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아프리카 - 대자연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우정의 서사시
조세프 케셀 지음, 유정애 옮김 / 서교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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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몇 마디 말로 설명하거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다. 사회적 지위, 재산, 명예를 얻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가족들과의 작은 행복, 사회의 변화, 예술적 성취, 타인에 대한 봉사,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도 항상 주위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힘겨워하기도 한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가치 사이에서 망설인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때때로 투명한 유리 큐브 안에 갇힌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돌아본다. 소통의 힘겨움과 언어의 한계 속에서 절망하기도 하고 현실과 이상의 거리만큼이나 허망한 생활들이 고통스럽기도 하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사람들은 좀체로 그것을 얻는 방법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방법으로 인생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똑같은 욕망과 경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모든 인간의 욕망은 동일한 것일까?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거리가 먼 곳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 Fernweh! 전혜린은 일 년에 몇 달 아니 몇 주쯤 일상에서 벗어나 집시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동경과 기대가 없고 두근거리지 않는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상황과 조건에 맞게 적응하게 되어 있다. 어떤 곳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미래의 불안한 신비가 찬란하다는 전혜린의 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만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는 말일 것이다.

  조금 더 시야를 넓혀보자.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너머에는 늘 대자연이 우리를 품고 있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내가 사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해본다. 다람쥐처럼 돌아가는 일상과 반복되는 생활들 -  그것이 전부다. 자연은 인간의 모든 희노애락애오욕을 품고 묵묵히 바라본다. 오만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면서.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을 품고 있는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산자락에서 한 소녀가 그들과 교감하고 있다. 조세프 케셀의 『소울 아프리카』는 대자연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우정의 서사시이다. 이 소설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특별함을 갖고 있다.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 묻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색다른 소설의 소재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깊은 감동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킬리만자로 자락에 위치한 ‘암보셀리 국립공원’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공원에서 살고 있는 소녀 파트리샤의 이야기다. 우연히 여행 중에 공원에 머물게 된 서술자의 눈에 비친 소녀는 동물들을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영혼의 교감을 나눈다. 마사이족 등 원주민들과 소녀 그리고 다시 문명세계로 소녀를 보내고 싶어하는 엄마가 등장한다. 초원의 왕이 된 사자를 매일 만나는 소녀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는 문명 사회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른 고민과 갈등이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단순히 자연을 배경으로 한 감동 휴먼 드라마가 아니라 잃어버린 인간들의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1950년대의 생생한 자연 풍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벌써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신비스러운 자연의 모습과 화자의 독특한 목소리가 잔잔한 울림을 전해주기 때문에 독특한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휴가나 여행의 장소로 떠올리는 자연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호흡하는 자연일 수는 없을까. 단 한 번도 땅을 밟지 못하고 매일매일 생활하는 나의 하루를 떠올렸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이제 인조 잔디와 우레탄 트랙이 깔렸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운동장만큼 흙냄새는 사라졌다.

  지속가능한 인간의 삶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대책 없이 이대로 살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소설이 주는 아름다움과 무관한 현실적인 고민이다. 여유있는 삶, 조화로운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 사회의 희망은 아닐까?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한 감동적인 소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보고서로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09112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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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본 다이어리 2015
새시 로이드 지음, 고정아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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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순간도 숨을 쉬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무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른다.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면서도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어렵다. 그것은 끝없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물과 공기, 비와 바람, 태양과 대지, 바다와 나무 등 자연 앞에 겸손할 줄 모르는 인간은 언제까지 그 오만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채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제까지나 지구가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들은 매일매일 자연을 오염시킨다. 이반 일리히는 이미 오래 전에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고 설파했고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은 <조화로운 삶>을 실천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들이 말하는 생활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인간의 삶을 보다 편리하게 바꿔 놓았지만 그만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997년 12월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기후변화협약에서 채택된 지구 온난화 규제 및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인 ‘교토의정서’는 구체적으로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규정했다. 지구 오존층에 대한 경고와 위협은 끊임없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지만 우리는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해 버린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문학적 상상력은 때때로 우리의 삶을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미래를 보여준다. 공상 과학 소설의 전통을 잇고 있는 듯하고 환경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환경 소설이기도 한 새시 로이드의 <카본 다이어리 2015>는 부정하고 싶은 우리의 미래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로라 브라운이라는 열여섯 살 여학생이 2015년 한 해 동안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기형식의 소설이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을 기록한 10대 소녀의 일기는 ‘안네의 일기’만큼 사실적이다.

