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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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야기, 결코 끝이 날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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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11-2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일배송 받으셨군요! 저도 조금 전에 주문했어요~

다락방 2011-11-28 17:57   좋아요 0 | URL
네. 당일배송이라 구매자 표시가 뜨질 않아서 초조해요.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ㅋㅋㅋㅋㅋ
그런데 제 생각만큼 이 책은 '와 미치게 좋아 짱이야' 까지는 아니네요. 흐음.
 
당신의 61년산 슈발 블랑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차를 마시고 혼자서 영화를 보고 혼자서 쇼핑을 하는 시간들이 내게는 무척 좋고 완벽하게 느껴진다. 그 시간들이 내게는 자유롭고 행복하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영화를 보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매장에 가서 내가 사고 싶은 걸 산다는 것은 쾌감까지 선사한다. 백화점의 푸드코트에서 혼자 앉아 먹는 순대볶음은 일종의 위로다. 이런 내가 아직도 하지 못한 것이 혼자서 스테이크 먹기 이다. 영화 『사이드 웨이』에서 마일스가 혼자 햄버거를 시켜 먹으면서 자신이 가장 특별한 순간에 맛보고 싶었던 와인을 따라 마시는 장면은, 세상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축복같은 장면인데, 그 순간을 내가 나에게 선사한 것이라니, 완벽중의 완벽이 아닌가.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것, 나 혼자 하는 것. 나는 그것을 레스토랑에서 혼자 스테이크를 먹는것으로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레스토랑 앞에 가서 멈칫 하다가 이내 다시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그 동안은. 친구들과 이 얘기를 하고 있노라니 친구2가 내게 자신은 해본적이 있다며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오, 어쩐지 자신감이 생겼다. 나도 해봐야지, 하고 다짐했다. 해봐야지, 해볼거야. 혼자 레스토랑에 가서 스테이크를 미디엄레어로 시킬거야. 맥주를 한 병 곁들이거나 와인을 한 잔 곁들이는 것도 좋겠지.  

 

 

 

 

 

 

 

금요일에는 올림픽공원에서 데이트를 했다. 밤이었고 날은 추웠다. 우리는 밥을 먹었고 배가 불렀고 그래서 커피를 사들고는 호수 앞 벤치에 앉았다. 나는 바다를 보는 것보다 호수를 보는 쪽을 선호한다. 바다보다는 호수쪽이 내게는 좀 더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느껴진다. 바다는 내게 너무 벅차다. 그러나 호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것이 그 순간 거기에 있었다. 밤과, 커피와, 벤치와, 호수와, 남자가. 그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저릿해질만큼 행복했는데, 내 등뒤에 있는 까페에서는 바깥의 스피커를 이용하여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와- 정말이지 판타스틱했다. 그 음악은 아이돌들의 후크송도 아니었고 달콤한 팝송도 아니었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가사 없는 재즈 연주였으며, 그 연주가 끝나고 나온 곡은 케니지의 색소폰 연주였다. 또다른 연주곡이 그 뒤를 이었고, 하아- 나는 정말 행복해졌다. 그 순간의 공기와, 냄새와, 소리. 그 모든것들이 신이 내게 집중하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했다.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토요일에는 창원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와인을 마시고 적당히 취했다. 마트에 들러 술을 또 샀다. 숙소에 가서 밤새 마시고 놀자며 우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어떤 얘기를 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런 참에 ㅈ 로부터 문자가 왔다.  

줌파 라히리가 좋아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좋아요?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문자가 ㅈ 로부터 왔다며, 나는 대답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1은 무조건 줌파라고 했다. 하진도 이윤 리도 읽었지만 줌파만한 사람이 없다고, 자신은 자꾸만 줌파의 새 소설을 검색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친구 2는 그렇게 단정하기 힘들다고 했다. like a rainbow 를 포기할 수가 없다고 그런 문장은 정말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 나는 줌파 라히리 같은 글을 쓰고 싶지만 한 권 더 사고 싶은 책은 올리브 키터리지라고 말했다. 사무실에 꽂아두고 펼쳐보고 싶다고. 그렇지만 가장 완벽한 소설은 줌파의 지옥-천국 이라고. 친구1은 이름 뒤의 숨은 사랑은 어쩔거냐며, 그 소설도 너무 좋았기 때문에 줌파가 이겼다고 말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끝날줄을 몰랐고, 우리는 술 때문에 그리고 줌파와 올리브 때문에 흥분한 탓일까, 들고 있던 와인 두 병과, 맥주 캔 여섯 개를 무작정 바닥에 놓고, 길 한가운데에 서서 자꾸만 줌파와 올리브를 얘기했다. 어느 순간 친구2가 이제 이걸 들고 이동하자고 말했고 우리는 땅바닥에 놓여진 와인 두 병과 맥주 캔 여섯개를 다시 들고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는 숙소로 돌아가 친구의 핸드폰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들을 자꾸만 youtube 에서 찾아서 들려줬다. 엠피삼에 있던 곡들을 틀기도 했다.   

