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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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리영희 선생님과의 대담 <대화>를 읽으면서 형언하기 힘든 정신과 이성의 힘에 압도당한다. 그 숙연함은 우리 시대 ‘사상의 스승’이라 불릴만한 리영희 선생님의 깨어 있는 의식과 올곧은 삶의 태도에 대한 경건함에서 비롯된다. 한 시대와 민족에게 있어 참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전 존재로 보여주신 선생님의 삶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20세기 한국 사회에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이 리영희 선생님이신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주신 선생님의 발자취를 더듬은 이 책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책이 될 듯하다.

  1929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나 삭주에서 성장하신 선생님은 중학교부터 서울로 유학한다. 그 무렵에 해방을 맞고 해양 대학을 졸업한 후 안동중에서 영어교사 재직하던중 6 ․ 25 전쟁이 발발한다. 군에 입대한 선생님은 최전방에서 통역장교로 3년을 근무하고 후방 군의학교에 전속되어 근무하다가 7년 만에 소령으로 전역한다. 합동 통신사에 첫 발을 내딛고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국제 정세와 세계사적 흐름을 주시하며 본격적인 글쓰기와 연구를 시작한다. 60년 4 ․ 19와 61년 5 ․ 16을 겪으며 역사의 현장에서 의식을 무장하고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나간다. 이후, 1964년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옮겨 11월에 유엔총회 남북한 동시 초청안 기사로 구속 기소. 69년에 베트남 전쟁과 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적 입장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제 1차 언론사 강제 해직. 군부독재 ․ 학원 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제 2차 언론사 강제 해직. 76년에는 제 1차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교수직에서 1차 교수직 강제 해임. 77년에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내용의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 기소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80년 광주교도소 만기출소. 사면과 복권 되어 해직 4년만에 교수직으로 복직되던해 5월 16일 ‘광주민주화운동’ 일어남. ‘광주소요 배후 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날조되어 구속되었다가 풀려나지만 한양대에서 2차 로 교수직에서 다시 해직됨. 84년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주관 ‘각급학교 교과서 반통일적 내용 시정견구회’ 지도 사건으로 다시 구곳 ․ 기소되었다가 2달만에 석방(반공법 위반혐의). 한양대학교에 해직 4년만에 2차 복직. 이후 동경대 사회과학연구소 초빙교수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와 독일 연방교회 사회과학연구소 공동초청 초빙교수.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주도적 참여후 이사 및 논설고문 역임. ‘한겨레신문’ 창간기념 북한 취재기자단 방북기획건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안기부에 구속 ․ 기소(당시 환갑). 추후 사면 복권. 95년 한양대학교 정년퇴직. 2000년 집필중 뇌출혈로 우측 반신마비. 이후 건강회복에 전념.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오신 선생님의 인생 이야기는 어떤 영화나 드라마 보다도 감동적이다. 딸 미정씨는 노동운동에 헌신하며 대학시절 아버지는 수정주의자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들려주는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7년간의 군복무중 17살 어린 동생의 죽음과 77년 11월 27일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 ․ 기소되던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선생님의 심정을 짐작해 본다. 한 인간에게 있어 사상의 자유와 사회적 책무는 어디까지인가. 참된 지식인이 한 사회에서 담당할 몫은 어디까지인가. 어렵고 힘든 질문과 대답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가족들에게 자상한 아버지, 따뜻한 남편의 역할을 포기한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길을 고집했던 한 인간의 발자취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독재정치와 권력에 맞서 온몸으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리영희 선생님의 태도는 물론 차이가 있다. 외신부 기자로 본격적인 논문과 글쓰기를 시작할 무렵의 선생님은 주로 중국의 공산당 혁명과 베트남 전쟁,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의 해방과 독립을 목도하며 넓은 시야와 안목을 가지게 된다. 이후 한양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일관된 연구를 거듭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의 자본주의적 속성과 패권주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유엔과 미국 정부의 비밀 문서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실체를 밝히고 전지구적 차원의 미국의 힘의 논리를 밝혀낸다. 중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시대 이후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체제 포기 등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북한의 입장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흐름을 짚어낼 수 있다.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를 발간한 이후 우리 사회는 리영희 선생님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고 여전히 그러하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관련 대학생들은 일면식도 없는 선생님의 영향을 언급한다. “난 모든 사건에 직접으로 관계한 일은 없지만 거의 모든 사건의 ‘간접적 주범’이 됩니다.(본문 554)”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의 영향력을 웅변한다. 노신을 존경하여 그의 사상과 태도 글쓰는 방법론까지 영향을 받았다는 고백은 우리 사회의 노신으로 여겨지게 한다. “‘개인은 합리적이고 또 이성적일수 있지만, 무리(집단)는 극히 비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개체로서 사고하는 인간’과 무리 속에서 ‘무리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큰 차이에요.(본문 268)”는 말 속에 인간 리영희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무리 속에서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입장과 태도마처 비이성적이라면 분명 통탄할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은가?

