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tacular 를 네이버 사전에 검색해보면 '장관을 이루는', '극적인' 이라는 뜻이란다. 그렇다면 이 영화 《spectacular now》는 '장관을 이루는 지금' , '극적인 지금' 정도의 뜻이 될텐데, 주인공 '셔터'(마일즈 텔러)가 언제나 현재를 즐기려고 하기 때문에 붙은 제목인 것 같다.


셔터는 고등학생이고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주변에서는 셔터가 똑똑하다고 하는데 기하학 선생님이 하는 말이 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 학문을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는 술취해 쓰러졌다 깨어난 길바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학교의 모범생 '에이미'(쉐일린 우들리)에게 자기의 공부를 도와달라고 한다. 공부도 잘하고 이미 대학에 합격도 해놓았고 미래에 나사에서 근무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에이미는 그간 셔터가 만나온 여자들과는 달랐다. 셔터는 늘 현재가 제일 중요했고 미래가 없다는 듯 살았다. 그러니 매일 파티에 파티에 파티 연속이었고, 그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어느 파티에서나 셔터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캐시디'(브리 라슨)과 화려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즐기는거다.


마침 캐시디랑 헤어지기도 했던 터라 그렇다면 에이미랑 파티에도 같이가자고 셔터는 생각한다. 그간 셔터를 보아왔던 친구는 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아이랑 사귀냐, 너가 그동안 만나왔던 아이랑 다르지않냐, 고 묻는데 이에 셔터는 여태 한 번 남자친구를 사귀어보지 않은 에미이를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쇼를 한다 진짜... 남자 없는 여자를 내가 도와주겠어..같은 그런 마인드는 상대에게도 못할 짓이지만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마음은 사실 에이미에게 끌리면서 폼 잡으려고 그렇게 말한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개멍청이.. 아, 그런데 내가 이래서 셔터를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 남자들의 후까시야 뭐 두말하면 입아프니까.


매력은 개인적인 것이다. 매력을 가진 내 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매력이 내게 다가서는 순간, 상대로부터 매력을 느끼는 순간이 개인적이란 거다. 극중 '셔터'는 정말 내가 안좋아하는 타입이다. 미래가 없다는듯 파티를 즐기는 것도 그렇지만, 가장 싫은건 그가 허구한날 술을 마신다는 거였다. 그는 일자리에도 술을 가져가서 홀짝홀짝 마시고 운전을 할 때도 술을 마신다. 술을 마셔본 적 없던 에이미에게도 술통(뭔쥬 알죠, 그거 이름이 따로 있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을 선물하고 에이미도 홀짝홀짝 아무때나 술을 마신다. 저렇게 운전하기 전에 술마시는 거 진짜 너무 싫다, 생각하는데 결국 술도 마시고 감정도 격해져있던 어느 날에는 사고도 낸다. 사실 사고도 한두번도 아니지..


그런데 셔터는 나름 인기남인거다. 게다가 학교 내에서도 유명하고. 그래서 공부를 너무나 잘하고 똑똑하지만 스스로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남자친구도 한 번 사귀어본 적 없던 에이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셔터가 나같은 여자를 정말 좋아서 만날 리가 없다는 생각을 수시로 한다. 키스를 한 뒤로는 연락도 없어서 좌불안석(아아, 나 그거 알아. 나도 키스한 다음날 연락 오기전까지 이불킥을 수천번 했던 그 여름이 있다). 오늘은 공부를 하겠다는건지 어쩐건지도 연락도 없고... 어쩌면 졸업파티에 같이 가자고 한 것도 술김에 한 말일지도 몰라, 진심은 아니겠구나, 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거다. 나로서는 도대체 이런 놈이 뭐가 좋다고, 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내가 여기 사는 이 나이의 나이기 때문이고, 저 나이또래의 학생들에게 학교의 인기남은 너무 핫한 동경의 대상이겠지. 어쨌든 그렇게 좀 위축되어 있는 거다. 나사에 들어갈 희망을 가진 여학생이 인기남이 자신과의 약속을 잊을까봐 기죽다니..



이게 남일이 아닌게, 나에게도 저런 일이 있었다. 오래전의 일인데, 나는 와 이렇게 멋진(?) 남자가 어떻게 나를 알게 되고 나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를 알고 지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좀 위축되어 있었다. 나는 상대와 나를 비교했고 나에 비해서 상대가 훨씬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다 부끄러운 과거 몇 개쯤은 있는 거잖아요...


어느날 그와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다가오는 금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금요일이 될때까지 그로부터 별 말이 없길래, 장소도 정할겸 어디로 할래, 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그로부터는 '음, 혹시 우리가 오늘 만나기로 했어?' 라는 답이 왔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그때 내맘 뭔쥬 알죠... 나는 그 날을 기다렸는데, 그 약속 조차 잊고 있었다니... 그때의 실망과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체념했다. '그럼 그렇지, 이 남자가 나를 만날 리가 없지' 라고. 나는 그에게 그렇다고 하자 그는 미안하다며, 자기가 그때 무슨 일이 있어 정신이 없던 까닭에 오늘 만나기로 했다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었다는 거다. 자신도 당황스럽다며 정말 미안하다고, 이미 처음에 말한 사람과 약속이 되어있다고 해서 오케이, 하고는 그 날 그를 만나는 것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포기했다. 그의 말이 거짓일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러나 내가 그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잖아. 그런 오전을 보내고 매우 서운하던 차에, 하아, 평소에 만나자고 했던 다른 남자1에게 갑자기 연락을 했다. '혹시 오늘 보는 거 가능해?' 라고. 그러자 그는 콜! 하고는 선물까지 사들고 나를 만나러 왔다. 그렇게 남자1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웃고 떠들면서도 '이게 이게 아닌데..'하는 씁쓸한 마음을 도무지 다스릴 수가 없었고, 앞에 앉은 남자에게 집중도 되지 않았고, 술을 다 마시고 집에 바래다 준다는 남자에게 한사코 거절을 했다. 술자리에서 그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다이어리에 그 때의 감정을 시로 쓰기도 했는데(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무튼 졸라 문학여자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문학적이다. 슬픔을 시로 승화시킨다. 예술인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나에게도 저런 찌질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에이미가 혹시나 하고 쪼그라들어 있는걸 보는데 '알아, 알아, 내가 그 마음 안다' 이렇게 되어버려.... 하아-



누구나 그렇지만 셔터는 셔터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어떤 사건이 그에게 벌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는 오래전에 부모가 이혼하고 아빠를 그리워했던 것. 엄마는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고 했지만 그건 엄마 말이고, 셔터는 아빠의 말도 들어보고자 오만년간 연락없던 아빠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만나러 간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셔터에게 아빠에게 연락해보라고 말해준 것도 그의 여자친구 에이미였고, 그런 아빠를 만나러 먼 길을 갈 때 동행해준 것도 에이미였다. 가서는 돈도 없고 여자에게 껄떡대기만 하고 한시간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깜빡하는 아빠를 보고 엄마의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달으며 좌절할 때 옆에 있어준 것도 에이미였다. 에이미는 그의 애인이면서 동시에 그를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해보지 못한 것을 시도해보게 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모든걸 다 알고 모든걸 함께 하는 사람. 셔터는 자신이 아빠와 똑같은 것 같아서 두렵고 에이미의 미래를 위해서는 에이미를 놓아주어야 하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혼술을 할때면 텔레비젼을 보려고 채널을 돌리게 되는데, 평소에 텔레비젼을 보지 않았던 터라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 잘 모른다. 지금 이때는 어떤게 방송하고 있나, 하고 편성표를 눌러보다 보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는게 1도 없어서, 결국 유튜브의 운동뚱... 을 찾아보게 되는데.... 편성표에서 최근에 자주 봤던 제목이 <저녁 같이 드실래요> 였다. 편성표에서는 제목만 볼 수 있어서 제목만 보고 나는 <한 끼 줍쇼>같은 먹는 방송 예능일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엊그제 월요일, 갈비찜과 김치찜에 소맥을 말아 먹으면서(네?) 채널을 하나하나 돌리다가, <저녁 같이 드실래요>란 제목이 떠있는데 송승헌과 서지혜의 투샷을 보고, 오오, 이거 드라마야? 하게된 것. 그러다보니 얼마전에 송승헌이 제주도에 내려가 <나 혼자 산다>방송을 찍으면서 드마라 촬영차 왔다고 햇었는데, 이것이 그것?


송승헌은... 참.... 너무 잘생겼지만 매력없는 대표적인 인물인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매력이라는 것은 느끼는 사람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에게 잘생긴 것은, 잘생겼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매력이기도 할테니까. 그러나 나에게 다가서는 매력은 그것이 아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결코 잘생김과는 거리가 먼..........(그만 두자, 보고 있으면 어떡해.)


아무튼 그래서 소맥을 홀짝이면서 이 드라마를 보게 됐는데, 내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파악한 바로는 김해경(송승헌)과 우도희(서지혜)는 자기들이 정한 '디너 메이트' 였다. 서로의 직장도 본명도 모른 채로 가끔 저녁을 함께 먹는 사이인 것. 그 전 회차들을 보지 않아서 도대체 어떻게 이름도 직업도 모르는 남자와 디너 메이트 같은 걸 할 수 있나, 나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다 싶었지만, 서로의 요구가 맞아떨어진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다. 그러니까 각자 그 당시 어떤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이러저러한 다른 관계 필요없고 가끔 밥이나 같이 먹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나도 그런데 너도 그래? 이러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별로 그럴 생각은 없다. 이름도 소속도 모르는 남자와 디너 메이트? 흐음.


