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시옷 -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손문상.오영진.유승하.이애림.장차현실.정훈이.최규석.홍윤표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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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단일어가 있고, 서로 기대어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복합어가 있는데 이것은 다시 합성어와 파생어로 나뉜다. 의미가 분명한 어근과 어근이 합쳐지는 단어 형성 방법을 합성어라고 한다. ‘사이시옷’은 이렇게 자기 색깔과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단어의 합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음운현상이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사람은 모두 독립적 개체다. 서로 기대지 않고 홀로 서는 것도 가능하지만 기대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이시옷’은 무엇일까? ‘사이시옷’의 역할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인가.

  또한 ‘사이시옷’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한자인 사람 ‘人’자와 닮았다. 상형문자인 한자의 의미는 뚜렷하다. 홀로 설 수 없는 두 사람이 기대 선 모습이라고 한다. 다정하고 행복해 보일수도, 불행의 근원이자 비참한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모습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은 홀로 산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는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2003년에 나온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만화책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나도 수십년만에 만화책을 사 보았다. 만화라는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은 다른 장르나 매체보다 강렬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든 만화책이라는 선입견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극명하게 보여 준 수작으로 기억한다. 후속편 격인 ‘사이시옷’도 역시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만화가들 8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제 지나가던 강아지도 ‘사회 양극화’ 문제를 이야기하는 시점이다. 그만큼 심각하다. 참여정부의 남은 기간을 ‘양극화 해소’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청와대 비서실장의 인터뷰 기사는 오히려 현실을 비참하게 한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무심코 책장을 넘기면 눈물을 한 방울 흘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실화를 소재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손문상의 만화가 인상적이다. 장애인과 사교육 문제 등 심각한 현안들을 다루고 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고 지적하면 곤란하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날개를 잘라버린 아이들의 이야기나 마법학교 ‘호구왔다’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해결해야할 문제라기보다 인식과 태도의 문제라고 보아야한다. 나홀로 꿈꾸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사람들은 꿈꾼다. 하지만 절대로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이기적 경쟁심, 시장과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자유 경쟁의 원칙을 고수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일은 쉽지 않은 문제다.

  우리 사회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힘이 없거나 결속이 약하다. 목숨을 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극복할 만한 대책은 마련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가고 느리고 더딘 형태의 노력들은 지속되고 있으나 현실은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공공성을 전제로 한 정부의 정책은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한 ‘언발에 오줌누기’식 정책에 그칠 우려가 있다. 개별적 상황과 구체적 사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전국민이 토론에 나서 몇 만년 걸려도 답이 안나오겠지만 우리 사회가 나갈 방향과 정책 목표가 확실하다면 사실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각론은 다를 수 있고 논쟁도 가능하다. 사회적 합의와 타협은 요원해 보인다. 스웨덴식 사회적 대타협 이야기는 ‘쾌도난마 한국경제’의 장하준 이야기에 과민 반응하는 정부 경제 부처 각료들의 이상주의로 비쳐지기도 한다. 철학적 이념적 틀이 공고하지 않은 정부 여당의 일관성 없는 태도와 미온적인 정책들이 답답해 보이는 것은 개인적이 과격성 때문인가. 혼자 흥분해서 별 쓸데없는 이야기로 와전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두 번째 만화책 ‘사이시옷’은 ‘십시일반’만큼 의미 있는 작업이다. 지하철에 비치해서 온 국민이 멀뚱히 보낼 시간을 때워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옴니버스식 영화 ‘여섯 개의 시선’을 설특집 영화로 방영되어 온가족이 둘러 앉아 함께 보는 상상을 해 본다. 작은 차이와 조그만 노력들이 얼마나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말해야 아는가. 개별적인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마지막 만화 ‘창窓’은 군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등병과 병장의 시선은 다르다. 수십억, 수백억을 가진 사람들과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야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다르다. 개인적 노력과 경쟁의 논리를 넘어선자리에 합의점이 있지 않을까? 없으면 말고……


