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총을 들고 기다린다 콥 자매 시리즈
에이미 스튜어트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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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들은 매력적이고 이야기로도 통쾌한데다 대사들도 명문이다. 게다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니 짜릿해!! 멋져!! >.<
시리즈 나오는대로 족족 읽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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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의 역량
    from 마지막 키스 2017-08-17 10:49 
    몇해전에 본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이 기억난다. 드라마속에서 김현주와 이유리는 병원에서 부모가 바뀌었다. 스무해 이상을 자라온 집이 나의 친부모가 있는 집이 아니었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은 아주 달라서, 김현주는 출판사 사장의 집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으며 그 출판사에 취직해 능력을 인정받고 잘 다니고 있었고, 이유리는 밥집을 하는 엄마와 백수인 아빠 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점에 취직을 해 책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 둘이
 
 
레와 2017-08-1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넣어놨어요!!잼있겠당! 까악!

다락방 2017-08-17 11:51   좋아요 0 | URL
응 이거 재미있고 좋아요. 읽어, 읽어, 읽어버리잣!!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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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을 받고 가족 구성원들끼리 충분히 대화하며 딱히 부족한 것 없이 중산층으로 살아온 아이가 있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모나지 않은 사람이 될거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아,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될것이고, 사랑을 충분히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아 사랑을 많이 받아봤구나, 라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지금도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지 않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아는 거라고. 


나 역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해왔고, 그러므로 '좋은' 부모 밑에서 안정적으로 자라온 사람이 어떤 사건의 '가해자' 혹은 범죄자가 될 확률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뒤집어 말하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 대해 은연중에, 나도 모르게, 불행한 과거를 추측하거나 행복하지 않은 가정을 짐작하게 된다는 거다. 나쁜 부모가, 불우한 가정환경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을거야.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듯 보여서,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중 한 명인 '딜런'이 좋은 부모 밑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기가 매우 힘들기도 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가족구성원들 사이에서 자랐는데, 그랬는데도 살인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게 언제든 내 주변의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문제가 없을거라고, 건강한 사람이 될거라고 당연히 믿고 싶어했는가보다. 그래야 살인과 자살이 내게서부터 먼, 다른 사람의 일이 되는 거니까. 우리가 우리 가족 안에서 사랑하고 화목하다면, 문제는 우리와 거리를 두게 될테니까.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으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p.20)



수 클리볼드는 자신의 아들 딜런이 다니는 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아들이 다치면 어쩌나 걱정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이 총을 쏘는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큰 절망에 맞닥뜨린다. 차라리 아들이 자살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딜런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였으므로, 희생자와 유족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괴물이 된다. 수 클리볼드는 자신의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웃들과 사이가 좋고 가족들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건 후에는, '수 클리볼드' 대신 '살인자의 엄마'가 된다. 어딘가에서 누구를 만나도 나라는 정체성이 '살인자의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그 사건 이후로 수 클리볼드는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그 사건이 있은 후로 16년간 끊임없이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 그녀에게 닥쳐온 건 아들을 잃은 슬픔이었다. 이제 다시는 아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어릴 적에 아이가 어땠었는지를 떠올리고, 그 아이와 미래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슬픔에 휩싸인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아들로 인한 희생자를 인식하면서부터는, 죄책감과 한없는 미안함이 그녀를 감싸고, 자신이 알고 있는 딜런과 세상이 알고 있는 딜런의 격차에 혼란스러워한다. 딜런이 왜? 그럴 리가 없어, 걘 사흘 전에도 자신이 갈 대학을 구경 갔었는데, 왜? 딜런은 친구도 많고 착한 아이인데? 

이런 혼란속에 그녀는 딜런이 약에 중독됐거나, 누군가로부터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기 직전 딜런이 남긴 영상속 딜런은, 수 클리볼드가 알던 그 아들과 아주 달랐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우울과 분노에 휩싸였으며, 자신의 의지로 그런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받아들인다. 



당연히 그녀는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아들이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했냐'는 비난에 수도없이 맞닥뜨린다. 그녀가 가장 많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도 그것이다. 내가 왜 몰랐지? 어디서 무엇을 놓쳤지?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일기로 남긴다. 아들이 남긴 일기를 읽고, 과거의 자신의 일기를 읽으면서 '혹시 이게 그 싸인이었나'를 곰곰 돌이켜보고, 희생자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고, 자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정신건강과 우울증에 관련된 전문가들을 만나고 또 만나며, 우울증에 관련된 책들을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쓴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이 책에 꾹꾹 눌러담았다. 



