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교실
오가와 히토시 지음, 안소현 옮김 / 파이카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니콜 키드먼의 <래빗 홀>과 브래드 피트의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생의 불가해함을 읽어내야 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봐야 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슬픔에 대한 분노와 허무를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이창동의 <밀양>과 또 다른 관점에서 두 편의 영화를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웰컴 투 마이 하트>는 그 슬픔에 대한 미국식 해법과 위로를 보여준다. 네 편의 영화는 단순히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관점이 아니라 죽음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행위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면 누군가의 죽음은 철학의 시작이다. 그것이 생물학적 죽음이든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처럼 이별과 부재로 상징되는 존재론적 죽음이든 말이다.

 

오가와 히토시는 철학의 교실에서 죽은 철학자들을 교실로 호출한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 3명과 30대 미혼 직장인 그리고 40대 초반 주부에게 철학을 이야기하는 철학자를 생각해 보자. 첫 시간에 등장하는 하이데거. ‘죽음을 통해 자신의 철학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핵심을 설명한다. 청중은 고교생과 직장인과 주부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독자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형식을 갖춘 책이라면 난이도와 깊이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아주 쉽고 간단하게 중요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 마지막 열 네 번째 시간에는 저자인 오가와 선생인 등장한다. 전체 열 네 개의 강좌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헤겔, 칸트, 퐁티, 레비나스, 아렌트, 롤스, 플라톤, 알랭, 푸코, 마르크스, 사르트르, 니체가 등장한다.

 

이들이 무작위로 호출당한 것은 아니다. 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철학교실에서 을 이야기하고 사회를 설명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말한다. 영화 <웰컴 투 마이 하트>에서 말로리는 더그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는 거냐고 묻는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하이데거는 첫 시간에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삶입니다.’라고 말한다. 삶은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을 이야기하는 헤겔, ‘이성과 욕망을 이야기하는 칸트, ‘고민을 이야기하는 메를로 퐁티……. 한 시간에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며 그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도식화 시켜놓은 메모는 독자의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관념적일 수 있는 철학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유의 흔적들을 몇마디 개념어와 화살표로 정리하는 것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지만 철학이 막연하게 어렵거나 두렵다고 느끼는 독자에겐 친절한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살을 발라내고 뼈대만 세운 핵심 요약집은 아니다. 간략한 분량이지만 핵심적인 내용과 개념들을 정확하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한 권도 읽지 못한 철학자도 있지만 책을 몇 권 읽은 철학자의 강의는 알기 쉽고 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헤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개인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국가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국가는 늘 국민이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55

 

이 책이 장점 중 하나는 저자의 목소리가 배제된 채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상공간이지만 교실에 둘러앉아 철학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느낌이다. 딱딱한 교실이 아니라 철학 카페로 설정했다면 조금 더 분위기가 부드러워졌겠지만 어쨌든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중간 중간 등장인물들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고교생 다운 질문과 영화를 좋아하는 이사무의 이야기가 생기를 불어넣는다. 일장적인 강의가 아니라 편안한 대화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토론 수업을 하는 기분이 든다.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는 문득문득 라는 질문을 한다. 반복되는 생활, 지루한 업무, 하기 싫은 일들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기도 한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런지 질문하고,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배려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플라톤이 들려주는 연애이야기, 니체의 인생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노동의 차이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다른 내일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노동은 살아가기 위한 자연적인 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음식을 만들거나 빨래를 하거나 이른바 생계에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입니다. 이에 비해 일은 비자연적인 활동을 가리킵니다. 일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은 도구나 건축물 같은 공작물입니다. - 159

 

그리하여 다람쥐처럼 맹목적으로 쳇바퀴를 굴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탈주를 꿈꿀 수 있는, 두근거리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철학자들에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지식이나 개념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와 구체적인 방법이 아닐까. 러셀이 말했듯이 정답을 찾는 대신 끝없이 질문을 던지면 되지 않을까.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 들뢰즈는 탈주를 이야기했습니다. ‘탈주는 기존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그곳에서 일탈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입니다. - 164