060216-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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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 평등으로 - 인권을 위한 강의
김동춘.한홍구.조효제 엮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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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견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한 사람이 꿈을 꾸면 일장춘몽, 남가일몽, 한단지몽, 호접지몽이 되지만, 모두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내가 꿈꾸는 현실은 타인이 꿈꾸는 현실과 다른 것이 항상 문제가 생기고 충돌이 발생한다. 편견과 선입견이란 이름은 다수에 의한 비중을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해보면 항상 내게 던져 주었던 모든 것들이 편견을 넘어선 곳에서 자리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원론적 문제에 부딪히면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항상 반복되는 순환론의 고리가 연결된다.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다시 돌고 돌아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쉽사리 ‘편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다수에 의한 공동의 선을 추구하자는 민주주의 원칙을 원용한 절대 선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도 궁금해진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합의에 의해 강제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그렇다고 현실을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이기적인 삶과 금밖에 서있는 사람들에 대한 논의가 없어질 수는 없다.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늘 이런보다 실천이, 원론보다 각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사회적인 문제에 관한한 풍찬노숙을 견뎌내며 흰수염을 휘날리는 문정현신부님같은 분의 행동은 그 어떤 웅변보다 많은 말들을 사람들에게 전한다고 믿는다.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라는 책은 참 난감한 책이다. 김동춘, 한홍구, 조효제가 엮은 책이라면 안읽어도 뻔하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 뻔하다. 그 뻔한 사실들을 우리는 왜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나? 너무 뻔해서일까? 몰라서일까? 귀찮아서?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서? 내게 불이익이 돌아오니까? 내게 이익으로 돌아올만 게 없어서?

  평등은 또 하나의 편견이다. 평등을 바라보는 관점과 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여기에 늘어놓는 것도 의미 없지만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무의미하다. 어떤 평등을 말하는가에 따라 많은 말들이 오간다. 단순하게 정리해보자.

  인간이 가져야하는, 가질 수 있는 권리와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순간들을 굳이 외면하면서 살아온걸까? 내가 그 인권이 뭔지 모르고 살아온걸까? 그 인권을 빼앗기며 살아온걸까? 참으로 감상적이고 주관적 태도에 빠지기 쉬운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대학 신입생들에게 기초교양으로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집필의도와 목적이 분명하고 오래동안 인권운동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필진들에 의해 쓰여진 책은 분명 실천적인 냄새가 강하다. 무모하거나 이론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다. 현재 우리 상황에서 논할 수 있는 인권에 대한 정의가 우선 분명하다. 시민사회와 인권의 문제를 동양문화권에서 살펴보고 서양과 다른 현실상황을 짚어보고 소수자와 장애인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논의의 초점을 다양화하면서도 하나로 모아내고 있다.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순간에 나를 바꾸지 않으면 현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모든 갈등과 선택의 순간에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냉정하다. 그리고 말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는 일은 더욱 어렵고 힘들다. 편견과 평등은 중지를 모을 일이지만 개인의 의식과 사회 ․ 문화적 토대가 쉽게 바뀌지 않는 어려움속에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문제다. 한 걸음씩 내딛어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을 떠오르는대로 쏟아내는 것도 지나고 나면 나를 돌아보는 한 순간이 될 것이다. 시작해보자. 여기, 지금부터 시작이다. 항상, 나를 인정하듯이 너를 인정하고 이론적 논의와 정책적, 사회적 관심과 제도적 보완에 앞서 의식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또 반복할 필요는 없다. 억압과 문화를 앞세워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지구 곳곳의 현실보다 먼저 내 주변을 돌아본다. 실천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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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전쟁 - 미래 전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존 에드워즈 지음, 류동완 옮김, 김민석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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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세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쟁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까지 유효한 이 사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발달하고 있다. 미래의 군인과 가상 전쟁을 생각할 것도 없이 현재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진화하는 전쟁>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을 넘어 선 자리에 환경 파괴가 놓여 있듯이 살상 무기와 보다 효율적인 전쟁을 위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가능한 모든 상상을 현실로 바꾸어 나가고 있다. 그 현재적 의미를 점검해 보는 책이 바로 존 에드워즈의 <진화하는 전쟁>이다.

