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문학을 즐기는 방법 - 구글 지도와 유투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문학에 적용해 보자. 공간은 사건에 선행한다. 작가는 가상공간에 인물과 사건을 배열하기도 하고,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을 창조하고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공간은 이미 작가의 실존적 경험이나 상상적 경험을 초월할 수 없다. 한 번도 들어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기막힌 공간을 창조한 작가는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오마주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릴리퍼트와 브롭딩낵을 거쳐 라퓨타를 완벽하게 창조했을까. 수많은 신화, 전설, 민담의 공간을 차용했다. 어떤 공간을 창조하느냐에 따라 문학 작품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공간의 구조내지 성격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문학적 공간에 적용해 보면 현실상상으로 나눌 수 있다. 실재 경험할 수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실감나게 몰입하는 재미가 있다. 반면에 옷장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나니아 연대기식 상상력은 꿈과 환상을 선물한다. 어느 쪽이든 세밀한 구조를 만들고 공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는 재창조된다.

 



로드 무비의 대명사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에서 나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1991)OST를 다시 듣는다. 바다를 향해 달리는 마틴과 루디, 세상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었던 델마와 루이스. 그들이 달린 길은 공간적 구조가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드러내는 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길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On the Road, 1957)는 공간을 따라가지 않으면 무의미한 소설이다. 1947~1949년의 미국의 길은 어땠을까.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히치하이킹으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간다. 다시 타임스퀘어로 돌아오기까지 13,000킬로미터의 대장정. 덴버에서 딘을 만나지만 1부는 오로지 샐 파라다이스 자신의 여행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미동부에서 서부로 끊어질 듯 이어진 길이 주인공이다. 소설에서 언급된 대도시와 중도시를 계속해서 찾았다. 구글 지도를 펼쳐 확대 축소를 반복하며 뉴욕 주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샅샅이 훑었다. 책 앞쪽에 1~4부까지 이동 경로가 나오지만 항공지도와 구글 지도를 따라가며 읽었다.

 

2부는 샐과 딘, 메릴루, 에드 던컬이 함께 떠난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운전을 하며 이동한다. 3부는 샐과 딘, 샌프란시스코에서 롱 아일랜드까지 기록이다. 4부는 샐, , 스탠, 셰퍼드가 덴버까지 가서 남쪽으로 멕시코시티까지 간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두 번 왕복 후 국경을 넘는다.

 


강을 건너고 산맥을 넘고 눈보라와 싸우며 이어진 길들은 그대로 500쪽이 넘는 소설이 되었다. 두툼한 소설책 두 권을 홀린 듯 넘긴 이유는 순전히 구글 지도와 유투브 때문이었다. 가본 적도 없는 미국의 시골길을 샐과 딘과 동행한 이유는 자동차에서 들려오는 재즈 때문이다.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빌리 홀리데이, 디지 길레스피, 루이 암스트롱, 로이 엘드리지, 핫 립스 페이지, 텔로니어스 멍크, 스탠 게츠, 찰리 버드, 페레즈 프라도, 듀크 앨링턴이름이 나올 때 마다 검색하고 추억의 재즈를 듣는다. 덜컹거리는 트럭 짐칸도 좋고, 메릴루와 키스하며 운전하는 딘의 차 뒷자석도 좋았다. 어차피 달려야하는 게 인생 아닌가.

 

완벽한 평면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문학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건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작가의 묘사와 서술에 따라 길을 만들고 건물을 짓고 인물을 창조한다. 그러나 지루하게 나열되는 미국의 지명을 따라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엉뚱한 방법 같지만 구글 항공지도를 확대 축소해가며 샐과 딘과 메릴루, 에드, 스탠, 셰퍼드의 위치를 추적하는 재미가 제법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유투브가 맡았다. 찰리 파커의 앨토 섹스폰 소리와 함께 뉴올리언스의 전성시대를 듣는다.




