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아마 내가 알라딘을 이렇게나 오래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싶다. 다른 책을 권하고 소개를 받고 또 공통적으로 읽은 책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것. 언젠가는 다른 알라디너들이 '이 작가처럼 쓰고 싶다'라는 글을 쓴 걸 보고 좋아하기도 했다. 설사 그들이 되고 싶어하는 작가가 내 취향의 작가가 아니어도, 어떤 식의 글을 쓰고싶다, 라는 걸 읽는 건 진짜 짜릿해.


얼마전에도 언급했지만 지독하게 미스테리 책만 읽으려는 편협한 취향의 남동생에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스테리 소설을 읽고 권하고 있는데, 어제 그 중 한 권을 다 읽었다며 남동생이 톡을 보내왔다. 최근 읽은 책중에 '재미있다'라고 표현한 건 아마 이 책밖에 없지 않나 싶다.




위에서 말한 책은 바로 이 책.
















이 책도 사두고 안읽었다가 남동생 미스테리 줘야한다,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었는데, 초반에는 북유럽의 낯선 지명과 이름에 몰입이 좀 힘들었는데, 와, 이건 대단한 이야기였다. 여성대상 범죄를 풀어가는 이야기이긴 한데 난민이 언급된다. 난민에 대한 혐오와 그렇지만 혐오할 수밖에 없는 그 지역 사람들의 사정도. 난민 혐오를 한 번 짚어주자는 거구나, 싶었는데 결론에서 맞닥뜨리는 반전은 느낌표 백 개 생기게 하고, 아, 그 때 나왔던 그 대사가 바로 여기에 적용되네 싶으면서 이 소설은 놀라운 소설로 바뀌어버린다. 아, 그 얘기 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냥 짚고 넘어가는 수준으로 끝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결국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어!


반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장치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남동생에게 건네면서 재미있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 낯선 지명과 이름 때문에 끝까지 넘길 수 있을까 살짝 걱정을 했었다. 어쩌면 에잇, 다른 거 읽을래,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남동생은 다 읽었다고, 재미잇었다고 톡을 보내왔다. 아흑 너무 짜릿한 순간이었다 진짜. 좀 더 욕심을 내자면 나는 남동생이 저런 식의 간단명료한 감상이 아니라, 어쩌고 저째서 이러저러하니 요러케죠로케 됐다...같은 평을 기대하지만, 아니, 다 읽었고 재밌다고 말해주는 게 어디야. 그래.. 좋다.



미스테리, 추리 소설에서 작가들이 반전을 장치하면서 뭐랄까, 이것봐라 반전이지롱~ 하고 싶어서 한거구나 싶은 그런 작위적인 느낌을 받을 때도 더러 있는데, 이 책의 반전은 '치밀한' 장치였다. 너무 좋아서 얼마전에 친구에게도 추천했는데(항상 나에게 재미있는 책 추천해달라고 하는 친구다), 그 친구는 이미 이책을 읽었다며 자신도 재미있었노라 말했다.


여러분 이 책 읽어보세요, 끝까지 읽다보면 느낌표 백개 찾아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오십개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찾아오긴 찾아와요...



마지막에 남동생이 '어느정도 예상했었어'라고 해서 빵터졌다. 저놈은 소설을 한 40권쯤 읽었을 때,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제 써야겠어"


라고 말했던 놈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 번은 로맨스 소설을 추천했었는데 한 십분의 일정도 읽더니


"이건 안읽어도 돼. 내용 뭔지 다 알아. 책을 하도 많이 읽어서 이젠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겠어." 라고 하는게 아닌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야 이놈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좀 더 길게 말해주렴, 동생아. 앞으로는 좀 더 길게..감상을 말해줬으면 해..... ♡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신간 소식은 항상 짜릿할 것이다. 특히나 좋아하는 작가, 기다리는 작가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좋은가. 나는 호프 자런의 신간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일전에 《랩 걸》을 읽으면서, 수화기 너머로 애인과 대화하던 생각도 떠올랐다. 그는 나에게 언제나 요즘은 뭘 읽는지 물어왔고, 나로부터 책 이야기를 들었고, 그 책에 대한 감상을 들었고, 내가 말하는 줄거리에 대해서 자신의 감상을 얘기하기도 했다. 랩 걸 에서는 작가의 절친한 남사친이 나오는데, 남자와 여자 사이의 친구관계.. 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어느 날 호프 자런은 남편을 두고 그 남사친을 만나 여행하는데, 거기에 전혀 이성적인 혹은 연애적인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물론, 남사친의 기분은 내가 알 수 없다), 그 일에 대해 얘기했을 때 애인은 '그거 괜찮겠어? 나는 싫을 것 같아' 라는 이야기를 했던 거다. 호프 자런, 이라고 하면 또 생각나는 건, 그녀의 실험실에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던 선배 여성에 대한 얘기였다. 호프 자런은 그 여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또 좀 꼰대라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나는 그 여성이 늦은 밤에 집에 데려다주려고 애쓰는 것, 호프 자런은 좀 과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내 보기엔 전혀 과하지 않은 범죄에 대한 우려 같은 게 느껴져서 그 선배 여성이 고마웠더랬다. 호프 자런, 이라고 하니까 이렇게 호프 자런의 책을 읽었던 기억들이 우수수 쏟아지는데, 그 호프 자런의 신간이 나온 거다.



















아 너무 좋지 않나요 여러분... 책 읽기는 진짜 만세만세 만만세야. 짱이다.



사람마다 책을 읽고난 후의 반응이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고 느끼면서 그것을 혼자 간직하는 게 기쁨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 거 진짜 나는 너무 좋아. 그래서 알라딘을 하고 있는 거다, 내가. 누가 읽든 안읽든 내가 주절주절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 그게 내 스스로 너무 좋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그러다보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생기고 또 그 중에 소수는 그 글들을 좋아해주기도 한다. 가끔 계속해서 보고 있는 눈팅족이었다거나 하는 댓글을 만날 때면 얼마나 가슴 가득 뻐근함이 느껴지는지...