아무튼 그런데 우도희 에게는 우도희에게 집착하는 전남친이 있다. 오 신이시여, 대체 왜 전남친들은 그렇게나 찌질한 집착남에 머저리들인가요? 왜 하나같이 그렇게 되는건가요? 왜죠? 아무튼 이 전남친은 자신과 우도희가 헤어질 수 없다고, 우도희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집착하는데(개새끼), 그 날도 우도희의 집앞에서 우도희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그를 거절하는 우도희의 손을 잡고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하는거다. 우도희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불쑥 집앞에 오는 것도, 팔을 잡는 것도 해서는 안되는 짓이다' 라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그 남자는 다시 우도희의 팔을 잡고, 아아, 우리의 백마탄 기사님인 송승헌 님께서 '그 손 놓으시지' 이러면서 등장하시는 겁니다.... 어이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이러면 안되는거야' 까지는 말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 남자로부터 나를 구해주는 다른 남자..... 라니요. 그러다가 좀 씁쓸해졌다. 그럴 때 이 남자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거,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게 주춤하게 만드는 게 다른 남자여야만 가능하다니. 만약 혼자였다면 나는 그 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까. 너무 좆같은 상황 아닌가. 약속도 없이 찾아오는 거, 싫다는데 붙드는 거, 모두 구질구질한 전남친의 잘못인데, 그런데 그 상황에서 피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안된다는 거, 너무 엿같잖아. 결국 다른 남자가 등장해야만 쪼그라들어서 사라지다니...



아무튼 이 전남친과 전여친은... 참... 뭐랄까... 그러니까 김해경에게도 전여친이 있다. 오래 사귀어온 전여친인데, 이 전여친 역시 자신이 허락하면 김해경이 자신과 다시 잘 될거라고 생각해. 어제 본 방송에서 다시 잘해보고자 하는 전여친에게 김해경은 '나는 너에게 화가 남아 있지도 않고 미련이 남아 있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데, 와, 그 말에 진짜 공허해지는 거다.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아무것도.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한 반성모드로 들어갔다. 나도 결국은 그런 전여친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상대는 내게 화도, 미련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데, 나 혼자 뭔가 잔뜩 남아서 터뜨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거다. 김해경의 전여친에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정리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내가 이걸 지금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주제인가 싶었던 것. 가슴이 시리네요...



우도희는 알고자 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김해경의 이름과 직업을 알게 되고, 그가 이름과 직업을 가짐과 동시에 그와의 관계가 그려진다. 그러니까 그는, 우도희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전남친이고, 그여자는 전남친에게 죽고 못살고...그렇다면 이 관계는 더 진행하지 않는게 맞고..해서 김해경을 불러내 이제 밥먹는 사이 그만두자고 말한다. 우도희에게도 그리고 김해경에게도 상대에 대한 마음이 생겨나고 있는 터에 이런 결정이라니, 우도희도 마음이 아프고 영문을 모르는 김해경도 마음이 시리다.


내가 어제 본방을 보기로 결정했던 건, 그 후에 김해경의 태도 때문이었다. 김해경은 이대로 디너메이트를 끝내고 싶지 않다. 그녀에게 마음이 생긴 까닭이고 자꾸 생각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도희를 찾아가 자신의 명함을 건넨다. 이 이름이, 이 번호가 나다, 이 사람과 다시 연락하고 싶다면 이 명함을 보고 연락하면 된다, 고.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좋은거다.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고 숨기는 걸 싫어한다. 내가 누군가를 숨기는 것도 싫고,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숨기는 것도 지독하게 끔찍하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그 일에 대해 세상 당당하고 싶고, 상대 역시 그러하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숨겨야 할일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진 않다. 살다보면 그러나 그런 일이 있게 마련이고, 나 역시 숨겨야 하는 몇몇 관계들이 있었다. 그런 관계들 틈에 놓여있을 때는 만족과 행복을 크게 가져갈 수가 없다. 만족과 동시에 한 편에 우울함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환한 대낮에 만날 수 있는 사람, 누군가가 물었을 때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지우고 꾸며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나는 좋다.


김해경이 환한 대낮에 우도희를 찾아와 명함을 건네는 것은 이 모든것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나는 여기에 속해있어, 이런 일을 해, 이런 이름을 가졌어, 이것이 내 번호야, 앞으로 니가 나를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나를 표현하면 돼, 라는 모든 것들의 상징. 나는 명함을 건네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다. 업무적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그간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던 사이에서 건네는 명함은, 내게 예의바름이었다. 그 장면이 너무 좋았고, 그 장면이 마지막이어서 그 뒤가 궁금해지는 거다. 정장을 입고 찾아와 명함을 건넬 때의 김해경은 무척 매력있는 남자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의바른 사람을 좋아했다. 깍듯한 사람, 숨길 것도 없이 정중한 사람. 그러나 나는 숨겨야 했던 사람도... 그만두자, 이런 얘기는.




















수이와의 연애는 삶의 일부가 아니었다. 수이는 애인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였고, 가족이었고, 함께 있을 때 가장 편하게 숨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이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이일 것이었다. 그 가정은 모순적이지만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 - <그 여름>, 최은영,  p.253




최은영의 <그 여름>에서 위의 구절은 정말 핵심적인 구절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애인, 나의 연인이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사람, 모든 얘기를 나눌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애인과 헤어졌다는 얘기, 이렇게나 좋은 친구와 헤어졌다는 얘기를 가장 잘 들어줄 사람도 이 사람인데, 그런데 그 사람과 헤어진거라 더이상 말할 수 없는 상황.

연인과 가장 친한 친구가 한 사람인 것은 그렇다면 축복인가, 아닌가.



















작아. 귀여워. 엉덩이가 예뻐. 진짜 반투족이야. 슈그는 나한테 모든 걸 다 말하는 데 버릇이 들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갈수록 더 들뜨고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 보였어. 그녀가 그의 앙증맞고 작은 발이 춤을 출 때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뒤 다시 금갈색 곱슬머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내 기분은 진창에 처박혔지.
그만해, 슈그. 나 죽을 것 같아. 내가 말했어.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어. 슈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일그러졌지. 아, 셀리. 슈그가 말했어. 미안해. 그냥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데, 나는 늘 너한테 이야기하니까.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면, 나는 이미 앰뷸런스를 탔을 거야. 내가 말했어.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P321




셀리는 슈그를 사랑했고 슈그도 셀리를 사랑했다. 이들은 오래 사랑했고 앞으로도 오래 사랑할거라 생각했는데, 슈그에게는 '새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새로 사랑하게 된 귀여운 사람에 대해 슈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셀리에게 조잘조잘 수다를 늘어놓는다. 슈그와 셀리는 서로의 마음속 얘기까지 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좋은 대화상대, 그리고 연인. 연인이면서 가장 좋은 대화상대였고, 늘 모든 걸 이야기 나누던 사람이라서, 슈그는 했던대로, 습관처럼, 새로운 사랑에 대해 셀리에게 수다를 떠는거다. 그러나 여전히 슈그를 사랑하는 셀리는 어떤 기분이 되어야 했을까. 늘 나에게 수다 떠니까 이 모든 걸 다 열심히 들어주는 대화상대가 되어야지, 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슈그를 사랑하는데, 슈그가 새로운 사랑에 빠진 얘기를 대체 어떻게 대화상대로서만 들어줄 수 있단 말인가. 셀리는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고 괴롭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고 슈그의 사랑에 대한 말들이 자신을 죽이는 것만 같다. 죽을 것만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가장 친한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은 축복인가 아닌가.




셀리는 슈그를 사랑한다. 슈그가 사랑하는 사람, 가장 마음을 열었던 사람, 모든 대화를 나눴던 사람.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슈그의 친구로서 슈그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가. 그러나 다른 사랑에 빠졌다는 그 말은 이토록이나 고통스러운데!

그러나 셀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폭력적인 전남친과 다르다. 그러나 셀리는 집착적인 전남친과 다르다. 셀리는 사랑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지닌다. 그녀는 슈그가 다른 사랑에 빠진 것이 몹시도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권리가 슈그에게 있음을 '안다'. 슈그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자신이 정해줄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안다'.


나도 슈그하고 같이 다니고 싶기도 하지만 슈그라도 그럴 수 있는 게 다행이야. 때로는 슈그에게 화가 나기도 해. 슈그의 머리카락을 홀랑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러고나서 생각하지. 슈그는 자기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고 말이야. 내가 슈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지.-《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P346



너무 좋은 친구였던 터라, 다른 사랑에 빠져 다른 사랑과 함께 있는 슈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 우정이 그립다. 셀리와 슈그는 가장 좋은 친구였으니까. 셀리는 슈그가 돌아오길 바란다. 그 우정이 너무나 그립다.



