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이야기 - 이국적인 유혹의 역사 살림지식총서 251
정한진 지음 / 살림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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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달콤한 맛의 유혹과 부드러움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을 떨치기 힘들다. 어떤 형태로든 초콜릿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외래 음식은 먹는 기호 식품이라기보다 하나의 상징이다.

보통 발렌타인 데이는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제과 업체들이 노리는 대목이다. 19세기말 영국의 캐드버리사에 의해 시작된 발렌타인 데이의 선물용 포장 초콜릿은 이제는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사랑을 고백하는 날에 초콜릿을 선물한다는 것은 그만큼 초콜릿의 맛과 향이 사랑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유혹은 초콜릿의 기원과도 무관하지 않다. 카카오 열매에서 분리된 씨앗을 갈아 마시는 초콜릿 음료는 멕시코에서 시작되었다. 잉카와 아스텍 족에 의해 신들의 음식으로 불리워진 이 음식은 콜럼부스가 1502년에 발견했지만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에 의해 본국에 전파된다. 이후 유럽으로 서서히 확산되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스위스로 퍼져 나가면서 초콜릿은 특권층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음료였고 주로 몸에 좋은 약용이나 최음제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 종교인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기도 한 음료이다. 지금 우리가 먹는 판형 초콜릿은 1830년경 영국 프라이사와 캐드버리사에 의해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밀크 초콜릿과 액상 초콜릿을 부드럽게 하는 ‘콘킹’ 기술이 개발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다. 벨기에나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다양한 제품이 개발되었고 특히 1920년대 미국의 허시에서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키세스 등에 의해 대중화 획일화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병사들에게 군용식량으로 초콜릿 바를 지급한다. 육이오 전쟁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초콜릿이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대량 생산된 초콜릿의 경우 설탕과 유제품의 함량이 많아 카카오 고유의 맛과 향을 느끼기 어렵다. 질 낮은 바닐라 향을 첨가한 초콜릿은 카카오에서 추출된 본래의 맛을 떨어뜨린다. 초콜릿은 당과류나 과자류로 변형되어 다양한 형태의 제품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얼마전 롯데 제과에서 나온 ‘드림 카카오 56’는 대량생산 초콜릿의 맛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일본에서는 진작부터 56, 73, 85, 99 등 카카오의 비율이 상당한 초콜릿을 판매 했으며 카카오의 성분이 건강에 이롭다는 말 한마디에 판매량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카카오 99% 초콜릿은 블랙에 가깝고 단맛은 거의 없으며 향이 강하고 거의 쓴맛에 가깝다. 차안에 두고 출출할 때 답답할 때 한 알씩 녹여먹는 비상 식량으로 손색이 없다. 드림 카카오 56은 자이리톨 이후 롯데의 대박 상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책에는 초콜릿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종류 그리고 먹는 방법까지 다양하고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생리학과 심리학적 관점에서 초콜릿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는 부분이나 현재와 미래를 살펴보는 부분이 너무 소략해서 아쉽지만 전체적인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는 손색이 없다.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음식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짧고 간단하게 읽어낼 수 있는 시리즈의 장점을 잘 살린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초콜릿은 여전히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다양한 제품들이 선보이고 다양한 가공 방법들이 생기겠지만 먹는 음식을 넘어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기호로서 초콜릿을 대하는 방식보다는 맛있는 음식으로 입안에서의 미각으로 먼저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커피와 더불어 생산과정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의 강제 이주와 노동으로 점철되어온 역사를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초콜릿이든 아이스크림이든 뭔가 달콤한 맛이 생각나는 날이다.


070109-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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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10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은 초콜릿이나 단팥이 든 빵, 단 것을 먹고 싶어지는 밤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sceptic 2007-01-1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행복하게 보내고 싶어요...님도 오늘은 초콜릿 한 조각 드세요...
 
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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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서로에게 무한한 행복을 주거나 극단적인 불행을 선물한다. 서로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으며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는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찢어지고 갈라진 관계를 끊어버릴 수 없을 때 불행은 시작된다. 특히 헤어진다고 해결되지 않는 가족 관계가 가장 심각하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그 관계는 물론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관계의 출발이다.

<천 개의 공감>은 김형경의 ‘심리 치유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타인에게 말걸기를 통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말을 걸어도 좋겠다. 다만 말을 걸 수 있는 적당한 대상과 방법이 있다면 말이다. 한겨레 지면에 연재되던 코너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이 책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짤막한 사연과 자기 상황에 대한 문제를 보내면 김형경이 상담과 조언을 해주는 형식의 글들을 모았다.