 

 

 

 

 

그리고 일요일. 오, 그 일요일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창원의 한 까페로 움직이던 그 길. 운전하던 친구는 이 노래를 들어봤냐며 카오디오를 플레이했다.  

 

 

꺅. 아니아니, 이건 뭐야, 이건 뭐지! 제이슨 므라즈의 목소리가 원래 이토록 완벽했었나? 그의 발음도 그가 내뱉는 영어들도 근사하다. 그는 1977년생의 미국에서 태어난 남자이니 영어를 쓰는것은 당연하지만 이 노래를 듣는 순간 그는 영어를 참 잘한다는 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었다. 영어를 정말 잘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영어를 잘한다. 가수이니 노래를 잘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정말 노래도 잘한다. 더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차가 별로 없는 창원의 거리를 이 노래를 들으며 움직이고 있노라니 행복이 물밀듯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제이슨 므라즈를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 등극시키고 말았다. 제이슨 스태덤과 제이슨 므라즈. 아, 세상의 제이슨들이 나를 도무지 가만 놔두질 않네. 위의 노래는 암스테르담에서의 라이브인데, 그 라이브를 보고 싶은데 그 영상은 찾을 수가 없다. 저 남자가 저기에서 저렇게 노래할 때, 나는 대체 어디있었지? 나는 왜 암스테르담에 있지 않았지? 그래서 다른 라이브 영상을 찾아봤다. 

 

 

하아, 제이슨. 당신이 암스테르담에 있다면 나도 암스테르담에 있고 싶어요. 당신이 하이드 파크에 있다면 나 역시 그곳에 있고 싶습니다. 당신이 노래 부를 때 따라 부르고 싶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건 뭐, 어쩔 수 없는거니까요.

2cd 도 싫고 1dvd 확장판 뭐 이런 타이틀도 싫지만, 내가 가진 앨범과 많은 곡들이 겹치지만, 살게요. 사겠습니다. 당신이 하는 랩을 듣다니요. 삽니다. 살게요. 암스테르담에서의 당신의 노래라니요.

 

 

 

 

 

 

일요일 서울로 돌아오는 ktx 에서 애인과 문자를 주고받는데, 몇시에 도착하냐고 물었고 나는 오후 네시 이십칠분이라고 말했다. 피곤할텐데 잘거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잘자라고 말해주었고, 도착하기 십분전에 이제 일어나라고 메세지를 보내주었다. 삶이 이런 순간들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호수 앞의 완벽한 그 밤과, 친구들과 노래를 듣던 그 오후와, 잘자라고 그리고 일어나라고 속삭이는 이런 시간들로. 창원역에서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친구1에게 그리고 친구2에게 행복해요, 라고 말했다. 그들도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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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11-2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술 때문에 그리고 줌파와 올리브 때문에 흥분한 탓일까, 들고 있던 와인 두 병과, 맥주 캔 여섯 개를 무작정 바닥에 놓고, 길 한가운데에 서서 자꾸만 줌파와 올리브를 얘기했다 -> 아, 이 글의 내용 중에서 이 장면이 가장 행복해보여요, 저는. :)

다락방 2011-11-28 18:08   좋아요 0 | URL
저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다 좋았어요.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어요. 후훗. 이런 순간들 때문에 우리는 매일의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시간들을 버텨가는 건가봐요, 치니님.

돌아오는 길, 지하철에서의 치니님의 문자메세지도 저를 구름위로 데려다 놓았더랬어요. 고마워요!
:)

2011-11-2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한밤중의 벤치와 호수가 가장 좋아보이는군요.

