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민주화 -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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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민주주의는 시대를 초월한 삶의 기본 조건일까?

정치적 형태로서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기원과 역사적 과정을 고찰하지 않더라도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채택하고 있다. 민주주의 이전의 중세 봉건 사회에서 공화정으로 이행 과정은 피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쟁취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비릿한 피냄새가 가득하다. 오욕의 한국 현대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얼마나 많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 획득한 가치인가는 누구나 알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출범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에서 정착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과정을 통해 달라진 삶의 질적 변화이다. 물론 변화가 없을 리 없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민주화라는 정치적 이념과 결합되지 못하는 수많은 난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고 그 뿌리를 확인하는 일은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최장집의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이러한 현실적 문제와 대안을 고민하기 위한 분명한 제언들로 가득하다. 개별 사안과 정치적 쟁점들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논쟁들도 중요하지만 거대 담론을 점검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책이다.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항들이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가장 첨예한 국가의 정책 사안인 한미 FTA에 대해 국민들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들 삶에 얼마나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해 고민하지만 정책 결정 과정이나 의사 표현이 서툰 것은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거리가 멀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극단적인 정치 혐오증은 민주주의 열망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다. 17대 총선은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여당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최근에 벌어진 5 ․ 31 지방 선거는 집권 여당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난 선거로 볼 수 있다. 미래를 향한, 혹은 선거와 정책을 통한 국민적 열망들이 정치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복과 실망감의 표현 수단이 되어 버렸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기한 ‘헤게모니’의 개념을 조금 다른 차원과 개념으로 정의한 뒤 민주주의와 헤게모니의 문제를 다루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이 문제는 노동과 민주주의 그리고 동아시아 전체를 조망하는 평화와 공존의 공동체적 관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살펴본다. 특히 3장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우리나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특수한 개념이 아니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촉발하는 민주주의와 국가의 역할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어서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한미 FTA’ 현안에 대한 문제와 대안은 눈여겨 볼 만하다. 정치인들과 학자들의 입장에서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민주주의는 성공할 수 없고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며 당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풀어나갈 방법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들 삶에 좀 더 밀착된 이념으로서 민주주의 이후의 문제를 제대로 고민하고 미래의 방향들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는 양극화가 고착될 경우 공멸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김유선의 <한국 노동자의 임금실태와 임금정책>을 보면 IMF이후 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대통령이 나서 대기업 노동자들에게 반성하라고 가르치는 나라의 노동 문제는 인식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 내맘대로, 내멋대로, 능력대로의 민주주의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민주화되고 있는지 다같이 고민해 볼 일이다. 또한 그것이 바람직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즉 사회적 약자와 소외 계층에 대한 복지와 분배를 염두에 둔 민주주의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민주주의를 바라보던 관점을 벗어난지 오래다. 이제는 미래의 한국사회에 걸맞는 이념과 정책의 방향들이 정치권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서도 고민의 깊이와 방향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개인적, 지적 능력과 상상력은 매우 크지만,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의 집단적 능력은 매우 낮다는 것 또한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실정치에 대한 나의 기대수준은 매우 낮니다.(P. 44)”는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가 더 큰 문제다. 우수한 개인의 능력들이 왜 집단적 능력으로 발휘되지 幣求째? 정치가 아닌 철학의 문제인가.

활발하고 꾸준한 논의와 공론의 장이 마련되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내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정치와 제도의 문제에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대표성과 책임성 그리고 참여를 기본으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적 성격은 바로 너와 나,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060701-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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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우리시대의 논리 2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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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붉은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이 되었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74년간 지속된 인류의 또 하나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충격은 한 국가의 패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국가 건설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실망을 넘어 사회주의 진영을 공황에 빠뜨렸다. 60년대는 물론 70년대와 80년대라는 질곡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90년대의 전망은 불투명하기만 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요원하기만 하다.

