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허균 지음 / 돌베개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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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은 독특하다. 상징은 형이상학적이다. 상징은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의 어떤 것을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상징은 재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상징은 그래서 삶의 의미를 구하는 일과 맞물린다. 삶의 의미란 우리들 사이에 있지 않다. 삶의 의미에 다가가려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삶의 한계를 넘어서 더 높은 곳, 저 바깥으로 가서 머물러야 한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가 말해주는 바를 응용해서 말한다면 우리 삶의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 근원적 토대는 우리 삶 안에서는 말해질 수도 얻을 수도 없다. 그것은 저 밖에 있으며, 우리는 죽어도 그 바깥에 갈 수 없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에 구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얼핏 볼 뿐이다.

비트겐쉬타인은 자신의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존경받을 만한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문을 열 수 있는 사람만이 알아챌 자물쇠를 문에 거는 것이다.' '상징'이란 바로 그런 자물쇠이다. 이 세계와 이 세계의 의미를 규정해주는 세계의 연결고리인 것이다. 상징은 자물쇠처럼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기호는 자기 주변의 것들과 무한한 꾸러미를 연속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열쇠들의 연쇄이다. 이 열쇠들을 자물쇠에 무한히 끼워넣어 보지만 언제나 어긋난다. 그저 좀 더 그럴듯 한 자물쇠-열쇠의 짝패가 가끔씩 나타날 뿐이다. 우리는 철컥거리는 듯한 시늉에 금새 환희작약했다가 다시 금새 풀이 죽을 것이다.

이 책은 불교의 상징을 그럴듯한 열쇠-자물쇠의 짝패로, 그러니까 오랜 시간 쌓여온 기호 관습(도상해석법)에 의존해서 설명해 나간다. 그러나 그 와중에 우리의 뇌리속에서 불교의 상징들은 어느 새 그 법력을 고갈당한다. 우리는 이해가능할 법한 선물셋트를 얻지만 미궁 그 자체는 놓쳐 버린다. 이게 문화적 해독능력(Cultural Literacy) 정책이 지니는 한계다. 문화적 해독력은 잡동사니같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종합선물셋트를 예쁘게 정리하는데는 아주 효과적이지만 '상징'이 넌지시 건네는 미궁, 신성, 침묵의 각성은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린다. 좋다. 우선 어설프게라도 이해하자. 그러나 그 다음에는 버려라. 강을 건넜으면서도 뗏목을 이고서 가는 짓은 어리석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버리기 위해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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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기호 표지
조르주 나타프 지음, 김정란 옮김 / 열화당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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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상징...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현대는 '기호의 시대'인가 아니면 '상징의 시대'인가? 기호는 뭐고 상징은 뭔가? 기호는 만능열쇠 흉내를 내면서 아무 것도 못 여는 자물쇠이고, 상징은 아무도 열지 못할 것 같은 자물쇠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열려고 시도하게 만드는 자물쇠다. 기호는 아무 것도 열지 못하면서 으시대는 현세중심적 낙관주의가 담겨있고, 상징은 열지 못한다는 자괴감으로 똘똘 뭉친 비관주의가 담겨있다.

이런 나의 사고방식을 따르자면 현대의 기호의 시대다. 모든 것이 간략한 이야기로 환원되고 누구든지 쉽사리 개조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별건가? 무한한 절충과 개조, 인용과 장식이다. 모든 것은 수평성으로 환원되고 우리는 그 수평적 얼음을 지치며 유희한다. 신나는 겨울이다. 그러나 겨울은 끝난다. 얼음이 녹으면 우리는 가라앉을 것이다. 기호가 수평적이라면 상징은 수직적이다.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지하실과 다락방이 없는 집(그러니까 오늘날 흔한 아파트)은 별 의미가 없는 집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같은 맥락에서 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 음침한 지하실이나 번거로운 다락방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삶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책에는 글자보다는 그림이 더 많다. 제목 그대로 상징, 기호, 표지를 싣고 있다. 주로 기독교 문화권의 것들이다. 기독교 상징들, 카발라 상징들, 연금술과 점성술의 상징들이다. 내게 이 모든 상징들은 인간들이 자신의 삶에 절대적인 의미를 찾고자 온 정신을 집중해 발버둥하는 행위로 보인다. 우리가 이 격렬한 발버둥을 염두에 두고 각각의 상징들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면 우리는 어떤 수직성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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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과 악덕의 알레고리
아돌프 카첸엘렌보겐 지음, 박은영 옮김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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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란 다들 알다시피 이념적 내용을 사물이나 인물에 비유, 상징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서구미술에 있어서 이런 알레고리 방식은 작품읽기에 있어서 아주 기초적인 소양가운데 하나이다. 현대문화와 비교한다면, 알레고리는 집단적 성향이 매우 강한데, 이는 현대의 대중문화의 '장르'개념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알레고리가 추상적으로 질서화된 사고를 표현하는 방식이듯이 장르는 대중들이 자신들의 실제 삶을 질서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사성으로 인해서 대중문화이해에 있어서 알레고리적 측면이 중요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아돌프 카첸엘렌보겐의 이 저서는 중세 기독교 미술에서 미덕이 알레고리로서 등장하고 다시 미덕과 악덕의 대립관계로 재정립되다가, 역동적이며 호전적인 대립관계가 다시 정적이고 조화로운 추상적 이분법으로 대치되는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최초로 미덕이 알레고리로 등장하게 된 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로 미덕을 처녀의 모습을 그린다. 신앙이 처녀라는 평화로운 이미지로 알레고리화된 것이다. 그