 

 

120130-0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주주의 앞에 자유가 붙이려고 목숨 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여 자유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의 정체로 삼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할 것인가. 과연 21세기형 빨갱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사회 민주주의로 양분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가치가 아니라 제도에 불과하다.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의 문제는 국가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이전에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정치 제도를 실험해왔다. 현재까지 검증된, 가장 인간적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치제도는 민주주의. 하지만 이 제도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변형된 형태를 띠며 변화해왔다. 정치 제도는 시대적 가치를 반영하며 변증법적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 제도에 최선은 없다. 정치권력의 부침과 선택에 따른 결정일 뿐이다. 우리는 현재 어떤 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으며 그것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 100년간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낡은 이념대립의 시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라고? 바보야 문제는 안보야!’라는 헤드라인을 단 인터넷 신문이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 첫 화면에 걸리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이것은 좌우의 대립이 아니라 안철수식으로 말하자면 상식의 문제다. 자괴감이 드는 이유는 모든 갈등과 대립이 이념의 문제로 환원되는 대한민국 사회의 단순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볼 때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웃한 일본과 중국과는 또 다른 이미지의 나라를 떠올려 보자. 가깝게 한미FTA’를 위시해서 대한민국의 모든 제도와 문화의 기준은 미국이 아닌가.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현재 진행형의 꿈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의 준거집단 미국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

 

미국은 가장 선진적이고 완전한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가장 잘 사는 나라, 완벽한 안보를 갖춘 나라, 민주주의가 완전하게 실현된 나라가 미국일까. 미국 시카고의 노동 전문 변호사로 하버드대학교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토머스 게이건의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는 우리에게 미국에 대한 선입견을 수정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를 제공한다. 한국의 사회학자의 미국 비판, 한국 유학생의 유럽 이야기 등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서양 이야기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콤플렉스로 비춰지기 십상이지만 미국 사람이 이야기하는 미국 이야기는 어떤가. 그것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구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로 생각하는 하버드대학 출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 하버드 교수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했을까라는 의심어린 눈초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미국의 변호사가 전하는 미국과 유럽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들을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 책은 미국 사람이 이야기하는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초점은 유럽에 맞춰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독일에 집중되어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 통일되면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모델이 될 만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독일의 통일과정과 이후의 상황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을까. 미국 변호사 토머스 게이건은 미국식 삶과 유럽식 삶을 적나라하게 비교한다. 그간 수많은 책들을 통해 끝없이 비교해 왔던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통계적인 방법으로 계량적 접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책보다도 가장 적나라하게 그리고 실감나게 미국과 유럽을 비교체험 할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순하게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을 비교하는 1부를 앞세워 베를린에서 직접 체험한 일들을 통해 구체화 시킨다. 개인의 직접 체험을 일반화시키는 오류는 이 책의 한계일 수 있지만 피상적인 현상에 머물지 않고 문화적 바탕과 인문학적 사유를 토대로 한 비교 체험은 작가의 주장에 신뢰를 부여한다. 미국과 유럽, 아니 미국과 독일은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와의 비교 체험이다. 1%를 위한 나라와 99%를 위한 나라, 선택은 잔인하지만 우리는 번번이 상식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

 

부나방처럼 모든 국민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이기심,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초법적 욕망, 노동자를 무시하는 풍토, 직업에 대한 잘못된 인식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점검해 보는 것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성공 신화에 목매는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관점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 사람에 의한 미국 사회에 대한 심각한 경고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은 건강한가를 물어야 한다.

 

죽지도 않은 강을 살려야 한다며 수십조를 쏟아 붓는 대통령은 죽지도 않은 경제를 살려줄 것이라고 믿는 국민들이 선택했다. 자기 수준에 맞는 정치 지도자를 갖게 마련이라지만 우리에겐 지나치게 가혹하다. 한미 FTA, 인천공항 매각, KTX 민영화 추진 등 그들이 추진하는 경제 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우리는 곰곰이 따져 본 적이 있는가. 대한민국의 주인은 누구이며 그들은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미국식인가 유럽식인가, 아니 미국식인가 독일식인가. 그것은 가치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냉정한 현실의 문제이며 우리들 삶의 문제이다. 선택은 잔인하고 결과는 참혹하다. 우리에게 미쿡은 과연 무엇인가. 미국은 우리의 미래인가, 반면교사인가.