어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9월 도서인 《페미니즘:교차하는 관점들》을 읽으면서 또 아직 읽지 못한 여성학자들의 책을 검색해보았다. 물론 내가 읽었던 작가와 책들이 수차례 나오긴 하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들과 작가들도 나오는 거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슬픈 건, 내가 읽고 싶다고 해서 읽을 순 없다는 거였다.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은 절판인데다가 개인 중고판매자들도 터무니없는 가격을 책정해놓았다. '메리 데일리'도 읽고 싶은데, 역시나 절판이다. 이런 책들, 다들 어딘가에서 개정판을 준비중이라면 좋겠다. 성의 정치학과 메리 데일리의 책 모두 오늘 생각나는 출판사에 문의 넣어볼 참이다. 이 책들 개정판 좀 내주시면 안될까요?


















빨리 점심시간 왔으면 좋겠다. 내가 만든 진미채(어제 페이퍼 참조) 도시락 반찬으로 싸왔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인 것이다.

다이어트는 빼고..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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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9-0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야기 친구의 소중함이야 이루 말할수가 없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코로나 시대에 책친구는 비상식량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수, 라면급이죠.
책친구도 좋지만 다락방님 책동생도 부럽네요. 다락방님이 읽고 골라준 책만 읽는다니 정말 남동생분의 큰누나 100% 활용법에 박수를 백번이나 치고 싶어요.
커피가 유독 향긋한 아침이네요. 전 코스타리카 라스 로마스가 알라딘 커피중에 제일 좋네요^^

다락방 2020-09-07 11:39   좋아요 0 | URL
아아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의 댓글을 읽으니 너무나 라면이 먹고싶어집니다... 나가서 라면 사올까..... 아아 라면 겁나 땡기네요. 흑흑. 그렇지만 제가 만든 진미채를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왔으니 얌전히 도시락을 먹겠어요.

단발머리님의 말씀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하지만, 제 동생이 저의 소중함을 알런지 모르겠네요. 이런 누나가 있다는 걸 고마워할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전혀 모를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노므시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복에 겨운 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커피 향이며 내리는 게 너무 좋아서 너무 듬뿍 마셨어요. 아이참. 뭐든 적당히를 모르네요, 저란 사람은.. 향긋한 커피와 함께 시작하는 하루라니, 단발머리님의 오늘 하루가 나쁘지 않은 하루가 될듯합니다.
샤라라랑~

감은빛 2020-09-0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서 꼼짝없이 집에만 있는 몸이 되고 보니 확실히 책만큼 좋은 친구가 없네요. 다행히 우리 집엔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만큼 책이 있으니 걱정이 없네요. ㅎㅎ

퇴원 후 처음엔 약이 너무 졸려서 거의 하루종일 잠만 잤는데, 약을 바꾼 후엔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가끔은 드라마도 보고. 요즘 이렇게 아무생각없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믿기지 않네요.

다락방 2020-09-08 08:04   좋아요 1 | URL
역시 책은 일단 사놓고 봐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든 읽을 수 있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책은 사두는 게 진리...

감은빛님 그간 너무 열심히 살아오셨잖아요. 쉴 시간도 없이 항상 바쁘다고 하셨고요. 글 읽을 때마다 늘 바쁘다 하셨는데, 이렇게라도 쉴 수 있다니 놓치지 마세요. 회복에 집중하시고, 그간 시간 없어 못하셨던 것도 다 해보시고요. 그간 에너지 소진한 거 이번 참에 차곡차곡 다시 쌓으시라 주어진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그게 꼭 이렇게 몸 아프게 해서 찾아왔어야 했을까, 좀 아쉽지만..
얼른 회복하세요, 감은빛님! 얼른 회복하셔서 좋아하는 술도 드시고 또 수다도 떨고 그래야지요!!

비연 2020-09-0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이 책이 제게 옵니다. ㅎㅎㅎ ㅜㅜㅜ

다락방 2020-09-08 14:00   좋아요 1 | URL
호프 자런 말씀이십니까!!!!!

비연 2020-09-08 14:15   좋아요 0 | URL
.... 애프터 쉬즈 곤. 휘릭 =3 =3

다락방 2020-09-08 14:23   좋아요 0 | URL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9-08 14:3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ㅜㅜㅜ

다락방 2020-09-08 14:34   좋아요 0 | URL
비연님, 화이팅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비연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

han22598 2020-09-11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랩걸에 대한 추억을 나눠주시니...저도 랩걸을 읽었을 때가 떠오르네요 크크크크... 재밌게 읽긴 했지만 호프자런이 우리 교수님이었으면 정말 싫었겠다 싶었어요(너무너무 싫어요..일중독....연구 너무 좋아하는 너드 ㅠㅠ) 호프자런이 게으른 학생에 대해서 아주 잠깐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3-4문장도 안될거에요..)...그 부분 읽으면서 심장이 조여왔어요 으으윽 ㅠㅠ 나는 너무나도 게으른 학생이었기에...

자주 댓글을 달지 않지만 항상 다락방님 글을 즐겨보면서 소개시켜준 책도 장바구니에 넣기도 하고 리뷰 보면서 많은 것을 공감하고 배우곤 한답니다. (아마도 저같은 사람이 많을 것 같지만지만 용기내어 고백해봅니다 ㅎㅎ)

다락방 2020-09-11 08:55   좋아요 0 | URL
오오, 역시 어떤 책이든 간에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인상깊은 부분도 다른것 같아요. 저는 게으른 학생에 대해 묘사했다는 것은 아무 생각이 안나요. 사람들은 역시 자기 기준으로 책을 읽는군요! 이런 거 너무 재밌어요. 나에게 인상 깊은 부분을 다른 사람은 모르고 다른 사람에게 인상 깊은 부분은 내가 모르고. 책은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읽는 자의 몫이 되는게 너무나 당연한 것 같습니다.

히히. 글 읽어주시고 또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누군가 읽고 감상을 남겨준다거나 의견을 교환해주는 건 참 소중한 일이에요. 그래서 아마도 알라딘에 이토록이나 오래 머무르는 것 같고요. 또 만나요!
 















