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강간을 정의하면 한 문장으로 가능하다. 한 여성이 어떤 남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남자가 그녀의 의사에 반해 행위를 계속하면 그것이 바로 강간이라는 범죄 행위이다. 여성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 문제인데도, 여성의 관점을 반영한 이런 정의가 법에 적용된 적은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없다. (p.10)




























제니퍼는 유부남 애인과 함께 사막 한가운데의 별장에 도착한다. 유부남은 그녀의 엉덩이에 환장하지만 침대에서 빠져나와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 아이들을 챙긴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돌아가고.


사막 한가운데의 별장인지라 오가는 이도 없고 매우 고요하며 이 사막 한가운데에 제니퍼와 애인 단둘만 있다. 게다가 별장은 매우 크고 좋아서 앞에 수영장도 있고 넓은 방도 여러개며 먹을것도 충분히 준비되어있다. 애인과 단둘만 있을거라 생각했던 제니퍼는 갑자기 낯선 남자 두 명의 방문에 놀라는데, 다음날 함께 사냥하기로 한 유부남의 친구들이 하루 먼저 도착한 것.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제니퍼와 유부남의 친구들이지만 인사를 하고 함께 술을 마시게 되는데, 유부남의 친구들인 남자1, 남자2는 이미 제니퍼의 미모에 반해서 정신줄을 놓았다.


제니퍼는 자신이 가진 외모가 매우 특별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예쁘고 몸매가 뛰어나다는 걸 아는 사람. 그녀는 유부남과 남자들 앞에서 술을 마시고 섹시댄스도 추고, 유부남과 섹스하러 가는 것도 굳이 감출 생각도 없다. 사막 한가운데에, 다른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에,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만 있는 상황. 그 중 남자 한 명은 자신의 애인이라고 해도, 과연 이 상황은 안전할 것인가.



다음날 눈을 떠보니 애인이 잠깐 집을 비웠다. 두시간쯤 밖에 나갔다 올 계획이고 남자1은 취해서 뻗어 있고 남자 2는 제니퍼에게 '여기에 우리 둘만 있네' 라며 노골적으로 제니퍼에게 다가간다. 제니퍼는 그에게 점차로 두려움을 느끼는데, 남자2는 '너 어제는 나랑 섹스할 것처럼 춤추지 않았냐'면서 그녀를 강간한다. 그 소리에 남자1이 강간 현장인 침실에 오게 되고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데, '너도 할거 아니면 문닫고 나가' 라는 남자2의 말에, 남자1은 조용히 문을 닫고 강간을 못본체 한다. 닫힌 문 뒤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남자1은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시간이 흘렀고 여자는 애인이 헬리콥터를 불러주지 않으면 이 별장에서 나갈 수도 없어서 애인이 돌아오자마자 헬리콥터를 빨리 불러달라, 나 집에 가고 싶다고 애원한다. 친구인 남자2로부터 '사실은 말야..' 하며 그녀를 강간했다는 얘기를 들은 유부남 애인은, 그녀의 통장에 돈을 넣었으니 캐나다 가서 새출발 할 수 있다면서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를 원한다. 여자는 집에 가고 싶다고 계속 얘기하자 유부남 애인은 그녀에게 폭력을 쓴다. 닥치라고.



여자는 이제야 자신이 위험한 상황임을 알아챈다. 자신의 애인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녀는, 냅다 뛴다. 그러나 냅다 뛴다고 갈 곳이 있을 리 없다. 그녀에게 여기는 낯선 곳이며 또한 사람 하나 없는 사막이다. 게다가 남자 세 명은 이곳에 사냥하기 위해 모인 터라 총을 가지고 있어. 그녀는 도망치고 그녀를 추격하는 남자가 셋. 그녀는 달리다가 절벽을 맞닥뜨리고, 거기에서 애인은 그녀를 밀어 떨어뜨린다. 이에 그녀도 놀랐겠지만 친구들도 놀란다. 야, 죽일 필요까진 없잖아. 이때 애인이 말한다.



"그냥 두면 우리 15년간 감옥에 있어야 해."



