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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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경우, 책을 선택하는 데는 몇 가지 경로에 따른다. 다른 분야의 책도 마찬가지 경로를 따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작가의 명성, 전작의 우수성, 출판사의 홍보, 각종 문학상 수상, 주변의 추천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인의 경우 평론집을 통해 책을 찾아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더구나 한국 문학 전체의 흐름을 읽고 신진 작가와 기성 작가의 작품을 두루 읽고 그들의 신작을 적절하게 선택하거나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최근 몇몇 통계를 보면 책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부익부빈익빈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읽는 사람은 1인당 평균 독서량이 작년보다 증가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 줄었다. 10명 중 6명은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으며 베스트셀러의 집중 현상은 점점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는 책 읽는 사람 입장에서 쉽지 않은 고민이다.

 

재와 빨강으로 처음 만난 편혜영의 소설 저녁의 구애는 주목할 만한 작가의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와 빨강에서 보여준 작가 색깔과 문장이 작가 고유의 것으로 육화될 것인지 중간에 힘을 잃어버릴 것인지 지켜보는 일은 소설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독자는 언제나 여러 선택지 중에서 최선을 희망한다. 합리적인 소비에 버금갈 만큼 책의 선택은 자신의 시간과 영혼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한 권 읽는데 뭐 그리 복잡할 것 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분야별로 제대로 읽어나가고 즐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고려할 만한 사항이 많다.

 

편혜영의 소설집 저녁의 구애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소설집은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일정기간 동안 정리하는 의미가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시간이 흐른 만큼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모습이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내적 변화와 외적 상황에 따라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집은 편혜영의 한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소설집일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평가하든 말이다. 통상적으로 하나의 문장 혹은 몇 개의 키워드로 작품 세계를 드러낼 수도 있다. 김형중은 해설에서 그것을 동일성의 지옥이라고 표현했지만 독자들이 그렇게 읽어낼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지라는 신현림의 말대로 그것은 시대와 무관하게 반복되는 일상성에 대한 도전이며 그 간극을 뛰어넘는 한숨이다.

 

동일성과 일상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며 시찌프스처럼 무한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는 일이 인간의 삶이라는 비극적 인식은 편혜영 소설의 기본 전제이다. 하지만 그 일상은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다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 생활하면서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반응할 수 있다. 편혜영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비틀어보아야 하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충실한 듯하다. 기다릴 무언가가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한단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소설가는 행복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거나 허망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소설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편혜영도 마찬가지다. 넓은 의미에서 편혜영의 소설은 희망 없는 시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로 읽히기도 한다.

 

김은 누구나 이기적이므로 누구에게든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 40

 

우정이라는 것은 애정의 정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자신에게 헌신적이거나 유익할 때에만 유효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모든 지나간 일을 되새기는 과정이 그렇듯 과거의 어떤 일이 미친 결과나 상처는 아무런 파동 없이 떠올랐고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에 대한 서글픔과 뻔한 회한만 남았다. - 40

 

표제작 저녁의 구애의 몇 문장이다.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은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는 일은 때로 우스꽝스럽게 여겨진다. 소설보다 더 극적인 생을 사는 사람들, 현실보다 밋밋한 소설들, 사람과 책 사이에서 현실과 허구의 매트릭스를 경험하는 우리에게 책읽기는 현실에 대한 확인이며 꿈이다. 그래서 때때로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진심으로 여겨지지 않는 말의 홍수를 견디는 일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얘기를 하는 동안 김은 여자에게 말한 것들이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말은 모두 어디서 읽거나 누구에게 들은 얘기 같았다.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진심으로 여겨지지 않는 말이었다. 반면에 그래서 진심처럼 들리기도 했다. - 61

 

토끼의 묘동일한 점심산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지루함과 건조함, ‘저녁의 구애에서 보여주는 허망함과 피곤함, ‘관광버스를 타실래요?’정글짐의 낯설음과 불분명함, ‘크림색 소파의 방을 통해 확인되는 안타까움과 불안, ‘통조림 공장의 그로테스크함과 우울한 전망.

