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낙태 여행 - Journey for Life
우유니게.이두루.이민경 외 지음 / 봄알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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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반대한다'고 기독교는 말한다. 물론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있는 모든 신앙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독교는 동성애를 반대한다. 애초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일을 어떤 이유로든 반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천주교는 낙태를 합법화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뱃속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임신한 여성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을 않는다.



종교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일까? 


이 책, [유럽 낙태 여행]을 읽으면서 나는 이 세상이 여자를 미워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종교만이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종교가 큰 축이 되어서 어떻게든 여자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하는구나. 이건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이들이 찾아간 모든 곳, 우리가 흔히 선진국으로 알고 있고 여성의 인권이 이곳보다 훨씬 높을거라 짐작한 곳들에서도 그랬다. 종교는 정치랑 손잡고 여자들을 제맘대로 하고 싶어했다. 통제하려고 했다. 


종교는 무엇이고 신앙은 무엇일까?


신은 애초에 무어라 말했을까? 동성애를 쳐죽어야 한다고, 낙태하는 여자는 타락한 여자라고 그렇게 신은 말했을까? 그랬기에 종교를 믿는 자들은 신의 말을 따르는 걸까?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연대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매달 있었던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각 지방에서 버스까지 대절해가며 와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자국의 여성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억압받는 다른 나라의 여성들을 위해서도, 페미니스트들은 할 수 있는 힘껏 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 아일랜드, 폴란드, 루마니아, 네덜란드 까지 날아가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듣는 여자들이 있고, 기꺼이 그들에게 시간을 내주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자들이 있다. 게다가 낙태가 불법인 곳의 여자들을 돕기 위해 낙태가 합법인 곳의 여자들이 손을 내민다. 읽다보면 각국의 절망스런 상황에 우울해지지만, 다 읽고나니 여자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연대하는한 세상은 바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각국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보자고 생각하고 실제 행동에 옮기고, 충실히 기록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내는 일. 보통의 에너지로는 되는 일이 아닐텐데, 좋지 못한 환경들을 마주할지라도 기어코 해내어 독자들앞에 내어준 것이 감사하다. 나는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여행하고 기록하고 출판해준 사람들 덕에, 다른 나라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책에 실린 이 사진이 너무 좋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동하는 중에 기차 안에서 저마다 마구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읽고 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 애정을 느낀다. 책 읽는 모습에도 숑- 가버리지만 이렇게 쓰는 모습에도 반해버려..)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

더 잘 싸우기 위해서 더 잘 알아야 하니까.




(유럽 낙태 여행은, 하노이에서 읽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읽었지만.)












플로랑스 모에르노는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로, 국가에 기여한 이들에게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지금까지 열여덟 권의 책을 펴낸 왕성한 학자이자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성들의 모임인 ‘제로마초‘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제로마초는 ‘성매매에 반대하는 남성들‘이라는 선언을 주창하는등 남성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남성들로 모인 단체다. 이들을 ‘남성 페미니스트‘가 아닌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성들‘이라 지칭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이틀 전 마르틴과의 대화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중에 "프랑스에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많은가"를 물었을 때 마르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없어요.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남자는 있지만." (프랑스, p.36-37)

유럽 내부의 연대에 대해서도 물었다. "다른 나라와도 협력을 하신다고 들었는데"라고 운을 떼자 그는 즉각 "페미니스트들과"로 정정했다. 국가적 협력이 아닌, 국경을 넘은 페미니스트들의 연대다. 스페인에서 낙태를 다시 불법화하려는 조짐이 보였을 때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의 열차‘라 이름 붙은 기차를 타고 마드리드로 갔다. 폴란드에서 검은 시위가 있었을 때는 주 프랑스 폴란드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했다. 이런 식으로 어떤 나라의 여성 인권이 퇴행의 위협을 받을 때에 다른 국가에서 그 상황을 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건 유효한 전략이라고 그는 말했다. (프랑스, p.47)