특히, 노동 운동에 관한 한 대한민국의 특수성을 전제로 하더라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노동자나 노동조합 같은 말은 곧바로 빨갱이를 연상시켰던 야만의 시대를 지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뿌리깊은 부정적 뉘앙스와 잘못된 인식의 틀은 쉽게 사라지거나 바뀌지 않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이 비정규직의 확대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여전히 우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 아니 서로 다른 상식을 소유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시대를 걸어가면서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하종강은 행복한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몇 안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의 가족주의적 행복과 경제적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데 하종강이 지니는 의미의 본질이 있다. 한 개인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실 자살한 전태일 열사는 노동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단병호로 대표되는 민주노총은 이제 당당히 국회에 진출했다. 현실적 한계와 역량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으나 역사는 늘 현재 진행형으로 발전한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의 다른 모습들이므로.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하종강은 1년에 300회가 넘는 강연을 하며 항상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는 일을 한다. 그러니 그의 강연과 글은 이론적 틀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장감이 무기가 된다. 그래서 어렵지 않은 말로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읽는 사람의 손을 잡아 버린다. 이성적 판단과 이념의 진정성을 넘어 날것 그대로 따뜻한 피부처럼 온몸으로 안겨온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의 글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감성에 기대는 그의 글쓰기는 그래서 더 무섭다. 이 감성이 유치한 감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노동조합 투쟁의 현장과 비정규직 문제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노종조합이 왜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지 확인시켜 주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아직도 억압과 고통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노동현장의 울부짖음과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한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들의 필독서다. 자신이 노동자인 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 권해주고 싶은 책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하종강의 토막글들을 커다란 주제로 묶어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읽을 수 있도록 거칠게 편집된 책이지만 글의 길이와 주제와 상관없이 전달되는 감동은 단순히 내가 노동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해 줄 것이다. 오랫동안 현장에 서 활동하지 못하고 야만의 시절에 겪었던 개인적인 경험들을 하종강은 ‘부채감’이라고 표현한다. 이 부채감이 20년이 넘도록 그를 지탱하게 해 주 힘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우리 모두는 이 부채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워도 안 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날선 칼날이 아니라 촉촉한 부드러움이라서 더 큰 울림을 준다.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목울대가 울컥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난감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한참동안 허공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뱉는다고 당장 세상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가장 큰 위험이 이러한 문제들과의 거리감이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노동운동을 해야 읽은 것을 실천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지하철노조의 파업으로 내가 당장 불편하더라도, 1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 조종사들이 파업을 해서 내가 당장 비행기를 못 타더라도 문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출발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종강은 이 책에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노동운동’이라고, 그것이 희망이라고.


060706-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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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e시대의 절대사상 2
김용환 지음 / 살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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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더 힘센 자가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욥기 41장 24절)”는 말처럼 국가와 교회를 통합하는 강력한 통치자의 출현을 홉스는 <리바이어던> 속에 담아내고 있다. 출판 당시의 표지 그림으로 나타난 리바이어던의 모습은 한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교구장을 들고 있다. 국가의 권력과 교회의 권위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그의 권능을 이보다 잘 묘사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현재의 국가는 그처럼 ‘괴물’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과연 국가는 괴물인가?

17세기 초반 유럽의 지성사를 뒤흔들었던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평가와 견해는 다양하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인 것처럼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홉스 전문가 김용환의 견해는 당연히 <리바이어던>에 대한 애정과 긍정적 평가로 넘친다.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인 내용이지만 홉스가 과연 국가 권력에 대한 믿음과 종교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이 책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국내에 <리바이어던> 완역본이 없다는 아이러니는 일반 독자들에게 논의 자체를 차단시킨다. 박영사에서 나온 유일한 완역본이 절판되었고,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검색해보니 3월에 나온 책이 있는데 완역본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저자의 말대로 홉스의 사상과 철학적 견해를 전부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당시의 종교와 철학의 흐름이 홉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 홉스는 로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쉽게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홉스의 견해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는 까닭은 인간과 국가 그리고 종교에 대한 그의 깊은 사유 방식 때문이다.

김용환은 홉스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절대군주론자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종래의 왕권신수설에 의한 무소불위의 절대 군주가 아니라 백성과의 계약 관계로 성립되었으며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부분이 있고 통치자가 계약 당사자라는 점을 들어 절대군주론에서 ‘유사 민주주의자’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리바이어던 발췌 부분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유명론, 유물론자라는 사실과 로크와 더불어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사상이 시대의 이단아처럼 보였던 것은 과학적 합리주의가 싹트기 이전 시대라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리바이어던>이 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현재의 관점으로 상식이 통할 수 있는 합리적 사고와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면면이 그의 생각들에 동의하게 하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무한한 권력으로부터 많은 나쁜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나, 통치권이 없기 때문에 오는 결과,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끊임없는 투쟁이 훨씬 더 나쁘다.(P. 231)”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끊임없는 투쟁’보다 ‘무한한 권력’이 훨씬 더 나쁜 결과를 보여준 사례를 우리는 수많은 역사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부분적인 인용과 반박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홉스의 견해가 모두 수용될 수는 없다. 당연한가? 어떤 사상과 철학이든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면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평가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홉스가 꿈꾸었던 세상은 “현실적인 힘을 소유한 사실적 통치자(de facto ruler)이자 사회계약을 통해 정통성을 획득한 합법적 지배자(de jure ruler)가 헌정 중단 시기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가 바로 진정한 리바이어던이다.(P. 154)”는 말처럼 ‘진정한 리바이어던’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서 항상 괴물의 모습을 드러냈다. 홉스 이전과 이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이상적 정치와 국가를 꿈꾸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상상속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비극적 현실 인식이 아니라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욕망과 이기심에 대한 인정일 뿐이다.

