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라 캐더의 ⌈로스트 레이디⌋는 얇은 책이라 단숨에 읽었다. 단숨에 읽고 책장을 덮고서는 그러나 오래 아련했다. 따지고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지점이 소설가가 가진 놀라운 힘이 아닐까 싶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사실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해도 그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만큼 움직일지는 작가가 써내는 오롯이 그만의 능력일 것이다. 대부분 이야기보다는 문장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뭐가 이렇게 건드리는걸까. 이야기? 문장? 확실한 건, '이 이야기'를 '윌라 캐더'가 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설레임과 욕망과 환상과 빛, 반짝임.


이성이든 동성이든 누구나 어떤 상대에 대해서 반짝반짝 빛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은 달라', '저 사람에게선 빛이 나' 하는 느낌. 누구나 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아닌데도 나에게만 유독 반짝거리고 환한 사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 그냥 보통의 사람이었구나, 빛이 사라졌구나, 하고 느낄 때도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빛이 난다고 느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그 빛이 사라짐을 느끼면서 그러나 이것이 그 사람이 한 일일까 스스로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아니, 그건 내가 한 일이었다. 그사람의 말이나 행동 외모, 뭐가 됐든 거기에 빛을 부여한 건 내가 한 일일것이다. 내가 가진 환상, 내가 가진 기대 같은 것들. 어느 순간 그것이 사라지고 내가 씁쓸해한다한들, 상대가 내게 빛을 느끼라 요구한 적도, 실망하라 요구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철도 사업 덕에 부유한 '포레스터 대령'은 스물다섯살 연하의 아내 '포레스터 부인'과 함께 여름철이면 타운의 집을 찾아 몇개월간 머무른다. 집 앞의 습지나 숲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포레스터 부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동네 소년들은 그 숲으로 소풍을 가면서 포레스터 부인을 마주치는 걸 좋아했다. 포레스터 부인은 젋고 상냥했고 밝고 환했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포레스터 보인을 좋아했다. 마을의 사람들도 그리고 포레스터 대령의 친구들도. 


마을의 소년 '닐'은 변호사인 삼촌 덕에 포레스터 부인과 친하게 지내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다. 다른 여성들에게서는 특별함을 찾지 못할 정도로 포레스터 부인을 특별하다 생각하는 닐은 그러나 포레스터 부인이 자기가 생각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빛은 사그라들고 환상은 깨진다. 포레스터 대령이 병이 들고 몸을 가눌 수 없게 되고 가진 돈도 잃게 되었을 때,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을 온전히 포레스터 부인이 하게 되었을 때, 포레스터 부인은 점차로 힘을 잃는다. 나는 결코 여기에서 이렇게 사는 걸로 만족하지 않겠어, 저기 다른 곳으로 환한 곳으로 갈테야, 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당장 헤쳐나가야 하는 눈앞의 삶은 그녀를 자꾸 이곳으로 주저앉힌다. 



이 책의 뒤에는 핏츠 제럴드가 윌라 캐더의 이 소설을 읽고 혹시 자기가 쓴 소설이 표절로 느껴지진 않을까 염려하여 윌라 캐더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윌라 캐더는 그렇지 않다고 답장을 보내준 것도 함께 실려있는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피츠제럴드를 떠올렸지만, 그러나 내가 떠올린 소설은 피츠제럴드가 걱정한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었다. 나는 피츠제럴드의 단편 <겨울꿈>을 떠올렸다. 꿈이 사라졌다고 말하던 청년이 기억난 까닭이다. 


















단편 겨울꿈에서 소년 '덱스터'는  골프장 캐디로 일하다가 부잣집 소녀 '주디'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소녀를 알고난 직후 충동적으로 캐디를 그만두고 청년이 되어 그녀를 다시 만난다. 그녀는 어릴적에 짐작했던대로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을 가진 여성이 되어있었고, 덱스터는 주디와 함께 식사를 하고 키스를 하고 자연스레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디는 그렇게 지내는 남자가 열명이 넘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지쳐서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면 다시 다정하게 대해주면서 그녀의 곁에 머물도록 했다. 그녀의 매력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남자들은 다시 다정히 대해주는 순간 일년을 버틸 힘을 다진다. 그렇게 번번이 그녀를 기다리다 잠깐 행복하고 다시 상처받고 기다리다가 결국 덱스터는 '아이린' 이란 여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아이린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고 단단했고 안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주디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 '달링' 이라고 부르면서 '나랑 예전처럼 지내자' 하고나자 아이린에게 이별을 고해버려... 오, 남자여......


