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가우디 살림지식총서 127
손세관 지음 / 살림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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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기회에 가우디 건축 화보집을 접한 적이 있다. 스페인어 선생님께서 방학 기간중 스페인에 다녀오시면서 가우디의 건축물 사진첩과 관련서적을 구입해 오셨다. 물론 읽지는 못하고 그 사진들을 통해 그의 건축물에 매료됐다. 공간 예술로서 가우디의 건축물은 숙연함을 자아내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가까운 거리라면 한달음에 달려가 보고 싶을만큼 매혹적이었다. 특히 ‘카사 바트로’와 그의 대표적 건축인 ‘성가족 성당’은 형언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디는 구리세공으로 솥과 그릇을 만드는 아버지를 도우며 평면에서 공간으로 펼쳐지는 과정을 일찍이 습득하게 된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자연과 태양의 빛이 쏟아내는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자란 가우디는 그 모든 감각을 장식과 조각에 쏟아부었다.

  그의 영원한 친구이자 전폭적인 지원자였던 구엘을 만나면서 가우디는 그의 건축에 영감을 불어 넣는다. 구엘 가족의 별장과 정원에서 건축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달한다. ‘건축은 말없이 군림한다.’는 가우디의 말은 말없는 웅변으로 건축을 통해 그의 생각을 대변한다. 온갖 장식과 조각의 아름다움이 건축에 가미되어 전통적인 건축물의 개념과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는 건축에 대해 ‘조형능력은 감성과 이성 사이의 균형을 말한다’는 말로 폭넓은 개념으로 정의내리고 만다. 저자 손세관은,

  가우디는 건축의 형태가 구조체의 명쾌한 표현이므로 건축은 점이나 선이 아닌 연속적인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세계는 종합적인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형태를 선이나 면으로만 분석하는 인간의 지성적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55페이지)

  라고 가우디의 건축 세계를 표현한다. 조형미와 빛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던 가우디의 건축물은 여전히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만큼 그의 건축은 이제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은 진실의 광채’라고 말한 가우디의 말을 되새겨볼 만하다.

  건축가이기 전에 성자였던 가우디는 1883년부터 1926년 사망하는 날까지 43년간 ‘성가족 성당’에 매달린다. 아직도 건축중인 ‘성가족 성당’에는 연간 백만명이 넘은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성당 지하에 묻힌 가우디는 영원히 이 성당의 건축가이자 보이지 않는 주인이 되어 성당을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교회는 종교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넓게 열려진 공간이 될 것입니다.’는 가우디가 남긴 한마디는 이 성당에 대한 그의 집념을 대신한다.

  가우디는 모든 건축물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주변 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였다. 주변의 지형과 자연, 하늘과 자연의 빛까지 고려한 그의 건축들은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는 인공적 흉물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조화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는 말없이 작업에 몰두하고 형태로서 웅변하는 건축가였다.

  인간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언어의 인간과 행동의 인간이지요. 언어의 인간은 말하며, 행동의 인간은 실천합니다. 저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합니다. 저는 언어 표현력이 부족하지요. 가령 저는 예술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데 서툴러서, 말로든 글로든 남긴 적이 없습니다.(81페이지)

  현명한 사고는 과학보다 우수하다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작업에 몰두하며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가우디의 장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듯하다. 말하는 인간보다 행동하는 인간이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생내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사람들은 언어의 인간보다 행동하는 인간에 매료된다. 말없이 걸어가는 신념 앞에 숙연해진다. 그것이 진정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가족도 남기지 않은, 평범한 삶을 거부한, 평생을 신과 건축을 위해 살았던 ‘신의 건축가’ 가우디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언제 스페인으로 달려 갈 수 있을 것인가?



200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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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움과 폭력 살림지식총서 29
류성민 지음 / 살림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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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스럽다기보다는 폭력적이다.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인간은 사회적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는 규범적 동물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본능적으로 폭력적 성향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갈등과 대립 상황에서 폭력은 가장 쉽고 단순한 문제 해결 방법이었을 것이다. 힘의 논리는 자연에서 벌어지는 가장 단순하고 손쉬운 문제 해결방법으로 여겨진다.