15년간 감옥에 있기 싫었던 남자들은 그녀를 죽이는 데 합의한셈.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인데, 나는 이 장면에서 매우 부러웠다. 강간범들이 자신의 죄가 발각되면 15년형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는 이 장면이. 대한민국에서는 감자탕의 고기만 덜어줘도 섹스에 합의한 게 되는데. 설사 강간이라고 밝혀져도 형이 짧은데. 모든 법과 처벌이 강간범 살리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섹슈얼리티로 인한 여성의 고통은 비가시화된다. 낙태, 구타, 성매매등 대개의 여성 섹규얼리티 관련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합법이다. 그래서 섹슈얼리티 문제는 법 제정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관련법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남성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시각과 의지가 없어서 처벌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희진,p.33)










그렇게 그들은 그녀를 죽이고, 죽였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로 계획대로 사냥을 하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시신을 처리하자, 라고 얘기를 나누지만, 돌아오는 길에 시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시체가 없다. 그녀는 죽지 않았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복수를 준비한다.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기에 복수를 해야하지만, 그러나 그 넓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살기 위해서라면 복수 말고는 답도 없다. 그녀에겐 전화가 없어 스스로 헬리콥터를 부를 수도 없고, 자동차도 없어 이동할 수도 없다. 그리고 스포일러, 그녀는 이 모두를 응징한다. 








이 영화를 안 지는 좀 되었으나 강간 때문에 뒤로 제쳐둔 영화였다. 이번에 한 리뷰를 읽고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강간 장면이 너무 걱정이 됐다. 아, 강간 장면 어떡하지, 그냥 넘길까. 뒤에 복수만 볼까. 도무지 강간 장면을 볼 자신이 없는 거다. 그래, 보다가 못보겠으면 감아버리자, 건너뛰자, 생각하는데, 영화속에서는 섹스씬도 그리고 강간씬도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대개 영화에서 강간을 다룰 때 그 강간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끔찍한 폭력장면을 여과없이 보여주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강간범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지만 강간에 집중해서 보여주질 않아, 그 점이 좋았다. (강간씬이 노골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강간전의 장면들은 고통스러우므로 시청할 시 주의를 요함. )



제니퍼는 예쁘고 아름다운 외모가 자신이 가진 자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남자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 그것을 권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봐,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나를 보면 남자들이 좋아하잖아, 이게 바로 권력이야,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의 시선은 그녀를 권력자로 인식해 본 게 아니었다. 그들은 여자의 외모를 권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녀는 한낱 성적대상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던 얼굴과 몸은 사실은 그녀에게 전혀 힘이 아니었던 거다. 섹시댄스를 추었기 때문에 섹스를 원하는 여자가 되어버리는 현실 앞에, 우리는 과연 예쁜 게 좋은 거지, 몸매가 착해야 해, 라는 신념을 계속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남자2는 유부남으로부터 주먹으로 얼굴을 한 대 얻어 맞아 코피가 나고 코뼈가 부러진다. 그는 바닥에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며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호소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그 강간범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대 맞고 이렇게 아픈데, 주먹 한 대에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면서, 한 대 맞으면 그렇게 아파하면서, 어떻게 한 여자를 강간할 수가 있을까. 원하지 않는 여자에게 강제로 삽입을 하는 남자는 실상 주먹 한 대에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인 거다. 자신의 고통은 있어서는 안되고 그러나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은건가. 강간이라는 더러운 죄를 저지른 것으로도 끔찍했지만, 그가 한 대 맞고 울부짖는 자라서 더 끔찍했다.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고통을 주는가.





˝그 사람들은 전부 섹스와 문란함 얘기만 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강간은 섹스와 전혀 관계가 없어요.˝

강간은 나쁜 섹스가 아니에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강간은 아예 섹스가 아니에요. 섹스는 합의하에 이루어지고 강간은 그렇지 않죠. 그건 섹스가 아니에요. 강간범에게는 섹스일까요? 강간범은 섹스를 섹스로 이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강간은 섹스를 무기로 사용하는 행위죠. 누가 뭐래도 섹스는 무기가 될 수 있어요. (p.120)










제니퍼가 당한 강간은 끔찍한 폭력이다. 이미 그 자체만으로 그녀의 영혼은 찢어질 것 같았을 것이다. 평생을 살면서 그 고통을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강간 때문에도 그녀의 몸과 영혼은 치명타를 맞았지만, 강간을 목격하면서도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남자에 대해서는 더 치명타를 맞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뻔히 잘못이 일어나고 있는 걸 보면서도 못본체 하는가. 그는 이 강간의 동조자다. 그런 한편 이 모든걸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제니퍼는 애인으로부터 더한 고통에 맞닥뜨린다.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래서 이 사막의 별장까지 같이 왔는데, 자신을 지켜줄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자신에게 강간에 대해 입다물기를 원하고 그렇지 않을 것 같자 그녀를 절벽에서 밀어버린다. 이 강간은 강간범이 한 것이며 동시에 강간범 목격자가 한짓이고, 침묵을 강요한 애인이 한 짓이다. 강간 사건이 하나 발생하기 위해서는 강간범만 있었던 게 아니다. 동조자들이 있었다.