자기알기, 가족관계, 성과사랑, 관계맺기 등 4개로 나누어진 이 책은 아무 때나 어디를 펼쳐 읽어도 상관없다. 짧은 글들 속에 압축된 상황들은 대개의 경우 일반적인 80% 범위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극도의 자기 부정이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상처입는 사람들,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거나 대책이 없는 사람들의 괴로움은 생각보다 심각해 보인다. 김형경은 거의 모든 경우에 예외없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사용하거나 시도하고 있다. 객관적인 분석이라는게 불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저자 나름의 잣대와 뚜렷한 방법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스스로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대응책을 제시하는 내용은 개별적인 상황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공감이 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일상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의 경우 생각보다 해답은 간단하다. 내면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면 갈등과 고민이 적어질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대한 판단도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대책은 자기 안에 있으며 문제는 스스로 풀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떤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당연히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단계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 사람들은 오히려 해법이 간단하다. 거울 마주보기를 통해 스스로를 인정하는 기본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족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에 관한 문제는 쉽지 않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예상치 못한 상황과 감정들과 부딪히게 된다. 사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고통스러울 수 있는 부분이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우리는 가장 큰 행복과 생의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신을 비추어 봅기도 하며 인생을 가꾸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 맺기에 실패할 경우 타인에 대한 혐오감을 넘어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특정인에 대한 관계가 전체로 확대되기도 하고 자신의 작은 문제가 타인들과의 관계 맺기에 지속적으로 간여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고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 영역에 대한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해 우리는 늘 고민하고 생각한다. 지혜롭게 그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의 생은 당연히 행복해 보이지만 그 방법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먼저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며 타인들과의 관계를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해와 용기이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으면 타인을 알 수 없고 안다고 해도 용기가 없다면 실천할 수 없다. 저자가 요구하는 해결책들은 스스로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부족한 상담자들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가. 가장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 용기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김형경의 잣대는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에 있고 id, ego, super-ego 사이의 관계를 풀어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리비도와 집단무의식, 어린 시절의 억압과 어머니와 애정관계가 실마리가 된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특히 ‘가족관계’나 ‘성과사랑’에 관련된 문제들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일 경우가 많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비법은 없겠지만 개인적 성향과 상황들이 모두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적인 처방이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만능 열쇠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를 진단하는 역할을 넘어설 수 없는 우가 많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거의 대부분 여성의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남성 상담자의 경우 상담자 자체의 문제를 부각시키거나 지적하는 반면 여성의 경우에는 상대에게 원인을 찾거나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여성은 가족 관계에서나 사회적 관계에서 약자인 경우가 많다. 감정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개별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부작용도 생길 수 있어 아쉽다.

전문 상담가나 의사가 상담자나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이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의 포괄적인 문제를 다룬 책으로서 ‘천 개의 공감’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책이다.


070108-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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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1-08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었었는데, 작가분이 심리학 전공이신가요? 아무튼 좀 특별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어요. 근데 천개의 공감은 소설이 아니라 신문에서 상담사례를 모은것이었군요.

sceptic 2007-01-0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김형경은 국문학 전공잡니다. 신문과 한겨레 상담 코너의 칼럼들을 모아놓았습니다. 꼭 여성들만의 입장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주로 여성들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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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 미래가 놓여 있다. 나는 항상 그렇게 믿는다. 겹침점이든 누빔점이든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그 간극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며 가치를 부여하고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물론 소설이 미래지향적이거나 희망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읽는 사람에게 주어질 미적 가치와 감수성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것이므로.

어떤 소설가를 좋아하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이다. 무엇을 좋아하는가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일단 소설의 특징을 뚜렷하게 결정하는 문체가 확실하지 않으면 내용이 목에 걸린다. 환상적인 이야기와 재밌는 입담은 소설가의 기본이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소설가도 많이 있다. 개인적으로 성석제의 소설은 문체가 먼저 보이고 내용은 그 다음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소설가는 행복하다. 성석제가 그런 경우다. 그의 소설 <참말로 좋은 날>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하나의 틀로 규정할 순 없지만 성석제의 소설이다. 그러나 조금 달라졌다.