선하고 지성적이며 지혜롭고 검소한 남자와 선하고 지성적이며 지혜롭고 검소한 여자가 만나서 아이를 낳았더니 그 아이는 선하고 선하고 선하고 선하고 선하며 지성적이며 지성적이며 지성적이며 지성적이며 지혜롭고 지혜롭고 지혜롭고 검소하고 검소하고 검소하고 검소한 어른으로 성장해갔다. 자라는 동안 선한 아버지와 선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세상에 혼자 남은 고아가 되었지만 이렇게나 선하고 선한 인물에게 나쁜 일이 생길게 무언가. 그녀의 선함과 검소함과 지성은 모두의 칭송을 받고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부터도 존경을 받는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살게 해주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소녀들의 교육에 힘을 썼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있나 싶을 정도의 인물들이 이 책 안에서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보여지는데, 이 책의 저자인 '조피 폰 라 로슈' 는 선한 인물에 대한 어마어마한 판타지를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중간까지 읽으면서는 미덕 컴플렉스 있나, 미덕이란 말이 뭐 이렇게 나오나 할 정도였고, 이렇게 미덕과 미덕이 결합하여 미덕으로 탄생한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려고 이렇게 하나, 싶었다. 사실 자신이 가진 지위나 재산으로 더 낮은 지위의 자들에게 돈을 주어 돕고 교육을 시키고 하는 이런 행동들도, 분명 선한 의도에서 나온 거였지만, 그거 너무 잘 알지만, 그러나 신분을 없애기 보다 신분을 더 공고히 하는게 아닌가, 이것은 지위가 낮은 자들을 너무나 자기보다 하등하게 보는 시선이 아닌가 하는 불편함도 좀 느꼈고 말이다. 게다가 책 속의 목사 입을 빌어 여성이 남성의 미덕을 따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여자에게는 여자의 할 일이 있고 남자에게는 남자가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라고 말을 해서, 역시 옛날 작품이군...할 수밖에 없었단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슈테른하임 아가씨는 곤경에 처한다. 심지어 납치도 당해. 그것은 난봉꾼인 한 남자에 의해서인데, 그녀에 대해서는 다른 여자들과 다른 매력이 있고 그래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비밀 결혼까지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지 않자 해를 입히는 거다. 이토록이나 선하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남자에 의해서라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작가는 전혀 그런 의도로 쓴 책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쩔 수없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의 존재는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잘 알겠다.



1730년에 태어난 작가이니만큼 이 책 속의 사랑 이야기는 도무지 답답해 따라 읽을 수가 없다. 신분제 때문에 사랑을 속이는 거야 그렇다쳐도, 자기 사랑을 왜 자기가 말을 못하고 누가 대신 말해줘야 하고 누가 대신 청혼해야 할까. 그리고 감정이 되게 과잉되어져 있는데, 이런 것들을.. 견딜 수 없는 것은 내가 지금의 사람이라서인가. 내가 1730년에 태어나 작가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았다면 나도 이런 삶속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까. 아무튼 미덕이란 단어는 이 시대의 소설이기 때문에 자주 등장하는 것 같다.



슈테른하임 아씨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당연히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여럿 생기는데, 공교롭게도 시모어 경과 또 시모어경의 사촌형인 리치경이 그녀를 사랑한다. 둘다 슈테른하임의 미덕, 지성, 영혼을 사랑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살면서 고민한 남자들도 이 둘이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두 명과 결혼할 수는 없고 한 명만 슈테른하임의 남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리치 경은 동생인 시모어 경에게 양보하는데, 그런 시모어의 마음을 자기가 대신 가 슈테른하임에게 전한다. 슈테른하임은 리치경도 나를 좋아하는데 어쩌나 했지만, 리치 경은 이제 슈테른하임을 여동생처럼 대하겠다고 한다. 내가 사랑한건 어차피 너의 영혼이었으니까 그게 가능해!




내가 사랑했던 것은 레이디 시모어의 영혼이요, 정신이었습니다. 그녀가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 쓴 글들이, 그녀가 자신의 능력에 있는 최고의 것을 내게 선물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내 성품에 대한 진실한 존경, 진정한 신뢰, 내 행복에 대한 사랑스러운 기원이 들어 있지요. 한 번 품었던 좋아하는 마음의 풀 수 없고 수수께끼 같은 고집이 오랫동안 자신도 모르게 그녀 마음의 성향을 옭아매었지요. 그녀 영혼의 높은 가치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우정은 어떤 다른 사람의 포옹보다 더 사랑스럽습니다. 이제 내가 처한 인생의 가을이 나를 우정의 순수하고 달콤함을 모두 조용히 누리게 할 것입니다. 난 이 행복한 사람들 곁에 살 것이며, 둘째 아들은 리치 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내 마음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매일 나는 레이디 시모어와 이야기할 것이고, 그 정신의 아름다움은 내 소유가 될 것이며, 나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 기여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사랑하는 시모어에 대한 내 결심을 축복해주셨고, 내 행복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존경스럽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달려 있지요. 친구요, 곧 나는 그녀를 보고 그녀와 말하게 될 겁니다. -p.386




하아.... 이게.....이게 어떻게 가능해....이게 어떻게 가능해.... 내가 사랑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물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 곁에서 그사람과 대화하며 그 사랑스러운 영혼을 매일 보면서 사는 삶이 어떻게 가능해.. 그것도 평생... 정말 괜찮아? 하아. 나만 속물이야? 나만 욕망의 동물이야? 


그런 한편,


부럽다.. 정말 부러웠다. 비록 내 옆에서 나랑 함께 잠들고 내게 팔베개를 해줄 순 없지마는... 그래도 눈뜨면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어. 사랑, 애정이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대화로 완성되는 게 아니던가. 너의 생각과 의견 내가 듣고 나의 감상을 또 너에게 말하고... 결혼, 함께 산다는 것은 육체적 사랑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텐데, 사실 나이 들면서..섹스 같은 거 없어도 살 수 있고 안해도 사는데 지장 1도 없으며, 오히려 임신에의 공포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어. 그렇다면, 영혼의 파트너가 되는 것, 게다가 그것도 매일 만나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넘나 부럽지 아니한가. 궁극적인 행복의 목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베스트프렌드가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의 상대 따로 있고 베스트프렌드 따로 있는 것은 또 그대로 나쁘지 않잖아. 친구, 친구로 지내는 것은 이렇게나 좋을텐데. 아싸리 멀어져버리는 것보다 친구로 만나는 것이라면, 길지 않은 인생, 그걸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거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때 티비 드라마중에 남녀고등학생들이 주연인 학교물이 있었고, 제목이 전혀 생각안나고 다른 등장인물 전혀 생각안나는데, 어쨌든 남자 주인공은 '이민우' 였다.이민우에게는 베스트프렌드 여사친이 있었는데, 어느날 이 동네에 공부 잘하고 예쁜 부잣집 여학생이 전학을 오고, 그 전학생과 이민우는 사귀게 된다. 이에 여사친은 자신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던 이민우가 이제 그런 시간을 여자친구에게 투자하게 되니 서운하고 속상해한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어쩌면 여사친은 이민우를 이성으로도 좋아했기 때문에 속상했던걸까? 그런데 불분명한 기억에 의지하자면, 전학생의 부모가 이민우를 싫어했던 것 같고, 그렇게 이민우와 전학생은 사귀는 사이었다가 헤어지게 된다. 이 때 왜 오지랖넓게 이민우의 여사친이 그 전학생을 만난건지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 때 '네가 좋아하는 이민우와 사귀었다'고 으스대는 전학생에게 여사친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이민우와 사귀었다고 으스대지만 결국 헤어져서 이제 다시 볼 수 없지. 그렇지만 나는 그의 친구로 남아 앞으로도 오래 옆에 있을 수 있어."



