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돌아오면 뗄거다

저도 다 돌아오면 떼겠습니다.

아니, 다 돌아와도 오랫동안 떼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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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from Sweet Dream 2015-11-06 23:06 
    '알케'님 서재에 '먼댓글'로 적을까 하다가..'다락방'님 서재로 알게 되어서(게다가 다락방님 가방도 찍었어...ㅎㅎ) 다락방님 서재로 '먼댓글' 달았어요. 이 리본을 달고 나가면, 보수적인분에게 책안잡히려고 양보도 많이하고 바르게 행동하려고 더 노력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언니랑 잠깐 역사책 국정화 이야기 나누다가, 옆에 앉아있던 할아방들도 그 이야기라를 하시는지라 귀가 살짝 그쪽으로갔다가 울화통 터져서.... 미칠뻔했어요.
 
 
기억의집 2015-11-0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콧등이 시큰하네요......

무스탕 2015-11-04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가방에도요..

아무개 2015-11-05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호도 아직 전혀 해결이 안되었는데
젠장맞을 국정화 교과서 까지.......

단발머리 2015-11-05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네들이 원하는건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잊는 거겠죠.
세월호를 잊어버리고, 그 한많은 부모들을 잊어버리고, 친구 잃고 울고 있는 아이들을 잊어버리는 거...
그런걸 원하겠죠. 에휴............

버벌 2015-11-0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가방에 달아놨어요. 오랫동안 떼지 못할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위탁부모에게서 자라는 것과 비슷한 이 그룹 홈에는 또 다른 소녀가 한 명 살았다. 앙네스 클라르스퇴룀은 소녀들의 양육을 삶의 과제인 동시에 수입원으로 삼았다. (p.220)
















의료사고로 팔 한 쪽을 잃은 앙네스는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춘기 소녀 세 명과 함께 살고 있다. 위탁부모와 비슷한 이 제도를 그룹 홈이라 부르는데, 그녀들은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오게 된지도 모르는 난민소녀들이며, 온갖 불행한 일들을 어릴때부터 겪어왔다. 그런 그녀들을 다루기는 쉽지가 않고, 그런 그녀들의 불행을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일도 쉽지 않다. 앙네스는 그런 소녀 세 명과 살고 있다. 십대의 소녀 세 명.


"내가 돌보는 아이들은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무인지대에 있어요. 아무도 그 아이들을 원하지 않아요. 쓸데없다고 내던져진 아이들이에요. 이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마주하는 자기비하예요. 아이들은 잠에서 깨어나길 싫어해요! 일어나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쓴맛은 대여섯 살 때 이미 아이들의 영혼을 파고들었어요." (p.229)



몇해전에 소개팅을 했었다. 우리는 서로 딱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만나는 시간만을 조용히 보내고서는 각자의 갈 길로 갔다. 소개팅남에게 어떤 매력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오래 기억남는 그의 말이 있다. 그는 지금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주변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치되어 있는 어려운 아이들이 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다고, 방과후에도 그 아이들이 밥 먹을 곳, 놀 곳, 쉴 곳을 제공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때 나는, 혹여라도 우리가 계속 알고 지내게 된다면, 당신이 그런 시설을 만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제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우리는 사실 그 뒤로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런 시설을 종국에 만들게 된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다. 내가 그 당시에 생각한 것, 그리고 지금 생각하고 앞으로도 생각하는 건, 그런 시설에 책을 기증하는 것이었다. 나는 간혹 그림책을 사서 보고 아이들 책을 사서 읽기도 하니까, 내가 읽어본 책들을 기증하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아이들의 공간에 책을 차곡차곡 쌓아주는 일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책이 어려운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유일한 대안도 아니며 또 최고의 놀잇거리는 아닐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어떤 아이에게는 아주 유용한 놀이의 수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식으로든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어제 상담을 공부하고 또 일하고 있는 친구로부터 심규선의 신곡이 도착했다. 상담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 듣고 많은 위로를 받은 노래라고 했다. 그래서 들어보았다.



심규선의 <피어나>



그간 심규선이 불렀던 노래와 좀 달라 앨범정보를 찾아보았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잔잔한감성의여성싱어송라이터 "Lucia (심규선)" 
디어뮤즈먼츠와한국유방건강재단이발매하는월간 [Monthly DearMuse] 의세번째앨범.

유방건강의식향상을위한핑크리본캠페인의일환으로시작된 [Monthly DearMuse] 가세번째앨범을발매하였다. 지난 7월부터시작된 '닥터심슨' X '그_냥' 그리고 '타린(바닐라어쿠스틱)' X '준모(프로젝트슈즈)' 로이어진두개앨범은수준높은퀄러티의음악과의미있는가사로한국인디음악씬에서좋은반향을일으키고있다. 그뿐만아니라수익의일부가저소득층유방암환우들에게기부된다는점에서음악을사랑하는리스너들에게는물론아티스트들사이에서도각광을받는프로젝트가되었다. 

어느덧세번째를맞은 [Monthly DearMuse] 는많은사람들에게잔잔한감성의여성싱어-송라이터로알려진 "Lucia (심규선)"의참여로더빛을발하게되었다. 심규선은 '에피톤프로젝트', '캐스커','한희정', '참깨와솜사탕' 등대한민국인디씬을대표하는아티스트들이소속되어있는 '파스텔뮤직' 싱어-송라이터로서 2010년디지털싱글로데뷔하기이전부터 "여수국제락페스티벌국무총리상대상", "제 29회 MBC 대학가요제금상수상", "개인유투브채널동영상수십만조회수기록" 등많은수상과경력으로알려져있던아티스트이다. "부디", "꽃처럼한철만사랑해줄건가요?" "어떤날도, 어떤말도" 등다수의히트곡을남기며전문가, 대중에게고루인정받고있는대한민국여성싱어송라이터 "Lucia (심규선)" 은간절하게부르는감성적인노래를통해잔잔한감동을주는것으로잘알려져있으며가사의깊이또한남다르다. 

그러한 "루시아(심규선)"의장점은이번싱글의수록곡인 '피어나' 에서도여지없이발휘되고있다. 어떠한고난과역경이우리의삶을누를지라도, 살아있는한아픔을딛고꽃처럼피어나겠다는삶의의지를담고있다. 가사를곱씹으며듣고있으면마치한편의시를귀로읽는느낌이다. 불행과가난, 병듦이구체적으로묘사되면서우리사회의약자들을대변하는노래이기도하며,누구나언젠가겪게되는비극앞에선한생명의강한에너지와같다. 결국이노래는희망을노래하고있으며깊은위로를전해주고자하는메세지가담겨있다.이는 저소득층 유방암 환우들의투병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음원이며한국유방건강재단과함께하는 핑크리본캠페인 속에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큰 힘이 되고자 하는 "루시아(심규선)" 의 소망이 담겨있는 곡이다. 

