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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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준비해 꾹꾹 눌러쓴 이야기. 경애의 마음에서 드러나는 김금희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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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문지 스펙트럼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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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소설들은 어째서 그토록 빨리 읽을 수가 있을까? 읽기 쉬워서? '읽기 쉽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스타 베를링 이야기』가 읽기 쉽다고? 『죄와 벌』이 읽기 쉽다고? 『이방인』보다도, 『적과 흑』보다도? 결코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들이 학교 교과 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일단 시칠리아 미망인을 비롯하여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하달된 이른바 '교양 필수 권장 도서' 따위는 으레 '고리타분'할 것이라고 속단한다. (p.173)



아주 어릴때부터 이웃집에 놀러가면 그 집 책장 앞에 가 책들을 구경하고 또 빼서 읽었더랬다. 놀러간 내 형제들이나 혹은 친구들이 수다를 떨며 다른 놀이를 즐길 때 나는 꼭 그렇게 혼자 책들을 구경하고 읽곤 했다. 고모네 집에 가면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오빠의 국어책을 꺼내 읽었다. 소설을 다룬 부분만 읽었는데, 그게 그렇게나 재미있었던 거다. 나보다 아홉살 많은 이모네 집에 가면 이모가 없을 때에도 아무 책이나 꺼내 읽곤 했는데, 그러다보면 아직 어린 내가 읽지 말아야할 책들도 더러 껴있었다. 아니, 대부분 그랬다. 이모는 집에 오고 나서 '그건 니가 볼 책이 아닌데... '했다. 그렇다고 이모는 내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여동생이 친구로부터 빌려온 <스타킹 훔쳐보기>시리즈를 하루 꼬박 몰아 읽었더랬다. 마침 시험기간이었던지라 여동생은 도대체 왜 공부를 안하고 책을 읽는 거냐며 내게 잔소리를 했다. 그래서 너는 전교 일등 나는 일등 한 번 못해본 사람...이었던 건가보다.



내가 공부보다 소설 읽기를 즐겨한 데는 그것이 교과과정이 아니라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읽는 책이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스타킹 훔쳐보기를 열과 성을 다해 읽는다고 해서 내 성적이 오를 리가 없다. 아니, 떨어지겠지. 내가 2년 위의 사촌 오빠 국어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것이 지금의 나의 교과과정과는 아무런 상관없다. 예습도 될 수 없다. 나는 그저 재미있어서 읽었다. 나는 소설 읽기가 재미있었다. 교과과정이 아닌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책 마다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들이, 다른 인물들의 삶을 읽는 것이 정말 좋았다. 책 좀 그만 읽으라는 소리를 들어도 도무지 끊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누가 왜 소설을 읽냐고 물어보면 '재미있어서'가 가장 먼저 튀어나왔다. 사실 그것말고 다른 이유는 어린시절에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아니 왜? 이렇게나 재미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데 책을 왜 안읽지? 안읽어봐서 재미있다는 걸 모르는 거 아닐까?



나는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좋았지만, 내가 이야기 자체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책마다 품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이 좋다고 늘 생각했으면서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게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놀랐다.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p.151)



나는 위의 문장을 읽고 내게 몇 번이나 물었다. 내가 정말 이야기 때문에 소설을 읽었던 거야? 나는 이야기 그 자체를 좋아했던 거야? 늘상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말해왔지만, 나는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 이기 때문에 좋아했던거야? 이야기? 이야기란 대체 무엇이지? 물론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의 나열은 아니지만, 거기엔 작가 고유의 문체라는 것도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런데, 어쨌든,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래? 나는 이야기에 목마른 자란 말인가?



묻고 묻고 또물었는데 답은 '그렇다' 였다. 왜냐하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으니까. 소설은 이야기였으니까. 소설이란 무릇 이야기이니까. 작가의 고유한 문체가 그 안에 들어있고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들어있다해도, 작가가 어떤 의도로 글을 썼다해도 어쨌든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였다.



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면 이야기였구나.


아,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 것 같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어. 이 사람의 저 이야기, 저 사람의 저 이야기.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였어. 그렇다면 말이 된다. 그래, 말이 돼. 내가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것, 연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 모두가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었어. 내가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 그 안에는 인간들이 저마다 품고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어. 내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소설을 계속해서 읽어대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었다. 그래,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좋아하기에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였어.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사는 존재니까.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였어!!




이 작은 책의 절반쯤을 읽을 때까지는, 그러니까 책 읽기에 관련된 책이라면, 게다가 청소년에게 책을 읽게 만드는 책이라면, 이 책보다는 '김소영'의 《어린이책 읽는 법》이 이천오백배쯤 낫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간을 지나면서부터, 그러니까 좋지 않은 학교의 열등생들, 자신들이 공부도 못하고 책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두꺼운 책을 이해할리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을 책에 빠져들게 만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책은 반짝거리며 빛이 난다.