그때 고개 끄덕이며 그 장면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 드라마 때문은 아니고, 나는 어쨌든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좋아하는 상대와는 사귀기 보다는 친구가 되자고 마음 먹었던 사람이다. 내게 연애는, 사귀는 것은 언제나 끝을 생각하게 했기 때문에, 사귄다는 것은 언제든 헤어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했고,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는 그 헤어짐이 오지 않을 친구 상대이고 싶었던 거다. 오, 나여... 나는 도대체 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이 오기도 전부터 헤어짐을 생각하고 고통스러워 하는가.... 




그래서 내가 기어코 기어코 사귀지 않으려고 했던 내 인생의 사랑을 나는 그렇게나 친구로 두려고 했었다. 그러니까 연락도 이메일로만 하고 싶었다니까? 아니면 문자메세지나? 그런데 왜 매일 전화를 해가지고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분명히 내 생각도 전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하고 헤어지는 거 싫어서 나는 사귀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니가 먼저 옆구리 콕콕 찔렀잖아, 그래도 한 번 가보자고, 왜 끝을 생각하냐고, 그렇게 옆구리 콕콕 찔러가지고 내가 안그럴라고 안그럴라고 했는데 사귀었고, 그러다보니까 헤어져서 이제 영영 안보는 사이가 되었잖아, 이 쌍놈아... 내가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 혼자 일자산을 오르면서 엉엉 통공을 했더랬다. 거봐, 내가 안사귄다 그랬잖아, 왜 사귀자 그래가지고 아예 존재 자체를 내 옆에 없게 만들어, 그냥 가끔 연락하는 친구 사이었으면 우리가 계속 연락하는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있었잖아, 왜 그렇게 그 누구보다 가깝게 옆에 와가지고 아예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느냐고, 왜, 왜, 왜, 왜.......





그래서 리치 경이 부러웠다. 그러고도 살 수 있냐고 묻고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있다니 부러웠다. 어쩌면 리치 경과 슈테른하임 사이에 섹스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성인 남녀라면 누구나 알고 있잖아요. 몸을 섞은 사이는 몸정..도 있고 몸이 몸을 기억해서.... 뭐 그래서 이성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면 좋은 친구 관계 될 수 있지마는..그것은 케바케고 사람나름이라 나는 ... 아니 그래도 지금은 또 나이도 들고 체력도 떨어지고 뭐 여차저차 이러저러해서 친구 할 수 있으니까... 우리의 섹스 잊으면 되니까, 그러면 되니까, 나도 리치경처럼 좋은 영혼의 단짝 되어서 그렇게 매일 안부를 주고 받고 생각도 주고받고, 무엇보다 뒷담화 함께 까고... 뒷담화, 정말, 어떤 뒷담화는 너여야만 되는게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이해 못해줘도 너만 이해해주는 그런 게 있단 말이다... 나 잘난척도 하고 싶고 뒷답화도 하고 싶고 그런 영혼의 파트너... 있어서 좋겠어요, 리치 경... 나는 미덕이 부족해서, 지성과 지혜와 검소함이 부족한 욜로족이라서 영혼의 파트너가 없는건가요...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하아 그러면 지금쯤 그 누구보다 영혼의 파트너 되어서 베프 되어서 사이좋게 살 수있었을텐데..



그러나 시간을 돌려서 나에게 다시 선택하라고 하면 그 때도 나는 아마 그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친구를 택하는 대신 아마도 그 불길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겠지. 팔베개를 선택했겠지. 누드 팔베개... 인생....... 친구란 무엇이고 연인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다음주 점심 도시락 반찬을 만들기 위해 진미채를 사왔고, 여동생으로부터 레서피를 받아 진미채볶음을 만들기로 했다. 우선 한 입 크기로 먹기 좋게 써는 걸로 시작해야 한다.




그릇에 진미채를 쏟고 가위를 들어 조솨버릴라고 하는데 엄마가 빽 소리를 지르시며 지금 뭐하냐고, 하나씩 들어서 얌전히 잘라야 한다는거다. 그냥 조솨버리면 안돼? 했더니 그러면 안된다고, 다 고르게 자르지도 못할뿐더러 또 섞인다고, 제발 차분히 앉아서 하나씩 자르라고 한다. 나는 그래서 앉아서 차분히 하나씩 들고 가위로 자르기 시작하는데... 아아 차라리 책을 읽는 게 낫지, 이런 단순노동은 나에게 명상의 시간을 가져다줄줄 알았건만, 과거의 시간을 붙들어와 하나하나 후회를 하게 만든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 말은 왜 했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한숨을 거듭 거듭 쉬었고, 엄마는 옆에서 너 도대체 왜 한숨 계속 쉬냐고 했고, 나는 엄마, 이렇게 가위질을 하노라니, 내 인생의 오점들이 떠올라...했다. 아, 인생의 오점이여. 거기에서 사라지렴. 왜 거기 있는거니. 이렇게 진미채 자를 때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면 내가 곶통...



그리고 만들었다. 진미채를!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어서 좀 짜게 됐지만 그런대로 맛있는 진미채가 완성되었다. 다음주의 점심 도시락은 월요일도 진미채 화요일도 진미채 수요일도 진미채 목요일도 진미채 금요일도 진미채가 될것이다.



이제 포장주문한 족발을 찾으러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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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9-06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마트에서 진미채를 사와서 집에서 만들까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데는 나도 모르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군요. 역시나. 역시 나.