유일하게 괴로운 건 슈그가 돌아온다는 말을 안 한다는 거야. 나는 슈그가 보고 싶어. 슈그와의 우정이 어찌나 그리운지 슈그가 저메인을 데리고 오겠다고 해도 두 사람 모두를 환영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려고 애쓰다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뭐라고 슈그에게 누구를 사랑하라 마라 할 수 있겠어? 내가 할일은 그저 스스로 진실되게 그녀를 사랑하는 것뿐이야.-《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 P346



아아, 나의 연인이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은 축복인가 아닌가.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그런 행운은 좀처럼 찾아올 수 없으니까.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는 것은 가장 궁극적인 관계가 아닌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게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마땅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게 어려워도 실은 그래야 하는거잖아? 그러나 이건 위험이 너무 크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 가장 좋은 친구 역시 동시에 사라져버려. 리스크가 너무 크다. 고위험.. 최은영이 단편에서 말했듯이, 연인과 헤어지고난 후의 슬픔이나 고민을 가장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친구 관계인 것을 유지하면, 셀리처럼 내 사랑의 새로운 사랑에 대한 얘기를 듣고 고통에 몸부림 쳐야해. 아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연인과 친구를 분리해둔 채로 살았었고 그것이 정신건강에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연인과 가장 좋은 친구가 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건 그 당시에 극도의 행복과 안정감을 주지만, 헤어지고 난뒤에 멘탈 찢기는게 장난이 아녀.. 최은영의 소설처럼, 내 모든 슬픔과 아픔을 다 잘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그와 헤어지기까지 내가 겪었던 고민들과 그와 헤어지고 나서 아팠던 일들, 그를 기다리는 마음, 새로운 사람을 만났던 시간들, 새로운 남자를 만났는데 섹스가 즐겁지 않았던 것들까지, 이 모든 얘기를 가장 잘 들어줄 사람이 그였는데 그 사람과 헤어져버려서 리스크가 너무 커... 나는 아직까지도 내 생각과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없다. 동성의 친구들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그사람일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없다. 연인과 가장 친한 친구가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건 인생에서 너무 치명적이야.. 그래서 친구만 가져올까, 생각해보지만, 그랬다가 셀리처럼 그의 말들로 나를 죽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아니야, 이제 좀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그런 것들을 다스릴 수 있다, 고 생각해보지만 그렇다면, 친구는 과연 나 혼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연인이든 친구든 나 하나의 의지로는 되지 않는다. 내가 내민 손을 상대가 잡아야 가능한 것인데, 나는 과연 무엇을 잃은 것인가...



그러니 연인과 가장 좋은 친구가 따로 있다는 것은 또 그런대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저녁 같이 드실래요>에서 우도희는 전남친의 집착이 짜증나고 새로운 남자에 대한 호감이 자라는 시점에 항상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친한 친구가 있다. 혼자 침대에서 뒤척이기도 하고 혼자 중얼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연락해주는 친구가 있다. 썸남때문에 고민이라고 하면 '저질러버렷!'하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다. 다쳤다고 하면 죽을 싸들고 오는 친구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좀 더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연인과 가장 좋은 친구를 분리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 모르겠다.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가 아닌건, 사실 연인으로도 별로라는 거 아녀? 그냥 다들 알아서 잘 살자. 마음대로 살아요..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이든 아니든, 건강한 관계 여러개 만들어놓고 한 사람에게만 몰빵하진 말자. 그것은 하이 리스크에 다름 아니여... 우리는 살아가야 할터이니...



제이슨 므라즈는 <Lucky>에서 가장 좋은 친구가 연인이 되다니, 이 얼마나 행운인가, 노래하지만, 오오, 제이슨 므라즈여, 그것은 하이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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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17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 시간 축복이라 생각했지만, 축복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 페이퍼를 읽고 나서 하게 됐어요. 한 사람이 나의 모든 면를 이해할 수 없다고도 생각하구요. 오후에 읽은 <빌레뜨>에도 셀리 같은 마음이 그려져서 전 무척 괴로웠다죠.
락방님 페이퍼 전체적인 내용은 좀 슬픈데 그런데도 전 몇번이나 웃었답니다. 남자들의 후까시야~ 뭐 이런 명문장 덕분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6-17 16:31   좋아요 0 | URL
연인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과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게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연인이 되겠어요? 그런데 그걸 한사람이 다해주면 그 사람이 사라졌을 때.. 전 어떡해요? 오 마이 갓 영혼이 박살나는거죠. 제가 제 삶을 잘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래서 단단한 관계를 여러개 만들어두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단단한 관계는 그러나 원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죠. 제가 상대에게 다정하고 마음을 열어야 상대 역시 저한테 그럴테니까요. 저는 여성주의 책 같이읽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좋아요.. 우리 다정한 똑똑이들....

페이퍼가 슬픈데 웃음이 나는건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일겁니다. 살다보면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뭐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이 페이퍼는 삶을 녹여낸 뛰어난 페이퍼다, 뭐 그런 말이 되는겁니다. 엣헴.

단발머리 2020-06-1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제가 땡투했어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9월 도서에요. 부자되세요! 😤

다락방 2020-06-17 16:28   좋아요 0 | URL
네? 벌써 9월 도서를 사셨다고요? 8월 도서도 이미 준비된걸로 아는데, 아니, 비연님에 이어 단발머리님도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에 진심인 부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땡투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부자가 되는데 이렇게 도움을 주시네요. 복받으세요, 단발머리님. 샤라라랑~~

2020-06-18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8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8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8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셀리'는 열네살에 '엄마를 대신해야' 한다며 아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그 일로 아이를 둘을 낳게 된다. 아이들은 낳자마자 다른 집으로 입양보내지는데, 그렇게 스무살이 된 셀리는 이제 자신의 아이들을 돌봐줄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보내진다'. 그 결혼은 셀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지만, 아빠의 손에서 이제 남편의 손으로 셀리는 넘어가게 된거다. 결혼해서 아빠를 피하게 됐지만 아직 아빠랑 같이 살고 있는 여동생 '네티'가 너무 걱정되고, 남편은 셀리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남편의 아이들은 말을 잘 듣지도 않고 셀리는 하루종일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남편은 몇 번 자기 위에서 움직이지만 이 섹스는 섹스가 아니고 셀리는 이것이 전혀 즐겁지 않다. 그러다 마을에 '슈그'라는 가수가 찾아온다.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옷차림의 그녀는 남편 '앨버트'의 애인이었고, 남편은 여전히 슈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몸이 약해진 슈그를 돌봐줘야 한다며 집으로 데리고 오기까지 한다. 셀리는 남편의 애인을 간호하는 일까지 떠맡게 됐는데, 그런데 셀리는 슈그를 돌보는 것을 전혀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동경한다. 못생긴 자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아름다운 여자이며 인기많은 여자에 대한 동경인걸까, 생각했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셀리는 슈그를 사랑하게 된거다. 게다가 셀리가 알지 못했던 섹스의 기쁨을 알려주는 것도 슈그다. 셀리가 슈그를 사랑하는만큼 슈그도 셀리를 위하고 사랑하게 된다.



아주 오래전에 이 작품을 영화로 봤던 기억이 나고,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러고 어떻게 사냐고 엄청 억울해했던 것 같다. 언제 한번 책으로 읽어봐야지, 하고 계속 미뤄두었던 책인데, 최근에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에서 함께 읽었던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 수차례 '앨리스 워커'가 언급되어 이번에는 읽어보자, 하고 드디어 만났다. 나는 이 책이 '인종 차별'에 대한 걸 중점적으로 다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여성차별에 더 많이 집중해서 놀랐고, 게다가 동성애가 나올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셀리와 슈그의 사랑에도 놀랐다. 시작부터 열네살 흑인 소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책의 책장을 넘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넘길때마다 힘든 얘기만 나와서 대체 이걸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했지만, 그러나 교육도 짧고 약하기만 한 셀리에게 싸워야 한다고 강해져야 한다고 너의 편이 되겠다고 말하는 여자들이 자꾸 등장하는 바람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당연히 드러나지만 성차별에 대한 것은 더 집중해 다뤄졌는데, 그래서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컬러 퍼플』은 출간된 후 많은 찬사를 받는 한편으로 상당한 비난도 받았다. 작품이 출간된 1982년은 흑인민권운동이 타오른 1960년대에서 이십 년가량 지난 시기였다. 법적 평등은 이루었어도 현실의 인종차별은 엄연히 위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흑인 작가가 인종문제보다 남녀문제를 더욱 두드러지게 제시하고, 흑인 남자는 '미개하고 폭력적'이라는 편견을 강화한다는 비판이 주였다. 하지만 그것은 워커가 흑인 중에서도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시대 흑인 여성이 겪는 직접적인 억압은 가까이에 있는 흑인 남성에게서 비롯되는 사회적 경향을 인식한 결과였을 뿐이다. 이는 워커 자신이 경험한 것이기도 했다. -해설, 고정아, p.376



흑인 남성에 대해 나쁜 면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비난이 가해진 셈인데, 흑인 남성의 나쁜 면을 앨리스 워커가 억지로 꾸며낸 것도 아니었다. 실질적 억압 앞에서 그녀는 소리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했고, 그러나 그것이 이미 사회적 약자인 흑인에 대한 나쁜 점이라면, 입을 다물도록 강요되는 거다. 이건 '패트리샤 힐 콜린스'의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 이미 지적되어졌던 바다.



인종단결을 초점으로 보면, 힐은 증언대에 서서 학대를 일삼는 흑인남성에 대한 흑인 "가족의 비밀"을 누설한 셈이다. 많은 흑인남성과 흑인여성이 보기에, 힐은 "더러운 세탁물"을 공공연히 방송에 내보냄으로써 흑인으로서 그녀의 주장이 지닌 진정성을 떨어뜨렸다. 어떤 사람은 토마스가 성희롱을 했다고 하더라도 힐은 흑인남성에 대한 연대심을 갖고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문화비평가 리사 존스는 흑인들이 흔하게 보인 반응을 이렇게 지적한다. "텔레비젼에 나온 힐의 얼굴보다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이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말한다고 보상받는 것이 아니다. 성희롱을 당한 여성은 이중적 피해자가 되며 목소리를 내는 비판적 흑인여성은 여전히 흑인인종의 배신자로 낙인찍힌다."(Jones 1994, 120) -《흑인 페미니즘 사상》, 패트리샤 힐 콜린스, p.224


















가끔, 아니 자주, 사람들은 자신이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 폭로가 있었다면 그 전에 폭로해야 할 사건이 있었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사건인데, 화살은 폭로를 향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통해 읽게된 컬러 퍼플인만큼,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이 소설 한 권에 다 들어가 있다. 책 속의 슈그와 메리 애그니스는 노래를 하는 사람들이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는 흑인 여성들이 블루스를 통해 자신들이 할 말을 그 안에 녹여내 부른다고 언급했던 바다. 슈그가 노래하고 또 조용히 혼자 흥얼대던 메리 애그니스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제안하는 것 모두 그녀들이 위치한 자리에서 할 수 있었던 그녀들의 목소리 내기였다.