  한 시대의 선각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상적 스승으로서 한 평생을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살아오신 선생님의 이 말이 비단 글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인들에게 경건한 자기 반성의 메시지를 전한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우상과 이성> 서문중에서)” - (본문 675)


   리뷰의 분량이 3200자로 한정되어 덧붙이는 사족.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21세기 한국의 미래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방향을 더듬어 볼 필요는 있겠다.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비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얼하다고 확신해요. (본문 687)

   촘스키나 피에르 부르디외, 에드워드 사이드나 사르트르를 대하면서 과연 우리 사회에 '지식인'은 있는가라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삶과 사상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우리 삶의 태도와 이성적 판단력에 영향을 줄만큼 큰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분을 꼽으라면 우리에겐 누가 떠오를 것인가?

   쉽사리 한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하거나 탁상공론에 빠지거나 지식과 이성이 삶의 태도와 현실의 모순으로 드러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시대를 공유하며 살아간다. 내가 배운것은 무엇이며 가르치는 무엇인가? 나의 삶은 어떠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적어도 선생님에게서 그 작은 빛과 희망을 본다. 가슴속에 꺼지지 않은 불꽃으로 살아남아 지성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책을 읽어가며 군데 군데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지만 이 몇개의 밑줄이 오히려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오해할 요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나만의 독서법이니 내 안에서 소화된 내용을 뭐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이 불편하여 자서전 형식의 책을 위해 대담을 맡아 성실하고 적절한 대화를 이끌어 낸 이 책의 또 하나의 주인공 임헌영 선생님의 역할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책을 추천하거나 권하는 일을 잘 하지 못하지만 이 책만큼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200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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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이야기 - 자유.자치.자연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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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의식과 신념은 하루 아침에 바뀌거나 형성되지 않는다. 가끔 그런 경우를 접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외부의 충격이나 경이로운 삶의 변화를 겪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는 저자의 오랜 기간에 걸친 자신의 세계관을 진지하게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것은 개인의 사유로 얻은 깨달음이 아니라 깊은 연구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지식의 차원이나 이론적 접근 방식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상상해봐. 천국이 없다고 노력하면 너무 쉬워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고 우리 위에는 하늘 뿐이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그건 어렵지 않아 누구도 그 때문에 죽이거나 죽지 않고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고 - 존 레논의 ‘이매진’중에서


  노래 속에 아나키즘으로 가볍게 시작해 보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생각과 이념을 확인하지 않고 살아왔거나 발전된 형태의 주의나 주장들을 외면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잘못된 편견과 시선으로, 고정관념과 선입견으로 ‘아나키즘’을 거부하지는 않았는지.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이해된다. 폭력적이며 비현실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의 아나키즘에 대해 저자는 하나하나 그 오해와 진실을 풀어나간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지금 이 나라에는 국가주의가 너무 과도하여 인간의 자유와 자치 그리고 자연이 과도하게 제한되고 파괴되고 있으므로 이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이라는 생각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다."고 말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회가 변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 새로운 이념과 이론이 등장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필연처럼 다가왔다. 저자가 얘기하는 아나키즘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근대에 등장한 개념으로 우리에게 잘못 이해되어 부정적 이미지와 의미도 모른 채 소외되었던 개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노래속의 아나키즘을 보여주면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들을 해명하며 필요성을 역설하고 기원과 유형을 보여준다. 핵심적인 아나키스트들을 소개하며 핵심 사상들을 정리해 준다. 마지막으로 예술과 교육 측면도 점검하고 있다. 그간 저자가 얼마나 깊이있게 아나키즘에 대해서 고민하고 연구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것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태도 변화이다. 삶의 태도와 고정관념에 대한 생각의 변화 말이다. 그냥 그저 그렇게 거기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왜’라는 질문에 인색했던 나에게 많은 질문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만든 책이다. 평소 피상적으로 관념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아나키즘’에 대한 의문들을 풀어준 책이다.

