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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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건강은 다양한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가치와 이념들이 제각각 자기 목소리와 색깔을 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보다 나은 사회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 가치들이 공존한다고 해서 구색을 갖추듯 쇼윈도우의 상품처럼 다양하게 진열된다고 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각기 다른 이념들이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가치와 신념대로 살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규항이 들으면 무척 화를 낼 일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B급 좌파’를 자처하는 김규항이 <나는 왜 불온한가>의 머리말에 인용한, 내가 좋아하는 노신 선생의 말이다. 그러나 그는 ‘걸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만들어가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 길은 언젠가 넓고 탄탄한 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걷고 싶은 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어쩌면 그 길을 걷고 싶으나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이 걷는 길에 섞여 걷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는 길을 김규항은 묵묵히 걸으며 소리 높혀 사람들에게 외친다. 이 길이 사람 사는 길이라고, 이 길이 더불어 사는 길이라고, 모두 이 길로 오라고. 사회주의자라는 이름표는 김규항과 지나치게 잘 어울린다. 스스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달리 부를만한 이름도 없는 셈이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혼동하고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때문에 잘못 규정된 이념적 지향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의 생각은 사상이나 이념이라는 거창한 말이 어울리는 않는다. 그의 삶은 혁명가의 그것처럼 화려하거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아름답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생활의 발견’이다. 소소한 생활속에서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이웃과 나누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모습은 아주 쉽고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평범한 우리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인가. 김규항은 말한다. 자본주의 물들어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온몸을 맡기고 치열한 경쟁과 사람냄새 나지 않는 일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내가 그의 글을 잘못읽지 않았다면 내가 읽은 이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선택한 가난에 대해 당당하며 삶의 태도가 당당하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한 그의 모습은 물론 군자나 종교인의 모습은 아니다. 흔히 우리 이웃에서 볼 수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들과 그가 가진 생각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글쓰는 것조차 지식인의 것이라서 대단히 힘들다는 김규항이 진보의 거처를 묻고 있다.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뀐다.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운동을 청산한 사람들이나 선택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지점들을 포함한)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본문 49페이지)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김규항의 이 책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겨레와 씨네21, 노동자의 힘, 보그 등 잡지와 신문에 연재한 그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을 쓰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마지막에 2004년과 2005년 일기를 덧붙이고 있어 그의 인간적인 면모과 생활과 생각의 접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아주 인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논평자들과 밤의 주둥아리들(네티즌)을 혐오하며 활동가를 가장 아름다운 직업이라 말하는 그의 말에 진진하게 경청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생활이 곧 그의 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는 한 마디의 말은 다른 어떤 거창한 웅변이나 화려한 수사보다도 더 큰 울림을 전해준다. 그의 이념과 가치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을 들어보자.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한다면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존경할 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체 게바라나 김산을 흠모하는 우리는 현실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엔 관심이 없나 그들을 비웃곤 하지요. “어리석고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본문 213페이지)

  그의 말대로 시간이 흘러 책 속에서 만난 체 게바라나 ‘아리랑’에서 만난 김산을 나는 흠모한다. 이름없는 우리 생활 속의 체 게바라나 김산을 ‘비현실적이며 관념적인 사람’이라고 비웃은 적은 없지만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많지 않다. 작은 실천과 노력이 사회를 변화 발전시킨다는 평소의 생각만으로는 부족한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그들과 우리의 삶이 별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규항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만든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정기구독할 예정이다.

  우리는 인류가 생긴 이래 최악의 어른들이다. 우리 전엔, 제 아무리 탐욕스런 장사치들도 제 아이에게 동무를 경쟁자라 가르치거나 돈이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그렇게 가르친다. (본문 281페이지)

  누구나 말한다. 아이들이 미래의 희망이라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고민과 실천은 영원한 숙제가 되겠지만 내겐 전혀 불온하지 않고 지극히 상식적인 김규항의 글들이 아프게 다가왔고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재생지로 만들어 두툼하지만 가벼운 그의 책이 또다른 방식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본문 251)