러다가 중세기로 들어서면서 기독교는 이방종교나 토속종교들과 맞서는 상태에 이르면서 미덕의 알레고리는 악덕과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로 바뀐다. 이는 고딕시대까지 이어진다. 이 격렬한 긴장관계는 다시 기독교가 카톨릭적 보편주의를 정립하면서 안정적인 이분법 구도로 재정립된다. 사르트르 성당은 이 두 가지 형태의 미덕과 악덕의 관계가 종합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이고 격렬한 투쟁의 관계와 추상적이고 이론적으로 정립된 만다라 형태의 관계가 공존한다. 그래서 사르트르 성당의 '승리한 미덕'들에만 홀리면 우리는 후자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중세의 알레고리는 신앙을 기호같은 아이콘으로 응축한 형태의 모습이다. 다시 이런 중세의 모습을 되돌아 보면 우리 대중문화의 모습과 이어진다. 에코는 현대를 되살아난 중세로 보기도 했다. 근대가 이런 맹목적인 듯 보이는 기호의 체계를 회의하고 붕괴시키고 오직 어떤 아이콘으로도 기호로도 환원되지 않는 개인을 추구했다면 현대의 대중문화는 그런 경향을 'It's not cool'하며 거부한다. 도스토엡스끼적 인간은 밥맛이 된 것이다. 대신 중세적인 명료함, 중세적인 도상성, 중세적인 장식성이 대중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중세는 다시금 현대를 보는 또다른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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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인 것에서 신성한 것으로 - 솔의신서 3
피에르 고디베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솔출판사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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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이란 결국 우리의 일상에서 신성한 것 혹은 환상적인 것을 소거하고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대치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결과는 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현대가 신성을 소거하면서 맞아들인 두 대안,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전자는 물신숭배로 후자는 정치숭배로 나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 대답을 준비할 수 있다. 우리의 근대성에 기초부터 프레임웍이 잘못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성성을 제거한 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고디베르의 이 저서는 후자의 대답을 택한다. 그는 1930년대 이후 서구 합리주의 문화 속에 침투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것의 존재, 탈신성의 흐름을 따져나가면서, 그 속에서도 신성이나 상상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고수했던 지성들, 예를 들어 블로흐, 벤야민, 융, 말로, 바슐라르, 앙리 코르뱅과 질베르 뒤랑 등의 활동을 고찰한다. 그는 선형적인 진화론적 역사관 대신, 수직성과 원형성이 농후한 나선형적 역사관을 피력하면서, 위기는 몰락의 위기가 아니라 쇄신과 변혁을 위한 위기이고, 한 단계 수직적으로 상승하기 위한 위기이다. 이 때 바로 신성성의 의미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신성의 위치는 도피가 아니라 각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다시금 '깊이'와 '높이'를 중요한 자산으로 삼는 문화를 복구하자는 의미로 들린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용어를 쓴 사람은 아마도 김지하가 아닐까? 그는 '그늘'을 이야기했다. 그늘은 명약관화하게 내 눈 앞에 던져지지는 않지만 그 의미의 모호성만큼이나 깊은 의미의 떠개로 쌓여있다. 우리의 삶은 그 더깨를 거둬버릴 때 삶은 기껏해야 계량화된 척도에 의해 얇게 분석될 수 있을 뿐이다. 더깨는 우리의 삶을 두껍게 만든다. 삶이 두꺼워지면 우리는 아주 단순한 사물에서도 무한한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게된다. 신성성의 회복은 바로 삶의 두께를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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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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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니에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흡혈귀에 관련된 문학작품에 대해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다. 뚜르니에는 그녀의 묘한 마스크에 호감을 느꼈고 그녀를 찍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려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나자 그녀는 벌거벗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졸지에 누드를 찍을 것인가? 뚜르니에는 '초상누드'라는 새로운 장르를 즉석에서 고안해낸다. 초상누드란 피사체가 될 인물이 홀딱 벗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프레임은 어깨뼈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는 프레임 아래에 가리워져 있지만 그 가리워진 부분에 의한 반사광이 모델의 얼굴에 미치는 아우라를 포착하려 한다. 그 아우라는 단순히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누드라는 데서 오는 어떤 부끄러움같은 것도 들어있다. 그는 다른 일반적인 초상사진들과 그가 고안한 초상누드를 비교한다. 초상사진에서 얼굴은 몸으로부터 유배당한 외로운 섬이다. 옷입은 초상사진을 봤을 때 우리는 그 유배당한 얼굴을 본다. 초상누드는 몸과 얼굴의 연결이 너무 강렬해서 안보이는 부분마저 보이려고 시도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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