남자들이 함께 모여 여자를 어떻게 ‘따먹고‘ ‘박아볼까‘ 이야기를 하고 ‘진도‘를 운운할 때, 이들은 성관계는 여자랑 하긴 해도 남자끼리의 감정적 유대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남성 동지들에게 ˝나랑 자는 여자보다 너희들이 더 중요해˝라고 전하는 것이다. (이게 많은 남자가 어떤 여자랑 성관계를 갖는지에는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또한 여기에 여자와의 성관계는 착취가 목적이라는 메시지도 담겨있다. 남자들끼리 이런 대화가 이루어질 때, 남성 청자도 남성 화자와 여자의 성관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여자에게 ‘박고 있는‘ 남자 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남성 동지들이 지켜보며 서 있다. 남자가 여성 착취에 성공하면 그건 모두의 승리가 되고, 승리로 말미암아 남자끼리의 유대감이 강화되며, 이들은 여성성을 발밑에 깐 채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하나가 된다.
- P198






세상에 강간이 등장하는 영화 만큼이나, 그 강간범들을 찢어 죽이는 영화들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영화속 제니퍼가 결국은 이 강간범을 다 죽여버리는 장면을 보여준 것처럼, 결국 처참하게 피흘리고 죽어갈 거라는 영화들이 같은 비율로 나온다면 어떨까. 강간 장면에 집중해 촬영하기보다 잔인한 복수에 더 집중하는 영화들이 나온다면 어떨까.


처음에 얘기했듯이 나는 이 영화에 강간 장면이 나올까봐 두려웠다. 그것을 보게될까봐 두려웠다. 언젠가 남자들이 영화속 강간씬만 잘라서 공유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너무 끔찍하다. 한 쪽에겐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 한쪽에겐 즐길 거리가 된다는 것이. 그 장면을 편집해서 보고 또 보고 하는 남자들은 모두 강간에 침묵하고 동조하는 강간범들에 다름 아닌가. '나는 달라, 나는 아니야, 실제로 강간을 저지르진 않았다고' 하는 말들이 핑계가 될까? 그런 강간영상을 소비하고 즐거워하면서 강간에 동조하고 있는데?


포르노도 마찬가지다. SNS 에서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을 신고하다 보면 그 장면들은 모두 여성인 내가 보기에 끔찍한 장면들이다. 구강 성교를 하는 장면과 얼굴에 정액을 뿌려대는 그 장면들이, 나에겐 아주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런게 SNS 에 그냥 올라오다니,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신고를 누른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은 왜 촬영되어지고 유포되는가. 누군가는 그런 걸 즐겨 보기 때문이겠지. 같은 장면을 봐도 한쪽은 폭력적으로 느끼고 한쪽은 이걸 해보고 싶다고 느끼게 되는 건,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일어나는 일인가.

한 명은 강간을 하고 한 명은 못본체 하고 한 명은 침묵을 강요하는 건,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건가.

이들 모두 강간범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술 2019-11-22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니 모니카 벨루치 나왔던 ‘이리버서블‘ 생각나네요.
어느 남자악당이 모니카 벨루치를 강간하는데 화면 저 끝에 어느 남자가 지나가다 강간을 봅니다.
그 사람은 망설이다 그냥 가 버립니다.
감독이 1)강간의 남성연대를 표시하려 한 건지 2)남의 일에 끼었다 손해보기 싫은 이기심을 비판하려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망설이다 그냥 간 남자‘ 때문에 그러잖아도 끔찍한 그 강간장면이 더욱 보기 괴로워지죠.

참, 한 가지 더 생각났는데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법>도 저는 고미숙 <호모 에로스>만큼 감동하며 읽었어요.

다락방 2019-11-25 08:19   좋아요 0 | URL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을 말씀하시는군요. 저 그 영화 개봉 당시에 극장에서 보고 엄청 우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주말에 여행했던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에 영화 한 편 보고 밥 먹고 헤어지자, 했었는데 영화보고 다들 너무 기분이 나빠서 밥을 안먹고 그냥 집에 갔었어요. 그 영화 촬영후 모니카 벨루치는 병원에 며칠 입원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목수정은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자이므로 패쓰하고, 고미숙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주말에 읽으려고 했는데 못읽었어요. 크레마를 가지고 비행기와 지하철을 탔지만.... 한 글자도 못읽었네요. 하하하하하

심술 2019-12-01 21: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우리 제목이 <돌이킬 수 없는>이었죠.

