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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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의 의식은 은유를 동반한다. 더구나 색채가 주는 강렬함은 이성적 판단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종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색깔에 대한 문화적 습성은 원형적 이미지를 벗겨내지 못하고 한 민족이나 모든 인류에게 고착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도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만 겉으로 표현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금기시 되어 있는 법적 효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을 지배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아직도 선입견을 넘어선 차별을 경험한다. 이 차별은 당연한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나 현실에서의 변화는 만만치 않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매일 부딪히는 문제다. 동남아 노동자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뿌리 깊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미국과 서구 유럽에 대한 근대의 열망으로 이어졌다. 혹자는 ‘한국 속의 세계’를 외치지만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약육강식의 국제질서는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자본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권리와 차별의 거부는 작은 외침으로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다. 뿌리 깊은 인간의 의식의 원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이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얼마나 탁월한 사상가들을 배출했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변화와 삶의 본질적 모습이다. 그 끝이, 완성된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다만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라는 낙관적 전망만이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지도 모른다.

  1951년 스물 일곱의 나이에 쓰여진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2006년에 읽는 심회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끼친 명저의 공통점은 선구적 안목과 새로움, 탁월한 분석과 이론으로 보편성과 항구성을 유지한다. 다양한 가치를 긍정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진일보한 족적을 남긴 책으로 손꼽히는 책들은 시대의 아픔을 담고 있거나 고통스런 사유의 결과물이다. 검은 피부를 가진 앙띨레스 출신 정신분석 의사가 써내려간 한 줄 한 줄이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이 책은 프란츠 파농의 육성 고백을 듣는 느낌을 전해준다.

  흑인의 정체성을 거론하는 것은 ‘타자’화된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앙띨레스 출신 흑인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곧 흑인 전체를 대표하는 전형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관계를 고찰하고 동 시대인들의 관찰과 저작들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식민지 민중의 의존 콤플렉스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글은 스물 일곱 청년의 육성이 배어 있다. 특히 흑인성이나 흑인과 정신병리, 흑인과 인정투쟁을 이야기할 때 드러나는 감정적 진술은 오히려 객관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인 검은 피부에 대한 회한과 절규로 들린다. 검은 피부가 백인에게 주는 은유들이 수없이 많다. 특히 사르트르의 <반유대주의와 유태인>을 인용하면서 흑인과의 유사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은 탁월하다. 유럽인들의 트라우마인 반유대주의와 흑인에 대한 반응은 겹침과 펼침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편견과 흑인들 스스로 규정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기술한다는 것의 의미는 비판적 접근을 내포한다. 따라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P - 203

  원칙과 나이와 상관관계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해결책’을 고민하는 프란츠 파농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고뇌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프랑스의 흑인 문제로 국한된 것처럼 보이는 그의 글은 이후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60년대 킹 목사나 말콤 X의 방법과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근본적 원인은 동일하다. 이십대에 프란츠 파농이 겪은 사유 과정이 시대를 넘어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직도 그의 고민이 끝나지 않은 채 흑인 문제 뿐만 아니라 차별과 편견이라는 서로 다른 문제들에 공통적인 접근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말이 현재형으로 다가오는 것은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것이다. 프란츠 파농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향한 웅변으로 들리는 이유는 검은 피부보다 더 역겨운 하얀 가면들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를 끝마치면서 나는 희망한다. 이 세계가 나와 더불어 활짝 열려진 모든 종류의 의식의 문을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도한다.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P - 292


060517-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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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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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우연들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독자가 한 작가를 만나는 것은 선택과 우연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간접적인 만남은 직접적인 인간관계보다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일방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모독이다. 우연히 만난 일본의 젊은 작가와의 만남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세기말에 만난 히라노 기이치로의 소설 <일식>은 대가의 탄생을 예고했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으로 기억한다.