200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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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바티칸의 금서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4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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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져도 군주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 군주라는 지위는 군주국의 형태로 남아 있는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공화국에도 군주의 지위를 가진 사람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그들의 지위와 역할이 많이 달라졌으나 변하지 않는 치세의 전략은 현재도 유효하다. 500여년 동안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만큼 군주와 백성 사이의 관계, 군주와 신하들 사이의 관계, 군주와 다른 군주와의 관계 등을 가장 현실적인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은 물론이고 외교 문제와 신하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고전은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만으로도 그 역할은 충분하다. <군주론>의 상세한 내용은 당시의 이탈리아의 정치, 역사, 외교, 문화 등 폭넓은 시각과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하고 분석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배경지식의 역할 이외에는 다른 의미는 없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의 로렌초에게 이 논문형태의 책을 헌사한 이유는 당시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아들이었던 체사레 보르자를 이상적인 군주로 설정하여 피렌체의 굳건한 기반을 다지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음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현실 군주의 실전 지침서이면서 자신의 능력과 안목을 보여주기 위한 처절한 목적이 숨어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공화국 형태의 나라에서 군주는 대통령에 해당한다. 물론 그들이 가진 권리와 의무, 국민들과의 관계가 군주국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현실 정치의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군주론>의 이야기들과 많이 다르지 않다. 흔히들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잘못된 용어로 군주의 냉혹함과 인색함, 잔혹함과 두려움의 덕목들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군주론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고 당시의 사회사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보고 고민해본다면 도대체 마키아벨리의 의도가 무엇이었으며 군주론에서 이야기하는 군주가 지켜야할 덕목들에 대한 세인들의 오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된다.

  말하자면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의 혼탁한 소용돌이 속에서 강력한 군주국으로 나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갖추어야할 군주의 덕목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인간관계와는 달라야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관계가 아닌 군주라는 특별한 자리에 오르기 위한, 혹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군주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들은 혼란한 국제관계에서, 그 힘의 논리에서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한 나름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시대와 상황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본다면 마키아벨리의 주장과 견해는 충분히 의미있고 수용될 수 있는 정도의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설정하고 집필된 것으로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와 에스퍄냐,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나폴리, 밀라노, 베네치아 등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힘의 부침에 따라 몰락과 부활을 반복하는 군주들의 모습을 지켜본 외교관 마키아벨리는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과정과 군주의 몰락 과정 그리고 굳건한 기반을 다져가는 군주의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16세기 중반의 이상적 군주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도 달라진다. 정치 형태도 달라지고 국제 관계도 변화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군주의 지위에 버금가는 지위에 오른 자와 국민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측근들을 다루는 인간 관계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충고들은 여전하다고 본다. 왜곡된 형태로 역사속의 인물이 잘못 이해되거나 한 권의 책이 지니는 의미를 과대 포장하거나 축소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있는 그대로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시 한번 미래를 위한 역사의 교훈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와 로마의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사회문화적 이해가 바탕이 된다면 이 책은 훨씬 더 많은 논의와 해석이 가능한 책이라고 본다. <군주론>은 군주국의 종류와 성립에서 시작해서 야만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간곡한 권유에 이르기까지 전체 2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제 18장은 <군주론>의 핵심으로 볼 수 있다. 가장 많이 인용되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들은 군주가 갖추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덕목들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군주들은 약속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으며 기만을 통해 사람들의 혼을 빼놓?데 능숙한 인물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을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수단이 있음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법률에 따르는 痼見?다른 한 가지는 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군주는 짐승과 인간의 성품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 그러므로 군주는 짐승의 성품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짐승 들 중에서도 여우와 사자의 성품을 선택해야 합니다. …… 현명한 통치자라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해지거나 약속하도록 만들었던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 약속을 지킬 수도 없을뿐더러 지켜서도 안됩니다. ……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어겨야하며, 자비심도 베풀지 말아야 하며 종교도 무시해야만 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 군주는 운명의 방향과 자신에게 닥쳐오는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 군주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자비롭고 신의 있으며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신앙심 깊은 사람으로 보여야만 합니다. (본문 146~150페이지)