다락방 2020-09-07 07:43   좋아요 0 | URL
진미채는 밑반찬으로 좋잖아요. 저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진미채가 제 입에 썩 좋지 않았거든요. 여동생이 만드는 진미채는 너무 좋았는데 요즘은 여동생을 만날 수가 없어서 여동생에게 레서피 다오, 해서 제가 만들어 보았습니다. 저 도시락 반찬으로 싸왔는데 너무 떨려요. 월,화,수,목,금.. 까지 먹을 수 있을까? 제가 오늘 다 먹어 치우는 건 아닐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무튼지간에 제 인생의 오점에 대해 충분히 반성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만 총총.

수이 2020-09-06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미채 사려고 방금 마트에서 골랐다가 아 이걸 언제 다 찢어;;;; 이러고 내려놓았는데 역시 잘한 선택이었다는 결론!

다락방 2020-09-07 07:44   좋아요 0 | URL
아휴 그냥 과거의 말과 행동들이 저를 후려 갈기는 바람에 마음 수양..같은 건 잘 되지 않았네요. 그렇지만 이번에 맛있게 잘 먹으면 다음에 또 해볼 거에요. 다음에는 고추장을 지금보다 조금 덜 넣어서 좀 더 입맛에 맞게 할 수 있게 되겠지요. 후훗.

바람돌이 2020-09-06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동네 반찬가게가 나보다 진미채를 훨씬 맛있게 만들어줘요.ㅠㅠ

다락방 2020-09-07 07:45   좋아요 1 | URL
저는 울엄마보다 반찬가게가 더 잘하는 것 같아서, 어디 한 번 그럼 내가 해보자! 하게 되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진미채 비싸더라고요. 페루산 350g 에 8,500 원.... 저만큼이 8,500원어치에요.. .비싸..........
 















여성주의 관련 책들을 읽어오면서 한 번쯤 그 흐름에 대해 정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흐름의 정리를 내가 하는 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일 것 같아 누가 대신 해줬으면 했는데, '로즈마리 퍼트넘 통'과 ' 티나 프르난디스 보츠'가 해줬네. 그렇다면 그들의 노고가 담긴 책을 나는 읽는 것으로써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로 끝나면 너무나 간결한 해피엔딩이겠지만,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읽기 전에 마련해두고 책을 한 번 휙- 훑어보면서 아아, 뭔가 논문인가..읽을 수 있을 것인가 했는데, 어떤 스토리보다는 역사, 개요에 관한 참고서같은 책이라서 수월하게 읽어낼 수가 없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멤버 한 명은 노트를 꺼내놓고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 역시 다이어리를 꺼내서 메모를 하면서 읽고 있다. 


그동안 읽어왔던 여성주의 책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책도 서문,서문,서문으로 시작한다. 그중에는 역자인 '김동진'의 서문이 있는데, 그 서문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독자들도 이 책에 실린 다양한 페미니즘 관점 중 가장 좋아하는 관점 혹은 페미니스트를 한 명쯤은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역사서문중, 김동진


저 구절을 읽는데 어떤 기대감이 생겼다. 이 책을 다 읽은 사람들과 너는 어느쪽에 제일 마음이 가? 어디를 지지하는 것 같아? 라는 물음과 대답을 교환하다보면 아주 재미있고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은거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급진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미국의 유생인종 페미니즘, 전세계 유색인종 페미니즘, 정신분석 페미니즘, 돌봄 중심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실존주의 페미니즘, 제3의 물결 페미니즘과 퀴어 페미니즘 등이 차례대로 나와있는데, 현재 제1장 자유주의 페미니즘까지 읽기를 마친 후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내 생각보다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어떤것인지, 누가 어떤 걸 주장하면서 흘러갔는지도 보여주고 또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비판도 들려준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아 그러했군, 하면서 읽게 되었다면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도 음 역시 맞는 말이야, 하게 되는 거다. 그런식으로 읽다 보면 결국 나는 어느 지점에 제일 가까운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대표는 '베티 프리던'이 있다. 가정주부들의 '이름 없는 문제'를 지적하고 언급했던 페미니스트, 그 유명한 [여성성의 신화]를 쓴 페미니스트. 그 책을 우리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에서 함께 읽기도 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나도 아쉬운 점을 적어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베티 프리던이 그 당시에 그런 책을 쓸 수 있었다는 것 자체는 우리가 환영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전에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보여줬던 영화 [아마데우스] 에서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더랬다. 궁중 작곡가인 '살리에리'가 작곡을 하나 하고는 뿌듯해하며 모짜르트에게 들려주는거다. 이거봐, 내가 작곡했어 좋지? 하는데, 모짜르트가 그걸 들어보더니 음 좋긴 한데, 그걸 이렇게 하면 어때? 하면서 거기에 살을 붙여가지고 더 근사한 곡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한 번 듣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을지를 머릿속에서 파바박 생각해서 살을 붙이는 것은 모짜르트가 천재라는 것에 확신을 더해주는 일화일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곡'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곡'이 우선해야 했다. 살리에리가 만들어둔 곡이기 때문에 모짜르트는 거기에 살을 붙일 수 있었다. 애시당초 그 곡에 대해서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살리에리다. 그리고 그 유를 더 근사한 유로 만들어 버린게 모짜르트고. 아, 물론 모짜르트는 천재적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작곡가이긴 하지만 말이다.


베티 프리던이 자신의 사상과 책으로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는 것 역시 베티 프리던의 작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 이런 생각이 있어,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야, 라고 세상에 내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건 이런 점에서 잘못되었어', '그보다는 이런 식으로 나아가야 했지'라고 덧붙일 수 있었다. 결국 처음부터 완벽한 방법을 내보일 순 없지만, 서서히 우리는 좀 더 나은 것을 향해 힘을 모을 수 있게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잘못된 것일지라도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베티 프리던은 그 당시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사람이었고, 후에 사람들은 거기에 살을 붙이고 있다.