 

 

120124-0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을 위한 선언
알랭 바디우 지음, 서용순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잊었다, , 무엇 때문에 알랭 바디우를 읽고 싶어졌는지. 미루어 짐작컨대 어떤 책을 읽다가 인용 부분이 좋았거나 그의 철학 사상을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거나.

 

철학은 때때로 삶의 도피처가 되거나 가장 실용적이지 못한 논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여전히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하는 인간 그것이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웅변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아닐까. 철학은 그 생각의 갈피를 잡아주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고민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철학을 밥과 물만큼이나 꼭 필요한 무언가로 여겨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 우리가 철학자들을 우리 시대를 위한 독창적이고 확인 가능한 연료를 제시하는 사람들로 이해한다면, 또한 주석가들과 필수 불가결한 원로들, 공허한 에세이스트들을 무시한다면, 철학자는 열 명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 철학을 위한 선언, ‘가능성, 41

 

철학을 위한 선언사랑 예찬을 연달아 읽으면서도 1989년과 2009년의 사이만큼이나 철학과 나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은 것 같다. 20년의 시차를 둔 책들이지만 문제적 철학자의 생각은 낯설지 않았다. 두 책의 내용과 성격이 달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철학의 방법과 태도가 철학을 위한 선언이전만큼 달라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태도와 방법에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고 사회적 상황 등 외적인 조건들이 주는 충격도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철학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와 관련된] 정세를, 다시 말해 진리들의 사유 가능한 결합(conjonction)을 발언하는 것이다. 철학은 시대의 균열에 대해 사유하고, 자신을 조건 짓는 것을 반성적으로 비틀기 때문에, 대체로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조건에 의해 지탱한다. - 철학을 위한 선언, ‘조건들’, 58

 

알랭 바디우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은 서용순의 해제가 우리를 먼저 기다린다. 바디우 철학의 흐름과 철학을 위한 선언의 지위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주는 이 글은 본문을 위한 에피타이저로 적절하다. 현존하는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바디우의 지적 연대기를 그의 저작과 함께 소개하고 있어서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도움이 될 듯하다. 바디우는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68혁명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알튀세르와 결별하고 마오주의에 경도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70년대의 마오주의를 거쳐 바디우의 철학을 가능케한 존재와 사건은 그의 주저가 된다. 하지만 그의 철학적 담론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은 바로 철학을 위한 선언이다. 이 책은 철학의 종말 운운하던 당대에 던져진 일종의 도발이다. 어찌 보면 생뚱맞은 제목이다. 모든 선언은 도발이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바디우는 수학, 정치, 예술, 사랑등 네 가지를 진리 생산의 절차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 예찬은 그를 이해하는 아니, ‘사랑을 이해하는 독특한 방식이 된다.

 

사랑은 만남이라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이다.’(철학을 위한 선언, ‘사건들’, 123)는 정의는 사랑에 대한 시각이기 전에 철학에 대한 관심이다. 세상에 진리는 존재하는가. 바디우는 모든 진리는 대상이 없다.’(철학을 위한 선언, ‘문제들’, 134)는 말로 답을 대신하다. 주체와 대상에 대한 철학의 오래된 논쟁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결국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이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사랑이란 만남을 넘어서 사랑이 기초 짓는 순수한 둘에 대해 충실하다고 선언하고, 남성과 여성이 있다는 유적 진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철학은 오늘날 유적인 것 그 자체에 대한 사유이다. 그것은 시작되고 있고, 시작되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다. '과거의 어두움처럼, 정체 모를 화려함이 펼쳐지리라.' - 철학을 위한 선언, ‘유적인 것’, 158