1부 샐

; 뉴저지패터슨~뉴욕~시카고~대븐포트~아이오와시티~디모인~덴버~스튜어트~오마하~그랜드아일랜드~셸턴~고센버그~노스플랫~샤이엔~롱몬트~덴버~센트럴시티~솔트레이크시티~리노~샌프란시스코~LA~플래그스태프~달하트~세인트루이스~인디애나폴리스~콜럼버스~피츠버그~해리스버그~뉴욕타임스퀘어(13,000킬로미터)

 

2부 샐, , 메릴루, 에드 던컬

; 뉴욕~워싱턴~리치먼드~테스터먼트~노스캐롤라이나 던~메이컨~모빌~뉴올리언스~배턴루지~보몬트~휴스턴~앨패소~라스크루시스~벤슨~투손~베이커필즈~툴레어~오클랜드~샌프란시스코

 

3부 샐,

; 샌프란시스코~새크라멘토~솔트레이크시티~크레이그~덴버~오갈랄라~고센버그~커니~그랜드 아일랜드~콜럼버스~디모인~뉴턴~대븐포트~시카고~디트로이트~롱 아일랜드

 

4부 샐, , 스탠 셰퍼드

; 워싱턴~오하이오~신시내티~인디애나~세인트루이스~미주리~캔자스~애벌린~덴버~스프링스~달하트~프레더릭스버그~샌안토니오~러레이도~몬테레이~그레고리아~멕시코시티~뉴욕 

 


 
길을 떠나는 이유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기 위해서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늙는다. 그럼에도 공간은 더디게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여행은 낯설게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다. 나와 세상을 낯설게 보지 못하면 살아있는 박제다. 잭 케루악은 마리화나 벤제드린 그리고 재즈로 이 소설을 썼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구두점도 문장부호도 없이 길고 긴 두루마리를 토해냈다고 한다. 타자기를 두드리며 그는 소설을 쓴 게 아니라 달뜬 여행의 피로감을 느꼈을까. 동부에서 서부로 다시 동부로 다시 남북을 가로지르는 잭 케루악의 여행기에는 두근거림이 없다. 희망이나 꿈을 찾아 떠나는 식상한 구성이 아니라서 단숨에 읽혔는지도 모른다. 길에서 만난 사람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거나 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피곤하고 지친 여행자일 뿐이다. 샐과 딘처럼. 이 소설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네가 인생에서 바라는 건 뭐야?”(1, 95)

여행에서 돌아오면 역시 일상이다. 일상보다 피곤한 여행을 하는 사람을 딘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무언가 돈과 시간을 들여 여행에서 기대하는 게 있다는 건 위험해 보인다. 샐과 딘에게 여행은 인생의 다른 이름이다. 머물지 못해 떠나는 게 아니라 그저 떠날 뿐이다. 길 그 자체가 인생이므로.

 

다시 돌아오면 일상은 그대로. 뉴욕은 뉴욕이다. “나는 러시아워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간에, 길에 익숙해진 순진한 눈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움켜쥐고 낚아채고 건네주고 한숨 쉬고 죽음을 맞아서 결국은 롱아일랜드시티 너머의 끔찍한 공동묘지 도시들 중 하나에 묻히는 것이다.”(1, 174)

 

소설 도입부에 딱 한 번 소설의 제목에 걸맞은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들어보자.

 

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은 평생 단 한번밖에 없었던, 아주 독특하고도 묘한 순간이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독에 지쳐 뭔가에 홀린 듯한 상태였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구려 호텔 방 안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텔의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위층의 발소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슬픈 소시들을 들으며 금이 간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한 십오초 동안 내가 누군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겁이 나진 않았다. 나는 그저 다른 누군가, 어떤 낯선 사람이 되었고, 나의 삶 전체는 뭔가에 홀리 ㄴ유령의 삶이 되었다. 내가 미국을 반쯤 가로질러 와서 과거의 공간인 동부와 미래의 공간인 서부 사이의 경계선 위에 있었다는 사실, 아마도 그 때문에 바로 그 자리에서 이상한 붉은 오후의 그 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 1, 33

 

길 위에서 낯설게 자신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이후의 여행은 길을 따라 일상을 사는 것처럼 때로는 지치고 피곤하며 때로는 충동적이다. 매일매일 낯설지 않다면 여행도 일상이다. 샐은 딘을 만나면서 길을 떠난다. 딘은 샐이 아니었다면 길을 나서지 않았을지 모른다. 만남이 여행이다. 여행은 곧 새로운 관계 맺음이다.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이 여행이다.

