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캥거루 문학과지성 시인선 563
임지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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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집도 온라인으로 고른다. 이게 다 ‘코로나’ 탓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밀린 숙제를 하듯 혹은 배부른 허기를 채우듯 시집을 게걸스레 먹어치우고 싶을 때가 있다. 포만감은 느껴지지 않고 더 큰 공허와 무기력에 빠질 때도 있으나 가끔 발바닥을 간질이는 문장을 만나고 겨드랑이가 움츠러드는 표현 때문에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시는 종이로 된 시집을 읽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인용과 crtl+v가 편리한 방법이라는 착각은 시가 주는 깊은 맛과 의미를 포기하는 일이다. 

문지와 창비 시집에도 옥석은 있다. 아니, 취향이 갈린다. 독자마다 다른 입맛 때문이기도 하고 나이, 상황, 감정, 건강, 계절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할머니는 욕을 밥 먹듯이 했다 하루에 한 끼만 드셔야 할 듯’이나 ‘애인에게 이럴 거면 헤어져,가 튀어나오려는 걸 이러지 말자고 고쳐 말했다’는 「언어 순화」가 내게도 필요했기 때문일까. 처음 만난 임지은의 『때때로 캥거루』가 하루를 채웠다. 언어의 깊이와 무게, 이미지를 포착하는 능력 따위는 분석하는 일은 모르겠으나 시인은 ‘유머’라는 강력한 무게를 장착했다. 사람들은 흔히 아재개그를 단순한 언어 유희로 폄훼하지만 명징한 언어의 이면을 들추는 일, 다양한 컨텍스트를 활용하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재능이 아니다. 아니, 어지간한 노력으로 챙길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임지은이 아재 개그를 한다는 게 아니라 언어를 향한 탐닉의 정수에 유머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유머는 긴장을 늦추고 관계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는 문제가 없는데 사람이 문제인 걸까요 관계없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다가 아, 저 사람은 관계가 필요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고 영영 못 보게 되는 사람이 있고 -「잘잘못」중에서

이렇게 관계양상을 정확히 비틀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수가 

두 손을 합친 것보다 많다 

손가락이 열 개뿐인 건 죄가 아니다 

-「죄가 아니다」중에서

자신을 항변하기도 하며, 관계맺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어쩌면 삶이 곧 관계이며, 그 관계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본질이기도 하다. 참고 견디는 일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씨를 호출하고, ‘구태여’ 씨가 등장하기도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호출한 시인의 재치와 타인에 대한 애정 혹은 타인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화하기 어렵다. 

사랑 혹은 이별의 고통에 대하여,

한밤중에 전화를 끊는 사람은 

가끔 알약처럼

잘 삼켜지지 않으므로

머리맡에 물 한 컵이 필요하다

-「사람이 취미」중에서

이렇게 직설법으로 토로하기도 하고,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던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궁금한 게 있었다

너는 모른다고 했다

몰라는 주머니가 있는 동물이 아니었지만

뭔가 담아야 할 것 같았다

고민을 눌러 담자 토끼가 튀어나와 귀를 접었다

몰라의 정체성은 모르는 것에 있었다

가끔은 알아도 모른 척해야 했다

-「때때로 캥거루」중에서

김보경은 “언어에 자유를 부여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시인. 시의 자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해설 「어느 유머리스트의 슬픔과 자유」중에서, 159쪽)라는 말로 임지은 시집을 정리한다. 언어의 자유는 유머를 통해 가능하고 시인의 슬픔은 관계의 자유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었을까. 공감은 향수처럼 진한 향기를 남긴다. 

인간은 악취 위에 뿌린 냄새 같아서

향수로도 잘 감춰지지 않고

틀어놓은 음악을 함께 듣고 있지만 

자기 자신만 듣느라

천사가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대충 천사」중에서

자기 자신만 듣는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숱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사이에서 허탈질 때 우리는 인생의 밝은 면을 기대하지만 그건 오로지 ‘웃음’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함정으로 가득하지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은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아닌

바로 웃긴 면입니다

-「인생의 밝은 면」중에서

삶의 고뇌와 슬픔의 미학으로 시에 접근하는 대신 유머와 해학으로 위로를 건넬 수는 없을까. 웃음은 소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른 척 외면하고, 알면서도 눈감고, 없는 것처럼 말하고, 안 보이는 듯 지낼 때도 있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가끔 가닿지 않는 곳, 이성의 치외법권에 대하여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불법 주차를 한 상태, 뜨거운 문장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냄비 손잡이가 다 타버린 상태, 하자니 괴롭고 안 하자니 더 괴로워서 치과 진료를 미루는 사람처럼 영혼의 치아 하나가 덜렁거리는 상태, 헬스 트레이너는 볼펜 끝을 살짝 깨문다 운동이 꼭 필요한 상태,라고 적는다