7개의 단편을 모아놓은 이 소설집은 성석제를 미래를 예견한다. 만약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전제하에. 재치와 농담 속에 진한 페이소스를 담아내던 그가 조금 변화한 듯 보이는 것은 이전과 다른 몇 가지 요소 때문이다. 그 요소들이 새롭게 등장시킨 신무기는 아니다. 이전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의 변화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과거에 대한 기억들이다. 고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했지만 생활의 모습과 패턴이 달라져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가끔 지나버린 시간들을 되짚어 보는지도 모르겠다. <집필자는 나오라>는 박태보라고 하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가진 ‘숭고한 삶’의 가치를 되묻고 있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굳게 믿고 지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생존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특별한 경우지만 박태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일상과 현재의 극단을 드러낸다. 사회적 관심을 떠나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소설 장르다. 그런면에서 성석제도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80년대를 정점으로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소설들은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와 이 소설집에서 가장 뛰어난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 주목한다. 한 개인과 가정이 확대된 모습이 그대로 그 사회의 자화상이다. 법과 규칙 바깥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안쪽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어떤 방식으로 눈물을 흘리거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것도 개인차이겠지만 위의 두 단편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의 모습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속에서 인간이 배제되고 법과 규칙들이 선행할 때 생기는 불안과 고통은 당연히 지금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내용은 당연히 책을 읽고 판단할 문제이겠지만.

이 소설가 아니면 안되겠다 싶은 소설 중의 하나가 <고귀한 신세>와 <악어는 말했다>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했던 영화 <숨바꼭질>을 보다가 10분 만에 결말을 예견했던 것처럼 <고귀한 신세>는 시작 부분에서 결말을 상상했더니 그대로다. 일상에서 만나는 뻔한 이야기라는 뜻은 아니다. 산다는 것을 이렇게 유쾌한 비극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은 만만찮은 소설가의 내공이 필요하다. 특히 <악어는 말했다>는 지루한 술자리 장면이라는 내용없는 지루함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군데 군데 드러나는 재치와 마지막 한 마디가 인관 관계의 단면을 희극적으로 풍자한다.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성석제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는 이야기꾼이다. 아쉬운 면이 있다면 이제 긴 호흡의 장편을 통해서도 만나고 싶다. 깊이과 넓이를 더할 수 있는 작가의 장편을 기다려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같은 말들 속에 진저리를 쳐 본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성석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렴없이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소설에 대한 오독이라 할지라도. 홍수 처럼 쏟아지는 풍성한 말의 잔치와 그물처럼 촘촘한 법의 규칙들 속에서 살아남는 인간과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좀 더 귀기울이고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다.


07010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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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나남신서 72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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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쳤다는 표현 속에 이렇게 많은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미심쩍은 눈초리와 의심스런 생각을 갖긴 했다. 질병으로서 미쳤다는 표현과 흔히 일반적인 용어로 미쳤다는 말은 차이가 많다. 정상에서 벗어난 것을 일상에서는 미쳤다고 표현한다. 현대 의학에서 미쳤다는 표현은 쓰지 않지만 뇌의 이상이나 다양한 정신질환자를 우리는 흔히 미쳤다고 표현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면 미친 것이다. 그럼 나는 정상일까? 우리는 모두 정상의 범주 안에 놓여있나?

흔히 의미있는 작업들이라고 하면 인간 사회에 충격을 주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 언급하는 책들이 야간 산행에서 만난 등불처럼 반갑다. 누가 처음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들은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고전시대의 광기의 역사’라는 원제를 줄여서 번역했지만 특정 시대의 ‘광기’에 집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광기의 역사>로 읽어도 무난하다. 이 책은 책 자체가 갖는 의미와 저자의 명성을 무시하고 읽을 수 없어서 책을 읽는 내내 빛의 간섭현상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감시와 처벌>로 번역된 ‘감옥의 역사’로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푸코의 사유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

고전주의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광기’가 어떻게 다루어졌으며 어떤 방법으로 처리되었는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들여다보는 또다른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광기가 19세기와 어떻게 다른가?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는 광기는 무엇인가?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밑줄을 치며 잠깐씩 반복해서 읽어보았지만 쉽게 정리할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광기는 종교적 관점과 도덕적 관점에서 접근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이성이 아닌 비이성의 관점이냐 도덕의 관점이냐가 중요하다.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광기에 대한 태도와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가지 관점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도 처리 방법이 전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 사회가 지닌 ‘광기’에 대한 태도는 인간 이성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구빈원에서 출발해서 현재의 정신병원에 이르기까지 푸코가 추적하고 싶었던 광기의 역사는 ‘인간 이성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지혜에 비하면 인간의 이성은 광기일 뿐이었고, 사람들의 얄팍한 지혜에 비하면 신의 이성은 광기의 본질적 움직임 안에 놓여 있다. 큰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광기일 따름이고, 작은 차원에서는 전체가 그대로 광기이다. - P. 92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나는 미쳤나, 정상인가.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광기에 대해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지만 현재의 관점에서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적 의미와 태도가 달라졌을 뿐 광기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을 뿐이다.

