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문학과지성 시인선 302
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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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은 가끔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미래 지향적 시간이 아니라 현재나 과거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내 안에 나를 가두기 위해 시를 읽는다. 김명인의 <파문>은 시간의 흔적 기관처럼 미래가 아닌 과거를 돌아보고 사물의 현상들을 꼼꼼히 짚어보고 있는 시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첫 시집 <동두천(1979)>과 <머나먼 곳 스와니(1988)>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시는 세월과 나이를 입고 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다.

  사물에 대한 투명한 시선이 차갑고 선명하다. 표현 미학의 한 정점을 이룬 듯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깔끔한 언어는 단연 돋보인다.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江을 보면 안다, 저기 ”U, 긴 뿌리
골짜기 깊숙이 묻어두고
줄기째, 줄기로만 꿈틀거려 여기 와 닿는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중에서)

누가 순식간에 기웠을까 연두에 회장 둘린
군데군데의 산벚꽃
햇살 옮겨 구름 무늬 펼치는
신록 다채 저 초록 新衣를 보아라
환하게 드러나려다 감춰지는 실밥! (‘봄 산’ 중에서)

  흐르는 시간과 세월을 이겨낸 사물들과 그것들을 읽어내는 시인의 관점은 새롭거나 독자의 시선을 낯설게 하지는 못한다. 모든 시가 즐겁고 신선하게 독자에게 다가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독자들은 여전히 두근거림과 미묘한 떨림을 기다린다.

  치열하고 뜨거운 열정을 좋아하거나 투박하고 거친 시선을 즐기거나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일 것이다. 시인도 독자를 위해서(?)만 시를 쓰는 법은 없다. 하지만 편안하고 개인적 언어에 함몰된 시어들이 감동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언제나 벗어나지 못하는(?) 서정시의 딜레마! 그래서 혹자들은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의 본질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한다. 커다란 규모로 덮치는 해일은 아니지만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가득한 따스함을 즐기거나 내밀한 시인의 고백에 공감하거나 영혼의 울림에 동참한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관심의 대상과 무관하게 독자들은 ‘감동’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적 진실을 은폐한 채 덤덤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혹은 개인적 진실을 외면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랑을 위하여 시는 여전히 존재한다. 시의 기능과 본질에 대해 숱한 논의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시인들은 여전히 시의 의미를 되묻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으로 나는 여전히 시집을 펼쳐 들 것이다.


200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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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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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가치나 사람들의 성향을 바꾸는 일은 무엇보다 힘들다. 오랜 시간동안 몸에 배어버린 관습적 사고와 행동은 타성이 되어 버린다.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습관의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종교와 각종 단체 등 수없이 많은 가치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고 우리와 다른 그들을 인정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심각한 민족내의 이념적 갈등에서 비롯된 전쟁을 겪었고 그로 인한 분단과 고통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거대 담론으로 통일과 북핵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해법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관과 성향,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육을 통해 일방적으로 굳어져버린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개인에게 내면화되고 그것은 계급을 재생산하고 재생산된 계급은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한다. 각종 불법과 유착 관계가 만연하고 부정이 판을 치며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내고 사회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좌와 우의 대립보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립을 사회 통합과 사회 복지의 측면에서 접근하기 보다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 채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억압과 폭력으로 억눌러 왔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의 저자 하승우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하나의 개념이 겉돌고 한 사회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접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홍세화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처음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들고 우리 사회에 진입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까? 집단간의 이익과 갈등이 봉합되고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을까? ‘中庸’, ‘和而不同’의 개념조차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익숙한 좋은 전통과 개념이 있다. ‘똘레랑스’라는 낯설고 어색한 개념을 이해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사실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승우는 이 개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적절하게 수용하고 설명하며 우리 사회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한계까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탈러런스와 달리 똘레랑스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한다. 똘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주장을 위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한 후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쟁으로 풀리지 않는 상대방의 확고한 의견이나 생각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똘레랑스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관용이다. (39페이지)


  미국에서 사용되는 탈러런스(tolerance)라는 개념은 차이를 드러내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종교의 갈등과 전쟁을 통해 유럽 사회의 체제와 틀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똘레랑스’였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대혁명 이후에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그들은 또다시 공화정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이 처절하고 자생적인 과정에서 사회 체제와 개인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공동선의 개념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틀림없다.