최근 다시 주목받을 때까지 그를 잊고 있었다. 이후 <달>과 최근에 <장송>이 출판되면서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3부작이 마무리 되었다. 두 소설을 천천히 읽어야겠다. 책 읽는데 순서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소설집 <센티멘탈 in a sentimental mood>은 장송 이후에 쓴 단편들의 모음이다. 이 책에서도 젊은(?) 소설가의 특성은 유감없이 발휘되는 느낌이다. 소설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무엇이며 앞으로의 전망이 어떨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3부작이 주로 중세와 근대에 대한 치밀한 탐구 정신의 산물이었다면 이 단편들은 드디어 현대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시간들을 바탕으로 현재가 구성되어 있다는 직선적인 시간 개념에 입각해서 순차적인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수상자라는 천재성이 말해주는 외형적인 개성도 도쿄대 법학부 재학생으로 무심히 게재한 소설의 수상으로 그의 관심이 변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무명으로 끝나버리거나 문학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겠지만.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를 벗어난 소설을 생각할 수는 없다. 모든 작가들의 관심이 시공간을 넘나들더라도 결국 현재성을 확보하고 인간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정신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의 한계와 범위를 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인 소설의 본령을 생각해 보면 히라노의 게이치로의 소설은 이제 공시적 관점으로 전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얼마나 깊고 예리한 혹은 폭넓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는 작가의 역량과 선택에 달려 있다. 작은 단편집에 실린 소설은 겨우 네 편이다. 그러나 네 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청수淸水’는 그가 꾸준히 천착해온 철학적 주제들과 맥을 같이 한다.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억과 연결시키는 솜씨가 일품이다. 단순한 사소설을 넘어서 일상을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나머지 세 작품은 각각 특별한 맛과 취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표제가 된 ‘다카세가와’는 도쿄 북쪽의 강이다. 이 강변에서 벌어지는 젊은 소설가 오노와 잡지사 여기자 유미코의 섹스 장면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다. 사랑의 의미를 묻는 대신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세밀화가 오히려 극적인 재미를 더해준다. 부분의 묘사는 전체를 조망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존 콜트레인과 듀크 엘링턴의 노래 ‘in a sentimental mood’를 들으며 읽는다면 감각적 이미지들이 살아 움직일 것이다. 사랑과 섹스에 대한 진부한 질문 대신에 현실적인 풍경이 오히려 그로테스크하다. 해체주의 시를 대할 때의 생경함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추억’은 내용과 형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교묘한 퍼즐같은 작품이다. 작가의 의도와 고정된 틀에 대한 회의가 독자를 낯설게 한다. 마지막 작품인 ‘얼음 덩어리’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2단 편집으로 같은 페이지의 오른쪽과 왼쪽의 내용이 다르다. 동시에 벌어지는 다른 공간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되어 있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롤라런’이나 ‘라 빠르망’을 기억하는 관객은 이 소설을 그렇게 읽을 수 있겠다. 중간중간 교차 혹은 중복되는 내용을 맞추기 위해 텍스트의 길이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실험은 새로움으로 끝나지 않고 정교한 틀로 인식된다. 많지 않은 단편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새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센티멘탈>은 그의 장편들을 읽기 전에 가볍게 접근하는 에피타이저나 장편들을 읽은 후의 디저트로도 좋다. 다만 장편을 장식하는 부록으로 읽지만 않는다면.

소설가의 나이가 젊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국적과 문화를 넘어서 흥미로운 새로운 작품들을 읽어나가는 재미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과 <장송> 그리고 번역중인 작품들이 남겨졌다. 천천히 음미하는 즐거움을!


06051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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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또 하나의 세계 -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
최준식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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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가 알의 껍데기를 까고 날아가듯이
우리도 몸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나 날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죽음은 형태(form)의 변화일 뿐이다.

  우리는 단 하루도 죽음과 헤어져 본 적이 없다. 태어나는 순간, 생명을 얻는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무덤을 향한 끊임없는 질주가 우리의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이 생의 끝자락 어디쯤엔가 놓여 있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무엇으로 치부된다.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물학적 논쟁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대한 논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삶 이후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들의 삶이 오히려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인도의 어떤 구루(영적스승)가 남긴 시 한편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나머지는 모두 주금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이 시가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분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믿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과 인식 저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깨달음이거나 죽음의 이쪽편인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이다.

  서양의 연속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항상 삶과 함께 하는 것이며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 곁으로 떠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신의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독교적 윤리관에서 보면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도구적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반면 동양의 불연속적 세계관은 죽음을 극도로 혐오한다. 삶과 죽음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며 이승과 저승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전혀 다른 형태의 시공간이 존재한다. 불교나 유교적 관점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는 동일하다.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는 일상에서 우리가 고민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의 단초를 제공한다. ‘근사체험을 통해 다시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주된 관심은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NDE’에 두고 있다. 사람이 죽은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인다. 저자는 우선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락사에서 존엄사까지 의학적, 생물학적 죽음의 정확한 정의에서 죽음의 문제를 시작한다.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우리말에 ‘무섭다’는 대상이 존재할 때 사용하며, ‘두렵다’는 말은 대상을 알 수 없거나 특정 대상이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죽은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이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결국 죽음에 대한 고찰이 지닌 의미가 될 것이다.