-「건강과 직업」중에서

김지, 박쥐, 큰 지은, 안경 지은, 까만 지은(「모두 다른 지은」중에서)…… 그 많던 흔한 ‘지은’이 중 시인의 흔한 이름이 오래 기억되기를. 이런 비유가 좋다. 선명하고 확실한 이미지로 복잡한 상황이나 언어 이전의 세계 혹은 욕망을 표현하는 임지은의 시가 괜찮지은? 

신발 끈같이 엉키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대화들의 대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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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생각한다 창비시선 471
문태준 지음 / 창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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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백자(白磁)와도 같은 흰빛이 내 마음에 가득 고이네

시야는 미루나무처럼 푸르게, 멀리 열리고

내게도 애초에 리듬이 있었네

내 마음은 봄의 과수원

천둥이 요란한 하늘

달빛 내리는 설원

내 마음에 최초로 생겨난 이 공간이여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나는 낙엽처럼 눈을 감고 말았네

곧 ‘천둥이 요란한 하늘’이 시작된다. 하늘에 금이 가듯 번쩍, 하는 순간이 온다. 내가 먼저 그녀를 바라봤다는 사실조차 잊었으리라. 내 눈길이 머문 자리에 그녀의 미소와 몸짓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러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 순간, 화들짝 놀란다. 시인의 시선은 내가 바라본 그녀가 아니라 나를 바라본 그녀의 시선을 포착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주었을 때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바라봤을 때 나는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서너살 무렵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첫 기억」중에서) 돌고 돌면서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를 잊은 지 오래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각인된 첫 기억은 로렌츠의 오리처럼 애착으로 바뀐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아서 열렸던 마음이 어느새 같은 이유로 ‘낙엽처럼 눈을’ 감는 순간이 온다. 

왜 시인과 소설가는 정년이 없을까. 예민한 촉수를 드리우고 타인과 세상과 사물의 감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시인들의 시가 무뎌지고 관조적 태도로 변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은 슬프다. 거의 모든 시인이 걷는 길이다. 맨발로 가재미를 잡던 시인은 어디로 갔을까. 변화보다 안정을, 불안보다 여유가 익숙해지고 고뇌와 번민의 시간을 지나 평정심을 얻는 나이가 되기 때문일까. 제주로 간 문태준의 시에서 수평선에 눈이 베일 듯 날카로운 감각과 인상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넉넉함과 위로를 얻고 싶지는 않다. 

수평선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 것을 올려놓지

주름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그녀가 나를 보아서 각성했던 자아는 파도 위에서 결국 ‘당신’을 바라본다. 여기에서 거기까지, 나와 너와의 거리, 한참을 서성여도 서로 걷는 길의 언저리를 맴도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어느 날 문득 게시판에 올라온 누군가의 질문처럼, ‘우리는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장마가 시작인가보다. 흐리고 구름 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나면 또 뜨거운 태양과 푸른 하늘은 다음을 준비하겠지. 종이로 된 시집 한 권을 천천히 읽는 일은 바다로 걸어간 시인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일처럼 낯설고 헛되다. 늘 그렇듯,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매혹되는 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거기 또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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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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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1월을 좋아한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11월은 인디언식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쓸쓸해서 옷깃을 여미는’ 달이다. 끝도 시작도 아닌 어색한, 달력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놓은 그 11월. 나란히 선 두 개의 1자가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애매한 거리의 그 11월. 한해 곡식을 거두고 단풍으로 물든 화려함을 지나 낙엽이 지고 앙상하게 나목과 회색빛 하늘의 그로테스크한 표정이 오히려 안도감을 준다. 흰 눈으로 덮여 환상을 품은 동화 나라 같은 겨울이 오기 전 그 11월은 한없이 부드럽고 헤픈 봄과 너무 뜨거운 열정이 부담스러운 여름과 전혀 다른 표정이다. 그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 듯 저만치 혼자 팔짱을 낀 모습이 11월의 맨 얼굴이다. 고통을 견디고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과 비교할 수 없는 차디찬 명징함,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 단단한 표정으로 멀리서 관찰하듯 11월은 그렇게 사람들을 바라본다.