  ‘미래 전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전쟁은 추악한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지는 않다. 그보다 더 추악한 것은 전쟁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부패하고 타락한 도덕심과 애국심이다. 국민은 지배자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군대에서 대포를 쏘고 총검을 휘두르는 하나의 단순한 인간 도구로 사용될 때, 전쟁으로 인해 타락하게 된다”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로 시작한다. 이 책이 전하는 의미가 미래 전쟁에 대한 환상과 패배를 모르는 군대를 상상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세계 정복이나 끊임없는 욕망앞에 무력한 지배자에 대한 의구심과 저자의 노파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간 사이의 갈등과 폭력은 단위가 씨족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국가로 확장되었을 뿐 우리 인간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쌍둥이처럼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복잡하고 분화된 사회에 항상 내재되어 있는 폭력에 대한 유혹과 파괴에 대한 욕망, 즉 전쟁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고찰해 볼 수 있는 반면교사로 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이미 힘의 균형이 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말에 시작된 식민지 경쟁이나 힘의 논리에 의한 세계지배는 그 목적과 효용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재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순진하면서도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탈냉전 이후 ‘세계화’의 미명아래 벌어지고 있는 미제국주의는 한층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은 ‘세계 깡패’ 국가가 된 지 오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오래된 전쟁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진행형인 전쟁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인류라는 종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한 파워게임인지도 모른다.

