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알라딘에서 페미니스트 키링 분홍색을 받아가지고 그거에 잘 어울리는 가방을 샀다는 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 이렇게 뭔가 하나가 갖춰지면 그에 따른 부속사항(?)들을 사게 되는 경우들이 더러 생긴다. 아니, 늘 그렇다. 쓰레기..최근에 어딘가에서 쓰레기 얘기를 들었는데...아, 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 이란 팟캐스트에서 진행자 중 한 명이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너무 싫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끄덕끄덕 했었는데, 나 역시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게 너무 싫고, 가급적 쓰레기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물건의 포장은 대체적으로 쓰레기라 나는 가급적 선물도 포장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팟캐스트의 또다른 진행자는 '다른 사람들도 다 쓰레기를 만들어낸다'면서 나름 다독거려주려고 했다. 음, 쓰레기 만드는 거 싫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도 쓰레기를 만든다'는 딱히 도움이 되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마음은 전해졌지만.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의 한 구절이, 저 팟캐스트를 듣다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덧붙인 정여울의 해설 부분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쓰레기를 모아 버릴 때마다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 단출한 살림인데도, 왜 이렇게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 것일까. 음식물 쓰레기를 보며 가장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수많은 종이 박스나 비닐봉지들을 보며 '도대체 왜 이토록 많은 것을 사야 했을까' 돌이켜 본다. '쓰레기를 버리러 이 세상에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그 순간은 정말 문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비애를 느낀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반성을 한 후에도, 그다음 주 쓰레기의 분량은 그다지 줄지 않는 것 같다. 최소한의 상품을 소비하려고 노력해도, 우리는 결코 쓰레기를 버리는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이 쓰레기들의 대부분이 상품 그 자체가 아니라 상품을 '포장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각종 포장지, 상자, 플라스틱 봉지, 종이봉투만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지구를 향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지 않을까. (정여울의 작품 해설 부분, pp.265-266)







나는 쓰레기를 만드는 게 너무 싫어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구입하기를 꺼린다. 애초에 그런걸 갖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더 예쁘게 만들기 위한 것들은 대체적으로 필요와는 거리가 멀어서, 내 방은 건조함의 극치랄까. 그렇기 때문에 아이폰에도 케이스를 씌우고 싶지 않은데, 교통카드를 편하게 사용하기 위해 케이스를 씌우면서, 흐음, 이렇게 또 결국은 쓰레기를 만들어버렸네, 싶었더랬다. 


아이패드를 구입한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액정필름도 케이스도 구입하지 않았더랬다. 나에게 그것은 부가사항이었고, 굳이 구입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제 아이패드를 가지고 회사에 왔고, 퇴근후에 잠깐 아이패드로 청문회를 보려고 하는데, 그냥 눕혀놓고 보자니 너무 불편한거다. 그렇다고 손으로 들고 보자니 그도 불편하고. 사람들이 이래서 케이스를 사는구나, 싶었다. 별수없이 나도 케이스를 구매했다. 나는 그냥 이 '물건'만 있어도 되는데, 물건 하나를 구입해놓으면 그에 따른 제반 사항을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고, 그런것들이 필요한거라고 나름 합리화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지구상에 쓰레기를 또 하나 늘린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쓰레기를 보는 건 너무 답답해서,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에 분리수거가 있는 날이면, 식구들중에 누구보다 먼저 나는 그걸 얼른 버리러 간다. 내 집에 있으나 아파트 단지내에 있으나 쓰레기는 여전히 쓰레기지만, 그래도 내 집에서 저것들을 '버려야'한다고 생각하면 약간 스트레스를 받는다. 수요일과 일요일, 분리수거 하고 올게, 하고 재활용 쓰레기를 가지고 집에서 나갈라치면, 남동생은 내게 '진짜 잘 버린다'고 하는데, 남동생에게 나는 약간 강박증상이 있는 걸로 보이는 것 같다. 일요일 밤에 종이 박스가 또 생겼고, 나는 얼른 옷을 챙겨입고, 이거 잽싸게 버리고 올게, 라고 했는데, '누나 진짜 쓰레기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는구나' 라고 하더라. 어제는 수요일. 분리수거가 있는 날이었는데, 퇴근하고 집에 가니 아빠가 다 버리고 오셨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집에 들어가서 택배 박스를 하나 뜯어서 작은 박스 하나가 또 생겼고, 아빠 이거 버리고 올게, 하고 후다닥 박스를 버리고 왔다. 그냥, 이게 너무 답답하고, 아이패드 케이스 산 게 영 찜찜하다. 아이패드를 세워서 볼 수 있다는 편리함으로 선택했는데, 이런 제반사항들을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별 수 없이 나는 아주 많은 물건들을 구입해버리고야 만다.




