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고전의 특징이겠지만, 오래 읽히다 보니 개정판 나올 때 서문 나오고 10년 됐을 때 서문 나오고..아주 서문들로 파티를 벌인다. 이 책도 10주년 기념 서문에 개정판 서문에 난리 난리 대난리. 어제 유난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앉아서 이 책을 펼쳤는데 서문이 끝이 안나고 내 눈은 자꾸만 감긴다. 왜 읽어도 읽어도 서문인것인가. 지난 3월의 도서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때처럼 서문이었다가 서문이었다가 서문일 것이었다가...


아, 너무 졸려..서문만이라도 다 읽고 자려했건만 안되겠다, 서문이 끝이 안나는걸. 나는 서문 읽기를 포기하고 잠을 잤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서문을 드디어(!) 다 읽었는데(폭죽 팡팡-), 하하하하. 난 몰랐지요. 서문 다음에 <들어가는 말>이 나올줄은...


본문...

언제 나와요? (그렁그렁)



자, 드디어 본문에 들어갔다. <01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 이었다. 나는 결혼을 한 적이 없지만, 이 책의 처음부터 나오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하겠다. 자, 일단 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알아보자.




한동안은 명확히 보지 못했지만, 나는 조금씩 오늘날 미국 여성들이 삶을 꾸려가는 방식에 뭔가 아주 잘못된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를 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에 내 능력과 교육을 사용하면서, 한 남편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반쯤은 죄책감을 느끼고 반쯤은 열의가 없는 내 삶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것을 처음으로 감지했다. (p.53)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문제를 느낀 여성들은 결혼 생활이나 자기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성들은 자기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엌 바닥에 윤을 내면서 불가사의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자기는 어떻게 된 여성이란 말인가? 그런 여성은 자기 불만을 인정하는 행동을 너무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같은 불만을 지니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남편에게 말해보려고 애썼지만 남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조차도 정말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15년 넘게 미국 여성들은 섹스보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훨씬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조차 이런 증상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랬듯이 정신과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러 간 어느 여성은 "무척 수치스러워요" 또는 "전 절망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에요"라고 말했다. 교외의 어느 정신과 의사는 불안해하며 말했다. "요새 여자들이 뭐가 문제인지 통 모르겠어요. 우연찮게도 환자가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겠어요. 성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도 알겠는데……."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대체로 정신과 의사에게 가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다. "정말 문제될 게 없어. 아무 문제도 없단 말이야."

1959년 4월의 어느 날 아침, 나는 뉴욕에서 15마일 떨어진 교외의 새 주택가에서 주부 네 명과 커피를 마시다가 아이가 넷 있는 엄마가 절망적인 어조로 조용히 '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 나머지 부인들은 그가 남편이나 아이들 또는 가정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문제,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문제를 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았다.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이들을 보육원에서 데려와서 낮잠을 재운 두 명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순수한 안도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p.67-68)




이것이 베티 프리단이 말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 이다. 남편들을 결코 이해시킬 수 없는 문제, 정신과 의사조차도 이해시킬 수 없는 문제, 자기 자신조차도 뭐라 이름붙여야 할 지 모르는 바로 '그 문제'. 자기 혼자만 앓고 있는 것인지, 모든게 다 준비되어 있는것 같은데, 세상이 정해둔 것들을 다 이뤘는데,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데, 그런데 왜 나는 우울하고 신경질적인지 알 수 없어 괴로운 바로 그 문제.


나는 그 문제가 바로 보바리 부인의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빵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겨울에 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바로 그 문제. 빵이 부족한 게 아니라서, 불이 부족한 게 아니라서 다른 사람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바로 그 문제.



「사실」 하고 그는 엠마 곁으로 되돌아와서는 커다란 사라사 손수건을 이빨로 물어 펴면서 말했다. 「농민들은 정말 불쌍해요」

「그들 말고도 또 있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물론이지요! 예를 들어서 도시의 노동자들이 그렇죠」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실례지만 말입니다, 내가 아는 불쌍한 가정의 어머니들은, 정숙한 여성들은, 정말이지 거의 성녀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인데 빵 한 조각 없이 헐벗고……」

「하지만 저어……」 하고 그녀는 말을 받았다(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 양쪽 끝이 일그러졌다). 「신부님, 빵은 있어도 여전히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여자들이……」

「겨울에 불이 없는 여자들」하고 신부가 말했다.