  저자는 아나키즘을 ‘자유 ․ 자치 ․ 자연’이라는 개념의 삼자주의(三自主義) 개념으로 풀어낸다. 이론과 개념 속에 갇혀 관속의 시체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아나키즘은 저자에 의해 현실 가능태로 탈바꿈한다. 우리의 삶에 투영된 잘못된 믿음과 생각을 바꿔나가고 새로운 생활습관과 태도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말처럼 “실천 전략이 없는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것도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실천 전략들을 저자는 알기 쉽게 설명한다. 역사적 배경과 그간의 논의를 통해 독자들의 생각을 바꾸고 인식의 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저자의 개념은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인간은 그런 모든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스스로 자치를 해야 자신이 사는 터인 자연에 합치된다. 우선 부모와 교사 그리고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나아가 기성의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권위와 절대, 관념과 사상, 조직과 전체, 편견과 허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따라서 자유는 당연히 반항과 부정을 내포한다. (본문 47)

  이렇게 당연하고 신선한 이념을 우리는 실천전략으로 만들어가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현실속에서 실현되지 않거나 막연한 관념 속에 묻힌 이론들은 공허하다. 아나키즘을 실천한 대표적 아나키스 중에서 쿠닌에 대해 저자는 “아나키스트는 항상 원칙에 충실하고 철저했으며 타협을 거부했다고 했다. 그야말로 지식인으로서, 사상적 대결의 가장 철저한 모범으로서 그들은 평생을 두고 원칙에 충실하고자 집요하게 싸웠고 진지?정신적 고투를 경험했으며 철저하게 결단했다고 했다. 그 가장 순수한 원형이 바로 바쿠닌이었다. 그는 그 어떤 아나키스트보다도 더 아나키스트다운 아나키스트였다.”고 평가한다. 이 평가를 보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사상도 실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원칙에 충실하고 철저하며 타협을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깨어있는 일이 어려운가? 사회적 합의와 개인적 실천이 부족한 것 뿐이다. 마지막으로 직업병처럼 교육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렇다. 상징자본과 상징권력으로서 계급을 재생산하는 교육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교사가 달라져야 한다.

  피교육자에 대한 강제나 조작은 교육자의 우월성과 피교육자의 의존성으로 성립되는 상하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에 비해 피교육자에 대한 강제와 조작의 배제는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는 양자의 ‘평등한 인간관계’를 전제로 한다. (본문 267)

  성인은 청소년 자녀를 여전히 아이로 취급하거나 부당한 권위를 강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평등한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Godwin, 1965:118) (본문 267)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공부를 시키지 않는 것이다. 자유롭게 놀게 하고, 즐겁게 말하며 읽고 쓰게 하고, 그리고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사는 권위를 버리고 학생과 평등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교사의 독재는 사회의 독재, 정치의 독재를 허용하는 기반이다. 학교의 비민주화는 사회와 국가 전제의 첩경이다. (본문 285)

모든 아나키스트가 교사일 필요는 없지만, 모든 교사는 아나키스트여야 한다.


200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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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과 매혹
레이첼 에드워즈, 키스 리더 지음, 이경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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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슬랭은 친구들과 브리지 게임을 하고 아내와 딸과 함께 사위의 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가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현관문은 굳게 잠긴 채 미친듯이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러도 기척이 없다. 더욱이 하녀들이 있는 다락방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다. 두 시간쯤 시간이 흐른 후 그는 경찰서에 가서 세 명의 경관과 함께 집 뒤쪽의 창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2층으로 가는 계단위에 극심하게 난타당한 채 허벅지와 다리가 처참하게 잘린 랑슬랭 부인과 딸 주느비에브 랑슬랭을 발견한다. 정말 끔찍한 일은 두 모녀의 숨이 붙어 있을 때 맨손으로 뽑아낸 안구가 계단 양탄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처참한 살해 현장을 확인한 경관과 랑슬랭 씨는 입주 가정부 크리스틴 파팽과 레아 파팽의 시신을 확인하게 위해 2층으로 향한다. 하녀들의 방은 굳게 잠겨 있고 열쇠 수리공을 불러 방문을 열자 파팽 자매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살아있었던 것이다. 바닥에는 두 모녀를 살해할 때 사용한 망치가 놓여 있었으며 두 자매가 바로 살인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순순히 살인을 인정했고 살인에 사용한 칼은 랑슬랭 부인의 시체 밑에서 또 다른 도구인 양철 물병은 계단에서 발견되었다.