이번 [#DearMuse #201510A #PinkRibbon] 또한앨범의판매금액중일부는한국유방건강재단에기부되어저소득층유방암환우들의수술치료비로쓰여지며아모레퍼시픽핑크리본캠페인의일반인홍보대사핑크제너레이션이앨범아트웍디렉팅에직접참여하였다. 한국유방건강재단은국내최초유방건강비영리공익재단으로지난 2000년아모레퍼시픽이설립기금전액을출자하여설립한이후연중으로핑크리본캠페인을전개해오고있다. (네이버 앨범소개)

 

펼친 부분 접기 ▲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한 조각 햇빛도 들지 않는 그런 캄캄한 궁지에
바람을 타고서 날아왔나 작고 외로운 꽃씨
어둡고 후미진 골목에서 넌 뿌리를 내렸지
눈길조차도 머물지 않는 그런 꼭 버려진 아이같이

구둣발에 채이고 머리 위 태양은 타는 듯 뜨겁네
아침이 더디 오길 긴 밤 지새우며 달빛에 위로해
여린 줄기 사이로 잎맥을 따라서 밀어올리는 건
외로움도 아니요, 원망도 아니요
살아있다는 증거

이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도 꽃은 피어나
매일 아프고, 두려운 일들에 짓밟혀도 꽃은 피어나
멍든 가슴에 오래 맺힌 꽃 터지듯 병든 이 세상에
너의 향기로 너의 몸짓으로 디디고 일어나 피어나

메마른 바람이 허공에로 자장가를 부르면
의미조차도 알지 못해도 슬퍼 꼭 엄마의 노래같이

헛된 꿈은 쌓이고 거리 위 세상은 차갑게 식었네
안개비라도 오길, 긴 밤 지새우며 별빛에 기도해
어린 가지 사이로 잎새 끝끝마다 뻗어올리는 건
그리움도 아니요, 핑계도 아니요
살아있다는 증거

이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도 꽃은 피어나
매일 아프고, 두려운 일들에 짓밟혀도 꽃은 피어나
멍든 가슴에 오래 맺힌 꽃 터지듯 병든 이 세상에
너의 향기로 너의 몸짓으로 디디고 일어나

사람들은 그 꽃의 이름을 몰라 영원히 그럴지 몰라
누가 봐주지 않아도 너의 꽃 피워올려
이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도

이 세상이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도 꽃은 피어나
어떤 불행에 가난에 아무리 짓밟혀도 꽃은 피어나
너의 가슴에 오래 맺힌 꽃 터트려 멍든 이 세상에
너의 향기가 멀리 퍼지도록 고개를 들어 자, 피어나




내가 듣기에 가사는 좀 뻔했고 그래서 오글거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본디 <포기하지마>, <나는 문제없어>, <우리들만의 추억> 같은 류의 뻔한 가사를 가진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이 노래가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 노래는 만들어진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했다. 책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세상 모두의 심금을 울릴 수도 없고 세상 모두를 웃게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딘가의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웃거나 울거나 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제 역할을 톡톡히 다 한 셈이 아닌가. 마음이 묵직해졌다.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이런 노래를 만들어 준 심규선에게도 고맙고, 그런 소녀들을 돌보고자 한 앙네스도 고맙고, 이런 이야기를 써준 헤닝 만켈에게도 고마웠다. 


헤닝 만켈은 자신의 소설을 빌어 이런 얘기도 했다.



"예순여섯, 많군요. 서른셋은 상당히 어린 나이지요. 그래도 우리나라에 오늘날만큼 심각한 위기는 일찍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충분한 나이예요. 그런데 그걸 아무도 못 보는 모양이에요. 어쟀든 방향을 제시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못 보고 있어요. 이 장벽은 사람들을 갈라놓고, 불화가 깊어지게 하지요.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톡홀름 지하철을 타고 교외로 조금만 나가보세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해요. 서로 다른 세계라고 주장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같은 세계인데도 중심지에서 멀어질수록 다음 역은 곧 다음 장벽을 의미해요. 변두리로 완전히 나가면 진실을 볼 건지 말 건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요."

"진실이 뭔데요?"

"최극단이라고 생각했던 게 중심지라는 것, 그리고 그게 이제 막 스웨덴을 개조하려고 한다는 사실이지요. 축이 서서히 방향을 돌리고 있어요. 안쪽과 바깥쪽, 가까운 곳과 먼 곳, 중심지와 변두리가 위치를 바꾸는 거예요." (p.228-229)



남자는 우체부가 사흘에 한 번 찾아오는 외딴 섬에 홀로 산다. 그의 나이는 66세이며, 과거에는 의사였다. 그러나 의료사고를 낸 후 그는 오래전 자신의 조부모가 살았던 집으로 돌아와 이제 조용히 혼자 살고 있다. 겨울이면 얼음이 꽁꽁 어는 바다를 앞에 두고, 아침에 일어나 그 얼음을 깨고 얼음 샤워를 하는게 일과의 시작이다. 사흘에 한 번 보는 우체부에게도 퉁명스럽게 대하고 결코 그를 집 안에 들이지 않으며, 방 하나는 개미집으로 잠식당하고 있지만 그냥 둔 채, 늙은 고양이와 개를 각각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그야말로 고요하고 적막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에게, 어느날 69세의 여자가 보조보행기를 끌고 찾아온다. 그녀는 사십년전 그가 사랑했던 여자. 그녀를 이토록 오랜만에 다시 집안에 맞아들이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그였지만, 그는 그녀와 함께 과거에 약속했던대로 연못에 데려가고, 그간 존재를 알지 못했던 자신의 딸과도 만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은 시절 가족을 이루고 시간이 흐른 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면, 남자의 경우, 혼자 외롭게 지내다가 가족을 갖게 되었다. 고집스럽고 퉁명스러우며 피하기만 했던 그가, 이제는 저마다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옆에 두는 것이 소중하다고 여겨지며,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행복해한다. 이 외딴 섬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펼치는 축제는 지극히 평화롭고 행복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그는 이제 누구와도 헤어지고 싶지않고,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이렇게 혼자 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노년에 대해 아주 여러번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과 많이 다른 식으로 진행될 것 같진 않다. 그러니까 갑자기 로또에 당첨이 되어 갑부가 된다거나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십살 연하의 남자와 갑자기 불같은 사랑을 진행하며 살게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건 예외적인 삶의 형태이고, 내 삶이 그렇게 예외적으로 흘러갈 것 같진 않다. 아마도 나는 혼자 조용히 늙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자는 집에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쟁여두고는 있다. 어쩌면 내 삶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늘 냉장고에 술을 넣어두고는 필요할 때마다 마시면서 조용히 앉아있는 것이 노년의 낙이 되지 않을까.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얼음을 깨고 그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도넛츠를 먹는 걸로 일과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커피를 내려마실 수도 있고, 또 모르지, 모닝 맥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될지도. 하루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속의 남자처럼 깊고 고독한 곳에 혼자 거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고양이와 개를 키우게 될지는 모르겠다. 별 거 없고 또 요란하지도 않았던 그들의 축제처럼, 나도 어느날에는 몇몇 사람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고 맛있는 걸 먹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다가, 사람에겐 결국 다수의 사람들이 좌르륵 줄 서 있어 나란히 기다리기보다는, 서로의 치부까지 다 알고 있는 속 깊은 몇명만이 필요한 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을, 그대로 알아주는 사람들. 그들과 어느 하루는 별 거 아닌 일들로 깔깔대며 웃으며 파티를 열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예전에는 언제나 뉴스에 매달렸다. 뉴스를 읽고, 듣고, 보았다. 세상은 나의 참여를 원했다. 어떤 날은 예타 운하에서 어린 소녀 둘이 익사했고, 또 어떤 날은 대통력이 저격당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섬에서 점점 더 고립되어 사는 동안 이 습관은 서서히 사라졌다. 신문도 읽지 않았고, 텔레비전 뉴스도 이틀에 한 번 정도만 보았다. (p.75)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사실 아주 많지는 않을 것 같다. 