숱한 역사적 자료와 텍스트를 넘나드는 푸코의 사유를 통해 ‘광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단숨에 읽어야 한다. 호흡이 끊기거나 단절되고 나면 하나로 집중하기 어렵다. 니체와 고흐, 아르토를 예를 들며 책의 ‘인간학의 악순환’으로 책을 끝내고 있는 저자의 의도는 예술에서 나타나는 광기가 사회적인 부분과 어떻게 다르게 수용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사회가 수용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에 따라 광기의 운명은 갈라진다. 광기를 어쩌자는 것도 어떻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조건인 ‘이성’에 반해 ‘비이성’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광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실재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푸코가 고민했던 생각의 끄트머리를 짐작할 수 있다.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들 것 같았던 역사를 돌아보면 정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미친게 미친게 아니라 정상이 비정상인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고민은 어떤 것인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용어와 개념이 낯선 부분들과 심각한 번역투의 문장(우리말 구조와 어순이 망가져버린)들이 문맥을 흐려놓고 이해를 방해하는 부분들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어렵지 않은 부분들도 어렵게 느껴지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었다.

광기는 다만 이성의 날카롭고 비밀스러운 힘일 따름이다. - P. 96

광기는 ''착각''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 P. 105

광기는 이성의 완전한 부재인데, 사람들은 광기를 ''이성적인 것의 구조''라는 바탕 위에서 그러한 것으로 곧장 인식한다. - P. 317

광기는 진실과 인간의 관계가 혼란되고 흐려지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광기가 일반적 의미와 특별한 형태들을 띠는 것은 바로 이 관계의 파괴와 동시에 이 관계로부터이다. - P. 400

광기는 설령 보호시설 밖에서 결백을 선고받는다 해도 어김없이 보호시설에서 처벌받게 된다. 광기는 오랫동안,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도덕의 세계에 유폐되어 있다. - P. 767


광기에 대한 무수한 정의들과 분석들을 통해 푸코가 생각하는 광기가 아니라 우리가 인식해 왔던 광기의 역사를 재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광기도 결국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0701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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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광기는 세계와 세계의 숨겨진 형태들에 연결되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인간의 약점, 인간의 꿈과 환상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 P. 78

 

지혜에 비하면 인간의 이성은 광기일 뿐이었고, 사람들의 얄팍한 지혜에 비하면 신의 이성은 광기의 본질적 움직임 안에 놓여 있다. 큰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광기일 따름이고, 작은 차원에서는 전체가 그대로 광기이다. - P. 92

 

광기는 다만 이성의 날카롭고 비밀스러운 힘일 따름이다. - P. 96

 

광기는 '착각'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 P. 105

 

사실상 수용의 역할은 부정적 배제였을 뿐만 아니라 긍정적 조직화이기도 했다. 통일성, 일관성, 기능성을 갖춘 경험영역이 수용의 관행과 수용의 규칙에 의해 구성되었다. - P. 171

 

17세기와 18세기에 광기가 방탕이나 자유사상과 동일한 이유로 감금될 때, 요점은 17세기와 18세기가 광기를 질병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두 세기에 걸쳐 광기가 다른 지평 위에서 인식된다는 것이다. - P. 213

 

광기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광기가 수용, 징벌, 교정의 영역에 속하게 되는 다른 경험과 동시대적이다. 문젯거리가 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병렬현상이다. - P. 221

 

사실 광인은 실증주의에 의해 의학적 지위를 부여받기 훨씬 이전인 중세에 이미 개인으로서 충분히 독립적인 존재였다. 그때 광인은 아마 환자로서의 개체성이라기보다는 인물로서의 개체성을 획득했을 것이다. - P. 224

 

수용은 비이성을 숨기고, 비이성이 불러일으키는 수치를 드러내지만, 광기를 명백히 보여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추문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지만, 그 다음으로 곧장 추문을 조직화하는데, 이것은 정말 이상한 모순이다. - P. 267

 