목수정은 좋아하시지 않으시는군요. 잘 기억해 뒀다가 다락방님께 또 목수정 추천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락방 2019-12-02 09:02   좋아요 0 | URL
하하 아뇨 제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까지 기억하진 않으셔도 되지요. 아하하하하하하하.
월요일이고 12월이네요. 으악 우울해져요.. ㅠㅠ

심술 2019-11-2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성의 사랑법>이 아니고 <야성의 사랑학>입니다. 실수했네요.

블랙겟타 2019-11-29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읽었던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에서도 <우리 의지의 반하여>에도 나오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강간도 아닌 섹스조차도 성욕의 해소를 넘어 ‘승자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주기 때문에 하기에 위의 <강간은 강간이다>의 발췌부분처럼 나쁜 섹스= 강간? 이라는 사고를 못 벗어나는 것 같아요. 전혀(!) 다름에도 그들의 시각으로는 약간 더 지나친 수준이라고 생각할테니깐요....

저도 특히 영화에서.. 감독의 좋은 의도로 만든 영화라 하더라도! (그러면 더더욱 그러면 안돼잖아!) 강간을 폭력적으로 연출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반드시 패스합니다. 어설픈 선의로 무장된 또다른 폭력이니깐요. (엄밀히 말하면 선의도 아니지..)

다락방 2019-12-02 09:04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의 말씀이 맞아요. 강간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알리려는 거야, 라는 의도라 할지라도(사실 저는 그 의도 자체도 믿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자극적인 장면으로 일단 사람을 모으자, 가 더 그들의 의도에 맞는 것 같아요), 그것은 또다른 폭력이죠. 대체 그런 장면을 보여줘야 할 이유는 뭐랍니까?

강간이 섹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간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대체 언제쯤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게 될까요? 부지런히 책이 나오고 또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음에도 갈길이 멀어 보여요 ㅠㅠ
 
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오?!
이야기가 이런식으로 교차되다니,반전이 숨겨진 소설인줄 몰라서 깜짝 놀라며 재미있게 읽었다.
사일런트 페이션트, 에서 사일런트는 침묵하는 인데 페이션트는 뭐지, 사전 찾아봐야겠다...라고 계속 생각만 하고 안찾아보다가 어느날 갑자기 환자! 라고 퍼뜩 떠올랐다. 크- 침묵하는 환자였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1. 거짓말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야 분명 존재하지만, 그래도 '이런 거짓말을 하는 여자'를 꼭 등장시켰어야 했을까. 그게 이 책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다.


2. 미칠듯한 통제광에 거친 남자도 나쁜 놈이지만, 난 너밖에 없어 너를 사랑해 너를 숭배해 이러는 놈도 나쁜 놈인건 마찬가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각기 다른 형태로 나쁜새끼들.

(김숨이 그랬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3. 여자들이 자기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생각했으면 좋겠다. 도대체 자기애적 소시오패스 새끼들한테 왜 빠져들어.. 휴.. 음모 털을 대칭으로 만들라는 새끼가 왜 좋지?


4. 왜 난자는 정자랑 굳이 만나야만 수정이 될까?

"네 이야기를 들으니 그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제이. 그 사람을 피할 생각은 없어?"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가볍게 말한다. "나도 있는데."
"문제 있는 두 사람이 만나봐야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해. 지금 네게 필요한 사람은 착하고 든든한 남자야. 너를 아끼고 사랑해줄 사람."
"슬프게도 착하고 든든한 남자는 내 타입이 아니야."
미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후로는 연락이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전화 안해봤어." 나는 다음날 일부러 가벼운 분위기로 쓴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는다. - P133

