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립다 - 스물두 가지 빛깔로 그려낸 희망의 미학
유시민.조국.신경림 외 지음 / 생각의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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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모든 글들이 다 좋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몇몇 글들만이 좋았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글, 이 책을 읽고자 했던 나의 의도에 부합했던 글은 '정주영', '신충진', 그리고 '노항래'의 글이었다. 정주영(전속 이발사)과 신충진(전 청와대 요리사)이 가까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시간을 회고해서 울림을 주었다면, 노항래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뒤에, 스스로 싸움을 지속해 나간 것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노항래는 검찰청에 있을 노 전대통령을 작게나마 위로하고자 검찰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경찰들에게 잡혀갔고 다음날 풀려났는데, 다음해에 집시법 위반으로 30만원의 벌금을 내라며 검찰이 기소를 한거다. 이에 노항래는 정식재판을 청구한다. 



재판을 받으며 나는 거듭 "그날 '집회'에 참석한 바 없다."라고 주장했다.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고, 주관적으로 집회에 참석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나는 그냥 팬클럽 회원 같은 사람이었다. 이런 주장을 거듭했다. 그러면서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검찰을 비난했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세력이…….", "석고대죄 드려야 할 집단인데…….", 뭐 이런 주장들이었다. 이런 말을 내뱉으면 공판검사는 제지하려 하고 판사는 흥분하지 마시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나는 공판 때마다 거듭 검찰을 비난했다. 그것이 내가 내 수고를 스스로 위안받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p.214-215)



30만원의 벌금을 내는 것이 재판을 청구하고 재판을 받는 것보다 훨씬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신 싸움을 택한다. 2심 판결에서 벌금은 10만원까지 내려갔지만,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싶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30만원 내고말지' 할 일에 맞닥뜨렸을 때, 그는 두 해동안 그 재판을 받는다. 그는 이 과정을 스스로 '이건 내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의로운 항거'(p.216) 라고 명명하는데, 나는 이 일을 대하는 그의 고집이 무척 좋았다. 이런 고집이 더 많아져야 된다고도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알게되고 그리워하게 된 것은, 그의 서거 직후가 아니라 지금이다. 나는 무지했고, 무관심했으므로, 그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를 지내고 박근혜정부를 보내고 있는 지금,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자꾸만 언급되는 노무현을 알고 싶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를 이제는 잘 알것 같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잃은 건지도. 그리고 그의 살아생전 그를 알지 못했던 나도 그가 그립다.






저는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자폐증에 걸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작은 커뮤니티 안에 웅그린 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 또한 필요 이상의 관심을 받지 않기를 빌며 조용히 엎드려 살아야지 했습니다. 그 변명의 끝에는 항상 이런 문장이 있었죠. 나는 소심하니까, 나는 겁이 많으니까. 하지만 `겁 많고 소심하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자기변명 속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남보다 더 잘 상처받고, 남보다 더 자주 겁에 질리는 저 같은 사람에게야말로 민주주의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저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세상이 무서울 때마다, 사람들이 무서울 대마다, 더 깊이 저만의 누에고치 속으로 숨었던 저는 잊고 있었지요. 겁 많고 소심하고 힘없는 사람에게도 지켜야 할 민주주의, 지켜야 할 인간의 도리, 지켜야 할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 저는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 내기 위해 아주 작은 용기부터 내 볼 작정입니다. (정여울, p.20-21)

우여곡절 끝에 당신은 대통령 후보가 되셨고 이때는 저도 이발사로서 당신에게 도움을 준 것 같아 무척 기뻤답니다. 그리고 진짜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 그 이틑날 오셔서 "사장님 덕분에 됐습니다."라고 하셨을 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져 본 감정 중에 감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 느껴 본 순간이었습니다. (정주영, p.107)

"선거철이 되면 `이번에는 누가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자리가 나오잖아예. 그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예. 옛날에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말하더라. 우리도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면 투표를 잘해야 한다. 그러면 내 자식이 좀 수월케 살고 내 손자가 수월케 산다 하더라. 그러니까 앞에 있는 것만 보지 말고, 정치인 싫어서 투표 안 한다 하지 말고 먼 날을 생각해서 조금 더 좋은 사람에게 투표하러 가야 한다. 그렇게 말을 하고 싶습니다." (김상철, p.121)