  원시 공동체 사회를 이루면서 인간의 이성은 조금씩 발달하기 시작했다. 근대적 국가가 성립되고 형벌제도가 도입되어 개인의 복수가 국가권력에 의해 대신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기 전까지 폭력은 당연한 개인간의 문제 해결 수단이었다. 이것이 종교제의와 결합되면서 희생제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의 출발을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에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과정에서 동물을 희생제의로 삼는 것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의 제목을 뒤집어 <성스러움과 폭력>으로 류성민은 폭력에 대한 논의를 종교의식과 희생제의라는 주제로 풀어내고 있다. 종교행사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들에게 가한 필요 이상의 가학적 폭력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다각도로 진행된 논의를 먼저 보여준다.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하던 논의는 결국 희생제의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폭력적 성향을 잠재우는 역할로 희생제의는 제 역할을 다 해냈을까? 희생제의가 폭력을 잠재울 수 있는 사회적 장치로 충분한 역할을 했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과 대답은 여전히 미흡하다. 짧은 분량 속에 여러 가지 논의를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한계로 느껴진다. 아무튼 제한된 분량 속에서 폭력의 의미를 종교적 의미와 결합시키고 ‘희생제의’라는 측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했기 때문에 성스러움이라는 다소 거리가 먼 개념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희생제의를 거행하면서 엄청난 폭력이 행사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폭력이 폭력을 예방하고 최소화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분석은 폭력을 통한 폭력의 극복이라는 역설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희생제의는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윤리적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39페이지)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폭력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로부터 예수와 신약성서의 저자들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견해였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가 발전시켜온 종교의 기본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의 폭력 성향과 사회 윤리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논의의 초점이 종교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희생제의에 관한 견해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반박할 만한 견해가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생제의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죄와 사람을 구분지어 흔히 쓰는 말이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가 그것이다. 이 말 속에는 희생제의가 표방하는 중요한 윤리적 의미가 숨어있다. 죄와 사람을 분리하여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할 희생제의가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영원’이라는 시간적 개념속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희생제의를 통해 억제되고 예방되어 온 폭력은 이제 사법제도를 통해 효과적으로 제어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사족처럼 마지막에 언급한 현실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의 의미에 대한 논의이다. 학교 폭력을 비롯하여, 조폭의 직접적 폭력, 사법제도에 의해 행해지는 사형이라는 공인된 폭력,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부패 척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희생양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폭력과 희생 제의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어 아쉽다. 종교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폭력에 대한 논의가 깊이 있게 다루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학문적 영역을 벗어난 이야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쉬운 논의는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현실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자식을 위해, 학생을 체벌을 한다는 것도 정당하지 못하다. 희생제의에서 자신이 자신을 대신하는 동물에게 폭력을 가하듯이 체벌은 스스로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생양을 만드는 정치 노닐도 비판받아야 한다. 희생제의에서의 희생양은 양을 희생하는 사람들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곧 자기희생인 것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 대신에 그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은 폭력의 순환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88페이지)


200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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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10장을 쓰는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황혜숙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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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손가락이 저주스러울 때가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주문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이토 다카시의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은 한심스럽다. 주먹만한 글씨와 수준이하의 삽화 그리고 각 장의 제목을 한 페이지로 잡아 156페이지 분량의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재주가 용하다.

  글쓰기 전략에 관한 지침서나 활용서가 아니라 필자가 현재 운영하고 있다는 학원에서 직접 활용하고 있다는 초등학생용 교재로 복사해서 나눠줄 정도는 되겠다. 이런 식으로 많은 책을 쓰고 그 책들을 출판한다면 우리 모두 글쓰는 일에 종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 내용에서 어쩌면 이런 반응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일정 분량의 글을 쓸 수 있으며 끊임없는 노력과 전략적 훈련을 통해 원고지 10장을 완성하면 아무리 긴 글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 무려 9,500원. 왠만하면 책값 얘기는 잘 안하는 편인데 입맛이 많이 쓰다.

  개인적으로 글을 잘 쓰든 못쓰든 전문적인 글쓰기가 아닌 다음에야 무엇이 중요하랴. 솔직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을 가슴에서 풀어놓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과정이라고 믿는다면 행복하지 않을까싶다. 물론 경우에 따라 실용적 목적의 글쓰기가 필요한 경우는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이 책에서는 일반적인 글쓰기 능력을 향상 시키는 방법을 소개할 목적이었지만 남는게 없다.

  그래서 여전히 실용과 거리가 먼 기억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색의 도구로서 글쓰기를 선택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의미없는 책이 될 듯하다. 여러권의 책을 주문하다가 끼워넣은 나의 실수였다는 말로 책의 평가를 대신한다.

