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주는 대한민국 여성들에게 고난의 한주였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난 한 주는 더했다. 손정우는 숱한 아동성착취물이 가득한 사이트를 만들고 또 영상 제작까지 하였음에도 1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 석방되었고, 성폭력 가해자인 안희정의 모친 장례식에는 정치권 인사들이 두루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유죄를 받고 감옥에 있어야 하는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이나 유력한 사람들을 장례식에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 광경을 뉴스로 지켜봐야 할 피해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고소까지가 지난 한 주 일어난 일이다.


물론 이런 굵직한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런 대형 사건들 사이사이로 늘 있어왔던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교사가 학교 여자화장실에 불법촬영을 하기 위해 카메라를 설치했던 것도, 다투던 여성을 살해한 일도, 술취한 여성을 끌고 가 강간한 남성들에게 무죄가 선고된 일도 있었다. 일주일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니, 내 실수다. 대형 사건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피해자들에게는 평생을 안고 갈 트라우마가 될것이고 마찬가지로 똑같은 고통일 것인데.



손정우에 안희정에 박원순까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멘탈을 나가지 않도록 붙잡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는 지난 한 주 내내 멘탈을 붙잡으려 노력해야 했고, 그러다가도 아차 싶으면 멘탈이 나가버려서 눈물이 차올랐다. 대한민국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자신의 멘탈을 붙잡고 있을지 너무나 걱정되었다. SNS 에서는 다들 서로에게 격려하고 힘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연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지은입니다]는 그런 연대의 표시로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김지은이 쓴 [김지은입니다]는 내가 전혀 읽고 싶지 않은 류의 글이었다. 그래서 내내 미뤄두었고 애써 모른척 하려고 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의 피해자라는 걸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그 구체적 피해를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구체적 피해와 피해 후의 감정들을 읽어나가는 것은 결코 쉬울리 없을 테니까. 아마 많은 여자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 책 읽기를 미뤄왔을 것이고, 그리고 또 많은 여자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제는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내 짐작대로 처음부터 힘들었다. 저자는 마지막 성폭행을 당한 일부터 기록하고 있었다. 가해자가 퇴근 후의 피해자를 자신의 숙소로 부르고 그간의 성폭행에 대해 미투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 다시 성폭행을 한다. 이 일은 범죄라는 측면에서도 비난받아 마땅하고 죗값을 치러야 하지만, 이 일이 일어나는 전과 후의 배경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고약하고 괘씸하다. 범죄(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를 끝내고 나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아침에 아내가 오기로 했으니 청소를 하고 가라."(p.17) 며 청소도구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거다. 그렇게 피해자는 아내가 오기 전에 먼지 제거 테이프로 침구를 정리해야 했다. 피해자가 청소를 하는 중에 가해자는 티비를 보고 있었고, 왜 빨리 끝내고 가지 않냐며 재촉한다. 피해자는 그 날의 비참했던 상황과 마음에 대해 길지 않게 썼지만, 책 밖으로 내가 느끼는 그 비참함과 모멸감의 크기는 너무나 컸다. 사건이 드러난 후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불륜관계 혹은 연인사이라고 2차가해 했는데, 설사 그들이 연인이었다고 해도 '아내 오기 전에 청소해놓고 가'라는 말은 해서는 안될 말이 아닌가. 상대를 도대체 어떻게 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연인이었어도 개쌍놈이 하는 짓이고, 연인이었어도 어떻게 그런 놈을 만나냐고 당장 헤어지라고 했어야 할 싸가지없는 일인데, 그런데 이 일이 심지어 위계에 의한 성폭력으로 벌어진 일이다. 상대를 철저히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책장을 덮어야 했다. 사람들 이 책을 어떻게 끝까지 읽었을까, 이게 가능할까를 생각하며 한참을 쉬어야 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가해자의 편에 서 위증을 하고 모략을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피해자의 말은 구체적 증거조차도 무시되는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편에 서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이야기해주는 동료들이 있다. 그중에 영상제작에 참여했던 한 동료는 실제적으로 안희정과 함께 일하는 그 공간이 전혀 민주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얘기한다. 수평관계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그 직장 내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잘 알면서도 왜 수평적이라고 얘기들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측근들도 그렇고, (…)어떤 말씀도 올리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잘못된 것에도 아무도 나서서 얘기하지 못했다. 보이는 직업이면 보이는 직업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때로는 들어주셔야 하는데 듣지를 않았다. 제일 중요한 건 도지사가 불편하지 않은 거. 도지사가 편하게 일하는 것. (…) 마이크 차는 거 하나 말하지 못했다. 3초면 차는데, 다들 무서워하면서. 왜 이제 와서 수평적 분위기였다고 우기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 안희정은 우아하게 품위 있게 사람 좋게 민주적인 정치인으로 있는 동안 우리는 모든 스텝이 어떤 짓이라도 해야 하는,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영상 제작 직장 동료의 발언) -p.205



민주주의, 젠더, 소통을 강조했던 사람이 사실은 민주주의, 젠더, 소통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었다. 대외적으로 부르짖는 가치와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했던 일들-가족과 직장 동료들-은 자신이 추구한다고 말해오는 가치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를 드러냈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안희정의 피해자는 김지은만이 아니었는데, 이미 충남 경찰청장, 검사장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 안희정을 보면서 어떻게 자신의 피해를 드러낼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체념 말고는 답이 없었을 것이다. 이 싸움은 누가 봐도 이기는 쪽 지는 쪽이 분명하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여성들이 도덕 코르셋을 가장 먼저 벗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상대에 대한 믿음은 도덕 코르셋의 가장 강한 형태가 아닌가 싶다. 김지은은 성폭행을 당하고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가해자의 말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가해자의 말을 믿었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믿었다. 안희정 주변의 사람들, 안희정의 팬들은 민주주의를 말하는 안희정을 믿었고, 성평등을 말하는 안희정을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피해자에게 폭행으로 되돌아왔고 2차 가해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너무 잘 믿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그리고 후배들에게 말했었다. '오빠 믿지라는 말을 절대 믿지마' 라고. 오래전부터 그런 말도 무수히 해왔다. '이 남자는 달라' 는 없다고. 다른 남자는 없다. 이 남자나 저 남자나 다 똑같다. 안희정이 젠틀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그걸 부지런히 챙겨주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트빨 때문에 자기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넣고 싶지 않았던 사람, 때문에 자기 옷에 굳이 주머니까지 만들어야 했던 것은 수행 비서의 몫이었다. 




재판이 끝났다고 해서 김지은이 에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자신이 당한 성폭행을 폭로하고 난 뒤로 그녀는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했고 죽을 생각도 했다. 매일 아팠고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외출할 때 모자와 마스크는 필수였다. 낯선사람을 경계하게 됐고 핸드폰의 문자메세지 알림음에도 위축됐다. 돈벌이를 할 수 없으니 굶는 날들도 많았다. 연대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챙겨주고 찾아와주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지은이 원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도 스스로 사회에 나가 돈을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단 그녀를 돕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 책을 사고 읽는 일이 그 중에 하나가 될터였다. 인세가 들어오는 것은 경제적 도움이 될것이고, 책을 읽는 행위는 가해자쪽이 퍼뜨린 숱한 유언비어들로부터 진질을 구분해낼 수 있는 일이 될것이다.