 

1920년대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2차 대전을 직접 경험한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계급 및 예술파 청년들을 가리키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와 구별된다. 비트 세대는 다시 혁명가 기질을 가진 힙스터hipsters’와 방랑자 기질을 가진 비트닉beatniks’으로 분류한다. 샐과 딘은 기성 사회를 떠나 글을 쓰고, 재즈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떠나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정착한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된 구절을 찾았다. 번역은 좀 다르지만 길은 곧 삶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깨달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다. 아니 먼 길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을 수도.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 2, 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울할 땐 뇌 과학 - 최신 뇌과학과 신경생물학은 우울증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앨릭스 코브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 발전이라는 말은 타당한가지식은 시대마다 재구성된다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는 다만 이성의 날카롭고 비밀스러운 힘일 따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역사도 지식도 미친놈도 시대 변화와 상황 맥락에 따라 재정의 된다
  
나는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우울하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위악적인 인간보다 위선적인 인간을 혐오하듯이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우울이라는 단어는 통상 슬프다외롭다기분이 좋지 않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된다심지어 심심할 때도 우울하다고 한다광범위한 단어의 사용법으로 볼 수도 있다하지만 이는 우울증 환자들에겐 치명적 가해다장애인에게 앞에서 병신같다는 말을 뱉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함부로 우울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우울증의 증상과 심각성을 예단하지 말라는 의미다
  
우울증은 때로는 감기처럼 가볍게 자각증상이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그야말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대개의 경우 우울감의 깊이와 넓이는 헤아리기 어렵다불면수면장애알콜중독공황장애무기력의욕상실감정조절장애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고 복합적인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마음은 몸을 병들게 한다당연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정신에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는 힘들다식욕 부진운동 능력 상실활력 감소슬럼프의 반복은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에겐 일상이다
  
앨릭스 코브의 상승나선the upward spiral’은 우리나라에 우울할 땐 뇌 과학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번역서의 제목은 원제를 반드시 확인할 것핵심적 키워드로 간명하게 내용을 압축할 수 있는 제목은 때때로 엉뚱한 방향으로 바뀐다이 책은 우울증 극복을 위한 뇌과학자의 조언이다. ‘환자가 아니라 우울하다는 느낌인 사람에게 이 책은 무의미하다센티멘탈리즘에 젖고 싶은 소녀 감성자감상적 낭만주의자를 위한 말랑한 에세이와 거리가 멀다
  
심리학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우울증은 사실 뇌 과학의 영역이다마음이 심장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연한 이야기다특히 전전두피질과 변연계의 조화와 균형이 깨진 상태가 우울증이다생각하는 뇌인 전전두피질과 느끼는 뇌 변연계’ 사이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대화와 소통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수단으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교류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미친다
  
우울증에 대해 우리가 갖는 또 하나의 편견은 우울증이 감정이라는 생각이다우울증은 감정이 마비된 상태에 가깝다당연히 느낌과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상태다저자의 분석대로 우울증은 하강나선을 타고 내려가 바닥을 경험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강하다따라서 우울증은 매우 안정된 상태다
  
신경과학자의 눈에 비친 우울증 환자는 단순히 치료 가능한 존재일 뿐인가하강나선에 갇힌 뇌를 상승나선을 만드는 뇌로 바꿀 수 있을까운동을 하고 최선이 아니더라도 괜찮은 결정을 선택을 하고 충분한 수면나쁜 습관 고치기감사하는 마음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만으로 우울증은 완치가 가능은 여느 질병과 유사할까
  
앨릭스 코브는 전두-변연계의 의사소통 문제로 우울증이 발생한다고 진단한다뇌 회로의 조율 방식을 결정하는 다섯 가지 요인은 유전자생애 초기의 경험현재 삶의 스트레스사회적 지원의 양 그리고 운이다이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저자의 주장대로 이 다섯 가지 요소를 살펴보면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건 현재 삶의 스트레스뿐이다나머지 80%는 개인의 노력과 무관하다는 의미다안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가 우울증에도 통용되는 걸까모르는 게 약일까

  
남보다 더 감정적인 뇌를 지녔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이다감정은 인생에 자극과 묘미를 더해준다그러나 감정성이 강화될 때 부정적인 사건에 대한 인지와 주의가 함께 강화된다면그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커진다. - 87
  

