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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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는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

도대체 일상사는 무엇을 다루는가? 이 물음을 염두에 두고 포이케르트는 일상사는 새로운 영역이라기보다 “새로운 전망”이라고 말한다. 전망, Perspective, 원근법, 즉 새로운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바로 “아래로부터의 역사(Geschichte von unten)”를 추구한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 400쪽

최근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일었던 교과서 문제는 많은 것은 시사한다. 정권의 부침에 따라 좌우되는 교육현실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니 자괴감을 가질 것도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차이보다 일제 식민지에 대한 관점, 이승만에 대한 평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시선이 당황스럽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쉼 없이 굴러가고 인간의 삶과 더불어 그 평가의 잣대로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점이나 실체적 진실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라는 것은 최소한의 합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명한 사실 확인과 그 사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풍부한 논의가 가능해야 역사는 살아 숨을 쉬게 된다. 박제된 역사는 빛을 잃기 마련이고 권력을 가진자들의 해석과 관점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변증법적 관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선으로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며 미래를 위한 이정표이다.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과 관심이 아니라면 거시적 안목으로 역사를 접근할 수밖에 없다. 왕조 중심, 정치와 권력 투쟁 중심의 역사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조금 다른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시적인 관점으로 시대를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하지만 일상사는 특정 시대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정치와 권력, 계급과 자본의 정점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일상사는 연대기식으로 서술되는 역사보다 살아 숨쉬는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며 사람 냄새나는 역사로 읽힌다.

<뮤직박스>라는 영화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이후에 <쉰들러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 <파이니스트> 같은 영화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같은 책을 통해 끊없이 재생산 되는 히틀러와 유대인 학살 문제를 들여다보지만 먼 나라의 역사에 대한 피상적인 해석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수백만 명을 학살한 인류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제노사이드(genocide)의 잔혹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이후 인류의 수적 팽창과 과학 기술의 발달보다도 사회의 계층구조, 계급의 충돌, 감시와 처벌, 규율과 욕망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인공인 나치와 히틀러에게 표를 던지고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불만을 표시하고 저항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고 있는 책이다. 대량 학살의 과정과 심리 분석,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우슈비치의 참상, 집단적 광기에 대한 분석과 해석 등 지금까지 수없이 다루어졌던 방식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책이다. 1982년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과거의 특정 시대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옮긴이의 해설에서 인용한(400쪽) 말은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가 가진 가장 큰 의미이다. 새로운 영역이 아닌 ‘새로운 전망’을 읽어 냈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또한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작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카프카의 말대로 이 책은 우리에게 도끼 같은 혹은 찬물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한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하위 50%를 작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안에서도 노조위원장이나 노조 간부들은 큰 사람들에 해당한다.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작은 사람들’에 주목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실의 모습이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언제까지 ‘빨갱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매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나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다. ‘아래’에 해당하는 ‘작은’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 행동과 실천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모른다.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역사는 오롯이 그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인 포이케르트는 노동자와 청소년의 일상에 주목한다. 비상사태에 처한 ‘일상’은 어떻게 다른 것이며 민족공동체를 내세운 총통과 나치의 주장이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특히 ‘청소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관한 세밀한 분석이 압권이다.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내부 보고서에서부터 저항 세력의 문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인용과 사례를 통해 독자들은 실제 그 시대를 살아냈던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 받을 수 있다. 나치 시대를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과 이야기들, 다양한 영화들, 소설들이 널려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지적 호기심이나 타인의 불행에 안도하는 태도로서의 접근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일상사는 나치 시대의 그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역사는 언제나 우리와 무관한 권력자, 가진자, 승리한 자의 기록일 수는 없다. 우리처럼 ‘작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현실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우리의 역사를 만든다. 토인비의 말대로 과거에서 무언가 조금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나치 시대의 일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올바른 역사 이해를 위해서는 사회와 정치구조를 겨냥하여 일반화하는 접근 방법과 일상의 모순을 담고 있는 경험을 겨냥하여 개별화하는 접근 방법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 - 93쪽