 

스타카토처럼 짧게 던져지는 문장과 모래바람이 불 듯 서걱이는 건조함은 희망없이 미래를 바라보아야 할 우리들의 모습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소설의 아이러니는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렇게 시니컬하게 비틀고 무미건조하게 툭툭던지는 문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들뜬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한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생의 비의(悲意)를 확인하고 싶다면 편혜영의 소설이 제격이겠다.

 

전화를 끊으면 그는 누군가 자신을 낯선 도시로 내몰았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공교히 음모를 꾸몄으며 자신은 순진무구하게도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가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늘 구군가에 의해 설계된 인생을 살아온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화가 났다. 자신을 통제하는 대상이 있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 통제에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 때문이었다. - 167

 

 

2011122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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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전체가 한 단위를 형성하며, 그 단위가 다른 어떤 사람의 단위와도 다르다는 명백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단위를 라 부른다. 과연 그 는 무엇일까? - 148

 

과학은 진술한다’. 과학의 유일한 목표는 대상에 대해 옳고 적절하게 진술하는 것뿐이다. 과학자가 강요하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진실과 성실뿐이다. - 194

 

물질세계는 자아, 즉 정신을 배제함으로써만, 제거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었다. 정신은 물질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물질세계에 작용을 가할 수도 없고 물질세계의 어느 부분이 정신에 작용을 가할 수도 없다. - 196

 

세계는 내게 단 한 번 주어진다. 존재하는 세계가 주어지고, 또 지각되는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관과 객관은 단지 하나이다. 물리학이 이룩한 최근의 성과로 주관과 객관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은 옳지 않다. 애초부터 그 장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 208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만들 뿐이다.” 자연적인 사건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가치는 찾아볼 수 없으며 특히 의미와 목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 226

 

이런 이론화 과정은 우리가 사실들을 질서 있는 패턴으로 기억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지만, 실제 관찰과 그로부터 나온 이론 사이의 구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실제 관찰은 항상 감각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이론이 감각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이론은 감각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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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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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전체가 한 단위를 형성하며, 그 단위가 다른 어떤 사람의 단위와도 다르다는 명백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단위를 라 부른다. 과연 그 는 무엇일까? - 148

 

19449월에 쓴 에르빈 슈뢰딩거의 서문이 낯설다. 67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때문이 아니라 그간 상전벽해 해버린 과학의 발달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이론 물리학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막막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론적 정의보다 우선 그 의미를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쉽게 답을 떠올리기 어려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견하여 파동역학을 수립하고 물질의 파동이론과 양자역학의 한 축을 담당한 공으로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말년에 과학철학에 몰두했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생명은 무엇일까. 더구나 생물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가 던지는 호기심은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질문이다. 살아있는 세포의 활동과 역할을 고찰하는 일은 단순히 환원주의 입장에서 원자와 분자 수준의 물질을 탐구하는 일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2500여 년 전부터 철학자들이 했던 고민과 현대 물리학자들의 고민이 근본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생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그 수많은 질문 중에 하나는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과학자와 철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궁구하게 만든다.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밝히는 과정을 재미있는 소설처럼 풀어낸 제임스 왓슨의 이중 나선에 소개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일단 재미가 없다. 과학자들이 극찬하는 고전이면서 많은 연구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책이고 제임스 왓슨 때문에 읽게 됐지만 이중 나선처럼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최재천이나 제임스 왓슨처럼 재미있고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 능력은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 책은 궁리하는 과학 시리즈 네 번째 책으로 정신과 물질을 함께 묶었다. 두 권을 한 권으로 묶는 데는 분량의 문제 뿐 아니라 내용의 흐름도 고려했을 것이다. 옮긴이 전대호의 말대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살펴보는 내용과 연결된다.