물론, 북쪽의 11월과 남쪽의 11월은 다르다. 각자 선 자리에서 다른 풍경이 보이듯, 최은미의 소설집 『눈으로 만든 사람』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을 읽고 나서 11월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체념도 인내도 아닌 명징한 표정의 얼굴들이 스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놓인 그 수많은 감정들 – 사랑, 증오, 환희, 고통, 애틋함, 연민, 안타까움, 회한, 공감, 후회 같은 것들이 없을 리 없다. 삶은 때때로 잠시 내뱉는 한숨 같은 것이다. 우물쭈물할 틈도 없이 시간은 지나가 버리고 지나간 일들은 상처가 되거나 아쉬움을 남긴 채 ‘추억’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를 뒤집어쓰기도 한다. 허나, 사는 동안 사람은 명쾌한 답을 얻을 만큼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최은미는 영지, 나리, 강윤희, 강수영, 승미, 은석, 창용, 은형... 들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아주 잘 쓴 소설을 읽었다. 소설집 한 권으로 최은미를 평가하기 어렵지만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미시적 방법에 흡입됐다. 직접 보여주지 않되 비껴가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본질에 천착하되 분명하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최은미는 체험이 아니고서는 건져 올릴 수 없는 디테일을 통해 사실성을 확보하고 인물들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작위적인 느낌도 없고 억지스런 설정도 보이지 않아 잘 읽혔다. 개인차가 있겠으나 나는 디테일을 놓치고 정교함이 떨어지는 소설에 몰입하지 못한다. 특히, 사소설이라 명명될 만큼 개인의 감정에 몰입하고 그 감정을 일반화하지 못한 경우에는 아주 난감해진다. 공감하는 독자가 없지 않겠으나 소설의 역할과 의미를 의심케하는, 아니 소설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는 소설이 점점 늘어가기 때문에 소설 읽기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은미의 소설은 ‘여성/가족’을 주제로 독서 모임에서 선정한 책이다. 9편의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다. 그들이 기억과 현실이 맞닿는 지점이 고통스럽게 전해진다. 소설을 사회학으로 읽을 수는 없으나 각각의 인물이 살아온 이력과 그들이 놓인 상황은 그대로 우리들의 현실이며 과거이자 미래다.

「눈으로 만든 사람」, 「나와 내담자」, 「내게 내가 나일 그때」는 연작으로 읽힌다. 소설집 전체가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한 듯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고 하면 지나칠까. 친족성폭력 앞에 무력한 주인공은 처절한 절규와 분노를 선택하지 않는다. 아니 최은미는 지금, 여기 놓은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굳이 상처를 헤집고 고통을 설명하는 대신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상황을 객관적 거리에서 묘사하듯 담담하게 서술한다. 독자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감정이 서사를 잡아먹지 않도록 조절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할 만하다. 「보내는 이」, 「여기 우리 마주」, 「11월행」, 「점등」은 조금 다른 이야기로 읽히지만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섬에 관한 이야기다. 불가해한 관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건 어쩌면 모든 소설가의 운명이 아닐까. 그것이 연인이든 부모, 형제든 ‘이해’ 불가능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이러니하다. 허나, 모든 인간은 또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소설적 상상력이 아쉽다. 남성 화자로 쓴 단편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최은미의 소설을 모두 읽지 않은 탓이겠으나 사건과 서사의 힘이 주인공들을 이끌어나가는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다. 문학이라면, 아니 소설에 대해서는 모두 할 말이 많다. 읽는 재미, 다양한 상상력과 작가에 대한 매력, 현대소설과 고전의 차이, 시대마다 다른 주제와 시선들, 가장 쉽고 가장 친근하며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 형식과 내용은 변치 않고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는다. 소설이 전하는 슬픔과 기쁨이 오롯이 현실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일 터.