iReaditNow 앱에 이 책을 다 읽고 '쓸쓸하고 고독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라고 썼다. 정말 그렇다. 처음, 이 소설은 고독하고 쓸쓸하고 고집스러웠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온기가 퍼진다. 누군가의 옆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 있었다. 가진 게 넉넉한 이들이 아니었고,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이 아닌데도 그랬다. 개에 대해서도 그랬다. 



"개 때문에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사라 라르손의 스패니얼을 우리가 데리고 왔는데, 아무도 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안락사를 시켜야 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개를 돌보았지요. 무척 아름다운 암놈입니다. 그런데 제가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이 사람이 개 알레르기가 있어요. 그렇다고 안락사를 시킬 수는 없잖아요.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성함과 주소를 적어둔 게 있었어요. 혹시 이 개를 돌보실 마음이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거리에서 그 개를 보았을 때 차를 세우신 걸로 보아 분명히 개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내 개가 얼마전에 죽었습니다. 그 개를 돌볼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곳으로 오지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사라 라르손이 개를 루빈이라고 불렀다는 걸 알아냈어요. 개 이름 치고는 무척 독특하지요? 그래도 이름을 바꿔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다섯 살이에요." (p.351-352)




지난 주는 내게 매우 혹독했다. 직장생활이란 것에 대해 아주 많이 생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 그만두고 싶다고 이만오천번쯤 생각했다. 왜이렇게 더러운걸까. 너무 오래다녀서 못볼 꼴을 다 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대안이 없다. 대안에 대해서 생각하자, 하고는 계속계속 대안에 대해 생각했다. 마침 어제 외출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 걸으면서는 생각이 무척 많아진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몇해전에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 엄마아빠 다 돌아가시고 나면, 동생들은 다 저마다의 가족이 있을테고, 나는 혼자일테니, 그때는 미국에 가 살아볼래, 라고. 거기가서 밥벌이를 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써가면서, 그러면서 살아볼래, 라고. 어제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미국에 갈까. 다 정리하고 미국에 갈까. 그렇지만 지금은 밥벌이가 필요하다. 그러나 소박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지금 다 정리하고나면 그동안 모은 돈과 퇴직금을 가지고 훅 날아가서 북까페를 차리는 건 어떨까. 그러니까 한국어로 쓰여진 한국어 북까페. 간판도 아예 한글로 달고. 그래야 내가 영어공부 안해도 되니까...내가 가진 거라곤 책밖에 없으니, 낯선 외국 땅에 한국어 책을 잔뜩 구비해둔 까페를 차리는 거다. 나는 계속 책을 읽어왔고 그래서 그 책들을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도 책을 읽을테고, 그 책들은 쌓여갈테니, 그걸 그냥 구비해두고 까페를 차리는 거다. 요리솜씨는 없으니 뭐 대단한 거 팔지말고, 만화방처럼 라면을 끓여주거나 하지도 말자. 라면 끓이다 세월 다 가... 커피랑 녹차, 홍차 티백만 준비해두고 그냥 조용히 앉았다 가라고.. 이걸로 대단한 밥벌이가 되지는 않겠지만, 단골들은 몇 생길것이고, 그날그날 소박하게 먹고살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조용하고 소박한 밥벌이를 목표로 한다면, 굳이 미국에 가진 않아도 되잖아? 라는 게 이어진 생각이었다. 지방으로 내려가도 된다. 집값이 싼 지방에다 작은 집 하나 얻고, 작은 공간도 하나 얻어서,내가 가진 책을 다 가지고 내려가는 거다. 그리고 책장에 내가 원하는대로 꽂아놓고는, 하루종일 조용히 앉아 책을 읽다가 책을 읽으러 온 손님도 받고... 



아, 그렇지만 이 수입은 어쩌면 마이너스일지도 모른다. 알라딘 중고샵에 취직할까? 그렇다면 정기적인 수입이 매달 들어오긴 할텐데. 그냥 책들에 둘러싸여 사는 건 어떨까? 중고샵에서 일하면 월급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적으면 적어졌지 많아지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까페에 취직하는 건 어떨까? 아르바이트로 취직하는 건...



어떻게도 결론을 못내리고 시간은 흘렀고, 날은 밝았고, 변함없이 나는 같은 자리에 출근해 앉아있다. 별 수 없는걸까? 별 수 없어야만 하는걸까?



이 책의 마지막은 이런 근사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더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 (p.409)




대학 입학부터 지금까지 이십년간을 쉼없이 일해왔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여기까지 온 건 정말 장하고, 더 갈 수 있다면 또 더 풍족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걸로 이제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의미로 여기까지 온 걸로 나는 잘했다고 다독이고 싶다. 더 가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더 가지 않아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자꾸만 든다. 나는 너무 오래 일해왔다.




"나는 늘 얼음이 무서웠어."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얼음장을 건너 내가 사는 섬까지 왔어?"