다락방 2011-11-28 18:07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았어요. 한밤중도 벤치도 호수도 따로따로 떨어져도 좋은것들이 모두 한 데 있었습니다.

moonnight 2011-11-28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애인!!! 데이트!!!! 제가 한동안 바빠서 서재에 관심을 못 뒀더니 중요한 걸 놓쳤나봐요. ㅠ_ㅠ 와, 다락방님 축하합니다. 다락방님의 모든순간순간들이 빛이 나는 듯 느껴져요.
특히, 와인 두 병과 맥주 여섯캔을 길에 놓아두고 줌파와 올리브를 토론하다니. 정말 정말 부럽네요. 저도 치니님처럼 이 장면이 가장 행복해 보여요. 막 떠오르는걸요. +_+;;;;;;;;;;

다락방 2011-11-28 18:07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문나잇님이 놓치신건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그것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제 일상의 모든 순간들이 빛나지는 않았고, 틈틈이 제게 절망과 지옥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확실히 이번 주말만큼은 행복했어요. 정말 그랬어요.
줌파와 올리브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라니, 그 질문을 받는 것 자체로도 참 만족스러워요. 뿌듯합니다. 히히.

비로그인 2011-11-28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행복해요. 나도 그런 문자나 날려볼까요? 그러면 어디 아프냐고 물을까봐 겁나요. 그러고 보니 왜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는 걸까요? 행복과 각별한 슬픔은 말하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얘기를 안 했었나봐요. 별 일도 아닌 것들만 많이 얘기하고. 이건 좀 고쳐야겠어요.

책상 한 편에는 삼총사를 놓고,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어요. 좋아요 :)

다락방 2011-11-28 18:06   좋아요 0 | URL
저는 행복과 불행 그 자체도 별 거 아닌 것들로 찾아오는 것 같아요. 작고 사소한 일상이 행복과 불행을 가른달까요. 어쩌면 제가 원하는 건 가장 소박한 삶인지도 모르겠어요. 행복하다고 해보세요, 수다쟁이님. 상대도 그 문자를 보는 순간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

저는 이제 퇴근할 것이고, 퇴근 하면서는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를 들을거에요. 퇴근길이 울트라캡숑 나이스짱으로 행복해질 것 같아요. 꺄울 >.<

2011-11-28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8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11-11-2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 제 덕분이군요. ㅋㅋㅋ

다락방 2011-11-28 18:01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한순간에 우리를 흥분시켰어요.

무스탕 2011-11-2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만 살고싶은 삶 속에 탕이도 포함되어 있는건가요? (옆구리 마구 찌르는 중ㅎㅎㅎ)

다락방 2011-11-28 18:00   좋아요 0 | URL
포함되어 있을까요, 아닐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벌 2011-11-29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하죠. 줌마 올리브 와인 맥주 친구 메시지 모든게 다 부러워요 ㅠㅠ 너무 부러워요. 어찌까.

다락방 2011-11-29 08:41   좋아요 0 | URL
ㅎㅎ 행복했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버벌님, 잡문집 말고는 어떤 책을 읽고 있어요?

버벌 2011-11-30 15:41   좋아요 1 | URL
문학동네 가을호와 말벌공장을 잡고있어요. 문학동네 가을호는 미루다 미루다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잘 넘어가네요. 몰랐던 작가들을 많이 알게되고. 장르문학 잡지 였던 판타스틱을을 달마다 받아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 시기가 찢어진 메모장들이 많이 날리던 시기. ㅎㅎㅎ 문학동네 읽으면서 그때만큼은 아니어도 찢어진 메모장들이 모이고 있어요 뽈뽈뽈 말벌공장은 아직 읽지는 않았어요. 잡고만 있죠.

jongheuk 2011-11-29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i love this post.

다락방 2011-11-29 16:02   좋아요 1 | URL
i like you so much.
:)

2011-11-29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30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30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전에 친구와 식사를 하다가 친구의 팔목에 걸려진 팔찌가 스르르 팔꿈치쪽으로 내려간 일이 있었다. 친구는 그래서 귀찮다고 했다. 다시 팔목으로 끌고 와야 하니까. 나는 그때 친구에게 그래서 팔찌가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내려간 팔찌를 다른쪽 손으로 끌어 올리며, 아, 여기에 내 팔찌가 있어, 하고 새삼 느껴져서, 그래서 좋다고. 그런데 이 책,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페터 한트케는 이런 문장을 내게 보여준다. 

"일전에 손목시계를 잃어버린 적이 있어." 내가 말했다. "그다지 아끼는 물건도 아니었던데다, 그 전에는 그런 것이 내게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지. 그런데도 시계를 잃어버린 후로 손목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면 한동안 깜짝깜짝 놀라곤 했어." (p.90) 

이 책은 분량은 얇은데 쉽게 읽히질 않는다. 지루하고 재미도 없다. 그런데, 묘하게 마음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다. 음, 책 전반에 드러나는 강박증 같은것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고 해야할까.  