"당신에게 쾌락을 주는 행위를 왜 거부하죠?"
"사람은 어떤 행위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쾌락을 순간적으로 탐닉하면서도 혐오할 수 있어요. 그게 옳지 않게 느껴진다면요. 당신이라면 누구보다 이런 감정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요."
샤프의 촉이 지진이 없는 평온한 날 지진계의 바늘이 움직이듯 거침없이 부드럽게 앞뒤로 미끄러진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줘요, 제인."
"거친 행동들."
"계속해요."
"기본적으로 멍이 들 수 있는 행위요. 힘을 주거나 압박하거나 피부에 자국을 남기거나 머리를 잡아당기는 것. 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건 알아두면 좋겠어요. 나는 정액은 먹고 싶지 않고 항문섹스는 절대 하지 않아요." - P2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토요일은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멤버들과 처음으로 오프라인 만남을 가졌다. 내가 생각했을 땐 멤버중 두명쯤은 수줍은 성격이라 어색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그 자리에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잘했고 만나는 긴 시간 내내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두명이 장소를 못찾아 헤매는 바람에 처음에 네명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와, 보부아르와 제2의 성에 대해 다다다닥 이야기하는 시간이라니, 너무 짜릿한거다. 나중에 두 명이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 우리가 같은 책을 함께 읽었고 그래서인지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꽤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고, 어제 전까지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만나서 무언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건 우리가 같은 책을 읽었기에 가능했고, 이 과정을 같이 해왔기에 가능했다. 아, 진짜 너무 좋지 않은가. 나는 모두에게 몇 번이나 함께 읽어줘서 그리고 이 먼길에 와주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실제로 한 명은 부산에서 오고 한 명은 대구에서 온것이야.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부러 그 먼길을 나선것이다. 아,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은가.


우리는 아주 많이 웃었다. 다같이 크게 웃을 수 있다니, 너무 좋다.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함께 크게 웃다니. 내가 잠깐 화장실을 다녀와 자리로 돌아가는 그 찰나에도 다른 멤버들이 함께 크게 웃고 있었다. 크- 우리는 1차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했고, 2차로 이동하는 중에도 계속 이야기했고, 2차에 자리잡고 앉아서도 계속 이야기했다. 술잔이 오고갔고 내기가 오고갔다. (응?)


밤이 깊었고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에 집에 가자며 다들 일어섰다. 각자 가는 길이 달라 지하철 역을 앞에 두고 헤어졌는데, 나를 비롯한 지하철을 타는 멤버들 모두 지하철이 중간에 끊겨버렸다. 내려서 누군가는 버스를 타고 가고 누군가는 택시를 탔는데, 나 역시 왕십리역에서 전철이 끊겨 나가서 택시를 잡아야 했다. 술 마시고 늦은 밤에 택시타는 건 정말 싫지만, 어쩔 수없지. 그렇게 무사히 집에 도착하고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한 시가 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놀랍게도!



멤버중 두 명이 책상 앞에 앉아 제2의 성을 펼쳤노라 했다. 우리중 완독하고 온 사람이 세 명이었고 세명은 다 읽지 못한 채로 왔는데, 그 중 두 명이 올해 안에는 반드시 완독하겠노라 다짐을 하고 약속을 하고 또 내기도 한거다. 그들은 그 시간에 집에 돌아가서 새벽 한 시가 넘은 그 때! 제2의 성을 펼쳐놓고 인증 사진을 올렸어. 아놔 ㅋㅋㅋ 여러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사랑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들 같이읽기를 해서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이끌어주어서 고맙다고도 해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정말이지 많은 칭찬을 들었다. 진짜 넘치도록 들었어. 그자리에서 나는 진짜 졸라 멋진 인간이었다. 흑 여러분 ㅜㅜ 나 멋지게 만들어주어 고마워요 ㅠㅠㅠ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라는 얘기도 듣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일단 12월 한 달은 쉬고, 여러분 어때요, 이걸 또 해야 할까요? 또 하는 게 좋을까요?



놀랍게도 모두가 다 계속하자고 말했다. 계속하자고. 모두들 다, 그렇게 말했다. 아 여러분... 한 명도 빠짐없이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우리는 이걸 계속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년에도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1월에 함께 읽을 책도 정했다. 멤버의 추천이 있었다. 그 책은 이 책이다.


















1월이 오기 전에 다시 한 번 페이퍼로 예고하겠지만, 2020년 1월 같이읽기 도서는 '케이시 윅스'의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입니다. 



히히, 여러분 반가웠어요. 그리고 정말 즐거웠어요.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해요. 독서로도 오프라인 모임으로도.

:)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11-17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1-18 08:20   좋아요 0 | URL
2020년 1월부터 새로이 시작할것이니 그 때부터 열심히 읽고 쓰시면 됩니다!!

단발머리 2019-11-18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간, 좋은 이야기 감사했어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혼자 많이 큭큭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년 책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책, 여성주의와 함께 시작하는 2020년이라니. 최고예요!!!

다락방 2019-11-18 09:25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시간이었죠! 제 생각보다 더 좋았어요.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뭐에요! 진짜 짜릿한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너무 업되어가지고 술을 많이 마신 모양입니다. 아, 막판에 빈 술병 사진찍는다고 했는데 깜빡했네요. 아이구 바부팅이.. ㅠㅠ

좋은 시간 만들어주셔서 함께해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님.
마지막에 화장실 따라와주신 것도요...(감동의 눈물 ㅠㅠ)

- 2019-11-18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권하고 좋은 이야기 나누는 좋은 사람들🥰 애정합니다!