  영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탄소 사용 규제 프로그램은 끔찍한 지구의 대재앙을 예고한다. 1인당 탄소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영국은 원시 사회로 돌아간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자동차, TV, MP3 사용도 철저하게 개인 탄소 카드를 통해 규제를 받는다. 마치 공산주의 사회를 연상시키는 하루하루가 실제 상황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게 아니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을 적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현실감은 배가된다.

  폭풍과 해일까지 겹쳐 홍수가 발생하며 런던 전역이 물에 잠기고 콜레가 발생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소설의 말미를 장식한다. 관광학과 교수로 일하는 주인공의 아버지는 예상대로 금방 실직한다.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의 일상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의 친구들과 학교 록밴드는 이 소설에서의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를 통해 각각의 삶에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고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사소하지만 위대한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는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록 밴드 음악을 통해 사회 비판 의식을 담아내지만 탄소 배급제를 지겨워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평범한 10대 소녀의 의식을 반영한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환경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일상생활에서 조금씩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천의 괴로움 앞에서는 금방 나약해진다. 그것을 개인들이 혹은 국가와 세계적 차원에서 감당해내지 못한다면 이 소설은 먼 미래에 벌어질 수도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끔찍하지만 이런 상상은 바로 지금 우리들의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암울한 미래 전망의 디스토피아 소설로 치부하기에는 우리들의 현실이 심각하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2015년에 정점에 이른다는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의 2007년 보고서는 지구의 온도 상승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다. 중요한 것은 ‘희망’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피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 소설을 무겁게 쓰지 않았다. 청소년 소설답게 개성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10대 특유의 ‘짜증’과 일상들이 뒤섞여 발랄하면서도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아니라 주인공의 사랑과 질투, 실연 등을 일기의 한 축으로 삼고 짜증나는 가족들을 한 축으로 삼아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 소설은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는 청소년 소설로만 볼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불편한 진실’을 통해 환경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상생활에서 생각 없이 낭비하는 물과 전기, 게으른 몸을 위한 자동차와 냉난방 설비 등 다시 한 번 돌아볼 것들이 너무 많다. 너무 편리하고 게으르기만 나는 내일부터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09111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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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재구성 - 제28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작 창비시선 306
안현미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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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해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엄숙함과 경건함을 느낀다. 세상을 얼마나 살아왔느냐에 따라 시간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시간 앞에서 겸손함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나이를 조금 먹었다는 증거일까. 시를 읽으면서도 지나온 세월 살아갈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하루, 한달 혹은 일년이라는 시간은 짧고도 멀기만 하다. 분절되지 않는 시간을 인간들을 인위적으로 구분해 놓고 계획하고 측정한다. 사람이 산다는 일이 마치 시간에 배를 띄워 물 흐르듯 그렇게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안현미의 <이별의 재구성>은 모든 것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유리벽처럼 차고 단단한 의식 속에 고정되어 있는 듯하다.

  사물과 사건에 대한 시선과 인식 태도가 개성적이다. 지극히 주관적 정서에 매몰되기 쉬운 시와 독자들이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를 열어 두어야 하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독자의 바람일 수 있겠지만 불가해한 언어의 세계 속에 침잠하거나 안개같은 모호함만으로 견고한 집을 짓는 시인의 시가 이제는 더 이상 읽히지 않는다.

  안현미의 시는 그 중간을 서성인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것들에서 시작해서 추상적인 개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나는 안현미의 시를 읽으면서 가볍고 상쾌한 우울함을 느꼈다. 무색무취의 물맛 같기도 하고 담백한 가을 단풍의 냄새가 나기도 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안개를 찍으러

양수리로 갔다
사냥을 준비하는 어둠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밤새, 몸을 숨기고
무한대로의 거리조절을 마친 조리개
새벽은 포그필터처럼 밝아오고
오염된 강물로 그물을 던지는 사람들
그물 가득 안개를 낚고 있다
       f:8s:1/15
       찰칵찰칵
안개를 포획하는 카메라
단 한 컷의 사진을 위해
수없이 소비되는 필름처럼
       착각착각
자본의 욕망을 위해
수없이 소비되는 나를 본다


  기형도의 ‘안개’를 떠올렸고,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생각났다. 자연이 주는 관습적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어렵다. 안개가 가진 기본적인 속성과 양수리의 두물머리 풍경이 겹쳐진다. 카메라의 셔터소리를 ‘찰칵’이 아니라 ‘착각’으로 들을 수 있는 자본의 욕망! 수없이 소비되는 자신을 보아야 현실은 견고한 시멘트 벽이다. 그래도 어깨로 밀어보고 손으로 눌러보고 두발을 굳게 딛고 버티지 않는다면 사방은 깜깜한 절벽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보이지 않는 것을 찍으려는 헛된 카메라의 욕망에서 시인은 자신의 욕망을 확인한다. 생경하고 엉뚱한 것들이 조합되지만 의식의 흐름은 굳이 논리를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안개와 카메라와 자본의 욕망은 그렇게 한 편의 시 안에서 소비된다.

