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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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는 문장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이 문장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며 암호를 풀기위한 키워드로 사용된다. 독특한 형식과 맛깔스런 내용의 소설 한편이 내게 왔다. 독일 작가 발터 뫼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 1, 2>는 추리 소설이자 환타지 소설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삶에 대한 통찰이나 미처 돌아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재미가 ‘상상력’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과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그런 면에서 충분히 만족스럽다.

  우선 이 책은 주인공인 공룡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모험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다. 대부시인인 단첼로트로부터 상속받은 책속에 끼워진 열장의 원고를 읽으면서 그의 모험은 시작된다. 린트부름을 떠나 차모니아 서부 둘스가르트에서 동쪽에 위치한 부흐하임에 도착한 주인공은 그 원고의 작가를 찾아나섰다가 고서점가의 검은 실력자 스마이크의 덫에 걸려 지하묘지에 버려진다. 외눈박이 책벌레들인 부흐링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주인공이 가죽동굴에서 ‘오름’을 하기 직전까지의 내용이 1권의 내용이다.

  바야흐로 우주 여행을 시대를 맞이해서 인류는 이제 공간에 대한 상상력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하늘과 바다속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차츰 미지와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땅 속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 19세기에 쥘베른의 <지구속 여행>이 발표된 후 21세기가 되었지만 땅 속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여전히 상상력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부흐하임의 지하묘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생물들과 끝없이 펼쳐진 서가들 그리고 그 서가에 꽂혀 살아숨쉬며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책들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공룡 미텐메츠가 아니라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가공의 작가와 책들이라고 볼 수 있다. 부흐링족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책에 대한 애정은 상상력으로 확장된다. 희귀하고 소중한 책들을 얻기 위해 지하묘지에서 암투를 벌이는 전설적인 책 사냥꾼 레겐샤인과 악의 축(?) 롱콩코마의 역할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조연의 역할을 한다. 선과 악의 축으로 인물 유형이 나뉘는 한계는 모험 소설의 기본 유형으로 단순함의 재미가 시작된다. 어설픈 교훈과 현실과의 연계성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모험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소설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들은 이미 오래된 책들 속에 쓰여 있습니다.”

  무심히 내뱉는 작가의 이 말 한디가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또다른 메시지는 아닐까 싶다. 우리는 거의 무한대로 쏟아지는 책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도서관과 대형 서점에서 책에 대한 중압감에 기가 질려본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지식의 총아로 볼 수 있는 책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면서도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1차원적인 재미과 흥분, 지적 호기심과 깨달음도 물론 책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일까?

  여로형 구조의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흥분과 기대, 알수 없는 원고 한편의 의미와 그 작가를 찾아 내는 과정속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상상속의 존재들과 공간들이 서사구조의 축이다. 주인공과 조력자, 악의 무리들과 해결과제가 뚜렷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쉽게 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끝을 보아야 손을 놓게 되는 부류의 책인 것이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분량 때문인지 몰라도 2권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점과 하드카바가 주는 부담감이다. 형식은 내용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풍스런 느낌과 켜켜이 먼지 앉은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특별한 책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에 삽입된 일러스트와 표지는 일체감을 떨어뜨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2권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 부흐링들의 ‘오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고 열장짜리 원고의 주인공과 의미를 밝혀내야하며 행방이 묘연한 레겐샤인과 그림자 제왕도 만나야한다. 그리고 지하묘지에서 부흐하임의 지상이나 린트부름으로 주인공이 살아돌아 올 수 있을지는 뻔하면서도 궁금하다. 기대감을 저버릴 수 없고 방법을 알기 위해 2권을 Т?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됐다. 찬바람이 불 때까지 현실밖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지? 본격적으로 소설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200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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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문학과지성 시인선 299
이성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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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발부리를 톡톡 차면서
  이미 알고 있는 답
  자꾸 묻는다 - <전문>

 이성미의 시들은 절제와 이미지의 변형에 대한 탐구로 요약할 수 있다. 젊은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정제된 언어와 변형된 이미지들이 조화를 이룬다. 표제 시인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는 한 때 유행하던 잠언식 아포리즘이 아니다. 일본의 하이쿠는 형식이 내용을 제약한다. 소네트나 시조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정형성은 사고의 틀을 규정한다. 한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나름의 미학을 가진다. 그것들은 일종의 기성품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변형의 미학이 없기 때문이다. ‘발부리로 톡톡 차’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많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길지 않은 진술 속에 담아 낸 시인의 표정이 지나치게 담담하다.