그러나 주디는 그렇게 한달여쯤만을 덱스터의 옆에 있었을 뿐, '내가 아이린의 남자를 뺏을 순 없지' 이러면서 세이 굿바이 하는 것입니다. 아이린은 뭐가 된것이란 말인가... 


그 후 7년여의 시간이 흘러 덱스터는 우연히 주디의 소식을 듣게 된다. 결혼을 했고 그녀를 막대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고.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주디의 미모를 '괜찮은' 정도라고 얘기한다. 덱스터는 그가 전해주는 얘기를 듣고는 '꿈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윌라 캐더의 소설을 읽고 피츠제럴드의 겨울꿈 생각나서 다시 읽었는데, 어휴, 읽다가 나 갑자기 아이린 되어가지고 너무 슬펐다. 부대찌개를 데워야겠어 ㅠㅠ 나랑 있을 때 좋아했고 단단했고 안정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치명적 매력의 여자를 마주치고는 나에게 세이 굿바이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나. 나는 치명적 매력없는, 우선 순위가 아닌, 안정적으로 선택하는 그런 보험같은 여자인가. 나는 아이린이 되어서 너무 슬퍼가지고 ㅠㅠ 이거 왜 다시 읽었지 ㅠㅠ 막 이렇게 되었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자기가 환상을 덧씌우는 치명적 매력의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걸까? 누구나 그런 사람이 있는걸까? 치명적 매력이 후려치면 열번 슬프고 한 번 기뻐도, 그 한 번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타인을 향한 꿈을 꾼다면 그 꿈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다시 윌라 캐더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유독 슬펐다.

포레스터 부인이 힘을 잃고 빛을 잃고 사그라드는 모습이 슬펐는데, 그동안 유지되었던 그 힘이 그렇다면 남편 때문이었던 것이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닐 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불량한 청년 '아이비'가 있었다. 아이비는 십대였던 시절에도 동물을 학대했고(딱따구리 학대 장면에서 책장을 덮어야했다, 너무 괴로운 장면이었어 ㅠㅠ), 그 숲이 포레스터 부인의 것이라는 것도 마음에 안들었고, 포레스터 부인에게 대적할만한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서도 분노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불량하게 살아가면서 힘을 키운다. 어떤힘? 비열한 힘을. 그래서 남편이 앓아 눕고 돈도 없던 포레스터 부인에게 다가간다. 포레스터 부인은 그에게 자신의 땅을 임대해주고 거기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먹고살 수 있다. 남편이 몸을 움직일 수도 없게 되고 그녀가 남편과 집을 돌보면서 점점 더 정신적으로 무너지자 이 비열한 청년 아이비는 포레스터 부인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고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먹이기도 한다. 아이비가 친구들을 불러모으고 그곳에 포레스터 부인 한 명만 여자였을 때 내가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는지. 닐은 그런 그녀에게 아이비와 어울리지 말라고 말해보지만, 그러나 포레스터 부인은 아이비로부터 지금 당장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닐은  어느날, 아이비가 포레스터 부인을 뒤에서 끌어 안는 모습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이 때가 너무 속상했다. 남편이 쓰러진 것보다 이게 더 힘들었다. 그러니까 바로 저 순간이 내포하는 바로 그 의미가 너무 힘들었다. 남편이 옆에 있었을 때는 차마 어떻게 하지 못했던 여자를, 그러나 남편이 없으니까 뒤에서 자기 멋대로 만지고드는 그 남자에 대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그게 너무 비열하고 너무 싫다. 남자가 있는 여자는 만지지 못하지만 남자가 이제 없는 여자는 만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나는 그게 진짜 너무 싫다. 너무 비열하고 너무 찌질하다. 남자가 없는 여자는 존중해야 할 한 인간임을 인지하지 않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지점이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자신을 지킬 사람은 자신 하나뿐인데, 심지어 자기의 경제적인 부분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게다가 타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녀가 거기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픈 거다. 너무 아프다.



