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전에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몹시 힘들어있을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그 때 나는 헤어진지 한달 된 그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문자메세지를 보냈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연락하면 반칙이지?]
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응. 반칙이야.]
나는 그래, 이러지말자, 라고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번호로 그 임을 확인한순간 나는 어쩐지 울 것 같았다.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는 받자마자 대뜸 목소리가 왜그러냐고 내게 물어왔다.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가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쯤은 알아챌 수 있는 사이였으니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 내게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었다. 나는 응, 이라고 말하고는 반칙이라며, 했다. 그는 무슨일인지 얘기해보라고 했는데 나는 힘들다고 그에게 말하고 싶었으면서 막상 무엇 때문에 힘든지 말을 못하겠는거다. 그는 내가 아무 얘기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럼 내가 얘기할까? 한다. 그래서 또 응, 이라고 했다.
"보건소에서 건강검진 받았거든. 그런데 당신 말 진짜였어."
"응? 뭐?"
"똥꾸멍에 진짜 면봉 넣었어."
나는 그 아침에 곧 울것같은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푸하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것봐, 내 말 맞잖아, 라고 하면서. 그는 회사를 옮겼고 그곳에서 건강검진 받은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다고 했다. 어느 화창한 토요일 오후, 친구를 만나러 가는길이었는데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서 자신은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가고 있다며 그 얘기를 했던 터다. 그때 나는 그에게
"보건소에서 건강검진 받는거 무료긴 한데, 똥꾸멍에 면봉 넣는대"
라고 했었다. 아, 정말 얼마나 웃었는지. 나는 어제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동집에 들렀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가 없었다. 아 제기랄. 우동 한그릇을 지금 먹어줘야 되는 기분인데, 그냥 가야 하다니. 그때 갑자기 이 면봉 사건이 생각났다. 누군가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똥꾸멍에 면봉 넣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밤에. 그러면 나는 깔깔 웃으며 기분이 어땠어? 하고 물어볼텐데. 내 기분 따위 잊을 수 있었을 텐데.
- 어제, 업무차 세무서에 들렀다. 세무서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려는데, 좀 한가해 보이는 남자 직원이 나를 본다. 그러더니 번호표를 누른다. 아무도 안왔다. 또 눌렀다. 아무도 안왔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몇번이냐고 물었다. 478번이요, 라고 나는 답했다. 내 앞에는 다섯명이 있었고 내 뒤로도 사람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직원은 내게 저한테 오세요, 제가 해드릴게요, 하는거다. 아이쿠야. 나는 살짝 주변의 눈치를 봤다. 사람들이 항의하면 어쩌지? 하고. 그러면서도 그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사실 나에게 정의로운 마음 같은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아뇨, 저는 제 차례를 지키겠습니다." 라고 말했을텐데. 그러나 나에게 정의로운 마음 같은건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그저 '역시 예쁘면 세상 살기 편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예쁘니까 특혜를 받아. 음. 이런건 뭐, 내가 어쩔 수 없으니까, 하면서 금세 업무를 처리했다.
이 일을 친구에게 말하니 친구가 내게 꽃뱀이라고 했다. 풋-
나는 어제 술을 마시던 와중에 갑자기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스마트폰으로 네이트온에 들어가, 메신저 대화명을 '역삼동 꽃뱀'으로 바꿨다. 내가 역삼동에서 남자들 여럿 흔드는구나.. ( '')
- 외근갔다 돌아오는 길, 아주 달디단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길 모퉁이의 아주 작은 테이크아웃 까페에 들러 커피를 샀다. 그런데 마침 거기서 나오는 노래가 너무 좋은거다. 언니, 이 노래 제목이 뭐에요? 누가 부르는 거에요? 라고 물었더니 까페 언니는 카리나의, 라고 말하다가 멈추고는 "적어드릴까요?" 하는거다. 그래서 네, 라고 했다. 저 이거 예전부터 가끔 들어서 제목을 알고 싶었거든요, 하면서. Karina 의 Slow motion
적립금으로 음원을 살까 하고 나의계정을 보니 나의 적립금은 260원 뿐이네. 음원 하나도 못 사는 적립금..가난한 나..
- 오래전에, 같은 공간에 있는 남자를 좋아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너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걸 종종 알렸다. 이를테면 그가 혼자 있을 때 몰래 가서 초콜렛을 주며 "하나밖에 없어서 당신만 주는거에요" 라는 식으로. 그는 처음 나를 본 순간부터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싶어했었는데-나를 좋아하지 않았었다고 했다-, 하하하하, 뭐 어쨌든. 한번은 비가 오는 아침, 그에게 아무도 안 볼 때 쪽지를 건네줬었고, 그 쪽지에 나는 이 시를 적어 두었었다.
아침 일찍부터
- 이정하
아침 일찍도 오시던군요.
그대인가 했더니, 아침 일찍도 오시는 비.
내 우울함의 시작.
그립다는 것은 그대가 내 곁에 없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런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뜻이다.
그립다는 것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내 가슴 한 쪽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립다는 것은 다시는 못할 짓이다.
- 아침 일찍부터 비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