"가끔 난 아이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 클레어가 대답했다. "그럴때면 난 천하의 조심성 없는 엄마가 되지. 아이에 대해 도통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그럴 때면 아이는 내 주위를 무슨 애완동물처럼 돌아다니지.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 사랑이 커질수록 죽음에 대한 불안도 그만큼 커져. 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자면 가끔 난 그 두가지를 더이상 구별할 수 없게 돼. 애정이 너무 깊은 탓에 그것이 외려 죽음에 대한 공포로 급변하는 거야. 그래서 아이가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뺏은 적이 있어. 아이가 갑자기 질식하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거든." (pp.91-92) 

나는 정확히 이런 걱정을 했던적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과 특히나 내 조카에 대해서. 그 아이들이 앞으로 받게 될 상처를 내가 견딜 수 없어지는거다. 아이가 자라서 어떤 위험에 닥치게 될지를 상상하니 도무지 그게 멈춰지지를 않는거다. 종국에는 내가 이 모든것들을 감당할 수가 없을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오히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이 두려운 생각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결국 그 생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때의 내가 얼마나 불안해했는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불과 몇개월전의 일이라서. 

그래서 나는 별 재미도 없는 이 책을 읽기를 포기했다가 다시 집어들고 말았다.  

 

 

- 어제는 정말 지독한 하루였다. 오전 내도록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못한채로 보내고나니 오후에는 폭풍야근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해봤자 일곱시에 퇴근했지만. 오후 내내 정신없이 일하고 업무적인 건 업무적인 것 대로 또 개인적인건 그것대로 나는 슬픔과 짜증과 비참함과 우울함이 최고치에 달했다.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 원래는 금,토,일이 약속이 있는 관계로 목요일은 쉬어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아, 정말 그럴 수 없는 기분이었다. 

순대국에 소주 한 잔 할래요? 

나는 친구에게 물었고 친구는 그럴까요? 라고 말하고 회사 앞으로 와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순대국에 소주를 앞에 두고 마주앉았다. 우리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소주 반 병을 비우도록 우리의 입밖으로 나온 소리는 아~, 음~, 하아~ 뜨겁다, 맛있다가 전부였다. 순대국에 푸짐히 들어간 고기들을 건져 먹고 또 깍두기를 먹고 가슴속에 소주가 들어가서 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마음이 사르르르 풀어지고 있었다. 아, 순대국은 영혼을 구원하는 음식인것 같아요, 라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웃었다. 그리고 나는 진심을 담아 친구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지금 같이 순대국을 먹어줘서. 

그 순간 순대국과 소주 그리고 마주 앉아 함께 신음 소리를 내뱉어주는 친구가 정말로, 정말로 고마웠다. 

 

- 친구를 만나러 가기전에는 말했듯이 정말로 미친듯이 일에 시달리느라 스트레스 작렬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나올 무렵 여동생으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열어보니 조카의 동영상이었다. 조카는 그네를 타고 있었고 까르르,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오, 맙소사. 나는 그 순간 무장해제 되어버렸다. 조건 없는 사랑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 순간까지 나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나는 조카의 웃음소리와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다 잊고 말았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 얼마전에 한 남자와 배론성지에 갔었다. 성지로 가는 길은 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는데, 내 옆에 앉아 운전을 하던 남자는 앞에서 차가 올때마다 얌전히 한쪽에 차를 멈추고 상대의 차가 먼저 지나가도록 해줬다.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번번이 그랬다. 어제, 내가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배론성지에서의 그 일이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그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랬나?, 하고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고 한번쯤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어제였다. 그랬어요, 라고 말하며 나는 덧붙였다. 

나 그때 당신이 너무 좋았어요. 반했었어. 

그는 내게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대답했다. 

 

 

- 어제 타부서의 y 씨가 아이폰4s 화이트를 받았다며 과장님, 기분이 너무 좋아요! 라고 했었다. 나는 그때 그 케이스만 보고 실물을 보지 못했던 상황이라 오늘 아침 출근하고 나서 타부서의 문을 노크했다. 나 아이폰 구경하러 왔어요, 라고. y 씨는 내게 아이폰을 내밀었고, 나는 그걸 구경했는데-뭐 크게 별다를 바 없더만. 근데 왜 사고싶지? ㅎㅎ-, 초기 화면에 어떤 동양 여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여잔 누구에요? 그러자 그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배우라며 그 영화를 봤냐고 물었다. 아뇨, 나 안봤어요. 라고 대답했는데 그 뒤로 그는 그 여자배우에 대해 극찬을 했다.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나 뭐라나. 나는 y 씨에게 아이폰을 되돌려주며 "내가 왜 아침부터 여자 칭찬이나 듣고 있는거죠?" 라고 말했다. y 씨도 L 과장도 함께 웃다가 나는 혹시 그 영화 파일 있냐고 물었다. 그는 없다고, 자신은 극장에서 보았다고 말했다. 알겠다고 말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좀전에 메신저로 파일 받았으니 이메일로 보내겠다고 y씨가 말한다.  