1992년에 애니타 힐이 클래런스 토마스의 성회롱을 공개석상에서 고발했던 기념비적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흑인여성이 오랫동안 흑인 남성에게 "변화"를 요구해 온 통로는 블루스 전통이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흑인여성은 블루스를 통해서 흑인남성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괜찮은 여자, 괜찮은 남자>라는 노래에서 아레타 프랭클린(1967)은 여성은 장난감이 아니라 남자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인간이라는 서저너 트루스의 주장을 내세운다. "남자들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여성을 이용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남자임을 "증명"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프랭클린은 남자가 함께 있는 한, 그의 존중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노래한다. 그녀의 입장은 분명하다. 만약 그가 "긴 밤을 함께 보낼 괜찮은 여자"를 찾는다면, 그도 역시 "긴 밤을 함께 보낼 괜찮은 남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지배적인 성정치에서 말하는 "괜찮은 남자"가 되기 위해서 "남자들 세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라고 촉구한다. 흑인여성을 존중하고 "긴 밤을 함께 보낼 남자"라면, 관계에 충실하고 경제적으로 탄탄하고 성적으로 적극적인 남성이라면,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패트리샤 힐 콜린스, p.269





뿐만 아니다. 책 속의 소피아는 인종 차별에 맞서 시장 부부에게 대드는데, 그 일로 12년의 감옥형을 선고받았다가 결국 시장 부부의 집에서 일을 하는 벌로 대신하게 된다. 소피아는 시장 부부의 아이들을 잘 돌보는데 그렇다고 그 아이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 부모님이 오빠인 아들만 좋아해서 소피아를 유독 따랐던 시장 부부의 딸 '엘리너 제인'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소피아를 찾고 소피아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나 소피아는 엘리너의 아들을 결코 사랑으로 봐주지 않고, 이에 엘리너는 흑인 여자들은 아이들에게 더 잘해야 하지 않냐고 말하는거다.



이해가 안 돼요. 엘리너 제인이 말했어. 내가 아는 흑인 여자는 전부 아이들을 사랑해요. 아줌마가 그러는 건 뭔가 부자연스럽다고요.

나는 아이들을 사랑해. 소피아가 말했어. 하지만 흑인 여자들이 네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다 거짓말이야. 그들도 나만큼이나 레이놀즈 스탠리를 사랑하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그런 질문을 계속하면 그들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어떤 흑인들은 백인이 너무 무서워서 면화 기계마저 사랑한다고 말하는걸.

하지만 레이놀즈는 아직 아기라고요! 그 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엘리너 제인이 말했어. -p.341-342



흑인들은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데, 왜 소피아 아줌마는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자, 소피아는 답한다. 네 아이는 자라서 똑같은 백인이 될거잖아.



나도 내 나름대로 문제가 있어. 소피아가 말했어. 레이놀즈 스탠리도 자라면 똑같은 백인 중 한 명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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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은 내가 네 아들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거야. 너는 네가 사랑하고 싶은 만큼 네 아들을 사랑할 수 있어. 하지만 결과는 감당해야지. 흑인들은 그렇게 살아. -p.343



흑인에 대한 모성 신화, 흑인은 특별히 더 모성이 발달되어있다는 이 만들어진 신화, 이에 대해서도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는 얘기하고 있었다. 흑인의 모성, 그리고 대드는 여자에 대한 이미지까지. 책속에서 소피아는 남편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다. 게다가 덩치도 커서 남편에게 맞는것보다 더 때릴 수 있다. 남편은 도대체 자신의 아내가 왜 고분고분하지 않은지, 자기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맞고 고분고분하던데, 왜 이 여자는 엄마랑 다른지 너무 고민이 많고, 그런 아내에게 맞서기 위해 엄청나게 먹어대며 덩치를 키우려고 한다. 모성이 가득한 어머니, 대들지 않는 아내.



흑인숙녀 이미지는 또한 가모장 명제의 여러 측면과 닮아있다. 즉, 흑인숙녀는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직종에서 일을 하느라 남자를 만나거나 돌볼 시간이 없거나 남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여성이다. 그녀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남성들과 경쟁하면서 이러한 경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여자답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고등교육을 받은 흑인숙녀는 자기주장을 너무 강하게 펼친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들과 결혼하려는 남성이 없다고들 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패트리샤 힐 콜린스, P.149



그러나 담론이 아니라 미국 흑인의 현실을 살펴보자면, 어머니를 찬양하는 흑인남성 중 너무 많은 이가 자기 자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남성들은 점점 더 빈곤에 시달리는 흑인아이들의 양육을 아내나 여자친구에게 떠넘긴다(Nightingale 1993, 16-22). 미국에서 흑인어머니를 위한 경제적 사회적 지원이 약화되고 있는데, 많은 흑인 청년은 흑인남성의 과잉섹슈얼리티 신화를 신봉하고, 미혼의 십대 여자 친구에게 미래를 보장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를 낳으라고 부추긴다9Ladner 1972; Ladner and Gourdine 1984). 이들 역시 자신들이 관계를 맺어 온 여성들이 직면한 빈곤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지만, 가모장과 강인한 흑인 어머니라는 통제적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셸 월리스Michelle Wallace 가 지적한 대로, 많은 흑인남성은 흑인여성이 어머니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패트리샤 힐 콜린스, p.301




흑인 여성은 백인의 아이까지 사랑하는 건 불가능했고 계속 남편한테 맞고 살 생각도 없었다. 소피아는 주인공 셀리보다 젊었고 셀리의 며느리였는데, 셀리는 이 강인한 며느리, 할 말을 하고 맞서 싸우는 이 젊은 흑인 여성을 질투하지만, 그녀로부터 싸워야한다는 것을 배운다. 아프리카에 선교활동을 하러간 똑똑한 여동생 네티도 셀리에게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노래를 부르며 돈을 많이 버는 슈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알려준다. 다름 많은 흑인 여성들의 도움으로 셀리는 남편에게 맞설 수 있었고 피할 수 있었고 결국 남편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고 이 소설을 읽게 됐으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떠올리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책을 읽자마자 나는 6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에코 페미니즘》도 생각났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강간, 그리고 백인들의 흑인 땅에 대한 침략까지, 컬러 퍼플은 아직 다 읽지 못한 에코 페미니즘을 숱하게 떠올리게 만들었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가 쓴 《에코 페미니즘》은 시작부터 너무 재미있는 책이다. 자, 일단 서문에 실린 글을 잠깐 훑어보자.



인터넷 폭력이나 인터넷 전쟁은 '파괴의 아버지'들이 개발해낸 새로운 발명품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유전공학과 재생산기술이다. 둘 다 우리의 세계관과 인류학을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유전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을 주로 우리의 유전자가 결정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남성의 폭력은 그들의 유전적 구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천성적으로 '전사'(戰士)인 것으로 간주된다. 전사가 아니라면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과 기타 '적'들에 대한 남성의 폭력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은 천성적으로 강간범도 아니며, 모든 생명의 원천인 어머니 자연의 살해자로서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도 아니다. 이 폭력은 약 8천년 전에 시작되었던 사회적 패러다임의 결과물이다. 그 이름은 가부장제다. -《에코페미니즘》,서문, p.34



컬러 퍼플에서 셀리는 아버지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한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그러니까 이 남자들은 딸과 아내인 여성에 대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 이 폭력이 유지되어지고 다음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에게로 전달되는 것은 다름 아닌 가부장제의 탓이다. 이 가부장제는 그렇다면 여자들만 파괴하느냐, 그 안에서 남성들도 파괴한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혹은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 남자임을 뽐내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의 인격 또한 파괴하고 있고,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거스르지 않음으로써 그 안에서 굴복하는 것. 아내를 때리는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컬러 퍼플에서도 나온다.



가부장제와 폭력의 관련성을 에코페미니즘을 통해 조금 더 살펴보자.




전통적 가부장제 구조가 자본주의 가부장제 구조와 혼종(混種)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새롭고 더욱 사악한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우리는 불공정하고 지속불가능한 경제체제의 폭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 더 잦아지고 잔인해지는 현상 사이의 연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전통적 가부장제 구조가 점점 더 커져가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구조와 결합하여 어성에 대한 폭력을 심화하는지 볼 필요가 있다. -《에코페미니즘》,서문, p.15


나는 지구에 대한 강간과 여성에 대한 강간은 밀접하게 연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왔다. -《에코페미니즘》,서문, p.17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여성에 대한 강간의 사례를 가져오면서 또한 빈민층과 자연에 대한 폭력도 가져온다. 여기의 것을 해결하기 위해 저기의 것을 망가뜨리는 일.




