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 - 빅뱅부터 전쟁과 혁명까지
김서형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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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먹과 찍먹 사이

 

짬뽕과 짜장면, 물냉과 비냉 사이의 갈등은 이해하나 탕슉을 부먹이나 찍먹이냐로 고민해 본 적은 없다. 전혀 다른 음식, 서로 다른 맛을 넘어 이제는 같은 음식 같은 맛이지만 식감의 차이를 따질 만큼 우리는 배가 부르게 산다. 졸업식 날 온가족이 짜장면을 먹던 기억에 대한 언급은 꼰대질이다. 음식 문화가 변했다는 건 단순히 경제생활의 향상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트렌드는 문화가 되고 생활이 된다. 생활의 변화는 생각을 바꾸고 습관과 행동 그리고 운명을 조정한다.

 

사소한 차이에 시간이 결합하면 그 결과는 놀랍다. 스키 바인딩을 적절히 조절하면 큰 부상을 방지할 수 있지만 조절에 실패하면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빅히스토리는 136억년 넘어에 놓인 빛과 어둠에서 출발한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시간의 흐름 속에 현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부먹과 찍먹의 바삭거림 차이가 아니라 탄생-성장-소멸을 가늠하는 존재론적 차이다.

 

김서형의 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는 두 가지 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우선 신선함이다. 그림으로 빅히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어 어느 한 쪽만 이해한 사람에게는 낯선 영역과의 결합을 보여준다. 물론 일관성 있게 전체적인 구성과 히스토리가 치밀하게 엮이지는 못했다. ‘우주와 생명의 탄생’, ‘인류의 빛과 그림자’, ‘혁명과 전쟁으로 우주와 인류의 빅히스토리가 모두 담길 수는 없다. 그래도 친숙한 그림에 담긴 과학, 신학, 역사, 사회, 전쟁, 근대화 이야기가 풍부하다. 또 하나의 장점은 한국인이 쓴 쉽고 적절한 설명이다. 번역서로만 접했던 빅히스토리를 우리글로 읽으니 더 쉽고 재미있다. 경어체를 사용한다고 해서 청소년용이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책이 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읽힐 필요도 없지만 누구나 거부감 없이 예술빅히스토리를 함께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을 덜어내고 지식과 정보를 간명하게 전달한다.

 

 

재벌과 학벌 사이

 

초등학교 시절, 눈밑을 벌에 쏘인 적이 있다. 한쪽 얼굴이 부풀어 올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선생님들의 기상천외한 체벌에 시달렸다. 자로 손등을 때리거나 부러진 눈밑을 꼬집거나 부러진 아이스하키 스틱으로 종아리를 때리거나 구레나룻을 쥐어뜯거나……. 그때 그 시절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 재벌을 알게 됐다. 학문 영역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학벌 체제로 굴러가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재용 2심 판결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승복한다고 해도 36억 아닌가! 누군가 공무원에게 36억의 뇌물을 주고 풀려날 수 있을까? 재벌공화국의 오명은 대통령이 바뀐다고 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견고한 기득권의 시스템과 그보다 더 단단한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어찌 하루아침에 무너지겠는가.

 

동종교배는 열성인자를 낳는다. 대통령의 권력이 국민을 무시하는 세상은 교수의 권위가 새로운 학문적 도전을 배척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학벌 사회의 견고함은 학문의 동종 교배에서 비롯된다. 선생님의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생각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대학은 발전이 없다. 교수 자리를 탐하는 학자, 승진에 목숨 거는 공무원, 이익에만 집착하는 기업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재벌가의 몸종이 되지 못해 한이 되고 학벌로 줄 서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세상에서 우리들의 빅히스토리는 쓰일 자리가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빈센트 반 고흐의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로 시작해서 모네와 고갱, 클림트, 루벤스, 김호도, 들라크루아, 윌리엄 터너, 조지 럭스의 헤스터가로 이어지는 스물 한 작품은 예술적 완성도 뿐 아니라 풍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나하나에 얽힌 우주의 신비, 생명의 탄생, 지구의 모습, 인류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한다. 분과 학문에 매몰된 학교 교육을 넘어 거대한 퍼즐이 맞춰지는 공부는 가능한가.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생각과 도전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가능한가. 재벌과 학벌이 아니라 상상력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변화와 공존은 가능한가.