나 줄라고 받은거에요? 

네, 라고 대답하는 걸 들으니 오늘이 신나는 금요일이라는 실감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음화화핫

 

- 나의 후버까페의 좋아하는 여성상에 나는 결코 부합되질 않는데, 이 점에 대해 후버까페에게 말하니 후버까페는 이렇게 말했다. 

다락방님은 제가 가끔 언급하는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기준을 파괴시켜 버리는 수준에 계시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신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만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준파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금요일이다. 먼 데 사는 남자가 나 본다고 한시간 일찍 조퇴하고 올 예정이다. 후훗. (아마도)굿 다운로더 파괴, 여성에 대한 기준 파괴, 근무시간 파괴. 난 다 파괴 시키는구나.

 


 

You call me at night, and i pick up the phone. 

 

앗. 이런건 알고 싶지 않은데, 검색하다보니 캐서린 맥피의 크리스마스 앨범이 나왔어. 아....어쩌지. 

 

 

 

 

 

Christmas is time to say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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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1-11-2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딜간거에요?! 왜 메신져에 없어?!

다락방 2011-11-25 11:27   좋아요 0 | URL
잠깐 안보이는 사이 찾으시기는 ㅎㅎㅎㅎㅎ

2011-11-25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5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1-11-25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읽는 재미란.. 중독입니다.

다락방 2011-11-25 16: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ㅎㅎ

이진 2011-11-25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왓, 지금만나러 갑니다의 여주인공 말입니다... 정말 동양적으로 이쁘게 생겼습니다 ㅎㅎ

저도 가끔 그런 불길한 걱정을 하곤 하는데... 다들 쓸데없다고 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그래도 걱정을 떨칠수가 없는걸 말입니다 ㅠㅠ

다락방 2011-11-25 16:02   좋아요 0 | URL
흥. 그렇습니까?

불길한 걱정, 그게 쓸데없다는 거 잘 알잖아요. 그런데도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잘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소이진님도 그렇군요. ㅜㅜ

이진 2011-11-25 20:50   좋아요 0 | URL
우왓.. 그러고보니 유투브 동영상 어찌 옮김니까... 저는 그때 했다가 안되서 애 먹었습니다 ㅠㅠㅠ

다락방 2011-11-26 10:02   좋아요 0 | URL
페이퍼창 열고 음악 올리기전 html소스사용버튼 클릭☞유튜브 원하는곡 검색☞공유☞소스복사 클릭☞이전소스사용 체크☞ 페이퍼에 불이기☞html소스사용 다시클릭

비로그인 2011-11-26 21:05   좋아요 0 | URL
ㅋㅋ 소이진님도 모르셨군요. 저도 다락방님이 알려주셔서 알았다는~!

poptrash 2011-11-25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역시 마성의 매력의 소유자였어...

다락방 2011-11-26 09:57   좋아요 0 | URL
집안 내력입니다. ㅎㅎ

무스탕 2011-11-25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에게 먹히는 매력을 갖고 있다니 부럽잖아!! 뭡니까, 그 매력이? 이제라도 나도 좀 배워보자구요!!

다락방 2011-11-26 09:59   좋아요 0 | URL
ㅎㅎ 무스탕님. 저 지금 새마을호 기차안인데 배고프고 졸려요 ㅠㅠ

노이에자이트 2011-11-2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한드케...연극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극작가로 유명하지요.독어권 작가들은 소설과 극작을 겸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좋아하는 독어권 작가가 또 있는지요?

다락방 2011-11-28 17:55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은 좋아하는 독어권 작가가 있는지 지난번에도 제게 한번 물으셨던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때도 저는 이렇게 답했을 거에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작가 말고는 독어권 작가를 잘 알지 못해요.

노이에자이트 2011-11-28 22:25   좋아요 0 | URL
네...그랬군요...

비로그인 2011-11-26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샤콘느... 새벽마다 듣고 있어요. 도입부가 정말 슬퍼요...
어제 [더 리더]를 다시 봤더니 더 뭉클한 것 같아요. 리스트의 탄식보다 슬퍼요 ㅠ ㅠ
그치만 기뻐요. 이런 음악을 듣게 되어서, 또 다락방님한테 받아서! ㅎㅎ

ps. 그런데 잡문집 다 읽으셨어요?
오늘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무려 100쪽이나 읽은 거 있죠?
'벽과 알'에서 감동먹었어요!!!