「아니! 그런 거야 아무려면 어때요?」

「뭐라고요! 아무려면 어떠냐고요? 내가 보기엔 사람이란 몸 따뜻하고 배불리 먹기만 하면……왜냐하면……결국……」

「아아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 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담 보바리》, 구스타브 플로베르,p.167)




보바리 부인은 무언가 부족해서 교회 신부를 찾았다. 그러나 신부는 보바리 부인에게 빵이 있고 겨울에 불이 있으니 문제될 게 없을 거라 확신한다. 그러자 보바리 부인은 답답하여 어쩌면 좋아, 하는 것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1857년 소설이다.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1963년 책이다. 보바리 부인이 느꼈던 문제와 베티 프리단이 느꼈던 문제는 어쩌면 살짝은 결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보바리 부인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보바리 부인이 느낀 것, 그리고 베티 프리단이 느낀 것 모두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느낀 문제들이다. 남편들도 그리고 교회의 신부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 다른 여성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문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자신의 책 《제2의 성》에서 수많은 남자 작가들을 언급하며 그들의 여성혐오적인 시선을 지적하고(대표적으로 발자크가 있다) 또 어떤 남자 작가들은 놀랍게도 여성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칭찬하기도 한다(대표적으로 스탕달이 있다). 플로베르는 남자 작가인데 이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한 바,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플로베르를 언급한 적이 있던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내가 쓴 제2의성 페이퍼를 찾아봤는데, 플로베르에 대한 건 나오지 않았다. 으윽. 책의 본문을 뒤져봐야 되는건가.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통해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언급한다.


「마님은 게린느하고 똑같네요.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디에프에서 알았던 폴레의 어부 게렝 영감님이ㅡ 딸이었죠. 표정이 어찌나 슬퍼 보였는지 이 아가씨가 그 집 문간에 서 있는 걸 보면 마치 그 집에 초상이라도 난 걸로 생각될 정도였어요. 그 아가씨 병은 꼭 머릿속에 안개가 끼어 있는 것 같은 증세였는데 의사 선생님도 신부님도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어요. 병이 심해지면 혼자서 바닷가에 나가서는, 세관 관리가 순회하면서 보니까, 파도가 밀어닥치는 자갈 위에 뒹굴면서 울더래요. 그렇던 것이 결혼을 하고 나자 깨끗이 나았다는 소문이더군요.」

「하지만 내 경우는」 하고 엠마는 대답했다. 「결혼을 하고 난 다음부터 생긴 병인걸」(《마담 보바리》, 구스타브 플로베르,p.161)


그녀는 아들을 갖고 싶었다. 튼튼한 갈색 머리의 애였으면 했다. 이름은 조르주라고 지으리라. 이렇게 사내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치 과거의 모든 무력감에 대하여 희망으로 앙갚음하는 느낌이었다.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 (《마담 보바리》, 구스타브 플로베르,p.131-132)




플로베르는 여성들에게 삶에 제약이 가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담 보바리를 통해 그걸 보여준다. 아들을 원하는 이유도 아들의 존재를 의지하고 싶다거나 좋아서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야 이 세상에서 비로소 자유롭기 때문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언급한 수많은 남자 작가들 중에 플로베르가 있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도 있다면 호의적 시선을 가졌겠구나, 생각하다가 앗! 플로베르...《미친 사랑의 서》에 나왔었잖아? 그 책, 보통의 연애를 한 사람이라면 등장할 수 없는데? 아, 세상이여. 세상엔 책이 너무나 많아서, 플로베르님 미안..난 당신의 사생활에 대한 책도 읽어버린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어떤 연애였더라? 엄마 모시고 살면서 결혼 안하고 연애했던가...단순히 그것 뿐이라면 그 책에 나오지 않았을텐데... 아 기억이 안나네 답다비...

각설하고.




'여성성 신화'는 여성이 가진 욕망을 억누른다. 여성이 살아가야 할 삶을 정해주고는, 그것이 여성들이 누려야할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이 실제 그 욕망을 본인 안에 갖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여성들은 괴롭다. 여성성 신화 대로라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렇게 내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지금은 세상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뭔가 부족하고 우울하다. 신경질이 난다. 그렇다면 나는 잘못된 것인가. 행복해야 한다는 이 삶이 나는 행복하지 않으니 미치겠다, 죄책감이 느껴진다. 베티 프리단은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인지하고 설문조사를 하고 책으로 써내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막는 것, 남편들의 아내나 아이들의 어머니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게 만드는 이것에 대해 무엇이든 적당한 이름을 붙여야 했다. 여성들이 성욕이 생겼을 때 느끼던 죄책감과 달리, 지금 느끼는 죄책감은 여성에 대한 성적 정의와 들어맞지 않는 욕구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성적 성취에 대한 신화, 바로 '여성성의 신화' 였다. (p.19)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여성학의 고전이다. 그러니 10주년 기념 서문이 나오고 개정판 기념 서문도 나올 수 있었으며 아직까지도 팔리고 있는 것일테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생각은 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읽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는 것이 힘들기 짝이없다. 학교다닐 때 전공서적들 너무 무거워서 잘라가지고 다녔는데, 과애들이 다 나 미쳤다고 했더랬다. 아이들은 제본해서 들고 다녔는데 나는 꼭 제본 안하고 서점 가서 샀거든. 근데 제본도 아닌 책 잘라서 가지고 다닌다고.... 그러다가 그것도 귀찮아서, 2,3만원 책 사두고(20년 전의 금액이라고 ㅠㅠ) 너무 무거워서 집에 두고 다녔는데(네?), '책 무겁게 들고 다니기 총량의 법칙' 같은게 있는거 아닌가 몰라. 대학 졸업하고 나서 맨날 가방 무겁게 다닌다... 인생 뭘까?