비판과 비난을 가득 받을지언정 일단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은 그 성과를 인정해줘야 마땅하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내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가장 가까울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밖에 읽질 못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저자 서문에서의 짤막한 개요들을 읽다보니 나는 어쩌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에 더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그 모든 페미니즘들에 대하여 차근차근 다 읽다보면 내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 좀 더 분명해지리라.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 공간에 여러차례 얘기하곤 했지만, 나랑 같은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내게 남을 순 없다. 마찬가지로 나랑 다른 페미니즘을 지향한다고 해서 내가 내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현재 나와 다정하게 지내는 사람들 중에도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나랑 바라보는 바가 같았으나 내가 딱히 친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페미니스트는 완벽한 인간, 흠없는 인간이란 뜻이 아닌데,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여러가지를 덧씌우고 억압하고 제약하고 그리고 또 기대를 한다.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줘야지, 라는 식의 억압도 존재하고 너는 페미니스트라면서 거기서 왜 그렇게 행동해? 라는 제약도 들어온다. 나는 이 모든 사건들을 수차례 마주하면서 아프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갈등과 번민도 있었지만 정말 끔찍하고 싫은 기억도 있다. 어떤 순간들의 선택에는 후회하고 또 어떤 순간들의 선택에는 내가 잘했다고 쓰다듬게도 되는데, 최종적으로 지금은 내가 옳다고 믿는 방향을 보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가자고 다짐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인정 자체에 대해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아니니까. 설사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아 임 오케이. 페미니스트라는 정체화나 타인의 인정같은 게 내게 중요치 않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그보다는 내가 보는 방향을 향해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참고서 같은 책을 읽는 것은 매우 힘겨운 시간이 되겠지만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또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기대되고 친구들과도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될지 궁금하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읽기는 마쳤고(그렇다고 모든 걸 다 습득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급진주의 페미니즘 차례다. 그렇지만 오늘은 자유주의 까지만 읽고 마쳐야지. 머리도 좀 쉬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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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06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사람의 다양한 생각을 하나의 이즘으로 묶는 것 자체가 무리죠. 가장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던 사람이 자기 집에서는 가장 억압적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말이죠. 결국 어떤 사람이든 생각의 층위는 다양하고 무슨 이즘이라는건 그것의 대표흐름만을 표현할뿐인듯싶어요. 그래도 그런 분류가 필요한건 그속에서 내가 동의하는 생각 그리고 삶의 방향들을 더 쉽게 찾아낼수 있는 길잡이정도로러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어려운 책은 읽기 싫어서 그냥 다락방님을 비롯한 다른분들의 글을 눈팅하는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네요. ^^;;

다락방 2020-09-07 07:4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바람돌이님.
어제 이 책의 2장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읽는데, 그걸 읽으면서도 또 제가 백프로 급진주의와 같다고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거든요. 앞으로 남은 장들을 읽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게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일치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세상은 워낙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살고 또 처한 상황도 역시 다르니까요.
바람돌이님, 책을 읽으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고 쓴 글을 읽는 것도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면 ‘그 책이 정말 이렇게 말했나‘ 라는 의심이든 ‘그 책에서 이런 좋은 말을 하다니!‘라는 궁금증이든 어떻게든 책으로 다가설 수도 있게 될테고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그대로 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

syo 2020-09-06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좋은 곡을 만들지 않았어도 바로 더 좋은 곡을 내놓을 수 있었을 거예요.... 물론 그렇게 만든 곡은 살리에리의 곡을 바탕으로 한 곡과 전혀 다른 곡일 테지만, 오히려 처음부터 모차르트가 만들어서 훨씬 더 좋은 곡일 확률도 없지 않아요.

천재와 수재의 차이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천재 좋겠어-_ㅠ

다락방 2020-09-07 07:42   좋아요 1 | URL
맞아요, 모짜르트는 너무나 쉽게(영화여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살리에리의 곡을 변형시켰어요. 그건 그 사람의 재능의 극히 작은 일부일 뿐, 애시당초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곡이 살리에리가 만든 곡보다 훨씬 많고 성공했죠. 천재는... 뭐랄까.. 제가 감히 뭐 어떻게 흉내내볼 수도 없는 저어어어어어어어기 어디쯤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천재로 산다는 건 어떤걸까요? 어쨌든 지금 내 삶과는 다르겠죠.... 이건 아닐거야, 이건....... 하하하하하.

- 2020-09-08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빨리 읽고 싶다...!!!...

다락방 2020-09-08 08:27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다음장도 빨리 읽고 싶은데 어제는 다른 책 읽느라 멀리했네요 ㅎㅎ
 















일전에 한나 아렌트 관련 책을 읽고 페이퍼를 쓰면서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내가 한나 아렌트 읽기를 시작하면서 한나 아렌트에게 몹시 반했던 것은, 한나 아렌트가 그 행동의 최고봉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지만, 그렇게 말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다 정체화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실제로 그런 사람이라고 보증해주질 않는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지만 거짓을 일삼을 수 있고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말하면서 불의로 가득찬 삶을 살 수도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 안에 마음을 담지 않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내가 너를 보러 가는 그 행위, 약자를 위해 몸소 나서는 그 행위. 행동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예전에 비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여성들이 많아지자 백래시도 심해졌다. 백래시 이전에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게 무슨 페미냐' 혹은 '너 페미니스트라면서 왜그래'라는 지적으로 상대의 말과 행동을 억압하려고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이 페미니스트 전체를 대표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여성 한 개인의 단점이 여성 전체를 대표하게 되듯이, 페미니스트라는 나 한 개인은 페미니즘을 대표하게 된다. 내가 그런 지적을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초반에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려 들었다.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이라는 조건을 걸고 그 사람이 다른 식으로 행동하기를, 나와 같이 행동하기를 바랐던 거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내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나는 무엇이다', '나는 누구이다'라는 선언에 앞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칭하지도 않았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가르쳤던 하이데거보다 더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이론가가 되었고,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최초의 여성 정교수가 되었다. 그녀가 프린스턴 대학의 최초의 여성 정교수가 됨으로써, 다른 여성들은 대학 교수가 여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그전까지 여성이 대학의 정교수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조차 가져보지 않았던 사람이라 해도, 한나 아렌트를 보면서 '오, 저럴 수도 있구나!'를 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한나 아렌트가 사유에 사유를 거듭하고 결국 인기 많은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의 그 삶의 과정들, 그것들이야말로 그 어떠한 선언보다 많은 것들을 세상에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보여주는 행동으로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는 영향을 미치는 사람. 그러기에 나는 너무 작고 보잘것 없는 쪼꼬미지만...




그러나 내가 한나 아렌트 읽기를 거듭하면서 내가 한나 아렌트가 깨달았던 것을 나 역시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 이미 그렇게 행동했다는 공통점을 여러개 찾아냈다. 그걸 찾아냈다고 내가 한나 아렌트같은 어마어마한 큰 사람은 되지 못하지만, 이런 비슷한 점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몹시 짜릿하다. 예를 들자면,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가장 좋은 토론 상대로 자기 자신을 선택했다. 끊임없이 자기에게 묻고 또 자기에게 답한다. 이 세상에 자신이 진정으로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라고 생각한 거다.



