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 - 돈 키호테에서 장 뤽 고다르까지 한나래 시네마 13
로버트 스탬 지음, 오세필 외 옮김 / 한나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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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두에서 말하듯이 문학과 영화에서 '대안적 전통'이라고 불릴 수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대안적 전통이란 기존의 소설, 영화, 희곡 등의 관습에 의문을 던지는 것, 헐리우드에서 흔히 보이는 환영주의와 매혹과 결별하는 것, 그리고 매끈하게 봉합된 텍스트로서의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인공적 구조물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 그래서 전체적으로 탈신비화, 탈신화화의 전략을 실행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와 같은 문학의 영역에서 부터 그 기원을 찾아, 브레히트를 이어서, 현대 고다르의 영화들로 이어지는 이 전통은 예술이 단순히 소극적인 환락의 대상으로 전유되기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삶의 체험과 반성, 대안과 창조의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영화나 문학을 텍스트적 구축물이라는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이 예술장르들의 미디어적 특성을 사상시키지 않는다. 언어와 영상이란 나름의 특성 속에서 나름의 자기 반영적 전략을 추구하는 모습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아방가르드 영화만을 위한 논설이 아니다. 저자는 전위와 주류 사이에서 요동치며 움직이는 어중간한 영화들을 새롭게 범주화시켜내고 있는데 이런 범주에 속하는 영화들의 특성은 내러티브를 해체할 뿐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 즉 이야기 만들기를 즐기면서도 내러티브의 탈신비화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다루는 자기 반영전략들은 관극행위의 우의적으로 드러내기, 생산(제작) 과정의 드러내기, 내러티브와 동떨어진 자의식 드러내기, 무질서하지만 역동적인 카니발리즘의 정치학, 그리고 전복이다.

이제 100여년을 넘어선 영화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역사를 구성한 역동적 의지들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저자의 자기 반영적 전통은 크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단지 영화를 다른 문화적 전통들과 단절적으로 파악하기 쉬운 순진한 영화매니아들에게 영화 전통 속에 겹쳐진 다른 예술의 전통,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 뿐만 아니라 주류문화에 대한 문제의식과 정치적 판단에 대한 안목을 높여주는데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이 책의 부록으로 첨가된 '영화 특유의 자기 반영성'이란 장은 영화 매체의 자기반영적 가능성들을 통찰력있게 보여주고 있어 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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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문학 동문선 현대신서 37
로버트 리처드슨 지음, 이형식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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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영상문화에 관련된 담론들이 홍수를 이루면서, 영상예술를 문학과 같은 언어예술과 독립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늘고 있다. 몸, 육감, 이미지, 멀티미디어 등과 같이 선언어, 선관념적인 차원이 우리 앞에 있고, 영화니 영상물이니 하는 것은 그런 선관념적 차원으로 우리의 인식을 끌고 간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이미지는 언어와 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관념적 질서에 갖힌 인간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인 듯 하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앞서 나가는 것 같다.

레니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와 알렝 레네의 [밤과 안개]를 비교해 보자. 전자는 히틀러와 나치즘을 서정적 시각주의로 찬양하는 작품인 반면, 후자는 반대로 지금까지 나온 가장 실날한 나치즘 비판영화이다. [의지의 승리]가 시각과 몸에 강력히 호소하는 영화, 그러니까 그전까지의 관념과 언어로부터 막무가내로 풀려나가도록 의도한 영화라면, [밤과 안개]는 자극성있는 시각성 보다는 원전 소설에 더욱 충실해 있고, 영화의 시각적 면은 문학적인 면에 엄격하게 종속되어 있다. 물론 시각성이 문학성과 관면에 꼭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이미지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우리는 판단을 해야 한다. [의지의 승리]가 주는 시각적 자극과 판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나는 영화가 기술로 환원될 때, 영화가 이미지로 축소된다고 생각한다. 나치즘이야말로 인간을 기계와 기술로 환원시킨 대표적인 체제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 영화를 기술로 환원시키는 또 다른 조류는 헐리우드 영화다. 스타일은 해마다 조금씩 바뀌지만 그 이데올로기적 정향과 소외성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스펙터클에 성공할수록, 이미지만의 영화로 이해될수록 영화는 기술로, 그리고 무성찰성으로 떨어진다.