놀랍고 다행스럽게도 김지은은 살아갈 일을 찾는다. 돈벌이도 할 수 없고 위축되는 상황에서 성폭력센터에 봉사하러 갔다가 그 일에 대한 교육을 받기로 결심하고 이수하는 거다. 



활동가의 제안으로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듣기로 결심했다. 교육 접수가 시작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접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으로 낯선 사람들과 함께 매일 같은 공간에서 수강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게다가 약 4주간 꽉 짜여 있는 커리큘럼으로 100시간을 공부하는 일이, 일상조차 어려워 병원을 오가던 내게는 벅찬 일정이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고 교육에 참가했다. 

뜨거운 여름 시작된 교육 첫날에는 강한 긴장으로 몸이 너무 아팠다. 온몸이 굳은 채로 수업을 들었다. 사실 교육 일주일 전부터 걱정에 내내 잠을 못 자기도 했다. 둘째 날에는 수업을 듣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내가 무언가를 시작했다니, 내가 공부를 하고 있다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다시 나로 살고 있는 기분이 처음으로 들었다. 피해자가 아닌 학생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p.314



쉽지 않았을텐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돕고자 마음을 먹고 교육을 듣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어 보려는 저자를 보는데 같이 힘이 났다. 앞으로도 힘을 내서 살아주기를, 단단하게 살아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게됐다. 




몇해전 직장내 회식이 있었을 때다. 직원 한 명이 음식이 나오기 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에 임원은 그에게 호되게 야단을 쳤다. '식탁 매너가 없다'는 거였다. 어디 예의를 모르고 식탁 앞에서 핸드폰을 보느냐며 소리치던 임원은, 그에게 다른 것들까지 끄집어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이 찌고 담배까지 피면 빨리 죽는다, 운동을 좀 하라는 거였다. 다른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 직원은 고래고래 임원이 지르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했고, 그런 분위기가 다른 직원들까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리고 음식이 나왔다. 회식하는 자리가 얼른 끝나기를 나를 포함해 모두가 바랐다. 임원은 다같이 먹자고 했다. 그 때 음식을 먹는 우리들에게 식탁 매너가 없는 건 누구였을까? 직원을 향해 온갖 소리를 지르고 밥 먹는 자리를 불편하게 만든 그 임원은, 스스로 식탁 매너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숱하게 드러나는 성폭력 사건 때문에 이 세상은 답이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러나 이제는 참지 않고 드러내 말하려고 용기를 내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바뀌고 있다는 생각도 더불어 하게 된다.  피해자에게 연대하겠다는 발언들에 호통치는 늙은 남자 정치인들이 있지만, 피해자에게 연대하겠다고 말하는 정치인들도 있고 언론사 기자들도 있다. 피해자에게 연대하고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중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은데, '젊은' '여성으로서' 세상의 손가락질과 호통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터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 아직도 싸가지없고 예의 바르지 못한 사람들로 호명되고 있으니까.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이 멘탈을 잡을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우선 나부터 멘탈을 잡는 일이 중요한데, 이것 저것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시도하고 있다. 지극히 사적으로는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일이 있었고, 엄마를 모시고 미술관에 가는 일이 있었다. 엄마는 평생 미술관 한 번 가보지 못한 분이셔서 이번 기회에 함께 가자고 모시고 갔다. 물론 가기 전에도 '돈 내고 가야할텐데 안가' 라고 하셨고 나는 비싸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거듭 제안해야 했다. 미술관에 가서는 너무 좋아하셨고 다녀와서는 그런데 데려가주어 고맙다는 얘기를 들었다. 운동도 방법이었다. 수시로 눈물이 차오를만큼 고통스러운 한 주였는데, 토요일에 빈야사 한 시간을 하며 땀을 흠뻑 흘렸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져 있었다. 각자의 방법으로 우리는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시위에 나가야 할 것 같아 시위를 나갔었다면 어떤 순간에는 후원을 해야 할 것 같아 후원을 했다. 이번 손정우 석방을 보면서는 여성의당에 후원금을 보냈고, 지금은 여성의당 권리당원이 될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중이다. 


각자가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고 무너질 것 같다면 뉴스나 SNS에서 멀어지는 것도 답이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나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일들도 모두 다 염두에 두면 좋겠다. 시위를 나가는 것도 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며, 김지은이 이 책을 썼던 것처럼 글을 쓰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버티는 방법이 될것이다.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이 모든것들이 한데 몰려와 무너질 것 같다면, 그 감정을 고스란히 글로 써보는 방법도 추천한다. 글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더 위안이 된다. 내 감정을 토로하고 정리하는 일이 글을 쓰면서도 가능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걱정한 건, 김지은이 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김지은은 친구들과 식구들 직장 동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응원을 받는다. 일하는 내내 너무 성실했다는 것을 증언하며 그녀의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그건 너무나 다행한 일이지만,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옆에 있어줄 가족도, 친구도, 직장 동료도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김지은은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고 성실히 일했던 사람인데, 만약 성실하게 일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래서 친하게 지낸 동료도 없다면.. 그 점에 대해 계속 걱정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김지은입니다]는 그런 사람들에게 분명 도움이 될 책이다. 책속에서 김지은은 여성운동 활동가들과 단체의 도움을 받는데, 그런 일들에 대해 모르는 것보다는 이 책을 읽고 아는 것이 훨씬 나을테니까. 일상이 무너지는 다른 피해자들이 결국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내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연대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너무 똥같다고 절망하게 되지만, 그 똥같음을 드러내주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용기를 내는 여성들, 그리고 그 여성들의 곁에 서고자 하는 연대자들. 대한민국의 정치권이나 법조계에 있는 많은 기득권의 남자들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피해자들과 피해자에게 연대하고자 하는 이 많은 여성들은 더이상 착해빠지기만 하지도 않고 참고있지만은 않으리라는 것,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살고자 한다는 것, 꼰대의 지적질에 맞서서 으르렁 거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에게도 투표권이 있다는 것. 


눈물을 삼키고 멘탈을 잡기 위해 이를 악무는 시간들이 있었고 분명 내가 느낀 건 절망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조금씩 안게 된다. 무력함을 느끼는 많은 여성들이 용기와 희망을 결국은 안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민주주의자 안희정의 정치를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던 내게는 이런 괴리가 고통스러웠다. 대선 경선 당시 그는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줄이겠다는 연설을 하며 환호받았지만, 정작 그를 위해 일하는 이들의 노동 시간에는 한계가 없었다. 안희정의 수행비서는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고 휴일도 거의 없었다. 한밤중이라도 지사의 메시지에 답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호된 질책을 들었다. 고통스러웠던 일은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이유도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안희정이 아들과 가는 요트 강습을 예약하거나 의약품을 대리 첩아받아 전달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 P105

이곳에서 나는 암묵적 제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희정의 일부 측근들은 모임이 있을 때면 대부분 안희정의 좌석 옆에 여성들을 앉게 했다. "지사님은 여자밖에 몰리." "지사님 가까이 여자가 있어야 분위기가 좋아져." "지사님의 기쁨조가 되고 싶어도 우린 남자라서 못 하니까 너희가 최선을 다해." 여성 참모들에게 그런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다. - P107

나의 미투로 세상의 무엇이 바뀔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벗어나고 싶었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고 싶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잘못을 하면 있는 그대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한 인간의 힘으로 다른 이의 인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 P118