2011120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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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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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의미와 역할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소설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은 ‘재미’가 우선이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서사의 힘은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며 의미이다. 재미없는 소설도 있긴 하다. 근대 이후 앙드레 부르통에 의해 ‘초현실주의 선언’이 발표되면서 전통적 가치에 도전하고 굳은 틀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가 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사회와 역사적 발전 과정은 항상 새로운 형식과 기발한 상상력을 갈망했으며 그것은 모든 예술에도 통용되는 요구였다. 하지만 여전히 소설은 가장 대중적이고 쉽고 재미있는 갈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소설가들은 항상 낯선 이야기, 새로운 형식을 갈망하며 독자들 또한 미지의 세계를 갈망한다. 익숙한 세계에 대한 재발견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욕망은 상상력으로 채워지고 작가는 독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유혹한다. 인간의 내면적 갈등, 타인과의 관계, 세계와의 충돌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작가는 이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고민의 흔적을 토해내며 독자들과 함께 해결의 실마리를 성찰하게 된다. 결국 이야기는 끝없이 진화하고 발전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선행된다면 이 모든 이야기들의 문법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새로움은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다.

매일 벌어지는 문제 상황과 반복되는 갈등의 양상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역할이 소설의 몫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에게 정답을 요구할 수는 없어도 인간의 삶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은 우리들의 이야기,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태어나서 어떻게 살 것이며 인생은 무엇이고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요구가 없다면 소설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정유정의 『7년의 밤』은 다양한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소설에게 혹은 작가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7년의 밤』은 우선 강력한 서사의 힘을 지니고 있다.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사건의 해결과 반전 혹은 결말을 끝까지 파헤치게 만드는 힘있는 소설이라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소설이다. 전직 야구선수 출신 사형수 최현수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사건의 연결고리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사건이 벌어진 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사실’ 아닌 ‘진실’이 드러나고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충분하게 선사한다. 게다가 사형수의 아들과 그를 돕는 조력자이자 내부 이야기의 서술자인 승환의 관계, 치과 의사 오영제와 그의 아내와 딸의 관계는 세령호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갈등의 층위를 만들어내고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장편소설의 흡인력은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기도 하다.

서사의 힘과 남은 고민들

고양이는 천둥이 치기 전에 뇌에 자극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의 변연계에도 비슷한 감관이 하나 있다. 재앙의 전조를 감지하면 작동되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시계. - 정유정, 7년의밤, 18쪽

소설의 가장 고전적 숙제인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질문이 작가의 말의 제목이 되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소설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현수가 오영제의 딸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이 소설은 그 과정과 이후의 사건들을 정밀하게 추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앞 선 사건의 결과가 되고 뒤이은 사건의 원인이 되는 구성 때문에 독자의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소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서사의 힘이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듯하다.

표면상으로는 최현수의 이 소설의 중심이지만 그의 아들 서원과 오영제가 그리고 소설가 승환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서원과 동갑내기 오영제의 딸 세령이나 그의 아내 문하영, 최현수의 아내 강은주는 이야기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 최현수와 안승환 그리고 최서원의 캐릭터는 분명하고 설득력있게 그들의 행동과 사건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문제는 오영제다. 독특한 유형으로 이 소설의 재미를 불어넣는 인물 오영제의 성격과 행동에 설득력 있는 에피소드와 타당한 연결고리가 부족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왜’라는 질문을 여러 차례 하게 되는 것은 개별 독자의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아내와 딸에 대한 집착과 폭력을 묘사하는 부분이나 이후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 작은 아쉬움들을 상쇄할 만한 ‘재미’와 ‘흡인력’만으로도 이 소설은 작가의 오랜 준비와 치밀한 구성, 풍부한 상상력을 빛나게 한다. 스킨스쿠버, 댐의 운영방식, 수사과정 등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소설에 현실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 머지않아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추측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만하다.

인간이 가진 ‘불안’과 ‘공포’ 그리고 내면적인 ‘충동’과 ‘욕망’에 대한 깊은 성찰은 정유정이라는 작가를 주목하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이다. 천명관의 『고래』 이후에 서사의 힘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준 소설이지만 소설은 드라마의 대본이나 시나리오와 다른 문체과 스타일의 재미까지 갖추어야 한다. 문장과 표현이 빚어내는 분위기 언어가 갖는 보이지 않는 울림까지 보여줄 수 있다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개별 독자의 취향이겠으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그의 스타일대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일 수 있겠다.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총을 가지면 누군가를 쏘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천성이라고. - 정유정, 7년의 밤, 474쪽