  시에 대한 논란과 애증은 독자들에게 가장 빈번하고 오래된 문제다. 즉물적인 태도로 시를 대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시가 싫다. 불편하고 어색하며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한 것이다. 무언가 융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특히 이성미의 시처럼 하나의 대상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을 비틀고 변형시킨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표면적인 언술만으로 시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쉽지만 어렵다. 그렇다고 유행가 가사의 행 배열만으로 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바리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나타나야 할 그는 오지 않았다
  타르 같은 애정을 내게 주던
  여자는 지칠 줄을 몰랐다.

  식물보다 식물을 닮은 단어를 사랑했고
  요리법과 안전 지침은
  아무리 들어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 ‘청춘’중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사소함으로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고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시들이 오히려 불편하다. 그것은 시의 본령이 아름다움이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육체가 만나 변증법적 결합을 이루듯 사물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안에서 재가공 되어 하나의 주관적 객체로 남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시인이 말하는 사물들과 불협화음을 내며 끼리끼리 부대낄 때 즐겁다.

  다만 주관에 매몰되어 언어 유희로 끝나버리는 겨우를 많이 본다. 그것에 대한 기준과 판단, 수용과 배제는 물론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객관적 이미지의 주관적 변용을 본다. 그녀의 첫시집을 주목한다.

  벽과 못

  녹슬고 굽어 바닥에 뒹굴기 전까지

  그림 하나 걸릴 수 있도록
  벽에 꼭 박혀 있어야겠다 - <전문>



200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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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 그린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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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가 시작되었고,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사람들은 참 많은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유일한 분야가 있다면 바로 교육 분야일 것이다. 지나치게 부정적 견해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가당찮은 기대는 아니더라도 선순환의 고리는 마련되어야 하지 않는가. 바야흐로 21세기에 접어들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21세기 타령을 하는 이유는 교육 문제에 관한한 우리는 아직도 19세기 초 현대 교육이 시작된 시절보다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아직도, 19세기 교육환경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유효한가?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를 교육의 3대 주체로 본다. 그들의 의식, 특히 기성세대인 학부모와 교사의 교육에 대한 입장과 틀이 다를 때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학생은 그 사이에서 훨씬 더 큰 혼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현실(?)을 고려하여 3자 합의(?)하에 ‘인류대 진학’이라는 지상 최대의 목표로 모두가 일로 매진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선행학습이 시작되고 영어와 수학만이 살길이며 문학은 입시 주요 과목으로 떠오른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을까?

  어느 블로그였는지 미니 홈피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자녀를 둔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이 졸업한 대학보다 당연히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 했으면 소박한(?) 바램을 적었고 이웃들은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댓글로 달아 놓은 걸 본 적이 있다. 그 후로 그곳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걸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무도 교육문제로부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입시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은 잔잔한 파문만을 일으킨다. 그것은 모두가 동참하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적으로 본다면 이제 서서히 그 파문이 물결이 되어 파도가 되고 해일이 되어 큰 물줄기를 바꿀 수 있기를 우리 모두는 바란다. 그러나 내가 먼저 실천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 정말 어려운 것은 실천의 문제다. 모두가 짐싸들고 시골로 산으로 들어가자는 주장이 아님을 안다.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들부터 바꾸자는 이야기다. 사소한 일이다. ‘인류대 강박증’ 벗어나기, ‘옆집 아줌마’ 조심하기, 삶의 목표와 과정을 다시 생각하기.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바꾼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힘이 합해지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교육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생태적인 삶을 살며 자연의 소중함을 깨우치기 보다는 노동 생산성의 관점에서 ‘인재’로 육성되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넣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앞서고 좀더 비싼 집과 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 인생의 성공이라는 달콤함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바램일까?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하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어디에도 답이 없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부제처럼 ‘엄마 아빠가 달라져야 교육이 살아요!!’는 처절한 절규처럼 들린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교육문제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삶의 가치관과 태도 지향점이 달라져야 하며, 노동과 환경 문제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가장 뜨거운 감자다. 내 아이의 문제가 되면 태도가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나는 개인의 자유나 개성이 억압되는 국가 발전이나 민족중흥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 본다.”는 강교수의 선언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발전이 사회와 국가의 발전이라는 평범한 진리는 노동과 생산수단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발전이라는 것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억압되지 않으면서 사회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방법이 쉽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개인은 공동체 발전의 전제가 되고 공동체는 개인 발전의 전제가 되는 사회, 이것이 바람직한 미래 사회일 것이다.”라는 말이 꼭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아닐까 싶다. 그런 교육을 위해 나는, 우리는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의 아이들을 그렇게 키울 수 있는가?