"무서워한다는 게 그걸 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지." (p.121-122)






<피어나> 가 실려있는 앨범은 디지털로만 나온건가보다. 알라딘에선 찾을 수 없고, 대신, 정규앨범이 새로 나왔다는 걸 알게됐다. 아! 책만 안산다고 돈이 쌓일 줄 알았냐! 음반은 어쩔거냐!! 크- 음반을 생각하질 못했네..어쩔...3개월간 순수구매금액 줄일랬더만, 책을 안산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쩝...



시마는 아득히 사라지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도 가믄하지 못했다. 지혈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함을 쳐서 아이를 깨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는 시마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살아야 한다고, 그냥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여기 내 부엌에서, 이런 봄날에,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된 아침에 죽는 건 옳지 않다고……. 내 말을 들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계속 시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p.275)

"나를 맞아줘서 고마워. 바깥 얼음장 위에서 얼어 죽었을지도 몰라. 당신이 나를 못 본 척 할 수도 있었잖아."
"내가 당신을 한 번 떠났다는 게 또 그런다는 뜻은 아니지." (p.329)

죽음과 더불어 존재하던 모든 것은 소멸된다. 죽음은 내가 늘 겪던 어려움의 흔적만 남길 뿐이야. 사랑과 감정……. 하리에트가 너무 가깝게 다가와, 나는 그녀에게서 도망쳤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나를 떠나겠지.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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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2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2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5-11-0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 읽고 나니 울컥해요...학교가 끝나고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 대한 생각을 했던 그 남자도 그리고 도움을 주고자 했던 다락방님의 마음도 그렇고. 지난 주 유독 힘들었을 님을 생각해도 그렇고...

나도 조금 전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는 건 원래 이렇게 항상 힘들고 머리 아픈 문제들을 껴안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냥 좀 평화롭게 편안하게일 수는 없는 걸까.

그리고 와인. 저 큰일 났어요--;; 지금 하루에 한번씩 자기 전에 꼭 반잔 하게 되는데 이게 점점 중독으로 가는 것 같아요. 이래도 되는 건지 그런 마음이...그래도 이 힘든 나날들 중에서 라떼와 책과 와인과 음악이 있어 좀 살만해 지는 것 아닐까요? 힘내요, 부디...

다락방 2015-11-02 15:59   좋아요 0 | URL
다들 자기자리에서 사소한 고민에 부딪히고 또 큰 고민에도 놓이게 되고 그러는 것 같아요. 대체적으로 사는 게 다 그렇지, 하고 넘기게 되다가도, 왜 어떤 날은 유독 견디기 힘들어질 때가 있잖아요. 지난주가 제게 그랬어요, 블랑카님. 이제 그만하고 싶다, 라고 계속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도 그래요. 그래서 계속계속 생각할 거에요. 그만둔다면, 그 후에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요.

아니 그나저나, 와인..중독이라니. 하하하하하. 블랑카님, 그러다 금방 반 병 돼요. 저는 얼마전에 한 병을 다 마시기도 했답니다. 아, 블랑카님이 말씀하시니 지금 당장 와인을 마시고 싶어졌어요 ㅠㅠ 어제도 마셨지만 말예요.. 하하하하하.


네네, 기운낼게요, 블랑카님. 블랑카님도 기운내요. 그래서 우리 또 새롭게 맞이한 한 달을 잘 지내봅시다!

챔피언 2015-11-0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 힘들게 하는 사람의 무릎 꿇은 형상을 스케치 한다음에 님의 형상이 그 형상을 발로 까고 있는 스케치를 더하세요. 기분이 좀 풀어집니다. 제가 효과를 봤던 방법이니 믿을만합니다. 다만 약간의 그림 솜씨가 필요하니, 만약 그림에 자신이 없다면 드로잉과 관련된( 이충원 선생님의 스케치 쉽게하기 시리즈 추천) 책을 구매하셔서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상이 실물과 닮으면 닮을수록 기분이 업됩니다.

다락방 2015-11-03 09:49   좋아요 0 | URL
오,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그림 솜씨는 전혀 없지만 말이지요. 스케치 쉽게하기 시리즈까지 산다면..저는 필기체 교본과, 글씨 예쁘게 쓰기 교본에 이어 세번째 교본을 갖게 되겠네요. 다 하지 않고 쳐박아 두고 있다는 게 함정..Orz

그치만 스케치는 제가 진짜 못하는 거니까 역시 책으로 사서 공부좀 해봐야겠어요. 검색해볼게요. 고맙습니다. 흐흣.

무해한모리군 2015-11-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직장에서 10년 근속상으로 금 한냥을 받았어요. 그리고 회사에 왔더니 감사팀에서 우울한 전화가 왔네요. 상을 받으면서 정확히 `너무 오래 일했군`이란 생각을 했는데, 이 글을 읽게 되었네요. 운명인가요? 아 직장생활 참 고단합니다... 저는 가만히 책읽고 주말엔 산타고 밤엔 노래부르고 이렇게 살고 싶은데 말입니다.

다락방 2015-11-04 08:02   좋아요 0 | URL
어제 다른 동료랑 술 마시면서 이런 얘기 또 했어요. 그 동료도 10년 다녔는데 얼른 나가야겠다, 너무 오래다녔다,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나간다고 해도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망설이게 되고, 그렇게 십일년을, 십삼년을 다니게 되겠죠. 하릴없이 우리 동업이나 할까, 뭘하면 좋을까, 이런 얘기도 해보고요.

고단합니다, 휘모리님.
저는 어제 저녁에 술 마신게 안주 탓인지 얹혔는데, 새벽에 잠 한 숨 못자고 손을 따고 여전히 속이 불편한데도 꾸역꾸역 출근해서 앉아있어요. 정말 고단하지요?
 

하는 놈들이 끝까지 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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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5-10-27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글 읽으니, 나경원아버지 학원도 예전에 학교일 시키고 그랬다는 글 올라온 적 있었는데, 충암고는 한 술 더 뜨네요. 근데 저런 학교 보내는 인근 학부모 심정은 어떨까요? 저 정도면 인근 학부모들에게 똥통이라는 소리 나올텐데...

유부만두 2015-10-27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쩜 좋아... ㅜ ㅜ 하지만 학부모들은 애 맡겨놓은 죄인이라 학교측에 암말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했겠죠...

세실 2015-10-27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울 아들 충암고 다녔다면 저도 페인트 전문가를 불러야했군요. 부자도 아닌데.
.. 참으로 황당합니다.

