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이제이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살아가는 동안 왜 사느냐는 질문을 심장 박동수 만큼 하게 된다. 숨쉬는 모든 순간에 묻는다. 왜 사느냐고,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축적된 모든 지식으로도 아직까지 이 한 문제를 풀지 못했다. 우매한 인간들! 수 천 년 전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행복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전해주고 싶은 아비의 심정을 헤아릴 필요는 없는 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을 통해 인간 윤리의 목적과 궁극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유하는 방식과 윤리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내가 읽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관심있는 ‘행복’의 문제로 이 책은 시작한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어질 수 있으며,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느낌이어야 하는가.

행복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일 게다. 탁월성을 획득하는 데 아주 불구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 36

 배움과 노력을 통해 배움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가져 본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결론. 그것은 탁월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한다. 이전에 덕(德)이라고 번역되었던 모호한 개념을 탁월성이라고 말한다. 흔히 윤리의 문제를 선과 악의 개념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면 그 굴레와 속박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행복과 탁월성의 문제를 ‘좋음’을 기준으로 이야기한다. 

 악덕과 중용에 대해 말하는 기준은 모호하고 상대적이다. 동양 고전에서 말하는 중용과 거리가 먼 이 중용의 개념은 인간 윤리의 중간값을 말한다. 선과 악에 중간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 행동의 규범을 정의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용기는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파괴되고 중용(mesotes)에 의해 보존된다. - P. 55

라고 말한다. 절제와 용기가 완벽하게 통제되는 인간은 없다. 지나침과 모자람도 상대적이다. 그렇다면 결국 윤리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와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인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특별한 가치나 지향점을 윤리의 기본으로 볼 수 없다.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가치가 있듯이 그것은 타인에게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물론 모두가 합의할 만한, 혹은 의미심장한 지적도 눈에 띤다.

무절제한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촉각은 신체 전체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들에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 115

 행복과 즐거움의 문제를 신체에 한정시킬 때 전체와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기준과 방법이 간명하며 동의할 만하다. 시대적 가치와 분리될 수 없는 윤리가 있을 수 없다.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철학적 깨달음도 아니다.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과 접근 방법이다.

 공감적 이해와 실천적 지혜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을 꿈꾸어 볼 뿐이다. 사람 생김새만큼 다양하게,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에서 ‘행복’은 시작된다. 그곳에서 사랑이 생긴다.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유익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이런 일[불평]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된 것들을 갖지 못할 때 생겨난다. - P. 315

그 사람이 없으면 그리워하고 그의 현전을 열망할 때 에로스적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선의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고는 친구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선의를 가진 것만으로 친애적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 P. 327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요소와 상식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듣는 사람에게 호소력이 있게 전달되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는 두고두고 새겨둘 만한다. 우리가 고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가치가 현재적 유용성에 있다면 먼지 묻은 책갈피를 들춰 고전의 향기를 음미하는 자세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실제 적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용기는 산을 옮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믿는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깨어있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두고 두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새겨둘 만한 부분과 전체적인 논리망에 갇힐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하는 것은 풀어야할 숙제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에 있다는 데 일정부분 동의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070207-019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로운 발바닥 2007-02-0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식의 힘님 리뷰를 읽으니 이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철학에 관한 초심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인가요?

sceptic 2007-02-07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가 친절하지 못했나보네요...일기처럼 그냥 쭉 생각나는대로 써버려서...용어의 개념과 새로운 번역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덕'을 '탁월성'으로 번역한다든지 하는...새롭고 정밀한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다른 판본을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없어 비교는 불가능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흐름이 만만치 않습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몇 페이지 읽어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초심잡니다.

짱꿀라 2007-02-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광사에서 나온 책과는 느낌이 어떤가요.