낙태를 하는 여성은 갓 스무 살쯤 되어서 아무 남성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하는 이로 그려지곤 하지만, 실제로는 기혼자가 낙태를 더 많이 한다. 이런 현실을 더 많은 이가 직시해야 한다. 한국의 통계도 마찬가지다. 임신 중절 수설을 받는 여성 가운데 기혼 여성의 비율이 언제나 더 높았다. 1971년부터 플라닝 파밀리알에서 일했던 플로랑스가 주로 만났던 이들도 아이를 이미 너무 많이 낳아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고 찾아오는 부부였다. 이러한 현실을 토대로, 잘못 만들어진 이미지를 부수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여성들의 무분별한 성행위와 그에 따른 낙태‘라는 이미지에는 쾌락적인 성관계에 형벌로서 임신을 뒤따르게 하겠다는 징벌 심리가 분명하게 깃들어 있어요." (프랑스, p.46-47)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새로 맥주를 한 잔 더 시킨 뒤 아들린이 좀 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동시에 아들린에게로 귀를 기울였다.
"다들 연애를 어떻게 해요?"
듣자마자 그의 심각한 마음이 너무 이해되어 웃음이 터졌다.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뭐든 설명해주고 이해시키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거두절미 공감했다.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접할수록, ‘과연 남성과의 연애, 가능한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마저 전 지구적으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음, 저는 거의 포기했어요. 애인이라고 해도 모든 걸 설명해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만 알면 좋을 것 같아요."
깊이 공감되는 데 반해 해줄 수 있는 답은 신통치가 않았다. (프랑스, p.56)

민경의 친구여서인지 엘리즈에게는 궁금한 것들을 더 편안하게 물을 수 있었다. 아들린과 비슷한 나이대인 엘리즈 역시 길거리 성희롱이 요즘 가장 이슈가 되는 사안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게 별 거 아니라고들 하지만 한 번 길을 지나가는데 대여섯번씩 똑같은 일을 겪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지."
그리고 이어진 말도 아들린의 고민과 닿아 있었다.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이 문제가 나한테 얼마나 큰지 설명하는 데 힘이 많이 들어서 피곤해." (프랑스, p.61)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보다 보수적인 스페인을 본받아 낙태를 불법화하자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그리고 낙태가 합법이긴 하지만 낙태 수술을 받을 병원을 찾는게 생각보다 어렵다고 한다. 의사에게 낙태 수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직접적으로 수술 거부를 하지 않더라도 12주를 넘겨 수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엄연히 불법임에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비하면 낙태가 여성의 권리로서 보장되어 있는 프랑스에서마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프랑스, p.62)

사과주 한 병을 다 비워갈 즈음, 늘 궁금했던 것을 엘리즈에게도 물었다. "너희는 어떻게 낙태권을 갖게 된 건지 학교에서 배웠어?" 엘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학교에서는 안가르쳤을 걸. 나는 아마 어디서 우연히 들어서 알았던 거 같은데."
주어지지 않은 권리를 거머쥐고자 싸웠던 과거를 배우지 않으면 과거와 현재는 단절된다. 투쟁 이전을 살지 않았던 이들에게 권리는 태초부터 있던 것, 확대되지도 축소되지도 않는 것으로 남는다. 특히나 여성의 권리를 걸고 싸운 투쟁의 역사는 우연한 기회가 아니면 잘 전해지지 않는다. (프랑스, p.65)

그는 31살 때 임신을 했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사비타는 일을 그만두고 인도에 있는 그의 양친을 초대했다. 그러나 임신 17주째인 10월 21일, 심각한 등 통증을 호소하며 골웨이 대학병원을 찾았고 의사로부터 태아가 생존 가능성이 없으며 이미 유산이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사비타는 병원에 임신 중절 수술을 거듭 요청했으나 태아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어 불법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곳은 가톨릭 국가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10월 24일, 태아의 심장박동이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사비타의 몸에서 죽은 태아를 제거하는 수술이 이루어졌으나, 패혈증에 걸렸다. 유산 중에는 자궁 경부가 열려 여성은 감염에 보다 쉽게 노출되고 유산 기간이 길어질수록 감염 확률은 높아진다. 사비타의 남편에게 의사들은 부인이 젊으니 곧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28일 사망했다. 사비타를 살릴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의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비타가 인도나 영국에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 여성들은 국가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똑똑히 확인했고, (아일랜드, p.115)

분노했다.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사비타의 죽음을 추모했고 추모 물결은 정치적 흐름이 되었다. 사비타 사망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만난 ARC와 로자를 포함헤 아일랜드 여성의 재생산권 운동을 하는 페미니즘 단체가 다수 생겨났다. (아일랜드, p.115)