모계

당신이 내 절망의 이유이던 때가 있었다
당신이 내 희망의 전부이던 때가 있었다
그 이전 이전엔 당신이 내 아무것도 아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 이전에도 당신은 당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이후에도 당신은 당신일 것이다

시시해서 미치겠는 사랑!

멀리에선 수련꽃 피는 여름이 오고
덩굴식물의 눈[目]을 들여다본다
네 눈이 네 길을 가게 한다

소문도 없이 낳아 기른
아이가 묻는다
“내가 왜 엄마를 아빠라고 불렀지?”

  태아의 잠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본능. 죽음의 그림자를 확인하는 과정이 삶의 희망인 이유. 사랑과 절망 사이에는 늘 위태로운 사랑이 놓여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저 당신은 당신일 것이다. 나는 나일 것이고.

  결국 모든 사람은 각자의 눈으로 각자의 길을 가게 한다. 그것을 우리는 숙명이라 부른다. 조금 느린 호흡과 편안한 마음으로 찰나를 생각해보자. 순간, 문득, 그 혹은 그녀가 떠오르거나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그려진다.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확인하는 것은 결국 당신과 나를 확인하는 일이다. 네 길이 아닌 내 길을 걸어야겠다는 시시한 사랑법!


0911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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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빈자리 낮은산 키큰나무 8
사라 윅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낮은산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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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춘기 이전의 삶은 아득한 강 건너편에 있는 듯하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시작되는 시기를 사춘기라고 한다면 세상과 타인에 대한 호기심만으로 가득한 시기를 유년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유년시절은 나와 가족 그리고 세계와 끊임없이 충돌하지만 해법을 찾기 어렵고 어른들의 설명을 이해할 수도 없는 시기이다. 아니 이해는 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시기라고 해야겠다. 대체로 초등학교 시절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초등학교(‘국민학교’를 다닌 세대라서 ‘초등학교’라는 말이 아직도 낯설다) 시절은 온통 또래 친구들과 놀이로만 가득하다. 딱지와 구슬치기를 거쳐 본격적인 구기 종목에 흥미를 갖게된다. 어머니가 처음 사 준 야구 글러브를 끌어안고 잠이 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딱딱한 가죽 축구화를 축구공 하나를 그물에 넣어 발로 차며 등하교를 했다. 운동장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매일 공을 찼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많은 변화가 찾아왔지만 내 기억 속의 유년시절은 공이다.

  지금 초등학교 아이들과는 많이 다른 생활이다. 겉으로 드러난 흥미와 놀이를 중심으로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트라우마가 될 만한 가족사나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뜻도 포함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하고 싶지 않은 상처와 기억이 없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망각’의 힘으로 견뎌내기도 한다. 그것을 우리는 ‘기억의 빈자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뉴욕에서 두 아들을 키우며 전국의 학교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스스로 만든 노래를 부르며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라 윅스의 『기억의 빈자리』는 모든 사람들의 유년시절을 돌아보게 한다. 가난, 아버지의 가출, 성폭행 등 흔치 않은 상처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왕따 초등학생이 주인공이다.

  제이미는 학교에서 제임스라고 부른다. 이름조차 제대로 모를 만큼 관심밖의 학생이다. 선생님에게 골치 아픈 학생이고 친구들에게는 놀림감이 되는 아이다. 아버지의 가출, 이모의 사고 때문에 제이미는 배틀 크릭으로 이사를 한다. 원더러스 에이커의 트레일러 집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이모와 산다. 이모는 사고 이전의 기억만 갖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질문과 대답을 가족들은 잘 견뎌낸다. 오늘 일을 잃어 버리고 내일은 또 다시 사고직 후 깨어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이미는 이모의 ‘망각’이 부럽기만 하다.

  공동 세탁소에서 우연히 무료로 최면을 걸어준다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지만 같은 반 친구 오드리 크라우치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한다. 결국 최면에 걸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하게 된다. 매일 점심은 샌드위치와 체리 캔이다. 혼자서 점심을 먹고 책을 좋아하는 제이미에게 오드리의 관심은 불편할 뿐이다.