  “당신이 만약 ‘당신은 인재’라는 말을 들으면 모욕인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부모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게 이 책은, 교육문제에 관한 그 많은 선언들과 각론들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과 과격한 접근 방법을 선택했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게 했던 책이다. 질 높은 노동 생산수단의 관점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살아가는 과정의 행복과 삶의 질적인 측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왜 현실(?)을 핑계로 그렇게 키우지 못하는가? 나로부터의 혁명과 작은 것들로부터의 변화가 이렇게 어려운가? 내가 변하고 사회가 달라지면 교육도 아이들의 미래도 달라진다. 지금 우리가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인가?


200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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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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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혼에 대한 많은 선언과 이야기들은 이제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원히 그 주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다만 작가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것이라고 믿었던 고정관념들을 흔들어대기도 한다. 타성에 젖어버린 사랑에 대한 점검이고 삶의 방식에 대한 경고로 들리기도 하지만 작가는 말로 전할 수 없는 무엇을 전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코엘료의 문장이 지닌 매력은 여기에 있다.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 그것도 떠나버린 아내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괴로하는 과정을 통해 참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을 돌아본다는 3류 드라마같은 소설의 기본 골격은 한심스럽다. 물론 그것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가 중요하다. “한 번 만지거나 보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고, 우리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해 광기로 몰아가는 무엇, 자히르.(78페이지)”를 통해 독자에게 던져지는 메시지는 신기루처럼 명확하지 않다. 자히르의 존재를 아내 에스테르에게서 발견하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삶 전체를 뒤돌아보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사랑의 전도사 미하일을 매개로 아내의 위치와 아내의 자히르를 발견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는 수많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유는 책임의 부재가 아니라, 나에게 최선인 것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능력이기 때문이다.(35페이지)”라고 말하는 작가는 독자에게 선명한 주제도 끓어넘치는 감동도 선사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대로 믿는 존재니까.(73페이지)” 나머지는 독자에게 찾으라는 말인가?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와 감동이라는 고전적 명제를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게 <오 자히르>는 후자쪽에서 경미한 진동만 남긴채 책장을 덮게했다. 이를 테면,

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힘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통제하려 할 때, 그것은 우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두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려 할 때, 사랑은 우리를 방황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129페이지)

선로는 마치 내 결혼에 대해, 그리고 모든 결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했다.(169페이지)

가난뱅이는 댁이오! 당신은 자신의 시간을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도 없고,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규칙들을 따라야만 하잖아.(284페이지)

아코모다도르. ‘살다보면 어느 순간인가 한계에 도달하기 마련이다’(317페이지)

그리하여 지혜로운 페르시아 현자의 말대로, 사랑은 아무도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질병이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은 나으려고 애쓰지 않으며, 사랑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는다.(439페이지)

  이런 잠언류의 구절들은 평범에 바쳐지고 있다. 구체적 형상화와 주관적 변용은 케케묵은 문학의 이론이 아니라 소설가가 금과옥조로 지녀야할 기본적 소양이다. 그것이 의도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단순한 사건과 과정의 지루함으로 무려 4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소화할 수는 없다고 본다.

  사랑에 대한 정의와 방황을 보여주는 방식은 단속적이며 결혼과 아내의 사랑에 대해 보여주는 방식은 지루하다. 소설에서 감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진정성으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문화적 상대주의를 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결혼과 상대방에 대한 소홀함,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관계 - 이런 가장 보편적인 주제를 담아내는 데 코엘료는 일단 성공한듯 보인다. 그것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상황과 모순에서 비롯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보편적 인류애인 ‘사랑’에 근거하고 있어 더욱 애매하다. 전쟁을 이야기하고 사람들 사이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가장 친밀해야할 부부관계에서조차 ‘자히르’가 사라지는 상황.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 부분에 대해 작가는 진지한 고민과 궁극적인 고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저 그런 통속 소설일 뿐이다.

