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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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적 차이와 편향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엄밀한 제한 이론으로 외삽(外揷)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 79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던 숫자 세 개를 기억한다. 마치 노비문서처럼 따라다니던 IQ지수가 그것이다. 전교 1, 2등이었던 동생은 언제나 자신은 머리가 좋지 않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동생도 자신의 IQ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머리가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지능지수(IQ)는 비네 척도를 거쳐 1912년 독일의 심리학자 슈테른에 의해 탄생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다중지능이론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지능을 8가지로 제시하지만 그의 분류법에 따르더라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머리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학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이것은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 중 일부만을 평가하는 편협한 시각이다. 다른 지능이나 영역에 대한 능력은 대학 입학 시험이나 객관화할 수 있는 각종 시험에서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하물며 피부색과 인종에 따른 능력 차이는 어떤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각인된 인종적, 민족적 편견은 뿌리 깊다. 이것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The Mismeasure of Man에서 이 책은 역사적 관점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의 주요 주제, 즉 지능을 하나의 양()으로 측정해서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에 대한 반론이다.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은 외롭고 지루했으리라. 과학과 이론의 잣대를 들이밀며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잘못되었다고 외쳐야했던 저자의 노력은 한 권의 위대한 저서를 남긴 것이다. 1981년에 나온 이 책은 우생학과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의 기원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얼만큼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관점에서 출발했는지, 잘못된 실험 결과와 통계의 주관적 조작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것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파악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편견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지적하고 있다.

 

과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이성의 시대, 과학적 세계관이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주리라는 장밋빛 전망은 믿어도 좋은 것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법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규정과 질서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그것을 다루는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얼마든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다양한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두려워졌다.

 

흑인과 인디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무모한 노력, 머리의 크기가 인간의 지능을 좌우한다는 폴 브로카의 전성시대, 미국의 발명품인 IQ 등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무수한 오류와 잘못된 신념을 바로잡는데 저자는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지켜져야 할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권력자와 정치가들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듯이 과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불합리한 결정과 편견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확인 하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슬픔으로 가득한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백기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 다수결은 아니다. 8:1이라고 해서 8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모여 의사결정을 할 때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좇는다는 원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조직 내에서 혹은 국가 차원에서 지켜야하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조차 배제한 채 일부의 의견이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다수를 호도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같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면 과학을 앞세운 편견이 판을 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양성을 부정하며 혁신의 가치를 내세워 희생을 강요하고 기본권을 억압하는 사태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반대편의 그 사람들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나름의 논리가 있고 진심이 있으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방법과 태도, 근원적인 바탕은 저마다 다르다. 니콜라스 카는 조금 색다른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인종적 편견이나 피부색, 종교, 출신 고향, 학벌, 국적이 아니라 인터넷이 놓여 있다.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꾼다는 저자의 주장은 체계적으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두 가지다. ‘문자인터넷이다. 문자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펴보는 과정은 마치 인터넷이 얼마큼 우리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지 말해주는 듯하다.

 

수세기 동안 종이 인쇄물을 통해 이루어지던 개인적인 독서에 갇혀 고립되고 해체되어 있던 우리의 자아는, 부족 마을과 같은 전 지구적인 공동체로 통합되면서 다시 하나가 되고 있다. - 6

 

구글goole이 구골googol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0100제곱. 그 원대한 꿈과 희망이 이제 우주로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인터넷에서 하이퍼텍스트를 읽는 패턴 때문에 책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화되고 있다.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네.’(213)라는 새무엘 존슨의 말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듯하다. 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일까.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고민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네크워크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완곡한 저자의 비난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비난이 아니라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해도 현실과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나칠까.

생각한다는 것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행위이다. 오늘 저녁 먹을 메뉴를 고르거나 어떤 핸드폰을 살까 생각하는 것만이 생각의 전부가 아니다. 생각하며 살자. 나부터. 생각하지 않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작은 다짐을 하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이다. 점점 더 빠르게 인테넷 환경을 숙명처럼 활용해야 하는 세대에게 책은 점점 멀어지고 스마트한 생각을 대신 해주는 폰은 언제나 장기의 일부처럼 손 끝에 매달려 있다.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는 책과 같은 문서를 읽을 때와는 아주 다른 형태의 뇌활동을 보여줌을 발견했다. 책을 읽는 이들은 언어, 기억, 시각적 처리 등과 관련된 전전두 부분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다. 반면 숙련된 인터넷 사용자의 경우는 웹 페이지를 보고 검색할 때 이 전전두 부분 전반에 걸쳐 집중적인 활성화를 나타냈다. - 182

 

 

141221-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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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모순이란,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신호입니다. - 1, 19

 