살리미 2015-10-28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생들 상대로 뻘짓하는 사학재단들 제발 좀 정신차렸으면 좋겠어요. 저런 마인드로 왜 교육사업을 하는지!! 하긴 이 나라에서 누굴 보고 배우겠어요 ㅠㅠ

[그장소] 2015-10-28 0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교자체를 재단으로 만드는 일이 더 위험한 건 아닌지..
뭐든 재단과 엮여서 일이생기는데..교육을 사업으로하는
마인드..부터..꽝 ...대놓고 돈벌겠습니다..잖아요.^^;;

transient-guest 2015-10-2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그런건 아닌데, 이런 문제학교들이 종종 사립/종교사립구조로 수익사업을 하고 있죠. transient guest nation에서 이런 자들은 사형감입니다.

붉은돼지 2015-10-28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진짜 가지가지 여러가지 해도해도 너무하네

치니 2015-10-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저도 충암고 기억 있어요.
중학교 때인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어떤 오빠를 만났는데, 자신이 충암고 다닌다면서 악랄하기로 유명한 학교인데 넌 못 들었냐며 다짜고짜 학교 욕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겠다 싶어요. 자기네 학교가 얼마나 이상한지 보는 사람마다 말하고 싶었을 거야...ㅠ

낭만인생 2015-10-2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
 
연애의 계절

















아주 오래전 신해철이 [밤의 디스크쇼] 디제이를 했을 때, 금요일이었나 토요일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청취자들로부터 엽서를 받아 그 주의 인기가요를 순위로 뽑아 틀어줬었다. 신해철에 대한 애정으로 듣던 나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당시 1위는 계속 신해철의 노래가 했었는데, 그래서 신해철은 말했었다. 자신의 신곡이 나온것도 아닌데 자꾸만 디제이라고 1등하니 안되겠다, 여러분들이 보내주는 노래에서 신해철노래는 빼겠다, 라고. 그러나 애청자들은, 팬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해철의 노래를 보내는 대신, 그들은 무한궤도의 노래를 보냈고, 1위는 신해철이 아닌 무한궤도의 노래가 했다. 그렇게 무한궤도가 해체하고 한참지난 후에도 밤의 디스크쇼에서는 '우리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들을 수 있었다. 먼댓글은 그 노래에 대한 추억.



여동생과 남동생이 주말동안 신해철이 불후의 명곡에도 히든싱어에도 나온다고 알려줬다. 보지도 않던 [불후의 명곡]을 보기 위해 티브이를 틀었는데, 마침 홍경민이 <안녕>을 부르고 있더라. 아...나는 안녕을 참 좋아하는데, 홍경민을 못보겠어. 뭐랄까, 저 제스쳐나 옷차림이나 무대 매너...이 모든게 다 오글거려. 뭔가 견딜 수 없는 기분이야...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 진짜 못보겠다. 싫다거나 불편하거나 한 게 아니라, 정말 그냥 오.글.거.린.다. 해서, 그 프로그램은 보다 말았고, 늦게 들어온 남동생이 술이나 마시며 히든 싱어 보자고 해서 또 술을 꺼내가지고 [히든 싱어] 앞에 앉았다. 우리 울면 어떡하지? 라고 했는데 역시나 나는 계속 울었다. 출연한 게스트들은 모두 자기가 신해철과 각별한 사이었고 오래 함께 보냈으니 누가 신해철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고 장담했고, 나의 남동생은 저들보다 자기가 더 잘 맞힐 수 있다고 했다. 왜? 자신은 신해철의 라이브앨범까지 정말 미친듯이 들었으니까. 정말로!! 김세황도, 신대철도 맞히지 못하는데 남동생은 백프로 정답률을 자랑했다. 누나 나한테는 이게 너무 쉬워, 다 들려, 다. 


신해철이 그리워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남동생과 함께 우리가 그의 장례식에 다녀온 건 정말 잘했다고 말했다. 신해철을 앞에 두고 우리가 같은 프로를 보고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몹시 행복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어떤걸 좋아하는지, 그것이 다른 사람과 늘 일치할 순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취향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같은 걸 좋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와 시간을 오래 함께 보낼 사람은 가급적 술을 마셨으면 좋겠고 그렇게 같이 취했으면 좋겠다. 책을 읽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신해철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아주아주 나이들어서까지도 우리가 같은 노래를 듣고 또 같은 노래를, 한 가수를 같이 추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근데 나 정말 치매인가 봐. 어제 카드 명세서가 왔는데 전자 제품 매장에서 12만 엔 썼더라고. 뭘 샀는지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지. 자질구레한 걸 많이 샀나? 심각하지?" 나는 어젯밤부터 찝찝했던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너 그거, 냉장고!" 친구가 냉큼 대답했다. 아, 맞다. 머릿속의 뭉게구름이 말끔히 개었다.

"난 말이야, 통장을 봤더니 65만 엔이나 인출했더라. 어디에다 썼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나는 곧바로 말했다. "너 그거, 부동산취득세." "앗, 맞다." 어째서 남의 지출은 안 까먹는 것일까. 머릿속이 상쾌해져서 기쁘게 일어났다. (p.30)



















잘 늙어가고 싶다. 또한 다정한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늙어가고 싶다. 언제까지고 친근한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소수의 몇 명과는 소소한 일상이야기를 언제까지고 함께 공유하며 즐거웠으면 좋겠다. 서로의 집에도 느긋한 걸음으로 놀러가고, 또 그렇게 느긋하게 집 안에 있는 음식들이며 술을 꺼내서는 함께 먹고 수다떨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용히, 요란하지 않게 늙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비가 오면 부침개를 부쳐 먹어도 좋겠지. 부침개 해먹을래? 전화를 걸면 응, 하고 또 느긋한 걸음으로 누군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줬으면 좋겠다. 방문자는 내 집에 들어서면서, 요앞에서 막걸리 사왔어, 라고 말해도 좋겠지. 우리는 막걸리에 부침개를 먹으면서, 응, 근데, 요즘엔 <슬픈 표정 하지말아요>가 자꾸 생각나, 하며 흥얼거리고, 상대는 젓가락을 두드리며 함께 불러줬으면 좋겠다.