  고전이 될만큼 좋은 책들만 골라 읽는 것이 반드시 좋은 독서법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개인적 취향과 관심 분야까지 고려해서 선택의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법은 없을까?


200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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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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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있다. 죽거나 혹은 다치거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존재는 소멸한다고 믿는다. 관계와 접속을 통해서만 인간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김경욱의 소설은 인간의 그 ‘존재 형식’을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집요하거나 진지하지 않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건조한 문체가 매력적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정현종)”는 짧은 시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관계에 대한 불가해함 때문이다. ‘타인의 취향’을 알 수 없거나 무관심하며, ‘장국영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와 추억만으로 그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김경욱의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섬’의 존재 방식을 묻고 있다.

  동년배의 소설가가 쓴 책은 정서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으로 홍콩 느와르를 몰고 온 장국영과 주윤발 오천련과 장만옥, 장학우와 왕조현을 떠올려본다. 80년대와 지금 학생들이 달라진게 있다면 인터넷이다. 거미줄처럼 네트웍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전보다 훨씬 더 친밀해보이지만 관계는 피상적이다. 표제작인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이혼녀와의 채팅을 통해 같은 날 같은 극장에서 ‘아비정전’을 본 우연을 확인한다. 같은 날 결혼하고 제주도로 신혼 여행을 간 것도 일치한다. 독자들이 이혼한 주인공의 전처로 착각할만큼 우연은 일치한다. 하지만 가상 공간의 인연은 현실로 이어질 수 없으며 서로 다른 공간과 존재만을 확인한다. 장국영의 장례식에 검은 양복과 흰 마스크를 한 여러명의 사람들이 극장 앞에 모여 해프닝(?)을 벌이지만 그 행위 또한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익명성을 담보로 한다. 그것이 접속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존재 방식이다.

  이 외에 여덟 편의 단편은 ‘당신의 수상한 근황, 피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타인의 취향, 장미정원의 아름다운 원주민, 나가사키여 안녕’이다.

  ‘당신의 수상한 근황’에서 ‘삶이란 나약하고 낡아가는 일체의 것에 대해 잔혹하고 가차없는 그 무엇이라고 말한 사람은 독일사람 니체였다. 하지만 나약한 일체의 것에 잔혹하고 가차 없는 삶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는 인용방식을 취하고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인간의 탐구가 모든 소설의 주제라는 측면에서 김경욱의 소설들은 그 문법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으며 지나친 진지함과 무거움으로 독자들을 주눅들게 하지도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영화와 TV, 인터넷은 시대를 반영하는 매체다. 인간의 관계망에 포착된 의미들을 해석하는 데 동원되는 요소들은 피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소통 방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낯설지 않으며 잔뜩 폼잡지 않고 있다.

  낭만적 서사와 그 적들에서 보여주는,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들, 일테면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만 여자들은 사랑을 느낄 때 비로소 섹스를 원한다. 남자들에게 섹스는 사랑의 본론이지만 여자들에게 섹스는 사랑의 부록이다.”는 대학 동아리 낙서장에서 봤음직한 표현들이 유치하지 않게 느껴진다. 낭만적 서사를 지배하는 표현들이 모두 공감대와 보편성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죄 없이 사랑할 수 없는가”라고 말하는 주인공이 몰라서 묻고 있겠는가? 아니면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마누라와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로맨스와 진지한 대화.”라는 잠언같은 말들을 뱉어내는 상황들이 자조적이다. 경건함은 없지만 냉소도 없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바닥에서 건져올린 가벼움이 아니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지나간 이야기들에 대한 작가의 아쉬움과 곤혹스러움보다는 앞으로의 이야기에 주목하며 또 다른 방식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세대를 규정하는 것이 언어와 문화적 환경일 수만은 없지만 젊은 작가의 참신함이라고만 명명할 수 없는 새로움을 기다리는 것도 독자들의 몫이다.


200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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