  유행처럼 번지고 지나가버린 쉽게 잊혀져 버리는 특성상 그것을 부단히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겨레 신문의 ‘왜냐면’을 통해 끊임없이 토론과 대화를 시도하고 공론의 장으로 갈들을 끌어내기 위한 홍세화의 노력은 조금씩이지만 우리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몇 몇 사람의 노력만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거나 한 사회의 윤리나 가치가 달라진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그 작은 노력과 개인적 실천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한다.(54페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똘레랑스는 평등을 전제로 한다. 평등하지 않은 개인간의 혹은 집단간의 똘레랑스는 의미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차이는 평등이라는 중요한 전제를 잃어버리고 단순한 취향으로 변했다. 사회를 바꾸는 참여보다 자기의 취향을 만족시킬 취미가 더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를 침범당하면 간섭이라 여기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96페이지)”는 저자의 지적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개인이든 집단이든 변화는 참여와 실천으로 촉발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어떤 개념이든 용어이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여전히 자발성의 문제로 남는다. “똘레랑스는 완전무결함을 부정하지만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을 존중한다.(54페이지)” 개념위에 서게 되는 전제 조건으로 아프게 와 닿는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의 자발성……. 이것이 왜 똘레랑스라는 개념에서 중요한가는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똘레랑스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공익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똘레랑스가 아니라 이기주의와 통한다. 똘레랑스에는 자신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하고 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 공화주의가 깔려 있다. (72페이지)


  사회적 연대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실천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늘 자발적 개인의 참여와 실천, 그리고 연대의 문제로 귀착된다. 내가 읽은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그렇게 소화되버렸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저자는 그 한계까지 정확하게 짚어낸다. “똘레랑스의 가장 큰 한계로, 체제가 만든 규칙을 깨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83페이지)” 한계라는 표현은 관점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체제가 만든 규칙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큰 틀의 체제까지도 변화가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서 논의하는 똘레랑스와 앵똘레랑스의 개념적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개념을 넘어 현실과 적용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에서 맴돌며 이론의 문제로 남겨지는 껍데기 개념은 가라! 학문적 개념보다 논의의 초점과 과정들이 현실에 맞춰지고 그것들이 현실속에 녹아드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를 열고 이기주의를 넘어 타인의 자유까지 지키려 노력하는 사회적 연대만이 살 길이다. 작은 곳으로부터의 실천의 문제로 나에게 이 개념은 남겨진다.



200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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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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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하늘 멀리 헬리콥터 한 대가 흰 구름을 배경으로 날아간다. 벌써 가을이 당도해 버린 것인가. 지난 번에 주문한 <서재 결혼 시키기>는 책에 관한 여러 책들 중 하나다. 독서에 관한, 책에 관한 타인의 취향이 궁금할 때 가끔 환자(?)들의 책을 읽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증상과 성향들을 보여 재미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나도 비슷한 증상을 경험했고 그렇게 지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중의 하나는 책읽는 부모를 만나는 일이라고 한다.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양질의 도서를 책장 가득 채워주는 것보다 아이와 함께 조용히 책읽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 분위기가 집안 전체를 가득 메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앤 패디먼은 바로 그런 집에서 자란 대표적인 경우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보다 서재를 합치는 일련의 과정들이 흥미롭게 보인다. 영혼을 합치는 작업을 눈으로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은 저자가 살아온 과정을 책이라는 주제로 묶은 수필집이다. 성장배경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책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연결시켜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불편하고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 위트와 유머 넘치는 글솜씨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웃음을 만들어준다. 권위적이거나 목에 힘주고 설교하거나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로 독자들을 긴장시키지 않는 방법을 저자는 알고 있는 듯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과 인연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끔씩 책을 읽는 행 위 자체를 돌아보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여전히 책읽기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사는 나에게 생활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쾌하고 즐겁게 여겨진다. 결국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자연스럽게 자신이 읽고 쓰는 일로 연결되어 버린 앤 패디먼은 행복해 보인다. 누구나 그렇게 자연스런 행복을 원한다.