sceptic 2007-02-08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본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다만 부록으로 실린 해석들과 용어 설명으로 미뤄 짐작하고, 다른 책에서 인용됐던 개념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이 신선하다는 정도입니다.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평생을 같은 일에 몰두해도 행복한 일이 있다면 좋겠다. 한 번도 고개 돌리지 않고 푹 파묻혀 뒤돌아보지 않고 한 우물만 파보아도 좋겠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두 갈래 길에서 항상 선택의 고민과 갈등에 망설이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19년 만에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시의 길을 걸으며 내쳐 달려오지 않았어도, 먼 길을 돌아 왔어도 시집 한 권 펴내는 일이 어려울 수 있지만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 외적인 이야기가 호기심보다 시에 담긴 마음들이 눅눅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비맞지 않고도 장마철에 습기를 머금은 장판처럼 쭈글쭈글한 마음의 켜들이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시간은 흘러가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바라볼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바람처럼 흘러가는 마음 한 구석 어디로 보낼 것인지, 무엇 때문에 그리로 흘러가는지 굳이 묻지 않고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시인의 마음은 아닐는지.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시들은 아름답게 독자의 마음을 적신다. 슬픔과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의 본령에 충실하다. 빠른 것 보다 느린 것에, 큰 것 보다 작은 것에 마음이 쓰이는 김사인의 시들은 읽는 동안 현실 속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죽음과 사랑, 일상과 기억으로 점철된 시의 편린들은 독자를 우울하게 한다. 이수익의 ‘우울한 샹송’과는 또 다른 의미의 애잔함이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 속에 숨 쉬고 있는 텅 빈 바다 하나씩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정현종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단편이다. 시집의 대표작과는 거리가 멀지만 <가만히 좋아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구체적 표현들이 잔잔하게 끓어오른다. 애매하고 공허한 구절들보다 스치고 지나기 쉬운 것들에 대한 반 박자 느린 템포. 이 시집은 그렇게 사람들을 가만히 있게 만든다. 가만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게 한다.


070205-0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199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치 은어처럼 윤대녕의 소설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새롭다. 최근작 <제비를 기르다>에 이어 초기 작품집 <은어낚시통신>을 읽는 동안 지나온 시간들을 반추해 보았다. 물론 소설가에게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해서 그 흐름에 맞춰 소설이 국수 가락처럼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랜 시간에 걸쳐 흘러온 강물처럼 한 작가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윤대녕의 ‘은어’을 읽다가 ‘음력 삼월 삼일에 강남에서 왔다가 구월 구일에 돌아간다죠?’라는 구절을 보고 ‘제비를 기르다’를 떠올렸다. 윤대녕의 작품 세계가 원점으로 돌아온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돌고 돌아 찾아온 곳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생의 비밀들을 찾아내지 않을까 싶다.

 은어와 제비는 돌아온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의 초기작들은 ‘은어낚시통신’에서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존재의 시원’을 찾아 떠나는 머나먼 여정으로 보인다. 이후 펼쳐지는 다양한 시도들과 소설들이 보여주었던 작업들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거나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떤 순간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니라 나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말해질 수 없는 순간, 혹은 찰나의 감정들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윤대녕의 소설은 이 순간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말해질 수 없는 부분들을 부단히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주의 붕괴이후 사회적 관점이나 자본에 대한 치밀한 세부에 접근하기 힘겨웠던 90년대의 소설은 사소설에 가까운 흐름들을 보여왔다.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윤대녕의 소설은 사회적인 문제들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듯하다. 자칫 감정의 과잉 토로나 시대의 유행에 민감했던 소재들의 끼워넣기가 부작용으로 드러날 수 있으나 작가의 의도와 소설의 흐름은 무난하게 비껴가고 있다.

 ‘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은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린다. 점치는 여자의 이력과 점집을 찾아가는 세 명의 젊은이(?)들의 모습이 90년대 초반의 풍경을 을씨년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서 사회로의 확장은 결코 쉽지 않다. 그 모든 균형감각과 폭넓은 주제와 시야를 한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특징없는 백화점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윤대녕은 이제 반환점을 돌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은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문체와 행간에 숨어있는 모호한 환상들은 작가 특유의 개성이 된다. 윤대녕스러운 이야기 전개와 어법들이 주는 매력은 언제나 은근하다. 뜨겁게 달아오르거나 열광할 수 없는 목소리지만 쉽게 외면할 수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은어낚시통신,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소는 여관으로 들어온다 가끔, 카메라 옵스큐라’ 등에서 보여주는 현실과 환각 사이의 거리감은 안개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은어, 국화옆에서’는 연애에 대한 환상과 현실과의 거리를 보여준다. 엉뚱하게도 철저하게 자본의 힘과 논리 현실 사이의 감시망이나 보이지 않는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을 나는 인상깊게 읽었다. 좋은 작품이다.

 그의 소설들을 현실과의 거리감이라고 보는 것은 망원경으로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보여지는 현실과 인물의 내면 풍경은 생활과 거리가 멀다. ‘낭만은 짧고 인생은 길다’는 광고 카피처럼 그의 소설에서 나는 생활의 냄새를 맡기 어렵다. 아쉬움으로 보아야 하나 작가의 특징이자 매력 혹은 장점으로 보아야 하나?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다.