다만, 비율의 문제일 뿐 사람은 이성과 감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태도를 보일 뿐이다. 물론 같은 일을 해도 일을 하는 방식에 차이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나 의견을 모아야 하는 일은 합리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생각을 조율하고 거기에 감정적 판단까지 끼어들 때 당신이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 공동체 전체의 발전? 그 둘이 상충한다면?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다름 아닌 우리가 남이가’ ‘가족 같은등등의 구호를 내세우는 인정에 호소하는 오류에서 비롯된다. 세상 일이 어찌 칼로 자르듯 처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기본적인 태도와 기준조차 세워지지 않은 채 인간관계에 따라 처리하거나 어떤 일인가가 아니라 누군가에 따라 달라진다면 어떨까. 분위기 좋고 화기애애하다는 명목아래 갈등이 없는 조직 같지만 사람들이 가진 생각은 제각각이다. 말하지 않을 뿐 목소리 큰 몇몇 인간들이 떠드는 소리를 외면하거나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까 조심스러워할 뿐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을 하겠다는 뜻이다. 나를 변화시키겠다는 의미다. 남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경우 갑질에 익숙하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도통 인정하기 힘든 집단이다. 기본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 집단이기 때문일까. 하늘에 대고 침을 뱉는 겪이지만 소일 삼아 소설 몇 권을 뒤적이며 일 년을 보내는 교사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탁석산의 달려라 논리는 교사들이 먼저 읽어야 하는 책이다. 알기 쉽게 든 예문들은 모두 부모와 아이들,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 매일 벌어질만한 상황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며(그것은 물론 학생과 학부모가 저지르는 경우가 더 많지만) 학생들에게 궤변을 늘어놓거나 부정확한 판단력을 정답처럼 이야기하는지 나부터 반성한다. 개인적인 취향과 가치관을 옳은 것처럼 강요하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생각을 열어주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끊임없이 읽고 생각하고 공부해야 한다.

 

170~190쪽 남짓 3권으로 나눈 이유는 딱딱한 논리에 대한 포장이다. 분량을 덜어주고 일러스트를 삽입하고 일기와 대화를 통해 상황을 이해하기 쉽도록 배려했다. 오류를 설명하고 논증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서양 철학사를 암기하는 대신 이 책으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학교 교육의 바탕을 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교사들도.

 

의사소통이란 결국 서로 논증을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1, 145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거나 듣고도 왜곡하거나 합리적 논거를 살필 수 없다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의사소통은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연인 사이가 아니라면 결국 서로 논증을 주고받는 것이란 사실을 외면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사실 대부분의 대화, 일처리, 문제해결, 의사도소통의 바탕에는 논증이 필수다. 공식적인 회의, 업무상 주고받는 메일, 논술 평가 등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글을 쓴다. “글을 쓰는 데는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으로 꾸며 주느냐보다 얼마나 탄탄한 논증이 토대를 이루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라고 저자의 말을 새겨 듣자. 논증이 무소불위의 해결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과정에서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 114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남에게는 관용의 원칙을 적용하면서 좋은 논증을 향해 나아가자. - 3, 175

 

가장 비논리적인 책이 시집이다. 정교하고 논리적인 언어의 결합체인 시가 비논리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막걸리냐고 화를 낼 시인도 있겠으나 내가 시를 읽는 이유는 마음밭에 울타리를 걷고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내려놓고 시선을 돌리는 일이다. 간만에 읽는 손택수 시인의 시들이 반갑다. 익숙했던 시인들과 낯선 시인들의 시집을 뒤적이는 일처럼 남은 일은 익숙한 일들과 낯선 일들 사이에 조금 더 분명하게 경계를 세우는 일이다. 그 경계가 모호해질 즈음 또 다른 경계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에서 한 편을 옮겨 적는다.

 

수묵의 사랑

 

수묵은 번진다

너와 나를 이으며,

누군들 수묵의 생을 살고 싶지 않았을까만

번짐에는 망설임이 있다

주저함이 있다

네가 곧 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

경계를 넘어가면서도 수묵은

숫저운 성격, 물과 몸을 섞던

첫마음 그대로 저를 풀어헤치긴 하였으나

이대로 굳어질 순 없지

설렘을 잃어버릴 순 없지

부끄러움을 잃지 않고 희부연히 가릴 줄 아는,

그로부터 아득함이 생겼다면 어떨까

아주 와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빛깔,

한 몸이 되어서도 까마득

먹향을 품은 그대로 술렁이고 있는

수묵은 번진다 더듬

더듬 몇백년째 네게로

가고 있는 중이다

 

141214-12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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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구 맞아? - 청소년을 위한 관계의 심리학 창비청소년문고 12
이남석 지음 / 창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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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르기아스의 매듭을 자른 알렉산터 대왕처럼 단칼에 잘라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얽힌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것이다. 칼로 잘라 버리는 게 쉬워 보이겠지만 다시 돌이킬 마음이 없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점에서 의지력이 약한 사람에게는 아주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실타래를 확 집어 던지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고통을 감내할 용기도 있어야 한다.” - 106