그녀와 나는 부부이고 매우 친한 사이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다. 바퀴벌레처럼 엉켜 사는 것이 피차 취향에 맞지 않아서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자 우리는 거처를 따로 두기로 결정했다. 나는 `작업실`이라는 공간에서 밥 해 먹으면서 따로 산다. 주말이면 아내와 아이가 사는 집에서 가족 상봉을 하는데 날마다 비비적대는 것보다 낫거니 싶은 때가 많다. 서로 반가워하니까. (김갑수, p.140)

토론은 길어졌다. 그리고 찬성 일곱 표, 반대 두 표로 반전 의견서를 채택했다. 당연히 파란이 일었다. 민주당 여러 의원이 인권위원회를 비난했다. 다음 날 <동아일보>는 의견서 채택 과정을 자세히, 그리고 가장 크게 보도했다. 나는 책임을 추궁당할 것을 각오했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여기저기 방송에도 나가 반전 의견서의 내용을 되풀이했다.
"가령 큰 댐을 건설하려고 하면 산업통상자원부는 적극 추진하겠지만 환경부는 반대할 수도 있지 않나요? 인권위는 헌법 가치를 지키고자 합니다."
한바탕 회오리를 각오하고 있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예상 외 반응에 크게 허를 찔리고 말았다. 그는 평상시 어조로 지극히 낮게 말했다.
"인권위원회, 그런 일 하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유시춘, p.168)

제가 3년간 국정원 안에 설치된 위원회에서 일했기 때문에 잘 압니다. 대통령 노무현은 단 한 번도 국정원을 자신의 개인적 이해 때문에 이용한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과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관계로 본다면 더할 수 없이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관계라 한다면 양측의 손발이 맞아야 하는데 대통령만 그랬지, 국정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국정원을 변하게 하려면 제도의 개혁과 사람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해외 정보와 국내 정보의 분리, 대공 수사권 폐지와 같은 제도 개혁의 중요성을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기에 사람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은, 그리고 그가 지휘했던 과거 청산은 사람의 개혁에는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한홍구,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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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텔레비전에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오는 새누리당 대표인 황우여는 학림사건 때도, 그 전의 명동3.1사건 재판 때도 법대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은 아마도 《고문묵인 판사 열전》의 앞부분에 모셔야 할 겁니다. (한홍구, p.206)



위 부분을 읽다가 네이버 검색창에 황우여 를 입력해 보았다. 아아...그는 네이버에서조차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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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3-04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그를 보니 마치 내가 황우여를 그리워하는 꼴이 되어버렸군...

단발머리 2016-03-04 11:30   좋아요 1 | URL
나의 그 분도 그렇게 환히 웃곤 하셨는데...

나는 그 분을 이제 다시 볼 수 없는데,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데...
다락방님 저 책 표지만으로도 나는 울고 싶은데...


아... 그런데 저 분은... 저리도 환히..

다락방 2016-03-04 17:14   좋아요 2 | URL
이 책에 보면 노무현 전대통령이 시대를 앞서갔다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갖기에는 지나치게 훌륭한 대통령이었던 것 같아요. 누구의 글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결국 우리 국민의 수준은 지금 대통령의 수준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고요. 그렇다해도 우리가 투표를 해서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어봐야죠. 힘을 냅시다, 단발머리님!

Forgettable. 2016-03-04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생글생글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라니!

다락방 2016-03-04 18:14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말입니다 ㅎㅎㅎㅎㅎ
 
시사IN 제442호 2016.03.05
시사IN 편집부 엮음 / 참언론(잡지)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EBS 도 더이상 청정지역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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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6-03-0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ㅜㅜ 사장을 보세요, 최근 이상한 사람이 낙하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낙하산은 찢어지지도 않나봐요. ㅠ

다락방 2016-03-04 17:22   좋아요 0 | URL
네, 시사인에서 보니 EBS 도 이제 .. 하아. 이 나라는 점점 더 살기 싫어지는 나라가 되는 것 같아요, 테레사님. ㅠㅠ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책 뒤표지에 보면, '단숨에 읽히지만 긴 후유증이 남는다' 라고 이적(뮤지션)이 평했던데, 역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만의 것이로구나. 나한테는 후유증이 1도 안남는다.