아무튼 베티 프리단이 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 그 문제에 대해서 앞으로 뭐라고 글을 쓰게될지, 책 더럽게 무겁지만 열심히 읽어보도록 하겠다. 갈 길이 멀다. 멀고 고되다. 피곤해...

책 샀고 커피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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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4-14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담 보봐리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와요. 제2의 성을 읽은 1인으로서(흠흠) 보부아르가 플로베르를 언급했던거 같기도 한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ㅠㅠ 앞으로도 흥미진진한 독서후기 기대합니다.
훌라춤은 여기서 출까봐요! 훌라훌라! 훌라훌라!

다락방 2020-04-14 10:51   좋아요 0 | URL
되게 많은 작가들을 끌어오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기에도 플로베르 있었을 것 같은데 기억이 1도 안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책 대체 왜 읽는건지 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우리가 그걸 다 기억하면 제2의 성을 썼겠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거 왜이렇게 서문 안끝나 ㅠㅠ
책은 또 왜케 무거운거야 ㅠㅠㅠ
여러분 서문은 짧게 짧게 쓰도록하자 ㅠㅠㅠ 서문 읽다가 나 늙어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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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하우스 레이크
레이철 케인 지음, 유혜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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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를 저지른 건 남자지만 도망치고 숨고 피하고 두려워하는 건 여자의 몫이다. 온갖 협박과 욕을 온 몸으로 받아가며,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강하게 단련하고, 아이들을 지킨다. 그리고 그녀 자신을 지킨다. 용기를 내고 앞으로 다가올 것에 지지 않기로 한다. 올 상반기에는 이 소설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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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누구나 악플을 들어요, 엄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요. 그냥 무시해 버려. 그럼 가 버릴 거야.˝
이 말은 아주 많은 관점에서 날 미치게 한다. 마치 인터넷이 가공의 인물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라는 듯이. 마치 우리가 애초부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반사적으로 안전을 추정하는 말은 저렇게 어린 수컷이나 하는 말이다. 여자들은, 래니 나이 정도 되는 소녀조차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세상이 정말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맹목적이며 특권적인 무지를 드러냈다.
- P53





지나는 자신의 어린 딸과 아들을 사랑하지만, 자신이 안전에 대해 가진 두려움 그리고 피해의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이 '어린 수컷'이기 때문임을 안다. '맹목적이며 특권적인 무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남자사람들도 당연히 어떤 두려움들을 갖겠지만 여자들은 거기에 남성이란 성별이 내게 가할 위험에 대한 두려움까지 추가해야 한다. 낯선 남자 혹은 익숙한 남자, 늦은 밤, 술자리.. 모르겠다, 남자들도 나름대로 꽃뱀을 만날까봐 두려워서 여성에 대한 특별한 두려움이 있을지. 아니면 스타벅스 가는 여자에 대한 두려움? 명품백을 사는 여자가 내 돈을 다 쓸까봐 갖는 두려움? 자기관리 하지 않는 뚱뚱한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책속에서 지나는 자신에 대한 스토킹을 의심한다. 그녀의 많은 걱정, 초조함, 불안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의식으로 보일 수 있다. 또한 지나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스토커는 진짜로 있었다. 그녀가 짐작한 스토커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녀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녀가 가진 두려움은 실재 일어날지도 모를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범죄는 그녀의 남편이 저질렀는데, 도망은 그녀가 치고 있다. 그녀는 범죄를 저지른 남편으로부터도 살해 협박을 받고, 남편의 추종자들로부터 살해협박을 받고, 그리고 그녀의 무죄를 믿지 않은 세상의 모든 남자들로부터도 살해 협박을 받는다. 그녀는 남편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몰랐는데. 그러나 그녀는 계속된 죄책감을 갖고 있다. 남편이 살인을 저지르는 걸 모르는채로 그의 아내로 살아서. 살인을 도운 것도 아닌데, 살인한다는 사실을 자기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한다. 그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도 저것도 다 이상했는데. 그러나 그녀가, 한 남자의 아내로 살고 또 아이들의 엄마로 살면서 그 남자의 살인을 눈치채지 못한게, 그래서 피해자들을 만든게, 그녀가 이렇게 도망다니고 숨고 두려워하고 강박증에 걸릴만큼 잘못인가. 애초에 그녀의 잘못이 있기나 했나?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남편은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정상가족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게 평범한 가장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는 이 점을 이용했다. 그녀는 이용당했다. 살인자에게 이용당했다. 그녀 역시 피해자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자기 가족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는프로포즈 받았던 순간부터 함께 살며 겪었던 순간순간들이 '그게 그게 아니었구나', '그건 잘못이었어'를 깨닫는다. 그녀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이용당했다. 그녀는 철저한 피해자였다. 그러나 이제 신분증을 위조하고 이름을 바꾸고 보안에 철저한 신경을 써야 한다. 아이들까지 지켜야 한다. 범죄는 남편이 저질렀는데 고통받고 우울하고 도망치고 초조한건 아내의 몫이다. 