가급적 쓰레기로 버리지 않기 위해서 입지 않는 옷과 가방은 동네 수거함에 넣거나 아름다운 가게로 보낸다. 책은 판다. 알라딘 굿즈는 내가 사용할 게 아니라면 선택하지 않고, 필요한 게 아니라면 크게 유혹받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굿즈 같은 거는 내게 필요가 1도 없고 유혹적이지도 않다. 가방 안에는 언제나 장바구니가 들어있어서 퇴근 길에 장을 볼라치면 장바구니를 꺼내면 된다. 가끔 장바구니 없이 마트에 가 와인을 한 두병씩 살 일이 생기는데, 그러면 나는 그냥 손에 와인을 병째 들고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누가 보면 웃기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냥 들고 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텀블러를 들고 가 커피를 사마시고, 장바구니를 챙겨가서 장을 본다고 해도, 쓰레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이패드 케이스도 아이폰 케이스도, 없어도 살 수있지만 있으면 더 편하다는 용도로 사버리고 말았는데, 쓰레기가 생기는 부분은 사실 이보다 다른 데 더 있지 않나. 어젯밤엔 마스크팩을 하고 버렸고, 오늘 아침만해도 크림치즈의 케이스를 버렸고, 고다치즈의 봉투를 버렸고, 샌드위치의 포장을 버렸고... 와인병과 소주병과 맥주캔은 셀 수 없이 많이도 버렸다. 게다가 이건 앞으로도 버리겠지. 문득, 내가 먹지 않는다면 쓰레기를 만들일도 확 줄어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러나 나는 먹고 마시는 걸 진짜 너무 좋아해서 ㅠㅠ



삶이 참 아이러니하게 연속성을 가진다는 생각이 든다. 쓰레기를 만드는 삶이 싫다고 나름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사용하면서, 그렇지만 먹고 마시는 걸 남들보다 많이 하니 결국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고...


인생은.. 뭘까?

삶은.. 뭘까?



그리고 그렇게나 쓰레기가 싫다고 하면서 오늘도 책을 주문했어... 나는..... 뭘까? 모순덩어리 인걸까? 인간은.. 뭘까? 그리고 파우치를 사은품으로 선택했는데, 이걸 조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려면, 책 한 번 더 구매해서 파우치 똑같은 거 하나를 또 받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가면 며칠간만 좋을 것이란걸 알면서, 결국 쓰레기를 만드는 삶에 또 한걸음 다가서버리는데..아아, 삶이란, 머릿속이란 이렇게나 뒤죽박죽인 것이다. 명징하고 명쾌하게 살 순 없는걸까..... 내 삶에 규칙이란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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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6-12-15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 쓰레기 버리는 건 남편 담당이지만 남편이 늦는 경우가 많아 제가 쓰레기를 자주 버리는데 진짜 들고 나갈 때마다 우리 둘이 먹고 사는데 무슨 쓰레기가 이렇게도 많이 나오나 싶어요. 저는 쓰레기 오래 두는 거 넘 싫어해서 쓰레기봉지 다 안차도 남편 없는 날 막 갖다버림 ㅋㅋㅋㅋㅋㅋ

암튼 최근에는 이런 데 관심 갖는 사람도 많아지고 국내에도 포장재 없이 파는 식료품 숍 같은 게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성수동에 있는 그로서란트 더 피커 같은 곳... 고객이 용기를 들고 가면 거기에 담아주고 무게를 달아서 파는 시스템인 거 같더라고요. 물론 저는 멀고 귀찮아서 이렇게 살고 있지만... 누구나 가까운 곳에 저런 가게들이 많이 생기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다락방 2016-12-15 10:10   좋아요 0 | URL
저도 성수동까지 갈 적극성은 없고요, 가까운 곳에 있다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실상 저는 쓰레기를 만드는 삶이 영 마음에 안든다, 고 하면서도 계속 끊임없이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에 있어서 스스로 좀 찜찜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떤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는 것도 아니면서 싫다고 하니, 너무 모순된 느낌이랄까..

저는 필요 없는 걸 집에 두는 걸 너무 싫어해요. 공간 차지하는 것도 싫고, 필요 없는데 두고 보는 것도 괴로움이.. 그래서 정말 잘 버려요. 그런데 잘 버리는 게 좋은것 같진 않아서 아예 사지를 않으려고 하죠. 대체적으로 쓸모 없는 것,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것에는 그래서 잘 물욕이 안생기는 것 같아요. 문제는 조금이라도 필요한 것에 대해서인데, 하하하하하, 그러면 자꾸 고가의 상품이 눈에 들어와서...이를테면 페라가모 가방 같은 것... 하아- 그래서 쓸모 없는 거 안사는데도 돈은 없는.... 이 삶의 아이러니!!


물론 페라가모 가방은 사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 ˝)

프레이야 2016-12-1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 일. 요일이 우리 아파트랑 같아요. 절대적으로 공감되는 글입니다. 요즘은 수많은 택배 물건이 쓰레기 생산에 한몫하는 것 같아요. 상자며 뽁뽁이며 비닐이며.

다락방 2016-12-15 10:26   좋아요 0 | URL
맞아요, 프레이야님. 박스도 그렇고 뽁뽁이도 정말 많죠. 대체적으로 저는 그거 뒀다가 제가 택배 보낼일 있을 때 쓰려고 하는데, 그래봤자 어딘가에서 또 쓰레기가 되겠죠.
배달시스템이 더 편해지면서 쓰레기가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배달음식 쓰레기 진짜 많잖아요. 일회용 그릇과 박스들... 그렇다고 제가 그런것들을 안시켜 먹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는 점점 더 많아질 것 같아요..

