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렝지구의 공원에서 책 읽는 여자사람을 보고는 좋아서 찍었다. 동행들과 함께하는 일정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저 옆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싶다고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보고싶기도 해서 아쉽게도 사진만 한 장 찍고는 발길을 돌렸다. 아, 책을 좀 읽었어야 했는데..
오고가는 비행시간이 편도 17시간이었다. 경유시 대기시간까지 포함한다면 20시간이었는데, 그러니 책을 얼마나 많이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책을 세 권이나 준비했는데, 칠봉이가 가기전에 내 말을 듣더니 한 권을 빼라고 자꾸 그러더라. 무겁게 세 권을 다 가져가지 말고 한 권 빼, 어차피 다 못읽는다, 고. 그래도 고집 피우고 빼지 않다가, 직전에 한 권을 뺐다. 그렇게 두 권을 가져갔는데, 왕복 30시간이 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고작 책을 열 장 정도 읽었을 뿐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책을 왜 가져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이 무슨 똥욕심, 똥고집이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왜 번번이 욕심을 부리지? 왜? 왜 때문이지???????? 그렇지만 나는 다음 여행에도 또 책욕심을 부리겠지? 그렇겠지? 왜 나는 과거의 실수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지? 왜지? 왜 때문이지? 이건 무슨 고집인거지, 대체??????????????????????????????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가 본 사람이라면, 여행을 같이 간다는 게 얼마만큼 어려운 일인지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사이가 좋고 또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여행까지 즐거우리란 보장은 없다(세상에서 가장 힘든 여행은 가족여행....). 서로의 다른 취향을 기꺼이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해도, 낯선 여행지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분명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해서, 여행은 늘 갔던 사람, 그중에서도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 추진하게 된다. 친구1은 늘 나와 여행을 했던 친구라 걱정이 없었는데, 친구2 가 함께 가는 건 좀 신중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다. 친구2는 나중에 함께 가겠노라 의사를 밝혔고 게다가 친구1과 친구2는 만난 적이 별로 없던 터라, 둘 사이는 나를 통해 아는 터라, 괜찮을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은근 신경쓰였다. 이렇게 세 명이...괜찮을까?
그러나 내 걱정과는 달리, 나와 친구1 친구2는 충분히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어느 순간에는 무척 만족스러워서, 또 이런 건 내가 참지 못하는 스탈이라, 아, 나는 지금 너무 좋아! 하고 흥분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트라'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침을 먹고 거리를 산책하며 커피를 한 잔 마시려고 까페에 들렀다. 우리 오늘 신트라 가는 일정이니까, 거기에 가서 점심을 먹고 저녁은 돌아와서 먹자, 등의 얘기를 하고는 신트라에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을 찾아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면서 우리 셋 모두 천천히 주변을 보면서 걷는 거다. 다들 서로가 보는 것들에 취해 천천히 걷고 이 낯선 풍경을 음미하다가는 곧 다른 사람이 보는 걸 함께 보기도 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가 한 명이 뭔가 사고 싶다며 작은 가게로 들어가면 다들 따라가서는 다른 건 뭐가 있나 함께 구경하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어딘가로 가자, 정해두었지만 거기에 가기 위해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가 되어서 나는 빵터져 웃으며 말했다.
근데 우리 신트라에 언제가?
다같이 빵터져서 웃었다. 그때, 너무 좋았다. 그 누구도 이 여행을 '소화해야 할 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목표를 정해두고 거기에 가기 위해 빡세게 움직이거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게. 이게 너무 좋아서 막 행복해졌다. 우리는 여기 즐기러 왔다고 말했고 정말 그렇게 했다. 셋 다 모두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여유롭게 움직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재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큰 만족감을 줬다. 나는 함께있는 사람이 불편해하는 걸 불편해하는 성향인데(뭐, 누구나 그렇겠지만), 우리 셋 모두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으며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주 만족도가 큰 여행이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리스본 공항에 도착해 순전히 낯선 풍경을 보는 게 흥분됐다. 나로 말하자면 낯선 사람, 낯선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가급적 피하고 싶어하는 데, 이게 여행지라면 좀 달라지는 것 같다. 밥집도 갔던 데만 가고 싶어하는 사람인데 나는, 먼 여행지에 도착해서 이토록 이국적인 풍경을 보는데 잔뜩 흥분이 되면서 막 업되는 게 아닌가! 내 마음속 여행지 1위는 변할 수 없는 미국인데-열다섯살 때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어서 이 순위를 바꿀 수가 없다- 그 다음 순위는 고민없이 리스본이 차지했다. 뭐, 내가 여러 군데를 가본 건 아니지만, 정말로 순수하게 풍경만으로 나를 흥분하게 만든 곳이 리스본이다.
신트라와 벨렝 지구 같은, 친구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곳에 가보았지만,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내가 머물렀던 메인 스트리트 거리이다. 이들이 사는 곳,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마트가 있고 우체국이 있고 광장이 있고 레스토랑이 즐비한 곳. 이토록 낯선 건물들이 가슴을 가득 채워주더라. 신트라는 뭔가 남한산성 느낌이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보는 풍경이 물론 한국과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만족감을 얻진 못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리스본 시내는 나를 방방 뜨게 했다. 가장 좋았던 건, 광광객들과 광장 그리고 레스토랑이 있는 메인스트리트를 제치고, 그 뒤의 뒷골목, 정말 그들이 사는 곳이었다. 화려하지 않은 레스토랑, 일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관광객이 좀처럼 찾아들지 않는, 약간은 허름하고 조용한 곳. 이곳이 그들이 정말 사는 곳이라는 생각에 또 흥분이 됐다.
이 풍경들에 대한 만족도가 너무나 크고 그 만족감이 행복함마저 줘서, 아 나는 여기에 이민 오고 싶다, 고 입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안돼, 여긴 너무 멀어, 라고 했다. 그래.. 멀다.. 여긴 일 년에 한 번 놀러오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너무 멀지. 아아, 그렇지만 너무 아름다운 풍경들이라 잠시 머물다 가기 아쉬워... 긴 비행시간을 감안하더라도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 리스본이었다. 친구2는 포르투로 넘어갔고, 나와 친구1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친구1은 리스본에 머무르는 내내, 걷는 내내, 하늘이 너무 좋아서 기분이 너무 상쾌하다고 말했다. 하늘이 자기를 업되게 만든다고. 몇 번이나 그 얘기를 하는데도 나는 그래? 하고 무심히 넘겼는데, 오늘 아이폰의 사진첩을 보다가, 내가 포르투갈의 하늘은 엄청나게 많이 찍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 역시 포르투갈의 하늘을 좋아하고 있었는가 보다.
아,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한 권을 리스본 호텔에 두고 왔다.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가서 잘 읽혀지기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