 

책의 말미에서 사랑에 대해 그리고 철학에 대해 이렇게 선언한다. 바디우는 20년 만에 사랑 예찬을 내 놓는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아르튀르 랭보,지옥에서 보낸 한 철, ‘착란’)라고 랭보를 앞세운 채. 바디우는 사랑에서 시작하지 않는 자는 철학이 무엇인지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여 철학에서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웅변한다. 한마디로 사랑을 모르는 자 철학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선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예컨대, 보험 계약서의 안전과 제한된 쾌락이 가져다주는 안락이라는, 사랑의 두 가지 정적(政敵)을 발견하게 됩니다. - 사랑 예찬, ‘위협받는 사랑’, 19

 

사랑은 철학뿐만 아니라 진리와 정치, 예술과도 연애를 한다. 안전과 안락이라는 정적을 물리치고서. 이 책은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연이나 대담을 엮어낸 책의 단점은 전체적인 구성이 탄탄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부분에 매달리기 쉽다는 점이다. 대화를 이끌어가는 질문자의 의도와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디우의 사랑이야기는 세계를 해석하는 또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기능하는가. “세계는 사실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랑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혁신 속에서 취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만 합니다.”(사랑 예찬, ‘위협받는 사랑’, 20)

 

섹스에서 당신은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결과적으로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될 뿐입니다. 타자는 당신이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이용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랑 속의 타자라는 매개는 그 자체로 가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만남입니다. 다시 말해 타자를 있는 그대로 당신과 함께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타자를 공략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섹스의 실재에 관한 상상적 그림일 뿐이라는, 정말이지 진부할 뿐인 그런 개념보다 훨씬 더 심오한 개념적 접근에 해당됩니다. - 사랑 예찬, ‘철학자들과 사랑’, 29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저는 타자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 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내 존재를 위해 네가 있는 그 원천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 사랑 예찬, ‘결론’, 113

 

사랑에 관한 한 사람들은 모두 철학자가 아닌가. 철학자가 감히 사랑을 논하다니!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사랑만큼은 철학자에게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타자에 대한 사랑은 의 고독으로부터 촉발된 공격이고 도전이다. 내 존재를 위해 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독한 존재들의 허탈한 몸부림은 아닌지. 그 최면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굳은 신념은 아닌지. 옮긴이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일, 그것은 결핍을 끌어안은 그 상태 그대로 삶을 살아나가는 자그마한 경험들, 시련과 위험을 삶의 조건으로 삼아 내 경험과 타자의 경험을 매일 그 길 위에 포개놓으려는 자그마한 노력은 아닐까? - 조재룡, ‘옮김이의 말’, 136

 

결핍을 끌어안고 길 위에 포개놓으려는 욕망과의 시간차. 철학을 위한 선언의 번역을 맡은 서용순은 사랑 예찬의 해제에서 바디우의 사랑을 이렇게 요약한다. 사랑은 이다. 어떤 알레고리로 을 사용했든지 그 의미들의 차이를 헤집어 내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사랑에 대한 바디우의 사유는 을 견지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질 수 있다. ‘의 지속을 사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디우의 철학이 요구하는 사랑에 대한 성찰이리라. - 서용순, ‘바디우의 철학과 오늘날의 사랑’, 165

 

 

20120118-005, 0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는 독자를 자신의 소설에 취하게 할 의무가 있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 한 작가를 가슴에 품게 되고 오래 기억하며 그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된다. 그것은 소설의 재미뿐만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점 등 독특한 개성에 기인한다. 여러 작품을 통해 점점 빠져들게 되는 작가도 있고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괜찮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첫 눈에 반해 버리는 작가도 있다. 처음 만나는 독자들의 가슴 속에 펼쳐지는 그 다양하고 내밀한 반응이 궁금할 때가 있다.

