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36
강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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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동생이 먼 나라로 떠난다. 내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이지만 마음이 착잡하다. 본인은 새로운 기회와 도전에 고무되어 있지만 갑갑해 보인다. 그 갑갑함의 원인은 물론 복합적이다. 뉴욕대 박사 과정을 위해 떠나는 동생에게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영어를 미국에서 공부하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돌아오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미국에 비전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육환경과 풍토를 감안한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비관적인 현실 인식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지만 개인들의 노력과 뜻있는 사람들의 점진적인 의지가 모아진다고 해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모순은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중등 교육은 물론이려니와 대학에서 벌어지는 교수 임용문제와 전공과 관련된 밥그릇 문제, 학문 자체 내의 건전한 비판과 질적인 발전 측면은 거론 자체가 금기시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부 고발자나 비판자는 이 땅에서 학문과 생활을 접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명원이다. 최근 서울디지털 대학에서 교수 재임용에 탈락한 이명원 교수는 비판적 지성인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대학은 비판적 지성의 무덤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에 솔선수범해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외부인이 적합하다. 아니 어쩌면 외부인은 용기가 없어도 그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실험과 결과에서도 황우석 사태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인문학 분야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교수 신문사의 강성민이 쓴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는 내용과 분량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살림지식총서로 발간되기에는 내용의 깊이와 범위의 한계가 느껴진다. 굵직한 단행본으로 본격적이고 심층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내용들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나하나의 주제를 걸핥기 식으로 소개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논의들이 진행되지 못해 아쉬움이 많다.

스승을 비판과 전공 불가침의 법칙, 논문 형식의 실험에 이르기까지 대학 내에서 관습화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소개된 것은 저자의 말처럼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확인 작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들에 대한 현상을 밝히는 일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알고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사실들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단순하게 대학의 교수와 제자들 사이의 문제 뿐만 아니라 학계의 오랜 관습과 형식의 틀이 제공하는 고집들을 짚어 보는 일은 미래를 위해 당연히 거쳐야 할 비판이다.

생존 인물에 대한 탐구와 진보와 보수의 문제, 김우창의 학제성, 문화와 비평에 대한 비판에 관한 글들은 새롭다기보다 지루하지만 ‘금기’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보는데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최근들어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고조되어 있다. 그만큼 글쓰기는 대중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에 대한 허구성을 지적하는 저자의 지적 또한 적절하지만 지식 대중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 정도로 끝나 버려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근대성 콤플렉스에 관한 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 있다.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다양성과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우리 사회의 ‘금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제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닌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들만의 리그와 침묵의 카르텔이 유지되는 사회는 결코 발전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기회와 합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공론의 장이라는 열린 공간만이 대학을 대학답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이론적 틀과 미래의 아젠다를 제공해야 하는 학문의 전당에서 경직된 사고와 봉건적 인습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눈감고 모른척 하고 있다면 미래는 암울하다.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의 6년간의 복직 투쟁 과정은 눈물겨웠다. 서울대에 미대를 설치한 장발 박사의 친일 행적을 비판했다는 학자적 양심이 그가 대학 교수로서 결격 사유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도 국립대에서 말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다 아는 거짓말과 모두가 인정하는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적 대안과 기본적인 틀거리에 대한 고민들은 대안이 쉽지 않지만 반드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학계에 대한 금기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숨어 있는 ‘금기’에 대한 모든 ‘해금’이 이루어져야 한다.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는 저절로 우리들 손에 쥐어 진 적이 없다. 피와 땀과 눈물들의 결과물이다. 무임승차는 역사에 대한 반역이다. 스스로 모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기득권과 이기적 욕망의 노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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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 생물학자가 진단하는 2020년 초고령 사회 SERI 연구에세이 18
최재천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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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휴가지에서 얻은 책 한 권. 청풍의 어느 콘도 TV대 밑에서 굴러 다니는 책을 가져 온 건 제목 때문이었다. 최재천의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는 책의 제목은 흥미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생물학자가 진단하는 2020년 초고령 사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인생의 이모작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퇴직 이후에 대비하라는 얘기다.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출산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노인이 많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으니 대비하라?