다락방 2019-11-19 07:44   좋아요 1 | URL
히히 너무 좋아요!! >.<

psyche 2019-11-1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 읽는 사람들이 직접 모여서 책 이야기라니... 아 부럽네요! 이럴 때는 정말 한국에 살고 싶어요 ㅜㅜ

다락방 2019-11-20 10:28   좋아요 0 | URL
사실... 책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는 게 함정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렇지만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고요, 우리 모두가 같은 책을 읽었다는 그 느낌은 짜릿했어요!! >.<

블랙겟타 2019-11-2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으로 이어진 인연이라니
뭔가 대단한 듯(!) 해요. (˶′◡‵˶)

다락방 2019-11-20 12:1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님 이모티콘 보니까 또 엄청 웃기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모티콘의 비밀을 이제 우리는 아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19-11-20 19:00   좋아요 0 | URL
매번 엄선해서 내놓습니다 ㅋㅋ 🤗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시절 우린 사이가 아주 좋진 않았지만 엄연히 연인 사이였고 무미건조한 감정 외에는 특별한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렇게 말하는 연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했던 걸까. 나는 화를 냈다. 우리가 권태기일지는 모르지만 4년이나 사귄 정이 있는데 누군가를 만나면서 이런 식으로 통보하는 건 너무 무례한 것 같다고. 무주는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고 물었다.

무례? 너 ... 화나긴 해? 그러면 잡아봐. 그 사람 만나지 말라고 말해.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

뭐가 미안한데? 너 진짜 화나? 날 죽이고 싶다거나 내가 만나겠다는 남자를 죽이고 싶다거나 그래?

무슨 소리야. 

거봐 아니잖아. 넌 그렇게 안 할 거야. 그냥 내 행동과 결정을 흥분도 하지 않고 비판하겠지.

그리고 무주는 떠났다. (p.45-46)




남자는 업무차 오스트리아로 출장을 가게 되는데,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이 스위스에 거주한다는 걸 알고있던 터라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어떤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었고 그래서 그렇게 7년간 잘 지켜왔지만,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 지금 자신이 머무르는 곳 근처라고 하니 뭔가 참을 수 없게 된거다. 연락하지 않은 채 7년을 잘 버텨왔지만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메일을 보낸다.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답장이 올까 기다리고 자신이 왜 메일을 보냈을까 수십번 생각하고 후회하면서 남자는 일을 한다. 나는 순식간에 그 메일을 보낸 사람이 되어 같이 초조했다. 그리고 이건 사실 괜찮은 방법이 아닌가도 생각했다. 헤어진 연인에게 자니? 라는 문자를 보내는 건 좀 찌질할 수 있지만, 7년이나 지났는데, 7년이 지난 후에 이메일로 '나는 지금 네가 산다는 곳 근처에 와잇어' 라고 보내는 거는 좀 괜찮지 않나. 나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거다. 물론 내가 그런 이메일을 보내게 된다면, 그리고 그가 사는 곳 근처에 가게 된다면, 그건 업무상은 아닐 것이다. 내 업무는 출장이 필요없는 일이고, 그러니 출장으로 업무차 어쩔 수 없이 외국의 어느 한 도시에 가게 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나는 그에게 '마침 여기에 와있고 여기는 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네 생각이 난다'는 메일을 보내려면, 사실 부러 가야한다. 부러 그곳에 가서는 마치 우연히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것처럼 꾸며야 한다. 마침 여기에 오게 되었어, 네 생각이 나네.


남자는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답장을 받는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어떡하지 자책을 오만번쯤 할 무렵 그녀로부터 답장이 오고, 그녀는 자신이 사는 동네에 올 수 있다면 오라고 한다. 그렇게 그는 그 뒤의 일정을 포기한 채로 그녀에게로 간다. 헤어진 옛 연인을 7년만에 만나게 되는 거다. 기차에서 내려 저기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그녀라고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랑 살겠다고 떠났긴 하지만, 그녀의 뒤에서 빼꼼, 아이가 나온다. 그 사이, 7년이라는 시간동안 여자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남자는, 옛 연인과 재회 했으나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이고 또 어떤 아이의 엄마인 것을 알고 보게 되는 거다. 그러면, 그러면 마음이 다 정리될까?