영화와 문학은 그래서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은 인류가 삶의 영역에서 성찰해온 유산들이 고스란히 담기고 투쟁해온 영역이며, 언어란 바로 그런 투쟁들의 기록이고, 또 우리가 새롭게 써야할 투쟁의 그림책들이다. 하지만 영상문화의 폭팔과 함께 이미지의 독자생존을 갈구하는(아마도 문학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신의 이론적 헤게모니를 세워보겠다는 시도인 듯) 지적 운동과 그에 현혹된 시네키드들에게 영화란 결코 하늘에서 똑 떨어진 것이 아님을, 여러 차원의 문화들이 겹친 결과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데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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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테리 이글턴 지음, 김준환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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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자코비는 그의 <유토피아의 종말>(모색, 2000)에서 서구 자유주의의 맥빠짐 혹은 길잃음 현상은 유토피아주의의 상실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는 유토피아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활력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정의라는 차원을 각성해왔는데, 유토피아가 역사의 종말이 통속적으로 운위되는 상황에 빠지자, 자유주의는 상대주의와 무력감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대로 포스트 모더니즘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급진적 운동이 패배한 상황에서 나타난 실패의 결과물로 본다. 이 실패로 인해 사람들은 총체성, 역사, 주체와 같은 고전적 개념들을 포기해버리고 표류하면서 그 대신에 문화주의에 입각한 탈정치적, 탈경제적 이론으로 좌절된 정치적 욕망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우리 한국의 좌파들에게도 잘 적용될 듯하다. 소위 문화주의적 좌파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이글턴이 비판하는 것은 후기 근대주의 전체의 양상이 아니다.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급진적 운동이 실패한 상황에서 문화주의에 입각한 급진적 이론의 아성을 세우고, 그 속에서 놀면서 정치적으로 좌절된 시대의 현실상을 외면하려는 경향이다. 따라서 그의 비판의 주요 표적은 후기 근대주의가 조장하는 '문화적 상대주의, 도덕적 관례주의, 회의주의와 실용주의, 연대와 규율적 조직에 대한 혐오,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적절한 이론의 부재' 등이 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마비상태 대신에 포스트 모더니스트적 좌파들이 얻은 것은 이 마비상태를 무화시켜줄 정교한 이론이었다. 그래서 전형적인 레닌주의자들은 전형적인 라캉주의자가 되고, 프랑스적인 염세주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푸코주의자가 되고, 계몽주의 역사의 목적은 무의식적으로 아우슈비츠였다고 스스로 믿게 된다. 그들은 이글턴에 의해 풍자의 대상이 된다.

이글턴은 자신을 '위계질서적, 본질주의적, 목적론적, 메타-역사적, 보편주의적 인본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주공격목표가 되는 이 용어들을 그들보다 더 급진적인 것으로 다시 해석한다. 그래서 거꾸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옹호하는 반대용어들, 즉 수평적, 반본질주의적, 탈목적론적, 탈역사적, 탈인간적, 반보편주의적 이란 말들이 현대 자본주의 문화에 대해 가장 보수적이고 순응주의적인 논리로 해석되어지는 묘한 아이러니를 집어낸다. (그러고 보니 데리다가 많이 쓰는 수법이다.)

이로써 자폐-이론적인 문화주의적 좌파의 자기보호 논리는 내파된다. 거대담론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거대담론을 혐오하는 거대담론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들어가 사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에 문제된 구겐하임 중심의 뉴욕 추상미술과 미국 씨아이에이 사이의 기묘한 연관설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이 주장을 한 사람에 의하면 소비에트 트랙터 미술 대신에, 진정성을 열망하며 변혁을 갈망하던 열혈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을 몰두하게 해줄 소스가 필요했고, 이런 기묘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잭슨 폴록을 비롯한 전통파괴적이면서 이론지향적인 작가들을 키워냈다는 것이다.