저자는 이 책에서 나이 50을 기준으로 인생을 이모작하라고 이야기한다. 생물학적 기준으로 보아 번식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번식 후기를 잘 준비해야 앞으로 다가올 고령 사회를 대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종족 번식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의 생명이 연장된다. 특별한 종이 되어버렸지만 자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자면 이 기나긴 인생을 현재의 정년 개념으로 살아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일생을 생각해보면 서글프다. 여기서 평범의 기준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비율로 대다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정년에 대한 두려움은 직업의 안정성에 대한 열망과 뒤얽혀 삶의 중요한 지표이자 변수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철밥그릇으로 불리는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오로지 정년 보장과 연금이라는 매력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현실은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이기적 욕망들은 놀랄만하다. 이런 세상에 발표되는 각종 통계 지표들은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한다.

2020년이 되면 젊은이 4명이서 노인 하나를 먹여살릴 정도가 된다니. 현재 출산율이 1. 17명이라는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좀 섬뜩할 것 같다. 고령화 사회를 넘어 고령 사회로 곧 초고령 사회로 진입이 멀지 않다는 경고는 경고에만 그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있다. 엄청난 속도로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대안은 쉽지 않다. 생각해 보면 한심스럽다.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사회. 아니 그 이전에 산아 제한을 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 ‘둘만 나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인구의 증가를 막았던 시절이 그립기만 할 것이다. 각종 출산율 증가 대책을 마련해보지만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단순히 출산율 감소에 대한 대책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육아에서부터 사교육비 대입 제도와 경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원인을 찾자면 끝이 없다. 대책은 쉽지 않다. 단순화시키면 출산율 증가만이 고령 사회의 사회적 대책이 될 것 같지만 어불성설이다. 노인들의 복지와 삶의 질이 출산율 증가로 해결되진 않는다. 더구나 아직도 지구에는 너무 많은 인간들이 자연을 해치며 살고 있다. 민족과 국가주의를 넘어선 대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민을 확대하고 국경을 허물면 된다. 단순하지 않은 문제라고?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병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코앞에 닥친,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고령 사회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겠지만 다양한 논의 속에 포함되어야 할 필수 요소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50대 후반에 정년 퇴직을 하고 나머지 인생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비참하다. 그러나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전의 개념으로 열심히 일한 당신 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인간은 적응하게 마련이다. 다만 보다 먼 안목으로 현실성 있는 대책을 세워나가야 한다. 정부 정책만의 문제도 아니고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댈 일이 어디 한 두가지랴.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아이들에게 오늘은 정말 어려운 시험 문제를 낼 것이라고 하자. 아이들이 모두 빙 둘러 모여 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리둥절한 교사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거든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하라는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아이이들을 보며 교사는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경쟁과 갈등의 이기적 현실 속에서 모두 함께 다같이 잘 살아 보자고 하면, 성장이냐 분배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부터 별의별 분열과 의혹이 싹튼다. 보다 단순한 논리로 살아가기는 정말 힘겨운 듯싶다.

국가 차원에서 국민의 건강과 고령 사회에 대한 대책은 국민들의 합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정책으로는 성고하기 어렵다. 정부의 역할은 단지 국민들의 뜻을 모으고 어렵고 힘든 중재자의 역할에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저자는 조혼예찬, 열린 이민제도, 대학의 재교육, 여성 인력의 활용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일견 옳은 말이지만 사회 구조적 모순들을 지적하고 근본 원인의 제거를 주장하는 데 까지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피상적이고 원론적인 분석과 당연한 주장들이 무리없이 전개되고 있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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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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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이희재 역 / 제레미 리프킨 저
민음사