 

거기, 당신?으로 처음 만난 윤성희의 소설은 따뜻함이었다. 차마 긴 이야기로, 거짓 소설로 담아낼 수 없어 짧은 시의 언어가 지배했던 80년대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90년대 소설을 어떻게 떠올리고 있을까. 거대 담론의 소멸과 여성 작가들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이슈가 되었다. 미시적 관점과 내면의 문제에 대한 섬세한 관심은 여성 특유의 감각적인 문장과 1차적인 관계망을 실핏줄처럼 상세하게 그려냈다.

 

2000년이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했다고 해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IMF라는 전대미문의 경제적 충격 이후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자유경쟁 질서의 고착은 삶의 양상과 태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문학 외적 조건들이 작품에 반영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리는 듯하다. 사실주의 문학이라고 볼 만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나 정도상의 모란시장 여자정도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소설은 사소하고 소소한 일에 머물며 때로는 독자들을 칙릭(chic-lit)에게 빼앗기기도 한다.

 

문학의 위기는 가리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이전에도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것은 다양한 통신 매체의 발달과 흥성거리는 볼거리와 놀거리 때문이 아니다. 중심을 잃어버리고 주변인들에 대한 위무와 개인의 슬픔과 아픔에 호소하는 일관된 방식 때문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윤성희의 소설은 거대한 흐름 바깥을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웃는 동안이 보여주는 풍경은 익숙하지 않고 현실 안팎이 뒤섞인 만화경을 연상케 한다. 가령 ‘340분이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문장에서는 건조한 모래 바람이 인다. 감정은 메말랐고 익숙한 풍경은 낯설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찾아낸다.

 

우연이란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라는 것을 첫사랑에게 배웠다고 적으리라. - '부메랑' 중에서

 

해설에서 강동호는 영원히 우연적인 것이 기적을 구원한다는 모호한 문장을 낳았지만 윤성희의 우연은 기적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기대하는 모든 희망을 조롱한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죽은 사람 혹은 유령 들은 현실 바깥에서 현실을 들여다보는 역할을 하지만 그 현실이 특별히 뒤틀리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주인공 혹은 관찰자가 이물스럽다. 그것은 정교한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집에는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감기이후에 오랜 만에 만난 그녀의 소설들은 무미건조한 물맛이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커피향처럼 은은하지도 않고 찬 냉수처럼 마시는 순간 감각을 깨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용하게 그리고 막힘없이 스민다.

 

투명 인간처럼 서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단편과 단편들 사이를 넘나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소설을 위해 탄생한 개성적 인물들이 아니다. 특별히 이 시대 밖으로 쫓겨난 소외된 이웃도 아니다. 평범에 기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주목 받는 인생도 아니고 특별한 존재도 아니라서 뭐라 명명하기도 어렵다. 주변인?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아주 재미있고 나름의 특징을 가진 듯 보이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보면 모두 투명인간이 아닐까. 그래서 놀란 라이언처럼 강속구를 주무기로 하는 선수가 아니라 아주 느린 공을 던지는 은 투명인간이다.

 

형의 최대의 무기는 느린 공이었다. 너무 느려서 아무도 치질 못했다. 형이 공을 던졌다. 나는 그 공이 날아오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느린 공이었다. 아주아주 느린 공, 나는 손바닥이 아픈 것처럼 엄살을 피웠다. 그리고는 말했다. "볼이야.“ - ‘느린 공, 더 느린 공, 아주 느린 공’, 281

 

단편들을 다 읽고 나니 스토리는 사라지고 이미지와 밋밋한 문장의 뼈다귀만 남는다. 형체없는 주인공들과 유령들도 사라지고 헛된 일상과 현실 바깥일이 궁금해진다. 소설을 읽는 일은 현실의 메트릭스 안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비춰보는 일이다. 열정도 냉소도 없이 바라보는 텔레비전 화면처럼 멀건 눈으로 창밖을 보는 일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는 인생처럼 덧없다. 소설을 해석하려는 헛된 노력처럼.

 

우리의 삶은 필연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필연처럼 움직이는 소설의 주인공이나 우연의 무질서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우연과 필연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 삶의 진실은 아닐까. 긍정도 부정도 없이 묵묵하게 오르고 다시 올라야 하는 시찌프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등산객처럼.