  전쟁의 목적이 승리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현대전은 인명 살상이 목적이 아니라 군사시설의 파괴와 상대방의 지휘 체계의 무력화, 정보와 통제에 의한 지배체제의 구축은 전쟁의 목적과 양상이 과거와는 판이한 양상을 보여준다. 목적이 어디에 있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인명을 최대한 보호하고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 개발된 무기체제와 의복, 정보통신, 군수 장비의 발전은 눈부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도 군사 목적으로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은 찾아서 파괴하기라는 제목으로 전술 체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해서 정보, 통신, 정찰, 재난 구조, 보건, 의학, 생명공학, 운송, 군수, 보안, 암호기술 그리고 군복과 보호 장비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 과정에 동원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점검하고 있다. 대부분 오늘 현재 시점에서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그 실현가능성을 점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과학기술의 발달과 전쟁이 아닌 현실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은 행간에 숨어 있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읽다보면 독자들이 생각하는, 혹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책을 읽는 목적이 새로운 정보를 얻고 사고의 폭을 넓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높혀주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값을 한다. 주의할 것은 저자의 뛰어난 능력과 높은 안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하는 정보들 사이의 연결고리와 상상의 즐거움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전쟁이 없는 미래를 상상해 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명 살상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쟁 수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진행 중인 대다수 미국의 전쟁 관련 프로젝트들의 반성적 토대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2010년 실전 배치를 목적으로 진행되?있는 오브젝트 포스 워리어(0bjective Force Warrior)에 비하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노력만으로 가능할 지도 모른다. 철학적 반성이 필요한 종류의 책은 아니지만 미래에 대한 환상과 꿈을 전쟁으로 풀어내려는 어리석음을 미리 경계해 본다. 그것은 ‘진화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에 의한 인류의 파멸’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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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는 논리 문지푸른책 밝은눈 10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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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 나눈다면 이 책은 필요없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책들이 그렇겠지만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 이기적이고 냉소적이고 개인적인 관점 - 불필요한 책이다. 사회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경쟁적, 자본주의적 질서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해가 되는 책이다. 특히 청소년 시기에 겪을 수 있는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은 공부에 방해가 되거나 사회적 욕망을 달성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가 반가워하겠는가. 공부에 방해가 되는 어떤 활동도 꺼려하는 것이 현실이다. 학생회 활동, 심지어 반장, 부반장 경력이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상당수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이 꺼릴 것이다. 게다가 학교내 동아리 활동이나 사회 봉사활동, 사회 참여 활동 등은 대학 진학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다. 슬픈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김찬호의 <사회를 보는 논리>를 읽으라고 권한다면, 논술에 도움이 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대단히 도움이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책의 효용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슬프다. 특히 실용적 목적의 책읽기는 책이 수단과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책이 신성시되어야 한다거나 높은 교양과 학문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같은 책을 통해서도 목적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는 혼란스런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내 삶의 방향이나 목적을 수정하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얻고,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생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인식의 힘을 길러 나가는 도구로서 책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유 방식을 색다르게, 참신하고 창의력 있는 관점을 가져야겠다는 목적으로 책을 읽는 논술용 교재로 인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2001년에 출판된 이 책은 저자의 말대로 내용보다 문체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체 4부의 구성으로 인식 모델의 성찰, 공생과 교류의 관계, 21세기의 사회 구상, 대안적 생활양식의 모색으로 되어 있다. 사회 전반에 관한 폭넓은 관심과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는 의도가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전문 용어나 어렵고 딱딱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서가 아니기 때문에 같이 공감하고 생각해 볼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 문체가 가볍거나 얄팍한 내용으로 사회적 관심사를 나열하는 책은 아니다. 깊이 있는 주제와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책을 읽어나가면서 더욱 절감한다. 김찬호는 이 부분에서 일정부분 성과를 거뒀고 성공한 듯 보인다. 다만 제한된 분량과 시리즈의 기획의도라는 출판사의 요구에 맞물려 적당한 분량으로 지나치게 다이어트 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조금 더 자세하게 깊이있게 다루었다면 더 좋은 책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람 사이에서 소통되는 언어의 문제, 문화의 문제,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 모델을 성찰하는 일은 나이와 시기에 상관없이 일생을 두고 고민해야 할 문제다. 직업이나 삶의 틀이 형성되기 전인 청소년 시기에는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해낼 수 없다는 견해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대안적인 삶의 모델들도 살펴보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고민과 반성, 자기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더 절실하게 필요해지고 있다. 청소년이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먼저 작은 관심과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안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듯이 옳다고 해서 모두 그것을 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논리를 뛰어 넘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21세기의 인물로 선정될 것이다. 그 대안이 사회체제이든 국가 형태이든 급격한 변화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하게 세계화나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허우적댈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여행을 즐기는 세대들을 위해 작은 나침반과 지침서, 그리고 이 배가 어떤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안내는 늘 필요하다. 이 책 한권으로 이 많은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 다만 학문적 영역과 울타리 안에서 논의되는 아카데미즘의 견고함과 논술처럼 시류에 편승한 상업적 저널리즘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참된 지식인의 역할이다. 그것들을 선별하고 읽혀야 하는 것 또한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지만, 반듯한 사각형 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들, 돈이 행복을 보장해 줄 거라 굳게 믿는 스무 살 언저리의 젊은 사들의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혀 주는 역할 할 수 있는 책이다. 꾸준히 팔릴 때는 이유가 있다.


06040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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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하고 서툰 사랑 고백 우리시대의 논리 1
손석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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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와 세상살이를 묶어 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으로 보는 세상살이는 더욱 느낌이 새로워진다.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미래에 관한 전망도 아닌 불과 얼마 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철저한 망각과 혹은 세밀한 분석은 관계자들만의 몫으로 돌려버리기 쉽다. 군중 혹은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머나먼 이야기 일 수도 있고 내 이야기지만 하릴없이 속으로만 분노하는 경우도 많다. 세상 모든 일이 나와 무관한 일이 어디 있을까. 더구나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접 만나게 되는 현장속의 일들일 경우에는 더욱 문제가 된다. 토인비의 말처럼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데 있는 지도 모른다.