세계의 석학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책을 보면 일단 부지런함에 감탄한다. 그 부지런함은 단순한 열정과 근면한 노력에서 오는 것만이 아님은 물론이다. 끊임없는 독서와 방대한 자료에 대한 분석은 기본적인 바탕이 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다. 종합적인 판단능력과 통찰력은 단순한 사유의 과정이나 고민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순전히 개인적인 능력으로만 보기에는 질투가 난다. 경외에 가까운 찬탄이다. 놀라운 시야에 대한 감탄은 현실에 대한 반성과 실천의 문제로 이어진다. 늘 그러하듯이.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은 21세기 벽두인 2000년에 출간된 책이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책이 제시했던 현상이나 의미들이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이 책의 탁월함을 반증한다. 몇 년 만에 폐기되어 버릴만한 단견이나 예측이라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책에 대한 평가는 저자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복잡한 현실 세계에 대한 해석과 전망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매달리고 있지만 부분적인 현실이거나 특정 분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경우가 많다. 스스로 경험하고 예측하는 내용은 미시적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주관적 견해와 편협된 시선일 경우 독자는 금방 시선을 돌려 버린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이론이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리프킨의 이야기들은 들을만하다. 객관성이 확보된 예측과 전망이 돋보이며 게다가 과거와 현재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토대가 되기 때문에 더욱 믿을만하다.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어쩌면 단순하다. 첫째, 소유에서 접속의 시대로의 이행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사유 재산이 곧 자유의 상징이었던 시대를 거쳤다. 로크에 의해 사유 재산에 대한 권리가 가장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권리로 옹호받기도 했다. 소유는 곧 개인의 가치를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물적 증거가 된다. 그러나 미래, 아니 현재도 그러한 변화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간을 토대로 한 사적 소유에서 접속을 통한 관계의 지속성이 중요한 것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새로운 자본주의에서는 물질의 차원보다는 시간의 차원이 훨씬 중요하다.(143페이지)”는 저자의 말은 확신에 가깝게 들린다.

둘째는 산업 사회에서 문화 사회로의 변이과정이다. 문화에 대한 리프킨의 주장과 전망은 많은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상업주의와 결합된 세계 각국의 문화 파괴와 고갈에 대한 우려는 설득이 있게 들린다. 팔기 위한 상품의 발굴과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사회의 구조적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각국의 상황과 시대, 문화적 배경 등 통시적 관점과 공시적 관점의 교차점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소유의 종말>은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재와 미래 사회에 대한 지침서이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정확한 과거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우리들 삶의 모습을 점검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조언으로 들을만하다.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접속권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체험과 세계가 과연 접속할 만한 가치가 있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만들어나갈 사회의 성격은 이 답변에 좌우될 것이다. - P. 392

참여의 수준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그의 견해로 이 책이 마무리 된다. 21세기에 우리가 만들어나갈 사회의 성격에 대한 고민은 한 두 사람의 노력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다함께 같이 풀어내야 할 문제들이다. 늘 그러하듯이 모든 문제의 귀결은 이론과 고민이 아니라 참여의 실천의 문제이다. 이 책을 읽고 ‘소의 종말’이 도래 했으니 ‘접속’을 통해 뭔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역점을 둔 사업 전략의 다각화를 고려하는 CEO도 있을 것이고 삶의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수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집 한 채를 장만하기 위해 평생을 한숨으로 보내?수많은 서민들이 대한민국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면 과연 올바른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 소유의 시대가 끝났으니 집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고 말하는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목적과 방법 속에서 우리가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결코 만만치 않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은 이 책 한 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는 끊임없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탁월한 혜안을 가진 그들의 이야기에 내가 귀기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06102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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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하는 神의 나라 - 일본 지배세력의 정신세계
노 다니엘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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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경기에 대한 강렬한 기억 두 가지. 먼저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 결승전을 기억한다. 흑백 TV였고 김재박의 번트에 이어 한대화의 쓰리런 홈런이 터질 때 내 심장도 터지는 줄 알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한일전이었기 때문이었는지 결승전이었기 때문인지 단순한 야구에 대한 관심이었는지는 아직도 애매하지만 그 순간의 짜릿한 기억만큼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이 열렸던 97년 9월 일본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경기에서 이민성 센터 써클 좌측에서 그야말로 미사일같은 왼발슛을 날린다. 일본의 골대 좌측이 출렁하는 순간 내 심장도 출렁거리며 높지 않은 아파트 천정을 뚫고 올라갈 뻔했다. 그 경기가 한일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아주 단순한 수식어가 어울린다. 지리적으로 어느 나라 보다도 가깝지만 역사적으로 정서적으로 지구라는 행성에서 공존하기 어려울 것 같은 나라가 또한 일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모른다. 대부분 일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감상적 반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보다 ‘민족의 죄인’으로 손가락질하는 친일 한국인을 더 싫어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와 멀다. 그렇다면 일본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생각할까?