와... 이거 진짜 내가 잘하는건데.

사실 나는 한나 아렌트처럼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 내가 묻고 내가 답하기 보다는, 내 안의 천사와 악마...혹은 욕망과 자제..가 싸운다고 보는게 맞겠지만. 나는 그저 쪼꼬미... 이 세상의 찌끄러기..


- 토요일 와인 안주 결정했어?

- 내 생각에 소고기가 좋을 것 같은데.

- 그보다 색다른 건 없어?

- 글쎄. 조금 더 생각해볼게.



이정도의 대화라든가,


- 그를 향한 마음이 너무 커.

- 집어 넣어.

- 포기가 안되는 걸.

- 그러다 너만 상처 받아.

- 상처가 꼭 나쁜 건 아니잖아? 이대로 사는 것보다 낫지 않아?

- 그건 그래. 그럼 지르자.

- 넌 나와 싸우는 거 맞니?
- 싸우지말자. 에너지 빨려..



이정도의 대화라든가.




게다가 나는 누누이 이 공간을 통해서도 얘기해왔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내가 생각하고 예측한대로 세상이 흘러가겠지만,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그래서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나는 이걸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자주 얘기하곤 하는데, 아빠랑 대화하다가도,


"아빠, 세상은 아빠 혼자 사는 게 아니라서 그래.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잖아. 다른 사람은 아빠처럼 생각하지 않고. 그러니 어떻게 예측대로 되겠어."


라고.


한나 아렌트 역시 벽의 물얼룩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공교롭게도 '발터 벤야민'의 형상을 가진 그 물얼룩은 한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이렇게 생각해보게. 만약 이 세상에 자네 혼자밖에 없다면 자넨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어.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대로 이행하면 되니까. 그런데 작은 문제가 있지. 자넨 혼자가 아니야. 지구상의 어딜 가든지 다른 사람들로 가득하거든. 게다가 전부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다른 일을 하지. 그럼 미래를 예측하기가 훨씬 어렵겠지?" -p.190



아아...나는 순간순간 한나 아렌트이고 발터 벤야민이고 그랬던 것인가... (네?)




발터 벤야민은 한나와 그녀의 남편인 '블뤼허'가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발터 벤야민은 한나 아렌트와 매우 친했고, 그래서 그가 쓴 어떤 원고는 '한나 아렌트만 읽어볼 것'이라고 써있기도 하다. 그는 한나 아렌트에게 때가 되면 읽어보라며 그 원고를 전했고 그 후에 자살했다. 발터 벤야민은 한나 아렌트 부부의 공통 지인, 공통 친구였기 때문에, 한나와 그녀의 남편 블뤼허는 그가 죽은 뒤에도 그에 대해 함께 얘기할 수 있다. 벽의 물얼룩을 보고 '발터 벤야민 같다'고 한 것도 블뤼허다. 나는 이런 식의 대화가 너무 좋았다. 서로 사랑해서 함께 하는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둘만의 언어를 만들고 둘 만의 농담을 만들겠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떤 설명없이 '이거 저거 같지?' 물으면 '응 그러네' 라고 답할 수 있는 이런 분위기. 게다가 한나 아렌트는 결혼과 이혼을 겪고 두번째 만난 남편 블뤼허가 너무 좋다. 아니, 결혼하고 나서 둘이 너무 좋다고 막 이래.





나는 이런 거 진짜 너무 좋다. 상대를 좋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순간 좋다는 것을 끊임없이, 쉼없이 표현하는 것. 너무 좋아, 나도 좋아, 너도 좋아? 응 좋아. 이렇게 계속 얘기하는 것. 표현하는 것. 좋다는 감정이야말로 표현해야 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서 저렇게 너무 좋아, 나도 좋아, 하는 게 진짜 너무 짜릿하게 좋은 거다. 이렇게 계속 좋다는 마음을 표현해주면 상대는 그런 나로 하여금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걸까'라는 의심 자체를 갖지 않게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있는 거다. 내가 이런건 또 기똥차게 잘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걸 너무 잘 안다. 사랑해, 라고 하면 '알아'라고 할 수 있게끔 내가 한다. 내 조카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사랑을 잘하고 표현을 잘하냐면, 이렇게나 어린 조카도 내 마음을 안다니까?



각설하고.



한나 아렌트에 대해 얘기하자면 하이데거 얘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 일전에도 한나 아렌트 관련 페이퍼 쓰면서 하이데거 겁나 씹었던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정말이지 씹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어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으러 온 한나에게, 그녀보다 두 배 나이가 많고 유부남이면서 자식도 있는 하이데거는, 쪽지를 보내는거다!




저 쪽지의 모든 구절이 싫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의 다락방이고 저 당시의 한나 아렌트가 아니기 때문에, 한나는 저 쪽지로 마음이 움직이고 하이데거의 연인이 되며 아주 오랜 시간 그를 가슴에 품고 산다. 그는 오랜동안 그녀의 중심 축이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하고 나서도 그를 만나러 가는데, 이 하이데거 자식은 자기 와이프에게 한나 아렌트와 자신의 관계를 얘기하고 또 같이 만나기도 해. 하이데거의 아내인 '엘프리데'는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 빡쳐..




하아.

게다가 하이데거가 얼마나 한심하냐면, 한나 아렌트는 이미 스승을 뛰어넘는 정치이론가가 되어있었단 말야. 미국에서 최고 인기 정교수가 됐단 말야.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이 한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나를 뛰어나다고 평가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이데거야, 그거 아니야. 청출어람은 이미 진작에.... 그걸 볼 수 있어야 해..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는 하이데거.. 그러나 자기가 잘난줄 아는 하이데거...



.......................




한나 아렌트의 이 책, 《한나 아렌트, 세번의 탈출》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장면을 꼽으라면, 당연히 열네살의 한나가 칸트를 다 읽고 칸트가 읽은 책까지 다 읽어버리겠다고 다짐하는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아니 너무 좋잖아? 그림도 너무 딱이다.