  전체 문맥 속에서 그리고 당시의 사회역사적 관점으로 외교 관계까지 들여다 보고 마키아벨리가 열망했던 강력한 군주를 통한 조국 이탈리아의 대통합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또다른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 관계의 덕목과 민주사회에서 요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님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권력과 강력한 왕권을 위한 좋은 가이드가 될 수 있으나 국민들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군주로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논쟁속에 휩싸여 있고 오해되고 있으며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혹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거나 반대하는 지침서로 활용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05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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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 6색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인터뷰 특강 시리즈 2
한겨레출판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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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흔히 예술가들의 전유물로 오해하기 쉽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없는 기능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능이 상상력이다. 나는 늘 꿈꾼다. 몇 천억쯤 되는 돈이 있다면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하는 상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굶주린 아이로 살아있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나 마당을 쓸고 있는 상상에 이르기까지 공상에 가까운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상상은 대부분 공상으로 마무리 되지만 ‘꿈’의 의미와 범위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있을 것이다. 앞서 열거한 개인적 공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생산적 상상력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겨레의 인터뷰 특강은 작년의 <21세를 바꾸는 교양>에 이어 올해는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계속됐다.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한 권의 책으로 현장을 떠올리며 읽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교양’에 이어 ‘상상력’이라는 다소 모호할 수 있는 주제와 특강에 참여한 강사들의 강의 내용이 직접 관련을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모든 문제는 개인에게 돌릴 수 밖에 없다. 타인에 의해 상상력이 자극될 수는 있겠지만 대신 생각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통을 나누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한비야, ‘신화의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이윤기, ‘자아실현의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홍세화, ‘새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박노자, ‘과거를 푸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한홍구, ‘문명에서 배우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오귀환의 인터뷰 특강이 이어졌다. 6명의 제각각 다른 색깔들로 채워진 이번 특강은 6인 6색이었다. 김갑수의 사회로 진행되어 앞부분의 짤막한 강의 내용에 대한 청중들의 질의 응답 형식으로 이어져 일방적인 강의와는 달리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각기 다른 주제가 무지개처럼 뒤섞이진 않았으나 거부감이 들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주제가 다르고 강사들의 공통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상상력’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너무나 익숙한 6명의 이야기가 식상할 수도 있으나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할 내용들이다.

  21세기는 불연속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간 구분에 속한다. 시간을 1년 단위로 끊어서 연말연시다 세기말이다 하는 것은 나름대로 정리와 반성의 의미를 지니겠지만 쉼없이 흘러온 시간과 역사 속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전체 강의 주제에서도 나타나듯이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개인주의와 가족주의를 넘어서 거시적인 안목에서 사회를 조망해보는 고민이 모든 사람들에게 상시적일 수는 없어도 한번쯤 짚어봐야 할 당연한 문제이기도 하다. 큰 틀과 전망 속에 개인이나 가족의 모습도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의의 주제나 내용이 비현실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이지는 않다. 우리들 생활속에서 미쳐 깨닫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함께 고민해보고 개개인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지 그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고민해보기도 한다. 그것이 21세기든 22세기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개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평생 고민하며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을 위해서든, 사회를 위해서든,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한 점으로도 찍힐 수 없는 역사속의 개인의 의미를 묻기 전에 사는 이유에 대한 소박한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불편부당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관점이 잘못되었거나 사회가 변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시선과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리 분석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를 원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세상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과 개인적 관심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 무한한 상상력과 에너지가 하나로 모아지고 개인과 사회가 어깨 겯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우리 모두에게 충분하다. 힘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이다. 공간과 시간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찍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미래의 모습을 조금은 상상할 수 있지 을까? 참 별 쓸데없는 걱정도 다 했던 과거가 있어다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상상해본다.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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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상식론 - 새로운 휴머니즘을 위하여
박호성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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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른바 ‘좌파’의 자세를 아우르며, 과격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영어 ‘래디컬(radical)’의 어원은, ‘뿌리째 파고든다’는 의미를 가진, ‘라딕스’라는 라틴어다. 말하자면 뿌리까지 파고들어 속속들이 따지고드는, 단호한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 P. 197