 처음과 현재를 확인하고 거는 기대는 더욱 크다. 내가 앞으로 나올 그의 작품에 대해 개인적으로 갖는 관심은 물론 ‘제비’에서 비롯됐다.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미래는 진행될 것이고 윤대녕의 작품들은 더욱 흥미롭게 전개될 것이라 믿는다. 맥없이 주저앉아 그대로 쭉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어떤 ‘느낌’ 때문이다. 지나친 해석일지 모르지만, 벌써 다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버일 수 있겠지만 어쩐지 다음이 더 기대된다.


070202-0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꼭 20년만에 사랑니를 또 하나 뺐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였으니 그 고통과 통증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또 뽑을 용기를 냈다. 인간의 기억은 그만큼 간사하다. 지나간 시간들을 지워버리는 화학물질을 분비하지 못하는 순간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은 현재이다가 과거였다가 미래일 것이다. 그 오래된 미래 속을 헤매는 것이 우리들의 비루한 삶이다. 날카롭게 자른 생의 단면들을 보여주면서 어쩌자는 것일까? 소설은 보여주기만 할 뿐 답은 없다. 미처 바라보지 못한 부분들과 구석구석을 헤집어 보여주는 소설은 흥미롭다. 늘 바라보는 대상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혹은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소설은 새롭다. 그렇다면 윤대녕의 소설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물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이다. 보이지도 않고 투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져지지 않으니 느낄 수 없고 보이지 않으니 인식될 수도 없다. 그런데 뭔가 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내가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이다. 정지화면에 작은 돌멩이를 던질 때 생기는 파문.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긴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지켜온 그의 무늬와 빛깔들이 느껴지기도 하고 새로움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 소설집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많은 것들을 길어올린다. 소설이 되지 않을 것들을 소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단편 ‘못구멍’은 서사 구조가 뻔하다.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적어 놓은 몇 줄의 글귀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랑의 의미를 환기 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반전의 효과는 미미하다. 이런 구절들을 살펴보자.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 P. 227 ‘못구멍’중에서 

남녀가 웬만큼 나이를 먹게 되면 관계에 속도가 생기게 마련이다. 사소한 절차는 서로 비껴가는 일종의 지혜를 터득한다고나 할까. 아니면 좀 더 담백해진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 P. 237 ‘못구멍’중에서

 설혹 사과를 하더라도 두고두고 잊어버려지지 않는 일이라는 게 있다. - P. 246 ‘못구멍’중에서

  책,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주관을 개입시킨다. 내가 살아온 경험과 내 정서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부분들에 밑줄을 그어본다. 아직도 소설에 줄을 그어가며 읽느냐고? 그래, 그렇다. 윤대녕의 소설은 이렇게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전달하는 방식의 새로움이든 문체의 특징이든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큰 울림과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닐까? 결국 소설은 인생에 대해 그저 한 번쯤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아직도 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문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너무 진부해서 다루기 곤란할 것 같지만 이 문제를 빼고 나면 문학은 개점 휴업 선언을 해야한다. ‘연’과 ‘못구멍’, ‘마루 밑 이야기’는 사랑에, ‘낙타주머니’와 ‘편백나무숲 쪽으로’, ‘고래등’은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비를 기르다’와 ‘탱자’는 두 가지가 섞여있다. 거칠게 나누었지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내용이 아니라 소리와 빛깔에 주목해야하는 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행간에 숨은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무슨 수학책이나 이론서적도 아닌데 숨은 그림 찾기를 할 필요는 없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안 느끼면 된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작년 봄 강화도에 갔을 때 가능포들에 몰려와 있던 제비떼를 본 순간 영혼을 잃어버렸다고 문희는 눈시울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날부터 하늘에서 길을 잃은 철새처럼 방황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 P. 70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따지고 보면 사랑한다는 말처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말도 없잖아요. 그 말은 상대의 모든 걸 원한다는 뜻이니까요. 사실 모든 건 안되죠. - P.81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문희에게 다가왔던 생의 한 순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설명하는 작가의 목소리와 문희가 직접 사랑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숱한 사랑을 전달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한 사람이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며 돌아보는 인생은 어떨까? 작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갖는 기대와 희망의 대부분은 알고 보면 타인에게 애써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상대를 객관적인 타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P. 186 ‘고래등’중에서

 삶은 뜻하지 않은 각도로 사람을 바꿔놓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계기로 작용해 생의 전모를 바꿔놓는 수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원리이자 저마다 이면에 감춰진 속박이자 굴레이기도 하다. - P. 187 ‘고래등’중에서

  결국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돈에 목숨 걸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가장 단순하게 인생을 정리하면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삶에는 여자의 내부처럼 함부로 열어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만 결국은 누구나 열어보게 돼 있다. 이유야 어떻든. 한데 열지 말 것을 열게 되면 대개 뜻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다. - P. 212 ‘낙타 주머니’중에서

마음에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이 곧 몸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몸과 마음은 자웅동체로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 P. 216 ‘낙타 주머니’중에서

마음이 가난했으므로 피워야만 했다. - P. 217 ‘낙타 주머니’중에서

 열어보지 말아햐 할 판도라의 상자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아니 공감한다. 작가는 ‘낙타주머니’를 통해 생의 비애 혹은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들 생의 굴레일 뿐이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생의 다양한 부분들을 헤집고 들여다 보고 때로는 우울과 희망을 버무려 놓아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생이라면.