왜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도망은 여자가 쳐야할까?



범죄에 있어서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쉬쉬하고 욕먹는 일이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터다. 룸싸롱에 다녀온 코로나 확진자보다 스타벅스 다녀온 코로나 확진자가 더 욕을 먹는다. 성폭행 가해자보다, 그 성폭행 가해자에게 '꼬리친' 혹은 '같이 술마셔준' 여자가 욕을 먹는다. 세상은 어떻게든 여자를 욕하기 쉽고, 그렇게 욕먹은 여자는 꼬리표를 오래 혹은 평생 달고 다닌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세상 쌍년이 된다.

범죄에 있어서만 그런것도 아니다. 우리는 무수히 들어오지 않았나. 학교에서, 동아리에서, 회사에서 사귀다가 헤어졌을 경우(혹은 결혼했을 경우)관두는 건 거의 대부분이 여자였다. 연애를 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피하는 건 여자가 해야 했다. 같이 있던 자리에서 누군가 나가야 한다면, 그건 대부분 여자의 몫이었다.





나는 몇 번의 연애를 했다. 모두 이성이었다. 일하다가 만나면서 사귀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온라인 활동을 하면서 만나게된 경우도 있었다. 자주 보고 만나면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능하지만 랜선으로 만난 인연으로도 가능했다. 당연히 아주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후회되는 만남들도 역시 가지고 있다.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 왜 내가 그런 사람과 사귀었을까, 하는 후회도 하지만 이럴 줄 몰랐는데 했던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요며칠간은 온라인에서 만난게 잘못일까, 를 오래 생각했다. 온라인이 문제인걸까. 내가 온라인으로 남자를 만나서 이렇게나 오래 힘들어야 하는걸까, 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온라인의 문제인가?


아니었다. 호감을 가지는 것은 어떤 식으로 만나든 어떻게든 시작될 것이었다. 어떤 수단이 당신과 나 사이에 있을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서는 거다. 내 친구는 학교 동창과 사귀었고 또 어떤 친구는 데이트앱으로 사귀었다. 어떤 친구는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강력계 형사(!)를 만나 결혼했고 또 어떤 친구는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알게된 남자와 결혼했다. 어떤 수단이 되었든 사귀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그게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온라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만해도 온라인을 통해서 사귀게 된 남자를 아주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그는 벼락같이 내게 내려진 기쁨이라고도 생각했으니까.