가부장제 왓더헬... 교육과 일자리의 성차별 왓더퍽........



그나저나 윌라 캐더의 책이 이렇게 세 권 있는데 다 출판사도 다르고 디자인도 다르고...나는 책장에 이 책들을 어떻게 꽂으면 되는건가염??




















"글쎄, 내 철학은 이겁니다. 사람이 날마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있으면 결국에는-말하자면, 자기도 모르게-이루게 될 거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는 말이에요. 물론, 당신이 세상에서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모르기에는, 난 탄광과 공사장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무척이나 우울한 이야기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듯이, 그 무거운 진실을 묵묵히 인지하는 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듯이. "닐, 콘스턴스. 너희가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면 말이다, 네 마음이 가장 절실히 바라는 일을 결국 이룰 거야." - P66

"왜냐하면 내가 말한 방식으로 간절히 꿈꾸는 일은 이미 성취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서부는 전부 그런 꿈에서 싹터서 자랐어요. 이주 농민들과 광부들과 건설업자들의 꿈입니다. 내가 스위트워터에 집을 짓겠다는 꿈을 꾼 것처럼 우리는 산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깔겠다는 꿈을 꿨습니다. 다음 세대들에게는 그것이 그저 일상이겠죠."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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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2-1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량 청년 아이비의 행태를 읽으면서 저는 최근에 읽은 <진주>의 이 문단이 떠올랐어요.

... 부엌에서 쥐가 나왔을 때, 온갖 동네 남자들이 어머니를 남편 없는 여자라 여겨 술에 취해 우리 가게를 찾아올 때, 그 남자들의 여인들이 어머니를 남편 없는 여자라 수군거리면서도 질투에 가득차 손님인 척 찾아올 때도, 어머니는 잠이 왔습니다.
꿈과 잠은 그녀가 쉴 수 있는 유일한 거처였기 때문입니다. 꿈에서조차 아름다운 어머니는 자꾸만 잠이 왔습니다. (40쪽)

여자의 주인은 여자인것을.... 넘 슬프네요 ㅠㅠ

다락방 2021-02-15 08:52   좋아요 0 | URL
남편이 없으면 온전한 인간으로 여겨기지 않았다는 게 너무 화가 나고 슬퍼요. 너무나 당연하게 ‘남편 없으니까 이제 내가 .. ‘라는 그 생각이 진짜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요. 싫다고 밝히는 나의 뜻은 존중되지 않고 내 옆에 누군가가 있냐 없냐로 판가름하다니.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정말 끔찍한 장면이었어요. 싫어요 ㅠㅠ

2021-02-15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2-15 08:52   좋아요 1 | URL
저도 좀전에 페이퍼 하나 쓰고 루틴회복 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옥수수를 관찰하세요 - 여성 유전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의 생각 인물다큐
크리스티아나 풀치넬리 지음, 알레그라 알리아르디 그림, 김현주 옮김 / 책속물고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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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과 세포학이 너무 좋아서 자기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는 유전학자 바버라 매클린톡의 이야기.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이 아까워 머리도 짧게 자르고 옥수수 농장에서 좀 더 편하기 위해 치마를 버리고 원하는 것에 열중하는 이야기를 보노라니 정말이지 의욕이 뿜뿜 샘솟는다. 전기를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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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한 달 살기 태국 남부 한 달 살기 시리즈
김경진.조대현 지음 / 나우출판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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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태국 여행 가이드 책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한달 살기에 대한 어떤 팁이 담겨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액티비티, 교통수단, 레스토랑 소개일 뿐...
그렇지만 또 사흘 여행가나 한달 사나, 중요한 건 먹고 이동하는 거니 더 뭐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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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2
서이레 지음, 나몬 그림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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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됨과 여자됨이 부질없다는,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이라는 걸 깨달은 정년이는 두렵지만 앞으로 나아간다. 소리도 연기도 배우는 건 쉽지 않지만, 무엇보다 여자를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고, 그렇게 여성됨을 내려놓고 나로서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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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읽으면서 이게 뭐야 나는 이 책 어떻게 읽어 두려워했다. 그래서 차마 1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어. 이미 읽은 분들의 인용문 봐도 아아 저것은 글자긴 글자로되 나에게 아무런 뜻도 남기지 못할것인가... 했고, 나는 연휴를 맞이하여 침대에 눕듯이 앉아 1장을 펼쳐 읽기 시작하는데, 얼라리여, 1장의 첫페이지부터 나로 하여금 똑바로 앉게 하고 서재로 책 들고 옮기게 하네? 자, 페미니즘 책 읽다보면 자꾸 소환되어 까이는 루소, 그가 어김없이 캐롤 페이트먼의 책에도 등장한다. 보자. 루소여..