  2001년부터 거의 모든 책을 예스 24에서 주문하기 시작했고, 읽은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8개월 남짓된다. 머리가 나빠 오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책을 읽을 때 좀 더 꼼꼼하고 내면화된 독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서평 원칙은 단순하다. A4 2매 이내 그리고 1시간 이내. 1,600자로 제한되어 서평이 너무 길다고 짤리는 겨우가 있지만 그런 경우엔 대충 짤라고 올리고 나머지는 블로그에서 수정을 눌러 전부 올리며 된다. 사실 그렇게 긴 서평을 쓴 것도 많지 않고 쓸 능력도 안되지만. 그리고 시간의 문제다. 잘 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시간이 많이 투자되고 부담이 되며 또하나의 일이 되어버릴 듯한 생각에 1시간 이내의 원칙을 고수한다. 그래서 나중에 우연히 다시 읽어보면, 오탈자도 많고 문맥의 호응이 엉망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어떤가, 이렇게 자유로운 글쓰기가 훨씬 나를 행복하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누굴 위해 글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물과 사상 20 - 한국 문학의 위선과 기만>에서 강만길 교수가 지적한 문단 권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떠오를 때가 있다. 책을 선택하기 위해 서평들을 읽다보면 그렇다. 주례서평과 비판없는 상찬들이 그렇다. 좋은 책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렇겠지만 정확한 평가가 아쉬울 때가 많다. 여러 계층의 독자들을 위해 나름의 평가가 더해진다면 뒤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요구하는 ‘원고지 10장을 쓰는 힘’은 개인차가 심하다. 원고지 10장이면 2,000자다. 대략 A4 두 장 분량이다. 내가 자주 쓰는 패턴이다. 그래서 이 책에 관심을 갖고 주문했을 것이다. 자기만의 개성과 취향대로 일상적인 글쓰기 속에서 문체를 만들어내고 알맹이를 채우기 위해 부단한 독서로 정신을 살찌우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믿는다. 저자는 뭔가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을 것이나 책으로 묶어낸 방법이나 내용이 맘에 들지 않는다. 실제 예문을 통한 글쓰기 방법을 제시하거나 특별한 노하우가 없는 일반론 수준에서 접근해서야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싶다.

 


200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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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04
장석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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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시는 유효하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할 수 있는 장르는 소설이 아니라 시다. 문학의 보편성을 전제로, 공시적 측면에서 당대의 진실을 담아내는 역할이 소설에게 주어졌다면 시는 통시적 측면에서 敍情을 바탕으로 한다. 다양한 문예사조와 시대의 유행을 넘어 시의 본령을 이루는 것이 서정시다. 여전히 장석남은 서정시를 쓰고 있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들어 지칠(?)법도 하건만 여전히 그는 ‘사랑’을 노래한다. 낯간지러운 설렘과 그리움이 아니라 누더기진 삶에 대한 사랑 말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귀 밑을 스치는 바람이 가을을 알려주고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면 막막하기만 하다. 하늘이 푸르고 높다고해서 세상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므로.

  삽십대의 한복판에 서 있는 소설가 김연수가 그의 시를 해설하고 있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전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중심으로 애정어린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모든 시집의 해설들이 그러하듯이 일반적인 독자들과는 거리가 먼 분석적이고 해석적인 비평이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외면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저 장석남이 펼쳐 보이는 세상에 대한 낯선 시선들을 따라가며 편안하게, 때론 불편하게 그의 시들을 가슴에 담아보면 그만이다. 서시에 해당하는 그의 ‘얼룩에 대하여’를 두 번 읽고는 시집을 덮었다가 다음날 다시 폈다. 가슴이 먹먹했기 때문이다. 결국 독자와의 소통과 반응 속에서만 시는 제자리를 찾고 다시 살아나 언어의 의미를 살려내고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삶의 진정성을 전해준다.

 얼룩에 대하여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너무 이른 생에 대한 선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를 가늠하며 시를 읽을 수는 없다. 어느 순간이든 삶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다 다르기 때문이다. 장석남의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는 우리에게 묻지 않고 ‘미소’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시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미소를 어디로 떠나보내고 사는지. 어디에서 미소를 찾고 있는지.


200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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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창비신서 4
리영희 지음 / 창비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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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名不虛傳). 이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설명이 필요없는 책이다. 고전(古典)으로 꼽히는 책의 특징은 보편성과 항구성이나 세월이 흘러도 보편적 진실을 담아내고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데 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 집에 갔다가 빌려 뒷부분을(5, 6부쯤 되는 것 같다) 읽지 못하고 돌려준 책이다. 누구에게나 사회와 현실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했던 시절이 있을 것이고 스무 살의 나를 눈뜨게 했던 책으로 기억한다. 이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기 전에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싶어 주문한 책은 옛 모습 그대로다. 74년 초판이후 개정판이 나오지 않고 그대로 29쇄가 내 손에 들어왔다. 표지도 활자도 오래된 기억처럼 그대로의 모습이다.

  내용상 전체 6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체계적으로 엮은 것은 아니고 주로 70년부터 73년에 걸쳐 시사 저널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1부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를 시작으로 주로 중국과 일본, 베트남을 위시한 아시아의 정치 역학 관계와 군사 문제를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마지막 5, 6부에서는 몇 편의 수필과 ‘한 ․ 미 안보체제의 역사와 전망’으로 글을 맺고 있다.