  강유원이 자신을 표현할 때 래디컬하다고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색깔이다. 분명하고 군더더기 없이 그 사람을 알려줄 것 같은 매력이 있다. 한 인간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래디컬한 인간이라는 일종의 편견을 가지면 사상의 단면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잘못 표현되거나 독선에 빠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수준 문제다. 자신의 사상과 색깔을 분명히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색깔만 논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늘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실천의 문제로 귀결된다. 수많은 탁상공론은 의미없다. 다소 과격하더라도 온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의 육화된 이야기에 감동을 담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박호성의 논의와 코드(?)에 일단 동의하지만 강력하고 진심어린 주장은 공허함 울림으로 끝나버린다.

  박호성의 ‘우리시대의 상식론common sense for korean’은 일종의 편견이다. 수구꼴통 우파에서 본다면 좌파의 상식은 상식이 아니다. 그 역도 마찬가지겠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 여기서 말하는 ‘건전’의 기준은 뭘까? - 사람들이라면 동의할만한 상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이것이다 말하기는 참 어렵다. 우리 시대의 상식이라니, 너희들 시대의 상식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박호성은 좌파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다. 그래서 그는 ‘진보進步는 진보眞寶다.’라고 말한다. 進步가 眞寶라니, 우파의 반응이 궁금하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기준은 상이하다. 다만 일종의 편견이라고 전제할 때 몇가지 성향과 방향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다. 그 단순한 논리가 오른쪽과 왼쪽이다. 물론 가운데도 있지만 그 가운데가 얼마나 위험하고 더러운 처세술인지 박호성의 말을 들어보자.

  지옥에서 가장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장소가 하나 있는데, 그곳은 이승에서 위기의 순간에 중립만을 지켜온 죄인들을 마지막으로 처절하게 단근질하는 곳이라고 불교 경전은 쓰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도 역시 힘든 문제가 발생하는 위험한 순간에 항상 중립을 지키며 정의의 사도처럼 행세하는 사람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또한 아무런 위험도 따르지 않는 평화로운 순간에 과격한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는 사람 역시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기회주의적 정의감과 무책임한 과격성을 가능한 멀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P. 279

  이 책에서 내가 읽어낸 화두는 이렇게 단순하다. 좌파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갈등하는 사회는 나쁘지 않다. 건전(?)한 우파와 참신한(?) 좌파의 갈등은 차라리 축복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직 멀었다는 비관론 대신 비참한 심정까지 든다. 아직도 이념공방과 과거사 문제, 국가보안법, 사학법 문제에 대한 해법과 시각이 제각각이다. 많은 사람들의 많은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발전적인 갈등과 충돌은 요원해 보인다. 정치인들만의 싸움질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에 답답하다. 내가, 아니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을 수 있는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 박호성이 이야기하는 ‘상식’이 진짜 ‘상식’이 되는 날은 올 것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인의 생활 철학과 해방과 통일, 한국 사회의 현주소, 이데올로기와 개혁, 전통과 진보, 자연정치론과 원시인 정치론을 거쳐 새로운 휴머니즘을 주창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 신제국주의와 한반도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신휴머니즘’은 저자가 꿈꾸는 유토피아다. 나도 그곳에 가 살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말하던 시인의 말은 부정되어야 할까?