  이 엽기적인 살인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위한 설정이 아니라 1933년 2월 2일 프랑스의 르 망 시 브뤼에르 가 6번지에 벌어진 세기적인 살인 현장의 모습이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은 경악했으며 냄비처럼 들끓었다. 훨씬 더 끔찍한 살인 사건과 연쇄 살인범과는 비교되지 않는 특수하고 대체 불가능한 힘을 부여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재생산되는 문화의 코드가 되고 있다.

  레이첼 워드워즈와 키스 리더가 공저한 <잔혹과 매혹>은 이렇게 단 하나의 살인 사건이 가져온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있다. 우선 1장에서는 살인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사실fact에만 집중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들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라깡과 데리다, 들뢰즈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들의 관심과 저작을 중심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있다. 3장에서는 ‘매혹당한 작가들’이라는 부제로 해석과 분석을 예술가들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마지막 4장에서는 영화 속의 자매 살인자의 모습들을 분석하며 수없이 많은 영화로 최근 2000년까지 재생산 되고 있는 두 자매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살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계급 간의 갈등, 즉 주인과 하녀라는 특수한 관계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한 두 자매는 근친상간의 동성애자였던 사실이 밝혀지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은 생활을 했던 유년시절 등이 알려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논란은 증폭되었다. 언니 크리스틴 파팽은 단두대 형을 언도 받았지만 대통령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1937년 정신병원에서 사망한다. 동생 레아 파팽은 10년 노역형을 치르고 최근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의 독특한 범죄행위가 주는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맨손으로 뽑아내고 한 집에 거주하던 여주인과 딸을 망치와 칼로 두 자매가 협력해서 살해한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르트르의 <벽>, 장주네의 <하녀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연륜의 힘> 등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로렌스 하비의 영화 <의식>, 니코 파파타키의 영화 <심연> 등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이후 2000년에 제작된 <살인의 상처>, <파팽자매를 찾아서>에 이르기까지 두 자매에 관한 관심을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학문적 관점과 정신분석이나 예술적 관점에서 두 자매의 삶을 재해석하고 분석하는 것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왜, 도대체 왜 그런 방식으로 두 모녀를 살해했으며, 두 자매의 관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라깡의 문구를 빌리자면 ‘샴 쌍둥이 영혼’을 지닌 인간에 대한 보고서인지도 모른다.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와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한 방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미스터리가 숨어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지나치게 간접적인 서술과 지금까지 출판된 책과 영화를 통해 2차적이고 종합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본질에서는 한발 물러선 느낌까지 전해준다.

  하지만 사건 자체가 주는 ‘잔혹’과 그 잔혹이 불러일으키는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많은 작가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계속된다. 21세기에도 사람湧?삶은 이어지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는 이어질 것이다. 20세기에 벌어진 처참한 살인 사건이 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대한 증폭되는 의문들이 이 책이 내게 건네는 의미이다.

  하늘은 회색이어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되겠지만……


200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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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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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은 그의 명성을 확인해 줄만한 수작이다. 우선 구성 측면에서 전통적인 방식인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의 넘나듦이 이 틀을 깨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작가다. 그의 소설 속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소설속에 ‘신탁의 밤’이라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건과 내용의 주된 내용은 외화(外話)나 내화(內話)라고 말할 수 없다. 현실인 외화와 소설인 내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3중구조의 소설로 구성된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문체와 전달방식에서도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오랜 병을 앓고 퇴원한 오어는 아내 그레이스와 함께 살고 있는 작가다. 브루클린의 한 문구점에서 포르투갈제 푸른 노트를 구입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속에는 닉 보언이라는 작가와 아내 에바 보언 그리고 로사 라이트먼이라는 편집자와 ‘역사보존관리소’를 만든 에드 빅토리가 등장한다. 또 소설속에 등장하는 실비아 맥스웰이 쓴 ‘신탁의 밤’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정리하면 소설속의 소설속의 소설이 바로 ‘신탁의 밤’이다.

  어떤 소설이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하는가? 없다. 이 소설도 그런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알 수 없는 인생에 대한 또다른 통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구성요소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도 제각각이겠지만 정답은 없다.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필연과 우연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놓는다. 다소 복잡하고 작위적인 구성으로 느껴질 법도 하지만 공상 과학 소설이나 기시감을 들먹이는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지닌 불가해한 측면을 깊이있게 고민하고 있는 소설로 읽혔다.