⌈정치와 예술⌋이라는 글에서 루소는 '한 민족이 지나친 음주로 멸망한 적은 없다. 모든 민족은 여자들의 무질서 때문에 멸망한다'라고 공언한다. 루소는 술에 빠지는 것이, 다른 점에서라면 강직하고 품위 있는 남자들의 통상 유일한 결함이라고, 부도덕한 자만이 술이 증진시키게 될 무분별함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술에 취하는 것은 남자들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멍청하게 만들기 때문에 최악의 악덕은 아니다. 또한, 술은 남자들을 다른 악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므로 정체 (政體)에 대해 그 어떤 위험도 제기하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들의 무질서'는 모득 악덕을 낳고 국가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 -p.33


캐럴 페이트먼이 루소의 글을 가져온 것은 저 루소의 글을 놓고 반박하기 위함이니 뭐 내가 따로 덧붙이지 않아도 좋겠지만, 그래도 저 부분을 읽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나의 맥북을 열었다. 크르릉-


일단 '술'에 대해서라면, '술'이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건 아니라는 것에는 나도 동의하는 바다. 술은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술을 마셔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술은 기존에 내가 가진 자제력을 건드리는 역할을 함에는 틀림없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면, 그건 평소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 확률이 크다. 맨정신에 말하지 않고 눌러뒀던 감정을 술이 건드려서 말하게 했을 확률이 크다는 거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술김에'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다. 술을 먹고 갑자기 없던 감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있던 감정이 더 진해지거나 그것을 감추는게 어려워질뿐. 술을 마시고 남자들이 저지르는 그 모든 행동들은, 그러니까 기존에 그에게 잠재해있을 확률이 매우 크다는 거다. 술마셔서 나도 모르게, 취중에, 술이 그렇게 만들었어 라고 하면서 저지르는 여성을 향한 범죄들은, 술이 한 게 아니다. 술을 마신 그 당사자가 한 일이지. 술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술을 원망할게 아니라, 술을 마신 그 당사자, 그 안에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과 범죄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고야 만 그 당사자에게 벌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술에 대해서라면 한없이 관대한 대한민국 남자들은 술 핑계라면 무조건 오케이다. 술이 나로 하여금 강간을 저지르게 만들었어, 오구오구 그랬쪄여? 그러면 봐줄게염~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다. 그러나 그 술은 여자에게 있어서라면 마땅히 피해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단이 된다. 그러니까 왜 술을 마셨어? 니가 술을 마시니까 그런 일을 당하잖아, 하면서. 술은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들과 남자들의 문화 사이에서 결속을 단단히하고 여성들을 배제하거나 여성 탓을 하고 그렇게 계속 해서 여성혐오 문화를 이어가는데 중심적 수단이 된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기에 적절한 종이 아니다. 술이 그렇게 만든다면 술을 멀리하면 될텐데 그러나 여전히 술핑계를 대면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여전히 범죄를 저지른다. 술을 마시기에 되게 부족하며 부적합한 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내가 술 얘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여자들의 무질서, 루소라는 저명한 학자가 세상을 망친다고 했던 여자들의 무질서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거다. 그리고 정치.