심리적 쇼크정신적 충격과 다른 우울증은 예상대로 남들보다 감정적인 뇌를 가진 사람이 걸리기 쉬운 질병이다축복이 될 수도 있으나 저자의 지적대로 부정적인 사건에 대한 인지와 주의 강화되면 문제가 생긴다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부정성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이성보다 감정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성적 판단이 안 되는 상황을 오히려 견디지 못한다
  
과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울증은 원인과 현상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워 치료하고 개선할 수 있는 질병일지 모른다그러나 우울증 환자는 이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심각한 상황과 마주친다우울증은 거대한 벽이다두께도 높이도 알 수 없는뛰어넘을 수도 뚫고 지나갈 수도 없는 항거 불능의 거대한 벽환자의 시선은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한 권의 책은 언제나 나름의 소명이 있다우울증을 줄곧 연구해 온 뇌 과학자가 제시하는 상승나선을 그리는 방법은 설득력이 충분하다나름의 근거와 사례를 제시한다하지만 하강나선에서 상승 나선을 그리기 위한 반전의 고리는 무엇일까그이유와 목표가 무엇일까다른 질병과 달리 환자 치료 의지와 노력이 관건일 수 있다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환자는 왜 의지가 없을까왜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가
  
에필로그 그만 침대에서 나와라에 소개된 잭 케루악을 읽을 시간이다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은 다시 길 위에 나와 쌓여 있고
우리에게는 앞으로 갈 길이 더 많이 남았다그러나 상관없다.
길이 바로 인생이니까
길 위에서잭 케루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성한 모독자 - 시대가 거부한 지성사의 지명수배자 13
유대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단일한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면 놀랍다일반적으로 동일한 팩트서로 다른 분석과 비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주장하는 팩트 자체가 다르고 같은 증거와 사실 관계를 보는 눈 자체가 이미 객관과 거리가 멀다확증 편향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설전은 지옥이다어떤 사실이 밝혀져도 어떤 증거가 나와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며 인정할 줄 모른다그래서 나는 신념이 강한 자를 믿지 않는다
  
언론과 SNS에 노출되는 정보를 보며 흥분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다아니 이해할 필요도 없다동일한 사안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갖는 게 당연하다그런데 놀라운 건 같은 사람의 논리적 판단 근거가 매번 달라질 때다사형제에 찬성하는가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태어나면서 누려야할 권리즉 인권을 가진 존재인가언론은 비판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가검찰과 경찰은 권력이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서야 하는가소통과 배려의 가치는 언제나 유효한가?
  
유대칠의 신성한 모독자는 최근 읽은 책 중에 단연 최고다곧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떠올랐다물론칼뱅에 맞선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이 책에도 등장한다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는 중세 천년 역사의 이단아들이다지금처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 신성神性한 시대를 떠올려보자. 21세기의 아웃사이더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적 배경 때문에 더욱 신성神聖한 열세명의 면면을 살펴보자

  
아집我執이란 변하지 않으려는 욕심이다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기 욕심의 중력이다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러한 아집으로 살아간다그것이 편하다원래 있던 그대로 있는 것이 편하다굳이 다르게 되는 것보다 익숙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오늘도 어제처럼 살고 내일도 어제처럼 사는 것이 편한 사람들이 많다생각보다 너무나 많다. - 95 
  
에리우게나이븐 시나로저 베이컨오컴의 윌리엄조르다노 브루노갈릴레이데카르트스피노자 등은 철학과 역사를 뒤적이다 한 번쯤 만났던 사람들이다이들은 왜 개인적 이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으로 성공명예권력을 뒤로했을까바보 천치가 아니라면 어떤 말과 행동어떤 처세가 세속적 성공을 가져다주는지 알 만한 사람들이다이들은 왜 모두가 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했고모두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렇다고 외쳤을까가진 자권력자기득권층에서 이들은 고집스런 인물들이었을 게다. ‘진리를 무기로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 건 물리적 폭력과 세속적 비난이 아니다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들은 신의 권위에 도전한 오만한 사람들이 아니다그들은 이성이 시키는 대로 합리적 사고에 따라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튀지 마라가만히 있어라중간만 해라모난 돌이 정 맞는다누구한테 싫은 소리 하지 마라어른들 얘기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부모가 자식 잘 되라고 하는 말이다너도 나이 들면 알게 된다먼저 살아본 사람 말 들어라...... 
  