다락방 2011-11-28 17:54   좋아요 0 | URL
샤콘느는 정말 대박이죠.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슬픈 음악이 아닐까 싶어요. 클래식을 모르는 저도 그 곡만큼은 아주 절절한 마음으로 듣고 있어요.

잡문집 다 읽었죠, 물론! 벽과 알 도 좋았지만 저는 그가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이 좋았어요. 언더그라운드 얘기를 할때도 정말 좋았구요, 다른 작가들에 대해 얘기할때도 좋았어요. 아, 그는 정말 좋아요, 수다쟁이님!! >.<

달사르 2011-11-27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삼 느껴지는 손목의 빈 자리..흘러내리는 팔찌의 새삼스러움. 캬..좋아요.
저는 이런 관능적인 포스팅을 해주시는 다락방 님의 센스에 늘 감동한다는. 히힛.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기준파괴! 하하하. 후버까페도 멋진 분. 이 분은 남자이시지요? 궁금궁금. ^^

다락방 2011-11-28 17:53   좋아요 0 | URL
어머. 이런 사소한 일상 하나에 '관능적'이란 칭찬을 해주시다니. 역시 달사르님은 칭찬이 후한 분이셨어요!! 고맙습니다, 흑흑.

제가 제 글 링크하자니 뭔가 챙피하고 부끄럽지만, 후버까페는 남자사람이 맞아요.

http://blog.aladin.co.kr/fallen77/3451562

2011-11-27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8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버벌 2011-11-28 0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딜 간거에요. 난 원래 메신저에 락방님이 없어. ㅡㅡ;;;;
저 잡문집 노력하고 있어요.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지하철에서 수다쟁이님처럼 백쪽을 읽지는 못했어요.

ㅠㅠ

다락방 2011-11-28 17:4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혹시라도 메신저에 추가하고 싶다는 의미의 댓글이라면,
ven20@nate.com 이오. ㅎㅎ
우리에겐 그러나 왓섭이 있질 않소, 버벌낭자.

천천히 읽어요. 지하철에서 백쪽을 읽어야만 사람이 되는건 아니에요. 지하철에서 반페이지만 읽어도 된다구요, 버벌님. 오케이?

버벌 2011-11-29 03:59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의 댓글이 맞아요. ㅎㅎㅎㅎㅎㅎ 하지만 왓섭이 있죠 그럼요 ^^
네이트 접속시에 추가하겠어요. 왓섭의 락방님도 좋지만. 네이트 락방님도 갖고시픔 꺄~~

듣기 좋네요. 버벌낭자...... 이거 아디로 바꿀까요?
짜장라면 야식 먹고, 배 두들기며 후회하고 있는 새벽이에요. 으악~~~~

다락방 2011-11-29 08:43   좋아요 0 | URL
저 어제 자기전에 맥주 마시고 싶어서 미칠뻔했는데 남동생이 계속 말렸어요. 그러면 안돼, 그러지마, 참어....결국 먹지 않고 잤더니 지금 마음이 좀 편안해요. 만약 남동생이 옆에서 말려주지 않았다면 저도 캔맥주를 마신 뒤에 오늘 아침 부은 눈을 들여다보며 후회하고 있었을거에요. 흑흑.
그렇지만 짜장라면..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제 생각은 온통 짜장라면에 집중되고 있어요. 먹고싶다 먹고싶다 ㅠㅠㅠㅠㅠ

moonnight 2011-11-28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든 다 파괴하시는 다락방님. ^^ 마성의 매력에 공감 한 표입니다.
그런데 궁금. 저만 모르는 건가요. 배론성지는 어디에요? (왠지 부끄럽다. ;;;;;;;;)

다락방 2011-11-28 17:46   좋아요 0 | URL
배론성지는 충청도에 있어요. 저도 배론성지의 존재 자체에 대해 몰랐다가 이번참에 알게된 거에요. 거기 가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구요. 여름 휴가때 다시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화해서 문의했는데, 성지 안에서 따로 숙박은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아마도 바깥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그리고 성지를 산책해야 할 것 같아요.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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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많이 생각하게 할 수 있는 책이 좋다. 그 생각은 굳이 범세계적일 필요도 없고 아주 생산적일 필요도 없다. 그 생각은 그저 오롯이 나 개인에 집중된 것이기만 해도 되고, 혹은 다른 사람과 다른 환경에 대한 것이어도 된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좋다. 내가 책장을 넘기고 있는 책의 내용이 나를 그저 글자를 읽는 행위만 하게 하는게 아니라 상상하게 하고 꿈꾸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면, 그것들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든 나는 기꺼이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슬프거나 기쁘거나 행복하거나 울거나 짜릿하거나 저릿하거나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노곤해지기도 하고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거나 위안을 얻기도 한다.  