  작가가 기울인 그만큼의 깊이와 구성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현실속의 존 트로즈라는 대가의 입을 통해 글은 현실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이 작가의 다른 목소리로 들린다. 말보다 더 미래에 대한 예언적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 글이라는 얘기다. 시드가 쓴 푸른 노트 속의 이야기를 아내 그레이스가 꿈을 꾸고 소설 속 이야기와 현실이 점점 충첩되면서 시드는 결국 푸른 노트를 찢어버리지만 소설속의 소설 ‘신탁의 밤’의 얘기처럼 아내 그레이스와 존 트로즈의 관계에 대한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버린다. 소설의 말미에서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같은 시간에 벌어졌던 각기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병치시킴으로서 시간과 공간의 의미도 되새기고 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 한 편을 통해 하나의 주제나 도덕 교과서처럼 하나의 교훈을 제시하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폴 오스터는 그저 흘러가는 혹은 살아지는 인생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다만 영원한 숙제인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 보인다. 미래는 예언될 수도 있으며 현실과 상상은 언제든 충첩될 수 있고 예기치 못한 우연이 전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당연한 전언.

  순간 순간에 대한 상황 묘사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현실과 소설의 내용이 겹치거나 영향을 주는 장면들이 전혀 어색하거나 서툴지 않다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그래서 읽을 만하다. 호흡이 짧고 간결하지 않다. 다소 길고 느린 문장으로 생각의 속도를 지루하게 끌고가는 면이 있으나 내용과 어울리고 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특별히 새롭고 환상적인 소설이 없다면 다양성 측면에서 이런 소설도 괜찮았다.

  ‘신탁의 밤’은 사실 미리 예정된 운명 안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의 밤’에 대한 아이러니로 읽을 수도 있겠다. 어쩌겠는가 인간의 삶에 대한 한계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영화의 장면들이 계속되는 것을 지켜볼 밖에. 그것이 모순된 생의 부조리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200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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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입 창비시선 245
천양희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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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서정시가 유효한 것은 머리로는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서정시는 건재할 것이다. 다만 감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시들만 피해갈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그런 시가 있기나 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시에서 절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어떤 형태로든, 우스꽝스럽게 혹은 어설픈 몸짓으로 많은 책으로 엮여왔는지 독자들은 알고 있다. 각설하고 올 봄에 나온 시집, 천양희의 <너무 많은 입>에서 몇 편이 내게로 왔다.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왜 ‘뒤편’인가? 그건 시인의 시선이므로 따라가면 될 일이다. 다가오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떠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영원히 기억되는 법이다. 동전의 앞뒤처럼 생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시인이라고 믿는다. 잘못된 믿음인가? 아니 그러면 그 뒷모습을 포착할 줄 알고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바꿔본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거라는 진단이 떨어진다. 동의할 수 밖에. 시인은 또 말한다. 그 지겨운 희망에 대해.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을 놓아버리는 일은 여전히 금기된다. 그러면 남는게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형태의 희망이며 무엇을 희망하고 있으며 어떻게 희망하는가가 문제이다. 물론 그 실현방식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노선

형님은 자기 노선(路線)이 있소?
독립문 지나다 아우가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걸까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나의 노선이 될 텐데

아우는 자기 노선이 있나?
광화문 지나다 형이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형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요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너의 노선이 될 텐데

가다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이 우리의 노선이리

  ‘가다보면 길이’ 된다고? ‘그것이 희망’이라고?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노신의 말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사람 두사람 가다보면 길이 생긴다’는.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선구자들의 이야기고, 등떠밀려 그 길의 첫 번째 보행자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평범에 바쳐지는 ‘희망’은 없는가? 구체적인 ‘희망가’는 울려퍼지지 않는다. 당연한 일에 목숨걸지 말자. 시인은 신이 아니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생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올곧은 시선으로 ‘희망’과 ‘노선’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말이 때로는 위로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희망’은 ‘완창’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절망만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희망’에 대한 평가와 기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필요성은 인정하자. 인간과 사회로 확대된 ‘희망’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꿈이 아닌가. 그것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교감’에서 시작된다. 이 울림과 떨림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메마른 생을 산다. 겹침과 떨림을 느껴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욕망이 있기나 한 걸까?

교감

한 마음의 움직임과
한 마음을 움직이게 한
한 마음의 움직임이
겹쳐 떨린다
물결 위에 햇살이 겹쳐 떨리듯

시집을 읽다가 발견한, 어딘가에서 본 듯한, 참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구절이 눈에 밟힌다. 내가 걷는 이 길이 가장 먼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 '뒷길' 중에서

 

200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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