비연 2016-12-15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송도에서 잠시 혼자 살아보니, 쓰레기 만드는 게 넘 싫더라구요. 버리기도 귀찮고...
음식물 쓰레기는 더더욱. 덕분에 음식은 모두 제 뱃속으로 버리는 일들이 발생...
쓰레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라고 하나
저도 며칠 전 책 구매. 올해는 중고로 내다놓은 책도 별로 없고....
올해가 가기 전에 아무래도 책은 좀 처분해야 할텐데.

다락방 2016-12-15 11:28   좋아요 0 | URL
저는 책을 읽는 족족 개인판매로 올려두고 있는데 잘 안팔려요... 그러면 모아서 또 알라딘에 팔기도 하고 그러는데, 알라딘에서 제값 안쳐주고 후려치는 책들이 많아서 다시 개인판매로 돌리고... 얼른얼른 팔렸으면 좋겠어요 ㅠㅠ

혼자 살면서 밥 해먹는것도 치우는 것도 다 비연님 몫일텐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저 엊그제 퇴근하고 집에 가서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빨래 개고.. 이러다보니 잘 시간 되고, 너무 피곤하더라고요. 그래서 와인 한 잔 했거든요. 아, 살림이란 왜 이다지도 피곤한가... 우울했어요. ㅠㅠ

비연 2016-12-15 13:05   좋아요 2 | URL
저도 요즘 매일... 살림에 시달리느라... 피곤하고. 그래서 맥주 한캔 먹고 자고. 책도 못 읽고.
막 우울해요.... 잠잘 시간은 왜 그리 빨리 오는 지요...ㅜㅜㅜㅜㅜㅜㅜ

다락방 2016-12-15 14:45   좋아요 2 | URL
저도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부터는 책을 잘 못읽겠더라고요. 자, 이제 자기 전에 조금 책을 읽을까, 하고 침대에 앉아 책을 펼치면 잠이 쏟아져요 ㅠㅠ 그리고 아침이 너무 빨리와요 ㅠㅠ 고단한 삶 ㅠㅠㅠ

푸른희망 2016-12-15 1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글 정말 좋아요
주말 재활용 스레기를 버리는 날이나 새로 꺼낸 종량제봉투가 금방 가득 차는 걸 보면 정말 죄책감이 들어요
가끔 내가 저 종량제봉투속에 들어가야 스레기가 생산되지 않겠구나 싶은 극단적인 생각도합니다 ㅜㅜ

다락방 2016-12-15 14:45   좋아요 1 | URL
푸른희망님.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 고민하지 않는 것보다는 좀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도 ‘고작 이정도의 고민이 세상을 바꾸는데 영향을 미치기나 할 것인가..‘ 하고 씁쓸한 생각을 하기도 해요. 제가 먹고 마시는 것만 안해도 쓰레기가 확 줄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먹고 마시는 게 제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보니 계속 이렇게 고민하지만 막상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삶을 살고 있네요.

사각양배추 2016-12-15 1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행히 다락방 님처럼 아름다운 것과 관련된 물욕은 그리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을 너무 사서...욕심껏 사다보니 읽지도 못하고 쌓아두고 있네요.
근데 또 사고 싶은 책은 계속 생기고.....ㅠㅠ
예전엔 책이니까 괜찮아. 책은 많이 사도 돼. 이런 생각이었지만... 이젠 그것도 틀린 말 같아요.
뭐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있어야 하는데.... 책장을 보면 행복하면서 한숨이 동시에 나오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쓰레기도 만들지 않고, 단출하게 주변을 꾸려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맨날 생각합니다.

다락방 2016-12-15 16:30   좋아요 1 | URL
저도 읽지도 못한 채로 쌓아둔 책이 너무나 많아요, 사각양배추님 ㅠㅠ 매번 ‘이것들 다 읽고나서 사자‘ 라고 다짐해보지만 또다시 여러권을 한꺼번에 주문하곤 하죠. 오늘도 여섯권이나 또 주문했어요. 한 권 읽고 다섯 권 사고..이런 패턴인것 같아요 ㅠㅠ 이러면서 무슨 쓰레기 만드는 거 싫어한다고 난리난리 ㅠㅠㅠ

저 역시 읽을 책이 너무나 많다는 것에 행복해하다가, 읽지도 못하면서 왜 계속 사냐 한심하게 생각하다가 ㅋㅋㅋㅋㅋㅋㅋ 진짜 2017년에는 책 안사야겠어요. 2017년에는 그동안 사둔 책 읽기...로 결심해봐야겠습니다. 불끈!!

유월 2016-12-15 2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불가연 쓰레기를 모았다. 정말이지 인간은 쓰레기만 만들어낸다. 
우주에는 회수할 방도가 없는 인공위성이 5천개도 넘게 쓰레기가 되어 떠돌아다닌다는데 어쩔셈인가. 
유리공예가인 마리는 ˝인간은 생산적이어선 안돼. 쓰레기나 만들뿐이니까˝라고 말했다. 본인은 
실로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을 만들면서도 이런 말을 한다. ˝난 불가연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거야.˝
자각있는 예술가는 훌륭하다. <사는게 뭐라고>에 나오는건데, 제 심정이랑 같아서 스크랩해두었어요. 다들 사는게 비슷하네요:) 전 요새 백수인지라 쓰레기 버릴때마다 더 심각한 자괴감이 듭니다. (ㅠㅠ)

다락방 2016-12-16 08:15   좋아요 2 | URL
저 이 책 읽었어요. 사는 게 뭐라고. 배용준 나오는 부분만 생각나네요. ㅎㅎ

음, 우리가 지금처럼 쓰레기 버릴때 마다 고민하고 생각한다면, 그래도 조금쯤은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 지구의 파괴를 조금쯤 늦출 수 있지 않을까요? 음.. 부질없을까요?