서른 다섯명의 아이들, 도통 책 읽기엔 흥미가 없을 뿐더러 그런건 이해할 수도 없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어느 책의 첫 구절을 읽어주면서부터, 그 때부터 갑자기 독서란 너무나 재미있고 아름다운 행위가 된다.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을 궁금해한다. 그러니까 그 다음의,




아.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란 이렇게 다시 이 자리로 나를 불러오는 힘이 있다. 이제 아이들은 선생님이 읽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책의 책장을 넘긴다. 읽을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책들의 책장을 넘기고, 저마다 그 안에 있는 이야기를 전하기에 바쁘다. 아, 이 과정이야말로 또한,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닌가. 너무 좋아 ㅠㅠ

책이란 나랑 안어울려, 라고 생각하다가 책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그렇게 책을 읽게 되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읽은 책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아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이 작은 책 한 권은 그렇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완성한다.




게다가 책이란 것에 실려있는 사연, 그러니까 책이 품고 있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것이 하드웨어적인 것으로서의 의미, 누군가와 얽힌 사연에 대한 것도 잊지 않고 얘기해준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또한 책에 대한 느낌도 우선은 가장 소중한 이에게 먼저 전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아니 확실히, 감정이란 원래 책읽기의 욕망처럼 무엇 무엇을 더 좋아한다는 속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요새에 자리 잡게 된다. 책과 친구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가까운 이가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읽으라며 주었을 경우, 우리가 책의 행간에서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책을 준 그 사람이다. 그의 취향, 그가 굳이 이 책을 우리의 양손에 쥐여주었던 이유, 그와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표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p.110-111)



누군가가 나에게 주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읽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든 우리는 책에 대해 다른 누군가와 하나의 사연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을 더러 하게 되지 않나. 이 부분을 읽는데 가슴 속에 봄이 오는 기분이었어. 크-




다니엘 페나크는 물론, 나쁜 책도 있다고 말한다. 나쁜 책을 흥분하면서 읽었던 때도 분명 있었을 거고, 그 시절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을 거라고. 동시에 책을 읽지 않아도 되고, 건너뛰며 읽어도 되고,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고, 다시 읽어도 된다고, 아무 데서나 책을 읽고, 군데군데 골라 읽고, 소리 내서 읽고, 읽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모든 권리가 책 읽는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책 읽는 사람의 자유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자유로움이 우리를 계속해서 책을 읽게 하는거겠지. 자, 읽고 읽고 또 읽자. 이야기를 만나고 또 만나자.


아,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우린 정말로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어찌나 걱정스러운지 시도 때도 없이 내 아이를 또래의 다른 아이와 시시콜콜 비교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둔 친구 아무에게나 …… 가 아닌, 학교 성적이 뛰어나며 죽어라 책만 읽는다는 아이를 둔 친구에게 자문을 구해보기도 했다.
귀가 잘 안들리나? 난독증이 아닐까? 아예 학교에 안가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학습 장애가 있는 건 아닐까?
별의별 검사를 다 해보았다. 청력 검사에서도 모든 게 정상이었다. 언어 치료사도 안심해도 좋단다. 심리 검사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둔해서일까?
단지 둔해서일 뿐이라고?
아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와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이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 P58

열두 살인가 열세 살 때(열세 살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난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처음으로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여름 방학의 초입부터 형(앞서 말한 『계절풍』을 읽던 형)은 그 두꺼운 책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럴 때 형의 눈빛은 고향 생각을 오래전에 잊은 탐험가처럼 아련해지곤 했다.
"형, 그렇게 재미있어?"
"응, 무지."
"무슨 얘긴데?"
"으응, 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다, 결국은 세번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얘기야." - P196

더욱이 한밤중에 50명의 친구가 코를 골고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기숙사 방 한가운데서, 이불을 텐트처럼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비추어가며 책을 읽는 맛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감시 초소를 지척에 두고도, 언제나 나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 것은 오로지 사랑을 얻느냐 마느냐뿐이었다. 당시 내 손에 쥐여 있던 그 책의 두께며 무게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 P198

간단히 뭉뚱그려 말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똑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끝없이 복제해내는 것만으로 자족하면서, 상투적인 인물을 양산하고 감상과 선정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하려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공산품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끌어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경기 동향‘을 분석하여 특정한 독자층에 영업할 만한 특정한 유형의 ‘상품‘을 내다 파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나쁜 소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왜 그런가? 그러한 소설은 창조의 결실이 아니라, 미리 짜맞춘 일련의 ‘형식‘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 진실석(복합적이다)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런 복제품은 단순화(거짓이다)를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우리의 호기심만을 달래줄 뿐이기 때문이다. - P208

