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책도 사람처럼 언제 읽느냐가 중요하다. 열여섯의 <데미안>, 열일곱의 <새벽편지>, 열여덟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아홉의 <지와 사랑>, 스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르는 것은 나이보다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일생동안 많은 책을 읽고 잊어버린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작가는 바로 그 순간에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건넸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기를 전작주의로 삼은 조희봉은 <전작주의자의 꿈>을 통해 한 작가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해석을 통해 책읽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방법은 조금씩 다양하겠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렇게 한 작가에 탐닉하다가 이별하고 또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헤어진다. 헤르만 헤세, 정호승, 오규원, 황지우, 김지하, 김남주, 황석영, 밀란 쿤데라와 함께 사춘기를 보낸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파피용> 이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시큰둥해지고,  <어둠의 저편> 이후로 하루키의 소설에 하품을 하듯, <행복의 건축>을 거쳐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보통씨와 이별할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으로 그의 책을 거의 다 읽었지만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은 아니지만 재미도 감동도 없고 새로운 깨달음이나 지적 충격도 느껴지지 않는 책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슬럼프 없이 매년 4할을 넘기는 타자도 매력이 없긴 하지만, 보통씨와 이제 당분간 작별할 시간이 왔는보다. 점점 입맛만 까다로와지는 노인네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그의 신작 <일의 기쁨과 슬픔>은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배려가 곳곳에 배어 있다. 책머리에 정성스럽게 쓴 ‘한국의 독자들에게’ 말미에 적은 것처럼 집을 얻는 데 한국어판 인세가 큰 보탬이 된 것에 대한 보답처럼 느껴져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팬이 많기 많은가보다. 어쨌든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성격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번에 나온 그의 책은 열 개의 장의 구별된 ‘일’에 관한 에세이다. 발로 쓴 에세이는 관념적이거나 감상적인 산문과 구별된다. 정확한 관찰과 꼼꼼한 기록 그리고 현장을 따라가는 탐방 기사같은 글들이 읽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일상에 묻혀있다 보면 주변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쉽다. 현관 문 밖에 신문이 슬라이딩 하는 소리를 듣는 새벽처럼.

  현대인의 삶은 바쁘다. 쉬지 않고 일하고 남들보다 열심히 뛴다. 특히 한국인의 부지런함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쉬고 즐기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쉰다. ‘일’은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마치 종교와 같은 일의 숭고함을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화물선 관찰하기로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로 느껴지는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은 ‘일’에 인격을 부여한다. 물류센터를 돌아보고 비스킷 공장을 찾아가며 직업 상담가를 만나고 로켓과학의 눈부신 성과를 살펴본 후 화가를 따라가기도 하고 송전탑을 따라 무작정 걸으며 회계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창업자들의 고단함과 항공 산업의 놀라움을 관찰한다.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 에세이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도 조금 거리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감하지 못하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가. 24시간 동안 톱니바퀴처럼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흥미진진한 곳인가. 보통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은 보통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흡인력있는 문장으로 독자들을 매혹시킬만하다. 사색적인 태도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적절한 비유를 통해 차분하게 전달한다. 흥분하거나 강하게 밀어붙이는 일이 없고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감각적이고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책도 그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각과 조우할 수 있는 신선함으로 가득하다.

  ‘일’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은 독자 개개인이 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든지 저자가 말하는 열 개의 범주 너머에 존재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삶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해줄 것이고 현재의 삶을 보여주며 미래의 작은 희망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책표지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갈라지고 메마른 사막에 놓인 붉은 여행 가방처럼 낯설게 내가 하는 일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책이었다.