섹스를 해서 즐거움을 누렸다면 아이를 임신해서 그 쾌락에 대한 죄를 치러야 한다는 이 가톨릭 관념에서 탄생한 끔직한 실례가 바로 ‘막달레나의 세탁소(The Magdalene Laundries)‘다. 막달레나 수용소라고도 불리는 이 시설은 "몸을 버린 여자들"에게 지낼 곳을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가톨릭 시설로, 18세기(1765년)부터 20세기(1996년)까지 존속했다. 이 시기 아일랜드에서 여성들은 섹스를 했거나, 강간당했거나, 아기를 낳았거나, 아니면 그냥 너무 예쁘다거나 하는 이유로 납치당해서 이곳에 수용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더럽혀진 몸과 죄를 씻는다. 섹스를 하지 않았다 해도 "예쁜 사람은 필연적으로 오만해질 것이므로" 막달레나 세탁소에 끌려간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이 세탁소를 거쳐 간 여성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된다. 1993년 이 시설 중 한 곳에서 시신 155구가 암매장된 묘지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막달레나 세탁소의 폐쇄성과 각종 문데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고 2013년에 국가 차원에서 사과문을 발표했다. 막달레나 세탁소를 운영해온 것은 가톨릭 세력이었지만 은밀히 국가의 지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p.121)

"검은 시위를 계기로 겨우 이게 정치적 의제가 됐어요. 지금까지 정치에서 낙태나 여성 인권은 늘 뒷전이죠. 민주화가 완성되면 얘기하자, 경제가 더 좋아지면 얘기하자는 식으로요. 하지만 이제 낙태는 분명히 메이저 이슈예요."
전면 금지 법안 발표와 그 법안이 내포한 끔찍한 통제에 들불처럼 일어났던 여성들은 이제 그저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권리는 점점 더 위협당할 뿐임을 경험으로 첨예하게 인지하고 있다. 검은 시위 이전까지 재생산권이나 모성, 양육 등 여성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주제들은 계속 진퇴를 반복할 뿐ㅇ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공공에서 이야기되고 있으며 나아져야 한다는, 낫게 만들어야 한다는 공유된 열망이 있다. (폴란드, p.194-195)

보수집권당의 전면 금지 법안이 발표되자마자 수많은 여성들이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유산으로도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것, 여동생이 범죄를 당해 임신을 했는데 의사들이 그를 돕지 않으리라는 것, 여성들이 건강하지 못한 태아를 가져서 죽을 수도 있을 때 의사는 여성을 돕지 않으리라는 걸 안 거예요. 여성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국가가 여성 시민의 편이 되기는커녕 현실과 괴리된 명분을 위해 그저 통제하고 처벌하리라는 데서 공포를 느낀 거죠."
국가와 사회가 여성이 아니라 태아를 도우리라는 공포. 수많은 폴란드 여성은 낙태 전면 금지 법안에서 그것을 읽어내고, "목숨에 대한 위협"을 느꼈다. (폴란드, p.196)

"우리는 두렵지 않다, 혼자가 아니다. 그날 우리는 그저 그 공간을 주장했어요. 바르샤바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모습. 내게는 그게 강력했습니다."
마디마디 힘주어 말하는 우르술라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가 전해주는 검은 월요일 당일의 바르샤바를 상상하며, 그리고 그의 어조에 우리는 울컥했고 넷 중 세 명이 눈물을 찍어냈다. 국가의 폭력 앞에서 여성들은 들고 일어났고, 서로를 보고 힘을 얻으며 혼자가 아님을 확신했다. 이 경험은 폴란드 여성들 그리고 활동가들에게 선명한 자산으로 남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폴란드, p.199)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도, 정치적 보수파와 결탁해 공교육과 공공기관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톨릭 이념은 사회적 인식 전반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폴란드 사회에서는 낙태를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 낙태 전면 금지화 법안 발의 전 가톨릭교회는 자원활동가를 조직해 낙태 반대 캠페인을 했고 그들을 지원했다. 작은 마을에서는 지역사회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교회가 사람들의 생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낙태를 하는 여성들조차 낙태는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죄이며 낙태라는 행위가 여성에게 후유증과 트라우마를 안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죄악시는 낙태뿐만 아니라 피임에도 해당된다. 폴란드에서 여성이 피임약을 구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은 폴란드에 오면서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였다. 낙태가 불법이고 실제로 낙태 수술을 받기가 그토록 어렵다면, 피임이 매우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교육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폴란드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폴란드, p.202)

폴란드의 가톨릭적 교육과 이념은 피임 또한 낙태와 같은 의미에서 죄라고 치부한다. 피임약을 구하는 과정은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다. 피임약 처방을 해주는 의사를 찾아야 하고, 처방을 받으러 간다 해도 피임약을 원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비난하거나 무례한 언사를 하는등 수모를 겪는 일이 흔하다. 한 번의 처방으로 약을 계속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약값 자체도 비싸다. 이런 식으로 폴란드 사회는 여성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주면서 피임과 낙태, 즉 여성 당사자의 재생산권 행사를 막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신앙 있는 이들은 실제로 피임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말을 들으며 한숨이 나왔다. 여성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의 몸과 인생에 대한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 검은 시위를 전후로 변화하고 있는 대중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런 매커니즘은 이 나라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듯했다. (폴란드, p.202-203)