2011112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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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도시의 인문학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5
김석철 지음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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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

건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집’이 거주의 목적을 넘어서는 데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르 코르뷔지에나 안도 다다오는 사적인 생활 영역인 ‘집’에서부터 그들의 건축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 조건이며 거주의 목적으로 지어진 ‘집’에서 출발한 건축은 다양한 목적으로 고유의 기능과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상상력을 실현가능한 현실로 바꾸었으며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유리로 된 반짝이는 건물은 물론이고 둥글고 세모난 모양도 가능하다. 다양한 건축재와 시공법의 발달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건물들은 점점 더 크고 화려해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건축은 실용적 유용성과 미적 기능이 충돌한다. 순수 음악이나 그림, 조각의 경우는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데까지 나아갈 수 있으나 건축은 ‘기능’ 측면에서 다른 예술과 구별된다. 비움으로써 가득 차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건축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닐까.

그릇과 마찬가지로 실용적 측면만 살펴보자면 우리는 비어있는 공간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건축에 관해서는 세 가지 관점이 필요하다.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기능이다. 얼마나 적절하게 공간을 분할하고 동선을 고려하고 있으며 실용적인가. 둘째는 예술성이다. 유사한 기능과 효용을 갖추고도 심미적인 측면에서 손색이 없어야 한다. 마지막은 주변 상황과의 어울림이다. 도시 한복판의 좁은 공간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공간인지 아니면 자연과 어우러진 곳에 지어질 것인지에 따라 목적과 기능이 달라진다. 그밖에 건축재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수많은 고려 사항이 더해진다.

하지만 결국 건축의 중심에는 ‘사람’이 놓여야 한다. 자산 가치나 기능적 측면만 고려한 건축은 끔찍한 재앙이다. 대한민국만의 특이하고 기형적인 주거문화인 ‘아파트’를 생각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나와 있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다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위대한 건축에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선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근대 이전의 역사적 건축물들이 신과 왕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인간을 그 중심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문학과 건축

그래서 건축에도 인문학이 필요하다. 건축이 예술로 인정받는 이유는 인간의 꿈과 철학, 미적 본능과 창조적 상상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어떤 분야라도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건축의 바탕에는 인간의 삶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아내야 한다. 건축가는 인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그들의 철학과 삶을 이해해야 한다.

김석철의 『건축과 도시의 인문학』은 한 눈에 독자를 사로잡는다. 인간과 인문학을 이해하고 있는 건축가의 이야기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이며 석학 인문 강좌의 강의 내용을 엮은 책이라서 알기 쉽게 건축과 인문학의 관계와 자신의 건축에 담긴 인문 정신을 잘 담아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김석철이 건축과 도시 계획에 대한 이력을 반복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나 그가 담아내려고 했던 각 개별 도시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과 목적은 인문학과 구체적인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건축가가 설계할 도시에 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도시’를 설계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제시하고 있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 할 만하지만 도시가 인간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지역과 목적에 따른 규모와 적정성에 대한 철학적 깊이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미디 운하같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수로가 없어서 도시는 현대화를 쉽게 이루었지만 농촌은 무너진 것입니다. 농촌이 살아 있지 않은 나라는 부강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탈리아는 물론 일본, 프랑스, 영국 등 부강한 나라들은 모두 농촌이 강합니다. 우리나라는 농촌을 구제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을 살리는 일이 4대강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 73쪽

문맥을 보면 운하가 없어서 농촌이 없다는 주장이며 농촌을 살리기 일이 4대강 사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운하 중심의 4대강 사업이 농촌을 살릴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러나 책의 뒷부분에서 4대강 전체를 하나의 뱃길로 오르내릴 수 있는 운하를 만드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4대강 사업이 운하 중심인가 아닌가, 4대강 사업이 농촌을 살리는 일에 얼만큼 영향을 미치는가, 농촌과 운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정치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못해 아쉽다.