090927-09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0-02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6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졸업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가장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말이다. 우리들의 삶을 길에 비유하는 일이 많은데 한 사람의 길이 끝났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개인적인 일이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학교를 졸업했다는 뜻이기도 하며 직업을 바꿨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막다른 길은 없다. 모든 길은 이어지고 끊임없이 길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결국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한 사람 두 사람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진다는 노신의 말은 삶의 방법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남들이 가는 길만 걸어가는 것은 재미도 없고 즐겁지도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새로운 길만 만들어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많다. 우리는 걷고 또 걸으며 길에 대해 생각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삶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도 가족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형제나 친척을 선택할 수도 없다. 일본작가 시게마츠 기요시의 <졸업>은 우리의 삶에서 가족이 가지는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집이다. 네 편의 중편을 모아놓은 이 책은 가깝고도 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와 위안을 주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씻을 수 없는 가장 큰 상처와 고통을 주는 존재이기도 한 가족 이야기는 진한 눈물과 잔잔한 미소를 선사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졸업’은 한 인간의 성장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살한 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어나 14네 살이 된 아야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 와타나베를 찾아온다. 와타나베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친구 딸의 아버지 찾기에 동참한다. 새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별탈 없이 성장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호기심과 애틋함은 사춘기 소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실존적 고민이다. 결국 아버지가 자살한 시간과 장소에서 유년기를 졸업한다는 내용이다. 우리에게 졸업은 학교를 마치는 일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에서 어떤 시기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소설 ‘행진곡’은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기억을 더듬는다. 어린 시절 끊임없이 노래를 불러 문제아가 된 여동생과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고 ‘히키코모리’가 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잊혀진 유년의 기억과 가족 간의 관계를 깨닫는 과정은 부모가 자신에게 쏟았던 사랑만큼 자식에게 그 사랑을 물려주는 일과 다름없다. 물이 흐르듯 그렇게 사랑은 세대를 넘어 관계와 존재의 단단한 연결고리가 된다.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중학교 교사인 아들이 서술자이다. 아버지 세대가 아이들을 다뤘던 방식에 대한 잔잔한 술회, 죽음과 시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아이를 통해 아버지가 남긴 것은 무엇이고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는 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본다.

  마지막 단편 ‘추신’은 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은 소설가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병상에서 남긴 노트를 중심으로 새엄마와의 해묵은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 새 어머니의 아들인 동생을 통해 인정할 수 없는 어머니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늘에 계신 어머니만을 인정했던 시간들을 돌아본다. 상상속의 어머니를 실존인물처럼 잡지에 연재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생각한다. 이제 늙어버린 어머니의 잠든 모습을 보며 소설가가 된 어린 아들은 두 명의 어머니를 받아들이게 된다.

  네 편에 등장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마흔 살 먹은 남자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가족이라는 연결 고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생의 진부함을 확인한다. 우리의 삶은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때로는 안개 속을 헤매듯 방향을 알 수 없이 달려가다가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끝없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존재의 출발점과 종착역은 가족일지도 모른다.

  먼 여행을 하고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생의 순간순간을 ‘졸업’하며 우리는 그 의미를 되새기고 다음 생을 준비한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소설은 평온하고 잔잔한 음악처럼 낮은 목소리로 현대인의 삶에서 가족이 주는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네 편의 소설을 통해 나는 가족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090924-0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시간에 옛글읽기 문학시간에 읽기
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 / 나라말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문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선인들의 옛글조차 원문으로 읽을 능력이 없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제대로 된 번역본을 꼼꼼하게 고르는 수밖에. 옛글을 읽는 즐거움은 시간을 견뎌낸 책과의 대화로 시작된다. 대부분 조선시대로 한정되긴 하지만 당대를 살아냈던 선조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시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착각을 하게 된다. 마음으로 읽는 글은 지식과 교훈보다 깨달음과 지혜를 전해준다. 좋은 옛글을 읽는 것은 조상들의 지혜를 전수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펴낸 <문학시간에 옛글 읽기>는 고전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 엄선되어 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옛글을 읽히는 것은 더욱 어렵다. 따분하고 지루하다는 편견 때문에 잘 읽지 않게 된다. 그 편견의 원인은 교과서다. 국정교과서로 국어를 배우고 문학교과서는 검인정 도서로 18종이나 된다. 내년부터는 중학교 1학년부터 국어교과서도 23종 검인정 시대를 맞이했다. 각급 학교에서는 교과서 선정이 한창이다. 교육과정이 바뀌고 새 교과서가 나올 때마다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검증된 작품이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 중에 바탕글이 선정된다.

  국어시간에 문학작품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능력이 고루 갖춰져야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대학입시를 정점으로 모든 공교육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고등학교와 중학교, 초등학교는 이제 경쟁을 내면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운동부를 없애고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전학을 권유하고 초등학생에게 보충 수업을 시키는 당황스런 일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이제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모두 손을 놓고 불구경하듯 서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누구의 책임이고 어떻게 바꿀 것인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제대로 된 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인지 난감하다.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진리는 변함없이 시간을 뛰어넘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그리고 고전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사람부터 책을 읽어야 한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이들에게 방에 들어가 공부하라고 소리지르는 부모님, 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생님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건방진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가르치는 사람이 책을 보지 않는다면 무엇을 가르치는지 나는 궁금하기만 하다. 능력있는 분들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을 때가 많다.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는 사물과 현상을 통한 깨달음, 2장에는 어떤 일의 내력을 밝힌 글과 여행기, 3장은 편지글, 4장은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담은 글, 5장은 세상일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 6장은 삶과 세상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드러낸 글이 담겨있다.