책장에서 괜찮은 시를 발견했다. 감탄하여 읽고 또 읽으며 외우려 애썼는데, 알고 보니 내가 쓴 시였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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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2-2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도 안남더라고요ㅎ

다락방 2016-02-24 16:10   좋아요 1 | URL
저 안그래도 제 평 남기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싶어서 리뷰 훑어보는데 죄다 극찬이더라고요. 막 별 다섯에다가..그러다 고양이라디오님이 네 줄 리뷰, 별 셋 주신 거 보고 너무 반가웠어요!! 오, 나랑 같은 느낌이다!! 하고 말이지요. 잘 읽히는 것 말고는 남는 게 없는 책이에요. 뭐야, 김영하, 왜이래, 싶었달까요. 고양이라디오님, 반갑습니다! ㅋㅋㅋㅋㅋ

고양이라디오 2016-02-24 17:05   좋아요 0 | URL
저랑 같군요ㅎ 저도 그래서 별 셋의 다락방님 리뷰가 반가웠습니다ㅎㅎ

저도 사람들 리뷰보니 극찬에 별 다섯개도 많아서 당황스럽더라고요.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말하다>를 괜찮게 봐서 찾아 보게 된 소설인데... 다락방님 말씀대로 잘 읽히는 것 말고는 남는게 없었어요ㅠㅋ

다락방 2016-02-24 17:30   좋아요 1 | URL
저는 이제 부러 김영하 찾아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아요. 그 전에도 찾아읽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말예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군단에 김영하는 포함될 수 없겠어요. 하핫

고양이라디오 2016-02-24 18:27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읽는 소설이었는데 앞으로 김영하작가를 찾아보진 않을 것 같더라고요ㅠ
그래도 에세이는 괜찮았어서 에세이는 읽어보려고요ㅎ

다락방 2016-02-26 08:02   좋아요 0 | URL
저는 김영하 처음도 아니에요. ㅎㅎ 제가 읽었던 김영하의 책들은 다 재미있었어요. 재미있었는데 그게 끝이더라고요. 제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전 책장 덮고나서도 계속 생각하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책이 좋거든요. 김영하의 책은 그렇진 않더라고요, 제게.

고양이라디오 2016-02-26 14:02   좋아요 1 | URL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플롯에서 태어난 이야기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게 마련이다.˝ (p200)

˝플롯은 좋은 작가들의 마지막 수단이고 얼간이들의 첫번째 선택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p200)

라는 구절을 봤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바로 플롯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아닐까요ㅎ? 미리 계획된 이야기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이야기가 종결되어 더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 같아요. 저도 생각할 거리를 주고 여운이 있는 소설을 좋아합니다.

비로그인 2016-02-2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히는데 남는 것이 없다면, 잡문이라는 말인데, ㅋㅋ 암튼 김영하는 도서관에서 읽어야 겠네요. *^

고양이라디오 2016-02-24 18:26   좋아요 0 | URL
개개인마다 다를것같아요. 그리고 남는 것이 없다보다는
남는 것이 적다 나 그 정도가 약하다가 보다 정확할 것 같네요ㅎ

다락방 2016-02-26 08:03   좋아요 0 | URL
저도 고양이라디오님 댓글의 동의합니다. 이 책의 리뷰를 보면 별 다섯 리뷰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요. 배익화시인님은 저랑 완전히 다른 감상을 가지실 수도 있죠.

조선인 2016-02-2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선해서 그런게 아닐까요. 동류가 별을 주는 거죠. 저도 별 다섯. ㅎㅎ

다락방 2016-02-26 08:03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동류가 그렇게나 많단 말입니까! 정녕 세상에 선한 사람은 이토록 적단 말입니까! ㅎㅎㅎㅎㅎ

hellas 2016-02-2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류가 별을 준다는 말에 ㅋㅋ 웃으며 동의하게 됩니다. 재미있다와 별루다의 사이가 참 다채로운 이유가 있을테니까. 어떤 평도 귀기울이게 되요:)

다락방 2016-02-26 08:04   좋아요 0 | URL
책장을 넘길 때는 재미있어서 팔랑팔랑 잘 넘겼는데요 덮고나니 멘붕이 오더라고요. .....이게 뭐지? 하고 말예요. 그래서 저는 높은 별을 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나봐요. 별 다섯이 쏟아집니다. 역시 책은 읽는 자의 몫인가 봅니다. 하핫

젤리곰 2016-02-25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확히 같은 느낌을 받았더랬더랍....