나의 미투 이후, 안희정에게 당한 성폭력을 고백하는 다른 피해자들의 제보가 있었다. 이 두 사례 외에도 추가로 접수된 피해 사례가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신원이 노출될까 두려워, 마음으로 지지하고 동참하겠다는 의사만 밝힌 분들이었다. 다른 피해자들의 피해 사실을 들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동안 우리는 이렇게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가해자의 부담스러운 눈빛이, 불쾌한 터치가, 알 수 없는 성애적 말과 행동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고발하지 못했다. 잠재적 공포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고백으로 인해 야기될 상황을 두려워했고, 만약 그것이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피해자인 나만이 홀로 구겨지고 버려질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어려워했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작은 창을 통해서 말이다. 그 두려움이 우리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 P159

측근들도 그렇고, (…)어떤 말씀도 올리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잘못된 것에도 아무도 나서서 얘기하지 못했다. 보이는 직업이면 보이는 직업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때로는 들어주셔야 하는데 듣지를 않았다. 제일 중요한 건 도지사가 불편하지 않은 거. 도지사가 편하게 일하는 것. (…) 마이크 차는 거 하나 말하지 못했다. 3초면 차는데, 다들 무서워하면서. 왜 이제 와서 수평적 분위기였다고 우기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 안희정은 우아하게 품위 있게 사람 좋게 민주적인 정치인으로 있는 동안 우리는 모든 스텝이 어떤 짓이라도 해야 하는, 무릎 꿇고 앉아 있는. (ㅇ영상 제작 직장 동료의 발언) - P205

그 팔찌를 차게 되면, 우선 내가 사는 곳을 경찰에 공유해야 했고 해당 파출소에서 그 주변을 지속적으로 순찰하게 된다. 그 팔찌를 통해 내 위치가 작은 단위로 특정되어 실시간으로 경찰에 전송된다. 나를 보호하는 그 방식이 오히려 나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노출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위험한 상황에 처해 버튼을 눌렀음에도 정작 오작동이라도 난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 보호 장치만이 유일한 안전이라고 생각하는 피해자들도 있다. 장치 차는 것을 고민할 때 보호시설에서 이미 그것을 손에 차고 있는 다른 피해자를 본 적이 있다. 보호시설의 그 피해자는 미성년자였고, 가해자가 계속해서 찾고 있어서 그 위험 때문에 팔찌를 차고 있었다. - P252

1심 재판부는 "업무상 수직적, 권력적 관계로 인하여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지위·직책·영향력등 위력이 존재했지만 행사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력의 존재와 행사는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 P294

가해자에 대한 공포는 평생 따라다닌다고 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없어지는 감정이 아니라고 했다. 암울했다. 재판을 진행하며 2차 피해를 심하게 당했다. 가해자 측과 가해자 변호인으로부터, 직장 동료들로부터, 그리고 사회의 숱한 편견으로부터 공격당했다. 가해자 측의 피해자를 공격하는 논리와 패턴은 대부분이 흡사했다. ‘피해자다움‘.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피해자의 SNS를 모두 털어서는 왜 이날 이렇게 웃었냐며, 왜 아무렇지 않게 일했냐며 공격했다. 피해자의 삶은 잘게 분절되어 해체당했다. 성폭력을 겪었고, 문제를 제기했을 뿐인데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겪는 부당함은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이후에도 피해자는 회사와 학교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이게 내가 만난 미투 이후 피해자들이 겪는 진짜 현실이다. - P296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내 앞에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다. 죽고 싶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지만, 상황 파악과 대책을 마련할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안희정을 제어해줄 더 높은 사람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나의 대응으로 인해 어떤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충남도청의 성 고충전담 직원은 6급 주무관이었다. 안희정은 수시로 충남경찰 청장과 지역 검사장들과 통화했다. 대체 누구에게 신고를 해야 해결해줄 것인가? 아무도 떠올릴 수 없었다. - P299

활동가의 제안으로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듣기로 결심했다. 교육 접수가 시작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접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으로 낯선 사람들과 함께 매일 같은 공간에서 수강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게다가 약 4주간 꽉 짜여 있는 커리큘럼으로 100시간을 공부하는 일이, 일상조차 어려워 병원을 오가던 내게는 벅찬 일정이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을 굳게 먹고 교육에 참가했다.
뜨거운 여름 시작된 교육 첫날에는 강한 긴장으로 몸이 너무 아팠다. 온몸이 굳은 채로 수업을 들었다. 사실 교육 일주일 전부터 걱정에 내내 잠을 못 자기도 했다. 둘째 날에는 수업을 듣는데 눈물이 계속 났다. 내가 무언가를 시작했다니, 내가 공부를 하고 있다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다시 나로 살고 있는 기분이 처음으로 들었다. 피해자가 아닌 학생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했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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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4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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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작가의 책은 이번이 세번째인데 박지리 작가에게 여성은 어떤 존재인걸까? 여러차례 의문이었다.
상황을 보는 눈은 날카롭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도 대단한데 여성혐오를 끝내 버리지 못한것일까.
대기업 연수원에서 남자 동기들은 안경잡이, 회색 셔츠, 친구, 꼬마 등으로 칭하면서 왜 여자동기는 여자1, 여자2 일까. 그리고 그 여자들은 왜! 매주 생리 핑계로 봉사활동에 빠지려하고 왜! 봉사활동 가서도 바지에 진흙이 튈까 염려하는걸까? 왜 본부장에게 사적인 질문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던지고 욕을 먹을까? 너무나 전형적으로 힘든 일 안하려는 얌체같은 여자들의 전형이며 심지어 한심하다. 왜 박지리 작가는 스스로도 여성이면서 남자 화자를 내세우고 여자를 이런 식으로 뒤로 치울까?

똑똑하고 힘있는 소설인데 찜찜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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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7-09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런 표현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읽은지 벌써 오래되어 가물가물 하네요...

그렇게혜윰 2020-07-09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추천하길래 한 권 사둔 게 있는데 읽어보고 저도 한 번 판단해 봐야겠네요.
 
마스 룸
레이철 쿠시너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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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한 여자배우가 토크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첫결혼을 후회한다는 발언을 했었다. 그녀는 십대시절 유명한 남자 가수를 만나 스무살에 결혼을 했었고 이 일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알려져 한창 시끄러웠다. 게다가 그녀는 후회한다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남자 가수들의 여전한 팬들로부터도 엄청난 욕을 먹었다. 왜 스스로 한 선택이 만든 결과로 후회를 얘기하며 그 가수를 욕보이냐는 것이었다. 나 역시 십대 시절 그 가수의 팬이었고 만나고싶다, 친해지고 싶다는 당연한 사춘기적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수에 대해 잊게 됐고, 사실 그다지 팬심이란 것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그 가수의 사생활 역시도 관심이 없었다. 여자배우가 나왔던 토크 프로그램도 보지 않아 정확한 워딩을 알 순 없지만, 나는 그녀가 어린 시절에 했던 선택이 자신에게 나쁘게 다가왔다는 걸 지금은 알고, 또 그에 대해 후회하는 것 역시도 당연하다 생각한다. 지금 그 당시 기사를 검색해보니 그 여자배우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 살이라도 더 먹었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도 한 모양인데, 나는 이것도 역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사랑에 빠진게 열여섯살이었고 상대는 인기 있는 가수 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에게 '네가 한 선택인데 말 함부로 하지마, 네가 한 선택에 책임져'라고 돌려주었다. 나는 그 당시에 대중들의 이 반응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친구를 만난 술자리에서 '어떻게 십대의 여자가 한 선택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나 잔인할 수 있지?' 놀랐더랬다.