  어느집에나 같은 책 두권이 꽂혀 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읽고 선물했던 책과 선물받았던 책들이 가장 많은 경우다. 양이 많지 않아 나란히 꽂아두고 나름의 추억으로 삼는다. 패디먼 일가처럼 교열에 관한 편집증적 증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직업병 수준에 가까운 맞춤법과 표준어에 대한 관심은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수많은 오탈자를 담고 있는 일상적인 생활들이 더 정겹다. 엘리베이터에 앞 게시판에 붙혀놓은 반상회 안내문에 아저씨들의 실수가 짜증으로 여겨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언제나 세상을 정확하고 꼼꼼하게만 살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표지의 인용부호가 패디먼의 삶을 요약하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 그녀의 전 생이 책으로 가득하다는 말이니 달리 설명이 필요없다. 수많은 책에 관한 책중에 하나임이 틀림없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손색없는 아주 괜찮은 책이다.


200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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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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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에 이루어졌던 문학적 성과는 ‘노동문학’으로 대표될 만큼 문학의 저변 확대라고 말할 수 있다. 억압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문학운동은 엘리트 문학을 벗어나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한 본격적인 민중 문학의 출발이었다. 박노해와 백무산으로 대표되는, 특히 시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냈다. 이후, 레닌 동상의 철거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역사적 실험이 끝나고 거대 담론이 사라진 자리에 90년대에는 여류 소설가들의 약진이 돋보였다. 남성 우월주의와 사회적 억압을 거부하는 ‘불륜’이 넘쳤났다. 한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한 특징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21세기의 화두는 ‘여성, 환경, 생명’이라고 정리한 이윤기의 말은 이제 분명한 의미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젊은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은 8편의 단편이 실려있지만 분명한 특징들로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모든 소설의 주제는 진부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다만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과 표현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시간이 흐르고 삶이 진행되면서 사회가 변하고 삶의 양상은 복잡해지고 있다. 그 틈새를 예리한 눈으로 포착하는 작가의 눈을 빌어 우리는 즐겁게 들여다보면 그만이다.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해 불안해하는 많은 사람들과 억지로 틈을 벌리는 사람들의 중간쯤에 정이현은 서 있다.

  우선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녀는 전통적 소설의 문법인 시점을 일부러 거부하고 있지는 않지만 편안하지 않다. 소설과 내부와 외부에서 끊임없이 독자를 끌어들이고 타인의 시선을 전제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 때문이다. 서양 연극의 제 4의 벽의 원리처럼 대개의 경우 소설의 인물들은 짐짓 독자의 시선을 외면하거나 침묵을 전제로 행동하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렇다고 작가가 판소리의 창자처럼 청자를 염두해 두거나 대화형식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독자들은 사소한 일상의 문제들은 은밀히 공유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이 책의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개의 경우 현대적 의미의 여성이다. 10대 소녀에서 당당한 커리어우먼까지 지금 이 시대의 여성이 주인공이다. 물론 시대를 뛰어넘어 19세기말 당대의 현재성을 획득한 ‘김연실’을 앞세우기도 하지만. 독신이기도 하거나 동성연애자이기도 하고 거식증 환자일수도 있으며 결혼을 앞둔 지극히 평범한 미혼 여성일 수도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지금 이 시대를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는 듯하다. 피해의식으로 가득찬 여성이나 자의식의 과잉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울부짖는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모두 발랄하며 이 시대의 제도나 형식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공통적이지만 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새로운 인물형의 창조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면 소설들은 모두 생의 단면을 통해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또 하나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아이러니와 냉소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전의 여성을 다룬 소설들이 개인적 상황과 사회의 억압 구조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면에서 이 소설의 인물들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 정이현은 그녀들에 대한 시선을 차갑고 냉정하게 거두어 들인다. 의도적인 방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온기 없는 시선은 독자들의 동참에 호소하는 면이 있다. 그녀들에게 공감하거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낯설게 바라보거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삶의 부조리를 전하는 듯하다. 결혼에서 사랑보다 더 큰 가치를 믿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이나 지극히 일상적인 결혼의 과정을 가장 실감나게 그려낸 ‘홈드라마’에서 작가는 가볍고 발랄한 형식으로 그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그것도 깊은 여운과 생의 단면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없다는 치명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아직 시작뿐이라는 말로는 갈음하기 어려운 단조로움과 단단하지 문장 구성은 보완되리라 믿는다. 소설가를 등급 매길수 있다면 새로운 소설이 나오면 경우에 따라 선택해야겠다는 등급을 내린 소설가다. 그래도 여전히 신선하고 새로운 소재와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시선을 유지한다면 시간이 그녀의 소설을 말해 줄 것이다.