오래전에 헤어진 남자친구가 헤어졌음에도 나를 끊어내질 못한다. 문자를 보내길래 핸드폰에서 번호를 차단했다. 왓츠앱을 보내길래 왓츠앱에서 차단했다. 트윗에서 멘션을 보내길래 차단했다. 인스타를 팔로잉하길래 차단했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댓글을 달길래 내가 히스테릭한 증상을 보였더랬다. 아주 사적인 글들은 그래서 그곳에 감춰가며 쓰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차단할 수 있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차단한 셈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알라딘에서 그를 차단하지 못했다. 알라딘에는 차단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끔 내게 알라딘에 댓글을 단다. 내가 다른곳에서 차단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댓글을 단다. 그래서 생각한거다. 온라인이 문제인걸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온라인의 문제는 아니다. 온라인으로 사귄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다만, 온라인으로 만나 사귀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가 용이하다.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그저 컴퓨터나 핸드폰 앞에 앉아서 주소만 치면 되니까. 온라인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까. 어쩌면 즐겨찾기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글을 읽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가 얼마나 내 글을 자주 읽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때에는 다정한 댓글을 달지만 어떤 때에는 비꼬는 댓글을 단다. 이번에는 화가난 것 같았다. 여러곳에서 차단을 당했음에도 글을 읽는 걸 절제하지 못하고 글을 읽으면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이루어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나는 그로부터 댓글을 받으면 손이 덜덜 떨린다. 너무 두렵다. 그와 내가 사귀었던 사이이기 때문에 두렵다. 나의 어떤 사적인 면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렵다. 내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내 글이 그를 흥분시키기 때문에 두렵다. 너무 두려워서 정말로, '이럴거면 그냥 다시 그를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그와 다시 만나야 하는건 아닐까''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게 아닐까' 를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면 싫다는 내게 자꾸 말을 거는 게 아니니까. 너무 싫어서 그런 생각까지 했다. 어쩌면 그게 나은걸까, 를 묻는 내 말에 친구들이 나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했다. 그와 헤어진후 빈번하게 고민했다. 알라딘을 탈퇴해야 할까? 알라딘에서만 탈퇴하면 나에게 말을 걸 수 없을 터였다. 물론 다른 SNS 를 하는 이상, 그는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차단했다고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차단했지만, 그는 아마 다른 계정으로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알라딘을 탈퇴해야 할까? 알라딘에서 친구에게 공개로만 글을 써야 할까? 내가 그래야 할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곳에 계속 글을 쓰고 싶다. 알라딘에 차단 기능이 없지만, 나는 알라딘에 차단 기능이 나 때문에 생기기를 원하지 않을 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차단으로' 이 모든일을 해결하고 싶지가 않다. 이것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의지가 필요하다. 내가 알라딘을 탈퇴한다면, 그것이 헤어진 남자친구가 두려워서가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두려워서 내가 오래 글을 써온 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내가 이곳을 떠난다면 다른 이유여야 했고, 모두에게 건강하게 작별인사를 말한 뒤여야 했다. 나는 헤어진 남자가 댓글 다는 게 너무 끔찍해서 이곳을 떠나는 걸 하고 싶지 않다. 그러고 싶지 않다. 나는 어느 한 곳 만큼은 모두에게,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보이는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이 처음에 알라딘이었던 것처럼, 나중까지도 알라딘이기를 원한다.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면 그가 내 글을 읽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데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하는가. 나는 그러고싶지 않다. 내가 책을 읽고 내가 글을 쓰는데, 그럴 때마다 '혹시 그를 자극해서 댓글다는 건 아닐까?' 같은걸 걱정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항상 머릿속에 내가 말할 상대가 있고 그 상대에게 말하면서 글을 쓰는데, 거기에 그런 걱정 따위를 끼워넣고 싶지 않다. 그의 댓글이 달렸을 때 손을 덜덜 떨면서 심호흡하고 싶지도 않다. 그는 언젠가 내게 '너는 나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두렵다. 대체로 남자들이 '~하겠다' 하는 말들은, 대부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는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지 않다. 나는 숨고 싶지 않다. 나는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내 공간에서 그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내 공간에 오는 일은, 온라인이기 때문에 너무 쉽다.


왜 온라인으로 만난 남자를 사귀었을까. 주말 내내 나 자신을 자책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자책하고 있어서 속상했다. 왜 나는 그것이 마치 내 잘못인양 생각하는가. 그와 사귄 일, 그와 헤어진 일, 그리고 계속 이곳에 글을 쓰는 일이 나의 잘못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자꾸 내가 잘못한 걸 떠올린다. 일전에도 친구를 만나 '어디서부터 잘못한걸까', '뭘 잘못한걸까'를 얘기했더니, '니가 니 탓을 하는 게 잘못이야' 라고 했다.



이렇게 버티는 게 무슨 소용이야, 그냥 친구공개로 쓰거나 다른 계정을 만들거나 플랫폼을 옮기는 게 최선일거야, 를 빈번하게 고민했지만, 더 오래 생각했다. 아니, 그러지 않을 거라고.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떠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헤어진 남자 무서워서 이곳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온라인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이제 내 인생에 없도록 하자고. 여전히, 아직까지도, 조금은, 나는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한다. 온라인으로 만나지 말걸 그랬나, 글을 너무 쎄게 썼나. 자꾸 내게 묻는다. 그게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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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20-04-1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이 글 쓰기까지 얼마나 용기를 끌어모으셨을지 감도 안잡히네요. ㅠㅠ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0-04-13 10:43   좋아요 0 | URL
네. 등록하기까지도 많이 망설였고 쓰고 나서 지금까지도 계속 생각해요. 혹시 이 글이 나에게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요.

진심으로 잊히고 싶어요.

moonnight 2020-04-13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ㅠㅠ; 제발 좀 내버려두라는데 그게 왜 안 되는지ㅠㅠ;;;;; 다락방님 용기 존경합니다ㅜㅜ

다락방 2020-04-13 17:3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를 좀 무시했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단발머리 2020-04-1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다락방님이 내 잘못일까... 생각하는 그 순간이 너무 속상해요.
속상합니다, 너무너무 ㅠㅠ
글을 쓰고 용기내는 다락방님, 존경합니다!!!