오늘 아침에는 아이폰, 아이패드, 크레마를 충전하면서, 왜 오늘날의 삶엔 이토록이나 충전으로 가득차있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충전으로 삶이 지속되는 것 같달까요. 인생은 뭘까요? 삶은 뭘까요?
 















대학생이었던 나는 같은 과 친구와 함께 비디오방을 찾았다. 그때 선택한 영화가 《잉글리쉬 페이션트》였는데, 어떤 영화를 볼까 친구랑 그 수많은 비디오 테입 앞에서 고민하며, 손에는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다고, 친구랑 나오면서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굉장히 유명했고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영화였던것 같은데, 내게는 내용에 대한 기억의 거의 없고 그 때 감동을 받았던 기억도 없다. 줄리엣 비노쉬가 부상당한 남자를 간호했고, 외국인과 섹스했으며, 랄프 파인즈가 불륜에 빠져있었다는 것이 드문드문 기억이 났는데, 그러나 쇄골에 대한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쇄골에 대한 영화였다.


영화속에서 랄프 파인즈는 사랑하는 사람의 쇄골에 흠뻑 빠져있었고, 그래서 친구에게 거기를 뭐라고 부르지? 라고 궁금해 묻는 장면이 나왔었고, 바깥에서 사람들이 파티를 하는데 랄프 파인즈는, 사랑하는 여자의 쇄골 사이, 움푹 파인 곳에 키스를 했던 장면이 기억났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선명히 기억하는 부분이었다. 랄프 파인즈는 여자의 쇄골에 빠졌었다는 것. 나는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책에서는 그 부분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책은 그러나 내 기억과 조금 달랐다. 나는 그가 쇄골에 흠뻑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보니 그는 쇄골 사이의 움푹 파인 곳에 빠진 거였다. 그리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곳의 명칭이 등장한다.



"매독스, 여자 목 아래 오목하게 팬 부분 이름이 뭔가? 앞부분. 여기. 이게 뭐지? 공식적인 이름이 있나? 엄지손가락으로 누른 정도의 크기의 오목한 부분."

매독스는 정오의 땡볕 아래서 나를 잠깐 바라보지.

"정신 차려." (p.213)



나는 그가 웃으면서 몸을 돌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결후 아래 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여기는 흉골상절흔이라고 하네."

그는 그녀의 목에 오목 팬 부분에 공식적인 이름울 주면서 떠나간 것이죠. (p.315)



흉.골.상.절.흔.



저런 용어가 있었구나. 영화속에서도 저런 명칭으로 나왔었는지 모르겠지만, 들었다 해도 까먹었을 이름이다. 지금도 책으로 읽었고 이렇게 페이퍼를 쓰고 있지만, 아마도 돌아서면 저 이름을 잊을 것 같다. 흉골상절흔 이라니, 맙소사. 전완근 까지는 외우겠는데, 흉골상절흔 이라니...



흉골상절흔...




'해나'는 간호사이다. 전쟁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을 간호해줬던 사람이고, 지금은 한 영국인 환자를 돌보고 있다. 



"난 이제 죽음을 알아요, 데이비드 아저씨. 모든 냄새를 알고 그들을 고뇌에서 딴 데로 정신을 쏟도록 할 수 있는 법을 알아요. 주 혈관에 모르핀을 재빨리 찔러넣어야 할 때를 알아요. 식염수 용액을 주사하기도 하죠. 죽기 전에 창자를 비우기 위해서요. 빌어먹을 장군들이 내 일을 했어야만 하는데. 빌어먹을 장군들 모두가. 강을 건너기 전에 선수 조건으로 했어야만 했어요. 도대체 우리가 뭐길래 이런 책임을 져야만 하는 거였죠? 대체 우리가 뭐라고 나이든 사제처럼 현명해져야만 하고, 아무도 원치 않는 무언가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얼마간은 편안하게 해주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거죠? 나는 그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었던 종부 성사의 말을 하나도 믿을 수 없었어요. 천박한 말들.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ㅇ한 인간이 죽어가는데 감히 그렇게 말할 수가!" (p.112)



이 부분을 읽는데,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 생각이 났다. 전쟁을 하자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 '리더'라고 했던 말. 그러니까, 그 전쟁속으로 들어가 총을 쏘고 또 부상을 당하고 치료를 하고 상처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사람은 국민이지 리더가 아니다. 그 말은 즉, 해나의 '이런 일을 장군들이 했어야 하는데'와 통한다.