*단편 「美山」, 「내게 내가 나일 그때」 부근을 읽을 때 문득 생각나서 11월 이야기를 끄적였다. 그리고 단편 제목 「11월행」을 보고 조금 놀랐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기시감, 타임 루프, 평행이론 같은 것들이 실제로 현실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우연에 우연을 더할 때. 책은 개별 독자가 온몸으로 읽을 때 비로소 비밀의 문을 활짝 열고 미처 자기도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 펼쳐 보여준다. 내린천휴게소에 가 무망한 산 그림자를 보며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졌다. 내게 내가 나일 그때가 내겐 언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유정이 창용오빠를 만난 그 휴게소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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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_소설 해시태그 문학선
김지은.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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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팔아야 하는 건 출판사의 숙명이다. 팔리지 않는 책을 만들 수도 없고, 안 팔리는 책을 좋은 책이라고 자위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책은 하나의 상품이며 기획과 제작 마케팅과 유통 과정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각색되고 전혀 다른 목적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문학 출판사에서 재탕은 음식점의 반찬 재활용과 다른 차원이지만 주제와 형식과 표지 디자인을 갈아 신상으로 출시하는 경우가 많다. 해시태그 문학선도 이와 유사한 상품인데 하나의 주제로 단편소설을 여럿을 묶었다. 요즘 유행하는 주제어를 ‘우리 사회의 첨예한 문제의식들의 결정체’라는 말로 포장하고, ‘한국문학의 스펙트럼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만든다’는 명목을 내세운다. 해설에 해당하는 ‘포스트잇’은 시대 상황과 작가의 특징을 소개한다는 면에서 이해할 수 있으나 ‘생각의 타래’는 이 책의 성격에 의문을 갖게 한다. 토론용 교재로 활용하라는 말인지, 독서 모임용 맞춤 도서인지, 수업용 부교재로 적절하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용 확인을 넘어 생각의 확장이 아니라 주인공의 심정과 의도를 유도하는 질문들에 반감이 생긴다. 감상과 수용은 독자의 몫이니 엮은이는 그냥 빠지세요, 라고 일부러 마음속으로 툴툴거렸다. 독자의 반응까지 원하는 대로 끌어내고 싶은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마련된 중고용 학습 교재가 아니라면 이런 발문은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해시태그 문학선 『#젠더_소설』에는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백신애의 「적빈」, 오정희의 「유년의 뜰」, 박완서의 「겨울 나들이」,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모아놓은 단편들은 한국문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소중한 작품들이다. 작가의 면면이나 작품의 무게가 남달라 모두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놀랍게도 백신애, 배수아의 작품을 빼고는 모두 읽은 작품이다. 단편의 특성상 읽고 잊는다. 장편과 달리 소설집은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르다. 읽는 재미와 속도가 다르지만 장편과 다른 식으로 소비되고 기억되는 모양이다. 기시감을 느끼며 다음 장면이 생각날 듯 말 듯 결론이 기억나기도 하고 군데군데 처음 읽는 느낌이고. 시와 달리 소설은 재독을 하지 않는 버릇 때문일 수도 있으나 시대별 흐름의 작품 배치의 의도가 보이지만 ‘젠더’의 관점이 어떤 식으로 이동했는지 구별하는 재미도 있다. 처음 읽는 「적빈」은 이 책의 첫 작품이면서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920~30년대 한국 소설의 주제어는 일반적으로 ‘가난’과 ‘죽음’으로 요약된다. 근대소설의 태동기에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자각, 농경문화에 바탕을 둔 묘사, KAPF를 중심으로 한 이념 논쟁 등 한국문학사는 불행하게도 자유분방한 문학적 상상력이나 다양한 형식적 실험보다 ‘현실’의 도구와 ‘순수’ 문학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물론 이 자리에 ‘여성’이 놓일 자리는 없다. 그래서 백신애의 단편이 도드라지게 빛난다.

피난지 유년 시절을 술회한 오정희 「유년의 뜰」은 애잔하고, 아내와 사별한 남편과 딸의 모습을 보고 여행을 떠난 박완서의 「겨울 나들이」는 가슴이 시리며,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와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는 본격적으로 현대 여성들의 고민과 ‘젠더’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를 감지한다. 식물이 되어가는 아내를 묘사한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는 여성의 수동성, 식물성에 대한 탁월한 메타포가 돋보이며, 배수아의 「프린세스 안나」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의 모습을 건조하게 드러내며,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유명세에 값하는 발랄한 문체와 감각적 묘사로 두 여성을 통해 개인적이고 내밀한 심리를 통해 젠더 문제를 일반화한다.