귀를 막고 눈을 뜨게 하는 건 이런 말을 듣고 자란 환경과 무관하다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는 건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고 왜 나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은 자괴감을 느끼는 일이다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내세우는 일이다긍정과 희망과 순종은 주체성과 거리가 멀다맹목적 비판과 부정적 시선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이성적 사고논리적 사유를 통해 얻은 선택과 행동은 신성한 모독자들의 공통점이다이런 삶은 개인적으로 불행하다행복한 일상과 거리가 멀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일까

  
생각보다 현실은 단순하다이런저런 문제들로 복잡해 보이지만사실 누군가의 이기적 욕심을 가리기 위한 의도된 복잡일 수 있다사실 진리는 단순한데 그 진리를 숨기기 위해 어렵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말들을 늘어놓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그 복잡한 이야기들은 결국 누군가의 욕심을 감추기 위한 의도된 가리개일 때가 있다. - 113
  
백미터 달리기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들었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고 싶은 열정과 기다림잊었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신성한 모독자들의 치열함 때문이었다왜 우리는 사고의 근육생각의 속도에 두근거리지 않을까신 중심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따라가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내적 갈등과 심리적 고통이 없었던 게 아니다그들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성직자와 권력자들이 내민 눈가리개를 거부했을 뿐이다. ‘있음이 곧 하느님이다.Esse est Deus.’(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49)라는 말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꿰뚫는다가난한 자힘없는 자병든 자를 위한 종교의 타락은 성직자권력자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다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대가는 고스란히 민주사회에서 유권자의 피해로 돌아오고견제와 감시 장치가 결여된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박근혜와 이명박은 안 되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괜찮고비판과 감시 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유권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순간 vice versa!
  
의심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다다르게 생각하면 오랜 과거의 끝이다작은 의심은 오랜 시간 유지된 과거의 견고함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의심 자체가 이미 한 시대의 붕괴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 183
  
양비론과 양시론만큼 위험한 건 모두 까기다그보다 더 위험한 진영논리와 맹목적 신뢰다유대칠이 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를 내세워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중세 천 년의 역사와 철학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행복이 아니었을까그 행복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그 행복의 조건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나 지금까지 철학이 안내한 행복은 질문과 의심이다길들여지지 않는 자유와 절대 고독이다그런 아웃사이더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꿨고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이야기를 들려줬으며 그들이 안내한 길을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
  
우리 모두 이단이 되어야 한다지금 우리가 믿는 게 무엇이든 그 신성함을 깨뜨리지 못하면 미래는 밝지 않다만들어진 길만 걷는 사람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신성한 모독자와 거리가 멀다순종적인 사람적응이 빠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먼 훗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이 남겠으나 후회하지는 말자그 길도이 길도 아닐 수 있겠지만 사유하지 않고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면 거기 멈춰 침묵할 것

  
참다운 철학은 바로 이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외로운 외침이다권력자들과 다투고 싸우기에 철학은 참으로 무력해 보일지 모른다때로는 싸우는 과정에서 상처받고 버림받고 실패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철학은 실패마저도 흡수하여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삼는다그 실패로 얻게 된 고통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고통을 통해 아직 더 많은 것을 해야 할 존재의 이유를 더욱 강하게 자각하는 것이 참다운 철학의 힘이다. - 3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Vulnerant omnes, ultma necat.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마침내 죽는다. - 254
  