진작에 레이첼 카슨은 토양의 오염이 결국에는 사람들이 먹는 식품, 특히 모유에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제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 북의 많은 여성들을 경악시키고 있다. 얼마 전 한 여성이 내게 전화를 해서 모유가 오염되었으므로 이제 독일에서 3개월 이상 모유를 먹이는 것은 안전하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해결책으로 그는 인도 남부에서 안전하고 건강에 좋은 유아식을 생산하자는 계획을 제시했다. 그곳 건조한 데칸고원에는 '라기'(ragi)라는 특수한 기장이 자라는데, 생육에 물도 별로 필요 없고 비료도 필요 없어서 빈민층으 값싼 주식이라고 한다. 이 기장은 유아가 필요로 하는 모든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제안은 이 기장을 가공하여 통조림으로 만들어 독일에 유아식으로 수출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하면 모유의 오염으로 절망에 빠진 독일 여성들의 문제도 해결하고 가난한 인도 남부에서도 새로운 수입원을 얻게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개발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빈민층의 주식인 라기를 세계시장에 내놓아 수출상품으로 만든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더이상 그것을 사먹지 못하게 되리라는 점을 설명하려 했다. 가격이 급등할 것은 물론이고, 그 계획이 실현된다면 북의 시장에 라기를 더 많이 공급하기 위해 머지않아 살충제 등의 농약이 사용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라기가 오염되지 않도록 보장하는 사람들의 손에 생산을 맡기면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환경식민주의의 한 변형이라 할 만하다. 그에게 그것보다는 독일의 농업방식을 바꾸고 살충제 사용을 금히자는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자 그 방법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모유의 오염 문제는 비상사태라고 대답했다. 불안한 마음에 독일 여성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나머지 그녀는 인도 남부 빈민여성들의 이익을 기꺼이 희생하려 하는 것이다. -《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p.144-146




마리아 미스의 글은 1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였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와 여러차례 겹치는데, 그래서 읽기가 더 수월하다. 위의 부분에 대해서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비슷한 사례들이 나왔던 터다. 그리고 이 일이 컬러 퍼플에서도 등장한다. 네티가 아프리카로 선교활동을 하러 갔는데, 그녀가 도착한 마을에 백인들이 도로를 놓는 공사를 시작하는거다. 도로를 놓으면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용이해지니 마을 사람들은 이를 환영했다.




그런데 올링카인들이 도로 건설이 '끝났다'고 생각한(어쨌건 그게 마을까지 이어졌으니까) 다음날 아침에도 인부들은 계속 일을 했어. 도로는 50킬로미터나 더 이어질 계획이었던 거야! 그리고 현재의 경로를 이어나가면 올링카 마을을 관통하게 되어 있었어. 우리가 잠에서 깨어 나왔을 때는 이미 도로가 캐서린이 새로 심은 양 밭으로 들어오고 있었어. 당연히 올링카인들은 들고 일어났지. 하지만 건설 인부들에게는 진짜 무기가 있었어. 그들은 총이 있었고, 발포 명령도 받았어, 언니!

정말 안타까웠어, 언니. 사람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어! 하지만 자기들 밭과 집이 무참히 파괴되는데도 아무런 대책 없이 서 있기만 했어-옛날에는 부족전쟁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일을 거의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싸우는 법을 몰라. 그래, 건설 인부들은 작업반장의 지시를 한 치도 어기지 않았어. 도로가 지나가는 경로에 있는 오두막은 모두 철거됐어. 그리고 언니, 우리 교회, 우리 학교, 내 오두막도 몇 시간 사이에 더 철거됐어. 다행히 우리 살림은 챙겼지만, 아스팔트 도로가 마을 한복판을 관통하니 마을 자체가 내장이 뚫린 느낌이야. -p.226



하지만 최악은 그다음 이야기였어. 올링카가 이제 마을의 소유권을 잃었으니 땅에 대한 임대료를 내고 살아야 하고, 물에 대한 소유권도 없으니 물도 물세를 내고 써야 한다는 거였어.

처음에 사람들은 웃었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이곳은 그들이 까마득한 옛날부터 살았던 땅인데. 하지만 족장은 웃지 않았어. 우리는 그 백인과 싸워야 해. 그들이 말했어. -p.227



소설속에서 발생한 저 일들에 대해 반다나 시바는 에코페미니즘에서 실제 사례를 숱하게 가져오며 이렇게 얘기한다.



자국의 환경과 경제와 사치스런 생활양식을 유지하려는 부유한 나라들 때문에 간드마르단에 사는 부족들의 생존이 위협받게 된것이다. - 《에코페미니즘》, 반다나 시바, p.192



앨리스 워커는 컬러 퍼플을 통해 빈민국에 폭력을 가하는 부유한 국가를 얘기하고(총을 들어!), 흑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백인을 얘기하고(나한테 대들었으니 감옥에 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편과 아버지를 얘기한다(고분고분하게 내 말을 들어!). 이렇게 답답하고 가슴 아픈 와중에도 셀리는 기다리고, 기대를 하고, 사랑을 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런 셀리의 사랑에 대한 성숙한 태도였다.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셀리는 가슴 아파하면서고 '그 사람에겐 그 사람이 원하는대로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아마도 그런 식으로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은 사람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편지로만 구성된 소설이라 고통스럽지만 책장은 빠르게 넘어간다.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많아서 휘둘리다보면 정신없이 마지막이 되어있고, 그렇게 결말을 만나고나면 훌쩍훌쩍 울게된다. 그렇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울어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할 말이 더 있는데, 너무 길어지니까 다른 얘기는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이 소설 뭐 이래, 나는 최은영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그건 다음에 다시...






어쨌건 내가 기도하고 편지를 썼던 신은 남자야. 내가 아는 다른 남자들하고 똑같이 행동해. 찌질하고 게으르고 비열하지.
그녀가 말했어. 셀리, 조용히 해. 하느님이 듣겠어.
들으라고 해. 내가 말했어. 그 남자가 불쌍한 흑인 여자의 말에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는 세상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거야. - P255

슈그! 내가 말했어. 성경은 하느님이 쓴 거고, 백인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그런데 왜 하느님이 그 사람들처럼 생긴 거지? 그녀가 말했어. 덩치만 더 클 뿐이잖아? 털이 좀더 많고. 왜 성경도 백인들이 만드는 다른 것들하고 똑같은 거지? 어째서 자기들은 온갖 짓을 다 하는데 흑인이 하는 일은 저주만 받는 거야? - P257

작아. 귀여워. 엉덩이가 예뻐. 진짜 반투족이야. 슈그는 나한테 모든 걸 다 말하는 데 버릇이 들어서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갈수록 더 들뜨고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 보였어. 그녀가 그의 앙증맞고 작은 발이 춤을 출 때에 대해 이야기를 마친 뒤 다시 금갈색 곱슬머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내 기분은 진창에 처박혔지.
그만해, 슈그. 나 죽을 것 같아. 내가 말했어.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어. 슈그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일그러졌지. 아, 셀리. 슈그가 말했어. 미안해. 그냥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데, 나는 늘 너한테 이야기하니까.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면, 나는 이미 앰뷸런스를 탔을 거야. 내가 말했어. - P321

나도 슈그하고 같이 다니고 싶기도 하지만 슈그라도 그럴 수 있는 게 다행이야. 때로는 슈그에게 화가 나기도 해. 슈그의 머리카락을 홀랑 뽑아버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러고나서 생각하지. 슈그는 자기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고 말이야. 내가 슈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런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지. - P346

유일하게 괴로운 건 슈그가 돌아온다는 말을 안 한다는 거야. 나는 슈그가 보고 싶어. 슈그와의 우정이 어찌나 그리운지 슈그가 저메인을 데리고 오겠다고 해도 두 사람 모두를 환영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려고 애쓰다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뭐라고 슈그에게 누구를 사랑하라 마라 할 수 있겠어? 내가 할일은 그저 스스로 진실되게 그녀를 사랑하는 것뿐이야. - P346

그만둬도 괜찮아. 소피아가 말했어. 그애가 안 도와준다고 나한테 큰일이 나는 것도 아냐. 하지만 비난에 맞서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엘리너는 자기 인생을 살 수 없어.
어쨌건 난 널 응원해. 하포가 말했어. 그리고 네가 내린 모든 결정을 존중해. 그는 다가가서 그녀의 코에 있는 꿰맨 상처에 입을 맞추었어.
소피아가 고개를 들었어. 누구나 살면서 무언가 깨닫기 마련이지. 소피아가 말했어. 그리고 그들은 웃었어. - P362

슈그가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보냈어.
이런 게 인생일까?
나는 하나도 들뜨지 않아.
슈그가 온다면 나는 기쁠 거야. 하지만 오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이게 내가 깨달아야 하는 교훈인 것 같아.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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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1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권의 책이 이렇게 얽히는군요! 이렇게 다른 두 권이 주장하는 바가 골고루 담긴, 그것도 문학으로 탁월하게 엮어낸 <컬러 퍼플> 정말 위대한 작품입니다.

아니 그런데 최은영이 떠오르기도 했다니, 다음 이야기도 기대할게요. ㅎㅎ

다락방 2020-06-16 10:38   좋아요 0 | URL
잠자냥 님 이 책 읽고 안울었나요, 혹시?
어휴 저는 막 조마조마하다가 ㅠㅠ 그리고 다 읽고나서는 ‘읽기를 잘했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어요. 역시 끝까지 읽어야하는 책이었어요.

최은영이 떠오르는 건, 최은영이 자신의 단편에서 사랑과 우정에 대해 말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저는 셀리와 슈그의 사랑에서 그걸 느꼈어요!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한거요.

2020-06-16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6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6-16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인 여성이 이중으로 겪는 고통에 대해선 머리속에서 상상하는건 쉬운 일이지만 <컬러 퍼플>의 저자는 그걸 입체적으로 보여준 듯 해요. 흑인 여성의 위대함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됩니다.