소설에서 인물과 사건은 거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젠더gender’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고 구체적인 사건이 모여 거대 담론으로 나아간다는 면에서 생물학적 ‘성sex’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다. 풀어야 할 숙제이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지향점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각각의 목표와 방향이 다르고 남성과 여성의 이해가 달라 단기간에 해결될 수도 없다. 그러니 무조건 속도 조절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영원히 ‘합의’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누군가의 용기와 누군가의 배려, 또 누군가의 결단이 모여 세상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 중요한 변곡점에서 여성인 소설가들의 여성 주인공들이 모여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프고 저릿하다. 단순한 고통과 슬픔의 차원을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소외’를 담고 있다. 그들은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딸이며 아내이자 연인이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젠더’는 바로 눈앞에 현실이며 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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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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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존엄사가 사회적 의제로 부상할 때가 되지 않았나. 현대 의학은 두근거리는 삶이 아니라 심장박동 연장술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존엄 사이의 디커플링 현상은 핵가족 시대, 콩가루 집안에 닥친 필수적 사회문제가 되었다. 누구나 늙는다. 누구나 병들고 죽는다.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출생률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육아와 보육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죽음은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된다. 과연 그런가. 당신의, 아니 나의 마지막을 상상해 본다. 병원 중환자실 or 요양병원 or 고급 실버타운인가. 아니면 남편과 아내, 며느리와 사위, 자식들에 기댈 예정인가. 그도 아니면 형제자매, 조카 등 친족에 의지해야 하는가.

안락사를 넘어 존엄사 문제는 한 인간의 생을 마무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영화 《아무르Amour, 2012》는 노부부의 죽음을 다룬다. 영원한 사랑보다 먼저 찾아온 죽음 앞에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한동안 사랑의 끝 혹은 삶의 종착역을 생각하게 한 영화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은 자전적 소설이다. 사르트르와 여동생 푸페트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실제 1963년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 보부아르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그 이듬해 이 책을 출간했다.

150여 쪽 분량의 짧은 작품이지만 내용은 깊고 어둡다. 욕실에서 넘어진 어머니가 두 시간을 기어 전화기까지 가는 장면을 묘사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리들의 부모님,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진행형의 현실이다. 죽음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몸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후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수술을 하고 동생과 교대로 어머니를 돌보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미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친 딸에게도 어머니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다. 모녀지간이 모두 그렇지 않으나 보부아르는 당시 어머니를 기독교적 가치인 동시에 부르주아적인 가치, 나아가 가부장적 질서의 대변자로 간주했다. 애증의 관계였으나 늙고 병들어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 미묘하다.

타자로서 아들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순간, 딸이 어머니를 대하는 순간 오히려 관계가 편안하다.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가 만든 사회적 질서가 아니라 가장 친밀한 부모와 자식간에 지켜야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부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식이나 죄책감과 미안함에 허덕이는 부모나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이 반드시 경제적 대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도 복잡한 심리적 관계가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도 있다. 보부아르는 아주 담담하게 “엄마는 천국이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고 병에 걸렸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현세에 무척이나 집착했고, 죽음을 동물적으로 두려워했다.”라고 적는다. 객관적 거리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관찰자의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본다. 딸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지 그 내밀한 관계를 짚어보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딸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 집집마다 모녀마다 사연인 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사적인 관계가 일반화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보부아르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의 여성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죽음을 앞둔 어머니는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라고 고백한다. 병상에 누워서야 “너무 다른 사람들만을 위해서 살았구나. 이제부터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노인네가 될 테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겪는 때늦은 깨달음과 후회. 우리는 조금 더 일찍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없을까. 몸이 늙고 병들어서야 뒤돌아보는 대신 사는 동안 염두에 둘 순 없을까.

어느 누구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 삶의 마무리를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어야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조금 더 오래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보부아르가 관찰한 대로 인간의 존엄과 죽음은 아주 거리가 멀어진다. 생의 마지막을, 딸들과 이별하는 순간을 생생하게 바라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너무 일반적이고 당연한 과정이라서 특별한 장면이나 기록으로 남길만한 요소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보편적 정서와 마음의 물결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그래서 오히려 불편하다.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그것은 불확실한 자기 삶에 가장 확실한 단 하나의 미래다. 숱한 이야기를 남긴 채, 미련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모두 떠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온전히 하루라도 더 오래 사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이라는 보부아르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살아남은 자들에게나 적용될 수사에 불과한 게 아닐까.

30쪽에 달하는 강초롱의 <타인에 대한 애도를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는 보부아르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독자에게 길잡이 역할을 한다. 어머니 죽음에 대한 애도가 결국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이라는 분석은 지극히 살아남은 자의 이기적 관점으로 읽히지만 논리의 비약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자기 위로와 자기 기만이 모든 인간의 합리화 기제라면 아들이 아버지를 극복하고 딸이 어머니를 이겨내는 것도 지난한 삶의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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