놀랍지 않게도, 사후피임약도 마찬가지다. EU에서 사후피임약 구입에 처방전이 필요한 나라는 폴란드와 헝가리 뿐이다. 그런데 폴란드에서도 2년 전까지는 처방전 없이 사후피임약을 구할 수 있었다. 사후피임약을 처방 없이 구할 수 있도록 명시한 EU의 권고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역행한 셈이다. "왜?"라는 우리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에는 소름이 끼치는 동시에 실소가 났다.
"그들이 말하기로는, 만약 여성이 ‘응급피임약을 사탕처럼 먹으면 어떡하냐‘는 거예요. 사후피임약을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데. 어느 여자가 한 알에 100즈워티(Zt)나 하는 사탕을 먹겠어요. 그런데 정말로 저렇게 말하면서 처방전을 도입했죠. 그들은 여성이 자기가 원하는 사탕을 먹을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아요. 원하는 사탕을 양껏 먹을 수 있는건 남자뿐이죠. 여자는 안 돼요."
한편 폴란드에서 비아그라를 사는 데는 처방전이 필요 없다. 비아그라는 몸에 유해하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고, 때문에 미국이나 독일에서도 처방전이 필요하다.
그러나 폴란드는 남성들이 좋아하는 이 사탕을 제한 없이 허용하고 있다. (폴란드, p.203-204)

낙태를 금지하면서 피임도 금지하는 나라. 계속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끝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이것이 폴란드의 현재였다. 그리고 그 기반엔 가톨릭 이념이 있다. 생명은 신이 주는 것이므로 인간은 성행위 이후 즉 재생산을 스스로 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낙태와 피임을 둘 다 죄악시하는 폴란드의 현실이 이 이념에 충실한 결과라고 보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정자와 난자부터가 이미 생명의 씨앗이라고 하지만 남성의 자위는 처벌되거나 비난받지 않는다.
"모든 건 여성을 통제해요. 남성이 아니라요. 가부장제와 가톨릭은 여성에게 그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으려 해요." (폴란드, p.204-205)

우르슬라는 우리의 책에 행운을 빌어주며, 임신 중단은 당연히 얻어내야 할 권리임을 다시금 강조했다. 임신은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생겼을 때 여성은 자신의 삶을 위해 당연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여성 개인은 자신이 임신할 일이 없다 생각한다 해도 마찬가지죠. 예를 들어, 나는 레즈비언이지만, 낙태권은 가져야 해요." (폴란드, p.209)

꽤 신중하게 이어진 그의 답을 간추려보자면, 폴란드 남성들은 임신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더라도 피임을 하는 것을 "꺼린다".
여성이 "알아서 어떻게든 임신을 피하기를" 바란다. 거기까지 듣고 우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자 카타지나는 우리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짓을 하며 덧붙였다.
"가톨릭 기반 교육은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남성의 정액은 축복(blessing)이며 여성의 건강에 좋다‘고." (폴란드, p.214)

유명한 여자들이 낙태가 불법인 와중에 ‘나도 낙태했다‘고 주장하고, 그 이후헤 보비니 사건이 있었죠. 열일곱 살 아이가 강간을 당해서 임신을 해 낙태를 하려고 한 건데 낙태 시술을 한 사람과 조력한 사람들, 그러니까 아이와 아이 엄마를 포함해서 다섯 명 정도가 죄다 법정에 선 거예요. 이 사건으로 여론이 모였죠. 그러자 이번에는 300명 넘는 의사들이 서명을 했어요. 낙태 시술을 한 걸로 처벌이 되니까, 의사들이 다들 ‘나도 낙태 시술 했다‘고요. 사실 한 적 없는 사람들도 성명에 많이 참여했는데, 너무 많은 수가 이렇게 나오니까 법을 적용할 수가 없었어요." (시칠리아 그리고 다시, 프랑스, p.228-229)