무엇보다도, 결국 그런 책에서는 작가도, 작가가 보여주겠다고 하는 현실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정해진 틀에 짜 맞춰져 우리까지도 덩달아 그 틀에 가두고자 하는, 오로지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일회용 문학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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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토록 부끄러운, 남자의 향기
    from 마지막 키스 2019-04-04 16:50 
    간단히 뭉뚱그려 말해보자. 우리 주변에는 똑같은 유형의 이야기를 끝없이 복제해내는 것만으로 자족하면서, 상투적인 인물을 양산하고 감상과 선정성을 적당히 버무려 장사하려는 유의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이를 ‘공산품 문학‘이라 부르려 한다. 말하자면 세간의 화제로부터 온갖 소재를 끌어모아 시류에 편승하는 세태 소설을 만들어내는 문학이다. 철저한 ‘시장 조사‘와 ‘경기 동향‘을 분석하여 특정한 독자층에 영업할 만한 특정한 유형의 ‘상품‘을 내다 파는 것이다.
 
 
단발머리 2019-04-04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요새에 자리 잡게 된다. 책과 친구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p.110-111)

저번주에 친구에게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했어요. 그저께 <질의응답>을 선물받았구요.
책이 저와 친구, 저와 언니 사이에 있어요. 확, 들어와버린거죠.
너무 좋아요, 이 글!! 다락방님, 하트뿅뿅!!!

다락방 2019-04-05 14:57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께 제가 받은 하트의 정확히 두 배 돌려드립니다.

저도 제가 받았던 어떤 특별한 책들에 대해 떠올렸어요. 또한 특별하지 않고 내보내고 싶었던-순전히 그걸 준 사람 때문에-그런 책도 떠올렸고요. 책은 그 안의 내용으로도 소중하지만 그걸 선물한 사람때문에 특별햊기도 하는 것 같아요. 선물이란 게 물론 준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성질의 것이지만, 책은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잖아요. ‘아, 이 부분 때문에 줬구나‘, ‘어떤 이유로 내게 이 책을 준걸까?‘ 같은 거요. 그래서 더 유심히 읽게 되는.

저도 이 공간에서 단발머리님과 끊임없이 책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읽고 때로는 책을 선물로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행복합니다, 단발머리님!! >.<
 
가부장제의 창조
거다 러너 지음, 강세영 옮김 / 당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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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기존에 속해있던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로 말하자면 친하게 지내던 남자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고(새로 사귄 남자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탈코르셋을 선언하고 비혼을 선언한다. 비연애나 비섹스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존에 자연스레 하고 있던 것들, 그것이 응당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과 작별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자연스레 따라올거라는 생각을 하게된거다. '거다 러너'의 이 책,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으면서, 남자사람들과 또 결혼과 멀어진 사람이 있는것처럼, 종교랑 멀어지는 사람들도 많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그 보수성과 남성주의를 도무지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거다. 



메소포타미아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부장제의 창조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기 때문에 나는 거다 러너가 이 책을 쓰기까지 아주 많이 애를 썼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읽기에는 결코 쉽지가 않았다. 낯선 용어와 여신들의 이야기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좀 힘들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성서를 가져오고나서부터는 읽기에 수월해졌는데, 그러면서 '아, 종교를 버텨낼 수 없는 사람들도 있겠구나' 싶었던 것. 



성서에서 성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은유는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된 여자에 관한 은유와, 신의 은총에서 인간의 타락을 초래한 유혹자 이브에 대한 은유이다. 이 두 은유는 여성의 종속을 신이 승인했다는 증거로써 2천년 동안 인용되어 왔다. 동시에 이들 은유는 그 자체만으로 성별 관계에 관련된 가치와 실천을 정의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창세기와 같은 시적, 신화적, 풍습적 복합체에 대한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의 욕구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라고 예상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의 전통이 지나치리만큼 가부장적이었다는 점과, 지난 700년 동안 여성들이 개인적으로 구축해 낸 다양한 페미니스트 해석들이 그동안 굳건히 지켜졌고 신학적인 인가도 받았던 기독교신앙 이전의 오랜 전통에 대항해 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p.318-319)




아담의 갈비뼈에서 여성을 창조한 것은, 수천년 동안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하느님이 부여한 여성의 열등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 해석이 이브가 창조된 갈비뼈가 아담의 '아래' 부분 중 하나이며 그래서 여성의 열등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점에 기대고 있거나, 혹은 아담은 흙에서 창조되었지만 이브는 뼈와 살에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거나 간에, 그 구절은 역사적으로 극도로 가부장적인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p.319-320)