수 클리볼드는 책에서 자신의 아들을 잃었음을 슬퍼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며,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자신의 아들이 잘못했음을 인정한다. 같이 살인을 저지른 에릭때문이라며 에릭만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딜런이 정신이 건강하지 못했다며 아들 변명에 급급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힘든 시간에 자신을 비난한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며, 자신을 위로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그녀는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려고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쓰고, 최선을 다해 그것을 책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자기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은,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혹여라도 앓고 있을지 모를, 아파하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막을 수 있다면 우리가 막아보자고 혼신의 힘을 다해 얘기를 한다. 책은 첫장부터 끝장까지 그 진실함이 차고 넘쳐 내 안의 모든 것들이 뒤틀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 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막연한 원망이 저들끼리 섞인다. 그것들이 섞여서 나는, 나란은 인간을 다시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바이런에게 그랬듯이 딜런에게도 번개, 뱀, 저체온증을 조심하라고 가르쳤다. 치실질을 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사각지대를 꼭 확인하라고 가르쳤다. 십대가 된 뒤에는 음주와 약물의 위험에 대해 최대한 터놓고 이야기하고 안전하고 윤리적인 성행위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딜런이 마주한 가장 큰 위험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나는 내 가족은 자살 위험이 전혀 없다고 마음속 깊이 믿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사이가 친밀하기 때문에, 혹은 내가 빈틈없고 민감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안전하게 지킬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었다. 자살은 다른 집에서나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은 틀렸다. 

자살에 대해 내가 알던 것 전부가 틀렸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그 까닭이 뭔지 나는 안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거나, 비겁해서 자기 문제를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순간적 충동에 휩싸이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보는 문화적 편견을 나도 받아들였다. 너무 나약해서 삶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바라는 사람,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은 사람이라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쉽사리 판단하는 정확하지 않은 생각들이었다. (p.256-257)





수 클리볼드는 정신의 고통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육체적 고통은 손쉽게 얘기하고 치료 받으러 다니면서 정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숨기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정신의 고통에 대한 낙인을 피하려고 치료받지 않아, 더 큰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는 그 낙인을 없애야하고, 정신이 고통스러우면 신체의 다른 부위가 고통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치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픈 사람도 또 아프지 않은 사람도, 정신의 고통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혹여라도 이렇게 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딜런에 대해 변명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걱정하며, 정신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무조건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잊지않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의 고통을 무시하면 오히려 자기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더 큰 고통속에 몰아넣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끊임없이 얘기한다. 정신의 고통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수 있도록, 우리는 낙인을 없애야 하고, 또 평소와 다른 상태인건 아닌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죄책감과,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다른 사람들에겐 고통이 없었으면 하는 그녀의 바람이, 가득 차있다.

사건 이후 그녀의 삶도 혹독했겠지만, 이 책을 쓰는 과정도 그러했으리라.




덕분에 내 안의 것들이 뒤틀렸다. 내 안의 것들이 뒤틀려서 나는 나를 재구성한다. 재구성된 나는 아마도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럴 수도 있어' 를 더 많이 갖게 되지 않을까. 무조건 누군가를 탓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아, 어떻게 그 지점까지 가게 됐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나는 수 클리볼드를 살인자의 엄마로 먼저 정체화 시키기에 앞서 수 클리볼드로 먼저 볼 수 있게 되는 거 아닐까.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충분히, 잘 애도하고, 자살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힘이 실리고, 그녀의 말이 설득력을 갖고 모두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의 남은 삶은 여전히 아픔과 슬픔으로 채워질테고 그걸 극복하라고는 감히 내가 말할 수 없지만,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잘 전달될 수 있는, 그런 삶이길 바라본다.



여러분, 이 책 읽읍시다. 내 안의 것들이 뒤틀리는 경험을 함께 느껴봅시다. 