나는 비로소 사람을 기르는 방도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먹을 것을 잘 먹여 기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잘 이끌어 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눈먼 암탉이 병아리들을 기르는 것을 보고 사람을 기르는 도를 깨달았다. - P. 275 할계전(瞎鷄傳)

  좋은 글들이 너무 많아 손꼽기도 어렵다. 짤막한 글들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읽기 좋은 책이다. 그 가운데 나는 할계전의 한 토막을 적어본다. 애꾸눈이 된 어미닭이 병아리를 기르는 방식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한계이지만 아이를 기르는 부모와 교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옥같은 옛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가슴 깊은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먼저 읽어보고 아이들이나 학생들에게 권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물론 옛글이라면 무조건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인을 위해서도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각 장 뒤에는 생각할 문제가 몇 가지 정리되어 있다. 사유의 깊이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닐 것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생각을 넓히고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다면 이 책은 더없이 좋은, 살아있는 문학 교과서가 될 것이다.


090915-0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년대의 십년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모두가 21세기 새시대를 구가하면서, 시대를 닮으려고 그 뒤를 좇아 달려가버렸을 때, 허무성은 자신이 해일이 쓸고 간 황량한 바닷가에 여기저기 뒹구는 잔해들 중의 하나처럼 느껴졌다. 잊혀진 시절이 남긴 초라한 잔해, 그것이 학생들의 눈에 비친 그의 존재방식이었다. 달라진 이 세상과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감정도 관념도 다른 사람이었다. - P. 91

  내가 보낸 이십대를 90년대를 작가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었다. 현기영의 소설 <누란>을 읽으면서 이 구절을 읽다가 한참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선배들을 따라 시위현장에서 발밑에 지랄탄을, 머리위에 페퍼포그 사과탄을 피해 골목길을 뛰어다니던 일은 이제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흑백 사진처럼 남아있다. 백골단에게 끌려가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닭장차에서 대가리를 처박고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허무성은 386세대의 막내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잊혀진 시절인 80년대를 기억하기 위해 허무성은 90년에도 황량한 바닷가의 잔해처럼 쓸쓸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존재방식은 21세기 대학생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판과 저항 문화를 잃어버린,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대학생들이 허무성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허무성을 바라보는 작가에게 오늘의 대학생은 어떻게 비춰질까. 그 시선은 우리들의 시선과 많이 다를까.

  문단의 거목이 되어버린 현기영의 <누란>은 작심한 듯 지나간 지난 시대를 직선적으로 들여다본다.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이 주는 나른함이 없다. 군데군데 마치 신인 작가의 치기어린 열정을 보는 것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구절들이 보인다. 십년 만에 작품이든 준비기간이 얼마가 됐든 소설 외적인 부분에 대한 사실들이 소설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작가는 현실은 과거와 다른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지 못하는 세대와 지난 시절을 철저하게 망각한 세대에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우리가 바꾸려했던 세상이 우리를 바꿔버렸다고.

  1999년 세기말의 불안을 넘어 2002년 월드컵 축제의 붉은 악마와 노무현의 당선으로 새로운 세기는 화려하게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축제가 그러하듯 들뜬 분위기와 미칠 듯 끓어오르던 열정은 한 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린다. 변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남은 건 없었다. IMF의 충격은 부동산 가격폭등과 개혁의지 실종으로 이어져 다시 정권이 바뀌고 그들은 잃어버린 10년을 뒤찾기 위해 교과서를 바꾸고 강바닥을 뒤집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의식 없는 국민에겐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있다. 파시즘의 재림을 꿈꾸는 권력이 무슨 짓을 하든 내 앞의 밥그릇과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쉽게 지켜지지 않는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노동하기 힘든 나라가 된다. 당신은 기업가인가 노동자인가? 기업가와 노동자의 비율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가 기업가인가 노동자인가? 서민인가 부유층인가? 이것은 이데올로기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저 우리 이웃들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작은 고민일 뿐이다.