 

필연의 사슬에 결박되어 있기보다, 우연이라는 무질서의 너울 위에서 표랑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것이 인간의 삶이다. - 강동호, 해설 영원히 우연적인 것이 기적을 구원한다첫 문장.

 

 

20120115-0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이론이 수많은 검증을 견뎌내고 수많은 옳은 예측을 했을 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 된다. 곧 어떤 이론이 대단히 강력한 지지를 받아서 모든 합리적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 제리 A. 코인, 17

 

종교와 과학의 오해 혹은 진실

 

사실(fact)와 진실(truth)은 다르다. 객관성을 기초로 한 사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동의하는 것이지만 진실은 컨텍스트(context)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만 과학의 영역에서는 검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이 학문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반복 실험이 가능하거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증거가 필요한 과학이 세상의 모든 진실을 드러낼 수는 없다. 정상과학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증거들은 토마스 쿤의 말대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며 과학혁명을 일으켜 왔다. 이론의 합목적성을 달성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은 오늘도 여전히 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며 인류 문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여전히 종교와 과학이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인간 이성의 발달과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해 근대 이후의 종교는 중세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의 역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오래 전에 각자의 영역에 대해 합의가 된 것이 아닌가. 종교가 있든 없든 혹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도 매일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당대 최고의 과학 출판 에이전트이자 편집자로 평가받는 존 브룩만이 엮은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학과 종교의 갈등에 대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창조론진화론이라는 아주 오래된 갈등으로 구체화된다. ‘창조론은 다시 지적 설계라는 변형된 이론으로 대표된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벌어진 키츠밀러 대 도버 학군 사건은 이 책의 핵심 논쟁에 대한 현실적 충돌이다. 200512월 연방법원 판사 존 E. 존스 판사가 지적 설계를 공교육 기관에서 진화론과 함께 가르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라는 법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의 문제를 법으로 제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다.

 

어쩌면 진화의 신비는 생명 세계에서 특별하고 신비로워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일상적인 생물학적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의 설명들을 증거를 통해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 닐 슈빈, 123

 

그러면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후 인류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인접 학문 분야의 발달과 오랜 검증을 거쳐 핵심적인 이론으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었던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받아들여야하는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누구에게나 쉽게 수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대에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창조론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진화론은 수용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각 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 열여섯 명은 한 목소리를 낸다. ‘지적 설계는 과학이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말이다. 지적 설계론이 사실인지 아닌지 혹은 진실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과학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더 이상 불필요할 만큼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과학이 요구하는 어떤 절차적 검증도, 연구도, 논문도 없는 상태로 주장만 난무한 이 이론이 여전히 이슈가 되고 법적 판결을 받아야 할 만큼 심각한 이유는 과학의 대결 때문이 아니라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 때문이다. 생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혹은 진화의 과정에 발생하는, 아직 증거가 없는 빈 구멍들은 지적 설계론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아직 인간의 과학으로 인류가 쌓은 지식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의 빈자리를 모두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지적 설계로 메워버릴 수는 없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거 등 세계적인 과학자들은 분명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지적 설계를 허구성을 폭로하고 결국 과학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라는 존재를 숨긴 채 지적 설계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명확하고 논리적인 증거와 그간의 과학적 발견을 통해 지적 설계가 얼마나 무모한 주장인지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이들의 주장을 통해 과학의 역할과 종교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신비가 주는 철학적,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종교는 더더욱 과학의 자리를 탐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과학과 종교로 해결되지 않는 질문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것은 게으르거나 회피한다고 해서 누군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영구적인 논리적 해법이나 사실적 해법이 없는 인간 존재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과학은 유독 적합하지 않다. 예컨대, 죽음을 피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연인을 찾고, 정의를 확보하는 문제들이 그렇다. 과학은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이래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과학은 오직 이렇게 할 수 있다거나, 이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스콧 애트런, 166

 

 

20120110-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