'사노 요코' 할머니는 늦은 나이에 한국드라마에 빠진다. 욘사마를 사랑하게 되고 이병헌을 좋아하게 된다. 물론 그 드라마들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 보면서 푹 빠진다. 한국드라마가 있어서 행복했노라고 고백한다. 나야 언급되는 겨울연가, 가을동화..하는 것들을 하나도 보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보고 행복해할 수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중에서 스토커의 집념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스토리는 엉망진창이다. 욘사마 수난의 역사다. 교통사고를 두 번이나 당하는데, 두 번 다 연인인 최지우를 마나러 가는 순간이다. 3미터만 더 가면 껴안을 수 있을 거리에서 욘사마는 커다란 차에 치여 날아간다. 그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소꿉친구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남자만 한 스토커를 본 적이 없다. 굉장한 집념이다. 집념 하면 욘사마도 여주인공도 빠지지 않는다. (p.115-116)



술약속이 없어 평소보다 여유로웠던 주말, 텔레비젼 앞에 앉아서 채널을 돌리다가 드라마를 보게 됐다. [부탁해, 엄마] 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다. 극중에서 유진은 비서였고, 자신이 모시는 대표의 아들과 연인사이었다. 대표는 자신의 비서를 몹시 인정하고 좋아했지만, 아들의 연인이라고 하니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유진은 자신의 애인이 부잣집 아들인줄 몰랐다가 뒤늦게 알게 되서 연인과 사이가 안좋은 상황, 기분 안좋은 유진을 달래주겠다며 유진오빠의친구가 나타난다. 오빠의 친구로 말하자면 어릴적부터 유진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끊임없이 유진에게 구애를 하는중인가보다. 여튼, 그가 유진을 달래주겠다고 한 방법이 어처구니 없는게, 유진의 회사로 찾아와 회사 복도에서 무릎꿇고 꽃다발을 전해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이 꽃다발을 받으면 유진의 기분이 풀어질 거라는 것. 하아-


그 장면을 보면서 진짜 그 끔찍한 경솔함에 토할 것 같았다. 꽃다발을 준다-유진이 좋아할거다 라는 생각은 너무나 일차원적이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좋을대로만 생각할까. 덕분에 유진은 회사복도에서 사람들이 다 보는데 남자로부터 꽃다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회사 동료들은 지나가다 보면서 '이열~' 하면서 야유하며 '애인한테 프로포즈 받는구나' 등의 말들을 내뱉는다. 이남자는 애인도 아니고 설사 애인이라 해도 회사 복도에 나타나서 공개적으로 이런 짓거리라니. 그건 여자의 사생활과 사회생활 모두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닌가. 거기에서 유진이 난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하는걸까. 아 진짜 엄청 때려주고 싶은 상황인데, 이 착한 유진은, 오빠 때문에 내가 난처해졌다며 조곤조곤 불만을 토로한다. 아..너무 순진해 빠졌다. 나였으면 진짜 쌍욕을 하고 꺼지라고 했을텐데.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하아-너무 싫어. 그런데 남자는 나 때문에 니가 난처해졌다면 미안하다면서 유명한 플로리스트에게 부탁해 준비해온 꽃다발이니 받아달라고 조른다..야, 이 개... 어휴...... 니가 정성스레 준비했다고 해서 내가 그걸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그 마음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노 요코의 '스토커 집념'에 대한 글을 읽으니 갑자기 이 드라마의 이 장면이 생각나서 갑자기 또 빡이 확 쳐가지고...




나는 한국 드라마에 재산을 탕진했다. 남들 눈에는 경솔해 보일지라도 사실 소심한 나는 무언가에 재산을 탕진한 적이 없었다. (p.129)



하하. 귀여운 할머니시다. 한국 드라마에 재산을 탕진했다니. 그러나 그것이 사노 요코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었다면, 거기에 재산을 탕진하는 게 뭐 어떤가. 내가 내 행복을 위해 돈을 쓰겠다는데!



대체적으로 유머가 있고 시니컬한 글이라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좋았던 건 아니다. 군데군데 나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들이 튀어나와서 뜨악했다. 맥락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남자의 생식기쯤은 마음대로 쓰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p.124) 라든가, 맞짱 뜬 뒤로 사이가 좋아진 선생님과 학생의 예를 들며 '폭력은 근사하다'(p.201) 라 할 때는 아, 뭐지 싶더라. 그러다 다음문장을 읽고는 꼰대같다...고 생각했다.




신분이 낮은 병사도 신분이 높은 상관도 피를 흘리며 죽을 줄 알면서 사지로 간다. 좋은 사람들이다. 여자로 군대를 꾸리면 도망가거나 꾀를 부리거나 패싸움을 할 것이다. 적보다는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던 동료를 몰래 죽인다든지, 본처와 첩이 같은 부대에 배정되면 뒤에서 쏠 수도 있다. 여자에게 대의란 없다. (p.209)



뭐지, 이 꼰대 할머니는.... 역시 에세이 읽기는 쉬운 게 아니다.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엿보는 것은 분명 흥미롭지만, 그 생각이 나와 너무 어긋날때는 이렇게 짜증이 나...



분명,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는 또 지금의 나와 다를 것이다. '절대'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나는 이대로 변하지 않아, 나는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을거야, 같은 것들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런데 사노 요코가 이런다.



나조차도 가까이서 찍은 러브신이 나오면 고개를 돌린다. 텔레비전이 크지 않아도 고개를 돌린다. 키스나 성교 장면은 징그럽다. 예전에 내가 저런 걸 했다니 거짓말 같다. 거짓말입니다. (p.206)



아아, 나도 나이들면 저렇게 될까? 지금의 나로 생각하자면, 나는 나이 들어서도 키스나 성교장면을 징그럽게 생각해서 고개를 돌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그건 지금이 지금이라서인걸까? 나는 먼훗날이 되어서도 야한 영화 찾아보고 싶어질 것 같은데, 그게 단순히 지금의 생각인건가??




주말 오후에는 일자산엘 갔다. 해가 일찍 지는만큼 가지말까 생각도 했는데, 올라가다 해가 지면 바로 내려오자, 하고 올랐다. 아 그러나 가을산 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기를 잘했다고 혼자서 진짜 오만번쯤 생각한 것 같다. 이런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멈춰 서 사진을 찍으며, 여행친구에게 문자를 넣었다. 우리 또 여행가자고, 숲길로 가자고. 가서 잔뜩 걷고 오자고. 바다 말고 숲으로 가자고. 

일자산으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주렁주렁 감이 열린 감나무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감나무가 있는 집은 감나무집이라 불리고 있나????






며칠전에는 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고등학생 독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고맙고 기쁜 일이었다. 더 좋은 글을 쓰자고, 더 부지런히 읽고 더 부지런히 즐기면서 더 재미있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건 즐겁게 먹고 즐겁게 살아야 가능한 일. 그래서 어제는 비도 오고 해서 육전을 먹었다. 육전을 먹는 건 즐거운 것들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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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5-10-2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전.. 먹고 싶네요. 홍경민... 오글거림은 정말.. 저도. 채널 놀리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

다락방 2015-10-27 16:25   좋아요 0 | URL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오글거림이 넘쳐요. 어휴, 못보겠어요 진짜 ㅠㅠ 그 오글거림의 정체는 무엇인지.. ㅠㅠ
육전은 양이 너무 적어서 마음껏 먹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워요..휴..