제가 진짜 강하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우리는 애들한테 동화를 읽어주고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고 가르치죠." 내가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쓸 때 수가 내게 한 말이다. "지금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선해질 능력이 있고 또 나쁜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겠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선한 면과 악한 면, 둘 다를 사랑해야 한다고요." (p.10, ‘앤드루 솔로몬‘의 해설 中)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정리해주면 도움이 될 것 같군요.
1.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 혹은 어떻게 하지 않아서 딜런이 그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2. 딜런이 어떤 상태인지 부모님이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딜런은 원래 비밀이 많은 아이고 자기 내면을 부모님뿐만 아니라 자기 주위 모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감추었습니다.
3. 삶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딜런의 심리작용은 심하게 악화되어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4.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딜런의 이전 자아가 아직 남아 있어서 총격 도중에 최소 네 명을 살려 주었습니다.
(p.262, 피터 랭먼 박사의 이메일 2015.02.09)


무릎을 다치면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병원을 찾지 않고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관절에 얼음찜질을 하고, 다리를 높이 괴고, 운동을 쉬다가 며칠 지나도 차도가 없으면 정형외과에 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신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진짜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아무도 다친 무릎을 의지와 용기로 낫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낙인을 피하려고 스스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만 한다. (p.436-437)

내 불안장애를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게 되어 수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뇌건강 문제는 심장병이나 인대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는 건강 문제라는 사실이 갑자기 한낮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이런 건강 문제와 다를 바 없이 치료할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먼저 병을 깨닫고 진단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에는 유방 엑스선 검사와 촉진으로 50년 전에는 놓쳤을 암을 조기 발견해 치료한다. 덕분에 나도 암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언젠가는 뇌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그만큼 효과적인 진단과 개입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뇌의 병을 제대로 인지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병 못지않게 위험하다. 파괴적 충동은 그 충동을 느기는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다. 일부 예외적인 사례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럴 가능성도 낮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그 병을 앓는 사람뿐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도 위험해질 수 있다. (p.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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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7-07-1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다락방님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음.. 그래 나도 이 책을 연초에 읽고 글을 썼었지..‘라고 생각하며 제 글을 찾아보니 안썼던 거에요 ㅎㅎㅎㅎ;; 분명 썼다고 기억했는데.. 그래서 저도 이 책으로 곧 써보려구요 ㅎㅎ 다락방님도 이책을 강력 추천! 하시는 군요. 저도 읽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다락방 2017-07-12 11:53   좋아요 0 | URL
블랙겟타님 이미 읽으셨군요!
일전에 블랙겟타님의 마징가 z 글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오오옷, 이 책에 대한 글을 써주신다면 제가 후다닥 달려가서 역시 반가운 마음으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얼른 써줘욧!

책을 읽는 내내 제 안의 것들이 뒤틀리는 기분이었어요. 제 친구도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둘이 그런 얘길 했어요.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정말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읽기 전의 저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요. 블랙겟타님, 이 책에 대한 글 기다리고 있을테니 꼭 써주셔야 해요!

북깨비 2017-07-12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이동진님께서 영화 곡성 평론 때였나 아님 빨간 책방에서 였었나.. 아무튼 사람들이 카오스 (혼돈, 무질서)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인과관계 (질서)를 선택하는 이유는 불행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데 이 불행에 인과관계가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건데. 하지만 이 불행에다가 인과관계를 만들어 주면, 예를 들어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사람의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이야 우리집은 사랑이 넘쳐나니까 그런 일은 절대 안 일어나 나는 안전해! 하고 안심하고 싶은, 불행한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불행이 안 일어날꺼야 하는 절박한 논리가 형성이 되니까요. 이런 논리의 희생양으로 잘나가다가 한순간에 불행해진 연예인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이유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거 다락방님 리뷰를 보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됩니다.

다락방 2017-07-12 16:50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북깨비님.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이 책을 읽다보면 바로 그런걸 알 수 있어요. 저는 언제나 그렇게 안다고 생각해왔으면서도 인정하긴 싫었던 것 같아요. 그게 그렇게 어디에나 언제든 올 수 있다고 인정해버리고 나면, 결국 제 것이 될 수도 있을테고, 그걸 받아들이기가 너무 싫어서 조건을 붙였던 것 같아요. 내 가정환경은 그렇지 않으니까, 우리 집은 화목하니까, 하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수 클리볼드 역시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아, 운명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삶이라든가 하는 건, 대체 뭐지? 어떤 식으로 굴러가고 있는거지? 하고 혼란이 찾아오더라고요.

북깨비님, 이 책 참 좋습니다. 북깨비님께도 일독을 권합니다.