나 역시 그런 식으로 그와 재회하게 된다면 이런 식으로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사는 나라에 부러 찾아가서 '어쩌다 보니 여기 오게 되었고, 여기는 당신이 사는 곳 근처이니 마침 당신 생각이 나네' 라고 이메일을 보내 말을 걸었을 때, 그로부터 만나자는 답장이 올 수 있겠지. 그래, 우리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 번 보자, 네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나갔을 때, 그는 옆에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이것이 현실적인 미래일 수도 있을 테다. 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들이 변하니까. 어떤 사람들의 환경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의 배경은 아주 크게 변할 수 있으니까. 나는 우리가 헤어진 상태에서 어떤 조건이 변하진 않았지만, 상대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수 있다. 긴 시간이었으니까, 긴 시간이 흘렀으니까. 새로운 집을 찾아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그전과는 아주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 새로운 삶에 익숙해져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날 나로부터 불쑥, 이메일이 도착할 수도 있겠지. 이 책속의 남자가 그런것처럼, 나 역시 그런 상태의 전연인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겠구나. 그러면 마음 속의 모든 것들이 그냥 훅- 정리될까? 그런식으로라도 그를 보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게 나을까.



그렇게 처음 시작으로 말랑말랑 내가 나를 넣고 읽을 수도 있는 이 책에서 나는 저 위의 인용문을 보게 되는 거다. 4년간 연애했던 연인이 만나고 싶은 다른 사람이 있다고 이별을 통보하고, 이에 남자가 그것을 무례하다고 말하는 일. 그런데 여기에대고 여자는 너 진짜 화나긴 하냐면서, '날 죽이고 싶다거나 내가 만나겠다는 남자를 죽이고 싶다거나 그래?' 라고 묻는 거다. 여자는 마치 그렇게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정도로 화가 나야만 우리가 사랑했었다, 네가 나를 사랑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런가? 정말 그런가?



우리는 누구나 어떤 사람에 대해 죽이고 싶다는 감정을 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더러 있다. 그러나 내가 죽이고 싶다는 격한 감정을 품게될 때는 그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경우에 한했다. 이를테면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것.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나에게 감정적인 상처를 주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화는 나겠지, 서운하겠지, 배신감을 느끼겠지, 너무 속상하겠지. 그렇지만 내가 사랑했던 애인을 '죽이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느끼나? 나는 이게 너무 이상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이고 싶어진다고?


이거 너무 이상하지 않나?


내가 무척 사랑했던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는 달랐고, 그래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바라는 만큼 그가 나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나랑 헤어진 뒤로 사랑하게 될 그 사람의 새로운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왜 책 속의 여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생겨 떠나면서, 이런 자신에게 죽이고 싶은 감정이 드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걸까? 죽이고 싶다, 죽었으면 좋겠다, 는 마음 같은 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될 수 있을까? 나는 나랑 헤어진 사람이 계속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다. 내가 바라는대로 우리가 오래 함께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마음은 정말이지 전혀 없다. 내 연인이 안될거라면 죽어 없어져버려! 이런 마음이, 도대체 왜 생기는걸까? 다른 사람들은 보통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해를 입히고 싶어하는걸까?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히 내게 이별을 말하다니, 화가 난다고 연인을 찾아가 염산을 뿌리고 해를 입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뉴스에서 종종 듣게 되는 일들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게 정말이지 이해가 안된다. 왜 그러고 사는걸까. 다른 사람의 발을 실수로 밟아도 우리는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염산을 뿌릴 수 잇을까? 상대도 염산으로 큰 타격을 입고 평생 힘들게 살겠지만, 염산을 뿌린 나는? 헤어진 애인에게 염산을 뿌린 자신은 대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나?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싶다,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 망치고 싶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지 않다니'에 대한 그 다음 감정으로 발생할 수가 있나. 내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상대가 나를 떠난다고 햇을 때 내가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옳은 감정도 아니고 바른 감정도 아니다. 책속의 여자가 울부짖듯이 그것이 나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따라와야 할 감정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속상하고 아프고 화가 나겠지만, 슬퍼서 엉엉 운 채로 두 달간 밥도 못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떠난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그런 마음이 자신 안에 생긴다면 그건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내 과거의 연인들도 나를 찾아와 죽이고 싶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죽이고 싶어할까? 죽이고 싶어하면서 그것을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와, 그거 사랑 아니다. 그런 사랑 하지 마라. 죽이고 싶을 만큼의 사랑이라니, 대체 그런 게 어디있나. 