'로미 홀'은 종신형으로 감옥에 들어와 살고 있다. 그녀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사회인'이었을 때 그녀의 직업은 '스트립 댄서'였고 그녀는 아들 하나를 낳아 키우고 있었다. 그녀가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마스 룸'에서 그녀에게 '정을 줘버린' 남자 '커트'가 그녀를 스토킹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님으로 그녀의 춤을 보는 걸 즐겼으나 그 관심은 점점 넘쳐서 그녀를 미행하고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도 쳐보지만 다 소용없다. 그녀는 그가 여행간 틈을 타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 이제 그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집에 귀가해보니 현관에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쳤고 그녀는 질렸다. 그녀는 아이를 집 안에 들여보낸 후 다시 나와 그 스토커를 죽여버린다. 그렇게 그녀는 종신형을 받았다.



나는 지금 내 삶의 모습이 그동안 나의 선택들로 형성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 여기 아니면 거기의 선택에서 무언가를 분명 선택한 순간이 있었고, 그것은 내 생각과 내 결정이었으며, 그것들은 모여서 지금의 나와 지금의 나의 삶의 방식을 이루어왔다. 지금의 내 모습이 과거의 나의 선택들로 이루어진 거라면 앞으로의 내 모습 역시 지금부터 선택할 내 결정이 형성할 것이다.



로미 홀은 스토커를 죽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녀가 스트립 댄서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 스토커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스트립 댄서로 돈을 버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스트립 댄서가 되기로 했던 것은 그렇다면 그녀의 온전하고도 순수한 선택이었을까? 그녀가 스트립 댄서가 되기 전의 생활은 어땠을까? 어떤 시간들이 그녀를 스트립댄서가 되는 삶으로 데려온 것일까. 그녀의 어린 시절, 더 어린 십대에 그녀에게는 가난한 동네가 있었고 마약이 가득한 동네가 있었다. 그녀가 여기에 이른건 정말 그녀의 온전하고도 순수한 선택들 때문일까. 그녀가 부잣집 딸로 태어났어도 그녀는 스토커를 죽이고 종신형을 받게 되었을까?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스토커를 죽였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싶었지만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국선변호사가 할당되었는데, 그에게는 그녀를 지킬 의지도 딱히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고 지독하게 괴롭히던 스토커를 죽였다'는 사실을 배심원들에게 전할 수 없었고, 배심원들은 그녀가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다. 그녀에게는 종신형이 내려진다.




그런 그녀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어머니도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보살펴주기로 했으니, 이것은 그녀가 가진 유일한 위안이요 행운이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이 흐르던 어느날, 그녀는 교도관으로부터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제 일곱살이 된 아이에게 돌보아줄 어른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건 감옥안에 있는 그녀를 미치게 만드는 소식이다. 그녀는 아들의 소식을 알고 싶다. 아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누가 돌보아주고 있는지 그걸 알고 싶다. 아직 일곱살 아들의 소식을 알려달라고 그녀는 울부짖지만 교도관들은 그런 그녀에게 그러게,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살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꾸할 뿐이다.



"제 아들이에요." 내가 말했다. "이제 겨우 일곱살이에요.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제가 가봐야겠어요."

"네가 가봐야겠다고? 넌 두 번의 부정기형을 선고받았다, 홀.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내 아들이라고요. 걔가 병원에 있는데, 내가 ……"

"홀, 누군가의 어미 노릇을 하고 싶으면 사고 치기 전에 그 생각부터 했어야지." (p.205)




존스가 말했다. "넌 그애의 보호자가 아니다, 홀."

"그럼 그 보호자가 누군데요? 내 아이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겠어요."

존스가 수감실에서 멀어져갔다. 그녀의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목소리의 톤을 가다듬었다.

"제발요, 존스 교위님. 제발."

그렇게 되고 있었다. 나는 이 사디스트에게 어린 소녀의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존스가 멈춰 서고는 내게 예의를 갖춰 대하는 척 굴었다.

"홀, 힘든 일이라는 것 안다. 하지만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은 백퍼센트 네 선택과 행동의 결과야.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고 싶었으면 다른 선택을 했어야지."

"저도 알아요." (p.251)



그 누구보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고 있는 건 홀 자신일 것이다. 그 때 스토커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아들과 떨어져 살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보호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채로 저 바깥에 엄마 없는 곳에서 아이의 삶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펼쳐질 것을 스토커 앞에서 미리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스토커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토커를 죽이지 않았을 때의 선택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행복한 시간을 주는건 아니었다. 그녀가 스토커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디로 피해도 그를 마주치는 일을 계속 겪어야 했을 것이다. 피하고 도망치고 이름을 바꾸고 숨는 일들의 반복이 그녀에게 남겨졌을 것이다. 그녀가 선택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녀가 그것 말고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딱히 행복한 삶이 펼쳐지는 건 아니었다. 하나의 비극과 또다른 하나의 비극 사이에서 선택한 것은 과연 존스 교위의 말처럼 그녀의 '백퍼센트 선택과 행동'인것일까. 그녀에게 스토커가 없었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스토커가 그녀를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설사 그를 죽였어도 그녀를 변호해줄 좋은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있었다면 역시 다른 결과를 손에 들었을 것이다. 이런 로미 홀에게 교위를 비롯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건 네 선택이었잖아, 그러니 결과에 책임져'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가?




이 책은 감옥에 있는 로미 홀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녀가 있는 감옥에는 이렇게 저마다의 선택으로 감옥에 오게된 여자들이 가득하다. 사형수도 있고 곧 풀려나갈-그러나 다시 잡혀 들어올게 뻔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어떤 죄를 저질렀든, 그 순간 그 행동을 '선택'한 여자들이 지금 여기에 갇혀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 채로 뜨개질을 하고 나무를 다듬고 싸우고 약을 한다. 놀랍게도 이들 모두는 사회에 있었을 때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고 또 그들이 살아온 어린 시절도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가난, 마약, 알콜, 양부모, 폭행. 그런 환경속에서 살면서 순간순간 내린 선택들은, 이 사람들의 백퍼센트 선택이며 그렇기에 지금은 그들이 선택한 결과이므로 합당한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를 수시로 떠올렸다. 우리는 그 때 우리가 선택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선택이었을까.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의지라한들 애초에 주어지는 선택지가 달랐다면 다른 삶이 펼쳐졌을텐데, 주어지는 선택지가 다른 것은 왜 고려되지 않는가.



성매매 집결지에 서 있도록 강요되게끔 내 자신을 최초로 허락했을 때, 이상하고 역설적이게도 과감한 결단을 내린 듯한 기분이 샘솟았다. 가출 이후 처음으로 삶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느꼈듯이 말이다. 몇 년 후 과거를 돌아보고 깊이 들여다본 뒤 그 감정이 주도권 상실에 대한 반작용이었음을 자각하고는 얼마나 어리석게 느꼈는지 모른다.
성매매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성매매는 자라난 가정에서 독립하는 일반적인 나이 혹은 권장되는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독립한 10대 여성들이 흔히 진입하게 되는 삶의 국면으로 널리 인식된다.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정말 알아야 할 때는 몰랐다.- 레이첼 모랜,《페이드 포》, P96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 -레이첼 모랜,《페이드 포》, p.127



스토커를 때려 죽이는 여자가 나온다는 것 정도만 알고 봐서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자유로워지는가를 표현해줄 줄 알았다. 오랜만에 속시원해지는 책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이 책에는 자신의 선택으로 감옥에 오게된 수많은 인생이 담겨있었다.


