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담론에서 베일은 '억압받는 여성'과 '저항하는 여성'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띠고 있다. 즉, 베일을 쓰고 있다는 것은 '보여지는(seen)'것을 거부하면서 '보는(seeing)' 시선은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베일 쓰기는 여성에게 '시선의 역전(gaze reversal)'을 제공한다(염운옥, 2010: 15에서 Frank, 2005 재인용). 여기서 주목할 점은 베일을 쓴 여성의 이런 특징이 식민 지배에 강력히 저항한 무슬림 여성의 저항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는 여성이 독립 투쟁에 적극 동참하는 가운데 베일을 쓰고 그 속에 비밀 서류나 무기를 운반했다. 이런 점에서 베일을 착용한 여성에게는 전근대적 가부장제 억압의 가엾은 희생자라는 이미지와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투사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실제로 최근 호주 사회에 전개되는 베일 논의에서는 베일을 쓴 여성의 시선 역전이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협하고 사회적 범죄나 테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강력한 베일 금지 논리로 채택되고 있다. -p.167~168
제 5장은 <호주의 여성 이민자 베일 문제> 이다.
서구 담론에서 베일은 억압받는 여성과 저항하는 여성의 이중적 의미라고 하는데, 나는 이 책을 일기 전까지 베일이 당연히 억압받는 여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혹은 감추는 그런 의미라고만 생각한거다. 저항하는 여성이라고? 이게 무슨 말이지? 어떻게 자기의 얼굴을 가리는 것이 저항일 수 있지? 갸웃하며 읽다가 그 다음에서 '보여지는 것을 거부' 하면서 '보는 시선은 획득'한다는 데에서 너무 놀랐다. 그러네, 보여지진 않는데(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주체적인 건 아니었잖아?), 그런데 베일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볼 수는 있잖아? 나는 무슬림의 베일을 '보여지길 거부'한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 그들이 볼 수도 있다' 까지 내가 나아가진 못했던 거다. 아... 억압이라고만 생각햇던 베일이 당사자에겐 저항일 수 있다니. 너무 놀라버렸네..
여러분 책 읽는 거 너무 재미있지 않습니까?
나는 보여지는 것을 거부하면서 보는 시선은 획득한다는 문장에서 '박정자'의 [시선은 권력이다]를 생각했다.
(왼쪽은 구판 오른쪽은 개정판)
시선은 타자와의 관계이고, 나와 세계를 맺어주는 기본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시선이 인간관계의 기본인 권력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 시선은 권력이다 구판, 박정자, P6
우리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그의 의식 앞에서 내가 대상, 즉 사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있어서 나는 주체가 아니고 대상이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왠지 불편하거나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바라보임을 당할 때 나는 그의 의식의 대상이 되는데,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체인 타자가 나를 객체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동시에 내가 물질성을 띠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속에 의식을 품은 어엿한 인간이건만 그 인간성이 부정되고 한갓 물건으로 전락한 것이다. 대상이란 곧 물체이기 때문이다.
- 시선은 권력이다 구판, 박정자, P36
박정자의 글대로라면, 베일을 쓴다는 것은 상대에게 내가 물화되기를 거부하는게 아닌가. 그것의 원래 목적이 뭐였든 해석은 정말 다양하게 나올 수 있겠구나. 게다가 이 책을 읽다보면 무슬림 여성들이 베일을 쓸 때는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다. 5장의 호주에서도 6장의 영국에서도 이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에 대하여 얘기하는데, 호주와 영국은 베일 금지를 법으로 만들고 싶어하고 그러나 많은 당사자 여성들은 베일을 쓰고자 한다. 이 베일이 시선의 문제, 억압의 문제를 넘어 공공 안전과 질서유지의 문제를 갖기도 한다니. 베일로 감추다니 그게 말이나 돼, 그건 억압이야, 라고만 나는 생각했더랬다. 하아-
2010년 5월 시드니에서 부르카로 위장한 후 선글라스를 착용한 '중동계외모'의 남성이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호주 사회에서 부르카는 여성 억압과 이슬람 문화의 상징으로서만이 아니라 범죄자의 위장술과 연계되어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는 연방정부 내 일부 보수정당 의원의 부르카 금지 법안 제출로 또다시 이어졌다. -p.192
호주에서는 무슬림 호주인과 비무슬림 호주인 간 갈등이 거세지고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그 사건의 중심에는 무슬림 소년들의 비무슬림 여성 집단 강간 사건이 있었다.
사건 일지는 다음과 같다.
-2000년 8월 10일: 레바논계 폭력 조직원 8명이 17세, 18세 백인 소녀 2명을 집단 강간함.
-2000년 8월 12일: 17세 소년 모하메드 스캐프(Mohammed Skaf)가 평소에 알던 16세 백인 소녀를 공원으로 유인한 뒤 그의 형 빌랄 스캐프(Bilal Skaf)가 강간함. 12명의 폭력 조직원이 강간을 지켜보았고 피해자 여성에게 총을 겨누며 배를 발로 차는 등 폭력을 행사함.