다락방 2020-04-13 17:36   좋아요 0 | URL
저는 몇해전부터 도덕 코르셋을 그렇게나 없애자고 제 입으로 얘기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자꾸 내 잘못인가, 내가 어디에서 잘못한건가를 돌이켜보게 돼요. 살아온 습관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 같아요.

피곤합니다.

2020-04-13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13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syche 2020-04-18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락방님이 얼마나 힘들게 이 글을 쓰셨을까. 너무 마음아프고 속상해요.ㅜㅜ

다락방 2020-04-19 19:46   좋아요 0 | URL
이제 이렇게 여기에 글 쓰는 것 말고 더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ㅠㅠ
 
스틸하우스 레이크
레이철 케인 지음, 유혜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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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월요일이니(아니 벌써 오늘이다) 일찍 자려고 했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지나'는 아이 둘을 낳고 함께 살아왔던 다정한 남편 '멜빈'이 젊은 여자 열두명 이상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끔찍한 살인은 그들의 집 차고에서 일어났는데, 그녀는 남편이 그곳에서 여자를 죽이고 있을 줄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냐며 그녀 역시 공범이라고 얘기한다. 그녀는 그렇게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난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남편으로부터 살해당한 여자를 목격하게 되고, 그리고 우연히 그가 그 한 사건의 범인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녀는 그 일 자체로도 이미 충격적이었지만 그녀의 무죄를 세상이 믿지 않기 때문에 삶이 지옥이 된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계속 거주지를 옮겨야 하고 신분을 바꿔야 했다. 그렇게 거주지와 신분을 바꿔도 감옥에 있는 남편은 계속해 편지를 보내온다. 우리가 얼마나 좋은 가족이었는지, 아이들이 얼마나 그리운지, 그리고 아내를 얼마나 찾아가서 죽이고 싶은지.

지나와 아이들에 대한 협박은 비단 남편으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의 수많은 트롤들은 그녀의 행적을 쫓으며 그녀를 죽이자고, 그 아이들을 죽이자고 한다. 살인자의 아내, 살인자의 공범, 살인자의 자식들. 지나와 아이들에 대한 자료는 인터넷에서 뿌려지고 다른 잔인한 사진들과 합성되어 돌고 있다. 


그녀 자신과 그녀의 아이들을 지킬 사람은 그녀 혼자 뿐이다. 그녀가 재판을 받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맡아준 적이 있었고, 그때 아이들은 할머니와 다정하게 지내며 친해졌다. 할머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가끔 통화해서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해야 한다. 그들이 어디있는지, 어떤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 할머니에게 조차도 알려서는 안되니까. 어떤 식으로 그것이 그들을 향해 적의를 가진 이들에게 들어가게 될지 모르니까.



아이들이 자꾸 학교를 옮기는 것도 그리고 친구가 없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은 게 아니어서 지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갈등하는데, 마침 스틸하우스 레이크가 바로 앞에 호수가 보이고 한적하며 좋다. 어쩌면 이번에는, 이곳에는 정착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녀는 뛰면서 체력을 키우고 사격을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호숫가에서 여성의 시체가 떠오른다. 그 시체는, 전남편이 여성들을 살해했던 방식으로 살해되었고, 이에 지나는 용의자로 지목된다. 익명의 제보가 그녀가 호숫가 보트에 있는걸 봤다는 거짓을 말한탓이다. 이 살인으로부터 취조를 받고 집에 돌아왔는데 며칠뒤 또 호수에서 시체가 떠올랐고, 이제 그녀는 확실한 용의자가 되어 다시 경찰에게 잡힌다. 그녀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경찰서에 잡혀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의 집에는 빨간 페인트로 온갖 욕이 써있었다. 



지나는 이제야 비로소 남편과의 생활에서 잘못된 것들이 인식된다. 사실 그 때도 그게 좀 이상했더 거였는데, 그런데 내가 그냥 견디기만 했어, 하는 것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가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빠라고, 그리고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녀가 아내라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한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지 않았다는 것들을 그녀는 이제 안다. 남편의 거짓을 그녀는 그 당시에 볼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있지 않을 때, 이제 그녀는 남편이 자기에게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안다. 남편은 그녀에게 살인을 연습했고, 그녀를 길들였다. 남편은 그녀가 남편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그녀의 싫다는 말을 무시했다. 



얼마전에 읽었던 '게일 다인스'의 [포르노랜드]의 내용이 이 책에 겹쳐졌다. 남자친구 혹은 남편의 이상한 요구에 갈등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 포르노에서 본 장면을 그대로 따라하는 남자들이었는데, 왜 이런 이상한 요구를 하는지 몰라 어떤 여자들은 갈등했고, 어떤 여자들은 거부했고, 어떤 여자들은 견뎠다. '지나'는 견디는 여자였다.