여자들은 그들의 본성 때문에 국가 안에서 무질서의 원천이라는 합의가 있어왔다고 캐롤 페이트먼은 책에서 말한다. 무질서. 여자들은 그러니까 남자들만큼 질서적이지 못하다는 얘기다. 여자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은 남자들은 그 무질서 반대편에 서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남자들은 그렇다면 왜 무질서의 반대편에 서있을 수 있었을까.  그들은 여자들보다 더 배웠기 때문에, 교육의 기회가 훨씬 많기 때문(에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여자들의 본성이 무질서하다면, 그것이 나라를 망친다면 그 여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질서를 가르치면 어땠을까? 너는 바보야~ 라고 말하는 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바보가 되지 않게 글을 배우자, 하는 것이 그 다음의 나아갈 수순이 아니란 말인가. 오해가 있을까봐 노파심에 말하는데, 나는 여자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게 아니다. 여자들이 무질서했다면 그걸로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했다면, 그러지 않을 수 있게끔 그 대안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그런거 없이 다만 그냥 무질서해, 나라를 망쳐~ 하고 비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나. 문제가 있는데 해결하지 않고 그건 문제야, 문제지 하면 그 문제는 언제 끝나나? 안끝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루소가 하는 것은 단지 비난을 위한 비난이라는 것을. 만약 그것이 진정 문제라고 생각했다면 단순히 비난하는 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어떻게 하자는 그 다음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말이다. 도대체 여자를 향해 무질서하다고 비난하기만 하는데에서 루소가 얻는게 뭐람? 그저 아무말 내뱉은 자기안의 통쾌함 아닌가. 이렇게 나는 잘났다, 무질서한 너네들을 비난할만큼 내 안엔 질서가 가득하다, 라는 자신만의 뿌듯함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장 자크 루소'는 1712년에 태어나서 1778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이다. 잠깐 여기서 1833년의 영국을 들여다보자. 브리저튼 얘기다.

















브리저튼 가문은 총 8남매가 있다. 알파벳 순으로 이름지워졌으므로 '다프네'는 네번째 자식이자 맏딸이다. 이 시대의 '결혼적령기'에 이른 다프네는 결혼을 하고 싶고 신랑감을 찾길 원한다. 지금 사람들에게 유명한 가십지 <레이디 휘슬다운>에서는 아버지의 공작 지위를 물려받게 된 '사이먼'의 소식이 뜨겁다. '사이먼'은 다프네의 첫째 오빠인 '앤서니'와 옥스퍼드 대학 동기라고 한다. 이에 다프네 엄마는 '내 기억이 맞다면 수학 과목에서 수석을 했을거다' 라고 한다. 그러면서 왜 내 자식중에는 그런 애가 없는지, 중얼거리는데 이때 다프네가 엄마한테 말한다.



'I' m sure I would take a first if Oxford would only see fit to admit women.' -BRIDGERTON: THE DUKE &I, JULIA QUINN, p.18


"어머니도 참. 만일 옥스퍼드에서 여자를 받아 준다면 분명히 제가 수석을 차지했을 거예요." (번역본)



물론 다프네의 어머니는 너의 과외선생님 아팠을 때 내가 너의 산수 문제집 채점 해봤는데 네가 그 말할 건 아니지 농담하며 웃지만,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사이먼이 수석을 할 수 있었던 건, 사이먼이 대학을 갔기 때문이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죠? 다프네는 옥스퍼드에서 수석을 할 기회가 없었다. 물론 수학 점수가 실제로 어땠을지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옥스퍼드에서 수학과목 수석을 차지할' 기회 자체가 다프네에게 없었다는 거다. 1833년인데 말이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한쪽은 옥스퍼드에서 수학과목 수석을 차지했지 라고 칭찬을 듣고 있는데, 그것이 그의 장점이 되는데, 그와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은 애시당초 옥스퍼드에서 받아주지를 않아 '옥스퍼드에서 수석을 할지 꼴찌를 할지'에 대한 것조차 알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 루소의 '여자들은 무질서하다'는 것은 도대체 여자들에게 질서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어떤 기회를 줘봤느냐로 항변할 수 있다. 여자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은 평소 자신이 보는 여자들의 모습으로만 판단한 것이 아닌가. 그 여자들에게 다르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가, 그 여자들에게 남자들과 공평한 기회를 주었는가. 남자들이 50명 학교갔다면 여자들 50명도 학교에 보냈는가, 남자들 50명이 정치한다면 여자들 50명에게도 정치하게 했는가. 



여자들은 이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안에서 시민권을 부여받게 되었지만, 여자들이 정치적 삶에 적합하지 않으며 국가가 그들의 손에 있다면 위험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만연하다. -p.34

여자들이 정치적 삶에 적합하지 않으 국가가 그들의 손에 있다면 위험해 질것이란 믿음, 이라는 구절에서 나는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인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의 이 구절이 떠올랐다.
