이들의 등장과 함께 예술, 그리고 지식인들은 현실변혁의 의지 대신에 캔버스와 이론의 의지에 매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몸덩어리에서 나온 다른 얼굴인 듯 하다. 위협적이지 않는 한 건드리지 않는다. 선만 넘지 않는다면 적당한 일탈(혹은 이론만의 일탈)은 그것은 체제가 가하는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원래의 체제를 교묘하게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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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 우리 시대의 고전 4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규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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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생산물의 사용 가치는 소비의 전제 조건에 불과하다. 오늘의 현대 사회에서는 생산물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소비된다. 사람들은 광고나 텔레비젼의 기호를 소비하며, 그리하여 소비의 대상물이 기호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사물의 기능을 기호로 보고 소비를 사회의 언어 활동으로 보는 기호학적 사유가 깔려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상품의 구조와 그것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으키는 현상이 기호와 구조와 리얼리티에 정확히 부합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착수한다. 그의 기호분석은 마르크스의 상품분석에다 기호학적 사유를 덧붙이는 이상을 행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정치 경제학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가했듯이 보드리야르의 기호학 비판은 기호학에 대한 비판적 수정의 의미를 지닌다. 그가 보기에 정치 경제학과 언어 기호학은 모두 제각기 체계의 법칙과 구조를 갖는다. 전자는 공급/수요, 노동/교환의 [주어진 사실]에 집착하며, 언어 기호학은 분석과 항목들을 기술적으로 조작하며, 그리하여 부분적인 체계들은 자율화하고 사물화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그간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했던 생산/효율성/합리성의 논리에 대항해 [상징적 교환] 개념을 이념형적으로 설정한다. 이 개념은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와 바타이유에게서 빌려온 것이며, 그래서 상징적 교환을 가르키는 그의 예들은 주로 [선물 교환] 또는 [탕진] 같은 원시 사회의 교환 형식에서 빌려온 것이다. 여기서 그는 '사물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장이 아니라 상징적 활동의 장이다'라고 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활동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이 순수한 희생 내지 탕진이라는 소비 원리인데, 과거의 종교적 제의나 오늘날의 스포츠 게임이란 것도 이에 대한 상징적 예로 볼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리오따르 등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마르셀 모스의 '선물 교환 개념'에서 부터 바따이유, 리오따르, 보드리야르로 이어지는 포스트 모던 철학에로의 여정을 설명력있게 서술한 책이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시각과 언어에서 <이질성의 철학>이란 제명으로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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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의 진실 내 사랑의 자유
크리스틴 최 / 명진출판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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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는 구성이 허술해', '주인공의 성격이 불분명해', '쟝르 공식을 아주 유려하게 뒤집었어' 영화든 뭐든 나는 이런 식으로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이지 구역질이 난다. 이 때 작품은 내 안에 들어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앞에서 명석판명하게 분석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물론 헐리우드 대량소비영화들에 대해서는 그런 마아케팅에 도움을 주는 그런 분석의 시각이 필수적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예술이든 그것이 존재에 대해 도전적이지 않다면 과연 그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녀의 영화는 존재의 진실을 담고 있다. 뉴욕대 영화과 교수라는 신분이지만 우리나라 교수들처럼 학삐리 예술애호가의 한계는 이미 어지간히 뛰어넘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뒤에 쓴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코멘트, '두 개의 피를 가진 한 여자가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영화를 통해 어떻게 자의식을 찾아가는가에 관한'이란 식의 '거리를 둔' 코멘트가 어쩐지 우습게 여겨진다. 그는 그녀의 숭고를 쪼잔한 언어적 기교로 덤비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녀의 영화는 좌절과 분노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녀는 기본적으로 카메라를 단순히 담는 매체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키는 매체로 인식한다. 카메라 눈이 변하면 세상의 눈도 변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신념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소릴하면 지나간 시절 이야기를 한다며 혀를 찰 놈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그리곤 한국 영화도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며 어긋한 장광설을 늘어놓을 것이다. 사회의식을 외치던 어중간하게 변혁적인 감독들은 대개 다 성공적으로 거대화되는 시스템 속에 편입되었거나 이젠 고독한 미학적 자의식을 가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글쎄 뭐랄까... X같다.

이 책은 삶을 통해 분노를 얻고 그 분노를 벼려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바꾸려는 한 여류 영화감독의 이야기이다. 책 속에서 헤메다가 고등어같은 삶의 긴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망치를 휘두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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