공부한다는 것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그리고 이 단어가 원래 의미하는 대로 보잘것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만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라틴어를 기막히게 가르치는 교수법의 달인이었다면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다른 내용이었을 겁니다한때 지나가는 바람인지 오래오래 대기를 순환시킬만한 움직임인지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이 책도 그랬습니다베스트셀러에 대한 호기심과 매번 부딪치는 실망감 사이에서 자신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넉넉하게 점수를 주자면 배울 게 없는 책은 없습니다책의 형태로 묶였다면 굳이 욕할 필요도 없이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겁니다단 한 가지라도하지만 책을 고르고 돈 들여 구입하고 시간을 내 읽는 수고를 갈음할만한 배움도 깨달음도 감동도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제 평가가 짠 탓은 아마도 기대가 크고 늘 두근거리며 무언가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겠죠한동일 선생님은 수강생에게 어떤 이야기를 어떤 목소리로 들려주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책으로 만난 라틴어 수업은 전공과 이력이 주는 희소성오프라인 수강생의 반응이 더 커보였습니다기대가 너무 컸던 탓입니다아마 어떤 독자도 이 책을 통해 라틴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문법 체계와 교수법을 공부하고 싶었던 독자가 있었을까요쉽게 접하지 못하는 라틴어 문화권의 이야기가 궁금했을 겁니다제가 그랬거든요그 기대만큼은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책입니다한 편 한 편의 이야기가 라틴어 단어 하나문장 하나를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이 좋았던 건 한동일의 태도였습니다. ‘공부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나만 생각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자기 능력이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한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요.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을 될 수 있으나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너무나 당연한 말이지요제 한 몸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고제 가족의 잇속을 챙기고입으로는 그럴듯한 가치를 내세우면서 부와 명예를 챙기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진보와 보수젊은이와 노인여자와 남자기독교와 불교한국과 미국백인과 흑인 가릴 것 없습니다사람은 저마다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봅니다이념종교직업나이성별학벌인종국가......그게 무엇이든 틀렸습니다나눔과 실천배려와 소통은 입으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제가 가진 인간에 대한 평가 기준은 명확합니다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이타적인 삶이웃을 위한 희생더 나은 가치를 위한 실천 등 보통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운 삶의 목적을 설정했느냐를 따지는 게 아닙니다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출세와 명예를 지키고, ‘이 되는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요진영 논리도이념의 잣대도 이 큰 틀을 허물지 못합니다어디든 분쟁이 생기고 갈등이 심화되고 고통이 따르는 이유는 욕망과 이익 때문이 아닐까요그래서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출판사가 내세운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라는 타이틀 운운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는 노동자로서 자세를 바로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그 마음이 그 태도가 물론 수강생과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믿습니다
  
최소한 ‘Do ut Des’ 정도만 지켜도 세상은 달라집니다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한국인의 정서에는 야박한가요한국 사회에서 성장하고 배우고 벌었다면 그만큼 돌려주는 게 예의입니다그것이 지식이든 명예든 금전적 이익이든 말입니다저 혼자 잘나 그 자리에 오른 줄 아는 사람의 착각은 도 우트 데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이 책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경구도 많이 등장합니다익숙한 문장이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든 어느 지역에나 있는 금언이든 상관없습니다한동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저 살아가는 일이란 수천 년 전 라틴어를 사용하던 로마 사람들이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라틴어의 단수복수남성여성중성에 따른 격변화 단어를 어디에 쓰겠습니다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글자인지 다시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하지만 언어는 사고입니다그 자체가 생각의 틀입니다라틴어가 가진 특성이 문화이고 그들의 생각이며 문명의 기틀입니다한국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여러 사람이 지적했지만 개인적으로 저도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한국어의 약점은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동양 문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존대법입니다직장의 회의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예를 들어 직급이 낮은 사람은 부장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하지만 직급이 높은 사람은 !’ 12글자와 두 글자아니 !’ 한 글자면 어떨까요과장해서 표현했나요의사표현 도구로서 언어는 출발부터 다릅니다평등하지 못한 인간관계 자기 생각을 말하고 표현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유는 잘못된 교육가부장적 사회구조수직적 직급체계장유유서에 대한 사회적 관습 등 다양한 요소 때문이겠지만 그 출발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요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게 아닌 나이성별외모국적부모의 직업출신지역......’ 등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면서 차별을 구조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어서는 안 될 요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라틴어가 가장 우수한 언어라서 그 정신과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건 아닙니다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시간을 견뎌낸 언어가 안고 있는 문화와 전통그것이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볼 뿐입니다물론 제가 밑줄 친 곳은 뻔합니다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은 어떤 라틴어 문장에 밑줄 그었는지 궁금합니다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마침내 찾아낸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독일의 수도자이자 종교사상가, 1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끝난 사람
우치다테 마키코 지음, 박승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길고 지루한 소설을 읽었다마치 미드 브레이킹 배드를 1, 2회를 볼 때의 느낌이다느리고 더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끝난 사람(?)이라니 은 졸업일수도마무리일수도완성일수도 있다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나 끝난 사람을 긍정적으로 읽는 사람은 없을 터소설의 주인공 다시로 소스케의 정년 퇴임식 날 소설이 시작된다우치다테 마키코는 이렇게 길고 지루한 소설을 통해 그리 특별하지 않게멀고도 험한 길을 끝까지 견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을까
  