  고문과 인권 유린을 처절하게 고발하는 소설로 읽지 말자. 국가권력의 거대한 음모와 변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읽지도 말자. 그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장 소박하고 인간적인 우리의 상식을 확인하는 소설로 읽는 것은 어떨까?

  소설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아주 오래된 명제를 떠 올릴 필요도 없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위태로운 현실을 거울로 비춰준다. 눈이 부셔 찡그리지만 그것이 곧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된다면 현기영의 소설은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소설의 제목은 계란을 쌓아올린 듯 위태로운 상황을 나타내는 ‘누란지세(累卵之勢)’와 중앙아시아에서 번성했던 모래사막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누란(樓蘭)’ 왕국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흔을 바라보는 작가의 입장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발표한 소설이다. <누란>은 단순히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지난 시대와 오늘의 우리들을 돌아보는 반성문이다.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합의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가치는 이념과 무관하다. 반목과 질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난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불빛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다.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다.

  ‘작가의 말’의 첫 문장이다. 이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실패와 절망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수많은 개인들의 실패는 그 개인 자신의 탓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것이고, 그 구조는 세계화가 만들어놓은 부분이 크다. 즉 개인의 실패, 개인의 불행은 일국의 문제를 넘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무력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는 말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판단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희망을 불빛을 던지고 막연한 기대를 갖게하는 완강한 현실의 벽과는 다른 불씨를 보여주려는 것이 현기영의 <누란>은 아닐까?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는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 P. 300


090906-0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긴 노래, 짧은 시
이시영 지음, 김정환 외 엮음 / 창비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이 부신 날에

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 나는 문득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그 옛날 우리가 새로 태어났던 날의 초록잎새처럼
아직은 푸르름이 채 가시지 않았을
당신의 맑은 얼굴을

  아득한 꿈을 꾸던 날들이 있었다. 벌써(?) 지난 시간을 돌아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세상은 온통 초록빛이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들이었다. 지나간 모든 시간은 아름다움으로 채색되기 마련이니 무엇이라 말해도, 모든 사람의 당신은 푸른 얼굴이고 물처럼 맑은 얼굴일 게다.

  이시영의 등단 40주년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는 지나온 시간에 대한 보고서처럼 읽힌다. 한 시인의 시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독자들이 살아온 시간들도 조용히 반추하게 한다.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감성은 내것처럼 잔잔하기만 하다. 긴 노래를 불렀지만 돌아보면 짧은 몇 편의 시만 남은 듯한 것이 삶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소중한 시간은 흘러가고 한 시대를 살았던 흔적은 조용히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시영은 자신의 시를 통해 한 세월을 정리하고 있는 듯하다. 네 명의 시인이 엮은 이 책은 웅숭깊은 생각의 편린들이다.

공사장 끝에

“지금 부셔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용산참사의 상흔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우리가 외면하는 동안 우리의 이웃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 100쇄를 넘겨 여전히 이 시대에도 읽히는 것은 과거의 시대상황을 읽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삶의 터전을 잃고 절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있을까?

  이 한편의 시에는 처절한 분노도 성난 목소리도 드러나지 않지만 철거민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공사장 끝에는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 것들이 잠들어 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법과 질서를 내세우는 권력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돌아볼 시간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오늘을 반성하게 한다.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이시영은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떨림이 깊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큰 울림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시가 존재하는 이유는 머리가 아닌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진한 감동을 자아내는 데 있다. 그의 바람은 성공한 듯 보인다.

  온몸으로 사랑하는 일은 시인의 시가 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삶이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가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여전히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간다. 이시영의 시를 통해 언어가 전해주는 깊은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 여전히 따뜻한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해야함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무에게

어느날 내게 바람 불어와
잎새들이 끄떡끄떡하는구나
내가 네 발밑에 오줌을 누고 돌아설 때
수많은 정다운 얼굴로 알은체를 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돌아서자
수많은 오늘 같은 내일의 날이 지난 뒤
내가 불현듯 참다운 네가 되어 돌아오마


  하루를 살고 한 평생을 지내면서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잎새들이 끄떡이는 모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참다운 삶에 대한 깨달음이며 정다운 얼굴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시인은 나무가 아닌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수많은 오늘같은 내일이 지난 뒤에도 거기 그렇게 서 있는 나무처럼 살아가자고.


090902-0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