 

우선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전 물리학의 접근 방법에서 시작하여 유전의 매커니즘과 돌연변이, 양자역학적 증거를 살펴 본 후에 질서와 무질서 그리고 엔트로피를 통해 생명의 물리학 법칙들을 점검한다. 생명은 일정한 계통에 따라 순차적으로 개체가 발생하는 기계가 아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밝혀진 과학의 이론에 입각해서 생명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는 슈뢰딩거의 이야기는 전문지식이 없어도 들어볼 만하지만 역시 쉽게 이해되거나 재미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정신과 물질이 이해가 빠르다. 과학이 아니라 철학에 가까운 이야기로 가득한 정신과 물질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논쟁처럼 어디까지 혹은 무엇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선순위도 달라지고 영역도 분리된다. 정신은 무엇이며 그 정신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은 객관화 될 수 있는 것인지 또 그것이 정신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가만히 들여달 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한 권에 묶여 있어 자연스럽게 두 권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대신 개념적인 용어와 이론들이 들장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나열하거나 하나의 현상을 밝히는 책이었다면 고전이 되었을 리가 없다. 모든 고전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 질문은 시간을 견뎌내며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고 정답은 없지만 언제나 진지하게 고민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자연은 위대하다. 이 명제 앞에 나약한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그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감에서 종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 발달하면서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달했으며 지구상에 가장 오만한 생명체가 되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 선악이 없으며 인위가 없다. 돌연변이 조차도 하나의 흐름이며 생명의 신비에 해당한다. 그래서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슈뢰딩거의 성찰은 생명과 정신과 물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출발이다. 목적은 없지만 본능적인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의 일부인 생명이란 무엇인지 여전히 탐구 중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만들 뿐이다.” 자연적인 사건은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가치는 찾아볼 수 없으며 특히 의미와 목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 226

 

 

20111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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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김미월 지음 / 창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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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서평 사이

 

문학 연구자로 작품과 작가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 결과는 학문이 될 것이다. 문학사와 문학 이론은 물론이고 사회학과 역사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철학적 사유가 뒷받침 되지 않은 비평은 어느 작가의 비유처럼 소 잔등위에 앉은 파리처럼 귀찮기만 할 뿐이다. 이론적 기준에 입각한 정치한 글쓰기는 일반 독자를 쉽게 설득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와 개념들은 비평을 읽을 만하지 않은 그들만의 언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쉽다. 그러나 비평은 여전히 문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작품의 안과 밖을 두루 살피며 객관적인 검증 절차로 받아들이느냐 개별 비평가의 주관적 평가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늘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비평의 시대를 넘어 서평의 시대가 도래했다. 평론가들의 비평 기능과 역할이 2000년대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다양한 매체의 발달과 능동적인 독자들의 참여가 결정적인 이유 때문이다. 즉각적인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인터넷에 소설을 발표하는 시대에 문학 비평의 역할은 설 자리가 좁아졌고 문단 권력과 주례비평에 대한 반성과 비판들은 일반 독자들과 비평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비평의 역할과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로서의 문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 혹은 창작되는 작품들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과 해석은 여전히 평론가와 학문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온라인 시대의 문학에서 서평의 의미와 위치는 애매~하다.’ 개별 독자들의 단순한 독서감상문으로 보기에는 그 깊이와 영향이 상당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평과 서평을 큰 틀에서 볼 때 객관적일 수 없다고 본다면 백락청과 김현 같은 스타 평론가의 시대는 이제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 기능의 상당 부분은 신문 서평란의 전문 기자와 서평가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가들은 전문 연구자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출판평론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전문 직업군이기도 하다. 기존의 작가들이 겸업하는 경우고 있으며 일반인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김미월의 소설집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을 읽으면서 비평과 서평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신진 작가에 대한 접근 경로와 판단 때문이었다. 평론가는 최근에 출판된 한국 소설을 두루 읽고 그 흐름을 파악하며 한 작가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작품세계를 꾸준히 살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의 경우에는 어떤 작가가 주목할 만한 작가인지도 판단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전체 작가의 작품을 고루 읽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평가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많이 팔리고 이름이 알려진 작가지만 김애란의 초기작에서 느꼈던 발랄함과 감각적인 언어, 즐거운 상상력은 첫 번째 장편소설에서 실망으로 바뀌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이겠으나 돈을 주고 책을 사서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음 소설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베스트셀러 코너만 기웃거리고 영화를 보고 책을 구입하는 우스운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

 

 

처음 만난 김미월

 

책과 무관한 이야기로 시작한 김에 한 가지 더! 시집과 소설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학력표기는 필요한가? 중졸 학력이나 박사학위를 가진 작가의 이력이 작품을 읽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가 살아온 내력, 개인적 관심사와 취미, 집안 분위기, 인상 깊은 성장과정의 에피소드, 정치적 성향, 현재 하고 있는 일 등이 아닐까? 천편일률적인 학력 소개와 펴낸 책 소개는 표정 없는 증명사진처럼 의미도 재미도 없다.