이 책의 전체 구성은 고대, 중세,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지식산업사회, 한반도 등 크게 다섯 번의 강의 내용을 순서대로 엮고 있다. 예술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식과 건축가의 경험이 함께 어우러져 알기 쉽게 설명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흐름이 없어 아쉽고 건축과 인문학에 대한 건축가의 확고한 철학이나 일관된 사유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 지속가능한 발전과 친환경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패러다임이 필요한 이유와 인간의 삶과 건축이 맺고 있는 필연성에 대한 폭넓은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2011112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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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중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
홍정선.강계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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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또 다시 100권이 쌓였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은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출발했다. 1990년 100권 째 기념으로 나온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를 감격스럽게 읽었던 기억이 새로운데 벌써 1997년에 200권 『시야 너 아니냐』에 이어 2005년에 300권 『쨍한 사랑 노래』 그리고 2011년 400권 『내 생의 중력』을 읽었다. 다른 어떤 느낌보다도 켜켜이 세월이 쌓이고 생은 저물어 가고 또 다른 생명이 피어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어렴풋한 감흥. 신비롭고 기묘한 생의 감각.

시인과 비평가가 걸러낸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지난 6년간의 시간이 그 이전 100권의 단위처럼 엮였다. 불연속적인 시간을 분절적으로 사용하고 돌아보고 성찰하는 인간의 습성.

광휘의 속삭임

저녁 어스름 때
하루가 끝나가는 저
시간의 움직임의
광휘,
없는 게 없어서
쓸씀함도 씨앗들도
따로따로 한 우주인,
(광휘 중의 광휘인)
그 움직임에
시가 끼어들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의 외로움을
남몰래 이쪽 눈물로 적실 때
그 스며드는 것이 혹시 시일까.
(외로움과 눈물의 광휘여)

그동안의 발자국들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이 땅속
거기 어디 시는 가슴을 묻을 수 있을까.
(그림자와 가슴의 광휘!)

그동안의 숨결들
고스란히 퍼지고 바람 부는 하늘가
거기 어디서 시는 숨 쉴 수 있을까.
(숨결과 바람의 광휘여)
- 정현종, 『광휘의 속삭임』(352)에서


대가의 숨결과 노련한 솜씨가 자연과 인간과 시간의 비밀을 벗겨 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들춰내기도 한다. 내 안의 숨은 그림자와 타인과의 관계를 끝없는 기다림으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358)에서


무언가 기다릴 것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삶의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조금씩, 꼭 그만큼씩 사라져 가는 어제와 오늘이 아니라 멀어진 거리만큼 다가오고야마는 미래의 시간들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비밀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는 생의 이면일 수도.

알 수 없어요

내가 멍하니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내가 생각에 빠져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왜 그리 멍하니 있느냐고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다 보니
바다,
바닷가를 헤매다 보니
내 좁은 방.
- 황인숙, 『리스본行 야간열차』(341)에서

의미와 무의미,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물과 불, 산과 강. 언어의 반대편 혹은 모순을 들여다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을 들여다보라. 거기에 시가 찾는 진실이 숨어 있다. 아니, 인간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아버리는 검은 그림자가.

모순 1

삶의 갈래
그 갈래 속의 수렁
무수하다

손과 발은 열 길을 달려가고
정수리로 치솟은 검은 덤불은
수만 길로 뻗는다
끝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지 못한 진창에서는
바글바글 애벌레가 기어오른다

봄꽃들 탈골한 길로
단풍 길 쏟아진다

손가락마다 지문을 새겨 살아도
내 몫이 아닌 흙이여
- 조 은, 『생의 빛살』(374)에서


목소리 높여 옳고 그름을 외치고 적당한 거리와 시선이 만들어낸 착각을 믿으며 달콤한 합리화로 밀어붙이는 힘! 파리는 늘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죽을 놈과 살 놈을 구별하지도 못한 채.

파리

꿈은 늘 제자리에서 맴돈다
적당한 거리와 시선이 만들어낸 착각에
세상은 떠 있다
밥상머리에 달라붙은 파리들은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자유로운 어둠을 뚫고 생겨난 생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파리채를 들고 가까이 가자
죽을 놈과 살 놈이 구별되지 않았다
- 조인선, 『노래』(378)에서

그리하여 머나먼 지구별로의 여행자들은 ‘당신’에게 고백한다. ‘사랑하는 당신께’.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라고,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라고. 내가 당신의 텍스트가 아니라 당신이 나의 텍스트가 아니라 이렇게 네모난 시 안에서 당신과 나와 텍스트가 뒤섞이듯이 혼란스럽게 컨텍스트를 외면한 채 끝없이 나와 당신과 텍스트가 꼬리를 물고 텍스트는 텍스트라고.