2017-07-24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5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을 향해서 2017-08-2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지금 보고 있는데 박찬욱 감독의 서평이 인상적이기도 하였는데 읽다보니, 자식 키우는 일이 이게 참... 한 생명을 키운다는게... 무거운 부담감으로 다가오더라구요. 아이의 행동이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고, 혹은 내가 대체적으로 잘 하더라도 아이는 그렇게 못 느낄수도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세상엔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 키우는 부모가 한 번쯤은 읽었으면 하는 책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늘상 이럴거야 라고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걸 자각하고 사람을 더 폭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예요. 반 정도 읽은터라 이 정도 느꼈던 것 같아요. 알라딘에서 온 메일을 체크하다가 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반가워서 몇 글자 남기고 갑니다. ^^ 다락방님의 평 중에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의 이야기는 저도 읽고 한 대 탁! 맞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 부분을 읽으며 아이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할 때 한 마디를 하더라도 신중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생각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지만요;;^^ 잘 보고 갑니다~~~
 
그림자밟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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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통당한 이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 마음이 좋은데, 그러다가도 불쑥, 고통을 주는 것도 인간이란 생각에 인류애가 사라진다. 또 그러다가 다시 아, 그래도 그들의 영혼을 만져주는 존재도 인간이야...이렇게 눈물도 핑- 고이고.

2. 메밀국수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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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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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에는 눈웃음청년과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묻는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그와의 대화로부터 배우는 것도 많다. 오늘은 '각자의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과연 좋은 것인가, 옳은 것인가, 하는 얘기를 시작해서 각자의 페미니즘 쪽으로 결론이 났는데, 그러니까 지난 토요일 북콘서트에서 누군가 그런 얘길 한것이다. 요즘 서점에 가면 페미니즘 책이 많지만, 실상 그들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지가 않다, 온건하다, 고. 그러자 윤김지영 쌤은, 그게 우리 출판계가 딱 그만큼까지를 허락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얘기를 하신거다. 더 극단적인, 래디컬한 페미니즘에 대한 책 소개까지는 아직 할 수 없는, 아직은 이만큼까지만 소개할 수 있는 딱 그정도. 쌤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하셨다. 이를테면, 흑인 인권운동을 위해 싸운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기득권이었던 백인에게도 좋을까, 기득권인 백인은 불편할 것이다, 하는 얘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것이 '옳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게 될까?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를 위한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거였다. 성평등에 가기 위해서는 기득권의 불편함은 당연히 따라올 터, 그것이 과연 '모두를 위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페미니스트 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도 모두 각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서로 싸우기도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더 옳다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페미니즘 내부에서 이렇게 서로 자기 주장을 피력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모순일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한 방향을 보느니만큼 다같이 어깨동무하고 사이좋게 가면 더 빨리 닿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결국 지향하는 바에 닿기 위해서는, 갈등은 필연적으로 따라올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눈웃음청년과 나는 '각자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과, 내 친구 a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내 친구 b 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되,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살아온 환경과 각자의 경험이 모두 다르니까.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바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같은 페미니즘 책을 읽어도 서로 다르게 소화해낼 것이며, 받아들이는 게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걸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갈등은 결코 '모순'으로 표현되어져서는 안되는 것 같다. 갈등은 모순과 다르니까. 



토요일에 만난 친구는 정희진 쌤의 말에 대부분 동의한다고 했지만, 벨훅스도 읽었지만, 아, 뭔가 어딘가 다른 걸 더 듣고 싶어서,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서 윤김지영 쌤의 북콘서트에 오게 됐다고 했다. 나 역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발언을 듣고 싶었다. 내가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페미니스트가 된다고 했을 땐, 그건 이미 유명한 페미니스트 하나만을 모델로 두고 가는 게 아니다. 다양하게 읽으면서 또 다양한 강의를 들으면서, 거기에서 내가 느끼는 바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하고 내 자신을 성찰하며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어느것이 옳고 그른지, 어디를 향해 나아갈건지 물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옳게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 이런 페미니즘에 있어서 내부 갈등은 필수적이지 않을까. 나 하나의 개인을 놓고 봐도 내적 갈등이 수시로 오고가는데, 하물며 페미니즘이라는 성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 어떻게 아무 잡음 없이 앞으로 앞으로 쭉쭉 내달을 수 있겠는가.




윤김지영 쌤은 이 책에서 그간 헬페미니스트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어떤 액션을 취해왔는지를 잘 정리해주었다. 이미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던 바를 차근차근 정리해둔 그런 책이다. 게다가 틈틈이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에 대한 언급도 있어서 지금까지 내가 여기 있는 이유에 대해 다시 돌이켜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개인의 내적갈등과 집단의 내부 갈등을 어쩔 수 없이 끌고 가야 하는 것도 고개 끄덕이며 인정할 수 있었고.