  시간이 흐르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이기적이며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자유의 평등은 영원한 인간의 꿈일 뿐이다. 자유와 평등이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이상주의를 포기할 때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생긴다고 믿는다. 성난 얼굴로 달려드는 기득권 세력의 얼굴을 웃는 얼굴로, 상생과 타협과 대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을까? 끊임없는 의문부호 남는 문제가 아니다. 기다는 지차제 선거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투표 방식을 들여다 보라. 그리고 정치인을 욕하지 말라. 네 이웃을 조심하고 내 입을 단속하라. 지독한 역설과 모순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박호성이 말하?우리의 사회의 문제와 상식의 의미는 깊은 성찰의 시간을 요구한다. 하지만 전방위적으로 덤벼든 이 수많은 논점에 대한 해답은 멀기만 하다. 이론적 담론에 불과한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대안의 유무만으로 비판을 비난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지만 이상적 논의와 상식 수준의 이야기들보다, 미래를 위한 큰 그림보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치열함을 배웠으면 좋겠다. 단적으로,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방안이 쏟아지고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정부여당의 무뇌아적 발상과 대책들을 살펴보라. 개혁과 진보의 이름으로 혁명이 이루져야 한다. 아니, 이름이야 어찌됐든 꿈을 꾸고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0602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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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들’과 ‘당신들’은 나의 포함 여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금을 그어 놓은 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당신들’이라는 말에는 소외된 ‘나’와 ‘우리들’이 존재한다. 일정한 거리감을 두고 말하는 방식인 ‘당신들’이라는 호칭은 그래서 객관성을 전제로 한다. 소설과 다른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냉정하고 분별있는 시선으로 대한민국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이거나 공정한 시선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도 지니고 있다. 귀화한 러시아인 박노자는 외국인은 아니지만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전통과 문화적 관점에서 혹은 유전적 관점에서 완전한 한국 사람으로 볼 수 없다. 내게는 그가 또 다른 유형의 주변인이자 경계인으로 비친다. 그래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소속된 집단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일정부분 한계가 있음을 전제로 할 때, 박노자의 견해에 대해 많은 오류와 문제점도 지적당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논의에 대해 기본적인 시각차를 인정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다소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2006년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에 대한 문제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은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우리의 모습을 조망해 보는 모습은 항상 필요하다. 쓴소리와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박노자가 우리 사회를 보는 관점은 긍정 속에 부정이다. 경제와 문화 측면에서 괄목한 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주)대한민국은 이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2001년에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반응은 다양했다. 5년 후 속편 격인 ‘당신들의 대한민국 02’가 나왔다. 참여정부가 들어섰고 박노자는 이제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을 떠났다고 해서 그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야기한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던 표현과 비판을 넘어서 때로는 과격하고 감정적인 발언도 불사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은 알면서 고쳐지지 않는 것들도 많다. 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늘 궁금하다. 그의 말과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과 영향 때문이 아니라 벽안의 귀화 한국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일상 속의 권위주의와 숭미주의, 박제가 된 학문의 자유와 합리화된 폭력들, 민족주의와 북한의 문제 그리고 보수를 넘어 진보를 주장하는 그의 이야기들은 미온적 ‘개혁’의 흉내가 아니라 근본적인 ‘혁명’을 꿈꾸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행간에 묻어 있는 그의 생각들은 ‘이상주의’에 가깝다. 그러나 모두가 꿈을 꾸면 이루어 낼 수 있는 대단히 현실적인 이상들이다. 실현 불가능한 미래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된 미래의 모습, 현실속의 가능태로 나타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간에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방향의 문제를 점검하는 데 일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겨레에 여전히 칼럼을 쓰며 변함없는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보내고 있는 그의 쓴소리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 특정한 목적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목소리도 아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적당한 거리에서 비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이, 박노자의 눈이 갖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노동자, 농민이라는 대다수 대한민국 사람들의 모습과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소수의 모습까지 두루 점검하고 손길을 내밀어 더불어 함께 걸어가야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다만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분열되고 이기적인 모습들, 우리 안에 내재된 또 다른 우리의 모습들을 점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차별과 폭력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위정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 대타협의 서구 유럽의 모델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벗어던져야 할 편견과 익숙해져버린 이기심이다. 쉬운 길을 걸어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욕하기는 쉬워도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것은 어렵다. 길이 아니라고 우기지 말고 또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박노자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아니다. 대학 교수의 직함을 가진 어느새 우리 사회의 주류 資鍍퓸?버린 신분과 다르게 그는 영원히 비판적 시선으로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이야기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근본 체제가 되어 버린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내고 반성할 때 ‘당신들’이 아닌 ‘우리들’이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큰 틀과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 더욱 어렵다. 갑론을박하는 현 정치권의 양극화 해소 방안은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미래는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들’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


050208-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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