유부만두 2015-10-27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히든싱어 보다 울었어요....
그리고 사노 요코 할머니 글은 그냥 그렇더라구요. .. ㅋ 저도 꼰대 할매라고 리뷰에 썼어요.

다락방 2015-10-27 16:27   좋아요 0 | URL
ㅎㅎ 아 뭐지 짜증스럽네, 하면서 책의 리뷰들을 보는데 유부만두님 리뷰에 꼰대 라고 적혀있더라고요. 그래서 아, 맞아, 이 단어, 이 단어가 적절해! 했죠. 남자들이 아랫도리 쓰는거 내버려 두라는 것도 너무 짜증났고요 -_-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유머도 있는데 몇몇 부분들이 뭐랄까, 그냥 넘어가기 힘든 짜증을 줘요. -0-

건조기후 2015-10-2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싫은 건 아닌데 차마 몰입해서 볼 수가 없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고.. 불후의 명곡은 홍경민뿐만 아니라 대체로 다 그런 기분이었어요. 히든싱어는 정말 행복하게 울면서(?) 너무 잘 봤고요 ㅜㅜㅜㅜㅜ

다락방 2015-10-27 17:04   좋아요 0 | URL
아 다른 가수들도 그랬나요? 저는 딱 틀었는데 홍경민 나와서 으악 오글거린다 하면서 돌려가지고 다른 가수 부르는 거 안봤거든요. ㅠㅠ 어우 그 오글거림은 진짜 ㅠㅠㅠ
저도 히든싱어 울면서 봤어요 ㅠㅠ 어휴 그냥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hellas 2015-10-28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경민의 오글거림에는 무한대 동감해요. 진짜 왜 그런거죠? :0

다락방 2015-10-28 10:05   좋아요 0 | URL
터프한 락가수로 보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너무 오글거려요. -0-

토이앤미 2015-11-1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도시 1위 그거 기억나요!! 아아 ㅠㅠ
 

얼마전에 여자사람이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자신은 진실한 사랑을 찾고 있는데 접근해 오는 남자들은 어떻게 한 번 자볼까만 생각하는 것 같다고, 그게 눈에 보인다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꼭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네가 대화가 통화는 진실한 사람을 원한다면 그 사람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런 사람은 분명히 있다, 라고 말했다. 그런 참에 만난 《죽어가는 짐승》의 '케페시' 교수는 딱 재수없는 스타일이었다. 생각하는 거라곤 오로지 '이 여자와 어떻게 섹스할까' 뿐이니까.



아이는 생각해, 나는 이 사람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하고 있다고. 이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관심을 갖고 있다고. 그건 사실이지만, 난 아이와 씹을 하고 싶어서 그애가 어떤 아이인지 호기심을 느끼는 거야. 나한테는 카프카와 벨라스케스에 대한 이런 큰 관심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 아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생각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더 계속 이래야 할까? 세 시간? 네 시간? 여덟 시간까지 가야 할까? 베일 씌우기에 들어간 지 이십 분인데 벌써 궁금해하고 있어, 이런 것들이 아이의 젖퉁이와 아이의 피부와 아이의 몸가짐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남녀가 밀고 당기는 방식에 관한 프랑스식 기술에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야만적인 강한 충동에만 관심이 있지. (……중략) 나는 이 아이와 씹을 하고 싶고, 그래, 그래서 어떤 베일 씌우기를 견뎌야 하지만,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야. 이 가운데 얼마나 교활한 것일까? 나는 그 모두가 교활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야. (p.28-29)

















그가 그토록 씹을 하기를 원하는 아이, '콘수엘라'는 이제 고작 스물네 살이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젖가슴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잘 모르며, 그래서 그녀는 카프카를, 벨라스케스를 소개한 노교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수단'일 뿐이었는데. 뭐, 어쨌든 그는 그토록 원하는 그녀와 연인 사이가 된다. 연인 사이가 되어 서투른 그녀를 가르치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에게 집착해버리고 만다. 이토록 아름답고 어린 여자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행동, 거절했어야 했던 행위까지 해내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데, 와, 여기까지 읽는데 정말 힘들더라. 그가 그저 여자를 성적대상으로만 보는 것 같아서 힘든 게 아니라(그건 짜증스럽다), 그에게 섹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래서 섹스전과 섹스후를 계속 언급하기 때문에 힘들었다. 노골적인 유혹과 집착을 읽노라니 정신이 사나워지는 거다. 



아, 나는 그와 어떻게 처음에 키스하게 됐지? 부터 시작해서 육체적인 기억들이 진짜 쓰나미로 몰려들기 때문에 힘들었다. 어휴, 진짜 정신 사나워서, 지금 하던 모든 걸 때려치고 그저 야한 생각이나 하고 싶어지는 거다. 그래서 수시로 책장을 덮어야 했다. 자꾸만 불쑥불쑥 기억들이 튀어나와서 도무지 들어갈 생각을 안해. 이 기억이 여기있지, 이 기억은 여기있단다, 이 때 너는 어떤 느낌이었지? 아주 그냥 이것들이 나를 온통 휘어잡고 있더라. 


그래서 힘들었다. 이 책이 야해서가 아니라, 나의 야한 기억들을 불러 일으켜서. 아 정신 사나워. 다 읽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오래전에 '마이클 더글라스'와 결혼한 '캐서린 제타존스'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녀는 자신은 항상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끌린다고 했다. 그래서 마이클 더글라스 전에 사귀었던 연인도 나이차이 많이 나는 남자였다고. 매력적인 콘수엘라는 스물네살, 케페시 교수는 예순두 살일 때 처음 만나 연인이 된다. 나이차이도 보통 나이차이가 아닌데, 케페시 교수는 이런 말을 한다.