 

강릉에서 태어났다, 는 소개는 강릉에서 태어나서 몇 살까지 성장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왜냐하면 소설 곳곳에 배어있는 서울에 대한 느낌과 서울 살이에 대한 생경함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작가의 관찰과 경험인지 잘 설정된 주인공의 몸에 어울리는 상상력인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설집과 장편 소설을 각각 한 권씩 펴내고 두 번째 소설집으로 처음 만나는 김미월의 소설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엿보인다. 9편의 단편들이 가진 각각의 얼굴은 따로 또같이 잘 어울린다. 조금씩 다르면서 어우러져 화음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 기간 발표한 단편들을 묶어낸 소설집의 경우 내용이 다양하다는 즐거움이 있을 수 있지만 일관된 성격이나 흐름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소설집은 표제작에 나오는 표현을 차용하자면 베스트셀러 코너에 오르긴 힘들지만 그 뒤편 서가 구석에 꽂혀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시인지망생이었던 편집자, 가난해서 대학에 가지 못하는 여고생, 불법취업 외국인, 다문화가정, 취업준비생 등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이웃들과 있어도 표나지 않는 개성도 특징도 없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로 가득하거나 개성이 뚜렷한 주인공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기막히고 놀라운 사건이나 인상 깊은 장면으로 독자를 사로잡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미소 짓게 하는 상쾌한 비유, 물 흐르듯이 편안하게 읽히는 문장, 어색하고 딱딱하게 관념을 드러내지 않는 표현, 황망하지 않는 결론 등 김미월이라는 작가의 분명한 빛깔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분명함은 숨길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유였다. 아무것도 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처럼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렸을 생각들을 문장으로 확인하는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다수 평범한 우리에게 작가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는 따뜻함을 확인하게 한다.

 

흔히 희망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그 말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겨우 ‘29200’일 밖에 살지 못하면서도 영원을 살 것처럼 욕망하는 사람들이나 아무도 펼쳐보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쓰고 있는 작가의 심정이나 달리할 것도 없는 사람의 미래를 담담하게 들여다 볼 줄 알고 위로할 수 있는 자세를 지닌 작가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공감과 소통이 시대의 키워드로 떠올랐으나 그 말 또한 언제나 필요한 삶의 조건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언제나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소설을 꿈꾸겠으나 그것은 지금 여기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가장 치밀한 관찰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겠는가. 비록 누추하지만 희망혹은 을 영원히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멈추지 않기를. 모든 것이 우중충하지만 쨍쨍한 햇볕에 잘 마른 빨래처럼 팽팽한 내일을 함께 고민할 수 있기를.

 

모든 것이 우중충했다. 저 남자애는 곧 학교에 도착할 것이다. 곧 졸업을 할 것이고 저 아저씨들처럼 넥타이를 매고 출근할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레깅스를 신은 아가씨들 중 한 명과 결혼하겠지. 두 남녀는 아파트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을 갚기 위해 낮밤 없이 일할 것이다. 주말에는 주중에 밀린 잠을 자기 바쁠 것이고. 드디어 아파트를 장만하고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면 아마 나이 쉰쯤 됐으리라. 그때쯤이면 둘 중 하나는 암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당뇨나 허리디스크, 우울증도 피해갈 수 없겠지. 아아, 정말이지 너무나 우중충한 미래였다. - ‘292001’, 45

 

 

2011121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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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과 공자 -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제자백가의 귀환 2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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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난 어린 아이를 떠올려본다. 제 힘으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혼자서는 제대로 먹을 수조차 없다. 미숙한 인간은 조금씩 움직이고 뒤집고 기고 서고 걸으며 제 몸 하나를 겨우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명의 혜택을 받는다면 듣고 보고 읽고 쓰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지식을 습득하며 삶을 영위해 나가는 인간의 모습은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나름의 생각이 만들어진다. 어쩌면 이 불완전함이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고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 두렵다.