200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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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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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적 상상력의 부재이거나 인간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위해 작가들이 한번쯤 거쳐가는 통과의례가 역사적 사건이다. 소설과 역사는 많이 닮았다. 사실(fact)보다 진실(truth)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역사보다 소설을 본다. 허구적 세계에서 진실을 보다니! 하지만 역사는 승리자와 가진자의 논리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 대안으로 우리는 역사적 상상력과 그 곳에 숨어있는 진실찾기 게임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바로 인간 역사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아홉 편의 단편들이 모두 동일한 방식과 주제로 묶이지는 않지만, ‘뿌넝쇠(不能說)’를 비롯해서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등에서 보여주는 작가의식은 분명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기록된 역사의 오류를 우리는 진실이라 믿으려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것을 부정하고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말해질 수 없는 부분’에 대해 탐구한다.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거짓말이 들통나는 게 아니라 들통난 것들이 거짓말이 된다’는 조르주 뒤비의 말을 인용하며 작가는 그 의식의 단면을 드러낸다.

  인간의 역사는 모두 부정될 수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혹은 사관(史觀)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 가능한 역사를 소설로 풀어내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가져야할 당연한 문제의식인지도 모른다. 무론 김연수의 소설들은 선이 굵은 흐름을 짚어내거나 구태의연한 ‘가정법’을 쓰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한 영화를 만드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에 의해 여러 버전이 나오듯이, 김연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수많은 버전을 상상해내는 작가다.

  단순한 상상력의 차원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진실과 책속에 담겨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맹목적 믿음에 대한 거부가 작가의 믿음이다. 무엇이 진실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과 견해로 사실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 관점과 생각의 틀을 만들어 준 교육이나 이데올로기의 틀을, 관습적이고 맹목적인 사유 방식을 뒤짚는데서 김연수의 소설은 출발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작가를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하는 듯 싶다.

  이 소설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간 관계에 대한 소통 방식이다. 과연 인간은 소통 가능한 존재인가하는 질문에 답하는 대표적인 단편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묻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은 대부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단초가 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작가는 진지하게 묻는다. ‘의사 소통에 문제가 없습니까?’라고.

  의사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불신은 많은 작가들이 다루어 온 주제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간 관계의 ‘소통’이라는 말은 본질적인 이해와 믿음을 이야기한다. 오랜 시간과 자매라는 설정 속에서도 찾아지지 못하는 관계의 진정성이라면 낯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말이 필요없다. 타인에 대한 이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만다.

  이렇게 작가는 세계 인식에 대해 부정적이다. 김영하의 발랄함이나 김경욱의 죽음에 대한 관심, 정이현이나 박민규가 보여주는 현대 사회의 단면들 속에서도 유독 김연수의 작품에 주목하게 하는 요소는 바로 이 부정적 세계 인식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다. 하지만 확실한 대안과 정의는 물론 없다. 소설에 답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모두 독자의 몫일테니까.

  다만 이후 김연수가 보여주게 될 소설에 대한 관심과 미래는 밝아 보인다. 지독하고 철저한 독서에 의한 내용의 신뢰감과 소설적 상상력 또한 은근한 매력이며 단순한 현학취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깊이를 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속적인 내공이 쌓여 좋은 작품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2005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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