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전: 이론과 비평 한나래 시네마 12
수잔 헤이워드 / 한나래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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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Studies란 말은 있어도, Filmology나 Cinemolgy란 말은 없다. '신문방송학'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학문의 십자로란 말처럼, '영화학'이란 여타 학문들이 서로 가로놓여 있는 가운데 왕성하게 생성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혈기왕성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숙하다는 거다.

본서는 1996년 루트리지 출판사에서 간행된 것인데 교보에서 원서를 보고 구입한지 6개월만에 내 눈 앞에 번역서가 나타났다. 그냥 책도 아니고 사전인데 이렇게 빠르게 번역을!! 좀 놀랐지만 서두른 때문인지 번역에서의 오류가 자주 눈에 띈다.

영화이론의 경우 현대철학과 기호학, 미학, 커뮤니케이션이론, 사회학 등의 용어가 자주 원용되는데 이 분야의 용어는 자의적으로 번역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자주 눈에 띈다. 이 책도 사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전을 번역하는 일은 학문적 소통의 기초를 놓는 일이라는 점에서 섯부르고 성급한 번역은 차라리 않하느니만 못하다.

역자는 (항목 몇 개 더 늘린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좀 더 다른 관련서들을 참조해서 전문어들에 대한 상세한 각주를 포함시켰으면 한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꾸준하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수요가 꾸준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새 판을 찍을 때 전면적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원서의 문제인데 이 사전은 지나치게 미국중심적이다. 역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미국영화뿐이니 오히려 장점이 많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그래도 이건 해도해도 너무 했다. 마지막으로 집고 싶은 점은 한나래 출판사 특유의 촌스런 레이아웃이다. 원서의 단아하고 깔끔한 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서의 커버 사진처럼 [현기증]나는 레이아웃이다. 제발 전면적이고 완전하게 판을 갈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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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그림 - 중국화의 매체와 표현 이산의 책 11
우훙 지음, 서성 옮김 / 이산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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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고서를 접하게 되면 우리는 자주 '공자 가라사대', '맹자 가라사대'와 같은 표현을 접하게 된다. 일제는 이런 습성을 지배논리로 합리화하기 위해 '사유의 정체성'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항시 시원으로 거슬러 고답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새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서양의 경우를 봐도 어떤 문화가 벽에 부딪히거나 해체되어가면 다시 과거로부터 비추어 새롭게 이뤄낸 바가 아니던가?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온고이지신'의 방책인 것이다.

최근에 중국건축에 대한 <순간과 영원>이 번역되었는데, 이 책의 저자 우홍이 <그림 속의 그림>의 저자다. 그는 신중국학, 그러니까 고래의 전통적 중국연구방법 대신 다양하고 혁신적인 방법론을 응용해서 중국문화를 연구하는 서구 중국학의 대가이다.

이 책은 중국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라사대'형 형식이 중국화 양식에도 자주 등장함을 포인트로 삼는다. '그림 속의 그림'이란 그림이 다른 그림을 인용하고 모사하고 품평하는 관계를 간략히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중국화를 이해하는 기존의 방식, 그러니까 그림 자체의 필법과 형식, 그리고 도상성 위주의 전통적 연구보다는 맥락을 그림 너머로 확장한다. 그림 주위를 휘감는 콘텍스트를 보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미시적으로 병풍, 두루마리 같은 그림을 담는 틀에서부터, 거시적으로 문인화가들의 위상과 역사적 맥락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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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 개념과 역사 - 에코 라이브러리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광현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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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이론서를 포함해서) 다른 저서들을 연상하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실망할 것이다. 에코 특유의 유머와 다양한 사례 적용, 이야기꾼적 재질 같은 것은 이 책에서 전혀 얻기 힘들다. 또한 저자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그의 후기 저작이 다루고 있는 기호학적 문제영역들(기호학의 영역과 한계 - [기호와 현대예술] - 나, 해석의 가능성과 한계성의 문제들 - [열린 예술작품]과 [해석의 한계] - 등을 다룬다)에 천착하기 보다는 이 저작이 쓰여지던 때 까지 이어져온 기호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배경과 전개과정을 다루고 있다. 탐구서라기보다는 개론서에 가깝다.

하지만 여지껏 나온 개론서 중에서 에코의 이 저작 만큼 충실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쓰여진 저서도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 책의 진짜 메리트는 맨 마지막 장의 '기호의 철학적 문제들'이다. 특히 퍼스의 이론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어지는데, 이 장을 잘 읽어 둔다면 기호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춘 사람에게 더 근본적인 토대와 포괄적인 지평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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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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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가에는 이산의 책들만 따로 모아놓은 칸이 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이산의 책들은 멀리서 봐도 뽄떼가 좋다. 일렬로 늘어놓으면 마치 무슨 잘 차려입은 제국의 군대같다. 게다가 그 내용의 알참을 신뢰하기 때문에 모두 다 정예요원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산의 신병이 나올때 마다 얼른 내 병적부에 등재시켜 버린다. 그리곤 미래의 전쟁 - 독서 - 에 대비한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는 '조너선 스펜스'라는 학자와 '이산출판사'라는 이름을 동시에 나에게 각인시켜준 책이다.스펜스의 저서들은 이산에서 맡아 놓은 듯 줄줄이 번역되고 있고 가장 최근의 저서는 '강희제'이다.