1번과 2번 중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그렇다면 우리의 순수한 의지이며 선택인가. 1번부터 5번까지의 선택지가 있는 사람도 있고, 애초에 7번부터 100번까지의 선택지를 받아든 사람도 있다. 주어지는 선택지가 다른데도 결국 절망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네 선택이잖아, 라고 일갈할 수 있을까. 앞으로 로미 홀의 어린 아들이 받아들게 될 선택지는 어떤 것일까.


절망은 이런 식으로 반복된다. 내가 받아든 선택지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토퍼스의 칵테일 웨이트리스가 술에 취하고 약에 절어서는 박사가 팬티 옆에 찔러준 지폐 두 장이 미국달러가 아니라 그보다 가치 낮은 캐나다달러라는 사실에도 성질머리를 부리지 않던 밤이 있었더랬다. 하 하 하. 그런데 칵테일 웨이트리스가 대체 왜 달랑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을까? 그건 토퍼스 미스터리의 일부였다. 토퍼스 유일의 미스터리였다. 그는 그 미스터리를 부수고 여자를 위장순찰차로 데려갔다. 팬티를 내리고 가랑이 사이로 손을 넣었다. 여자가 제모기인지 왁스인지로 정리한 저 아래가 꼭 아이처럼 느껴졌으니, 박사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이들의 보호자이자 수호자가 아니던가. 털 없는 보지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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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7-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별 네 개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7-08 11:31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책이었고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무거운 책이었어요. 잠자냥 님 읽고나서 어떤 리뷰를 써내실지 너무 기대됩니다. 그리고,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0-07-08 11:43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추천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런 댓글을 본 적이 있어서 살짝 사볼까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사보겠습니다. ㅎㅎㅎ (땡스투는 거여유셀 다락방 님에게 ㅋㅋㅋ)

다락방 2020-07-08 11:59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스릴러 소설을 기대했다가 너무 절망적인 내용을 만나서 과연 이 절망을 추천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거든요. 그런데 절반을 지나고 나서부터 작품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자꾸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책장을 덮고 이것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고요. 잠자냥 님 이라면 이 책을 읽고 아주 좋은 리뷰를 써주실 것 같아요.

비연 2020-07-0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도착했어요. 지금 간단하게 읽고 있는 소설 하나 다 끝나면 이 책 바로 들어가려구요.

다락방 2020-07-08 12:00   좋아요 1 | URL
비연님, 책장이 쉬이 넘어가는 책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에요. 천천히 읽어보셔요.
 
















자신을 지독하게 쫓아다니는, 어딜 가나 자신보다 먼저 와있는 스토커를 죽인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대부분 스토커로 시작하고 그러나 스토커방지법이 없는 국내에서는 스토커를 신고해도 피해자가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한다. 가끔 이 나라에서는 '일단 죽어봐'라고 여자들한테 말하는 것 같다. 아니, 자주. 


책은 감옥에 갇힌 여자 '로미'가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면서 시작한다. 같이 이송되는 다른 많은 여자 죄수들, 그리고 이동한 감옥에서 만나는 여자 죄수들, 교도관, 교위,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 그녀가 여기에 이르게 된 과정들. 

아직 책의 절반 밖에 읽지 않았고 책은 시종일관 우울하고 무겁다. 그녀가 스토킹에 노출되기 전부터 그녀의 삶은 결코 밝거나 행복하지 않았으니까.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변명을 할 기회도 주어지질 않는다. 그녀가 그녀를 괴롭히는 스토커를 죽였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채로, 스트리퍼였던 그녀가 잔인하게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만이 법정에 기록된다. 국선변호사는 적극적으로 애써 그녀를 변호할 의지가 없으며, 다른 변호사를 살 돈이 그녀에게도, 그녀의 엄마에게도 없다. 시종일관 어둡고 암울하게 진행되는데, 여기에 잠깐의 농담이 등장한다.



남자 감옥에 갇힌 '박사'의 이야기가 그것인데, 박사는 감옥에 오기 전 부패경찰이었다. 부패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으며 결국 감옥에 오게된 건 살인 때문이었다. 그는 살인을 저질렀고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그는 부패경찰에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지만, 그런 그가 정말 못견디고 증오하는 건 아동성학대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감옥에 오기 전 경찰이었을 때, 아동성학대범에 대해서는 다른 경찰들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서 쏴죽여버린 적도 있다. 인간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 우리는 각가의 기준으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박사'는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그러니 경찰이라 하기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아동성학대는 그런 그조차도 결코 봐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책의 농담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박사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까, 감옥에 갇힌 박사가 농담을 한다. 무려 소개팅에 대한 농담을.








아아 시종일관 우울하게 읽고 있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진짜 농담이네. 그러나 이것은 농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좀 슬프기도 하잖아.  린다가 만약 내가 린다에요, 라고 했다면, 이야기는 그 뒤로 아주 다르게 펼쳐졌으니까. 나는 이것을 농담이라 피식 웃었다고 했지만, 그렇지만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농담일 수 없지 않은가. 비극에 또 비극을 더하는 일이 아닌가. 


굳이 소개팅이 아니어도, 나 역시 상대를 모르는 채로 약속 장소로 나갔던 일이 더러 있었다. 방금 이 문장을 쓰고서는 웃었다. 여러가지 즐거운 기억들이 떠올라서. 그중에 단연 으뜸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나는 린다가 되어서 '혹시 리처드?' 라고 물은 뒤, '난 린다가 아니에요' 하고 돌아서 가고싶었던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다. 분명 그랬다. 그렇게 나는 리처드로 짐작되는 남자를 지나쳐 지하철역 계단으로 내려가 얼른 내 몸을 숨겼다. 큰일이다. 저런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다, 어쩌지. 나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곳에 서있는 그사람 때문에 혼란스러워졌다. 우리는 전화통화를 한 적이 없었고, 이메일과 문자메세지로만 연락했던 사이었고, 그렇게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었고, (아아, 내가 그 날의 기억 때문에 자꾸 웃는다), 그리고 이메일과 문자메세지 속의 그사람은 나에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보다 어린 여성' 이었고, 그래서 나는 만나서 사회생활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선배로서(!) 많은 유용한 이야기들을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거기에서 키가 큰 남성을 본다. 어...? 이를 어쩌지? 회사에서 일이 생겨 내가 좀 늦겠다고 한터라 분명 상대가 먼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고, 비가 오고 있었고, 약속 장소 앞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고, 저 키 큰 남자 하나뿐이었다. 어........ 뭐.....뭐지? 아직 오지 않은걸까? 설마 저사람인걸까? 아니야, 나는 분명 여자랑 얘기했는걸? 일단 도망가자, 하고 나는 지하철역 계단으로 성급히 내 몸을 숨겨버린 거다. 