  본격적으로 죽음 뒤의 세계를 살펴보면 체외이탈과 어둔 공간 속의 터널 체험을 거쳐 빛의 존재를 만난다. 그리고 장벽을 만나게 되며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장벽 앞에서 몸으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지역과 종교, 인종과 성별, 연령과 민족에 따라 다양하게 근사체험의 형태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과 레이먼드 무디, 퀴블러 로스 등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근사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잘 풀어주고 있다. 다양한 사례 수집과 수집된 자료 분석으로 통계를 내고 특징들을 분석하는 사회과학적 방법이 죽음을 말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이런 노력들이 죽음에 관한 인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에 대한 작은 해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의학계와 종교계의 견해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약물에 의한 환각 작용 실험 등 근사체험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실험도 있었고 종교적 교리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근사체험을 부정하는 종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 잣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일이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근사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근사체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차분히 고민해 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내가 동의하게 된 이유도 죽음이 지금 현재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게 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존재의 상실감에 대한 허무로 발전한다. 종교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유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죽음에 淪?깊이 고민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권해볼만한 책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죽음에게 물어보라. 잘 살기 위해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고민해보자.

  이슬처럼 사라져간 이슬이도 그 밝은 빛의 터널 속에서 평안하길 빌면서……


060523-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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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시령 창비시선 260
고형렬 지음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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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오십육년간 하루 한끼 하다
절에 비 오는 낮은 궁금했을 것
눈 날리는 날은 더 적적해
친구 없어 몸이라도 굴리고 싶게

이 나라 청화
중이여, 우리에겐 그대가 있군
가장 깊은 곳에서 높은 그대
저 텅 빈 듯한 산중에
지금은 또 누가 삶을 견딜까

그의 창자는 아무리 날이 좋고
마음산 어두워도
하루 한끼만 받고 궁금했던
그대 작은 신발, 만지고 싶다

고형렬의 이번 시집들은 조용하고 잔잔하다. 때로 격렬하게, 혹은 역동적인 몸짓으로 이야기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나지막하다. 산사의 고요함처럼 맑은 정신을 길어 올리는 고즈넉함이 아니라 밋밋하고 특징없는 고요함이다. 울림은 적고 목소리는 낮다. ‘그대’가 누구인지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느닷없는 대상과 목적없는 행위들은 다소 낯선 풍경들을 자아낸다. 앞으로 시집은 직접 보고 골라야겠다. 시인들의 허명 때문에 손해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

네거티브, 검판
김정환 시인에게

이렇게 그리울 줄 알았다면

사진 찍어둘 것을
1980년대 초, 서울 살러 왔을 때
종로 3가에서 을지로 3가 사이
지하철공사장, 거대한 수로처럼 철기둥이 땅속으로
마구 들어가 박힌 대로(大路),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그 붉고 검은 흙들 진창들

흑백으로라도 웃는 둘을 잠시만 세워두었더라면

그 길로 곡예하듯
검판 보러 가던 여름과 겨울이 보고 싶진 않았을 것
기록만 있다면 벌레 먹어도 좋은 것
매미는 울어대고 오공(五共)시대 끝에서 타던 청계천
을지로는 3․1고가로 침침한
눈 펑펑 내리던 그 흑백의 길

내 횡경막 속에 묻힌 역사적인 그 길
지금 그 길, 대화와 수서로 영원한
휴가중, 도둑은 가버리고 늦은 화살만 날고 있는
한낮

그때 서른 무렵이었으니! 너무나 바쁜, 공화국의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차라리 내게는 이런 류의 고요함과 아쉬움이 감각적으로 와 닿는다. 단순한 과거 회상의 시점이 아니라 현재와 대비되는 지나간 시간의 ‘진창들’이 손끝에 전해진다. ‘너무나 바쁜, 공화국의’ 허우적거림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안타깝다. 그 정밀한 풍경 묘사만으로도 나는 한껏 시인의 서른 무렵을 돌아본 느낌이다. 한 편의 시가 전해주는 울림이 무엇일까? 공감할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없어도 언어와 감각, 의미와 상상력을 통해 길어 올린 표상들이 공유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치의 눈