이 책을 읽으며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떠올리는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락방님 페이퍼 읽다보니 <에코 페미니즘>과도 정확하게 닿아있네요. 본질을 꿰뚫는 다락방님의 혜안에 박수를 치게 됩니다. 잘 읽고 가요, 다락방님! 이제 <컬러 퍼플>을 읽게 될 모든 사람들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 더해 <에코 페미니즘>도 떠올리게 될거 같아요^^

다락방 2020-06-16 10:50   좋아요 0 | URL
에코페미니즘과도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닿아있어서, 저는 에코페미니즘 읽기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결국 페미니즘과 환경운동은 같이갈 수 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에코페미니즘은 저도 아직 200쪽 가량밖에 읽질 못했지만, 환경운동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여성운동에 관심있는 사람들 모두가 읽으면 좋을 책인것 같아요.

그런한편, 이렇게 주장하는 글이 실린 책들도 제 역할을 다하지만, 소설은 소설대로 자신의 일을 다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컬러 퍼플을 읽으면서 했어요. 소설 한 권안에 흑인 페미니즘 사상도 에코페미니즘도 다 들어있잖아요. 좋은 글은 소설로 쓰이든 인문서로 쓰이든 자신이 할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책 읽는 거 너무 좋지 않나요, 단발머리님?

그리고 제 혜안에 저도 감탄합니다. 전 정말 짱인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6-1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컬러 퍼플>을 읽어야겠어요!

다락방 2020-06-16 19:19   좋아요 0 | URL
비연님도 재밌게 읽으실겁니다. 그간 여성주의 책 읽었던 것들이 마구 떠오를거에요!
 
에티오피아 시다모 디카페인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10월
평점 :
품절


보냉 텀블러에 얼음 가득 넣고 에티오피아 시다모 디카페인 내려마시면 너무 맛있어... 올여름은 너와 함께 지낼게! (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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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1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완벽한 여름 ㅋㅋㅋ

다락방 2020-06-16 10:38   좋아요 0 | URL
저 아이스커피는 커피가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너무 맛있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 앞으로 당분간은 아이스커피 중독될듯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간 역시 모르는거에요... 하하하하하

보슬비 2020-06-1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페인이라 패쓰했는데 급궁금해져버렸어요^^

다락방 2020-06-19 14:04   좋아요 0 | URL
보슬비님, 이거 찐커피에요!
그런데 어제 오늘 정신이 안차려지길래 오늘 아침엔 맥도날드에서 아메리카노 사가지고 왓습니다. 엣헴.
그리고 오늘 시다모 원두 주문했어요. 카페인 있는걸로... 하하하하하
 














[에코페미니즘]은 '마리아 미스'와 '반다나 시바' 의 공저이다. 저자들이 돌아가며 한 장씩을 맡아 이야기하고 있는데, <2장 환원주의와 재생:과학의 위기>는 반다나 시바의 글이다.


보통 책을 읽다가 어려운 단어나 모르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그때마다 번번이 다 사전을 찾아보거나 하지는 않는다. 주석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 언제나 주석을 읽지는 않는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중간에 그 흐름이 끊기는게 싫고, 모르는 단어라고 해도 문맥상 대략적으로 뜻 짐작이 가능할 때도 있어 대체적으로는 흐름을 끊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는 편이다. 꼭 찾아봐야 할 때는 그 단어를 모르고서 도무지 책의 내용이 파악도 이해도 되지 않을 때인데, 반다나 시바가 말한 '환원주의'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환원주의, 를 이 책에서 반다나 시바의 말로 처음 접하고서는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으면 제대로 아는것도 아닌데도 나는 환원주의는 뭐 환원주의겠지, 하고 그냥 넘기려 했던 거다. 그러나 환원주의는 계속 등장하고 나는 이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채로 이 장을 이어나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환원, 이라고 하면 원상태로 돌린다는 걸 의미하는게 아닌가? 환원주의는 원상태로 돌리는 걸 의미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이런 식으로만 짐작했다가 책 내용이 영 파악이 안되는거다. 나는 우선, 내가 아는 환원이 그 환원이 맞는지 검색해 보았다. 네이버 어학사전에서는 '본디의 상태로 다시 돌아감'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니 내가 환원에 대해 알고 있는 뜻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환원주의가 뭔가, 왜 환원이란 단어의 뜻을 아는데 환원주의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인가. 나는 환원주의를 넣고 검색해본다.



reductionism ,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상()이나 개념을 단일 레벨의 더 기본적인 요소로부터 설명하려는 입장. [네이버 지식백과] 환원주의 [reductionism, 還元主義] (두산백과)



환원주의에 대한 네이버 지식백과의 '요약'은 위와 같다. 요약만 읽으면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데도 모르겠네? 나는 요약 밑의 상세설명을 읽기 시작한다.


특히 과학철학에서는 관찰이 불가능한 이론적 개념이나 법칙을 직접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경험명제()의 집합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실증주의적() 경향을 가리킨다. E.마하와 R.아베나리우스 등의 경험비판론, M.슐리크와 R.카르나프 등의 논리실증주의가 그 전형()이다.

전자가 감각적 경험에 대한 ‘사실적 환원’을 지향한 데 반하여 후자는 관찰명제()에 대한 ‘언어적 환원’을 지향한다는 차이는 있으나, 다같이 반형이상학()의 입장에서는 노선을 같이한다. 후자는 다시 관찰명제의 기술()에 감각여건언어(sense-datum language)를 취하느냐 사물언어(thing language)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현상주의()와 물리주의()로 갈라진다.

또 생물학에서는 생명현상이 물리학 및 화학의 이론이나 법칙에 의하여 해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내세워 생기론()에 대립한다. 환원주의는 심리학상의 행동주의나 사회과학상의 방법론적 개체주의()를 가지고 통일과학의 이상을 추구했으나, 그 주장에는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이 지적되어 실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환원주의 [reductionism, 還元主義] (두산백과)




...............네?.................뭐라고요?...................아니 어째 사전을 읽을수록 더 미궁에 빠지는가, 나여.

환원주의를 알기 위해서 나는 실증주의를 알아야 하는 것인가. 알지 못하는 단어를 찾기 위해 사전을 펼쳤는데 그 단어의 설명을 위해 알지 못하는 단어가 수두룩 빽빽하게 나오면 그 때는 대체 어쩌란 말인가.


오만년전에 '홍정욱'의 [7막 7장]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생때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때 홍정욱이 가져간 건 영영사전 한권 뿐이라고 했다. 영한사전이 아니라 영영사전. 모르는 영어 단어를 찾아보면 영어로 써있어서 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사전을 뒤적여야 하고 역시 또다시 사전을 펼쳐야 하는 반복의 연속이었다고. 이 과정을 거친 사람이라 그는 하버드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 같고, 나는 환원주의 찾다가 실증주의 나오고 개체주의 행동주의 통일과학.... 해버리는 바람에 더이상 찾기를 포기하기 때문에 대학원을 갈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나는 환원주의에 대해서는 이해를 포기한 채로 이 책을 읽어야 하겠구나, 아 어이없어, 반다나 시바 너무 박사님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환원주의 모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미처 인지하지 못한것일까. 환원주의가 이 책의 초반부터 나 너무 괴롭히네, 엉엉 울고 싶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 하였는데, 아아, 아니다, 환원주의는 내가 더이상의 뜻을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책으로 돌아갔을 때, 그 책안에서 다 설명되어지고 있었다. 흑흑. 자, 우리, 환원주의에 대해 이해해보도록 하자. 여러분 이해 준비 완료?



개별 기업과 경제의 분화된 부문들은 사적 소유이든 국가소유이든 자체의 효율성과 이익만을 생각하며, 모든 기업과 모든 부문은 사회적ㆍ환경적 비용이 극대화되는 현실에는 눈감은 채 이윤의 극대화라는 척도로만 효율성을 측정한다. 이 효율성의 논리를 제공해온 것이 환원주의이다. 착취와 수탈을 통해 이윤을 발생시키는 자원체계의 특성만이 고려되며, 생태계의 과정을 안정시키지만 상업적 이윤을 낳지 않는 특성은 무시되고 결국 파괴된다.

상업적인 자본주의는 전문화된 상품생산에 기반을 두며, 따라서 생산의 획일성과 자연자원의 단일기능적 활용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환원주의는 복잡한 생태계를 단일 구성요소로, 단일 구성요소를 단일 기능으로 환원한다. 나아가 이것은 단일 기능, 단일 구성요소의 착취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생태계를 조작하도록 한다.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에서 숲은 상업적인 목재로, 목재는 펄프와 제지업을 위한 섬유소로 환원된다. 그리하여 숲, 토지와 유전(遺傳)자원들은 펄프의 생산을 증가시키도록 조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전체적인 생산성만 증가시킨다면 그것이 숲의 수분 보유량을 줄이건 숲공동체를 이루는 생명체의 다양성을 파괴하건 상관없이 과학적으로 합법화된다. 그렇게 해서 '과학적인' 산림관리와 산림 '개발'은 살아 있는 다양한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자연의 유기적 과정과 리듬과 재생력을 파괴하는 변형을 수반하기 때문에 환원주의 과학은 점증하는 환경재난의 뿌리가 된다. -p.83-84


숲은 상업적인 목재로, 목재는 펄프와 제지업을 위한 섬유소로 환원되고 그리하여 자연이 인공적 생산을 증가시키도록 조작되는 것. 이렇게 예를 들어주니 오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나저나 여성학 책 읽을 때도 그렇고 무슨 ~주의 이런거 너무 많아서 읽기 너무 힘들다. 세상에 수많은 그 주의들을 다 알 수도 없고 이럴 때마다 사전 찾아야하니 책읽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싶다. 어휴... 아무튼 환원주의 때문에 80쪽쯤에서 머리 터지게 고민했는데, 이 책이 총 524페이지의 책이고, 나는 고작 이십프로 읽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는데 앞으로 남은 부분에서는 어떤 용어들이 나를 또 후려칠까.... 그래도 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현재 125 페이지까지 읽었다. 