 

관계적 공격relational aggression이란 관계나 우정, 소속감을 훼손하거나 훼손하겠다고 위협하며 남을 공격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공격 대상을 집단으로 따돌리거나 무관심, 침묵으로 일관한다. 악의 있는 소문을 퍼뜨리거나 상처를 주고서 농담이나 장난이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관계적 공격은 신체적 공격과 달리 매우 심리적이다. 공격받은 사람은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거나 우울증과 무력감 혹은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가해자는 그것이 관계적 공격이 아니라 피해자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는 청소년기의 또래 집단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성향이 아니라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당신은 관계적 공격자가 아닌가?

 

우정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심리적 관계 양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피를 나눈 사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족은 물론이고 이해관계를 떠나 유년시절에 맺었던 친구 사이, 성장 후에 맺은 각종 친목 모임과 조직에서의 관계, 직장 동료, 동네 이웃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맺는 인간관계는 무한하다. 그러나 일상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별로 많지 않다. 아무리 발이 넓은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편안하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5~6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해관계를 떠나 신뢰 관계가 형성되기란 부부의 인연을 맺는 것보다 힘들다. 보이지 않는 갈등과 손익계산에 따라 머릿속에서 두드리는 계산기의 결과에 따라 사람들은 원근을 조절하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관계는 시간이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 된 관계일수록 신뢰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면 타인을 조금 더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첫 눈에 반해버린 이성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제외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우정, 친구, 멘토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관계나 감정은 단기간에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24시간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시대에 우정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며 친구의 범위와 한계로 다시 설정해야 한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고 매일 마주치는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받아야하는 상황을 한번쯤은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이남석은 우리 친구 맞아?라고 확인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인 관계의 심리학이지만 읽다보니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나의 문제일수도 있으나 그 잣대로 타인을 평가해 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친구와 우정은 전부일 수 있다. 이남석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청소년기의 관계를 톺아본다. 스토리텔링은 흥미를 유발하며 읽는 재미를 준다. 설흔의 우정 지속의 법칙이 우정의 의미와 방법론에 방점을 두었다면 이남석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뻔한 이야기로 우정의 의미를 살피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설교하는 게 아니라 자아 정체성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관계 양상을 주문한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은 평생 살아가면서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다. 하지만 그 모든 관계를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헤쳐 나가라고 할 수만은 없다. 친구와 이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버림받았다고 울부짖는 사람이 겪는 감정의 착각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대목이 이채롭다.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몸문화연구소의 내 친구를 찾습니다는 관계 자체에 집중한다. 연애, 우정, 스마트폰과 SNS, 나와 나의 관계, 가족, 어른과 권위, 연예인 팬덤, 관계중독, 멘토링에 대해 아홉명의 멘토가 나섰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청소년에게 의미있고 깊이있는 대화를 시도한다. 여기서 인문학적 관점이란 우리가 맺는 관계의 근본원인과 사회적 의미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우리가 맺어야하는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과 사회적 의미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환경적 차이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기대, 롤모델로 삼은 사람, 사회적 평가, 직업과 집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사회문화적 토대의 다양성이 관계를 만든다.

 