열네살에 이미 칸트를 완독한 한나가, 당시의 저명한 학자들이며 예술가들과 토론하고 또 그들의 책을 읽었던 한나가, 프랑스에서는 세상에,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경감을 읽는다! 오오, 매그레 경감을 읽어?

나도 아직 안읽었는데. 그거 유명한 거 알지만, 나는 어쩐지 별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단 말야?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기지를 발휘해 경찰의 눈을 피하고 무사히 프랑스를 탈출하게 된다. 블뤼허는 '그 때 어떻게 그런 탈출을 생각했냐'고 묻자, 한나는 '내가 매그레를 왜 읽었겠니?' 답하는 거다. 오, 한나 짱!!




소설 하나도 허투루 읽지 않고 모든게 다 계획적인 한나 아렌트님... ♡

갑자기 매그레 경감 읽어보고 싶어서 어제 막 검색했는데 이제 그 시리즈 안나오나봐...










그러자 조르주 심농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뭐라고 했었는데...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았다. ㅋㅋㅋ 하루키는 심농이 호색한으로 유명했다면서 자신의 에세이에서 심농을 언급했다.




심농 씨 본인은 노벨문학상을 노렸던 모양인데 결국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건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삼 년 전 누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심농이 섹스마니아였다는 것은 전설이 되어 문학사에 찬연히(는 아닌가) 빛나고 있다. (p.122)










한나 아렌트를 읽는 일은 즐겁다. 이 책 속에서는 하이데거를 개새끼라고 부르고 ㅋㅋㅋ 아도르노를 여우같다고 하는 동시대 학자들도 나오는데 ㅋㅋㅋ 웃김. 어쩌면 내가 숱하게 욕하는 주변의 누군가가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누군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후대에 남길 이름 생각하지 않아도 딱 떠오르는 욕할 사람들 ... 지금도 너무 유명한 사람들이네.




그나저나 한나 아렌트는 칸트를 읽고나서 칸트가 읽은 책들까지 읽어보려고 하다니,

나는 한나 아렌트를 읽으면서 매그레 경감을 찾아 읽어야겠다. 무릇 독서란 그런 것이 아닌가...


이제 한나 아렌트에 관련된 다른 책들을 또 사고 읽어봐야지. 일단 찜해둔 것은 이렇게 두 권.


















나도 천천히 다 읽어볼거다. 한나 아렌트를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읽었던 것들을.

인생은 이토록 수많은 목표들로 혹은 미션들로 가득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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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9-04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요, 오늘 페이퍼요. 딱 제가 좋아하는 페이퍼입니다. 한나 아렌트 겁나 좋고요, 책 쌓고 그 위에 앉은 열네살의 한나 그림을 다락방님 방에서 보는 것도 너무 좋아요. 하이데거 씹는 것도 좋고, 그리고 다른 책으로 연결되는 것도요.
완벽한 페이퍼네요. 페이퍼가 갖춰야할 걸 다 갖췄어요. 정보, 재미, 교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완벽한거 아닙니꽈!!!!!!

2020-09-04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9-06 16:09   좋아요 0 | URL
후훗 역시 글은 내가 좋아서 쓰지만 남도 즐겁게 읽어주면 행복이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님께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어 제가 기뻐합니다. ㅎㅎ
열네살의 한나가 무려 칸트를 쌓아두고 읽고 칸트가 읽은 책까지 다 읽으려 한다는 건 정말 너무 짜릿하지 않아요? 제가 좀 더 어릴 때 한나 아렌트를 읽고 알았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여러가지로 후회되는 삶이에요, 제 삶은... 왜 어릴 때 더 공부하지 못했나. 왜 고작 이런 사람밖에 될 수 없었나... 그렇지만 제 남동생이 말했듯이, 지금의 저는 제가 발현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모습일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밀댓글님/ 저는 어제 예스24에서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샀습니다. 아직 배송되진 않았지만... 천천히 한 권씩, 뭔가 덜 어려워보이는 것들부터 읽어가면서 한나 아렌트를 좀 더 알아가고 싶어요. 책장에 특별히 한나 아렌트 칸을 마련해두고 싶습니다. 지금은 고작 세 권뿐이고 그마저도 한나 아렌트의 책들에 비하면 입문서랄까, 쉬운 책들이지만, 한권씩 한권씩 늘려가고 채워가는 것이 제 인생의 작은 목표가 되었습니다. 비밀댓글님께도 숙제가 될 것 같다면, 그 숙제 우리 함께 해나갑시다!

건조기후 2020-09-04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븐(?) 다락방님이 아니다! ㅎㅎㅎㅎㅎ 다락방님이 한나 아렌트보다 훨씬훨씬 짱이에요. 비록 안주의 선택앞에서 자아와 토론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ㅎㅎㅎ ❤️❤️

다락방 2020-09-06 16:10   좋아요 0 | URL
힝 감사해요. 오늘 진미채 다듬으면서 내가 잘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여러차례 쉬었는데, 건조기후님의 이 다정한 댓글을 읽으니 불끈, 열심히 살아보자 생각하게 되네요. 오늘은 오늘의 족발을 먹겠습니다. 빠샤!
 
코스타리카 라스 로마스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주문한 커피가 도착해서 개봉해 마시기 직전까지 얼마나 설레이는지 모른다. 이 커피는 어떨까? 하는 기대감이 내 온 몸을 적셔...

오렌지와 메이플시럽 향은 맡지 못했지만 산미는 익숙해서 좋고 이틀전에 로스팅한 커피의 향도 굿이다.
좋다, 좋으다.. 생각하며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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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03 07: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몰랐어요~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걸....으흠..... ♪♬


어쩐지 이 노래도 생각나고...

수이 2020-09-03 09:39   좋아요 0 | URL
주문 들어갑니다~~~

다락방 2020-09-03 09:45   좋아요 0 | URL
제가 로스팅한 건 아니지만 맛있게 드세요, 수연님~

잠자냥 2020-09-03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커피 나왔군요! 근데 이거 8월 31일 로스팅인 거 같은데... 그렇다면 그새 또 책을 사셨군요?!!! ㅋㅋㅋㅋㅋㅋ
저도 마셔보고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노래 나오는지 한 번 마셔보겠습니다~!
130원 투척되면 저도 포함된 줄 아세요...

다락방 2020-09-03 10:0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제가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아서 ㅋㅋㅋㅋㅋㅋ책은 한 권 주문해서 같이 왔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도 나름 양심이 있으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드셔보시고 어떤 노래 나오는지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