"그리고 베유법이 통과됐죠. 베유는 남자로 가득한 국회에서 연설을 했는데, 직후에 욕을 무지하게 먹었어요. 웬걸, 나치라고 욕을 먹었다니까요."
베유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다. 당시 베유는 의원 490명 중 481명이 남성인 국회에서 낙태를 합법호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 연설 직후 그에게 욕이 쏟아졌으나, 막상 법을 통과시키는 데는 우파 의원들도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불법 낙태를 하면서 여성들은 과한 출혈,감염, 질병을 감수해야 했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렀다. 낙태를 한 뒤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쨌든 여성들은 낙태를 한다는 걸 사람들은 알았던 거예요."
그렇게, 프랑스 사회는 여성이 낙태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일종의 ‘합의‘에 도달했다. (시칠리아 그리고 다시, 프랑스, p.230-231)

임신 중단권은 여성이 시민권 문제이면서 원해서 태어난 아이에게 행복한 삶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폴란드의 우르술라가 말했듯 이는 존엄하고 고통 없는 삶의 문제다. 가톨릭의 모순은 짚고 넘어갈 만하다. 정말 배아를 생명으로 보고 소중히 여긴다면 배아의 수정에 참여한 남성에게는 왜 죄를 묻지 않는가? 남성은 왜 피임을 기피하는가? 남성을 위한 피임약은 왜 진작 상용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왜 모든 단죄와 처벌이 여성을 향하는가. 자신의 몸에 대해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라면 여성의 모든 선택에 대한 자유는 늘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맺는 글,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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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영화 - 배혜경의 농밀한 영화읽기 51
배혜경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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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글을 쓰는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인데, 나는 배혜경 작가의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다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오래 남는 문장을 만들어낸다는 건 분명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 책 속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감상을 훅- 읽었고 종종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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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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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장을 펼치자마자 시작되는 '맨덜리' 저택에 대한 묘사는, 공간적 배경에 크게 흥미가 없는 내게는 지루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장소에 대해서 설명할까.. 이어지는 내용이 금세 흥미로워져 정신없이 읽었는데, 다 읽고나서는 맨 앞에 저택에 대한 설명이 나올 수 밖에 없었구나, 하고는 처음으로 돌아가 그 부분을 다시 읽어야 했다. 뭐랄까, 오랜만에 '소설이란 이런 거지'하는 걸 제대로 느꼈달까.


처음 이 소설이 시작할 때 느껴지는 건 흥미로움이다. 돈이 없어 적은 연봉을 받으며 엄마뻘인 부인의 '동반자'가 되어야 하는 아직 어린 '나'는, 부인의 시중을 들며 부인의 오지랖 넓은 성격 때문에 당혹스러워하지만, 그 성격 덕에 '맥심'이란 마흔 두살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이 남자는 '나'와 신분이 다르고 나이차이도 많고 게다가 일년전에 아내를 잃은 터라 상실감에 젖어있어 전혀 연결점이 없어 보였지만,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고 남자는 알게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부모님이 안계셔 적은 연봉이라도 반드시 필요했던 '나'는 마침 내가 사랑을 느끼는 부유한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니, 그와 함께 살날을 꿈꾸며 그의 저택으로 함께 돌아가게 된다.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 느껴지는 건 이제 '슬픔'이다. 저택 곳곳에 전(前)부인 '레베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이 큰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며 하녀들 모두가 레베카에게 길들여져있었다. 레베카가 쓰던 방은 아직도 고스란히, 방금 전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관리되고 있었고, '내'가 하다못해 꽃을 꺾어와 꽂으려 해도 '레베카는 저 화병에 꽃을 넣었지'하는 말을 듣기 일쑤다. 지금 맥심의 아내는 '나'이고 지금 이 저택의 '드 윈터 부인'은 '나'인데, 이 저택은 여전히 전(前) 드 윈터 부인의 취향대로 관리되고 있다. 게다가 그녀가 만나는 남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레베카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를 얘기한다.



어느 여름날 아침, 나는 라일락을 한 아름 안고 서재로 들어가며 프리스를 찾았다. "프리스, 이 라일락을 꽂을 키 큰 화병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원 곁방의 것은 너무 작아요."

"라일락은 늘 응접실의 흰 화병에 꽂습니다, 마님."

"화병이 망가지지 않을까요? 약해 보이던데."

"돌아가신 드 윈터 부인은 늘 그 화병을 사용했습니다, 마님."

"아, 그렇군요, 알겠어요." 흰 화병이 도착한다. 벌써 물이 차 있다. 나는 라일락 가지들을 하나씩 화병에 꽂아 넣는다. (p.206-207)





그러니 남편인 맥심 역시 당연히 레베카를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가끔 '당신이 불행해 보이는데 이 결혼은 잘한걸까'라고 묻는 맥심을 보며 '그는 레베카를 생각하고 있구나' 라고 의심하는 건 얼마나 당연한가. 말없이 가만 있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레베카 생각을 할까' 하고 나로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나.