자유는 외적인 방해(external impediment)가 없음을 의미하며, 방해는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힘의 일부를 종종 앗아가지만 판단과 이성의 지시에 따라 남겨진 힘의 사용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 P. 112

홉스는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겠지만, 인간과 국가에 대한 그의 견해의 핵심과 가치는 ‘자유’에 있다고 믿고 싶다. 종교와 국가를 아우를 수 있는 절대 권능의 ‘리바이어던’이 ‘자유’와 상치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꿈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을 여전히 믿고 싶다. <리바이어던> 완역본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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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from 다르게 그리고 옳게 2008-01-07 22:55 
    리바이어던 - 김용환 지음/살림 홉스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생각난다...면 ^^ 제대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게된 이유는 엉뚱한데...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무한의 리바이어스라는 것이 있다. 거기서 리바이어스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따왔다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다. 다 보고 나서 느낀 생각은 크게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성서에서는 괴물로 나오지만, 홉스는 그것을 국가권력을 묘사하는데 사용하였다. 조금은..
 
 
 
아파트의 문화사 살림지식총서 224
박철수 지음 / 살림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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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줍니다’

엽기적인 건설 회사의 광고 카피다. 아파트라고 하는 공통 주택의 형태는 엽기다. 차단된 공간 속에서 한 줄로 앉아 볼일을 보고 한 줄로 누워 잠을 잔다. 아파트 밖에서 위 아래로 훑어보며 생각해 보면 닭장 속의 닭처럼, 성냥갑 속의 성냥들처럼 동일한 공간과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박제된 사람들의 생활이 재밌고 우습다. 이것이 내가 처음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느낀 점이다. 80년대 후반 처음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을 때 생활의 편리보다는 아파트라는 폐쇄적인 공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족들이 대부분 반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머니의 주장대로 이사를 감행했고, 또 그런대로 아파트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갔다. 이후 한 번도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삶의 형태도 비슷할 것이다. 이제 아파트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다.

우연히 박철수의 <아파트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한다. 한국의 아파트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했다. 짧은 책이지만 현대사의 산 증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파트는 개발 독재 시대의 유산으로 출발해서 양극화의 첨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중 소설을 통해 아파트의 이미지를 소개하는 부분은 신선했고, 우리의 아파트가 지닌 문제점을 건축가의 입장에서 지적하는 대목들은 공감할 수 있었다. 원래 아파트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들이 개선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공감하게 되었다. 현재의 아파트를 ‘자폐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비유한 대목을 이해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오래 전부터 하늘과 산과 강을 그리워하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그리워했던 이유들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피상적인 꿈으로서 전원 생활이 아니라 콘크리트 숲이 주는 건조함과 사막함의 원인은 공간적 이기주의와 폐쇄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숨 막히는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본능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는지도 모른다. 아파트의 편리함과 환금성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대안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닐 것이다. 아파트도 기본적으로는 우리들 삶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며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단지식 아파트로 현재와 같은 형태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는 1962년에 완공된 마포 아파트다. 이후 아파트의 높은 담장과 철저한 보안 시스템은 첨단을 달리고 있다. 결국 아파트의 진화는 단지별 위화감의 조성과 단지 밖에서 아파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동경과 선망으로 바뀌었다. 평수와 가격으로 수량화, 박제화 되어 버리고 있는 우리들 아파트의 현주소는 설명하기 힘든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결국 대한민국 자본주의 총아는 아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생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삶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토지와 주택에 대한 개념이 변함없이 유지된다면 우리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원시시대에도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했던 의식주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생존 환경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걸까?

박철수의 말처럼 ‘자폐증과 우울증’이라는 병리현상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는 아파트의 현주소는 바뀌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이기적 욕망들을 버리고 모두 함께 잘살자는 이상주의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과 동사이 개별 호와 호 사이에 최소한 소통의 공간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경쟁과 비교 우위의 강박 속에서는 불가능한 삶의 모습들이다. 물론 모두가 살벌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집단 이기주의의 속성은 첨예한 대립양상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단지와 단지 사이의 통행 제한이나 학군 조정 문제 도로 개통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으로도 아파트의 우울한 현주소는 쉽게 확인된다.