"살육 병기의 개발은 적을 얼마나 멀리, 보다 간단하게 대량의 희생자를 내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것보다는 날붙이를, 그리고 총기류를, 포탄을, 폭격기를, 결국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이런 식으로. 거기다 미국의 경우 이건 나라를 지키는 기간산업 중에 하나가 되었어. 그래서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루벤스는 이런 연구를 접하고 나서 현재 일어나는 전쟁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전쟁 당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의사(意思)를 가진 인간, 즉 전쟁 개시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만큼 적으로부터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백악관에서 만찬회에 출석하고 있는 대통령은 적이 흩뿌린 피를 뒤집어쓰지도, 육체를 파괴당한 전우가 내뱉는 단말마의 외침을 듣지도 않는다. 살인에 뒤따르는 정신적 부담을 거의 받지 않는 환경에 있다. 군대 조직이 이러한 형태로 진화하고 과학 기술 덕에 병기가 개선되고 있는 이상, 근접전에서 살육이 격렬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전쟁의 의사결정자는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대규모 공중 폭격을 명령할 수 있는 셈이다. (p.255)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이렇게나 많은 책이 말하는데도 여전히 전쟁중이라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능력없는, 적절하지 못한 리더가 얼마나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지도 이렇게나 많은 책이 말하는데도 여기저기 적절하지 못한 리더가 '투표로' 뽑히는 것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은 온통 이상한 것 투성이다...



책을 읽을 때면 으레 그렇듯이 이 책을 읽다가도 여러가지 생각에 빠지게 됐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알고 뛰는 것은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어느 한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여기에 오기 위해 그렇게 뛰었던 거구나, 하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뛰는 방향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뛰지는 않고 있는데, 걷는 것이 내 성향에 잘 맞기 때문이다. 나는 좀 쉬기도 하면서 걷고 있지만, 내가 가는 방향을,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온 셈이란 생각이 든다. 음, 너무 뜬구름 잡는 얘기 같구먼.



점심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아저씬 여자를 좋아했죠? 여자들을 좋아했잖아요."
"난 지금도 좋아해. 어째서 과거형으로 말하는 거냐?"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전쟁이며 이런저런 일들이 있으니까." (p.77)

그는 결코 가정 생활에 익숙해진 적이 없는 중년의 남자다. 일생 동안 그는 영구적인 친밀감은 피했다. 이 전쟁 이전까지는 남편이라기보다는 연인에 맞는 남자였다. 그는 연인들이 혼돈을 떠나가듯이, 도둑들이 가난해진 집을 떠나듯이 쓱쓱 빠져나가는 남자였다. (p.157)

그는 이제 늙어버렸다. 갑자기. 그녀 없이 살아가는 데 지쳤다. (p.232)

그에게는 아무도 없다. 사막 때문에 진이 빠진 게 아니라 고독 때문에 진이 빠졌다. (p.232)

나는 이런 일들을 믿어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질 때면 우리의 영혼에는 역사가인 부분, 약간 현학적인 부분이 있어서 서로를 모르고 지나쳤던 만남이 있었음을 상상하거나 기억하지요. 클리프턴이 그보다 일 년 전 당신에게 문을 열어주었으나 필생의 운명을 무시했던 것처럼. 하지만 몸의 모든 부분은 이미 다른 사람을 위해 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분자는 일어나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한 방향으로 뛰고 있지요.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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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12-14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잉글리시 페이션트.. 전 정말 재미있게 봤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독일에 지도를 넘겨주던 그... 친구의 아내인데 반해버려서.. 자꾸 애수(1999)랑도 겹쳐지고 그랬더랬죠.

그나저나 쇄골 사이 움푹 파인 곳 이름도 참 어렵습니다.

다락방 2016-12-14 17:19   좋아요 1 | URL
제가 영화 내용을 거의 기억을 못하는데요, 이 책을 다 읽고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책과 영화가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만간 영화도 다시 보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나저나 꼬마요정님은 이걸 정말 재미있게 보셨군요! 저도 다시 보면 또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네요.

흉골상절흔..
안외워질것 같아요. ㅎㅎ
 





여자는 배우가 되고 싶어 오디션을 보는데, 오디션을 볼 때마다 번번이 떨어진다. 그런 여자가 확인하게 되는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1 이라는 것. 나보다 더 예쁜 여자, 나보다 더 연기 잘하는 여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찬란히 빛나는, 어디에서나 반짝거리는 사람이고 싶었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그냥 그런 사람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자도 마찬가지. 재즈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죽어가는 재즈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한 그이지만, 사실 그는 규칙적인 돈벌이도 없고 또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야 하는 것이 죽을만큼 싫은, 남들이 보기엔 그냥 가난하고 무능력한 남자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그냥 그런 평범한 사람. 세상이 어두우면 그도 어둡고 세상이 밝으면 그도 밝아서, 그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다.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사랑이란 건 그 어두운 세상에서 역시 어둡게 가려진 나에게 찬란한 조명을 비춰주니, 내가 있는 곳만 밝아지고 또 그가 있는 곳만 밝아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두룩한 이 세상에서 저기 저 사람이 찬란하고 특별하다고 내게 말해준다. 그래서 이렇게 밝은 내가 저렇게 밝은 그에게로 걸어가고, 저렇게 밝은 그가 이렇게 밝은 내게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저 평범한 사람 1,2 지만, 서로에게만큼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너무 신나고 서로의 꿈에 대해 듣는 것도 너무 신난다. 여자는 '나는 재즈가 싫어!'라고 말했었지만, 이제 남자에게 '당신 때문에 재즈가 좋아졌어'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너는 글도 쓸 수 있으니까 니가 연기할 극본을 직접 써봐!'라고 격려해주기도 한다. 서로의 생각과 꿈과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고 있는 그들은, 그래서 적절하게 서로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고 응원을 해줄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지는데, 그 익숙해짐 때문에 각자가 감추고 싶었던 것을 들키기도 한다.