 

혼자 꿈을 꾸면 공상이지만 다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훈데르트바서의 말은 선언적 의미만 갖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치고 깨져도 소수의 가진자와 힘센자가 아니라 다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가진자와 힘센자가 되려는 노오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발상의 전환과 각자의 빅히스토리가 필요하다.

 

 

팝핑[popping] : 재미를 보태고_대중성

1. 호모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김영사, 2015.11.24

2.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김명주 역, 김영사, 2017.05.19

 

펌핑[pumping] : 외연을 넓히며_동질성

1.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이덕환 역, 까치글방, 2003.11.30

2. 빅히스토리, 신시아 브라운, 이근영 역, 바다출판사, 2017.12.04.

3. 시간의 지도, 데이비드 크리스천, 이근영 역, 심산, 2013.05.20.

 

점핑[jumping] : 깊이를 더해서_연계성

1. 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까치글방,2010.10.06

2. 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역, 사회평론,200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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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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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은 내용 전체를 포괄하며 핵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책 제목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시켜야 할 뿐 아니라 책 전체 내용을 응축하거나 상징해야 한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매력적인 제목에 비해 내용은 단 하나에 집중하고 있어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이 책은 혐오를 위한, 혐오에 의한, 혐오의책이다.

 

일상적인 대화, 공적인 언어가 갖는 말의 힘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아니다. 혐오 표현은 말과 글을 모두 포함한다. 사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사회적 의제이며 상징적 메시지다. 말이든 글이든 언어는 사고를 반영한다.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점검할 수 있는 도구가 언어다. 언어는 지문과 같다. 개인에게는 정치적 성향부터, 취향, 성격, 지적 수준, 관심사, 종교, 인종, 직업, 나이까지 가늠할 수 있는 도구다. 한 사회의 언어는 소통방식, 공동체의 의식수준, 규범과 질서를 드러낸다. 혐오표현도 당연히 개인 혹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점검 도구로 활용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맘충과 노키즈존, 영화 청년경찰, 퀴어문화축제와 반동성애운동을 통해 한국의 혐오 논쟁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혐오에 대한 법률적 논쟁 보고서에 가깝다.

 

법도 시대정신의 반영이며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투영된 결과다. 각국의 특성과 문화, 공동체의 합의가 법적용에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서구 유럽과 일부 선진국을 참고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법이 우리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촉발된 혐오 논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고 있지 못하다. 혐오 논쟁의 문제를 짚어내고 법적 제재가 가능한가, 형법으로 통제하는 게 올바른가, 사회적 논의와 대한은 무엇인가, 생활 속의 혐오는 없는가, 일반인들의 혐오의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혐오가 오로지 좌파의 아젠다인가,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망치 대신 메스가 필요하다면 메스를 대는 부분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가, 유럽식과 미국식 제제 어느 쪽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우리 사회 고유의 전통과 문화에서 발원한 혐오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회경제적 약자와 비정규직, 청년층에 대한 이해와 분석 없이 여혐과 남혐의 이분법적 접근 방식은 타당한가……

 

혐오 표현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조사와 통계 분석도 없이 지극히 편향된 시각으로 시류에 편승한 책이라는 판단은 나만의 생각인가. 내용에 동의 여부를 떠나 논의의 흐름이 정교하지 못하니,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 혐오는 혐오시설’, ‘혐오식품처럼 시설이나 음식을 수식하는 말로 주로 쓰여왔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에서 헤이트는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한다.”(24)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우선 저자는 남혐과 개독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소한 현재’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여혐과 남혐, 이슬람혐오와 기독교혐오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거나 저거나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48)이라고 말한다. 남혐은 이후에 미러링을 통해 그 사례를 제시하지만 B급 좌파, C급 페미니스트쯤 되는 내게 읽기에도 논리가 엉성하다. 여혐과 남혐, 이슬람 혐오가 기독교혐오가 등가로 놓일 수는 없고 같은 맥락으로 비판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양비론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남혐과 개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논리는 이해할 수 없다.