   
 

한 권의 소설이, 한 줄의 말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영혼을 구제한다. 다만 두말할 필요 없이 픽션은 늘 현실과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 픽션은 우리의 실재를 깊게 삼켜버린다. 예를 들어 콘래드의 소설이 우리를 실제로 아프리카의 깊은 정글 속으로 끌고가듯이.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나가야만 한다. (p.235) 

 
   

하루키는 자신의 에세이집인 『슬픈 외국어』에서도 자신의 글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고, 또 그의 소설 전반에 걸쳐서도 다른 작가의 소설들을 끼워넣곤 했다. 내가 개츠비를, 필립 말로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의 덕분이고, 프루스트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의 덕분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 좋은글이라고 했을 때, 이 잡문집은 더할나위없이 그런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이 책에 나는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던가. 그가 자꾸만 말하는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생각을 읽는 것도 짜릿했고, 그가 음악에 대해 말할 때는 내 자신이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하루키는 재즈 연주를 들으면서 그것의 감상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있고, 또 여기에서의 키보드는 어떤 연주자인지, 그 연주만으로도 구분해낼 수 있다. 나는? 나는 뭘 할 수 있지? 나는 전화번호를 잘 기억하고 인상적인 구절들을 잘 기억한다. 이정도는 다들 할 수 있는건가? 내게 더이상 다른 재능은 없나?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건 정말로 즐겁다. 게다가 하루키가 옴진리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몇년전에 지루하게 읽기를 끝마친 『언더그라운드』를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는 그 인터뷰를 '그냥' 한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인터뷰를 하고 그것들을 글로 풀어내면서 거기에 대해 느끼고 생각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문학에 대해서도, 그리고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하며 그것을 글로 풀어내주는 사람이라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인간은 마땅히 자유로워야 하며,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사란 그리 간단히 풀리지 않는다. 거기에는 암묵적으로 커다란 사회 규칙이 하나 있었다. '그 차이가 세간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커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다. (p.226) 

 
   

아,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다. 그의 문장은 전혀 어렵지 않고 그래서 잘 읽힌다-그런데 책 초반에 자꾸만 '비히클(vehicle)'이란 단어가 스펠링 표기도 없이 튀어나오는 게 거슬린다. 왜 '수단'이라고 번역하지 않았을까? 스펠링을 모르면 그 단어의 뜻을 찾아볼 수도 없었을텐데?-. 게다가 유머는 어떤가. 이 잡문집에서도 그의 유머는 빛을 발한다. 

   
 

"흐음 그 뭐냐, 무라카미 군은 인기가 아주 많잖아요. 나한테 찾아오는 아가씨들도 거의 다 무라카미 군 얘기뿐이에요. 다들 나한테 소개시켜달라고 난리라니까. 그렇게 인기가 많으면 부인이 걱정이 많을 텐데. 힘들겠어요."
더없이 친절히 걱정하는 척하며, 장황하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자기 흉은 모르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생각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한 번도 소개해준 적이 없지 않은가.
(p.349) 

 
   

이 책 속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은, 하루키가 작가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샐린저와 피츠제럴드를 카버와 가즈오 이시구로를. 하아- 정말 미칠것 같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얘기한다. 그걸 읽는 순간은 마치 내가 천국에라도 와있는 것 같았다. 하루키가 언급한 작가중 '그레이스 페일리'에 관심이 생겨서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려고 했더니, 그녀가 생전에 남긴 작품은 총 세권이고 국내에 번역본은 한권도 나와있질 않다. 제발 어떤 출판사라도 좋으니,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을 좀 소개해주세요! 

하루키의 다른 에세이집을 읽다보면 나 역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닌데, 이번에도 그랬다. 하루키는 나를 웃게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내가 그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의 글을 계속해서 읽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공감한 많은 문장들 중, 가장 가슴이 시린 문장을 옮겨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이별의 대부분은 그대로 영원한 이별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은 영원히 갈 곳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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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11-24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다락방님 글인데 댓글이 없다. 우와.