너 그거 싫어하잖아, 너가 원하는 거 그거 아니잖아.


라고 말을 했을 때, 나는 적당히 타협하고 그래서 이대로 멈추려고 했는데, 그냥 이렇게 멈추고 싶었는데, 내가 감추고자 했던 나를 상대가 알아채버리는 거다. 이 익숙함은 그래서 좋고 또 그래서 싫다. 이 익숙함은 그래서 편하고 그래서 불편하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사랑했고 그래서 서로가 아닌 길을 가는 것 같을 때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그러지 말라고 말을 한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나랑은 좀 다르구나 생각했다. 물론 내가 저들과 같을 수는 없다. 나는 저들이 아니고 또 저런 관계에 놓여있지도 않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끼어들어서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 쪽인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내가 '아닌 길로 가는 걸' 보지는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성숙한 사람이고 내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도 성숙한 사람이니, 자신에게 맞는 길을 자신이 잘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그저 조용히 바라봐주면 되는 게 아닐까.


다른 얘긴데, 토요일 외출하면서 들었던 팟캐스트 에서는 우울증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책, 《마흔통》에 대해 얘기하면서 진행자들은 '자기 객관화'와 그래서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들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 방송을 들으면서 나는 '나 역시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게 우울감이 찾아오면, 어라, 이거 뭐지, 하고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를 고민하면서, 스스로 그걸 털어내기 위해 노력을 한다. 이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가 내 감정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것까지 생각해보게 됐는데, 나는 내 감정을 '안다'는 결론이 났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잘 알고 있고, 잘 들여다보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내 능력이고 또, 상대로 하여금 나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도 내 능력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내가 내 감정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또 인정하는 것도 내가 가진 큰 능력이다. 나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고, 그건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별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내가 보기엔 명확해 보이는 감정을 자신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것은 감정의 문제인지라, 내가 거기다 대고 '니가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런 거야' 라고 얘기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자신의 감정은 자신이 알아채고 자신이 들여다볼 몫이다. 혹여,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 그때 그 감정이 이런 것이었고, 그래서 내가 그때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는 거였구나' 라는 걸 깨달으며 후회한다 해도, 그 역시 철저하게 자신의 몫이다. 나는 이걸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초조해하지 않으면서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이 된 것 같다.








다시 라라랜드로 돌아가서,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그게 불편해지기도 해 서로 소리지르며 다투기도 한다. 인상적인 장면은, 그렇게 다퉜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주 금세,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친근한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내일 아침 8시까지 내가 올테니까 나오기 싫으면 그건 니가 알아서 해, 라고 다툼의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도 여자가 나타나지 않자, 남자는 그냥 차를 몰고 가버리려고 한다. 그때 여자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막 출발하려는 차에 타면서 "커피 사러 갔다왔어" 라고 하는데, 남자가 너무나 심드렁하게 또 일상적으로 '어' 라고 하는 거다. 이 장면은 진짜 짜릿할만큼 좋았다. '그' 남자와 '그'여자였기 때문에 '그' 대화가 가능했으니까. 익숙해진다는 게 좀 더 좋다는 쪽으로, 이래서 기울고야 만다. 불편하기도 하다는 걸 계속 인식하면서도 좋은 점이 더 많아, 하게 된달까.



익숙해지고 다투고 그리고 여자가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Where are we?



남자는,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한다. 아, 어찌나 가슴이 서늘해지던지. 그러나 그 서늘한 대사는 늘 내가 했던 대사이다. 연인에게 이별을 말했던 몇 년전에도 나는 그에게 시간이 우리를 있어야 할 곳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라고 말했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흘러가는 대로 두면, 그것은 가야할 곳으로 있어야 할 곳으로 흘러갈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든지간에, 흘러갈 것이다. 어떤 관계는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면 끊어지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떤 관계는 백날을 울어도 끊어질 것이다. 나와 당신의 관계라는 것은, 그저 내 바람 하나로만 이어지거나 혹은 끊어지는 게 아니니까. 



정말 뻔한 영화인데 장면장면이 다 좋다. 정말 뻔한 영화인데도 끝나고나면 뻔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고 좋아하게 될 영화랄까. 중간중간 너무 아파서 가슴이 쿡쿡 쑤시고 눈물이 핑 고이기도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더이상 어두운 곳에서 그만 혼자 환하게 빛나지는 않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여러 사람들 속에 그가 묻혀있어도 또 나 역시 그에게 여러 사람들 중에 묻혀 있는 사람이어도, 그 모두가 있는 공간에서 마치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세상이 정지하기도 한다. 특별함은 그저 평범함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이랬던' 특별함이 '또다른' 특별함으로 남아 있다. 



이 영화를 너무 좋다며 두 번 본 친구는 영화를 보면서 내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간 나의 글을 읽어왔던 것들이 영화와 맞닿아 있는 것 같아서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나는 그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고 또 전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나의 글들과 잘 맞아떨여저서 자꾸 연상이 됐다고 했다. 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온걸까?

이 좋은 영화를 보면서 또 좋아하면서 내 생각을 하는 친구라니!!!

