빈민구제위원이 되고 나서 깨다른 것은 현행 빈민법은 그 법의 원래 목적을 실행할 수 없게 만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를 위한 조항에서도 이 법은 문제가 많았다. 그 법의 목적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성이 투표권을 가질 때까지는 새로운 법률을 만들기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 p.51



1890년대에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 교육이 문제가 있다는 것, 가난한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여성들은 정치에 참여해야 했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당시,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유가 분명 나쁜 것, 옳지 못한것을 바로 잡고자 한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지내면서 실생활에서 정말 필요한게 뭔지 자신들의 눈으로 스스로 관찰하고 확인하고 그래서 해결방법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던 거다. 계속해서 바깥생활을 하고 가사노동과 육아에서 먼 곳에 있고 남자들만이 구성원인 조직에서 일하는 남자들로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여자들이 보았던 것이고, 그것은 실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었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여성들의 손에 맡겨진다면 위험할 것이라는 저 시대의 짐작은 틀렸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명의 여성인 지도자가 잘못을 했을 때 그 여성은 다른 숱한 여성들을 대표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역시 여성을 대통령으로 뽑으면 안돼, 여자가 사장이면 안돼 같은 막말이 나온다. 트럼프가 잘못하면 그것은 남자들의 잘못으로 퉁쳐지지 않는데 한 명의 여자는 모든 여자들을 대표하고 그것은 곧 여자들의 무질서로 이어진다. 

















여성과 인종화된 소수자는 자신이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다는 사실, 아주 작은 실수조차 무능력의 증거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른바 ‘대표성에 대한 부담감‘을 짊어진다. 그들은 그 자체로 표가 나고 가시적인 그들 집단의 능력을 대표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파농은 어떻게 개인 경력 이상의 것이 ‘검둥이‘ 외과의사의 일에 달려 있는가를 설명했다. 인종화된 특정 집단의 능력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며 소수자의 일원이라는 데에 당연한 부담이 있다. 비백인도 그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일을 잘해야 하는 압박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 고위 공무원은 "못 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 편을 실망시킬 테니까요. 아시아인이 정말 잘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증명하고 싶어서 잘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공간 침입자, 너멀 퓨워, p.113)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08년에 태어나서 1986년에 죽었다. 보부아르가 루소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루소와 맞짱뜰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루소의 저 구절들을 보며 생각해보았다. 제2의 성에서 보부아르는 이렇게 말했으니까.
















세상은 여자를 부엌이나 규방 속에 가두어 두면서도 그녀의 시야가 좁은 것에 놀란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날개를 잘라놓고 그녀가 날지 못한다고 한탄한다. 만일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 준다면 그녀는 결코 현재 속에 갇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2의 성, 2권], 시몬 드 보부아르, p.776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서 남 욕 하기는 제일 쉽다.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것은 아무런 에너지도 들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그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낼 뿐이다. 아무리 배운게 많고 아무리 교육을 받고 그렇게 머릿속에 지식을 꾸역꾸역 넣어서 쌓아봤자 평소에 어떤 인식과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느냐는 다른 사람을 향한 날선 말에서 표현된다.



루소, 그는 누구인가...

어떤 책 있나 보다가 루소 책, 저거 사회계약론... 나 집에 있는 것 같다..

교육에 대한 책도 썼던데 읽어보고 싶어지네? 무슨 얘기 했을까?

에밀도 읽어보고 싶고 자서전도 읽어보고 싶다. (응?)


















그나저나 나는 여자들의 무질서 35페이지까지 읽었다.

그럼 이만..

냉동 쭈꾸미 해동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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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5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 너무 싫지 않나요 ㅋㅋ 저는 오만정이 떨어졌는데, 설에 동생들과 로얄 어페어라는 영화를 봤는 데 거기서 등장하더랍니다. 참 이 영화 락방님 보셨어요? 잉잉 ㅠㅠ

다락방 2021-02-15 08:55   좋아요 1 | URL
저는 루소를 그 이름만 알지 잘 몰라서 제대로 까기 위해 읽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는가... 생각하는 참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그 영화 안봤어요. 아무튼 루소도 싫고 무질서 읽다 보면 싫은 놈들 수두룩빽빽할 것 같아요.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