광기의 시간은 시계로 측정되지만, 지혜의 시간은 어떤 시계로도 측정할 수 없다.(윌리엄 브레이크) - P. 296

 

광기는 존재하는 바로 거기에서 자체의 진실을 말하고 스스로를 규탄하는 경향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상 전체로 펼쳐지는 경향을 내보이며, 세계 안에서 본성과 실증적인 현존 방식을 획득하려고 한다. - P. 301

 

광기는 이성의 완전한 부재인데, 사람들은 광기를 '이성적인 것의 구조'라는 바탕 위에서 그러한 것으로 곧장 인식한다. - P. 317

 

광기는 진실과 인간의 관계가 혼란되고 흐려지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광기가 일반적 의미와 특별한 형태들을 띠는 것은 바로 이 관계의 파괴와 동시에 이 관계로부터이다. - P. 400

 

물질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의 구분은 광기의 문제의식이 책임 있는 주체의 물음쪽으로 옮겨갔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의 의학에서 실질적 개념이 되었다. - P. 522

 

고전주의 시대를 대상으로 하여 육체적 치료법과 심리적 치료행위를 구별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익하다. 그 때에는 심리학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 P. 540

 

정신분석에서 문제되는 것은 결코 심리학이 아니라, 정확히 근대 세계에서 심리학이 본질적으로 은폐할 수 밖에 없었던 비이성의 경험이다. - P. 541

 

문명은 일반적으로 광기의 확대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과학의 발전은 오류를 일소하면서도, 연구를 즐기고 심지어 연구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결과를 확산시킨다. - P. 581

 

17세기는 진실의 상실에서 광기를 발견했다. 즉, 자연이 아니라 자유에 속하는 인간에게서 각성과 주의력의 역량만이 문제시되는 온통 부정적인 가능성을 발견했다. 18세기 말은 광기의 가능성을 환경의 구성과 동일시하기 시작한다. 즉, 광기는 잃어버린 자연이고 빗나간 감성, 욕망의 일탈, 척도를 박탈당한 시간이며 매개의 무한 속에서 상실된 직접성이다. - P. 586

 

이제 사람들이 미친 사람에 관해 말하게 될 때, 이때의 미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의' 직접적 진실의 땅을 떠나 자기 자신을 상실한 사람이다. - P. 596

 

정신병자는 진실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다. 즉, 모든 감각의 환각과 세계의 어둠에 내맡겨진다. 그의 진실은 하나하나가 오류이고, 그의 자명한 사실은 모두가 환상이며, 그는 광기의 가장 맹목적인 힘에 시달린다. - P. 611

 

수용의 작용에 의해서만 단번에 광기의 진실이 표명되고 광기의 본질이 풀려날 뿐인 것은 수용의 비어 있는 공간에서이므로, 공공의 위험은 사라지게 되고 질병의 징후는 소멸하게 된다. - P. 677

 

광기는 더 객관적일수록 더 불확실하게 된다. 광기를 검증하기 위해 광기를 해방시키는 행위는 동시에 광기를 이성의 모든 구체적 형태들 사이에 분산시키고 감추는 작업이다. - P. 723

 

고전주의 시대의 궁핍, 게으름, 악덕, 광기는 비이성의 내부에서 하나의 동일한 죄의식 속에 뒤섞여 있었고, 광인은 빈곤과 실업을 망라하는 대대적 수용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다. - P. 756

 

광기는 설령 보호시설 밖에서 결백을 선고받는다 해도 어김없이 보호시설에서 처벌받게 된다. 광기는 오랫동안,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도덕의 세계에 유폐되어 있다. - P. 767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는 침묵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광기를 예찬하는, 광기에 관한, 광기의 그 언어는 오래 전부터 침묵했다. - P. 785

 

고전주의 시대에는 광기를 위한 자율적 언어 또는 광기가 자기에 관해 진실한 언어를 말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광기의 문학이 없다. - P. 785

 

광기의 책략과 새로운 승리. 즉, 심리학에 의해 광기를 헤아려보고 광기를 입증한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는 심리학의 노력과 논쟁 속에서 니체, 반 고흐, 아르토의 과도함 같은 작품들의 극단성과 씨름하므로, 이 세계가 결백을 입증받아야 하는 것은 바로 광기앞에서이다. 그리고 이 세계 안의 어떤 것도, 특히 이 세계가 광기에 관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광기의 작품들에 의해 이 세계가 정화된다는 것을 이 세계에 확신시키지 못한다. - P.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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