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에서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강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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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어 산문가 에밀 시오랑의 이야기는 항시 한 쪽 끝과 그 반대 쪽 끝이 선천적으로 맞물려 있다. 그과 소위 '절망과 허구'의 사색가로 낙인찍인 이유의 근원에는 바로 위와 같은 사고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나쁜 것과 머리과 붙어 있고, 행복은 불행 속에, 불행은 행복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논리는 비논리와 불륜의 관계를 맺으며 인간사를 조종한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에밀 시오랑이 제기하는 해법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불행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혐오하라. 모든 것을 뒤섞고 모든 것을 휘저어라. ... 누가 알겠는가 - 당신이 이길는지. 당신들이 진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이 세상에서 얻을 것이나 잃을 거이 있겠는가? 얻는 것이 곧 잃는 것이고, 잃는 것이 곧 얻는 것이다.'

모든 것들을 마구 뒤섞어 버릴 수 있는 자, 그래서 삶의 두 극단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자만이 간신히 뭔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불을 뿜는다.( '내게 제기되었던 - 한번도 제기되지 않았던 -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불을 뿜어야 할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데 '지혜'에 의존하는 사람은 그런 불이 없다. 그들에게 오는 것은 혐오스런 자기 만족과 비겁함과 소심함이다. 그들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들의 움직임을 품평하고 격언을 선사해준다.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의 삶은 모순과 절망이 없는 이유로 해서 공허하고 비생산적이다. 모순을 피하지 말라. 모순이 이끄는 절망을 몸소 흡수하라. 그것이야말로 공허한 삶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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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현대철학
알프레드 쉐프 지음, 김광명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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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쉐프의 이 책은 프로이트와 그 사상의 영향사에 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정신분석과 철학이라는 일견 매우 모순적인 관계에 있는 두 사유방식이 어떻게 서로 조응하면서 서로를 변신시켜갔는지를 아주 농밀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살펴보고 있다. 철학은 (내적) 반성을 통해 자기 탐구를 완성시키는 것이라면 반면에 정신분석은 타자(정신분석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로부터 배제되었으나 분명 자기의 일부인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신분석과 철학은 갈등관계에 서게 되는데 정신분석의 정식이 확정된다면 철학의 반성적 사유란 한낱 꿈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정신분석으로부터 재기한 인간 주체 및 사유의 양성적 이중성에 대한 통찰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가 부각된다. 이로인해 현대철학은 정신분석이후 그 몸체를 변형시키기 시작하며 현대적 사유의 풍유로움에 핵심적인 촉매로 작용한다. 방대한 주제를 다루지만 아주 짧고 콤펙트한 글쓰기로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아주 유용한 책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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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을 보는 눈 사계절 Art Library 9
김영재 지음 / 사계절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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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을 미술사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 책들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르다. 이 책은 미술이 아닌 불교의 눈으로 불교미술에 다가간다. 미술은 예술로 여겨진다. 예술은 완성, 걸작을 지향한다. 그러나 종교의 입장에서 작품이니 완성이니 하는 개념은 없다. 불교에서는 대신 인간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열반'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종교의 시각에서 불교미술이란 형식의 완벽성이란 측면보다는 미술가의 깨달음의 세계를 통해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불가의 실용(實用)과 장식 및 양식을 시대정신과 문화사적 사관으로 재해석해 보여주고 있다. 학적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하는 그의 서술방식은 불교미술에 관심은 많지만 아직 엄두를 내지 못하는 수많은 초심자들에게 좋은 해법이 되어 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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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진리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번역) 483
레나토 로살도 지음, 권숙인 옮김 / 아카넷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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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에서 1980년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학계의 보수화, 그에 수반한 '당파적이고 정통을 지향하는 열기'에 대한 반감 위에 서있다. 사회과학은 비역사적이고 객관주의적이며 경험주의적인 원칙이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인문학은 전통적인 정전숭배의 풍토로 회귀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객관주의자'와 '기념비주의자들'이라고 레테르를 붙이고 객관주의자 우위에서 기념비주의자들이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 묘한 공생체제를 비꼰다. 저자에게 무당파적이고 비역사적인 객관성이란 허구에 불과하다. 미국은 항시 동질성과 다원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보수성이 강화될 때 동질성의 압력은 커진다. 그러나 그 동질성이란 무사공평한 평등에 기초해있다기 보다는 힘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삼은 동질성에 더 기운다.

전통적 인류학이 탐구대상으로서의 문화를 자기충족적이고 정적인 문화로 그려온 것처럼 보수성으로의 회귀도 마찬가지 기류에 휩싸이고 만다. 로살도의 새로운 인류학은 사회적 실재들이 갖는 엄청난 역동성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박제화를 피하고 살아있는 의미와 실천, 그리고 뉘앙스적 차원을 주목하길 원한다. 또한 문화적 용광로이자 교차로로서의 미국문화의 특성를 제대로 인식하여 문화란 결코 내적으로 동질적이지 않음을 깨달아야 하며 순수주의니 기념비주의에 중독되어 이질적인 것들이 충돌하는 영역을 단지 무질서라고 치부하고 보지 못할 것이 아니라 이 영역이야말로 문화가 새롭게 창조되고 실천되는 곳임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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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수학 경문수학산책 11
K.C.콜 지음, 박영훈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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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나름의 선입견을 지니고 있었고 그 선입견의 토대는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믿음에 있었다. 한 때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꼭 통과하게 되는 사회과학 방법론에서 양적 탐구에 사시눈을 뜨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나의 선입견의 근본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다. 저자가 스스로 밝혔듯이 그가 이 책을 통해 끈질기게 제기하고자 하는 논지는 '삶의 질을 양적으로 설명한다 하여도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과 질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다는 것이다.

결국 수학자나 과학자 역시 종교인이나 철학자처럼 존재의 양식과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있음은 동일하며, 이들의 양적인 통찰은 우리가 질적인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의 배경에는 그가 수학을 수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학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 4부의 에미 뇌터라는 수학자이야기에 이르게 되면 수학적 법칙과 세계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서로 들러붙어 있는 건지 명쾌하게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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