창세기 이야기의 상징적 의미는 둘 다 야훼의 개입을 통해 신성한 물질들이 스며들었지만, 흙에서 창조된 아담과, 인간 몸의 일부에서 창조되었으며 고대 다산 여신들의 후계자인 이브로 양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분법은 야훼가 벌로써 노동의 성별분업을 명한 타락 이야기 속에서 강화된다. 아담은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 속에서 일할 것이며, 이브는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낳고 후손을 키울 것이다. 부과된 처벌이 남성에게 일을 부담으로 만들지만, 여성을 고통과 괴로움에 빠지도록 한 벌은 여성의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자연적 결과인 여성의 출산하는 몸에 대해서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323)




이로써 3월의 마지막 날에 3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를 완독했다. 으하하하하. 장하고 뿌듯하다. 아직까지는 제 때에 잘 읽어내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렇게 같이 읽기를 하는 게 너무 좋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같이읽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공개적인 약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까지의 책들을 다 읽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읽다보니 더 읽고 싶어진다. 이 책 [가부장제의 창조]는 너무 오래전의 역사로 거슬로 올라가 힘들게 읽혔던만큼 좀 더 가까운 과거 속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다르게 쓰여진 가부장제에 관련된 책들이 궁금해지는 거다. 이성애를 스톡홀름 신드롬에 비유한 책을 한 권 사둔만큼, 가부장제, 결혼, 이성애에 관련된 책들을 더 많이 읽고 싶다고 생각한다. 한 권을 읽으면 또 다른 책들이 읽고 싶어지는 게 바로 독서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내가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는 만큼,

대학시절에, 그렇게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학교 도서관! 여대!) 그때 이렇게 페미니즘에 열정을 쏟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도 생각한다. 그랬다면 지금쯤 페미여전사가 되어 가부장제를 다 뿌셔버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쉽다.






‘온정주의‘의 토대는, 교환을 위한 문서화되지 않은 계약이다. 그것은 모든 사안에서의 종속의 대가로 경제적 지원과 보호를 남성이 제공하고, 성적 서비스와 무임가사서비스를 여성이 제공한다는 계약이다. - P414

우리느 반드시, 최소한 당분간은 여성중심적(woman-centered)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가능한 한 가부장적 사고를 떠나야 한다. - P396

여성들은 항상 자아(self)와 공동체의 현실을 경험해 왔고, 그것을 알고, 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세계에 살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은 중요하지 않다는 오명을 안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불신하고 평가절하하는 것을 배웠다. 월경 속에 무슨 지혜가 있을 수 있는가? 모유로 가득 찬 젖가슴 속에 무슨 지식의 원천이 있는가? 일상적인 수유와 청소 속에 추상성을 위한 무슨 재료가 있는가? 가부장적 사고는 그와 같은 성별 정의된 경험들을 비초월적인 ‘자연스러움‘이라는 영역에 소속시켰다. 여성의 지식은 단순한 ‘직관(intuition)‘ 으로 되었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수다(gossip)‘로 되었다. 여성들은 특히 희망이라고는 없는 특수한 것들을 다룬다. 그들은 자신들의 서비스 기능(음식과 쓰레기를 처리하는)속에서, 끊임없이 방해받는 시간 속에서, 그들의 분산된 주의집중 속에서, 매일 매시간 현실을 경험한다. - P390

그 특수한 것들이 자신의 소매를 당기는 동안 사실들을 일반법칙으로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상징을 만들고 세계를 설명하는 그와, 그의 신체적,심리적 욕구와 그의 자녀를 돌보는 그녀- 그 둘간의 간극은 엄청나다. - P390

가부장제 체계는 여성의 협조가 있어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성의 협조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수단에 의해 확보된다. 그 수단들은, 성별교의의 주입(gender indoctrination), 교육기회의 박탈, 여성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는 것, 여성의 성적 행동에 따라 ‘존중받을 수 있음‘(respectability)과 ‘일탈‘(diviance)을 규정함에 의해, 제재와 노골적 강압에 의해, 경제적 자원과 정치적 권력에의 접근 차별에 의해, 그리고 동조하는 여성들에게 포상으로 계급적 특전을 줌으로써 여성들을 분리하고 서로 반목하게 하는 것이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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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3-3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시절에 그 좋은 환경에.... 공부하지 않았던, 찬란하지 않았지만 어마무시 바빴던 20대를... 저도 엄청 후회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그래도 자꾸 아쉬움이 밀려오기는 해요.

전 아직 좀 남았네요. 재독이라고 괜히 여유부리다가 ..... ㅠㅠ
다락방님, 완독 축하드려요!!!