 

맘충이나 노키즈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맘충 따위는 농담으로 넘길 수 있다 …… 맘충이라고 말할 자유와 노키즈존 영업을 할 자유를 얻길 원한다면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는 사회 현실부터 바꿔야 한다. - 53

 

예를 들자면, 이 부분에서 차별받는 사회 현실은 어떻게 바꾸자는 말인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라는 한 문장이면 인문학 코너의 모든 책이 다 필요 없다. 맘충이라는 말을 현실에서 들어본 적도 없고, 노키즈존을 본 적도 없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될 정도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 간의 예의, 암묵적 합의를 깨는 사람, 이에 대한 지나친 분노가 충분히 문제가 될 수는 있다. 이 문제 자체를 떠나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독자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인지,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대형 화산 폭발로 인해 우리 땅 밑에 거대한 용암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 용암을 제거해야 한다. 용암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화산 분출만 막아봤자 별 소용이 없다.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 있는 여성혐오는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 104

 

앞뒤 맥락을 이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모든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여성혐오가 땅 밑에 용암처럼 흐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의 남성에게 달린 의 위치가 차별이다. 여성의 관점에서는 남성의 모든 말과 생각, 시선이 혐오라는 주장이다. 그것이 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궁금해졌다. 존재 자체가 여성혐오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니 조심하고 삼가라는 말인지, 그 인식 기저를 바꿀 용기를 내라는 말인가.

 

표현의 자유를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미국의 수정헌법에 따라 법률적 규제보다 사회적, 문화적 규제가 철저하고 기업과 학교 등 자율적 자정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미국과 법률로 규제하는 유럽을 비교한 내용이면 충분했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규제처벌법은 각각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동시에미국처럼 혐오표현규제처벌법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숭미(!)주의자이자 혐오표현 문제를 국가의 개입 없이사회에서 직접 해결하려는 행동가들일 것이다. 혐오표현 규제 옹호론이 맞서야하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도 바로 이들이다.”(141)라고 주장한다. 원천 봉쇄의 오류다.

 

혐오표현에 대한 법률이 미비하고 문제 인식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백퍼센트 공감한다. 섬나라처럼 고립된 지정학적 위치와 유럽이나 미국처럼 인종, 종교 문제가 첨예하지 않았고 문화적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당연한 결과다. 법은 현실을 앞서 갈 수 없다. 사회 현실과 맥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하는 습관과 오류를 이 책도 피해가지 못했다. 토양이 다르면 자라는 식물이 다르고 같은 작물도 맛이 다르다. 주장과 설득이 아니라 학문적인 비교, 정리, 논쟁거리를 제시하는 정도에 머물러야 했다.

 

지금까지 나의 논의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주장과 무관한 형식과 논리에 대한 엉성한 화풀이였다. 새로운 앎을 얻은 것도 아니고, 기존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으며, 대안을 제시하거나 해결방안을 제안하지도 못했으니 지식 습득을 위한 책이라면 다른 방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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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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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의 플레이는 아름답다. 종목과 상관없이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다. 물흐르듯 거침없고 억지스럽지 않다. 메시와 호날두는 나달과 페데러와 비교된다. 나는 메시와 페데러의 스타일이 좋다. 원고를 마무리하는 날 호주 오픈 16강에서 한때 세계 랭킹 1위였던 노박 조코비치를 3:0으로 이겼다. 두 번이나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호주의 전설 로드 레이버는 이 경기를 멀리서 지켜봤다. 그리고 오늘, 정현은 싱겁게 8강을 통과했다. 준결승 상대는 황제칭호가 붙은 로저 페데러. 무명의 선수들은 그렇게 거장의 벽을 넘는다. 세월은 가고 영원한 승자는 없다. 지구처럼 공은 둥글다. 한때, 화려했던 명성과 막강한 권력과 엄청난 부귀영화도 찰나에 불과하다. 언제나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통장 잔고, 아파트 평수, 사회적 직위는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을까. 우리가 사는 공동체 안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권력을 거머쥐는 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라. 승진을 준비하는 교사,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기는 관리자, 진급을 노리는 장교, 당선이 목적인 정치인, 경찰과 검찰의 승진 체계는 참담하다. 86년생 정현이 호주오픈 4강에 오른 날, 영화 1987를 미루고 있는 것처럼 오래 미뤘던 책 지연된 정의를 펼친 건 실수였다.

 

잘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때로 벼랑 끝에 서야 합니다. 걱정마세요. 살길이 열릴 겁니다.”

