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어두운 저편 창비시선 308
남진우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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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내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함은
입속에 작은 촛불 하나 켜는 것과 같으니
입속에 녹아내리는 양초의 뜨거움을 견디며
그대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속삭여도
불은 이윽고 꺼져가고
흘러내린 양초에 굳은 혀를 깨물며
나는 쓸쓸히 돌아선다

어두운 밤 그대 방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일 뿐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의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흔히 촛불을 켠다.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거울어 비추어볼 때도 촛불을 켠다. 사람들은 흔들리는 촛불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이다. 내 속삭임을 대신해 파닥이는 촛불을 들여다보고 싶은 시간이다.

  남진우의 『사랑의 어두운 저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다. 수없이 말해왔지만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는 것같은 그 ‘사랑’에 대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몰입과 거리두기는 서로 모순된 듯 싶지만 팽팽한 긴장의 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지속적인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서편 하늘을 물들인 저녁 하늘은 생의 이면을 반추케한다.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단한 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야하는 나그네처럼 사람들에게 시는 한 모금의 약수처럼 생기와 탄력을 불어 넣는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현란한 영상을 잠시 차단한 채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이 바로 시를 만나는 시간일 게다.



누런 먼지 날리는
사막 입구에서 문득
뒤돌아보며 너는 물었다
얼마만큼 걷고 걸으면 출구가 나올까

전갈 한 마리 소리없이 네 발뒤꿈치에 다가와
가만히 물고 지나갔다

사막 입구 쓰러진 네 몸 위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멀리 출구에서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
네 귀에 뭐라고 속삭이고 지나갔다


  출구없는 생. 입구는 더더욱 찾을 수 없을만큼 걸어왔다. 문득 고개 들어 주위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외로움 너머에 고독의 진저리. 둥근 달이 너에게 뭐라고 속삭였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한줄기 바람처럼 고즈넉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한 생은 찰나였음을 짐작하겠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2막 3장 Tableau Ⅲ. 액자속의 그림처럼 정지 화면들이 스치는 시간도 금방 올 것만 같다.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메모를 들여다 보는 시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며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너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한 번도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는 자기 부정이 지독한 역설로 들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먼 곳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고 그대 가까이! 손 닿을 수 없는 너의 몸을 향한 열망과 안타까움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생은 그렇게 아쉬움과 한숨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사라진 너를 찾아 몸을 돌리지 않겠다.

그대에게 가까이

너의 몸은
내 손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렇게 미소짓고 있는 너를
나는 만질 수도 껴안을 수도 없다

점점 푸르러지는 달빛 한가운데
너는 서서 내게 말한다 나는 추워…… 너무 추운 곳에 있어
바람 한점 없는 고요 속에서
너의 옷자락은 쉴새없이 펄럭이고
한 걸음 너를 향해 옆으로 돌린 채
너는 더욱 아득한 거리로 멀어져갈 뿐
서리처럼 네 몸에 차갑게 입혀진 달빛을
나는 걷어낼 수가 없다

나는 추워…… 너무 추운 곳에 있어,라고 속삭이는
네 입가에 가느다란 피가 흐르고
약속처럼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무성한 달빛을 헤치고 나는 마침내
네 곁에 다가선다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감싸고
두 팔을 벌려 너를 가슴에 가둔다
내 팔에 감겨들었다가
달빛과 함께 부서져 손가락 사이로
덧없이 흘러내리는 네 얼굴 네 가슴

지상에서 가장 추운 곳
너무 추워 하얀 입김조차 얼어붙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나란히 쓰러져 눕는다
점점 푸르러지는 달빛 저편
물무늬로 아른대는 너의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사라진 너를 찾아 몸을 돌린다



091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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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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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 오래두고 사귄 벗. 영화 <친구>에서 준석과 동수처럼 적이 될 수도 있는 사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친구는 추억의 섬에서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기억의 창고 같은 존재다.  이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림자처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친구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보다 시간을 견디고 오래 곁에 있는 벗에게 말할 수 없는 신뢰를 갖는다. 허물없는 친구 두엇만 있으면 그렇게 사람이 그립지 않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깊이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관계가 바로 친구다.