  ‘가장 진실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가장 국가를 위할 줄 안다’는 말은 책의 서두에서 그의 진심을 나타내는 간접 인용문으로 쓰인다. 기자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고, 비판적 시선과 깨어 있는 정신을 소유했던 선생의 글들은 여전히 오래된 활자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회의 공기로서 언론의 역할이 거론될 때마다, 검은돈과 추악한 정치를 연결하는 작금의 언론을 대하는 국민의 심정은 참담하다. 정경 유착의 고리에 본드 역할을 한 홍석현 중앙일부 사장의 일은 ‘불법 도청’이라는 방법적 범법 행위에 묻혀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이영희 선생의 글이 살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박정희의 서슬 퍼런 군사독재가 언론을 탄압하던 시대의 발언으로 모두를 숙연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한 언론과 정치의 추악한 모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어떤 사회도 어떤 정부도 비판의 여지 없이 최선이거나 만능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는 말은 언론의 진실과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최소한의 선언이다. 그렇다. 진실은 비판을 낳는다. 그 비판이 사회를 건전하게 하고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여전히 국민에게서 나온다. 인류의 역사가 낡은 관념과 새로운 관념의 투쟁의 역사라고 말하는 선생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올해로 해방 60년. 이제야 겨우 친일자 명단이 발표된 미개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잘못된 과거의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만으로도 노무현 정권은 벅찰텐데 노무현은 국민이 잠시 위임해 놓은 대통령의 의무와 권한 5년을 담보로 협상 카드를 내민다. 그의 진정성은 이해가 되지만 방법론은 틀렸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한과 의무를 다시 새겨보는 것으로 잔여 임기를 채웠으면 좋겠다. 과거와 같은 억압적, 폭력적 정치 형태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줄었으나 ‘언제나 통치자들의 잘못은 대중의 희생으로 끝났기 때문이다.’는 역사의 교훈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통치자의 실수와 잘못은 대중의 고통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산당 모택동과 국민당 장개석의 1, 2차 국공합작의 과정과 전개 그리고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글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자위대로 대표되는 그들의 군국주의에 대한 부활과 야망을 우려하고, 방위 예산과 미국과의 밀월관계를 통해 나타난 아시아의 역할론까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선생은 당시 미국방 장관과 일본 수상과의 대화 내용, 의회 회의록 등의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아시아 전체에 미칠 정치, 군사적 역학 관계를 예견하고 있다. 단순한 자료의 제시와 분석에 그치지 않고 날카로운 향후 전망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현재 미국과 일본, 중국과 미국, 한일 관계과 한미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당시의 가장 정확한 논리로 읽혀진다. 과거가 없는 미래는 없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되풀이되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라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 베트남 전쟁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헐리웃 영화를 통해 미국의 엄살과 고통에 공감하며 살아왔는지 알고는 있는지. F??참전에 따른 병사들의 고통과 베트남 민족에 저지른 죄과는 반성하고 있는지.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고엽제 문제와 현지 한인 2세들의 문제는 어떤가.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 중의 하나인 베트남전의 악목이 21세에 다시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리는 또다시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테러 위협 방지 대책을 논하는 관계자들의 모습을 보면 코메디 프로를 보는 듯하다. 어떤 논리와 명분으로도 합리화 될 수 없는 전쟁에 참여한 현실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선생은 베트남 전쟁을 하마디로 정리하고 있다. “프랑스 제국주의 ․ 식민주의를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의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려돼야 할 전쟁이다.”

  자신의 직업과 위치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현실을 바라보는 혜안을 가지셨던 이영희 선생이 기자로서 가져야할 태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실의 긍정에 토대를 두는 세계관을 우익‘적’이라고 놓고, 현실의 개선 또는 개혁을 토대로 하는 세계관을 좌익‘적’이라고 하는 용어 사용의 일반개념에 입각해서 기자는 현실긍정적이기보다 현실개혁적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기자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이 가져야할 태도가 아닐까?

  생각이 생활이 되고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실천하는 진정한 지성인. 우리가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선생의 말한 ‘전환시대의 논리’는 역사의 모든 순간에 적용될 것이며, 우리 모두가 ‘지식인적 자각에 입각한 실천적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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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08-08-08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솔직히 현재 역사에 대한 딜레마에 빠져있습니다.
수구도 진보도 웬지 자신만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묘한 생각까지 듭니다.
진짜 나라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너무 솔직한 리영희씨의 글을 저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불안합니다.
차라리 이순신과 김구선생의 뒤를 따르고 싶을 뿐입니다. 미군정에 처참하게 운명당하신 김구선생님이 그립기만 합니다.

sceptic 2008-08-10 15:52   좋아요 0 | URL
저도 아는 건 없지만, 역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더구나 현실은 더욱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한 두 사람의 의견이나 한 두 권의 책으로 스스로를 정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조금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조금 더 넓고 다양한게 읽고 생각하고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현실도 좀 보이고 말씀하신대로 보수도 진보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지요. 그 접점을 찾아보려는 노력, 혹은 고민이 현실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계속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