저작의 제목이 말하는 중국의 '현대', 즉 modern이란 명대에서 현재까지를 아우른다. 중국의 맑스유물론에 의거한 교조적 구분방식과는 다르다. 이건 미국 중국학계의 전형적인 구분이고, 스펜스 박사의 구분도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또한 그는 중국사를 초연한 객관성에 의지해서 서술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을 긴장감있게 보이게 하는 특징인데, 우선 전체서술이 이 책이 쓰여진 현재인 '천안문 사태'와 음으로 양으로 연관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역시 역사구분방식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의 근대에서 제국주의의 영향을 강조하는 근대화 충격론보다는 중국 내부적 자생성과 자기변혁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어 있다. 천안문은 그 대표적 실례가 된다.

얼핏 너무 두꺼워 - 두 권을 합치면 거의 1000페이지에 달한다 - 접근하기 힘든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한 번 잡아보시라. 삼국지가 따로 없다. 여름은 금새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다음에는 스펜스의 다른 책을 잡아 보시라. 현대분야에서 <천안문>, 서양의 충격분야에서 <마테오리치-기억의 궁전>과 <칸이 제국>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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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0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산 좋아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 천재의 의무 문화과학 이론신서 24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 문화과학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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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처럼 정체가 모호한 사람이 있을까? 부르조아적 경향이 강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를 대부로 모셨지만 정작 자신은 거부했다. 톨스토이의 민중적 기독교주의를 선망하고 볼세비즘에서 신성성을 보았지만, 사회주의적 개혁이나 혁명의 사회-지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오히려 그는 종교 속에서의 초월과 거듭남을 더 옹호한다. 그런 점에서 레닌보다는 쇼펜하우어나 오토 바이닝거에 더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든 자파담론에 유리하게 전유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부르조아적 검증주의의 신화적 인물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숨겨진 좌파 이데올로기의 화신으로 보기도 하며, 누군가에 의해서는 예술과 종교의 숨은 힘을 일깨우는 논리정연한 무당으로 보이기도 한다.

저자 레이몽크의 비트겐슈타인은 내게 이렇게 보였다. 그는 철학을 절대적인 원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철학이란 일종의 숙련된 노동이다. 철학은 감히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거나 세상을 미망에서 깨우치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철학은 그저 윤리적 충동과 예술적 충동, 그러니까 의지가 휘저어 놓은 삶의 회오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러셀의 학문적 시도가 주제넘어 보인다. 러셀이 기호논리학을 수학의 기초로 토대삼으려 했던 것은, 과학주의 시대의 인식론적 토대인 수학에 철학을 토대로 놓음으로써 철학의 왕좌를 복위하려는 시도로 보일 것일 게다. 그에게 철학은 윤리적 행동과 예술적 행동이란 시민들에 복무하는 공무원일 뿐이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결별한다.

비트겐슈타인을 보면서 어떤 인간형을 떠올리게 된다. 단순성을 강조하는 인간과 반대로 복잡성을 강조하는 인간말이다. 흔히들 소위 어른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아. 회색이지... 복잡함을 깨달아가는게 어른이 되가는 과정이지.' 허나 이 말을 비트겐슈타인에게 했다간 황당한 꼴을 당할게다. 복잡함이란 '비겁한 삶', '불결한 삶'의 연막에 불과하다. 복잡함의 강조는 이런 연막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초라한 인생들의 변명일 뿐이다. 단순성을 강조하는 인간은 세상은 복잡해보이지만 그 토대와 궁극을 또렷히 볼 수 있으면 아주 단순하고 명료해진다고 본다. 단순명료한 믿음과 삶의 방식은 스스로에게 자기 완결성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로인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는 불굴의 정신이 있다. 이 정신에 다다르면 개인들은 각자 올바르게 깨어있음으로 해서 억지로 사회개혁을 통해 개인의 성숙을 유도할 필요가 없어진다. 사회주의 개혁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태도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단순명료성에 봉사한다.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철학의 이름으로 말해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한한 것이고 그것은 단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여질 수 있는 것'의 구분은 [논고]와 [탐구]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지켜지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역서에 대해 말하자면 역시 제일 문제는 문화과학사 특유의 북디자인에 대한 무성의이고 둘째는 자주 오자가 눈에 띈다는 점이다. 오자가 자꾸 눈에 띄면 번역에 대한 신뢰도마저 동반추락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구절에 대해 번역탓을 하기 십상이고, 그러면 번역에 대한 헛소문이 떠돌아 책판매고를 떨어뜨릴 것이고, 나는 나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냥 남의 탓하고 넘어가는 지적 나태로 빠져들 것이다. 이건 독자나 출판사나 다 손해다. 문화과학사의 분발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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