감사하게도 아직 일요일 오후가 남아있고 아쉽게도 고작 일요일 오후밖에 남아 있질 않다. 나는 오늘 이 책을 얼마나 더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뭔가 로맨스 소설 읽고 싶어졌는데 집에 가진 로맨스 소설이 없는 것 같아..주군의 여인 읽을까...낯선살냄새를 다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지금 책장에 없어. 회사에 있다 ㅠㅠ 안읽은 책 책장에 이렇게나 많은데 지금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없어서...책 또사야 하나? 아, 지난주에도 책이 왔다.





아무튼 책장 앞으로 가서 뭔가 다른 책을 골라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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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0-06-15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홍정욱의 [7막7장] 읽었을 때, 언급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저도 한때는 영영사전으로 단어 찾고, 거기서 모르는 단어 나오면 또 찾고,
또 거기서 모르는 단어 나오면 또 찾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단어만 찾았던 기억도 나구요.
결국 거금 주고 샀던 옥스포드 영영사전은 몇 달 쓰지도 않고 어딘가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기억도 나구요.

‘~주의‘ 라는 단어를 포함해 많이 배우신 학자들이 주로 쓰는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소통되는 뜻이나 사전에 나온 뜻이 아닌 경우들이 많죠.
그럴 때에는 자신이 정의한 뜻을 잘 설명해주면 좋을텐데, 의외로 그런 경우는 별로 못 봤어요.
그리고 분명 번역의 한계도 있을 것이구요.
학술서적의 경우, 원서를 읽는 것이 번역본을 읽는 것보다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다락방 2020-06-16 10:40   좋아요 0 | URL
역시 외국어를 좋아하는 감은빛님 답군요!
저도 영영사전 샀는데 단어를 찾기보다는 그냥 한 번 펼쳐서 보는 용으로 샀어요. 지금도 잘 꽂혀 있답니다. 제가 영영사전을 가지고 있다는게 너무 좋아요. 지적 허영심.....

원서를 읽는게 학술서적 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좋을 것이고, 그래서 제가 방통대 영문과에 편입하였었지만, 아아 역시 학교공부를 나는 따라갈 수가 없어, 나랑 맞지 않는다, 노력과 거리가 멀다, 하고는 한학기 다니고 자퇴했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코로나 사피엔스 -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 대표 석학 6인이 신인류의 미래를 말한다 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 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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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에 들었던 정희진 쌤 강연에서 정희진 쌤은 본인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은 책으로부터 얻는다는 말씀을 하셨더랬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으로부터 얻는게 무척 많다고 자부하면서도, 필요한 모든 지식을 책으로부터 얻는다는 게 가능할까, 더 많이 읽는다면 결국 그렇게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심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책으로부터 모든 지식을 얻는 것은 가능할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책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속도가 있으니, 또 그 책을 내가 읽어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니, 모든 지식을 제때에 얻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필요한 지식을 얻는 것은 가능하겠구나.


나는 코로나19 이후의 삶에 대해서 처음부터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마스크도 벗을 것이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예전처럼' 비행기를 타고 내가 가고싶은 곳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시간은 고작 한두달 정도였는데, 지금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코로나는 종식되지 않고 있고, 그 사이에 나는 계획했던 여행을 취소해야 했다. 너무 가고 싶은 마음에 아직 9월 계획을 취소하지 못하고 비행기와 호텔에 예약이 잡혀있는 상태인데, 지금은 6월 초이고 9월까지는 세달 남았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바라고 있었다. 지금도 바라고 있다. 그러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 책에서 여행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알라디너의 얘기를 듣고는 얼른 사서 읽었다. 내 생각보다 길어지는 이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하겠기에.



처음 등장하는 최재천 박사의 이야기들로 아주 중요하고 당연한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자연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 사실 화해라기 보다는 자연을 더이상 침략하지도 공격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맞겠다. 최재천 박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진 것은 '우리가 전례 없이 야생동물들을 건드려대기 때문' (p.25)이라고 말한다. 박쥐가 우리한테 부러 와서 옮겼느냐, 아니다, 우리가 박쥐를 잘못 건드린거다, 라는 것. 결국 인간이 자꾸 숲으로, 야생으로 들어가서 들쑤시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았다면 옮기지 않았을 바이러스들이 인간에게 찾아왔다는 거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정리해주니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라도 우리는 더이상 예전처럼 살던 방식을 유지해서는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된거다.



그리고 홍기빈은 여행에 대해 언급한다. 뭐라고 말할지 듣고 싶었지만 듣기 싫은 그런 양가적 감정으로, 알아야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여행에 대한 홍기빈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우리가 대체 왜 해외여행을 그렇게 다녀야 하느나며, 내 안의 욕망을 다스리자고 얘기한다. 홍기빈의 얘기를 읽고 또 읽으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 무엇보다 내 욕망에 스스로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겠구나, 싶다. 내 마음을 다스려야지. 실상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건 내가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아는 거였다. 가고싶지만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은 갈 수 없다고 나를 다스리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마음먹은대로 되는게 아니었다. 아주 자주, 얼른 정리되어 날아가고 싶다고, 요이땅만 하라고, 그러면 바로 앞으로 튀어가겠다고, 의욕 충만한 상태였던 거다. 그러나 이렇게 누군가 활자로 얘기해서 정리해주니, 좀 더 단단하게 질서를 잡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꼭 가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나에게 좀 더 자주 부드럽게 말해줘야 겠구나. 이렇게 쓰면서도 그런데 너무 속상해. 하...




이번 코로나 상황을 보면서 미국에 대해 가장 놀랐다. 너무나 급속하게 확진자가 생기고 사망자도 늘어나는 것에 너무 몰라서, 도대체 미국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인 미국이 도대체 왜 이렇게 대책없이 무너져가고 있는가, 생각한거다. 게다가 뉴스 화면상에서 보는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예방에 참여하는 것 같지도 않은거다. 게다가 최근에는 백인경찰이 흑인을 사망케 하는 사건도 일어나 미국 전역이 들끓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미국은 총체적 난국인것 같았다.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분노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미국의 지도자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미국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다른 지도자였다면 코로나가 확산될 때에 그리고 백인경찰이 '또' 흑인을 사망케 한 일에 대해, 다른 지도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것은 지도자의 문제인걸까. 곳곳이 들쑤셔진 미국은 그렇다면 안정이 찾아오긴 할까, 언제 찾아올까, 에 대해서 좀 충격적인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누리' 가 말하는 미국에 충격받은 한국인중에는 이렇게, 내가 있었다.



미국은 사실 내게는 어릴적부터 가고픈 나라였다. 선망의 대상이랄까. 내가 보았던 영화, 내가 읽었던 책, 내가 들었던 음악에 미국이 있었다. 센트럴 파크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내가 살면서 꼭 가봐야 할,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내 손으로 돈을 벌고나서 미국에 여러차례 다녀온 뒤에도 뉴욕이란 도시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현실적이 되어 '언젠가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여기는 내가 살 수는 없는 곳이구나'로 바뀌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언제든 또 찾아가고 또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이렇게 처참하게 엉망이 되는걸 보는 건 충격이었는데, 어쩌면 (이 책의 정관용 표현대로)엉망이 '되는'게 아니라 엉망이었던 모습을 내가 미처 보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미국에 '여행'차 갔을 때에는 단순히 여행자의 모드로 그곳을 보았지, 거주자의 눈으로 그곳을 보진 못했을 테니까.



그러고보면 반미정서가 가장 적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중의 하나였으면서 그런 나라의 사람이라는 것이 씁쓸하다. 우리에겐 어떤 시간들이 있었던 걸까.


얼마전에도 미국에 저항하는 나라, 에 대해서 친구랑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에 대한 감상에서 얘기하게 된건데, 그때 나는 친구에게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인용문을 들려주었더랬다.



다음날 저녁은 우리가 마닐라에서 보내는 마지막이어야 했어요. 나는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어요. 텔레비전을 켰을 때 처음에는 영화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까, 영화가 아니고 뉴스더라고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그래요, 혐오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이었어요.

(중략)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공격의 희생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에요.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허구 인물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움직이죠. 여러 일화를 통해 내게 친숙해진 인물이 죽으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모신 하미드, p.66-67



파키스탄 사람인 주인공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 여자를 사랑하고 미국에서 직장을 잡고 살지만, 그러나 미국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쓴 소설이다. 그는 이 거대한 미국,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배타적인 미국을 무릎 꿇게한 상징성에 대해 즐거워한다. 주인공도 이런 자신의 감정에 대해 혹여나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저어하긴 하지만, 그러니까, 어떻게 미국한테, 이렇게 거대한 나라를 어떻게, 감히, 무릎 꿇릴 생각을 했을까, 에 대해 생각한거다. 

미국은 나에게, 이슬람 사람들에게, 유럽 사람들에게, 아시아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어떤 나라였던걸까.




미국에 친구들이 있다. 다른 나라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멀리 있다는 것이 나에게 그동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그렇게 만나기도 했으니까. 그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도 하고 우리의 중간지점인 다른 나라에서 만나기도 했었으니까. 나는 별 걱정없이 이런 삶이 언제든 가능할거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내 '의지'와 '시간'과 '돈' 만 있다면, 아무리 먼 곳에 당신이 있어도 우리가 언제든 만날 수 있다, 고 나는 생각해왔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산불 때문에, 태풍 때문에, 지진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그런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은 내게 가능해질까? 가능하다면 그건 언제쯤일까? 그리고 그렇게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일은, 정말 괜.찮.은.걸.까?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내가 만나겠다는 것이, 또 다른 식으로 결국은 자연과 인간을 공격하게 하는 건 아닐까.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에도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것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면 그런데,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이 책의 여섯학자들은 모두 우리가 '예전처럼' 살게될 순 없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게 잠재력이 있으니 희망을 갖자고 말하는데, 나 역시 이모든 상황이 안정될 것이고 우리가 적응할 또다른 삶의 모습에 우리는 결국 익숙해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순간순간 우울해진다.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두렵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뒤로 밀어두어야 하는 것도 두렵다. 무엇보다 이 두려움이 오래 지속될까 두렵다. 마음의 질서를 찾자고, 반복해 속삭인다.