각종 외국어를 이용한 아파트 브랜드의 차별화 전략은 명품에 환장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전형을 이용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한민국의 각 가정에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가 흘러 나온다. 내가 사는 곳과 내가 사는 아파트가 나를 말해 준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라면 할 말은 없다. 아파트의 ‘오만과 편견’은 우리들 삶의 모습까지 일그러지게 한다.

효율성과 집적 능력의 결정판으로 주거 형태에 혁명을 가져온 아파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고 접근 방법은 개별 거주자들의 노력은 물론이겠지만, 주택과 토지에 대한 국가적 개념 설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삶의 질을 향상 시키기 위해 아파트라는 주택 형태는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매년 새로 지어지는 주택의 80%가 아파트라면 아파트의 기능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시급하다. 그래야 아파트의 ‘자폐증과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다.


060818-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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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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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행복을 말하는 것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어려운 문제다. 그만큼 다양한 제 나름의 목적과 기준과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유치환은 ‘행복’이라는 시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 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행복이다. 행복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시키면 ‘행복’은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이상론으로 발전한다. 벤덤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역설했지만 실천적 한계와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반 일리히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단순한 문명 비판 서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책이다. 짧은 발표문으로 적은 분량으로 심층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일리히가 주장하는 에너지에 대한 과학적 사고는 귀담아 들을만하다. 특히 발전과 속도의 맹목에 목숨건 사람들에게 필요한 처방전이다.

우리는 빨라진 속도만큼 행복해졌는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KTX를 타고 부산에 당일로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에 행복도 그만큼 늘어났을까? 인간의 행복을 어떤 기준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쉽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도대체 자전거와 행복 사이의 상관관계에 말하는 이야기는 무언가. 그것은 에너지와 속도의 문제로 모아진다. 이 책의 원제는 ‘Energy and equity’이다. 화석 원료로 매장량이 제한되어 있는 석유에 대한 인류의 에너지 의존도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석유 먹는 하마가 되어 버린 중국의 석유 사용량의 증가는 미국과 함께 미래의 에너지에 대한 대책이 코 앞에 닥쳤음을 예고한다. 평등하지 못한 에너지의 사용과 주로 교통 수단에 사용되는 에너지의 사용에 대해 일리히는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인간의 잠재된 상상력과 자연 속에서 누려야할 행복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읽는 사람을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할 만하다. 우리가 잃어 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인간의 자율적 이동이 아닌 타율적 수송은 인간의 삶의 형태를 바꿔버린 것은 물론이고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파생시켰다. 이동 속도의 증가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자율적 시간을 빼앗아 버렸다. 점점 더 바쁘고 시간이 없어진 사람들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외침과는 거리가 먼 실천적 행동을 요구하는 일리히의 목소리는 새겨 들을만하다. 자전거는 인간의 신진대사의 한계만큼 활발하게 신속한 이동을 가져왔으며 에너지에 대한 공포와 환경 문제에 대한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과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리적인 말하기는 부드러움의 힘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21세기와 자전거라니? 빛의 속도를 흉내내는 인간의 이동 수단의 발달에 딴지를 거는 무모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자전거가 훨씬 더 효율적이고 빠른 교통 수단이 되어 버린 대도시의 교통난과 에너지 문제는 단순하게 치부할 만한 주장은 아니다. 실제 생활에서 실천 가능한 대안들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적용해 보느냐하는 용기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다. 쉽지 않겠지만 필요한 일이라면 신중해 질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자는 주장과는 거리를 두고 일리히의 주장에 귀 기울여 본다면 미래의 대체 에너지 개발에 열올리는 대신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쉽고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출퇴시간에 소요되는 시간의 효율성과 우리들 삶의 질을 비교한다면 발상의 전환은 가능하다. 일거에 자동차를 모두 없애자는 원천 봉쇄의 오류를 범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의 시작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도로와 교통 상황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오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생각과 방법들이 있다. 노력하고 실천하고 힘을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환경은 중요하다는 식의 단순 분류의 오류를 범할지도 모르는 이 책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생각할 문제를 던져준다.

자전거를 타고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율적으로 이동하는 것과 퍼스트 클래스 1등석의 안락함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리히가 말하는 에너지 위기와 속도에 마비된 상상력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가속도의 무익성이나 파악하기 어려운 속도의 한계, 인력이동의 효율성에 대한 논의들은 놀랄만한 과학 기술의 과학과 더불어 고민해 보아야 할 핵심적 사안들이 아닐까 싶다.


06082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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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경 2015-04-1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 봐야겠습니다
정성이 담긴 리뷰 고맙습니다

sceptic 2018-03-16 23:41   좋아요 0 | URL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