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엄청난 나이 차에 경악하는데, 콘수엘라는 바로 그 점에 끌린 거야. 사람들 눈에는 그저 야릇한 에로티시즘으로만 보여. 또 그것을 혐오스러운 것, 혐오스러운 소극으로 받아들이지. 그러나 내가도달한 나이는 콘수엘라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어. 노신사와 사귀는 여자아이들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게 아니야-나이에 끌리는 것이고, 나이 때문에 그러는 거야. 왜냐고? 콘수엘라의 경우 그건 엄청난 나이 차 때문에 자신이 굴복하는 것을 스스로 허용할 수 있어서인 듯해. 내 나이와 내 지위가 아이에게, 합리적으로, 항복해도 좋다는 허가장을 주고, 그러면 침대에서 항복하는 게 불쾌한 감각이 아닌 거야. 동시에, 나이가 훨씬, 훨씬 많은 남자한테 친밀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이런 젊은 여자는 젊은 남자와 성적인 수작을 할 때는 얻을 수 없는 권위를 갖게 돼. 굴복의 쾌락과 더불어 정복의 쾌락을 누리는 거지. (p.46-47)



이 말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나이 때문에 끌린다는 게 어떤건지 알 것도 같다. 나만해도 이십대 어린 시절에는, 나보다 나이가 훌쩍 많은 남자어른이 좋았다. 그가 어른이라는 사실이 좋았고, 그렇게 어른스럽게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받아줄 것 같아서 좋았다. 기대도 되고 의지해도 된다는 생각을 그때는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이가 나보다 훌쩍 많다고 해서 어른인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훌쩍 많다고 해서 내가 의지할만한 대상이 되란 법도 없다. 이제는 나이랑 전혀 상관없이 어른이 되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걸 알고 있다. 경험이 많은 만큼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그만큼 인격이 쌓이겠지, 하는 건 어마어마한 착각이다. 예순두 살이나 먹은 케페시 교수도 젊은 여자의 젖가슴에 반해서는 이런 몸은 환상적이라고 감탄하며 어떻게든 그녀를 침대로 끌고갈 생각만 하니까. 뭐, 결론이야 어찌됐든간에 말이다. 



끝까지 읽노라니, 이 책은 내가 일전에 보았던 영화와는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영화의 내용과는 달랐다. 제길 .. 뭐, 나도 늙어가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노년을 상상할 수 있어? 물론 못하겠지. 나는 하지 않았어. 할 수 없었어. 그게 어떤 건지 전혀 몰랐어. 잘못된 이미지조차 없었어- 아무런 이미지가 없었어. 사실 누구도 다른 것을 원하지 않아. 어쩔 수 없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가운데 어떤 것과도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아. 이 모든 게 나중에 어떻게 될까? 여기서는 둔감함이 관례야. (p.49)




콘수엘라는, 내 기억에서처럼 유방암에 걸렸다. 그리고 유방암에 걸린 채로 케페시 교수를 찾는다. 그녀와 그가 헤어진 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돌이켜보았을 때 자신의 몸을 그토록 좋아하고 아껴줬던 사람, 아름답게 보아준 사람은 케페시 교수였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케페시 교수는 그녀의 몸을 정말 좋아하고 정말 아름답게 느껴 그토록 찬탄해마지 않았지만, 콘수엘라가 암에 걸려 자신의 과거 연애사를 돌이켜보았을 때 가장 몸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던 남자를 떠올린만큼,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도없이 칭찬에 칭찬을 퍼부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헤어지지 않는다면 그토록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는 것이니 그건 그대로 좋고, 설사 헤어진다면 나중에 오랜 시간이 흘러 돌이켜 봤을 때, 그녀는 내 몸을 가장 많이 사랑해준 사람이지, 하고 떠올릴 수 있을테니. 




콘수엘라의 몸이 절대적으로 아름다웠다면, 케페시 교수가 아닌 다른 남자들도 폭풍같은 칭찬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콘수엘라의 몸은, 그녀에게 흠뻑, 흐으으으으음뻑 빠진 케페시 교수에게야말로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존재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간에, 아주 그냥 눅진눅진한 기억들 때문에 읽기 힘든 독서였다. 이토록 얇은 책 한 권을 읽는데 온갖 기억이 쏟아져나와 진짜 힘들었다.



책은 진짜 내용을 읽기전까지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가 없다니까...

내가 비록 그런 건 알 수 없겠지만, 어쨌든 오늘 점심 메뉴는 안다. 

이제, 먹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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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2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5-10-22 16:3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힝 ㅜㅜ

낭만인생 2015-10-2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유한 늙은 왕과 가난한 젊은 청년이 영혼을 바꾸고 서로 후회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젊은이는 노년의 명예와 부, 성숙함을 탐하고, 노인은 젊은이의 젊음과 아직 꾸며지지 않는 삶의 생체기를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는가 봅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게....

다락방 2015-10-22 16:37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가는 걸 실감해요. 올해 처음 새치가 생겼고요(우울 ㅠㅠ), 말씀하신 것처럼 젊음이 부러워요. 젊은 사람들을 보면 그냥 막 예쁘고 부럽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젊은이들이 예뻐보이고 부럽고 그런건 내가 늙어서겠지, 하고 혼자 생각하곤 했어요. 매일매일 늙어가고 있어요, 낭만인생님...

레와 2015-10-22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기억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위에 올려준 책내용과는 아주 다른 영화로 기억하고 있어요.


흠.. 필립로스 전작인 [에브리맨]과 [울분]과는 아주 다른 책인가봐요? .. ㅎㅎ;

다락방 2015-10-22 16:40   좋아요 0 | URL
책 읽다보니 얼핏얼핏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이 좀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달랐어요. 그래서 내가 영화를 잘못 기억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영화는 다르게 만들어졌나 싶기도 하고...

에브리맨, 울분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그래도 같은 지점이 있어요. 젊음과 늙음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더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증오하고 그러나 아버지를 의지하고 싶은 아들에 대한 얘기 라든가, 늙음과 젊음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 같은 건 어쩐지 울분이나 에브리맨하고 맞닿아 있는 것도 같아요.

단발머리 2015-10-2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다 여러 번 덮은 사람으로서, 정말 이 책은 읽기 힘든 책입니다.
이 귀한 여정을 마치신 다락방님께 박수를...
아직도 반이나 남아있는 나에게는 용기를... 좀 주세요.

다락방 2015-10-27 12:22   좋아요 0 | URL
정말 읽기 힘든책이죠. 에로틱한 기억을 불러내는 것도 그렇지만 교수가 여제자를 보는 시선이 처음에 되게 짜증나더라고요. 지금쯤은 다 읽으셨나요, 단발머리님? ㅜㅜ

moonnight 2015-10-22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트노이의 불평도 읽기 힘들었어요-_-; 필립 로스씨 무섭-_-;;;;;

다락방 2015-10-27 12:22   좋아요 0 | URL
저도 포트노이의 불평 읽기 되게 힘들었어요. 가까스로 다 읽었는데 읽고나서 남는 게 없어요. 읽는다는 행위에만 집중한 것 같아요. 그래도 이 책은 포트노이의 불평 보다는 나아요...휴....

에이바 2015-10-2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의미로...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도 좋아요

다락방 2015-10-27 12:23   좋아요 0 | URL
크- 그 책 좋다는 말 들었어요. 보관함에 슝- 넣을게요.
그런데 왜 `다른 의미`일까요? 다른 의미란 어떤 의미일까요?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