다락방 2019-03-31 21:26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에 왜그렇게 공부를 안햇을까요, 저는 ㅠㅠ 대학때도 학사경고나 받고 다니고 ㅠㅠ 그 때 못한 공부 지금 다 몰아서 해야하는가 봐요 ㅠㅠ

완독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그렇지만 이 책은 다시 읽어야할 것 같아요. 전 너무 어렵더라고요. 용어도 낯설고 그래서 ㅠㅠ
이 책을 다시 읽는 것도 좋겠지만 나와있는 다른 책들을 열심히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튼 앞으로도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단발머리님도 천천히 완독하시고!! 우리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읽어요!

비연 2019-04-0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같이 읽기 .. 넘 좋은데 번번히 참여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1인입니다.. 흑흑.
다시 참여해보기로 굳게 결심... 그래도 뭔가 꾸준이 읽고는 있는데 여러 권 붙잡고 진도는 안 나가고...

다락방 2019-04-01 17:08   좋아요 1 | URL
4월 도서는 [여자 전쟁] 이에요. 이 책은 [가부장제의 창조]에 비해서 읽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그렇다해도 내용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요.

천천히 같이 해봐요, 비연님. 천천히 같이 해봅시다.

비연 2019-04-01 17:41   좋아요 0 | URL
여자전쟁.. 이군요. 일단 시작해보렵니다. 꾸준히 길게 가기로...

무해한모리군 2019-04-01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입사 15년만에 ‘나요즘 여자가 되나봐(바로 직전에 짜증을 냈음. 쉽게 감정적이 된다란 뜻인듯)‘란 남자팀장의 말에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예요. 주의해주세요‘라고 처음으로 말했어요.

제가 입사했을때 관리자급중 여성 ‘0‘명, 현재는 메니저급은 6명(대다수는 원래도 여성팀원이 많던 디자인팀) 팀장임원은 여전히 0.

저는 제가 남성문화에 맞추면서 살아남았는데 후배들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생활에서 불편해져 보려구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열심히 해야되는데 삶이 비인간적으로 바쁘네요 제길 ㅠㅠㅠㅠㅠㅠ

다락방 2019-04-01 17:11   좋아요 0 | URL
아이고 바쁘셔서 어떡해요, 모리님 ㅠㅠ 비인간적으로 바쁘다니 너무해 ㅠㅠ 아마도 지금이 3월이라 (이제 4월됐지만) 더 바쁘셨던 거겠죠? 아무쪼록 4,5월은 좀 한가해지시길 바랍니다.

일일이 지적하고 잔소리하는 거 너무 피곤한 일이에요. 그래도 제가 지금 피로하고 불편하게 살아야 저보다 훨씬 젊고 어린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세상이 되는거겠죠. 지치지말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어요.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그 과정에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자, 우리 열심히 합시다, 모리님!

블랙겟타 2019-04-02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완독 축하드려요!!
역시나 마지막은 스티키인증샷으로. ^^
제가 가지고 있는 책표지랑 다른걸로 봐서 구판인가요?

읽으면서 저도 느낀건데 이 책을 읽으면 종교 속에도 드러나는 가부장적 시선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껏 여성주의에 대한 책을 몇권읽어가면서 특히 가부장제도에 대해 관심이 더 갔었는데요.
그래서 이 책을 제목만 봤었을 땐. 나에게 딱 맞는 책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으.... 저에게 제일 취약한 종교와 옛날이야기..를 중심으로 내용이 쓰여져있다보니(변명? 인가...;;;;)
아직도 쪼..쪼꼼.. 남았는데 고..곧 따라갈께요. ^^;;;
(3월안으로 읽지 못한 것은 스스로에게 분하지만요.ㅠ)

다락방 2019-04-03 08:55   좋아요 1 | URL
으하하핫. 축하 감사드려요!
네, 제가 가지고있는 건 구판이에요. 구판을 구입했던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지요. 그 친구는 다 읽지도 않고 제게 건넸답니다. 아하핫.
그나저나 저 구판은 난장판이 되었어요. 중간이 떡- 벌어지는 바람에 ㅋㅋㅋ 그래서 새 책을 살까 했지만, 그냥 구판으로 읽고 가지고있기로 결정했어요.


종교야말로 사실 가장 가부장적이 아닌가 싶어요. 애초에 이브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했을 때부터 여자의 위치는 그런식으로 남자로 인해, 남자 때문에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싶더라고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인식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었을텐데, 그러니 가부장제로부터 빠져나오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자신이 믿었던 종교로부터 느꼈을 배신감을 생각하면, 뭐랄까,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고요. 너무 오래된 역사라 갈 길이 그만큼 더 멀게 느껴져요.