도망자로 한 세월을 산 류영준의 말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됐다. 슬픔과 상처 없는 사람 없듯이, 불안과 걱정 없는 인생 역시 없을 거다. 내게 필요한 건 떠날 준비가 아니었다. 글쓰기에는 마감이 필요하듯이, 어떤 선택에는 준비보단 결단이 더 중요하다. - 18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의 재심청구 사건 기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추악한 이면이다. 아름답고 즐거운 뉴스로 가득한 세상은 불가능하다. 파산 직전 변호사와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헤매던 기자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사건은 시작에 불과하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은 어떤가. 아직도 진행 중인 완도 무기수 김신혜사건. 지연된 정의는 지연된 인생보다 비참하다.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영화 자백부터 유서대필사건의 피해자 강기훈씨에 이르기까지 역사책에서 경험했던 야만의 세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외면하거나 눈감을 뿐. 그 누적된 시스템의 오류가 이명박근혜를 낳았고 원세훈, 김기춘을 만들었다.

 

황당한 범인 조작 사건의 발달은 대개의 경찰의 사건 조작과 검찰의 동조, 판사의 동조로 마무리된다. 완벽한 팀웍이다.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는다. 가짜 살인범 3인조는 형사 장해구와 오재경이 조작했고 김앤장에서 돈벌레가 된 검사 최성우가 진범을 다시 풀어준다. 이명박 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당시 검사장 이종찬은 진실을 외면한다. 진범이 자백하고 조작된 사건 기록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버티는 이유는 자신들의 명예, 권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한 돈벌이 때문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가한 국가의 폭력은 최악이다. 누명은 벗었지만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도 않는다. 뻔뻔해야 잘 사는 법.

 

국가가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삼례 3인조를, 고졸의 가난한 박 변호사가 사람으로 대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 박변호사의 변론은 거기서 출발하고, 다시 거기로 향했다. 박 변호사는 그걸로 싸웠고, 그걸로 이겼다. - 114

 

중국집 배달을 하던 15세 소년이 누명을 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범이 나타나 황상만 형사가 집요하게 매달렸으나 검사는 끝까지 기소하지 않았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한 사람의 인생보다 중요한 건 자신들의 승진과 성공이었으므로. 묻고 싶다. 〇〇 형사, 정종화 검사, 김훈영 검사는 잘 살고 있나? 행복한가?

 

하지만 저는 죄가 없습니다.” K가 말했다.

……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죄 있는 자들은 늘 그렇게 말하곤 하지요.”

_프란츠 카프카, 소송중에서

 

사건은 모두 그렇게 시작됐다. 완도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수가 된 김신혜씨 사건도 그러하다. 강성구 형사는 보고있나?’

 

이 책은 지연된 인생을 사는 변호사와 기자의 활약기가 아니다. 확신의 함정에 자들이 벌인 명백한 실수 혹은 의도된 오류에 대한 보고서다. 그들은 개인적인 영달과 포상과 승진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이용했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라 함은 결국 공권력을 휘두르는 경찰과 검찰과 법원 조직에 몸담고 있는 인간의 실수와 오류다. 그러나 바로 잡히지 않고 바로 잡을 생각도 없다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법은 더더욱 정의와 거리가 멀다. 눈뜬장님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읽고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한다. 등따시고 배부른 돼지의 죄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물었다. 손석춘의 과격하고 서툰 사랑 고백,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후 오랜만에 다시 보는 후마니타스의 우리시대의 논리가 여전해서 반가웠지만 우리 사회의 이면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텍스트로 확인되는 그 깊숙한 행간의 그림자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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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전쟁 - 소비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김영준 지음 / 스마트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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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을 따를 수 없소.”

그럼, 인연을 끊어요.”

 

그렇게 결심한 후 그가 선택한 삶의 길을 함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에릭슨이 말한 결정적 시기는 생애주기마다 반복된다. 영화 나비효과를 비롯해서 타임 패러독스, 시간을 달리는 소녀, 하루, 슬라이딩 도어즈, 롤라 런처럼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 법. 선택은 잔인하고 결과는 현재와 미래를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합리적이지 않다.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의 기준에 따라 선택할 수도 없고 손익계산서를 놓고 따질 수도 없다.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버튼을 누른다.