노 다니엘의 <우경화하는 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읽어낼 수 있다. ‘일본 지배세력의 정신세계’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설문조사에 의한 자료도 아니고 일본인 대다수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지배세력이라 할 만한 정치인과 대학교수 등 우익인사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발언 내용과 인터뷰 내용 우익 잡지에 실린 글에 대한 분석과 연설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과 일본인데 대한 수많은 책들 속에서 이 책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완전히 주관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최대한 우익 세력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정리하고 제시하는 것에 1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통한 그들의 정신세계를 읽어내는 것은 독자들이 몫이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저자의 의도도 읽어낼 수 있다.

‘우경화’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는 변화를 말한다. 흔히 보수 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의 우익인사들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활동은 ‘새역모’를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단순한 역사 왜곡 집단이 아니라 정치와 재계는 물론 학계 인사들이 총망라된 일본 우익의 총본산에 해당하는 ‘일본회의’의 중추 회원들이 구성원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독도와 위안부 문제를 포함해서 일본과의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 뒤에는 이들의 숨은 노력(?)과 일치된 힘이 조직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아베 신조는 예상대로 고이즈미에 이어 일본의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헌법 개정 움직임이다. 과거 역사에 대한 패배주의를 걷어내고 교육을 통해 후세들에게 일본 정신 즉 천황을 중심으로 ‘좋은 나라 깨끗한 나라 세계에 하나 뿐인 신의 나라(전전 일본 국민학교 수신교과서)’라는 의식을 부활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민족주의와 선민의식을 단순한 자국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세계인식 때문이다. 동아시아에 대한 패권의식과 과거 영광에 대한 부활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우월감과 미국을 등에 업은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는 세계 평화의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쿠바와 북한 이란과 이라크가 아니라 일본과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다.

‘지일知日이 극일克日’이라는 가장 단순한 논리가 통용되는 책이라서 추천할만하다. 감정적이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본을 비난하거나 우리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단편적인 논리가 아니라 일본이 치밀하게 준비하는 그들의 미래가 우익 세력의 말대로 실현될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권을 중심으로 국민의 상당수와 정치인의 대다수가 우경화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일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앞서 지적한대로 그들의 주장과 지향점은 수많은 역사적 왜곡과 과장된 몸짓 그리고 허위의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현실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본의 우익세력이 범하고 있는 우가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태도와 대응방법은 일본의 현재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동북공정에 의한 고구려 역사 왜곡?착수한 중국도 마찬가지지만 이대로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길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개인의 실수와 자질 부족이 아니라 수많은 우익들의 사상을 기초로 한 돌출행동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본 수상 고이즈미는 나까소네에 이어 개인자격이 아닌 수상의 자격으로 8월 15일에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 국민들의 표정은 미묘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A급 전범이 합사된 신사에 천황이 참배하는 것이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데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일본 우익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기로 작용할 것이다. 주변국과의 관계와 일본의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특히 미국이나 중국, 한국과 북한의 정치 상황과 대응전략에 따라 일본의 미래는, 아니 아시아와 세계의 미래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는 아놀도 토인비의 말은 일본의 우경화는 물론 우리의 자화상을 비춰보는 가장 좋은 거울이 될 것이다.