"거실이 언제 지금처럼 꾸며진 거죠?"

"내가 결혼했을 때요."

"그럼 큐피드 상도 그때 놓였겠군요?"

"그럴 거요."

"그 전까지는 창고에 있었고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사실 그건 결혼 선물이었소. 레베카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거든."

나는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그 단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듯 입밖에 냈다. 전혀 힘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잠시 후 나는 슬쩍 그를 곁눈질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레베카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생각했다. 내가 받은 결혼 선물이 레베카가 받은 결혼 선물을 깨뜨리게 된 상황이 의아하겠지. 큐피드 조각상을 선물한 사람이 누구일지 기억할까. 그 선물을 보고 레베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다시 떠오를까. 레베카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군. 레베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큐피드 포장 상자를 조심스레 열고 있을 때 그가 그 방으로 들어갔는지도 몰라. 레베카는 그를 보고 미소 지었겠지. '우리한테 어떤 선물이 왔는지 한번 봐요'라고 말했을 거야. 상자에 손을 넣어 그 도자기, 손에는 활을 들고 한 발로 서 있는 정교한 큐피드를 꺼냈으리라. '이건 거실에 두어야겠어요.' 레베카는 이렇게 말하고 맥심과 함께 큐피드를 열심히 살펴보았겠지.

나는 계속 손톱을 만지며 딴청을 부렸다. 내 손톱은 볼품없이 짧았다. 특히 엄지손톱은 생살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나는 다시 맥심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벽난로 앞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 목소리는 침착했다. 마구 들끓는 가슴속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는 담뱃불을 붙였다. 그날 하루 동안 스물다섯 개피는 피워댄 듯했다. 이제 겨우 점심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는 벽난로에 성냥을 던지고 신물을 접었다.

"별 생각 안 했오. 왜 그러오?"

"아니, 그저 당신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요. 어딘지 멀리 가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p.222-223)



나는 매사에 이런 식으로 의심하게 된다. 남편이 말이 없으면 레베카 생각을 하겠지, 라고 그 상황을 상상하며 속을 끓이고 하인들은 지금 서로 이런대화들을 나누겠지, 하고는 또 애를 태운다. 그녀가 지금 이 저택의 안주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그녀가 이 저택에 여전히 손님인 것만 같다.



그녀가 이렇게나 어리지 않았다면, 게다가 자신의 계급에서 오는 자격지심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이 모든 상황에서 담대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라일락 화병으로 그거 싫은데, 다른 거 가져와,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도 아니라면 직접 일어나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맞는 것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조금 더 당당한 성격이었다면, 세상 무서울 게 없이 맞서 싸우는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당신이랑 있을 때 자꾸 과거 아내의 흔적이 느껴져, 내가 제대로 느끼는거야?'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서툴고 갈 길이 멀다. 제대로 맞서 싸우지를 못하고 그저 슬픔속에 내동댕이 쳐진다. 그 슬픔에 빠져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의심, 그저 의심 뿐이다. 그 의심들은 당연히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로 닿게 되고.



그런데 '내'가 그를 사랑한다. 이 압박감, 내가 주인이 아닌 것 같은 저택이 주는 압박감에 시달리느라 사랑하는 맥심이 집을 비웠을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고, 실제로 다른 곳에 있었더라면, 하고 다른 곳이 더 편안할 거라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내가 그를 사랑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너무 슬프고, 전 부인의 흔적이 너무 곳곳에 남아 너무 힘든데, 그런데 내가 그를 사랑한다. 저택을 둘러싼 모든것, 심지어 일하는 사람들마저도 내게 적대적인데, 그런 환경속에서 꿋꿋이 내가 남편을 사랑해. 그런 남편이,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 틈만 나면 내 옆에서도 전 부인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하니..



아 이것은 너무나 깊은 슬픔이 아닌가, 슬픔의 새드니스.. 슬픔 오브 슬픔... 결코 내가 놓이고 싶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나는 '나'의 이 슬픔에 푹 빠져서, 아, 혹시라도 내가 재혼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면, 큰 저택에 사는 남자랑은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만것이다. 그가 혼자라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든 그의 옆에서 나로 인한 행복을 느끼게끔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시로 좌절될 지언정,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그에게 내 사랑을 알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싼 많은 이들이 자꾸만 '너는 그의 전부인보다 못하지롱~' 이러면, 내가 그걸 어떻게 이겨낸단 말인가. 만약 재혼하는 남자가 내게 결혼하자고 한다면, 그가 너무 큰 집에 살지 않기를 바라야겠다.