당신의 텍스트 1
- 사랑하는 당신께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나
나의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당신
텍스트의 당신은 텍스트의 나
당신의 나는 텍스트의 텍스트
텍스트의 나는 텍스트의 당신
당신의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당신은 텍스트의 텍스트
-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349)에서



2011112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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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1-11-2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300권째 나온 쨍한 사랑 노래를 산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책꽂이 한켠에 놓여있겠군요.

sceptic 2011-11-26 20:58   좋아요 0 | URL
시 읽는 즐거움 오래오래 함께 하세요.
 
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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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와 제목은 독자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이미 알고 있는 작가가 아닌 경우 표지 디자인과 제목, 편집과 분량은 책을 선택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책의 목적과 방향을 적절하게 드러내거나 내용을 적절하게 압축한 제목은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은 진리는 아니겠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로 깊은 인상을 남긴 김이설의 장편소설 『환영』의 표지를 본 순간 소설의 제목과 내용과 표지를 한동안 음미했다. 과연 무슨 이야기를 풀어낼 것인가. ‘오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는다는 의미의 환영(歡迎)인가 아니면 신기루 같은 환영(幻影)을 의미하는 걸까.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2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의 하드커버의 포장이다. 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허다한 일본 소설류에 손이 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 그릇에 담겨 있어 마땅찮다.

소설이라는 갈래 자체가 인간의 삶에 대한 비루한 일상을 바탕으로 한다고 전제하면 얼마나 재미있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인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남루함, 드러내고 싶지 않은 슬픔, 포기하고 싶지 않은 희망,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들이 길게 나열되는 소설을 대할 때마다 독자들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주 오래된, 국어시간에 한번쯤 들어보았을 감정이입이나 카타르시스는 문학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어떤 형태로든 소설은 그 한없이 재생산되는 이야기의 이야기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삶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되는 것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김이설의 소설이 또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알 수 없고, 또 어떤 이야기들을 더 담아낼지 모르겠으나 칙릿(Chick Lit)과 거리가 먼 진정성을 담아내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나름의 독특한 문체와 개성을 갖춰 나간다는 것은 자신만의 나름의 영역을 구축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김이설의 개성 혹은 색깔은 어떤 것일까.

서른셋의 서윤영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남편과 고시원에서 만나 아이를 갖고 옥탑방에서 함께 살기로 한다.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남편을 위해 도시의 경계를 넘어 물가의 백숙집에서 일을 하게 된다. 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무능했던 아버지와 가난한 어머니 동생 민영과 준영 모두 윤영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고 기대는 존재들이다. 마치 불행 종합선물세트를 완벽하게 갖춘 것 같은 주인공은 ‘여성’이다. 딸이고 언니이며 누나이고 아내이고 며느리이며 엄마인 윤영이 위태롭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을 때마다 삶은 신산스럽게 부서진다.

왕사장과 아들 태민 그리고 함께 일하는 이모님과 언니를 둘러싼 일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 독자들 입장에서 삶을 왜 고해(苦海)라고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간접 경험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특별한 소설이 될 수 있겠다. 공감의 끄덕임, 동정의 눈물, 안도의 한숨 – 그것이 무엇이든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하고 투명한 바닥을 들여다 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알 수 없는 생의 비밀을 궁금해 한다. 누가 말해 줄 수 있는지 모르지만 교회와 절로 때로는 무당을 찾아 답답함을 풀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알고 싶은 욕망과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생을 대하는 태도와 열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불가해함. 그 비밀의 문을 열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닐까. 삶에 지쳐 문득,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거나 빗방울이 후드득 소리를 내는 순간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닐까.

김이설의 『환영』은 현실을 바라보는 겹눈처럼 다양하게 읽힌다. 경계를 넘을 때마다 우리를 반기는 ‘어서오세요’처럼 읽힐 때도 있고, 현실은 결국 환영(幻影)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다만 그 조건과 상황 그리고 태도에 대해서는 쉽게 말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이 순환 구조인 것 같은 구성은 뫼비우스처럼 우리의 생이 반복되기 때문이 아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우울한 샹송 같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삶의 허무주의가 아닌 아주 작은 ‘시작’과 ‘희망’의 불씨를 조금 아주 조금씩만 보여주는 소설을 기다려 볼 참이다.


2011112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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