 

모든 선택은 부조리하다. 자영업을 선택한 사람들의 결정은 어떤가. 선택지가 없었던 사람부터 놀이로 시작한 사람까지 상황과 맥락은 제각각이다. 업종, 입지, 시기, 투자금액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가 성공했든, 또 누가 문을 닫았든 결과에 따라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인지부조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귀인이론에 따라 그럴듯한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창업에 관한 행정 절차와 세법 등 객관적 규정을 제외하면 단 한 군데의 영업장도 동일한 조건은 없다.

 

대왕 카스테라, 벌꿀 아이스크림부터 코인노래방, 인형 뽑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영업의 메커니즘을 한 권의 책으로 배우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에게 세상 사는 게 그렇게 만만해보여?’라는 말을 내뱉지만 사실 그 말은 자기반성이다.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누가 똑같은 생각과 감정과 능력과 배경으로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건 먼저 살아본 사람들의 오만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자식을, 제자를, 후배를, 가족을, 친구를, 어린 사람을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말라.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다닌 기억이 선하다. 김영준의 골목의 전쟁은 전통 시장과 대형마트 사이에 놓인 자영업자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오해를 풀지도 진실을 찾지도 못했다. 김형준은 상품 가격의 결정과정, 자영업의 성패, 유행의 함정, 상권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나름의 시각으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골목의 자영업을 분석한다. 현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본질적 원인을 읽어내는 안목은 개인의 능력이다. 사적 경험과 통계 수치, 이론적 근거가 더해지면 믿음이 된다.

 

이 책의 장점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혹은 선택의 여지없는 자영업이라는 이슈다. 익숙한 소재 선택, 알려진 사실에 대한 분석, 간과하기 쉬운 오해를 쉽게 풀어낸다.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설명하고 근거와 이론으로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거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의지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판세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실패하지 않기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한 생존전략에는 분명 도움을 준다.

 

쉽게 말하자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가독성 있는 문장과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접하는 자영업은 누군가의 생업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미래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고통일 수도 있다. 사회학의 관점으로 경제의 흐름으로 트렌드와 라이프사이클의 변화로 자영업에 접근하는 책도 있겠지만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현실적인 문제로 녹여버린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경제학 박사가 떼돈을 벌 수 없듯이 이 책을 읽고 자영업에 뛰어들 수는 없다. 실수와 착각을 줄이고 오해와 편견을 없애는 역할로 받아들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안타까운 건 김형준의 분석과 조언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과 미래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데 있다. 행동경제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영업을 시작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마치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시장 경제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불공정한 계약과 갑질 논란,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 재벌 3~4세의 떡볶이와 순대까지 체인점까지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구조적 문제만 해결해도 자영업자들의 숨통이 조금은 트일 수 있다. 치열한 경쟁과 임대료 문제가 관건이지만 자영업자는 창업의 문제일 뿐 아니라 내 가족, 친구, 이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용적 목적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이지만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이해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눈앞에 현실을 외면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경제 비판서는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골목에 전쟁대신 평화가 찾아오길, 무엇보다 우리 삶이 전쟁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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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 조지 오웰 평론집
조지 오웰 지음, 조지 패커 엮음, 하윤숙 옮김 / 이론과실천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여전히, 인터넷은 놀랍고 신기하다. 성인이 된 후에야 모뎀으로 겨우 접속하던 시절. 한석규와 전도연처럼 영화 같은 일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네트워크 세상은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우매한 군중은 직접 민주주의에 버금가는 여론을 형성한다.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개인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신은 죽었다의 재현이었다. 통제된 언론과 권력기관의 압력은 석기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대신, 실시간으로 퍼지는 뉴스와 sns을 통해 확산되는 사건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홍수에 휩쓸리듯 전체 판을 읽지 못하는 분노, 혐오, 증오는 확대 재생산된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하는 사람도 생긴다. 피아 구분 없이 총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념, 정당, 계층, 성별에 따라 논리와 이성을 상실한 사람도 많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를 법과 인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쟁점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까?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를 이룬다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파간다에서 지적한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점은 포퓰리즘과 민심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 여론조작은 프로파간다로 가능하다. 언론은 여론을 이끄는 대신 목소리 큰 놈에게 끌려가기도 한다. 질문할 줄 모르는 기자,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로 월급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자의 기사를 새겨듣는 독자가 사라진 시대는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검색해서 뉴스를 전하면서 기자인척 하거나, 팩트 확인 없이 추측과 사견을 섞어 해설을 하는 기자는 이제 여지없이 걸러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치 뭘 연구하는지 모르는 연구원이 없는 연구소장이나 혼자 일하는 각종 모임과 단체의 대표처럼.