지금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백신밖에 답이 없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백신을 만들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린다면서요. 아마 실질적으로 2~3년 걸리겠죠. 그런데 만일 앞으로 바이러스가 거의 매년 우리를 공격한다면, 백신은 늘 뒷북을 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1년 동안 몇만 명 죽고 난 뒤에야 백신이 개발되고 유통되는 셈이죠. 백신은 독성을 약화시켰거나 죽인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로 만들거나 병원체를 둘러싸고 있는 표면 단백질 혹은 독소를 추출해 만들잖아요? 이런 화학백신보다 더 좋은 백신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행동백신과 생태백신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로 행동백신의 일종입니다. 옮겨가지 못하게만 하면 바이러스는 아무 힘이 없거든요. 그리고 숲속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게 생태백신입니다. 우리가 행동만 확실하게 하면 옮아가지 않습니다. 그게 훨신 더 좋은 방법이죠.


바이러스가 번번이 나타날 때마다 백신 개발한다고 1년이나 3년을 허덕이다가 대충 넘어가게 되거든요. 바이러스의 창궐 시기가 점점 짧아져 3~5년마다 한 번씩 인류를 덮친다면 우리는 늘 뒷북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백신의 안정성과 효과를 검증하려면 바이러스가 계속 유행하고 있어야 하는데, 수십만 명이 죽어나가고 세계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질 무렵이면 바이러스는 저절로 한풀 꺾이기 마련입니다. 사스와 메르스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요. -최재천, p.33





소비가 미덕인 건 현대밖에 없죠.


그렇죠.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꼭 해외여행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명도 이 문명밖에 없습니다.


전부 새로 나온 거죠.


그런데 이런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원칙이 계속되는 한 생태 위기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코로나19 위기도 누그러지지 않을 거고요. 현대문명의 가장 근간이 되는 이 원칙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에 우리 스스로 질서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무한한 욕망을 계속 무한하게 긍정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합니다. -홍기빈, p.120-121



여기서 우리가 살아온 방식도 바꿔볼 게 있을 겁니다. 우선 매년 한 번씩 해외로 여행을 가서 공기를 더럽히고 돈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가서 피사의 사탑을 꼭 손으로 만져봐야 할까요? 지하수고 암반수고, 심지어 빙하 녹은 물까지 플라스틱 통에 담아서 도시에서 마셔야 하겠습니까? 덴마크 사람들도 우리도 농사 짓고 돼지 기르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단 몇백 원, 몇천 원이 더 싸다고 해서 우리 농산물을 덴마크로 보내고, 덴마크에서 돼지고기를 가져오다보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질서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진 욕구와 능력의 한계와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유한한 인생인데 수십 년을 한없이 먹고 한없이 입다가 끝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바이러스는 미물이지만 우리에게 인간과 이웃과 자연이 함께 지복을 누리는 '좋은 삶', 그걸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홍기빈, p.125





미국은 뭐든 잘하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엉망이잖아요.


미국이 저렇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라가 한국이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국민은 한국인일 거예요. 대체로 유럽에서는 미국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이 넓게 퍼져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실상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전세계에서 가장 반미주의가 약한 나라, 거의 없는 나라라고 이야기할 정도예요. 우리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우리가 앞으로 선진국이 된다면 따라가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던 미국이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 못 한 거죠.


사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제3세계 수준의 삶을 산다는 것, 게다가 생존과 생명 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지켜줄 공공의료시스템이 없다는 걸 지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한국인들이 가진 미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너무나 좋은 계기라고 생각하고요. 왜 그런가 하면 한국은 사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미국화가 심한 나라거든요. -김누리, p.134-136





정말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회적으로 원하는 걸 계속 추구하다보면 훨씬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훨씬 더 많이 빼앗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알아가면서 그에 대한 역량을 발전시켜가는 사회나 문화에서는 더 적은 걸 가지고 공존하면서도 다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겠죠. -김경일,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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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1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셔서 약간 의외였는데, 그런 동기가 있었군요.
저도 코로나 때문에 여행 못 가는 게 정말 답답하고 언제나 다시 갈 수 있을까. 우울하기만 했는데, 이 책 내용 보니 정말 여행을 그렇게 가야 하는가 싶어지네요...

최근 쏟아지는 코로나 관련 책 저는 1도 관심없었는데(왠지 다 졸속으로 냈을 거 같아서요;) 이 책은 좀 궁금해지네요.

다락방 2020-06-12 11:32   좋아요 0 | URL
저도 평소 같았으면 이 책을 읽을 생각을 전혀 안했을거에요. 잠자냥 님 말씀처럼, 저도 뭔가 이슈됐다 싶으면 후다닥 책으로 내는 것에 대해 좀 얄미워하고 있거든요. 뭐야, 똑똑하다고 소문난 사람들 입을 빌어 시류에 편승해 책 팔아먹자는 거잖아,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 ㅎㅎ
그런데 여행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해져서 읽게 됐어요. 그렇게 가야만 하는건가 이 책에서 얘기하니, ‘그래, 못가도 아쉬워말자, 그간 충분히 다녔잖아‘ 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면서도 잘 안돼요. 너무 가고싶어요 ㅠㅠ
예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안정은 언제쯤 찾아올까요. 언제까지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할까요 ㅠㅠ

단발머리 2020-06-12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아직 읽지는 못 했지만, 이 시리즈 방송분을 모두 들었잖아요. 전, 홍기빈 소장 이야기랑 장하준 교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아서 페이퍼도 쓰고 그랬는데요. 음.... 전 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이 아닌데, 최근 몇년 사이 아이들 데리고 간다는 핑계로 여러번 비행기를 탔었더랬죠. 그런 기억이 행복하고 좋고 그렇기는 한데, 홍기빈 소장 이야기가 마음에 와서 박히더라구요. 지나친 소비, 지구에 대한 파괴 행위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데, 상황이 바뀌면 또 그렇게 하겠다는 거냐? 전 속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현재 우리 삶과 문명에 대한 경고를 그런 식으로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도 들었어요. 아직도 그 속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의료체계가 엉망이긴 해도 이 총체적 위기는 지도자 때문이라고 전 생각해요. 메르스 때 질본의 공무원들 지금 K방역 그 공무원들 이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리더가 중요하다. 제일 윗대가리가 제일 중요하다. 트럼프는 시위 일어나니까 군대 동원한다고. 그러고도 남죠.... ㅠㅠ

다락방 2020-06-12 15:47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의 갈등이 뭔지 알겠어요. 저도 이 책 읽고 나니까 그렇게 여행을 가야만 하는가, 라고 제 자신에게 묻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 욕망대로 행동할순 없는거잖아, 라고요. 그래서 홍기빈 소장 얘기에 막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고..그러면서도 가고싶단 말야 ㅠㅠ 이렇게 되고.

이 책에 실린 모든 얘기들이 다 귀담아들을만한 좋은 얘기였어요. 처음 최재천 박사의 원인분석에 대한 글도 좋았고요. 자연을 침략했다는 부분에서 에코페미니즘 생각도 났어요. 우리가 자연에게 못할짓을 하고 그게 결국 우리에게 되돌아오는거죠.

저도 미국을 보면서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하고 자꾸 생각하게 돼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요. 미국은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싶고요.

이번 주말이 우리 수도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고비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주말에 나가지말고 에코페미니즘 읽어요!!

- 2020-06-18 08:07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 방송이 뭐예용? 알려쥬세요~~~!!!

단발머리 2020-06-18 08:10   좋아요 1 | URL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코로나 19, 신인류 시대> 유튜브에 가면 바로 나옵니다. 굿모닝^^

- 2020-06-18 08:25   좋아요 0 | URL
굿모닝모모닝^.^ 내일은 엄마랑 그 프로그램을 보겠어요! 고맙습니댜!

다락방 2020-06-18 08:35   좋아요 1 | URL
오, 저도 시간될 때 한 번 찾아 봐야겟어요. 감사해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은 정말 다방면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고 교양을 막 쌓으시네요. 멋져.. ♡.♡

단발머리 2020-06-18 08:44   좋아요 1 | URL
이렇게 유튜브 달인은 교양인이 되는 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믿어 주세요, 다락방님! 엄청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 진짜로 그런 사람 되볼려고 합니다요!!!!

psyche 2020-06-18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로 미국의 민낯이 드러났고 바닥 또한 드러나고 있는 거 같아요. 미국이 개개개인은 부족해도 시스템은 제대로 되어있는 줄 알았는데 대통령 하나로 이렇게 무너지는 나라라니 참 ㅜㅜ 이런 상황에도 트럼프가 재선될까 걱정해야 하는 것도 한심하고... ㅠㅠ

다락방 2020-06-18 08:34   좋아요 0 | URL
프시케님 계신 곳은 괜찮은지, 프시케님은 잘 지내시는지 걱정이네요. 하루속히 미국이 좀 안정을 되찾길 바랍니다. 지금 상황은 너무 괴로워보여요 ㅠㅠ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까요? 멀리서 보는 저로서는 당연히 성공하지 못할것 같은데 말예요. 하긴 대통령이 될 줄도 몰랐었죠... 미국은 대체 어떤 곳인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