  소설의 스토리와 구조는 탄탄하지 못하고 사건과 갈등도 밋밋하다. 앞서 말한대로 가족에 대한 상처, 가난, 성폭행까지 경험하지만 긴장감이나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의 눈으로 유쾌하게 때로는 냉소적으로 친구들과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본다. 짧고 경쾌한 문장으로 쉽게 읽히지만 어린 소년에게 공감의 눈길을 보낼 수 있을 뿐, 잔잔한 감동이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일종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작위적이다. 현실에서도 모든 사람은 성장통을 겪는다. 그것이 어떤 계기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나 목적이 전혀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망각’의 힘을 빌린다. ‘기억의 빈자리’는 연속적인 흐름 속의 구멍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적절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고통을 겪지 않고 행복과 웃음만 가득한 낙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함께 웃고 울고 성장하고 치유하는 과정의 연속일 수도 있다. 누구나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렇게만 살 수는 없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또 다른 ‘기억의 빈자리’를 꿈꾸는 아이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린 아이가 아닌 어른들에게도 ‘기억의 빈자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절감한다. 다만 어디까지 어떤 모습으로 흔들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도종환 시인의 말대로 “흔들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09110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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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시에산다 2009-11-09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책이 너무 진지하지 않게 사건을 해결해가서 좋았어요~ 아직 어린 학생이 너무나 무겁게 그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는 것보다 그것을 잊고 싶어서 그래서 가벼운척 아무것도 아닌척 덤덤하게 말하고 있는게 더 아프더라고요~닮은꼴책으로는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가 생각났어요

sceptic 2009-11-29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무거운 주제는 가볍게 가야 하는데 아이의 입장에서 경쾌하게 풀어내서 더 찡하게 다가왔습니다...
 
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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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자치구 티베트는 가 본 적도 없는 머나먼 나라다. 작년 봄 분리독립 문제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독립운동 시위대에 발포해서 1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떠올렸었다.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의 삶은 여전히 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은 수많은 종족의 집합체다. 짱족[藏族]이 94%를 차지하지만 티베트 자치구에는 39개 민족이 살고 있다.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이 혼합된 중국을 이해하는 것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아라이의 연작소설 『소년은 자란다』를 통해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아라이는 티베트 출신의 작가다. 『색에 물들다』를 통해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올랐지만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은 아라이의 최근작으로 고향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순박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소년시절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어 읽는 내내 색다른 감동을 받았다.

  소설은 한 사회와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문화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이 소설은 티베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대부분 주류 문화를 바라보며 동경하고 의식한다. 하지만 문화상대주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문화는 나름의 독특한 향기와 빛깔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의 향기과 빛깔은 무엇일까?

  아라이의 단편들은 이웃 집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너가며 소개하는 듯하다. 5만명에 달한다는 티베트의 승려 이야기부터 절름발이에 이르기까지 소박하고 정겨운 이웃들의 모습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모습으로 소설 속에서 되살아난다. 아라이는 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유년과 고향의 모습을 적확하게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물질문명과 거리를 둔 사람들의 생활은 단순한 낭만과 거리가 멀다.

  라마불교의 사원이 무너지고 승려들이 흩어진다는 것은 사회의 변화가 아니라 전통의 붕괴이며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활불과 박사친구’, ‘라마승 단바’는 티베트를 상징하는 전통 라마불교의 승려 이야기다. 정신적 지주이자 영적 세계의 지도자인 라마승에 대한 이야기는 티베트인들은 물론 외부인에게도 관심의 대상이다. 그들이 우리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를 보여주며 현실과의 괴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표제작 ‘소년은 자란다’는 독특한 화법으로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소년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티베트의 자연과 고단한 삶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곰과 싸워 이기고 혼자 여동생을 낳는 어머니와 다시 만나는 장면은 깊은 감동을 준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언제든 어머니같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문명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엉뚱하게도 환경과 생태에 대한 공상을 하게 되었다. 아라이가 보여주는 소설의 배경은 그만큼 원초적인 모습이다. 독특한 문화적 환경과 생활이 자극적인 흥미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호수에 일렁이는 작은 바람의 무늬처럼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라이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새겨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또박또박 읽으면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늘상 익숙한 세계의 이야기를 듣거나 잘 알고 있는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낯선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가? 그들 모두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지만 내 생각의 폭도 사유의 깊이도 부끄러울 따름이다. 옷깃을 여미고 외면하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고 타자의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아라이는 이 소설을 통해 고향과 순수한 소년시절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관찰과 기록자의 역할에 충실했는지 모른다.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아라이의 소설을 다른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소설가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소설에서 없애버리거나, 사람의 생명과 행복을 말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관념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소설가에게는 사람이 출발점이자 목적지인 것입니다.
  소설가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실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합니다. 소설가는 표면적인 사실이 아니라 인간생활의 근본에서부터 진실을 파악하고자 하지요. - ‘한국의 독자들에게’ 중에서


09110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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