-2000년 8월 30일: 뱅스타운 기차역에서 총 14명의 소년이 또 다른 여성을 세 군데로 옮겨가며 25번 강간함.
-2000년 9월 4일: 3명의 소년이 16세 소녀 두 명을 5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강간함. -p.177 각주
특히나 무슬림 '소년'들이 강간을 저지른 것에 대해 더 답답한 마음이 드는데, 그들이 아무리 십대라한들 그들이 강간범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뭐가됐든 그들은 여성을 강간했다. 잡혀서 감옥에 가든 안가든 그들이 강간범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것이다. 언제까지 17세일 수 없고 27세가 되고 57세가 되고 97세가 될텐데, 그 때에도 '나는 한때 강간을 했었지' 라고 그 때를 회상하며 얘기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인생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게 꼭꼭 숨겨야 할 비밀을, 결코 자랑스레 말할 수 없는 일을 만드는 것은 너무 어리석지 않은가. 왜 십대부터 강간범으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인가.
한 피해자 소녀의 증언에 따르면 일부 강간범은 그 소녀를 "행실이 좋지 않은 호주 게집애(Aussie Pig)"로 불렀고, "'호주 스타일'이 아닌 '레바논 스타일'로 강간하겠다"라고 말했다(Warner, 2004:348). 또한 다른 피해자에 따르면 한 강간범은 피해자에게 "너는 호주인이니까 강간당해도 싸다"라고 언급했다. 강간범의 이러한 인종차별적 발언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이 사건들은 호주 사회 내 인종 갈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레바논계 무슬립 십대 남자 청소년들은 자신의 미래 배우자가 될 레바논계 여성의 성적 순결은 지켜줘야 한다고 믿는 반면, (비레바논계) 호주 여성과의 성관계에 대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레바논계 남성 청소년들이 보여준 인종에 따른 이중적 성적 행태가 문제로 떠올랐다. -p.178
자신의 나라 여자들이 순결해야 하고 호주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 그럴 수 있다. 호주 여성들은 성적으로 자유롭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건 틀리지 않다. 그런데 왜 '조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왜 기어코 강간으로 이어지는걸까? 호주 여성과 섹스하고 싶다면 너 대 나 로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정도 쌓고 그러면서 서로 욕망에 이끌리는 과정으로 가면 되는거잖아. 왜 강간이냐고. 그러니까 결혼전에 순결해야 하는게 레바논 여성이다, 그런데 호주는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게 왜 '그래서 호주 여성을 강간한다'로 가는거냐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그건 안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는걸까? 그건 그냥 안되는거잖아. 상대가 섹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 강제로 하는건 옳지 못하다는 거, 그냥 머릿속에 본능적으로 떠올라야 하는거 아니냐. 그게 장착되어 있지 않은건가, 혹은 그런 생각이 들지만 무시하는건가. 그게 자기를 혹은 자기 무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는건가.
자 이렇게 갈등이 촉발되었으니 호주 비무슬림인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제압하려 하고 복수도 하는데, 그중엔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 하아-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무슬림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이었다.
사건 이후 아랍 무슬림 레바논계 공동체에 대한 비무슬림 공동체의 반발이 거세졌다. 이는 주로 인종화된 성폭력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특히 젊은 무슬림 여성 또는 소녀를 상대로 비무슬림 호주 남성의 성폭력과 언어폭력 등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무슬림 성직자가 길거리에서 신체적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무슬림 여성은 공공장소에서 베일이 강제로 벗겨지는 등 수모를 겪었다(Ho, 2007: 293; Warner, 2004:397). -p.179~180
아 진짜 너무 싫다.
왜 땅 때문에 전쟁하든 인종 때문에 전쟁하든 서로 싸우면서 강간을 저지르냐고. 상대 여성을 강간함으로써 분노를 표출하고 복수를 하는거, 그거 너무 여자를 인간으로 안보는 행위 아닌가 .그거 너무 소유물, 사물로써 대하는거 아닌가. 아 진짜 너무 싫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라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성별로, 일단 태어났는데, 태어났더니 이새끼 저새끼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강간하려 드네. 세상의 모든 강간범들이 똥통에 빠져서 똥 삼키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이사카 고타로가 그의 책 [골든 슬럼버]에서 주인공 아버지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강간은 명분이 없다'고 . 살인은 명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강간에 있어서만큼은 어떤 명분도 있을 수 없다고.
강간은 명분이 없다. 이래서 강간했다 저래서 강간했다? 그거 명분 아니다. 강간 뒤에는 어떠한 명분이 존재하는게 아니라, 강간범이 존재한다. 십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강간이라는 범죄와 그 범죄를 저지른 강간범이라는 꼬리표가 강간범에게 계속 따라남는거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려고 강간범이 되기를 선택하는가. 아 진짜 똥통에 빠져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