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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 개마고원신서 33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개마고원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일상사는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
도대체 일상사는 무엇을 다루는가? 이 물음을 염두에 두고 포이케르트는 일상사는 새로운 영역이라기보다 “새로운 전망”이라고 말한다. 전망, Perspective, 원근법, 즉 새로운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바로 “아래로부터의 역사(Geschichte von unten)”를 추구한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 400쪽
최근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일었던 교과서 문제는 많은 것은 시사한다. 정권의 부침에 따라 좌우되는 교육현실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니 자괴감을 가질 것도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차이보다 일제 식민지에 대한 관점, 이승만에 대한 평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시선이 당황스럽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쉼 없이 굴러가고 인간의 삶과 더불어 그 평가의 잣대로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점이나 실체적 진실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라는 것은 최소한의 합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명한 사실 확인과 그 사실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풍부한 논의가 가능해야 역사는 살아 숨을 쉬게 된다. 박제된 역사는 빛을 잃기 마련이고 권력을 가진자들의 해석과 관점은 언제나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변증법적 관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선으로 현재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며 미래를 위한 이정표이다.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과 관심이 아니라면 거시적 안목으로 역사를 접근할 수밖에 없다. 왕조 중심, 정치와 권력 투쟁 중심의 역사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조금 다른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시적인 관점으로 시대를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하지만 일상사는 특정 시대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정치와 권력, 계급과 자본의 정점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일상사는 연대기식으로 서술되는 역사보다 살아 숨쉬는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며 사람 냄새나는 역사로 읽힌다.
<뮤직박스>라는 영화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이후에 <쉰들러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 <파이니스트> 같은 영화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같은 책을 통해 끊없이 재생산 되는 히틀러와 유대인 학살 문제를 들여다보지만 먼 나라의 역사에 대한 피상적인 해석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수백만 명을 학살한 인류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제노사이드(genocide)의 잔혹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이후 인류의 수적 팽창과 과학 기술의 발달보다도 사회의 계층구조, 계급의 충돌, 감시와 처벌, 규율과 욕망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인공인 나치와 히틀러에게 표를 던지고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불만을 표시하고 저항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고 있는 책이다. 대량 학살의 과정과 심리 분석, 유대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우슈비치의 참상, 집단적 광기에 대한 분석과 해석 등 지금까지 수없이 다루어졌던 방식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책이다. 1982년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과거의 특정 시대와 사건에 대한 해석을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옮긴이의 해설에서 인용한(400쪽) 말은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가 가진 가장 큰 의미이다. 새로운 영역이 아닌 ‘새로운 전망’을 읽어 냈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또한 ‘아래로부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작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카프카의 말대로 이 책은 우리에게 도끼 같은 혹은 찬물 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한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하위 50%를 작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안에서도 노조위원장이나 노조 간부들은 큰 사람들에 해당한다.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작은 사람들’에 주목하며 이 책을 읽는다면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실의 모습이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 언제까지 ‘빨갱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매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나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다. ‘아래’에 해당하는 ‘작은’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 행동과 실천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모른다.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역사는 오롯이 그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인 포이케르트는 노동자와 청소년의 일상에 주목한다. 비상사태에 처한 ‘일상’은 어떻게 다른 것이며 민족공동체를 내세운 총통과 나치의 주장이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특히 ‘청소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관한 세밀한 분석이 압권이다.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내부 보고서에서부터 저항 세력의 문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인용과 사례를 통해 독자들은 실제 그 시대를 살아냈던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 받을 수 있다. 나치 시대를 바라보는 수많은 관점과 이야기들, 다양한 영화들, 소설들이 널려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지적 호기심이나 타인의 불행에 안도하는 태도로서의 접근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일상사는 나치 시대의 그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를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역사는 언제나 우리와 무관한 권력자, 가진자, 승리한 자의 기록일 수는 없다. 우리처럼 ‘작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현실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우리의 역사를 만든다. 토인비의 말대로 과거에서 무언가 조금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나치 시대의 일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올바른 역사 이해를 위해서는 사회와 정치구조를 겨냥하여 일반화하는 접근 방법과 일상의 모순을 담고 있는 경험을 겨냥하여 개별화하는 접근 방법 모두를 포기할 수 없다. - 93쪽
2011120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