멜은 자심이 숨결 놀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내 목에 끈을 감고 조르길 좋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국이 남지 않도록 부드럽고 푹신한 재질의 끈을 사용했고, 그걸 사용하는 데 전문가였다. 난 그게 너무 싫어서 그에게 자주 풀어 달라고 이야기했고, 노골적으로 거절 당했을 때는 눈앞에서 뭔가 번쩍 하다 .... 캄캄해졌다. 다시는 싫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절대 기절할 정도로 세게 조르는 법은 없었지만, 그런 상태에 매우 근접했다. 그리고 난 그걸 견디고 또 견뎠다. 섹스하는 내내 내가 산소를 갈망하는 동안 그에 의해 땅 위로 들렸다 내렸다 하면서 올가미와 사투하는 여자를 그가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학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잘못됐다고 느꼈던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아보면 그가 자신의 살인 놀이에 나를 반복해 이용했다는 생각에 .... 오싹 소름이 돋도 구역질이 난다. (p.118)



포르노를 연구한 책들을 읽으면서 항상 드는 의문이었다. 영상 속에서 여자가 남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장면, 그러니까 항문에 고추를 넣고 입안에 넣고 얼굴에 정액을 싸고 여자를 때리고 묶고 목을 조르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어떻게 한쪽 성은 '저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이것을 활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그 영상들 속에서 그것을 '서로의 쾌락'으로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쾌락이 아니라는 건, 그냥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아는게 아닌가. 트윗에서 그 수많은 짧은 영상들을 신고하면서 내가 느낀건 괴로움이고 고통이었다. 여자들이 당하는 일들은 성적 학대였다. 그런데 그런 영상을 많은 남자들은 심지어 돈을 주고 본다고 하니 미쳐버리겠는거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학대하는 걸 보면서 쾌락을 느끼고, 그리고 그걸 직접 해보고 싶어한다니. 


지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는 거다. 남편은 섹스 도중 그녀의 목을 조른다. 그녀는 싫었다. 이게 좋을 리가 없잖아. 난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섭고 끔찍한데, 나랑 섹스하는 남자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걸 견뎌야 하는걸까? 지나는 무서워서 견뎠다. 거절했다가 눈앞이 번쩍 했기 때문에. 섹스할 때 자신의 쾌락을 위해 혹은 서로의 쾌락이라는 명목으로 한 쪽의 목을 조른다는 것의 그 폭력성, 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건가? 그 불안정을 그 불안함을 그 공포를? 어떻게 다른 쪽의 목을 조르면서 쾌락을 얻고자 하는걸까.  설마 부드럽게 졸랐다고 다정하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쾌락이 그렇게나 중요한건가. 한쪽을 고통에 빠지게 할만큼. 그리고 '나는 분명 상대의 허락을 받았고 상대도 좋아했다'고 하는 남자들은 천번 만번 스스로에게 솔직히 묻고 답하기를 바란다. 여자가 정말 자유의지로 그것을 원했을지. 예스라는 답을 받기 위해 자신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를 정말이지 진지하게 돌아보기를 바란다.



그녀는 죄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살인에 한 번도 공범인 적이 없었고 심지어 남편이 살인범인지도 몰랐다. 그건 상상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녀에게 죄책감은 무섭게 따라붙는다. 왜? 그녀가 몰랐다는 것 때문에. 한 남자가 살인범이라는 걸 모르면서 그와 함께 살았고,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 때문에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다. 세상은 그녀에게 돌을 던진다. 여자들을 납치해 살인한 건 남편인데, 오히려 남편에게는 추종자가 생기고 팬레터가 쏟아진다. 그러나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죽일년이 되어 있다. 세상은 여자의 말을 믿지 않고, 세상은 여자의 죄를 더 가혹하게 평가한다. 이 책의 작가 레이철 케인은, 이 모든 여성혐오를 누구보다 인지하고 있다. 그게 이 책을 이 밤에 끝까지 읽게 만들었고, 그게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남자 연쇄살인범에게 어떤 광적이고 불건전한 끌림을 느끼는 반면, 공범인 여성은 훨씬 더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성 혐오와 독선적인 분노, 다른 이들은 안 되지만 이 여자는 망가트려도 괜찮다는 단순하고 맛있는 사실이라는 독이 들어간 수프다. 