 

특히 직접 경험하지 못한 모든 지식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우리의 모든 감각 기관조차 확실치 않을 때가 많다. 더구나 과거의 역사와 철학, 문화와 전통은 습관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배웠던 수많은 지식들 겨우 걸음마를 뗀 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대부분 교과서를 통해 인류의 축적된 지식을 배운다. 이 과정이 맹목적인 주입식으로 이루어질 경우 주체적인 판단력과 사고력 따위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고 질문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스스로 찾아보고 토론하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비판적인 사고력과 논리적인 설득력 그리고 종합적인 판단력 때문이다.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세상이 하나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을 뿐이라는 자각 혹은 삶의 패러다임 전체가 흔들리는 지적 충격을 받은 적이 없다면 나는 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제자백가의 귀환 두 번째 책, 강신주의 관중과 공자는 앎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관중과 포숙의 교우 관계를 일컫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정도로 알고 있는 관중은 누구인가. 또한 500년 조선 왕조를 지배하며 우리의 전통 문화의 사상적 배경으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

 

현실주의자 관중과 이상주의자 공자

 

역사 속의 두 인물을 비교하는 일은 많은 책에서 시도해 왔고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자는 다른 인물들과 조금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제후들처럼 따로 다루고 있을 정도로 공자는 여느 철학자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만큼 공자는 위대한 철학자일까. 학교에서 배운 혹은 공자에 대한 막연한 의심은 춘추전국시대와 그의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대의 행운아로 보이는 관중도 마찬가지다. 후세 사람들에게 평가 절하된 관중은 어떤 상황에서 제나라의 환공을 패자(覇者)로 만들었을까.

 

작가는 이런 수많은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통해 인물의 생애를 조망한 후 그들의 사상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우선 혼란스런 중국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을 더듬는 일은 어떤 책보다도 흥미롭다.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 체제를 갖추지 않은 춘추전국시대의 상황과 1권에서 다루었던 의 관계는 2권을 읽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제자백가의 귀환시리즈를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이 될 것이다. 강신주가 제자백가를 다루는 다양한 방법이 기대되면서도 끝까지 이 시리즈를 읽어내게 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관중은 제나라 환공을 패자(覇者)로 만든 인물로 기억된다. 그가 가졌던 정치적인 능력과 꿈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고 현실이 되는지 살펴보는 일은 당대의 정치와 사회를 아우르는 작가의 통찰력을 빌리는 일이기도 하다. 폭넓은 인문학적 사유와 적절한 원문의 인용은 이 책이 단순히 알기 쉽게 풀어 놓은 해설서나 쉽고 재미있는 입문서를 넘어서는 이유다. 우리가 관중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제나라의 상황을 읽어내는 능력 뿐만 아니라 경제가 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간파한 관중의 전략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시하는 바가 크다.

 

정치철학 구분

관중

공자

정치 논리

가족 논리 국가 논리

가족 논리 = 국가 논리

정치 주체

군주

군주 + 귀족층

정치 대상

귀족층 + 민중

민중

정책의 우선순위

경제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경제

민중에 대한 인식

능동적 사회계층

수동적 사회계층

 

그에 비해 공자는 어떠한가. 주나라의 를 숭상하며 오랜 시간을 견뎠으나 그의 이상은 결국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관중과 공자가 비교되는 지점이다. 공자의 사상을 대표하는 에 대한 오해와 진실은 김경일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관점과 유사하게 서술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양비론(兩非論)과 양시론(兩是論)이다. 공자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모두 옳거나 모두 그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 사회의 관점에서 공자를 바라보거나 현재적 유용성으로 공자를 해석하거나 정확한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먼지 묻은 중국 고전의 원문을 읽고 그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누구의 해석과 관점이 정확하다고 순위를 매기자는 말이 아니다. 강신주의 해석과 관점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부분이 많다. 지면의 한계도 있겠으나 아쉬운 면도 있다. 그러나 컨텍스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스스로 아주 조금 안다는 생각이 든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2011121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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