저도 역사에 너무 취약해서(학교다닐 때 국사, 세계사를 제일 못했어요 ㅋㅋ 아 정치경제도 ㅋㅋㅋㅋ 다 못했네 ㅋㅋㅋㅋㅋ), 그래서 이 책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메소포타미아 나오는데 눈알 팽팽 돌아가더라고요. 역시 현대물이 저한테는 읽기가 더 수월해요. 얼른 따라오시고요, 블랙겟타님! 여러가지로 4월의 도서도 기대됩니다. 4월의 도서 읽고 우리가 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블랙겟타 2019-04-03 10:48   좋아요 0 | URL
네네!!
4월에도 자주뵈어요 다락방님 ^^ (๑˃̵ᴗ˂̵)و

다락방 2019-04-03 10:48   좋아요 1 | URL
아니 이렇게 귀여운 이모티콘은 대체 어케알고 쓰시나요 ㅋㅋㅋㅋ 지난번부터 너무 귀여워서 원 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 2019-04-03 10:58   좋아요 0 | URL
어이쿠.. (◜▿‾ )ノ
그 그런가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4-03 11:05   좋아요 1 | URL
아이참 ㅋㅋㅋ 귀여워 미치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을 배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너무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지나치게 큰 사랑이 압박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되돌릴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핑계를 대고 우리는 상대에게 압박을 가할 수도 폭력을 가할 수도 있다. 또한, 사랑이라는 이유로 상대의 삶에 당연하듯 개입하려고 하기도 하고. 내가 가는 방향이 옳고 내 생각이 맞다는 확신으로 내가 사랑하는 상대 역시 이 길로 가고 바로 이것을 선택하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자기 확신이 가져온 오만일 것이다. 그 사랑은 상대를 향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향한 사랑일 것이고.


몇 번 언급한 적 있지만, 영화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에서 언니는 여동생에게 학교의 킹카인 그 남자아이와 사귀지 말라고 조언한다. 본인이 사귀어봤는데 진짜 영 아닌 남자였다고. 그러나 동생은 언니에게 대꾸한다. '언니도 해보고 알았잖아, 나도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나는 그동안 동생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바로 저 언니 같은 태도로 대했던 것은 아닌지, 그 영화를 보고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그 뒤로 그런 태도를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어쩌면 또 그런 태도들이 나왔을런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건 잘못됐어 틀렸어, 이게 더 좋아. 나는 그런 식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했을까봐 두렵다.


나이들수록 그것이 정말로 지양해야 할 태도라는 것을 더 깨닫게 된다. 언제 더 절실하게 깨닫느냐면, 누가 내게 바라지도 않은 조언을 했을 때. 내가 상대에게 조언을 해달라고한 게 아닌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것이 낫다 저렇게 살아라 말하는 것은, 듣는 이에게는 강압이고 폭력이다. 그런 일들이 닥칠때마다, '아, 역시 남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려하지말자, 조언은 누군가 요청했을 때만 조언이 될 수 있다' 라고 깨닫고 또 깨닫는다. 내 행복은 당신의 행복과 다르다.




'로라'는 자신의 동생인 '셜리'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로라의 생각은 그저 셜리의 행복, 셜리의 행복. 로라의 좋은 친구인 여성혐오자 '존'은 그런 로라에게 '네 생각을 하라'고 매번 조언하지만, 로라는 셜리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다. 셜리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내가 너무 셜리에게 집착하나'를 생각한다. 셜리가 데려온 남자가 셜리를 불행하게 만들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이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 로라가 셜리와 셜리의 애인 헨리에게 1년간의 약혼기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자 셜리와 헨리 모두 투덜대고 언니가 동생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것이라 한다. 내가 정말 그런걸까, 내가 집착하는 걸까, 내가 동생을 빼앗기기 싫어서 그러는걸까, 내가 동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걸까...


로라가 정말 동생에게 집착하는 것일 수도, 동생을 누구에게도 보내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다. 다 가능성 있는 얘기다. 그럴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건, 내 눈에도 헨리는 '아니올시다'의 님자였다. 만약 이 남자를 내 여동생이 데려왔다면... 그러면 나는 어쩔것인가. 아아, 헨리, 내가 너무 싫어하는 캐릭터..



"제대하면 무슨 일을 할 거예요?"

"사실 모르겠어. 변호사가 될까 생각해봤지만."

"그런데요?"

"너무 힘든 일이야. 사업을 해볼까 싶기도 하고."

"어떤 사업이요?"

"글쎄, 어떤 사업이든 시작을 도와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난 은행에 다니는 지인이 한두 명 있고 실업계 거물도 몇 알아. 내가 밑바닥부터 시작한다고 하면 그들이 기꺼이 도와줄거야." 그는 말을 이었다.  (p.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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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진짜 너무 싫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변호사 될까? 아이 그건 힘드니까 안돼, 사업할까? 사람들이 도와줘야지........ 너무 한심하잖아. 이런 생각을 가진 남자가 청혼을 하는데 어떻게 예스를 하나요, 셜리여......... 내가 봐도 너무 쎄한데........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너무 여자 돈 잡아먹을 남자잖아...... 여자 고생시키고 여자 돈 다 긁어갈 남자잖아.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혼자 살자, 셜리여..... 너무 딥빡 오는 것이다. 이런 남자라는 것에 대해.