한 번도 성공승진에 관심이 없었던 내게 주인공 다시로는 낯설다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세속적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많다다시로가 대통령이나 재벌이 되려고 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출세의 길을 걷는다고향을 떠나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일본 최고 은행 임원 직전까지 실패를 모르고 승진을 거듭했던 다시로가 자회사로 좌천됐을 때 이미 그는 끝난 사람이었다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방법을 고민한 적이 없었던 노동 기계그것은 박정희 시대 새마을 운동과 한강의 기적으로 미화되는 베이붐 세대(1955~1964년 사이에 태어난 900만명)의 삶이며일본 단카이 세대(1946~)의 활력과 희망을 상징한다가족을 위한 희생국가와 민족을 앞세운 사명감으로 무장했지만 개인의 삶은 무시되고 조직이 우선했던 세대다다시로의 속내는 그대로 우리 사회에도 적용된다퇴직의 시기와 방법이 다를 뿐 모든 직장인에게 닥칠 일이다
  
나는 평화롭고 즐거운 여생을 즐길 수 없는 타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여생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산 사람에게 어찌 남은 인생이 있을 수 있나.
여든이건 아흔이건 혹 병이 들었건 살아 있는 한 그냥 인생이지 남은 인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 228
  
평균 수명이 80세에 이른다노인의 기준과 개념도 달라졌다퇴직은 은퇴와 다른 개념이다스스로 은퇴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퇴직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여생도 다른 개념이다물론 주인공 다시로 소스케는 그 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작은 회사에 고문으로 일하다가 사장을 맡고 회사가 도산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는 반전도 임팩트도 없다로맨스그레이가 잠시 등장하지만 이 책은 지나치게 점잖고 노년의 사적 욕망과 세속적 욕심을 정밀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동양 문화권에서 우리 아버지 세대가 걸어온 길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지금 청춘이 느끼는 것과 다르듯이여생은 없다그냥 인생일 뿐누구나 소중한 인생지만 타의에 의해 여생이 될 수 있음에 주의하라는 경고일까.
  
작가는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퇴직한 남자의 속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더 일하고 싶은오로지 일밖에 몰랐던 평범한 직장인의 욕망일 테지만 그것은 치열한 생존 경쟁 시대를 견딘 남자의 수고로움과 거리가 멀다여전히 현역으로 일하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인정 욕구가 하늘을 찌르고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우치다테 마키코는 끝난 사람에서 정년퇴직을 생전 장례식이라고 명명한다욜로와 워라밸이 트렌드가 된 시대에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겠지만일찍부터 게으를 수 있는 권리(폴 라파르그)를 주장했던 사람에겐 불쌍한 일중독자로 보이겠지만 주인공 다시로에게는 일이 곧 인생이었다성취감을 맛보고 삶의 보람을 일에서 찾았던 남자에게 퇴직 후의 여유는 고통이다연금과 저축으로 생계에 지장이 없는 주인공은 노년의 빈곤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치에 불과한 이야기다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 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구박받을 이야기다하지만 과연 그런가하루 세끼 밥만 먹고 잠잘 곳이 있으면 다 같은 인생인가
  
예순 셋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정년을 맞은 주인공의 문제는 끝낸 사람이 아니라 끝난 사람이라는 데 있다주체적으로 자기 일을 그만두고 정리했다면 갈등이 없다그러나 다시로 소스케는 끝내진 사람이다자기 자신이 끝내지 못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쓸쓸함과 공허함을 함부로 짐작할 수는 없다고통이든 고독이든 결국 추론에 의한 것일 뿐 공감은 불가능하다다시로 소스케와 유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그와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각자 가진 스스로에 대한 연민일과 휴식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모든 사람은 남은 시간을 알 수 없다나에게 혹은 바로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평균 수명을 계산하지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자문해야하지 않을까그래서 다시로에게 여든아홉의 어머니가 한창때라고 하지 않는가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간다누구나 겪게 될 혹은 곧 현실이 될 노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소스케너 올해 몇이나 됐냐?”
예순여섯.”
어머니는 감탄하듯이 말했다.
예순여섯아이고 한창때로구나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나이로세.” - 4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