토요일에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친구1에게, 너 그때 아팠던거냐 목소리가 피곤하게 느껴지더라, 라고 했는데 이런 내게 친구는 '예민하다'고 했다. 맞다 그 때 두 시간동안 계속 말해야 해서 피곤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민하게 그걸 캐치했다는 거다. 나는 그런 친구에게 '나는 너를 알잖아' 라고 했다. 관심이지, 라고. 관심이 있으니까 알아챌 수 있는 거다. 다른 사람들에겐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변화가 눈에 보이는 법이니까. 관심이 있으면 목소리로도 상대의 기분이나 마음 상태를 알아챌 수가 있고, 표정으로도 알아챌 수가 있다. 남동생은 내 표정만 보고도 내 기분을 알아채는데, 정말 귀신같이 잘도 꼬집어낸다. 그러면 내가 이렇다저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응, 하면서 바로 위로 받는 기분이 된다. 이것은 익숙함이 가져오는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익숙한 사람을 몇 명쯤은 꼭 만들어두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관계에 힘써야 하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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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이 같은 모습이라던가
내가 존경하고 믿는 부분 모두 다
똑같이 예뻐해 난 너를 공부해
완벽한 사람이 아니어서
더 많이 좋아해

가끔 짓는 슬픈 눈빛이라던가
애써 숨기려는 지친 모습까지도
난 모두 느껴져 널 많이 걱정해
나에겐 일부러 강한 척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지금 네가 짓는 표정
네가 나에게만 짓는 표정
오직 나만 볼 수 있는 표정
세상에서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내겐 꾸미거나 지어내지 말아
있는 그대로의 너로 와라
보여줘도 돼 나를 믿어봐도 돼

깊이 잠들면 잠꼬대하는 거랑
거짓말할 때 코를 찡긋하는 버릇도
다 너무 소중해 넌 나를 웃게 해
완벽한 사람 아니라도 괜찮아

지금 너를 보는 표정
내가 너에게만 짓는 표정
오직 너만 볼 수 있는 표정
세상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든

네겐 꾸미거나 지어내지 못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줘
보여주게 돼 전부 드러내게 돼

나는 절대 너를 판단하지 않아
세상의 잣대로 재지 않아
내가 아는 너의 모습 그대로 믿어

내겐 꾸미거나 지어내지 말아
있는 그대로의 너로 와라
보여줘도 돼 나를 믿어봐도 돼

 

펼친 부분 접기 ▲






칠 살 조카는 텔레비젼에 나오는 촛불 집회 사진을 보고 제엄마에게 왜저러는거냐고 물었다고 했다. 여동생은 거기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답을 최선을 다해 해줬다는데, 그 과정에서 저기 저 사람들 중에 이모도 있고 삼촌도 있어, 라고 했단다. 그러나 제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여동생의 관점이 다르고 '엄마랑 아빠는 다르다'라고 말을 했더니, 조카는 '엄마는 그런데 왜 아빠랑 결혼했어?'라고 묻더란다. 여동생은 '사랑해도 정치적 성향은 다를 수 있는거야'라고 했다는데, 그러자 조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맞아. 사람은 다 다르니까. 이모가 늘 그랬어."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는 진짜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도 텔레비젼을 보면서 조카가 보고 있는 텔레비젼에서 외모 비하를 하고 인종으로 비하를 하는 것 같을 때마다 나는 말했더랬다. '세상에는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고 저렇게 생긴 사람도 있어, 사람은 다 다르거든' 이라고 했고, 매스컴이 하는 말들을 그대로 가치관으로 삼을까봐 간혹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사람은 다 다르거든' 이라고 말을 했었는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고작 칠 살인 조카가 내 말을 듣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저 부지런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을 한 것 뿐인데, 아, 다 듣고 있었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실 칠 살인 조카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이 다 다르다는 말을 들었던 것과 듣지 않았던 것은 확실히 다르지 않을까. 여동생이 저렇게 말해주는데 진짜 울컥하는 기분이 되었다. 내가 잘하고 있구나, 내가 잘하고 있어. 그래서 여동생에게도 말했다. 


내가 잘하네, 나 잘한다.


하고. 흑흑 ㅠㅠ




오늘 아침에는 컨디션이 별로였다. 책을 읽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아, 그냥 멍하니 노래 들으면서 출근길 지하철 안에 앉아 있었다. 도중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내 기분을 잘 감추지 못해서 '너 상태 메롱이네' 라고 들켜버리고 말았다. 나름 안들키려고 하느라 했는데, 난 잘 못숨기네. 책도 읽기 싫고 나아지지 않은 기분으로 양재역에서 내렸는데, 힘없이 의욕없이 터벅터벅 걸으려는데, 뒤를 돌아보니 저기 내가 타야할 버스가 신호에 걸려있다. 어라? 저거 안타면 십분 기다려야 하는데? 하는 마음에, 다다다닥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뛰면서 일상의 비루함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나 컨디션이 엉망이고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데, 그런데도 출근하겠다고 다다다닥 뛰어야 하다니, 아, 삶은 진짜 지독하게 비루하구나... 하아- 고단하다. 고단한 삶....


문득, 장 그르니에의 《섬》, 그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한 번의 상처쯤이야 그래도 견딜 수 있고 운명이라 여기고 체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 같은 상태야 참을 길이 없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삶은 비극적인 것이다. 바싹 가까이에서 보면 삶은 터무니없을 만큼 치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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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12-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 좋아요.. 아침부터 왠지 울컥 하는 기분이 듭니다.