셜리와 헨리는 결혼하게 되고, 예상한대로 헨리는 자꾸 직장을 때려치고 나와서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예상한대로 헨리는 여기저기 빚을 지고, 예상한대로 헨리는 바람을 피고. 게다가 성매수를 하고 성매매 여성을 창녀라고 욕하는 남자들처럼, 헨리는 자신이 바람핀 여자를 '암캐'라고 칭한다. 사업할 때 도와줄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처럼, 헨리는 무조건 남탓이 먼저인 사람.



"이 주 정도 수전에게 푹 빠졌지. 잠도 안 올 만큼. 얼마 동안은 멋진 여자라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조금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얼마 안 가 아주 확실하게 지겨워졌어. 최근에는 완전히 골칫거리가 됐고."

"너무하네요."

"당신이 수전 걱정을 왜 해? 그 여자는 도덕관념도 없는 순 암캐야." (p.144)






게다가 예상한대로 헨리는 처형에게 돈을 빌려 다른 빚을 막고........그리고 불구의 몸이 되어 셜리에게 매달리며 온갖 짜증을 낸다.... 모든 걸 다 잃고 로라의 집에 들어와 살게된 셜리 부부. 하루종일 짜증을 내는 신랑의 옆에 있어주는 셜리를 보며 로라는 너무 슬프다. 셜리는 더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저 불행한 생활로부터 빠져나와야 하는데. 마침 그런 셜리에게 돈 많고 자상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아, 셜리는 저런 남자와 결혼했어야 하는데. 로라는 그런 셜리 보기가 너무 안타깝다. 셜리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셜리를 저 불행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해야 해.




문제는 그거다.

셜리는 그 삶이 언니가 생각한만큼 불행했을까? 셜리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을까? 셜리는 로라가 생각한 것처럼 책임감 때문에 계속 그러고 살았던걸까? 셜리가 원하는 건 뭐였을까?

로라는 셜리가 원하지 않았지만, 셜리가 불행할 것이라는 본인의 생각으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그렇다면, 그 결정이 셜리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소설의 마지막에야 다른 사람이 해주는 말을 통해 로라는 알게 된다. 자신이 생각한 셜리가 셜리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이 생각한 셜리의 행복이 셜리가 생각한 셜리의 행복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로라는 셜리의 삶을 행복해지도록 본인이 결정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그 일은 로라를 아프게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지만, 어쨌든 이제 로라는 자신의 남은 생을 살아내야 한다.




얼마전 텔레비젼에서 노르웨이의 산악철도에 대해 보게됐다. 홍콩에 여행가 맛있는 걸 먹는 장도연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레 내 조카를 떠올렸다. 저기 타미랑 가면 어떨까, 그런데 저건 맵겠지? 저기 아이들 먹을 만한 메뉴도 있을까? 그랬던 것처럼 노르웨이의 절경, 피오르드를 보면서도 감탄하며 또 타미를 떠올렸다. 저렇게 웅장한 자연이라니, 한 번쯤 보고 싶지만 으앗, 너무 무섭다. 만약 타미가 저기 간다고 하면 나는 가지 말라고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한것이다.




(출처: 투어2000 블로그)



너무 무섭잖아, 저기 타미를 보내기엔 위험해, 라는 생각을 저절로 한 것이다. 이 생각은 한참이나 내게 '그래도 되는가?'를 묻게 했다. 나는 나라는 한 인간으로 '저 곳에 가보고 싶다' 라고 생각했고, 또 내가 절실히 가고자 했다면 가려고 할것이다. 만약 누군가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면, 나는 정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내 의지대로 할것이다. 그런데 내가 타미에게 '위험하니 가지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타미를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지금이야 타미가 혼자 간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성인이 되고 저런 곳을 알게 되고, 나 저기 갈거야,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혼자이든 친구들과 함께이든, 그것이 그 아이의 선택이라면, 그것이 그 아이의 바람이라면, 그 아이가 독립적인 한 존재인만큼, 내가 가지말라 할 순 없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위험한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 라고 하는건, 상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불안함을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상대가 그런 상황에서 취약할 거라고 내 멋대로 약한 존재로 결정지어 버린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로라랑 다를게 뭐지? 나는 타미를 셜리 취급하고 있는 거잖아?