다락방 2016-02-26 08:04   좋아요 0 | URL
크- 기모키님이 저랑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니 씐나요! >.<

젤리곰 2016-02-26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그레) ㅎㅎ 저는 이 책은... 정작 책보다 북트레일러가 더 강렬한 체험... 혹 보셨어요? https://youtu.be/BOiJLGvtzbY ※ 꼭 소리 켜고 들어야...

다락방 2016-02-28 12:17   좋아요 0 | URL
무..무...무서운건가요? 재생을 못시키고 있네요. ㅎㅎ

젤리곰 2016-02-2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최면 걸리는 기분...? (무섭진 않아효!)
 
노란 새
케빈 파워스 지음, 원은주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많은 문장들이 한 번에 읽히지 않고 몇 번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만 제외한다면 이 소설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슬프고 깊고 아프고 고독하다. 올해의 책이라 해도 될만큼 좋은 책이라, 문장이 너무나 안타깝다.


대단히 좋은 소설이다.








"제군은 곧 선한 목적을 위해 맹렬한 폭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p.115)

"안쪽에서부터 누가 날 파먹는 것 같은 기분인데 아무한테도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어. 모두들 내게 아주 고마워하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 배은망덕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테니까. 아니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할 테고 정말로 다들 내가 한 짓 때문에 날 미워해야 마땅하지만, 다들 내가 한 짓 때문에 날 사랑하고 난 그것 때문에 미칠 것 같아." (p.184)

아니면 죽고 싶다고 말해야 할까? 저쪽의 철교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게 아니라, 영원히 잠들고 싶다고. 그러면 여자들을 죽일 필요도 없고 여자들이 죽는 걸 지켜볼 필요도 없고, 혹은 남자들을 죽일 필요도 없고 죽이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들의 등 뒤에 총을 쏴댈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마치 영혼에 산(酸)이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끔은 보이는 것마다 모조리 죽이려 하고, 그러다 영혼은 사라져버리고, 평생에 걸쳐 내가 한 짓을 만회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배워 알지만, 평생 그렇게 배웠지만 내가 라이플을 조준해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다신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머니마저 너무나도 행복해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래, 놈들이 날 죽이려 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 달리 어쩌겠어? (p.184-185)

자기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살고 싶다는 욕망의 확증이다. 이제 와 진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리고 스털링이? 진실은, 스털링은 자신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털링이 자신만의 욕망과 기호를 가져도 된다는 걸 깨닫기나 했는지도 의문이다. 스털링이 좋아하는 장소를 가져도, 그가 다음에 가게 될 부임지의 길고 곧은 대로들을 만족스럽게 걸어도, 파랗고 무한한 하늘 아래 깔끔하게 깎은 푸른 잔디의 균일함에 감탄해도, 깨끗하고 차가운 개울가에 몸을 담그고 그의 상처 입은 몸의 흉터 난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물살을 느껴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기나 했는지.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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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6-02-23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서 행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요. -_-;;; 어쨌든 부랴부랴 보관함으로 ^^;;;;

다락방 2016-02-23 16:46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책이에요, 문나잇님.
저 역시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그래요. ㅎㅎ
사고 싶은 책도 너무나 많은데 당분간은 집에 있는 책 좀 읽고 사던가 해야겠어요. 집에 안읽은 책이 너무 많아요. 책장엔 읽은 책보다 안읽은 책들이 꽂혀있어요. ㅠㅠ

moonnight 2016-02-23 16:50   좋아요 0 | URL
저역시 ㅠ_ㅠ 읽은 책들은 다 팔고 지금 꽂힌 책들은 죄다 안 읽은 ㅠ_ㅠ; 무서워요. ㅠ_ㅠ;;;;

비로그인 2016-02-2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장에 꽂혀 있는 안 읽은 책들을 읽어봐야 겠네요. ;^^

다락방 2016-02-26 08:05   좋아요 0 | URL
올 한 해는 책을 가급적 안사고자 합니다. 불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