이대로 집에 갈까? 어떡하지? 왜 남자가 서있지? 저남자인가? 아닐거야, 나는 여자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러나 생각해보니 나랑 만나기로 한 사람이 여자라는 건 나의 '생각' 이었다. 마땅히 그러하다고 내가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지하철 역에 들어가면서 당황해서 그간 받은 이메일과 문자메세지의 내용을 마구 떠올려보았다. 기억나는대로 다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서로 '너 여자지?' 같은 걸 물어본 적도 답한 적도 없다. 나에게 상대는 그냥 당연히 여자였고, 상대가 마땅히 여자였기 때문에 나는 친근하고도 다정하게 문자메세지를, 이메일을 보냈던건데... 어쩌면 약속장소를 못찾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것일지도 몰라. 진정하자. 나는 그간 문자메세지를 나누었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우리는 한 번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목소리를 들어보자. 남자면 도망가자! 나는 오늘 남자를 만나려고 온 게 아니야! 그렇게 문자메세지 속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그쪽에서는 여보세요, 하는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 마이. 갓. 오 뻐킹쉿. 이를 어쩌지. 나는 무작정 끊을 수는 없으니 '이거 본인 폰 맞아요?' 물었다. 상대는 그렇다고 했다. 아아, 신이시여, 지금까지 저에게 무슨 짓을 하신겁니까. 저는 누구랑 이메일을 주고 받고 누구랑 문자메세지를 주고받은 겁니까. 오, 신이시여...



나는 크게 놀랐고 매우 당황했다. 이를 어쩌나.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나를 만나기 위해 퇴근 후에 내가 있는 곳까지 왔는걸. 게다가 나를 기다리기까지 했는걸. 내가 여기서 그냥 가는 것은 지나치게 무례하다.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그래서는 안된다. 나는 이 만남을 진행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깨닫는다. 뒤를 돌아 지하철역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가 서서 "혹시 리처드?"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나는 린다가 아니에요"라고 뒤돌아 뛰어가고 싶었지만, "나는 린다에요" 하고 그와 인사했다. 하아...남자일줄 몰랐어요, 라고 나는 그에게 말했고, 그는 여자일줄 알았어요, 라고 말했다. 제기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일단 삼겹살을 먹으러 가죠, 하고 가는데(응?), 그가 우산 같이 쓰자며 내 우산 속으로 쏙 들어왔다. 뭐 이런 남자가 다있지? 오늘 처음 봤는데, 지금 처음 봤는데 어딜 우산을 같이 쓰..... 우리가 나눈 메일과 문자가 우리를 친근하게 만들었나........ 아무튼 우산을 같이 쓰고 가서 삼겹살을 먹었고 소주를 마셨다. 나는 여전히 당황한 채여서 평소대로 먹지를 못했다. 인생이 내 예측과는 언제나 다르게 흘러간다고 하지만, 이건 달라도 너무 달랐잖아. 너무 개충격... 너무 당황.... 그렇게 고기를 먹고 소주를 마시는데, 그는 내게 물었다.


"다음에 만나자고 하면 저를 또 만날 생각이 있어요?" 라고.


아아, 눈앞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면 아니요 라는 답을 할 수 없지 않나... 나는 지금 이 사람이 누군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어쨌든 당황한다. 그리고 '네, 그래도 될 것 같아요' 라고 답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그 날 '저는 린다가 아니에요' 라고 해야 했을까. 어쨌든 우리는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2차로 맥주를 마시기로 한다. 너무나 당황한 나는 '오늘만 보내고 집에 가면 된다. 몇시간이면 끝나' 생각하고 있었다. '해치우자, 해치우는거야' 라고 생각하고 그와 함께 있었고, 그렇게 2차로 가는 도중에 함께 걷는데, 옆에서 너무... 남자의 육체가 느껴졌다.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혼란스럽다. 뭐지, 어쩌지, 뭐지, 어떡하지, 그렇게 2차로 가면서 그래 후딱 해치우면 돼  하였지만, 맥줏집이 휴가를 간겁니다. 여름에 맥주집이 휴가가는건 너무 당황스럽잖아요.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다른 맥주집을 찾아가게 되고 ..... 




린다가 저는 린다가 아니에요, 했을 때 아아 나는 웃으면서도 슬펐고 슬프면서도 웃었다. 나는 그 때 내 예상과 다른 시나리오가 펼쳐졌으므로 그에게 저는 린다가 아니에요 했어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만약 그랬다면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나의 리처드는 그러나 리처드였고 나 역시 내가 린다라고 인정하였으므로 1차를 갔고 2차를 갔고 미치고 뜨거운 시간을 보냈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떠서는 아, 내가 무슨 짓을 한것인가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머리털을 쥐어뜯고 이불킥을 해야만 했다. 인생은 무엇인가.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만나다 헤어지고 헤어지다 만나고를 반복하고 그는 그렇게 나의 전남친이 되었다. 그를 나의 전남친의 포지션에 둔채로 나는 그의 전여친의 포지션인 채로 우리는 몇해전에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는데,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마사지사가 '너의 남편이니?'내게 물었을 때, 나는 그분께 답했다. "아니, 그는 나의 엑스보이프렌드야."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렇게 그는 나의 엑스보이프렌드인 상태로 거기에 있었고,  그가 엑스보이프렌드인만큼 그 뒤로 나는 새로운 썸을 타는데... 그러니까 그 때가 우리가 처음 헤어진 때였나 아무튼 모르겠다 우리는 헤어진 상태였고 나는 썸을 타는 중이었고, 썸남과 치킨을 먹고 있었다. 어느 동네의 무슨 치킨집인지 1도 생각이 안나는데, 아무튼 데이트남과 치킨을 뜯으며 노닥노닥하고 있는데 문자메세지가 왔다. 아아, 리처드...였다.



<자니?>




아아,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건 뭐여 ㅋㅋ 그러니까 자니, 는 우리의 농담이었다. 그거 너무 찌질하지 않아? 하면서 우리끼리 예전에 했던 농담이었는데(너무 진부하잖아!), 그가 그걸 내게 한것이었다. 나는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앞에 앉은 데이트남에게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안자' 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 뒤의 대화가 이어질 것이었고, 앞에 다른 남자를 두고 문자메세지는 리처드와 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리처드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치킨집에서 나와 택시를 탔고 나를 집에 바래다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안자, 라고 답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린다였다. 이 썸은 이어질 래야 이어질 수가 없었다. 이래가지고서야, 원. 




저는 린다가 아니에요, 라는 농담이 웃다가 슬퍼지는 이유는 저런 일이 실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박사'는 저걸 소개팅에 대한 농담으로 소개했고, 나는 그 농담에 웃으면서 린다가 아니에요 말하고 싶었으나 린다임을 밝혔던 일을 떠올렸지만, 이 농담 후에 여러가지 일들을 얘기하고 그 후에 박사는 고백한다. 농담이 아니었다고, 자기가 리처드였다고.




린다와 리처드가 나오는 농담은 사실 박사의 것이었다. 박사 자신의 얘기. 그러나 그 얘기를 할 때면 사람들은 늘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벌어진 건 고등학생 때였다. 단 한 번의 경험이었지만 그의 사춘기 전체, 그리고 리처드 린 리처즈, 일명 박사로 알려진 그의 삶 전체는 버뱅크 매그놀리아 스트리트의 음료가판대에서 린다라는 소녀에게 당했던 그 치욕의 순간 하나로 요약될 수 있었다. 박사의 인생 이야기는 바늘귀 하나에 끼워 넣는 것이 가능했다. 전 린다가 아니에요. (p.231)




내가 그 날 계단을 내려가 그대로 집으로 가버렸다면, 그의 앞에 서서 "나는 린다가 아니에요"라고 말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누구를 그리워하고 어떤 행복을 갖고 살아가고 있을까? 이야기는 어떻게 펼쳐졌을까? 내가 린다가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면 그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 해에 말레이시아 대신 그는 어디 있었을까. "혹시 리처드?" 하고 물었을때 그가 내게 "전 리처드가 아니에요" 라고 했다면 나는 그 뒤로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그리워했을까. 그가 만약 전 리처드가 아니에요, 라고 했다면 그는 그 뒤로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됐을까. 안정감과 사랑받는 느낌과 충족되는 시간들을 그는 얼마만큼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었을까. 운명이 어떤 힘을 작용하기에 그 때 그는 리처드였고 나는 린다였을까. 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리처드이고 린다임을 인정했을까. 나는 망설이고 망설이면서도 왜, 린다가 맞다고 했을까. 