페미니즘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행동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어진 것들, 몰카를 몰아내고자 하고 리벤지 포르노의 용어를 바꾸는 것들을, 페미니스트들이 해왔다. 언젠가의 페미니즘 강연에서 이현재 선생님은 그간 온건파 페미니스트로 살았는데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 이제 자신도 래디컬로 돌아서기로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이만큼 바꾸는 데에는 지옥을 헤쳐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한 것 같다. 헬페미니스트들의 행동력이 없었다면, 그들의 강한 나대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몰카에 시달리고, 여자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마치 잘못해서 복수를 당하는 것마냥 리벤지 포르노란 용어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일전에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 있던 '혐오'라는 단어에 대해 눈웃음 청년과 이야기를 나눴다. 만약 다른 사상이었다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격한 단어라고 했을 때, 혐오라는 단어를 버리고 다른 단어를 선택하려 했었을텐데, 페미니즘은 끝까지 혐오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 입맛에 맞춰 버리는 게 아니라 가져간다는 것에 대해 그는 감동한다고 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취해야 할 자세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너무 심해', '그건 아니야' 라는 숱한 말들에 물러서지 않는 것. 지금처럼 계속 나대고 시끄럽게 쿵쾅대는 것. 그래야 조금, 아주 조금 바뀌니까. 



언젠가 친구들과 할머니 페미니스트가 되자, 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친구들에게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할머니 헬페미니스트 들이 되자고. 영화 매드맥스에서처럼, 후손에게 씨앗을 건네줄 수 있는 전사 할머니가 되고, 공격에 맞서 싸우는, 그런 할머니가 되자고. 헬페미니스트라니, 정말 좋다.




아래 올리는 밑줄긋기는 모두들 다 읽어보았으면 한다.







리벤지revenge포르노-헤어진 연인이나 부인의 신체, 성행위를 찍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여성의 동의 없이 온라인에 유포하는 범죄 행위-라는 용어에 대한 헬페미니스트의 비판을 살펴봅시다. ‘리벤지‘라는 단어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남성의 사적 복수, 사적 정의 구현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포르노‘라는 단어는 피해자인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선의 연장이므로 헬페미니스트는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관점임을 지적합니다. (p.38)

때문에 헬페미니스트는 리벤지 포르노란 용어를 파기하고 ‘디지털 성범죄digital sexual crime‘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해 널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잘못에 방점을 찍어 이것을 사회적 문제로 부각함으로써 적극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것이지요. 소라넷 폐쇄를 이끈 DSO(디지털 성범죄 아웃)팀은 영상 유출자만이 아니라 이를 유통시키고 소비하는 자들 역시 디지털 성범죄의 공범자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공범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동영상 유포, 재생산 행위를 ‘유포 강간‘으로, 영상소비행위를 ‘시청 강간‘으로, 악성 댓글로 조롱, 협박하는 것을 ‘온라인 강간‘으로 명명합니다. 강간이라는 의미의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디지털 성범죄가 어떠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사회적 죽음-사회로부터의 백안시, 배제, 열외, 비하, 협박에 의해 이민을 가거나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는 것등-은 물론 생물학적 죽음-디지털 성범죄 영상유출 후 자살 등-으로 내모든 구조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p.40-41)

이후 데스티니 차일드 게임 일러스트 중에서 송 작가의 그림이 지워집니다. 송미나 작가가 사용한 한남충이라는 용어가 메갈리아라는 징표로 받아들여져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넥슨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남초 커뮤니티딜의 소비자 집단주의가 시작되면서, 소강기로 접어들었던 메갈 사냥이 재점화된 겁니다. 김치녀와 된장녀라는 용어는 남초 커뮤니티가 골고루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며 확대 재생산되고 농담처럼 용인되지만, 한남이나 한남충이란 용어는 메갈리아의 전유물로 규정되어 금기와 외설의 언어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재연된 것입니다. 단지 여성이 남성을 호명하는 용어를 발명해 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성우는 목소리를, 여성 일러스트 작가는 그림을 몰수당하게 된 것이지요. (p.76)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강간문화‘라는 단어는 형용모순은 아닌지 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떻게 강간이라는 흉물스런 폭력과 문화라는 고상한 단어가 조합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문화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화는 자연과 야만, 미개성의 영역을 설정해야만 존립 가능한 개념입니다. 문화는 자연에 대한 조작과 통제, 이용을 통해 형성되며, 이러한 정복 행위를 문명화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문화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들 간의 결속과 담합으로 이루어진 문화가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여성입니다. (p.98)