0610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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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 -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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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왼쪽에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적이 없다. 정운영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느낌은 당연이 두근거림이었다. 그 두근거림에 어딘가에 존재하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내 몸 어딘가에 쿵쾅거리는 심장이 있음을 생각했다.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선대칭 동물이다. 반으로 접으면 포개질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역할이 다르다는 사실부터 확인하자. 오른쪽 뇌는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정보를 인지하고 왼쪽 뇌는 자세한 부분들을 인식한다. 오른손잡이의 경우 뇌의 구획 정리가 확연하게 때문에 더욱 분명하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즉, 왼쪽 눈으로는 숲을 인식하고 오른쪽 눈으로는 나무를 본다. 사람을 쳐다볼 때도 타인의 오른쪽 얼굴이 그 사람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확정하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볼 때는 왼쪽 얼굴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들 신체는 비대칭적 구조와 인식들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심장이 왼쪽에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자연과학적 지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인문학적 관점으로 보면 우리들 마음이 왼쪽을 지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국민의회 의장석에 볼 때 왼쪽에 급진파가 앉았던 데서 유래한 좌파의 개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심장이 왼쪽에 있는 이유가 모든 사람의 심장은 좌파를 지향하기 때문일까?

2005년 9월 24일에 사망한 정운영의 마지막 칼럼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심장한 제목만큼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신문에 연재되는 칼럼의 경우 제한된 분량에 분명한 메시지를 담아야하기 때문에 훨씬 더 긴장감 넘치는 문장을 유지해야 한다. 편안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수필과는 달라야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현실과 유리된 이야기는 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정운영의 칼럼들은 특별한가? 남들과 다른 개인의 글쓰기 방식은 당연히 주목받아 마땅하다. 형식의 새로움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눈의 신선함이나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시각에서 문제들을 짚어낼 때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을 표현하게 된다. 그렇게 표현된 공감들은 생각을 바꾸고 바뀐 생각들은 행동을 바꾸고 행동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직접적인 힘이 된다.

누군가의 글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관이 개입되지 않는 평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정운영이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러하고 내가 정운영의 글을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전제로 정운영의 글들은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이 책은 다섯 개의 챕터chpter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앞에 ‘정운영의 여시아독如是我讀’은 주로 책을 통해 현실을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특한 방식의 리뷰에 해당한다. 책의 내용을 통해 현실을 짚어내는 안목이나 지독한 책벌레였으며 애서가였던 고인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다. 이어지는 ‘다른 세계는 가능한가’, ‘성장이냐 분배냐를 넘어서서’, ‘보수든 진보든 진짜이기를’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답게 경제와 현실 정치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문제를 제기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힘이 들어 가 있지 않다. 어깨에 힘을 빼고 억지를 부리지 않으며 시류에 영합한 흔적이 없다.

그러나 비판적 지식인으로 좌우익을 아울렀다는 평가는 인정할 수가 없다. 한 권의 칼럼집을 통해 그 전 생애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적어도 말년에 그가 쓴 칼럼들에는 분명한 목적과 뚜렷한 소신이 2% 부족하다. 김규항이나 손석춘, 하종강의 글들이 보여주는 울림과 다르다. 개인적인 성향 탓이겠지만 우리나라의 노조와 재벌, 현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태도는 그가 몸담았던 중앙일보의 그것도 어긋남이 없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챕터 ‘요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에서 보여주는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어쨌든 필자의 생각과 세상을 대하는 차분하고 날카로운 시선은 배울 점이 많다. 생각과 태도는 왼쪽이면서 현실과 생활은 오른쪽인 사람들에 대한 비판에는 가슴이 서늘하다. 극으로 치닫는 것은 좋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던 논객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평균대 위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필자가 평균대 위의 10점 만점 연기를 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게 중심을 잃지 않고 제대로 된 비판과 양쪽 모두에게 적당한 변명이나 항변을 생각해 내지 못하도록 하는 무엇이 있다는 데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필자의 진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슴에서 우러나온 따스함과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사리사욕과 무관하게 올곧은 정신을 벼리며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 면에서 정운영의 글에 보내는 갈채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정운영의 삶과 세상에 대한 지극히 우호적이고 정갈한 감정을 해칠 생각은 없지만 제목에서 보여준 감동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기억하며 살 것이다. 심장이 왼쪽에 있다는 사실을.

0610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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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1-2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당선 축하해요.

sceptic 2006-11-26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이사후에 좋은 일이 생기네요...고맙습니다...알라딘에도 감사드려야겠네요...모두 책을 사는데 쓰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