시간을 돌려도 그 날 나는 내가 린다라고 말햇을 것이다.





토요일 오전, 아빠는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계셨고, 나는 스테퍼나 좀 해야겠다 싶어서 거실로 갔다. 아빠, 내가 여기서 이걸 하면 아빠한테 방해가 될까? 물었더니 아빠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다. 


- 옆에서 나 움직여도 괜찮아? 티비보는데 집중 안되지 않아?

- 아니야. 나는 니가 내 앞에서 알짱거리는 게 좋아.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원에 가야해서 연차를 냈고 지금 나는 까페에 있다. 까페가 소란스러워도 이렇게 집중을 잘하는 내가 너무 짱이다. 나는 왜 이곳의 소란스러움속에서도 집중을 잘하지? 이제 이 책의 남은 절반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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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7-06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모레 이 책이 올거라 일단 이 페이퍼는 그 이후에 읽기로 ㅎㅎ
저도 오늘은 카페인데. <캘리번과 마녀>를 읽으려고 가져온 ㅋㅋㅋ

다락방 2020-07-06 12:52   좋아요 0 | URL
스포일러 없으니 이 페이퍼 읽으셔도 됩니다. 아니, 읽으세요 비연님. ㅋㅋㅋㅋㅋ 놓치기 아까운 페이펍니다!!

비연 2020-07-06 14: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아 막 유혹을... 아무 정보 없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큰데..ㅋㅋㅋㅋ
... 그리고 읽었는데..ㅋㅋㅋ 책 내용보다 ˝아니야. 나는 니가 내 앞에서 알짱거리는 게 좋아˝ 아버님 말씀에 카페에서 빵 터질 뻔 했나이다.. 낼모레 이 책 오면 바로 읽어야겠다! (아 나에겐 <스트레이트 마인드>가 있는데.. 흠냐흠냐. 시간이 왜 이리 모자라나)

다락방 2020-07-07 08:13   좋아요 0 | URL
저도 스트레이트 마인드와 동시 진행인데 ㅋㅋㅋ 스트레이트 마인드 내팽개쳤네요. ㅋㅋㅋㅋㅋ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얇아서 몇시간만에 끝낼줄 알았더니 며칠이 걸려도 안끝나는..

잠자냥 2020-07-06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스 룸은 곧 읽을 거라 책 내용 부분은 스킵했는데, 그래도 가끔 이 나라는 여자들에게 ‘일단 죽어봐‘라고 말하는 거 같다는 부분에서 급우울해졌어요. 아침부터 빡치는 뉴스투성이라 더 그런 거 같습니다. ㅠㅠㅠㅠ

근데 태그가 다락방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급우울에서 급방긋 ㅠㅠ 하..... 오늘 정말 심란하네요.

다락방 2020-07-07 08:14   좋아요 0 | URL
저 어제 이거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다고요. 그래서 웃으면서 작성했어요. 즐겁고 행복한 마음이었습니다. 점심 먹고 나서 남동생한테 들어 알게되고 트윗 들어갔다가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ㅠㅠ

우리는 왜 늘 이렇게 심란하고 분하고 억울해야 할까요, 잠자냥 님. 이 나라 도대체 뭐하는건가요... ㅠㅠ

잠자냥 2020-07-07 09:36   좋아요 0 | URL
한남민국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폭발할 것 같아요. 휴.......

페넬로페 2020-07-0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을 읽을 때 너무 힘들고 우울한건
이제는 좀 싫더라구요~~
일단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했는데
읽어도 괜찮겠죠!

다락방 2020-07-07 08:15   좋아요 0 | URL
저도 힘들고 우울한거 싫어요. 너무 허우적대서..
이건 읽기에 지장을 줄만큼 힘든건 아니지만 저는 아직까지는 추천을 하진 못하겠어요. 끝까지 읽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ㅠㅠ

단발머리 2020-07-0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좋아하는 페이퍼가 이런 페이퍼에요.
그 날, 그 때... 그 순간의 이야기. 만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만나게 되고, 사랑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사랑하게 되는가봐요.
너무 좋은 페이퍼다.... 아련하고 콩콩거리고 그래요. 내가 읽고 있는 ㄹㅂㅋ에 견줄만하당!!!

오늘의 문장 : 평소대로 먹지를 못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7-07 08:17   좋아요 0 | URL
신은 왜 그 때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그랬다 떨어뜨려 놓으시고 그랬다 다시 붙여 놓으시고... 왜그러셨을까요? 무슨 이유일까요? 다 까닭이 있겠지요? 지금 우리가 떨어져있는 것도... 우리 운명의 이 시점에 이게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신을, 운명을 알 수 없으니 인생이 재미있기도 하면서 고통스럽기도 하네요. 하아..인생...

앞으로도 재미난 페이퍼를 들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빠샤!

바람돌이 2020-07-06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안봐서 모르겠지만 그래도 장담하고싶어요. 다락방님 얘기구 더 재밌다고... 드음에 닉네임을 다락방 린다로 바꿔보시는것도 추천합니다. ㅎㅎ

다락방 2020-07-07 08:1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감사해요, 바람돌이님. 그리고 책을 읽으셔도 같은 감상을 가지시게 될겁니다. 제 얘기가 더 재밌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0-07-07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잼난다니까 ㅎㅎㅎ 😀

다락방 2020-07-07 08:3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여전히 기적같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2020-07-07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7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7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책은 두 번 이상씩 읽어야 하는 문장들이 많다.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들여다 보아야 한다.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고 해서 '아 이런 뜻이구나' 라고 명쾌히 이해되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나의 앎이 부족해서인가보다 싶다. 오늘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는데 대체 이 책 왜 어려울까, 하다가 이 문장을 읽고 왜 어려운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여성은 억압과 전유의 대상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추상화의 작동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 (p.72)



한 문장안에 개념어가 여러개 들어있는거다. 저 문장 자체가 지나치게 학술적이라고 해야하나. 나와 회사 동료들이, 나와 친구들이, 나와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 같은 그런 문장들이 아닌거다. 나는 지금 이렇게 저 문장을 인용하느라 다시 썼음에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지금 또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모니크 위티그는 자신 안에 많은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것이 문제인지 파악하는 것에 능한 사람이나, 그걸 알기 쉽게 표현하는데에는 영 재주가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어쩌면 모니크 위티그의 타겟은 일반 독자가 아니어서일까. '이성애 제도에 대한 전복적 시선'이라고 한다면, 사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해야 하는게 아닌가. 머리통이 터져버릴 것 같다. 우리가 여성은 억압과 전유의 대상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추상화의 작동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는게 무슨 말이여 대체.....