폭로divulgation는 자족적 독백이 아니며 비림의 봉인을 풀어 공론장 안에 던져 넣고 변화를 촉구하는 주체적인 발화양식입니다. 오늘의 문명 안에서 누군가가 누리는 특권이 다른 누군가를 짓밟음으로 이루어져 온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문명의 밑바닥에 설치된 가부장제의 음험하고도 비루한 하수구를 철거하려는 행위입니다. 또한 기존의 가치와 의미체계에 편입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의 들끓음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것은 기성 질서가 제어할 수 있는 규칙을 벗어나는 것으로, 세련되기보다 난장판에 가깝고 통제되지 않은 소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폭로는 고백을 듣는 청자로 ‘정의로운 남성‘의 자리를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모두를 진창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성폭력을 폭로하는 행위자는 여성 포식 구조인 강간문화를 방관해 온 남성에게 비판의 활시위를 당깁니다. 여기서 무지의 권력이란 그들 역시 여성을 향한 폭력을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無知의 권력‘을 누리는 공범자이기 때문이빈다. 그러한 무지는 단지 둔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알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몰라도 된다고 믿는 특정 문화의 소산입니다.(p.108)

이제 여성들은 일상의 고통과 상처의 목록을 꺼내들고 주저함 없이 그것들의 부당함을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자기검열 구조에 갇혀 ‘내 탓이오‘를 외치며 착한 죄인으로 고백의 값을 받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폭로 행위자들이 자신이 감내해온 고통의 강도가 얼마만한 것인지, 자신이 받은 상처의 깊이가 어떠한 것인지에 오롯이 집중하며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혐오사회의 긴 터널을 무너뜨리는 다이너마이트이자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폭죽입니다. 폭로는 바로 해방의 언어 그 자체인 것입니다. (p.111)

밀실에서 거리로 여성들의 공간 이탈을 가능하게 한 것은 통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통감通感이라는 정동 역학은 어떻게 개념화될 수 있을까요? 통감의 축자적 의미는 ‘마음에 사무치게 느낌‘입니다. 이에 한정하지 않고 새로운 윤리적 감각으로 이론화한다면, 통감은 고통의 감각이 나를 오롯이 관통하는 ‘가로지름‘의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p.153)

나아가 통감은 타자의 고통을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절절히 반응하게 합니다. 타자의 고통을 관망하지 않고 그것에 반응하며 행동하는 전신全身의 행위자가 되게 합니다. 지금까지 여성 살해에 대한 반응은 공감에 가까웠으며, 대부분 죽은 여성에 대한 안타까움에 그쳤습니다. 심지어 피해자 여성의 행실을 의심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5·17 페미사이드를 "강남역 유흥가 살인 사건"으로 보도하는 방식이 그러한데, 여기에는 ‘유흥가‘라는 적절치 못한 곳에 여성이 있었기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제시되고서야 유흥가라는 당너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즉 여성의 죽음은 살아남은 여성들에 대한 경고이자 공포정치의 효과적 표본이 되어왔기에 여성 살해는 추모의 연대와 분노의 저항으로 적극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p.156)

통감은 어느 한 사람의 고통에 다른 이가 먹혀버리는 것, 일방적 흡수행위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변이와 이행의 에너지에 온전한 자리를 담보 받을 수 없는 것, 이러한 차이의 회오리로 빨려들어가 변신의 파동에 일렁여 새로운 행위를 구성하도록 하는 것이 통감입니다. 즉 감정적 전염은 감정적 매몰에만 그쳐 어떠한 행위도 구성할 수 없도록 하지만, 통감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명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행위화로 이행해가는 인식의 차원 또한 내포합니다. 또한 통감은 감정과 사유의 섬세한 뉘앙스가 진동하는 접촉의 양식이자 생이 약동하는 계기입니다. 새로운 행위의 존재 진동을 낳는다는 점에서 감정적이자 인식적 차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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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7-07-0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동안 원론적인 페미니즘 책에 조금 지쳐있었는데 좀 새로워 보이네요 :) 사러갑니다

다락방 2017-07-05 13:51   좋아요 1 | URL
네, 잘 정리되어 있어서 좋았어요. 그것보다 또다른 페미니스트의 글을 읽는 것도 기뻤고요. 헬라스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얼른 읽어주세요!
 
눈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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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가 .. 내겐 힘들구나. 37쪽까지 읽다가 포기하고 덮어버렸다. 이 책을 좋아할 사람이 떠올랐지만, 아 나는 진짜 못읽겠고...
별 하나는 이 책 안읽고 준 것이다.
이 책을 호기심에 접할 사람들을 위해 언급하자면, 초반부터 오줌 얘기 엄청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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