난 결코 무죄가 아닐 테니 무죄가 된 것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p.246)




레이철 케인은, 죄없는 여자가 죽일년이 되어 계속 도망쳐야 하는 이야기를 써냈다. 아니라고 수십번 외쳐봤자 아무도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경찰도 믿을 수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돈으로 보안장치를 설치해야 했고, 사격 훈련을 받아야 했다. 자신을 지키는 일은 오로지 자신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게다가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눈앞의 적들을 물리쳤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자의 삶에 안전을 위협하는 놈은 결국 한 명이 아니기 때문에. 여자가 스토커로 의심했던 건, 여지없이 스토커였다. 레이첼 케인이 쓴 건 지나라는 인물을 만들어내 진행한 소설이었지만, 현실과 아무것도 다른 게 없었다. 여자는 죄인이 되기는 쉽고 무죄가 되긴 어렵다. 여자는 누구를 믿기도 힘들고 자기 안전은 자기가 책임져야만 한다. 




결론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더 현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한 소설이었고, 그리고 주인공은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 스스로 강해지고 또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가 겪었던 일과 그 일로 인한 트라우마까지, 소설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레이철 케인은 이걸 알고 있고, 그래서 아주 좋은 소설을 써냈다. 

"인터넷에서 누구나 악플을 들어요, 엄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요. 그냥 무시해 버려. 그럼 가 버릴 거야."
이 말은 아주 많은 관점에서 날 미치게 한다. 마치 인터넷이 가공의 인물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라는 듯이. 마치 우리가 애초부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반사적으로 안전을 추정하는 말은 저렇게 어린 수컷이나 하는 말이다. 여자들은, 래니 나이 정도 되는 소녀조차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세상이 정말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맹목적이며 특권적인 무지를 드러냈다. - P53

코너가 30분 뒤 나를 이곳에서 찾는다. 난 호수의 이 조용한 침묵, 물에 비친 달빛, 머리 위에 뜬 청명한 별들을 사랑한다. 불어오는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소나무에게 속삭인다. 위스키가 연기와 햇살의 기억이라는 근사한 대위법을 제공한다. 난 이런 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길 좋아한다. 내가 그럴 수 있을 때. - P84

"여러 가지로 감사해요."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것은 진심이다. 그는 처음부터 내게 잘해 주었다. 그냥 나 자신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인생에서.... 그것은 중요하다. 난 아버지의 딸이다가 멜빈의 아내가 되었고, 그러고 나서 릴리와 브래디의 엄마가 되었고, 그런 다음에는 많은 이들에게 법망을 피해 간 괴물이 되었다. 내 고유의 권리를 지닌, 한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나 자신을 온전히 느끼고, 그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많은 일을 겪어야 했다. 나는 그웬 프록터로 지내는 게 좋다. 그 신분이 진짜건 아니건 그녀는 충만하고 강한 사람이고, 난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 - P115

멜은 자심이 숨결 놀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내 목에 끈을 감고 조르길 좋아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국이 남지 않도록 부드럽고 푹신한 재질의 끈을 사용했고, 그걸 사용하는 데 전문가였다. 난 그게 너무 싫어서 그에게 자주 풀어 달라고 이야기했고, 노골적으로 거절 당했을 때는 눈앞에서 뭔가 번쩍 하다 .... 캄캄해졌다. 다시는 싫다고 거절하지 못했다.
절대 기절할 정도로 세게 조르는 법은 없었지만, 그런 상태에 매우 근접했다. 그리고 난 그걸 견디고 또 견뎠다. 섹스하는 내내 내가 산소를 갈망하는 동안 그에 의해 땅 위로 들렸다 내렸다 하면서 올가미와 사투하는 여자를 그가 떠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학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게 잘못됐다고 느꼈던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아보면 그가 자신의 살인 놀이에 나를 반복해 이용했다는 생각에 .... 오싹 소름이 돋도 구역질이 난다. - P118

손을 써서 일하고, 요리를 좋아하고, 준수한 외모.... 난 이 남자가 왜 이곳 호수에 혼자 와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두가 ‘사랑/결혼/아기‘라는 인생길에 순응하지는 않는다. 난 우리 아이들을 낳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그 아이들을 낳게끔 한 결혼을 후회할 뿐이다. 여전히 나는 대부분의 삶보다 나은, 외롭고 고독한 삶을 이해할 수 있다. - P148

사람들은 남자 연쇄살인범에게 어떤 광적이고 불건전한 끌림을 느끼는 반면, 공범인 여성은 훨씬 더 증오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성 혐오와 독선적인 분노, 다른 이들은 안 되지만 이 여자는 망가트려도 괜찮다는 단순하고 맛있는 사실이라는 독이 들어간 수프다.
난 결코 무죄가 아닐 테니 무죄가 된 것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 P246

"왜 날 돕고 싶어하죠?"
"당신은 도움이 필요해요. 아버지 부탁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린다. "당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일로 평가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아니까요."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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