또한 '지나치게' 사교적이었던 남자여도, 나는 그의 두번째 부인 자리를 거절하리라. 동네 사람들도 만날 때마다 '니네 저택에서 열렸던 그 무도회는 진짜 짱이었어!' 이러고 있으니, 날더러 대체 어쩌란 말인지. 나는 그녀가 아니야, 나는 나야. 나는 그녀처럼 승마를 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도 않아. 이렇게 너무 사교적인 남자는 주변에 너무 흔적을 많이 뿌리고 다녀서 내가 처리하기 곤란해...만약 나에게 자신의 두번째 부인이 되어 달라고 하는 남자가 너무 사교적인 남자라면, 나는 거절하고 그냥 데이트나 가끔 하며 살자고 해야겟다. 어휴, 내가 이제와 그렇게 힘든 길로 갈 순 없어...


라고 나는 레베카의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가,



아아, 정녕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제부터는 스릴있어 지기 시작하는 거다. 아니, 슬픈 사랑이야기가 어떻게 살인 심리 미스테리 공포..같은 게 되어버렸지? 이 전개는 놀랍도록 자연스러워서, 이제는 '아아, 이제 어떻게 될것인가, 모든 비밀은 밝혀질 것인가' 하고 초조하게 결말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소설이 이렇게나 놀랍다. 흥미와, 슬픔과, 초조함을 다 주는 것이야.



게다가 그녀가 생각했던 것이 다 맞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이런 거다.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과연 그것인가'

'내가 짐작하는 그것은 정말 그것인가'



내가 사랑한다고 온전히 그 사람을 알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나의 '사랑'에 갇혀서 내가 보고싶은 대로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생각을 오른쪽 방향에 놓았기 때문에, 나는 모든 사소한 일들을 오른쪽에 맞춰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실제로 '내'가 생각한 것은, '나'의 짐작은 달랐다. 나의 모든 생각에 맥심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라고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틀렸어!

내가 틀렸다!



어떤 '틀림'은 그러나 얼마나 좋은가. 차마 그 대답이 두려워 묻기를 참아왔는데, 그러나 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진실은 나의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가리키고 있었어!!




또한 물음을 준다.

나는 '이렇다 해도'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소설속의 '나'는 그랬다.

그렇지만 여기 이곳의 '나'는 잘 모르겠다.

끊임없이 물었다. 이게 가능할까, 내게도? 내게도 이게 가능한 일일까, 이렇게 될까?


이 모든 것들을 소설이 준다. 이 모든 것들을 이 책, 《레베카》가 주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쓰여진 시대가 시대니만큼 걸리적 거리는 부분들이 더러 나온다. '맥심'은 '남자는 이런데 여자는 그렇더군' 하는 발언을 엄청 많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베카'는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임과 동시에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니다. 레베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여 주는 건 그녀의 남편 맥심이고, 그녀의 친척 잭이고, 그녀의 가장 친한 하녀 댄버스 부인이고, 그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다. 레베카는 한 번도 '내' 눈앞에 나타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한 적이 없다.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말한 적이 없고. 그래서,



자연스레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생각이 났다. 소설 《제인 에어》를 읽은 '진 리스'가 미친 '버사 부인'의 입장에서 그려낸 소설. 진 리스는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마찬가지의 의미로 누군가가 '레베카'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설을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베카가 이대로 뒤로 사라지는 것은 어쩐지 부당하게 느껴진다. 레베카는, 레베카의 입을 빈다면 분명 할 말이 많지 않을까. 그녀가 '그런' 사람이어야 했던 이유가 분명, 분명 있을 것이다.



별점이라는 것은 너무나 애매한데, 사실 별로 치자면 나는 4.5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소설이 어떤 것인지, 그러니까 한 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소설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소설의 매력을 가득 담은 책이라 0.5를 내릴까 올릴까 고민하다 올려버렸다.



관대한 나인 것이다.