라라랜드 다들 재미있다고 그러더군요. 아직 보지 않았는데, 다락방님 글 보니 아니 볼 수 없겠습니다~ 저도 이 영화 보면서 다락방님을 내내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상대의 기분을 파악했을 때 주로 모른 체 합니다. 제가 들키고 싶지 않아 그런 것 같아요. 정말 도움을 줘야할 것 같을 때만 -그것도 제 판단이지만- 아는 체 하지요. 때론 슬픔과 아픔을 혼자 간직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상대는 또 그냥 알아줬으면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겨울이라 그럴까요..?

다락방 2016-12-12 16:32   좋아요 0 | URL
[섬]의 저 구절을 읽으며 밑줄 그었었는데, 오늘 아침 저 문장이 생각나더라고요. 삶은 정말 치사할 때가 많아요.

라라랜드 정말 좋았어요, 꼬마요정님. 친구는 새로운 연인이 보아도 오래된 연인이 보아도 좋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더라고요. 꼬마요정님도 얼른 보고 오세요. 꼬마요정님은 또 어떤 걸 느끼시고 생각하실지 궁금해요. 라라랜드 보면서 아 영화란 정말 좋구나,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정말 좋구나, 생각했어요.

때로는 자기가 알아치재 못한 감정을 남이 먼저 알아채주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다른이의 감정을 먼저 캐치했을 때, 상대에게 ‘너의 감정은 내가 볼 때 이렇다‘ 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라, 스스로 들여다보고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요.


라라랜드 보고 오시면 후기 들려주세요!

LAYLA 2016-12-1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랜드 보고 제 가슴은 멍이 들어서...
도대체 이 슬픈 걸 어떻게 두 번씩 보는거냐고 혼자 속으로 소리도 지르구요...?
연말 제 가슴은 해피엔딩 전용이라고 이번 기회에 못을 박아버렸습니다.
해피엔딩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전 마지막이 너무 슬펐어요 ㅠㅠ

다락방 2016-12-12 16:34   좋아요 1 | URL
아, 라일라님. ㅠㅠ
저 역시 마지막이 너무 슬펐어요. 그러지말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래, 저게 흘러가는 대로 된거겠지, 흐르고 흘러 저렇게 되었겠지‘ 체념하는 마음도 되었고요, 또 그 체념이 슬퍼 울고 싶어지기도 했어요. 저는 한 번 더 볼까 말까... 생각하고 있어요. 다시 보면 또 다른 게 보일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해서요.

몬스터 2016-12-1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nited Kingdom/La La Land/Release date / January 13, 2017

나오면 꼭 보께요 ㅎㅎㅎ

다락방 2016-12-14 08:19   좋아요 0 | URL
아아 개봉이 너무 늦군요, 몬스터님! 그래도 꼭 보세요. 보시고 감상 들려주세요!!

여울 2017-01-12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이 지나고서야 봤네요. ost 듣고 있어요. 내용을 까맣게 잊기를 잘했네요. 가장 남는 대목도ㆍㆍ‥감사
 

안 쓰시는 분, 저 좀 주세요.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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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8 0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12-08 07:5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니 그런데, 정말 오랜만이십니다!!

잘 볼게요.
:)

다락방 2016-12-08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e-book 나왔습니다!! 전자책으로 나왔다고요! 아하하하하.
















원고 검토 때문에 전자파일 받아서 먼저 훑어봤는데, 아아, 역시 몇년전 책이라 그런지, 그 당시엔 좋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읽어보니 좀 유치하고 오글거리더라고요 ㅠㅠ 다음번 책은 더 나아져있길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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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쓴 글을 다시 읽을 때 느끼는 심정은 마치 어린시절의 모습이 찍힌 사진 앨범을 보는 기분입니다. ^^;;

다락방 2016-12-06 14:19   좋아요 0 | URL
크- 그래서 사람은 자꾸 발전해야 하는가 봅니다. 부끄러워요 ㅠㅠ

단발머리 2016-12-06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ㅎㅎ
이 책의 e-book을 읽기 위해서라도 나는 크레마를 사야하지 않겠는가...!!!

다락방 2016-12-06 16:03   좋아요 0 | URL
아니, 단발머리님은 이미 종이책을 가지고 계시니까 이 책을 또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오글거리더라고요. 오글오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6-12-06 16:08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런가요?
두 번째 읽을 때도 전 좋았는데^^

그나저나... 제가 이유경 작가의 3번째 마니아라는 사실을 수줍게 알려드립니다. ㅎㅎ
1번째 마니아는 이미 알고 있으니 2번째 마니아를 찾는 일만 남았습니다.
누구실까요, 이유경님의 2번째 마니아?!?
ㅋㅎㅎㅎㅎㅎ

다락방 2016-12-06 16:54   좋아요 0 | URL
제가 단발님 댓글 보고 지금 가서 검색해봤더니, 이유경 작가의 첫번째 마니아는 다락방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두번째 마니아는 마노아님 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공개 2016-12-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번 책도 기대합니다 ㅎㅎ

다락방 2016-12-06 16:53   좋아요 0 | URL
으앗. 고맙습니다! >.<

2016-12-08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12-09 09:00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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