 뚜렷한 기억 속에 정확한 연도와 날짜와 시간을 적는 방법은 독자들에게 과거를 확인시키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생을 증거하는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는 이야기 방식과 캐릭터와 맞지 않는 대화들은 비현실적일 때가 있다. 상황에 맞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 뱉어내는 앵무새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허공에 발딛고 서 있는 듯한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특별한 직업과 생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작가의 많은 소설 속에서 보여 주었듯이 불친절하게 던져주는 희망과 삶에 대한 인식은 찰나적이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사회적인 관심이나 거시적인 담론들을 다루고 싶지 않을 리 없겠지만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역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주제로 내세워 작가의 대표작이나 특별한 작업에 매달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써야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는 작가의 미래를 짐작하기 보다는 기다리며 즐기는 것이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070131-0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안한 마음
함민복 지음 / 풀그림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 본문 ‘흔들린다’ 중에서

 사람은 자연을 닮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산과 물과 바람과 돌은 언제나 스스로 그러한 몸짓으로 거기에 있다. 어떤 모습으로든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달라지는 것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일 뿐이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가난한 시인이라고 설명하면 함민복 시인이 기분 나쁠라나? 강화도 바닷가에서 고욤나무 옆에 땅에 누워 하늘을 덮고 사는 시인의 삶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 속에는 물론 ‘자본’이 숨어 있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아니 너무나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사십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가난한 시인은 바닷가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의 두 번째 산문집 <미안한 마음>은 읽은 사람을 참 미안하게 만든다. 참 부끄럽게 만든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가 제공되는 책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한 번쯤 눈길을 던져보는 생활이 아니다. 자발적이든 아니든 바닷가에서 시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이야기들은 경의롭기만하다.

 시인이 아닌 바닷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고 팍팍하며 시인의 생활은 아름답다고 바라보는 시선은 경계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고달프고 신산스런 생활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다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감각이며 여린 감수성이며 따스한 손길이다. 오감이 열린 채 섬세하게 발달한 감각세포로 길어올린 이야기들은 그대로 산문이 시가 된다.

 낭만과 거리가 먼 바다의 높은 파도와 먹을 것 부족하고 편리한 시설과 거리가 먼 시골 생활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을까. 도시의 문명과 유리된 시인의 삶을 동경하는 것은 불경스럽다. 박제된 수채화가 아니라 시인은 그대로 강화도 바닷가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익선이 형과 석양주를 나눠마시고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가고 시를 쓰는 생활이 고결한 종교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나는 시인의 생활 속에서, 그의 시선에서 생의 진정성을 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사나라는 사치스런 질문 대신 고추밭에 물을 주고 쓰러진 옥수수대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고 고욤나무가 건네는 이야기를 듣는 시인의 생활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답이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무소유의 삶을 살라는 비현실적인 주장이 아니다. 겸손하고 침작하게 지금 현재의 모습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

 시가 주는 강렬함보다 산문이 주는 잔잔함은 때때로 훨씬 더 긴 여운을 남긴다. 짤막한 산문들을 삽화와 더불어 예쁘게 꾸며낸 출판사의 솜씨는 별로 칭찬하고 싶지 않다. 본능적으로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가진 마음을 흐리게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우울씨의 일일>에서 보여주었던 가난의 힘과 자본의 힘을 넘어 이제는 고개 숙여 겸손하게 보이는 모습이 <말랑말랑한 힘>을 보여준다.

 이쁜 색시 만나 장가도 가고 아이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사는 모습이 자발적인 행복의 최전선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쨌든 강화도에 갈 때 마다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는 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리얼리스트로서 치열하게 부딪힐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소유한 시인의 자연 귀의가 아쉽고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함민복의 몫이 그것이 아니라면 또 다른 모습과 이야기로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도 타당하겠다. 시인의 말대로,

현재란 시간의 섬이다. 세월이 가는 길, 세상 모든 ‘멈춤들’의 정거장인 시간은 현재의 물이다. - P. 41


070129-0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