신문의 칼럼은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담아내는 현실적 문제의 돋보기다. 사설이 아니라 기명칼럼의 경우 개인적인 식견과 관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특정인의 칼럼만을 가지고 하나의 문제를 다양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하지만 모두 같은 수준의 칼럼을 방향만 달리 한 채 쓰는 것도 아니다. 소위 ‘조중동’의 사설과 칼럼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평가하면서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뱉어내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특별한 용기임에 틀림없다. 본업이 작가나 대학에 몸담고 있는 교수가 아니라 언론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손석춘의 칼럼들은 특별함을 가진다.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발언과 결기있는 자세는 결국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손석춘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은 소설이나 시집 제목으로도 손색없다. 그러나 이 책은 세상과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고백’임에 틀림없다. 2004년과 2005년 한겨레의 칼럼들을 모아놓은 이 책은 가장 역동적인 시기를 살았던 우리의 기억들을 새롭게 한다.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탄핵과 17대 총선이 절정을 이룬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한국군 파병은 고 김선일씨에 대한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한다. MBC 이상호 기자의 X-파일을 어떻게 되었나?

불과 얼마전까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들을 우리는 때때로 까맣게 잊고 지낸다. 기억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실제 생활과의 거리감때문일지도 모른다. 주변에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도 시간이 가면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현실의 문제들은 잊혀지더라도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본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왜 아직도 ‘조중동’의 논리를 자신의 논리로 착각하며 살아가는지, 자신의 사회경제적 계급과 지위를 잊고 불합리한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지, 그것이 5․31 지방선거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일은 서글프다.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천국의 이야기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스웨덴을 벤치마킹하고 싶다던 노무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탄핵과 17대 총선의 결과를 열린우리당은 지금까지 어떻게 활용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한지 확인하는 일은 답답함을 넘어 분노가 된다. 대안없는 비판에 대한 비판을 멈출 때가 아닌가 싶다. 손석춘의 칼럼들이 이야기하는 2년간의 한국 사회의 자화상은 우울하다 못해 비참하다. 그대로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다만 그 깊이와 넓이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비정규직의 양산과 미군기지 이전에서 보여준 정부의 태도를 생각하면 부자신문이라 불리는 수구보수 언론의 대명사 ‘조중동’의 협잡과 동맹으로 여겨진다.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 이제 노무현 정권의 소임은 실패로 끝났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나온다. 무엇이 다른가 생각해 볼이다. 아직도 노무현이 좌파라고 외치는 정신나간 사람은 없겠지만 미래 사회에 대한 대안과 희망은 누구에게 어떻게 찾을 것인가.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굴러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면 미래는 암담하다. 더더욱 암담한 것은 그것은 그들만의 몫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인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다. 겁 없이, 혹은 조롱하듯 내뱉은 정치인들의 말 속에 숨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우매한 국민들, 멍청한 민중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모두가 투사나 독립군이 되라는 선동이 아니다. 최소한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자신의 태도가 어떠한가를 점검해 보는 정도를 손석춘은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목소리 칼칼한 진보 언론인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다만 그 목소리들이 모이고 모여야 한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더라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지 않는가. 침묵하는 다수의 고민과 성찰은 그대로 부자신문의 비이성적인 목소리와 대중들의 심리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파시즘과 결합되어 현실로 나타난다.

‘사랑’은 참 다양한 방법이 있다. 특히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그것이 ‘과격하고 서툰’ 것일지라도 그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마치 전사의 목소리로 세상에 대한 격문을 발표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손석춘의 외침들이 불편하고 부담스럽지 않고 당연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부정과 모순이 존재한다. 그걸 바라보는 관점이나 무게가 다를 뿐이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은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혁명보다 힘든 ‘개혁’을 말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060607-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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