홍콩 디즈니에 갔을 때 그런 경험을 했었다. 아홉살 조카와 롤러 코스터를 탔는데, 타는 내내 나는 한 팔로 아이의 안전바를 잡고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혹여라도 아이가 떨어질까봐 안절부절. 멈추고 나서야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이 찾아왔고, 롤러 코스터에서 내리는 순간, 아이가 무사히 내려서 다행한 마음에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이런 나를 모르는채로 조카는 '한 번 더 타자!' 하는거다. 어찌나 야속하던지. 진짜 너무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이것이 위험하고, 무섭고,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건 내 생각, 내 감정이었다. 아이는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를 좋아해서 바이킹도 네 번씩타고 그러는 아이인데, 나는 아이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서 아이가 다시는 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이는 더 타기를 원한다. 이게 아이에게는 신나는 일이야.


엉엉 소리내어 한참을 울고, 그런 나를 여동생과 조카가 달래고, 울고나니 기운이 쫙 빠져 있었다. 퍼레이드를 보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조카는 놀이기구를 한 번 더 타고 싶다고 말했다. 조카가 한 번 더 타자고 한 건 그런 스피드 있는 게 아니어서, 언제 또 올지 모르고 이 아이를 위해 온것이니만큼, 그래 한 번 더 타자, 했다. 아아..그러나 지나는 길에 더 무서운 롤러코스터가 보였고,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조카는 방방 뛰며 타겠다고 했다. 이모는 무서워하니 타지마, 나 혼자 탈게, 라고 조카는 말했는데 도저히 혼자 태울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내가 기꺼이 같이 타겠다고는 못하겠어.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던 여동생이 자신이 타겠다고 말하는데, '아니야, 내가 탈게' 라고 나는 도저히 말을 못하겠는 거다. 그렇게 여동생과 조카가 롤러코스터를 타러 가고 나는 제부에게 전화를 해서 이 일에 대해 말했다. 내가 엉엉 운 것 까지도. 그러자 제부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내게 말했다.



"타미는 놀이기구 타는 거 되게 좋아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맞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이는 좋아한다. 아이는 좋아하는데, 아이는 신나서 즐기고 있는데 나는 아이가 타는 걸 두려워했어. 내가 두렵다고 아이에게 타지 말라고 하면 안되는 거잖아. 마찬가지로 아이가 노르웨이에 피오르드 보러 가겠다고 하면, 나는 두렵지만, 내가 두렵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가지 말라고 하면 안되는 거 아닐까. 내 두려움과 다른 사람의 두려움이 다르고 내 바람과 다른 사람의 바람이 다르다. 우리는 그걸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하는게 아닐까.




이 책의 원제는 '짐The Burden' 이라고 한다. 그러나 번역된 제목처럼, 나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작년에는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사랑을 공부하고 싶었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지 않으려면 더 사랑을 알아야 하고, 더 배워야 해, 생각했던 것. 그러나 애인에 대한 사랑이 아닌, 가족과 조카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사랑을 배운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조카보다 네 배를 살았는데도, 나는 아직 사랑에 대해 배울 게 더 많은 것 같다. 여전히 잘 모르고 여전히 부족한 어른인 것 같아.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랑을 배워야지, 계속해서 사랑을 배워야지.




엊그제 만난 친구와 소설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서로 좋아하며 얘기했었다. 소설이 이렇게나 좋다.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들이 그 안에 있어서, 나로 하여금 또 생각하게 한다.



배워야지.

사랑을 배울것이다.




"지나친 연민이에요."
"그럴 수도 있나요?"
"네, 그건 현실을 똒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죠."
루엘린이 덧붙였다. "연민은 모욕입니다."
"대체 어떤 의미에서요?"
"바리새인의 기도가 이를 그대로 암시하고 있죠. ‘주여, 제가 그 사람과 다르다는 데 감사합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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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3-2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와르와 마플이 없는 크리스티 소설이라니 색다른 느낌이 드네요.코난 도일이 추리소설 작가라기 보다는 역사소설가로 불리우기를 평생 바란것처럼 크리스티 여사도 포와르와 미스 마플에서 벗어나고파서 이름도 바꿔 새로운 장르의 소설을 쓴것이 아닌가 싶은데 작가의 바램과 달리 독자들에게 크게 반향을 얻진 못한것 같습니다^^

다락방 2019-03-21 10:54   좋아요 0 | URL
반향을 일으켰는지 안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읽기에는 이 시리즈가 다 좋습니다.

얼룩말 2019-03-2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리즈 좋아해요.

다락방 2019-03-21 11:50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시리즈를 네 권 밖에 못읽었는데 며칠전에 갑자기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훗.
 
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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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 한 번 펼치면 쭉쭉 빨려들어가면서 읽게 되는데, 물론 그 뒤를 짐작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요즘 독서의욕 떨어진 사람들이라면 이 책으로 다시 불붙일 수 있을 듯. 확실히 재미있는데, 그렇다고 ‘으앗 좋아~‘ 이런 건 아니다. 굳이 별로 치자면 3.5. 알라딘은 반 개가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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