악마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우리는 위기를 극복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상처조차 남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재앙에 대한 그의 예감은 처음부터 정확했다. 수준 낮은 연극에 등장하여 과장되게 소리를 질러대는 여배우처럼 우리는 자유를 위해 크나큰 대가를 치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 삶의 멜로드라마는 이미 충분했고 그래서 현재의 평화아 안전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오감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작정이다. 행복은 획득하는 소유물이 아닌, 생각의 문제였고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절망의 순간은 찾아온다. 하지만 시게로 잴 수 없는 시간이 영원으로 치달을 때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함께 걸어간다는 것, 어떤 의견 차이도 우리 사이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p.11)

반 호퍼 부인이 그토록 지독한 속물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내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내 삶이 마치 바늘에 달린 실처럼 부인의 자질에 달려 있었다고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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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8-08-2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 애인이랑 인생의 책 이야기하다가 애인이 꼽은 책이었어요! ㅎㅎ 오래 전 읽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읽겠습니다!

다락방 2018-08-30 10:11   좋아요 0 | URL
오오?
확실히 재미 있더라고요. 으아악 하면서 읽었어요. 끝까지 긴장감을 가져가는 소설이랄까요. 덕분에 [나의 사촌 레이첼]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 책은 나보다 뽀가 더 재미있어 할 것 같아요. 제 짐작엔 그렇습니다. 후훗.

단발머리 2018-08-30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바다의 깊은 신음 소리가 저주를 부르고~~~˝ 옥주현의 ‘레베카‘가 생각나는 밤이네요.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소설의 맛을 느끼고픈 요즘이니까요.
관대한 다락방님의 관대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굿나잇^^

다락방 2018-08-30 10:12   좋아요 0 | URL
저는 레베카 뮤지컬이 유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볼 생각도 전혀 없었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전에 사전 지식이 1도 없었거든요. 그리고 읽으면서 이 웅장하고 음침함, 초조함을 뮤지컬로 어떻게 나타낼까 싶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에 역자 후기 보니까, 뮤지컬에서는 중요한 요소가 조금 바뀌었더라고요. 이게 헐리우드에서 레베카를 영화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중요한 장면을 바꿔버렸는데(언급하고 싶지만 그러면 확 스포일러가 되어버림), 뮤지컬도 그걸 따랐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무슨 뜻이냐면... 책을 읽어보시라는 겁니다! 책은 다소 충격이에요. 헐리우드가 왜 그렇게 했는지 알겠달까요? 후훗.

굿모닝, 단발머리 님!

꼬마요정 2018-09-1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저도 이 책 참 좋아합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 너무 좋아요. 단편집도 상당히 재밌답니다^^

그쵸 그쵸, 레베카 말이 듣고 싶죠? 저도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레베카보다 그녀의 말이 듣고 싶어요.
솔직히 아주 당당하고 멋진 여자인 것 같은데, 그래서 질시 받는 건 아닐지.. 어찌보면 맥심.. 좀 찌질..음..한 듯..^^;;

다락방님~ 저도 진 리스를 떠올렸어요. 그녀 덕분에 제 안에 있던 멋진 로체스터는 쓰레기가 되었죠 ㅎㅎ 찌찌뽕이어요!!

뮤지컬 재미납니다.ㅎㅎ 전 신영숙, 김선영 버전 좋아합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8-09-14 16:52   좋아요 0 | URL
그래서 대프니 듀 모리에 다른 책도 읽어보려고요. 나의 사촌 레이첼이요. 지금 제가 아직도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는 중이라 다른 책을 사지 못하고 있는데, 얼른 사서 읽어보고 싶어요! 소설의 맛을 제대로 살린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후훗. 기회되면 뮤지컬도 봐야겠어요. 으하하핫. 세상엔 읽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아요!!

꼬마요정 2018-09-14 17:40   좋아요 0 | URL
저도 레베카 읽고 나의 사촌 레이첼이랑 희생양, 자메이카 여인숙 사놓고 못 읽고 있어요 ㅎㅎ 읽을 거 볼 거 많아서 너무 좋아요!!!!
 



앙뜨완과 마틸드, 마틸드와 앙뜨완은 스스로 인정하듯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다. 긍정적이고 유머러스한 태도로 생을 사는 이들이 나누는 사랑에는 다른 것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가령, 주말에 부부모임을 한다거나 여러 부부들이 함께 가는 여행을 한다거나. 게다가 그들 두 사람 또한 어딜 나가거나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발소라는 공간이 그들에겐 천국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도 입양도 필요하지 않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인간애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런 것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완벽하고 관계는 빈틈이 없다. 앙뜨완의 말을 빌자면 그런 것들은 부부간에 허약한 관계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말인가.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놓지 않는다. 특히 앙뜨완의 에로틱한 대사와 동작은 육감적이라기보다 생의 노회함과 자연스러움이 엿보이는 에너지를 발휘한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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