하느님이 처음 만들 때 눈빛과
손길이 보인다

잘 접혀진 파란 풀잎
울지 못하는 풀의 울음을 대신한다
나는,
가급적 날지 않으려는 너를 눈으로
들어올린다

하지만 나는
원래의 풀잎에 다시 놓아둔다
울어도 찍히지 않는 울음 때문에

여치,
풀잎 줄기 실뼈의 섬유질 속에
통곡이 파란, 가을을
나는 혼자
눈으로 접고 또 접고 있다

슴벅한 눈길에
스스로 놀라 푸르르 날아가리라

아니면 이렇게 관찰된 대상을 통한 주관적 개입이 바람직하다. 철저한 객관화 아니면 감정의 떨림을 전달받고 싶다. 그 많은 대상과 상황들 속에서 독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신선한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안전 운전을 위해, 아름다움과 곱게 포장된 언어를 위해 시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060524-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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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적이다 -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웬델 베리 지음, 박경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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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제는 도시생활이 대부분이다. 농촌에는 60대 노인이 청년 회장을 한다는 말이 사실이 되었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낙후되고 삶의 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과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농촌으로 갈 수 있을까? 과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가능한 모든 발전들은 우리 삶의 목표가 되었다. 세상은 진보와 발전의 수레바퀴 속에서 영속적인 진화가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제 그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맹목적인 과학에 대한 믿음은 인류의 삶에 반성적 태도를 박탈했다. 현대의 미신에 가까운 과학에 대한 맹신은 인간의 가치 판단과 무관하게 발전되어 왔다.

  과학은 결국 가치 판단과는 무관한 기능만을 제공해왔다. 물론, 인문학과 예술과 종교는 과학기술의 시대에 적절한 가치관을 제공했는가 하는 비판과 반성도 아울러야 한다. 이러한 판단과 논의는 인류에게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고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웬델 베리의 <삶은 기적이다>는 이러한 논쟁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저자의 생각과 주장은 분명하다. 과학기술의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과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숭고함이다.

  현대과학의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와 환원주의, 기계론적 사고와 산업주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비판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저자가 택한 방법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유오성이 선택한 ‘한 놈만 팬다’는 전략이다. 그 한 놈으로 선택된 것이 에드워드 윌슨이다. 최재천과 장대익이 옮긴 <통섭>으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을 읽지 않아 웬델 베리의 의견에 전반적으로 동의하거나 조목조목 반대의견을 비판하며 읽을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전반적인 그의 견해와 논의의 초점은 특별하지 않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반론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

  윌슨의 통섭은 한자로 ‘統攝’이다. 큰 줄기로 끌어 당긴다는 한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전제주의적 지배적 성격이 강하다. 문제는 통섭의 주체가 과학이라는 데 있다. 웬델 베리가 윌슨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이유도 과학적 환원주의의 입장에서 모든 학문과 인접 분야의 통합을 시도한다는 데 있다. 알 수 없는 세계는 없고 과학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웬델 베리는 수용하지 못한다. 살아 있음의 신비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은 과학의 잣대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삶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는 인식이 기독교적 관점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구체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이 왜 타당한지 조목조목 따져 밝히고 있고 나름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저자가 내세우는 대안은 없다. 오히려 신비주의와 모호한 태도로 보일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다만 과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맹신을 돌아보고 경계해야할 전제임을 반성하는 정도로 읽는다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시도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한 시도로 보인다. 그것은 학문간의 교류를 넘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문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발전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진보와 발전의 개념과는 다른 문제다. 이 책의 저자가 현대 문명 전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삶의 방향과 목적도 없이 맹목적인 속도전을 치르고 있는 현대인을 위한 반성적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인다면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저자는 책 첫머리에 라이오넬 베스니(1946-1999)의 “우리는 아무 대가 없이 무언가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걸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선언적으로 요약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

당신이 보는 대로 세상은 당신에게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당신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Blake, Complete Writings, Oxford, 1966, 663쪽) - P. 16


를 인용하며 삶의 예측 가능성과 기계적인 방법론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이 비판이 비판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아전인수식 해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찰적 비판의 대안이 모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종교와 양립할 수 없는 과학의 대립이라는 관점은 아니지만 저자의 태도는 신비주의에 가깝다. 브레이크의 위대한 시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많은 책에서 인용되어 식상하기까지 한 이 시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곰곰이 음미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 준다. 그래도 ‘삶은 기적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한알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Complete Writings, 431쪽) - P. 168


06052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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