여자는 7년만의 재회 후에 그에게 '그당시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아마 그녀가 다른 사람과 떠나고 싶었던 이유일 것이다. 계속 혼자 그를 사랑하는 자신에 대해 수치심도 느꼈다고 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다른 남자와 떠난다고 해도 그는 나를 죽이고 싶어할만큼 화가 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난다? 너무 화가 나서 죽이고 싶다? 그것은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책속에서 이렇게 나오다니. 사실 이것이 일반적인 감정인가? 사실 사람들은 아주 많이, 헤어진 연인에 대해서, 이별을 통보한 연인에 대해서 너무 화가 나서 죽이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는가?


어제 여러명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 때 물어보고 싶었는데 까먹고 물어보질 못했네. 보통 연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으면 너무 화가 나서 죽이고 싶어지나요? 아, 나는 정말이지 '화가 나긴해? 죽이고 싶고 그래?' 라고 물어보는 그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살고 싶고 나를 떠난 연인도 살기를 원한다. 나는 행복하고 싶고 나를 떠난 연인도 행복하기를 원한다. 물론, 나랑 지낼때만큼은 말고.. ( ")  쿨럭.




비가 오는데도 굳이 나가 빵을 사왔다. 커피랑 먹고 싶어서. 세수도 하지 않고 나갔다. 으하하하. 아직도 세수는 하지 않았는데, 오늘 하루만큼은 세수를 하지 않고 지내볼 것야. 일요일은 그러라고 있는 날이 아닌가. 그렇지만 뭔가 더러운 이 기분... 어째야할지 모르겠다. 씻을까.....





만나고 싶고 만나고 싶지 않다. 잊었지만 잊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지만 보고 시다.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왜 만나면 안 되는 건지 의문을 품고 있다. 마음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어 이쪽으로 저쪽으로 뒤척거리기만 했다. - P40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9-11-1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비가 오는데도 굳이 나가서 전과 막걸리를 사왔어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ㅋㅋㅋ 빵과 커피하고는 참 다른 듯하지만 비오는 날 빵과 커피만큼 잘 어울리는 조합이죠? ㅎㅎ

저는 헤어진 사람을 죽이고 싶다거나 그 사람이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거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아요. 헤어지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상대에 대해 아무 마음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데, 아마 사귀는 동안 줄 수 있는 마음을 다 줘서 더는 미련도 후회도 없어 그런 거 같습니다.

다락방 2019-11-18 08:49   좋아요 1 | URL
저는 어제 이 글을 쓰고난 뒤에 샤워를 했습니다. 깨끗한 일요일 저녁을 보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저도 뭐 매순간 그의 행복을 바란다..이런 건 없어요. 그건 제 영역이 아니죠. 그렇지만 야속한 마음에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와 저는 그것은 정말이지 상대의 배신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나를 좋아하지 않는 너는 죽어버려.. 이런 마음은, 와, 너무.. 괴상하잖아요? 세상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인건데.. 어휴.. 나를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이 나에게서 돌아서버렸다면 물론 너무 슬프지만, 아무튼 참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런 마음이요.


잠자냥 님의 댓글을 읽으니 ‘짙은‘의 노래가 생각나네요. <잘 지내자, 우리> 라는 노래인데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분명 언젠가 다시 스칠 날 있겠지만
모른 척 지나가겠지
최선을 다한 넌 받아들이겠지만
서툴렀던 나는 아직도 기적을 꿈꾼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그럼에도 기적을 꿈꾸는데... 어흑 ㅜㅜ
아무튼 거시기한 날입니다.

심술 2019-11-18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랑 사랑 잘 안됐다고 한 때 사귀던 이의 죽음을 바라는 건
정신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병 앓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거죠.

고미숙 <호모 에로스>를 중학교 교과과정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락방 2019-11-18 16:58   좋아요 0 | URL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힘들고 슬픈 일이지만, 그걸 인정못하고 계속 집착을 보이는 건 분명 정상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대로, 그러나 그 병을 앓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 호모 에로스를 읽어보지 않았는데 지금 검색해보겠습니다.

심술 2019-11-19 17:02   좋아요 0 | URL
훌륭한 책입니다.

고미숙 모든 책 읽은 건 아니지만 제가 읽은 고미숙 가운데 가장 좋았어요.
아, 물론 다른 책들도 좋아요.
10점 만점에 평균 8점 쯤 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다락방 2019-11-19 17:03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어제 구입했습니다. 전자책으로 샀어요. 조만간 읽어볼게요!! 추천 감사합니다. :)

심술 2019-11-20 11:41   좋아요 0 | URL
즐겁고 행복한 독서 되시기를.

다락방 2019-11-20 12:11   좋아요 0 | URL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9-11-18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18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