우리는 소통나눔배려의 가치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부정하긴 힘들다. 그러나 이제 관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등 매일매일 관계를 맺고 정보를 나누는데도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면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라. 그리고 다시 한 번 겉과 속을 뒤집어 보자.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라는 수많은 꼰대들의 외침을 들어야할 지도 모른다. 강신주를 비롯한 18명의 꼰대스럽지 않은 꼰대들이 10대들에게 던지는 후회할 거야는 본인들의 후회를 버무려 놓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스탠다드한(?) 성공의 길이 아니라 진짜(?)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감히 그들에게 후회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다만 그들보다 아주 조금 먼저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색다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은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겐 뻔한 멘토링이 아니라 현실적인 잔소리가 필요하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은 없다. 살아보지 않고 세상을 속단할 수도 없다. 만나보지 않고서는 인간에 대해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생은 여전히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 때문에 비록 인생이 어그러질지라도 말이다.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은 미국 대공황 시절의 어둠을 배경으로 친구와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영특함과 미련함, 거대함과 왜소함 등 서로 상반된 모습의 친구 레니와 조지는 가난불안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울한 현실이냐 우정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이분법적 신파가 아니다.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현실보다 우정의 깊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해공감이다. 그것은 나의 관점이 아니라 타인의 관점이 우선이다. 내가 옳다, 우정은 이것이다, 이 가치가 우선이다, 이래야 한다, 너는 틀렸다, 는 너의 논리가 나는 제일 무섭다. 우정은 너를 고쳐주겠다는 배려도 아니고 너의 생각에 공감하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는 고집도 아니고 나와 같은 목적과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똘레랑스가 우정이다. ‘생쥐와 인간은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도전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141207-11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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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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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은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대상을 재배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모호한 심적 멜랑콜리가 아니라 대상을 명확히 밝혀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경건한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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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톰프슨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 태어나고, 자신의 고통 속에 죽어간다.’ 에드워드 영은 말했다.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뇨? 그저 울부짖을 뿐 아예 태어나지 말 것을, 태어났으니 얼른 죽을 것을.’ 블라디미르 나보고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단지 영원이라는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다.’ - 27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쉼 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며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적인 삶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경쟁하고 욕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들은 한담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삶의 절대 조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할 때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넬지도 모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는 비관적 태도를 보였을까. 하루하루 견뎌내는 일이 힘겨울 때도 있고 가슴 벅찬 환희로 영원히 살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삶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 가지 사연 속에서 우리는 매일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하지만 당장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데이비드 실즈는 너무 당연해서 웃음이 나올 법한 제목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외면할 뿐.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죽은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실즈는 97세 되신 아버지와 오십이 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한다. 10대 딸을 둔 가장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둔 아들로 삶의 한 복판에서 선 저자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다.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텔링한다. 어렵지도 난해하지도 않지만 결코 감상에 치우친 에세이나 낭만적 자기고백은 아니다.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태도가 반드시 진지할 필요는 없다. 미국식(?) 글쓰기 특유의 유머와 편안한 입담이 즐겁지만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는 동안 저자 자신은 아마도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독자들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다른 방식의 자신의 삶을 성찰하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지 못한 책이다. 편안한 서술, 가독성 있는 문장, 간간이 섞여 있는 금언들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지만 선뜻 추천할 만하다고 하기엔 2% 부족하다. 그것은 평범한 저자의 삶에 대한 자기고백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고 한 유년기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과정에 대한 지루함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나서 느껴야 하는 울림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의 간섭현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시 한 권의 책을 더 펼쳤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한 사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죽음의 사회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 한 그 느낌이다. 내가 없어도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이 세상 전부가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는구나 하는 그 느낌.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특수성은 수명, 체험, 구조적 경험적 특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화로 요약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죽음은 한 마디로 고독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삶은 또한 고독이 아닌가.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건강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예전 세대는 인간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의 일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문제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삶에서 고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삶이 고독인데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니. 아니 어쩌면 삶이 고독이었으니 죽음이라도 고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일까.

 

오늘날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 92

 

사회, 문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의 생각도 달라진다. 하물며 예술은 어떠하겠는가. 루이스 멈퍼드는 고도의 기술 발전의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예술과 기술은 그렇게 우리 시대를 간파한다. 우리는 재미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재미는 수많은 충격과 모순과 비극적 역설에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그러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술과 기술의 상관관계가 아니다.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시대를 넘어 이제 예술과 기술의 영역이 분리된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한 분야에서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은 생활과 기술이 곧 예술의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예술 작품을 보고 미적 충격을 받거나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오히려 현란한 인간의 기술이다. 그것이 몸으로 체득된 것이든 기술로 구현된 것이든 말이다. 백남준처럼 기술적 토대가 없으면 예술 자체가 불가능해진 미디어 아트 시대에 멈퍼드의 예술에 관한 관점과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물적 토대가 신앙이 되어버린 시대에 유기체와 인격 전체를 향한 관심의 촉구로 읽힌다.

 

기계의 무력한 동반자나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는 대신 상실한 개성을 찾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예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정되며, 전쟁이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지 말고 멈퍼드처럼 예술은 고양되고 상상력은 강화되며 평화는 모든 나라를 지배합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우리의 눈만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혹사당하는 귀에 대해 살펴보려면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를 천천히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은 음악 애호가를 위한 감상능력 배양 프로젝트가 아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한슬리크는 음악이 절대 감정 미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할애한다. 음악에 내용이 있느냐는 논쟁으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시작부터 음악에서 감정을 걷어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여기서 음악은 클래식에 해당한다. 가사는 음악이 아니다. 대중가요가 주는 감동과 눈물에만 익숙하다면 한슬리크의 책은 집어던지게 된다.

 

하지만 음악적 아름다움은 형식미학에서 출발한다는 한슬리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음악에서 화성, 리듬 등에 대한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막귀에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 한슬리크의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다.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어놓고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던 감동을 잊지 못하는 것은 20대의 감수성 때문이지 렌트카의 음질이나 바흐의 음악적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눈멀과 귀멀어 사는 헛똑똑이들의 관심사는 몇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닐까. 심봉사 지팡이를 더듬듯 보이지 않는 곳을 두드리며 손 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더듬으며 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젠가 죽을 테니까.

 

 

141130-1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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