다락방 2011-11-24 21:15   좋아요 0 | URL
ㅎㅎ 나 이거 리뷰를 너무 못써서 수치스러워요 ㅠㅠ 고치고 싶은데 못고치겠어서 포기. 수치스러운 이 글도 내 글 ㅠㅠ

blanca 2011-11-24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다락방님이랑 같아요! 저도 그레이스 페일리 폭풍 검색 했는데 번역본이 없더라고요!!! 너무 너무 아쉬웠어요. 맞아요. 하루키 글은 너무 쉬운데 어떻게나 또 깊이가 있는지요. 저도 사실 곱게 읽고 다시 내어 놓으려는 심산이었는데 줄을 너무 많이 그어서 제가 가지기로 했잖아요. 댓글이 없는 건 다락방님 리뷰에 전적으로 공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락방 2011-11-25 16:11   좋아요 0 | URL
저도 밑줄을 너무 많이 긋고 포스트잇을 덕지덕지 붙여놔가지고 ㅎㅎ 그런 상태로 타부서의 Y 씨에게 빌려줬어요. ㅎㅎ 전 밑줄 많이 긋게 하는 책이 정말 좋아요, 블랑카님.
저는 왜 리뷰를 못쓸까요?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지 말았어야 했나봐요. 잘 쓰고 싶다는 욕망만 강해져서 정작 제대로 된 리뷰가 나오질 못했어요. 하아- 속상해...

이진 2011-11-2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요즘 대세입니다...
하지만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작품을 먼저 읽고 그리고 나서 잡문집을 생각해봐야겠어요 ㅋㅋ

다락방 2011-11-25 16:12   좋아요 0 | URL
네, 다른 책 먼저 읽어도 충부합니다, 소이진님.
저는 상실의 시대를 가장 먼저 읽긴 했지만 그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건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이었어요. 그거 읽고 완전 쑝가가지고 하루키를 찾아 읽기 시작했죠. 훗.

비로그인 2011-11-24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원히 갈 곳을 잃어버린 말... 무서운 얘기네요. 어쩌면 영원한 이별보다 더 무서운 얘기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락방님을 위해서라도 하루키가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좋은 글을 계속 썼으면 좋겠습니다^^

다락방 2011-11-25 16:12   좋아요 0 | URL
네, 하루키가 오래오래 살아서 좋은 글을 많이 많이 써줬으면 좋겠어요. 그건 하루키에게는 어렵지도, 힘들지도 않은일...이지 않을까요?

stillyours 2011-11-25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사랑스러운 리뷰인 걸요!
난 오늘 아침 마지막 장을 넘겼는데, 좋군- 하는 기분도 잠시, 마지막 열댓 페이지가 쩍 벌어지며 낱낱이 뜯어졌어요 ㅠ

다락방 2011-11-25 16:13   좋아요 0 | URL
사랑스럽기는 ㅠㅠ 자노아님은 구라쟁이!! ㅠㅠ
저도 마지막 열댓 페이자가 쩍쩍 벌어집디다. 이거 제본 불량인가 왜 이러죠? ㅠㅠ

달사르 2011-11-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 읽는군요! 와우~ 저는 이 책 읽고 하루키가 더 좋아지고 있답니다. 역시 하루키야..이러면서 말이죠. 하루키는 참 배려를 잘 하는 사람 같애요. 소설을 써내는 작가로만 그치지 않고, 읽는 독자의 마음까지 배려를 한다고나 할까. 작가와 독자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반자로 인식한다고나 할까.

ㅎㅎ 저도 하루키가 소개하는 작가들 중 몇 몇을 지금 찾아보는 중입니다. 지금은 빌 크로에게 빠져있는 중. 히힛.

다락방 2011-11-28 17:45   좋아요 0 | URL
맞죠, 하루키 짱이죠? 끝부분에 작가들에 대해 써놓은 글들이 있거든요. 가즈오 이시구로, 피츠제럴드, 카버, 챈들러..아,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얘기해주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입니까, 달사르님!

아니 그런데 달사르님, 그동안 뭐하느라 뜸하셨습니까! 자주 자주 좀 들르세요.

Forgettable. 2012-04-0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그레이스 페일리를 검색해서 락방님 서재로 들어왔어요 ㅋㅋ

다락방 2012-04-06 13:03   좋아요 0 | URL
어떻게해서든 여기로 오고야 마는군요. ㅋㅋㅋ
 
폭두방랑 타나카 1
노리츠케 마사하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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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한번쯤 방황의 시기가 있다면, 타나카, 당신에게는 지금! 방황해요, 맘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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