저렇게 어렵고 난해한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왜 흑인 페미니즘을 재미있게 읽었는지를, 에코 페미니즘은 왜 좋았는지를 떠올려보게 됐다. 그 책들은 '쉬웠'는가? 그 책들도 결코 쉬운 책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 책들은 저런 개념어가 난무하진 않았다. 에코 페미니즘은 좀 많이 나왔지만.... 뭐랄까, 그럴 경우에도 예를 들어 설명해주기 때문에 앗 뭐여 어렵잖아, 하다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니크 위티그는 얄짤없다. 저 문장에 대해 뭐 구체적 사례를 보여준다거나 저 문장을 풀어 써준다던가 하는 일은 하질 않아. 얄짤없어. 그래서 이 책은 얇지만 어렵다.

유물론적 여성, 유물론적 페미니즘... 이러는데 학창 시절 내가 공부를 잘했다면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명징하게 다가왔을까? 골치가 아픈 것이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걸 읽게 되고 그로부터 영향받아 좋아하는 걸 쓰게 된다. '영향을 받는다'는 건 그런것이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시적인 문장을 적어내려가게 되는 것처럼, 유머를 좋아하는 사람은 유머 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게 되는것처럼, 내가 보고 익혀온 것, 익숙한 것들이 나를 구성하게 되는거다. 모니크 위티그가 저런 개념어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문장을 구성하는 건, 그녀가 읽은 책들 때문이로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언어의 과학은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라캉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구조주의 토대로부터 발전한 모든 분과학문 같은 다른 과학을 침공했다.

롤랑 바르트의 초기 기호학은 언어학의 지배로부터 거의 벗어났다. (p.80)



위의 두 문장에 레비스트로스, 라캉, 롤랑 바르트 나온다. 인류학,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기호학, 언어학...관련 책들을 읽으니 우리가 여성은 억압과 전유의 대상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추상화의 작동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 같은 문장을 쓰는 거 아녀... 하아. 내가 젊은 시절에, 지금보다 머리가 더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던 시절에 레비스트로스와 라캉과 롤랑 바르트를 읽었다면 스트레이트 마인드는 나에게 껌씹기 처럼 쉬웠을까? 그녀의 사상은 전복적이라고 해도, 세상의 불평등을 파악하는 시선은 날카로웠다고 해도, 우리가 여성은 억압과 전유의 대상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추상화의 작동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주체가 된다 같은 문장을 쓰면 도대체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하아- 답답하다....



저런 어려운 문장들 때문에 읽기가 매우 더디고 무슨 말이야 씨부럴...같은 중얼거림을 몇 번 삼키긴 해도, 읽을수록 이 책은 재미있다. 이성애 깨부수자고 얘기하는 게 너무 짜릿하다. 모니크 위티그가 1935년에 태어나 2003년에 사망했는데, 1981년에 막 이성애를 파괴하자고 했으니, 아아, 그 당시 사람들은 그런 주장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여성을 만드는 것은 남성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관계, 우리가 이전에 노예 상태라고 불렸던 관계, 경제적 의무뿐만 아니라 개인적이고 물리적 의무를 의미하는 관계("강요된 거주지", 가내 강제 노역, 부부 관계의 의무, 제한 없는 아이의 생산 등), 레즈비언들이 이성애자가 되거나 이성애자로 남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탈출한 관계다. 우리는 미국의 도망 노예들이 노예제도를 탈출해서 자유롭게 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 계급으로부터 탈출한 자들이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우리의 모든 힘을 남성이 여성을 전유하는 여성 계급의 파괴에 기여해야 한다. 이것은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의 토대가 되고, 성별 사이에서 차이의 독트린을 생산하는 사회적 제도인 이성애를 파괴함으로써만 완수될 수 있다. (p.75)




여성 차별이 눈에 보이고 여성혐오를 인지하는 순간, 어쩔 수없이 당연하게도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여성의 외모를 '여성답게' 꾸미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만연한 포르노 이미지를 없애야 한다는 것. 이건 공통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들인데, 모니크 위티그도 역시 언급한다.




계급과 계급의식 없이는, 진짜 주체는 없다. 소외된 개인들만이 있을 뿐이다. 여성이 유물론적 용어로 개별 주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할 일은 레즈비언들과 페미니스트들이 한 것처럼 '주체적인', '개별적인', '사적인' 문제가 실제로는 사회적인 문제, 계급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는 여성 개인이나 주체의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폭력의 사회적 제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p.74)



섹슈얼리티는 폭력의 사회적 제도라는 것을 이해했어요, 여러분?



적어도 여성이 남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자신의 최초의 프로그래밍으로부터 탈출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원하더라도, 그녀는 남성이 될 수 없다. 남성이 되기 위해 여성은 남성의 외양뿐 아니라 남성의 의식, 즉 그의 생애 주기 동안 적어도 두 '자연적' 노예를 처분할 권리를 가졌다는 의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레즈비언 억압 형상은, 여성은 남성에 속하기 때문에 여성은 여성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식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레즈비언은 무언가 다른 것이, 비여성, 비남성, 사회의 산물이 아닌 것, 자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 되어야만 한다. (p.63)



여성이 남성에게 속하는 것이 세상의 자연스런 흐름이고 그동안 만들어둔 사회적 룰인데, 그걸 거부하는 레즈비언에 대해서 억압 현상이 일어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 사회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이 생각났다. 레즈비언을 교정해주겠다고 성폭행했던 군대의 남자.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586&aid=0000000955&sid1=001




모니크 위티그는 역시 포르노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아아, 나는 정말이지 여자들이 너무 좋다. 이렇게나 똑똑한 여자들이.




포르노그래피적인 이미지, 영화, 잡지 사진, 도시의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은 담론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 담론은 우리 세계를 기호로 덮고,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여성은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기호학자들은 담론의 체계를 해석하고 그 배치를 기술할 수 있다. 그들이 담론에서 읽는 것은 그 기능이 의미화되지 않는 기호들과 특정한 시스템 혹은 배치 요소를 제외하고는 존재의 이유가 없는 기호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담론은 기호학자들에게서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억압(정치,경제적으로)인 사회 현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억압의 한 측면이고, 우리에게 특정한 힘도 행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실질적이다.

포르노그래피 담론은 우리에게 실험되고 있는 폭력 전략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우리를 모욕하고, 우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범죄다. (p.85-86)



자연에서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불가항력적인 그 관계는 바로 이성애 관계다. 나는 이것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의무적 사회관계라고 부를 것이다. (p.87)




다 읽고 팔 수도 있을 것 같아 깨끗하게 보다가 밑줄 그을 문장들이 자꾸 보여서 마음 놓고 '내 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87쪽까지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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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7-0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시작 못했는데... 이제 해야 하나.
진지하기 볼만한 책인 듯 싶네요~ 얇다고 미뤄뒀다가는 안 될 듯.

다락방 2020-07-03 16:57   좋아요 0 | URL
저는 얇아서 몇시간만 투자해 뚝딱 읽어내자~ 할랬는데 이게 너무 어렵네요, 비연님 ㅠㅠ

수이 2020-07-0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많이 읽으셨는데요. 전 115쪽. 근데 어려워서 재독해야할듯 해요. 빨리 읽는다 해도.

다락방 2020-07-03 16:57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이 쉬이 읽히질 않네요. 저에게는 개념어가 너무 많아요. ㅠㅠ
힘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