 

아날로그의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디지털 시대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였을 것.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정보격차 때문.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낮에 수평선을 본 사람과 밤에 파도소리만 들은 사람만큼 크다. 조지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서 천국과 지옥은 같은 곳에 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41)는 말로 그 시절과 이 시대를 하나로 묶어버린다. 그렇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 시스템과 구조를 바꿔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달라질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파간다는 어떻게 가능할까.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평화와 비폭력을 내세운 마틴 루터 킹과 폭력과 투쟁으로 맞선 말콤 엑스를 비교할 수 없듯 페미니즘 운동에 메갈리아는 숱한 이슈와 논란을 가져왔다. 지금도 그 논쟁은 계속된다. 시간의 문제일 뿐 변화는 계속된다. 국가의 정체, 권력구조, 경제체제도 끊임없이 변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행동도 변한다. 그러나 자연스런 변화는 없다. 생각의 전환, 실천적 행동이 이어져 변화가 일어난다. 급진적, 일시적 변화를 혁명이라 하고 점진적, 단계적 변화를 개혁이라 하자. 보다 큰 개념인 인권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사형제 폐지는 어떨까. 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물론 여성은 남성의 적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보편성과 범용적 원리를 들이밀지 말라는 논리는 타당한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김남주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로파간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 방법의 핵심은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 구조를 바꾸고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 늦었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지 못하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보는 환영이 아니며 실제로 이루어지지만, 느리게 진행되고 언제나 실망스럽다.”(42)는 말은 정운영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선언처럼 아프게 들린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게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디킨스 본인도, 빅토리아 시대 대다수 소설가도 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모든 프로파간다가 예술은 아니다.”(78)는 말로 흔들리던 시대의 예술을 평가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소설은 그대로 가공할 무기였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영향력은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그들의 말이 항상 옳고 선경지명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시선으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했다는 의미다.

 

예술은 글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를 여는 영화예술은 텍스트와 다른 힘으로 대중을 쥐고 흔들었다. 그것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는 방식대신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을 택했다. 찰리 채플린은 삼류 슬랩스틱 코미디의 달인이 아니다. 조지 오웰은 이 책에는 단 한편의 영화 이야기가 나온다. 위대한 독재자가 바로 그 영화다. 부분적으로만 봤던 영화 전체를 다시 봤다. 채플린은 영화 천재가 맞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연설만 들어보자.


위대한 독재자》 마지막 연설

 

찰리는 모두가 예상하는 연설 내용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관용, 상식적인 예의를 지지하는 투쟁 연설을 인상적으로 펼친다. 아주 대단한 연설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헐리웃 영어로 바꿔놓은 형태라 할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오래간만에 들어본 아주 강렬한 프로파간다였다.”(204)는 평가처럼 이 책의 제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예술은 찾기 힘들다. 선언적 의미의 민주주의, 자유, 평화, 인권, 평등에 대한 가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프로파간다는 20세기 예술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앞으로도 지속되야 할 예술의 가치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매일 쏟아지는 책과 텍스트는 개인적 기록으로 의미 있는 비평으로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가치또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면 인정받을 수도 없고 그 판단 또한 모호하며 기준 또한 점점 희미해진다. 러디어드 키플링, T. S. 엘리엇, 살바도르 달리, 조나단 스위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에 대한 조지 오웰의 평가는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한 대로 정치적이다. 어떤 예술이 프로파간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소련은 고속 성장을 보이는 대국으로 과학 연구자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후하게 대우한다. 심리학과 같은 위험한 학문을 가까이 하지 않는 한 과학자에게는 특권이 주어진다. 반면 작가는 극심한 박해를 당한다. 일리야 예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은 막대한 돈을 받고 있지만 그와 같은 작가들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 즉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 341

 

 

조금이라도 가치를 지니는 작가의 글은 언제나 온전한 자아가 만들어내는 산물이어야 하며, 이 자아는 한쪽에 비켜선 채 진행되는 일을 기록하고 그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일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결코 속지 않아야 한다. -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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