  그러나 가끔은 친구와 싸우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친구는 더욱 그렇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도 달라지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지면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자주 만날 수 있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친구라야 오래오래 우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혹자는 동성에 대한 사랑이 우정이라고 말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정은 사랑보다 넓고도 깊은 감정이다. 하지만 사소한 감정의 대립, 시기와 질투로 친구 관계도 깨질 수 있다. 그래서 그 모든 상처들을 견뎌내고 오래 사귄 벗을 친구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2008년 청소년 소설 분야에서 돌풍을 몰고 온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 새 소설 『우아한 거짓말』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았다. 가볍고 즐거운 시트콤 같은 『완득이』의 성공 요인은 경쾌함이었다. 이상적인 담임 ‘동주’의 인간적인 면과 복합적 사회 문제의 결정체 ‘완득이’의 만남은 웃음과 감동의 비빔밥이었다.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 갖추어야 하는 요소를 적절하게 갖춘 소설이라는 말이다. 그에 비해 『우아한 거짓말』은 조금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왕따 문제를 다룬 소설들은 아주 많다. 이 소설도 왕따라는 소재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먼저 한 부모 가정의 자매 중 동생이 자살하고 그 자살의 원일을 찾아가는 과정은 새로울 것이 없는 방법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소설의 미덕은 아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사례 중심의 소설은 감동도 크지 않고 사회적 의제도 던지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대체로 화목한 가족이기 때문에 언니의 무관심이 자살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자살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오면서 친해진 화연이다. 집단적이고 직접적인 따돌림이 아니라 화연의 은근한 놀림과 주변 아이들의 동조와 방관. 어느 또래 집단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쉽게 넘어갈 수는 없지만 성적도 우수하고 자기 생각도 분명하지만 ‘착한’ 아이가 자살할 정도로 심각했다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하고 작은 일로도 사람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천지는 언니 만지와의 관계나 화연, 미라와의 관계만으로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살을 하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넓은 의미에서 이 소설은 성장 소설보다 심리소설로 볼 수도 있다. 전학 후에 절친한 친구에게 당한 모멸감의 누적과 심리적 고통, 우울증으로 인한 불안 등이 자살의 원인이었다면 학교 폭력이나 왕따 문제를 다룬 청소년 소설이 아니라 청소년기의 심리적 갈등과 그 원인을 탐구하는 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작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독자들은 마음이 불편하다. 주인공 천지의 심리가 직접 서술되고 엄마와 언지 만지, 옆집 아저씨 오대오(별명), 화연과 그의 부모, 미라와 미란 자매 그리고 아버지 곽만호와의 관계가 그물처럼 얽혀있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철저하게 천지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모든 것이 천지의 자살 원인을 밝히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소설 첫머리에서 죽음을 던져 놓은 작가의 모험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수렴적인 방식으로 모든 인물들의 심리와 사건들이 하나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 앞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누가 죽었는지 어떻게, 왜 죽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천지의 언니 만지는 화연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민다. 천지의 죽음을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것보다 어쩌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와 앞으로의 삶에 무게를 둔 것 같기도 하다. 그 의도야 무엇이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에서 생긴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을 보듬고 시간에 맡겨 모른 척 가슴에 묻어두기도 하는 것이 생의 진실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그저 우리 아이들의 미래의 희망이라는 판에 박힌 찬사만 늘어 놓는다. 왜 그들이 우리의 미래인지 그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같지는 않다. 내 아이의 미래만 중요한 부모와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반성해 보자. 한 아이의 자살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은 작가는 결국 ‘우아한 거짓말’이 아니라 소박한 진실을 들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은 바로 우리 아이들의 현재와 우리 교육의 미래를 성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읽혔다. 가족의 울타리 너머 조금만 더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아이를 바라보던 눈을 들어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자. 그러면 내 아이의 진실이 보일지도 모른다.


0912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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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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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 류시화의 「구월의 이틀」중에서


  나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내 인생의 이틀은 지났을까?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일까? 사람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배경을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온전하게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인생을 산다고 볼 수 없다. 운명론적 세계관을 가진 건 아니지만 어쩌지 못하는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생은 ‘선택’이 뿐이라는 오만함을 가진 사람은 행복할까? 인간은 운명을 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행복할까? 환경과 유전의 관계를 놓고 벌이는 지루한 논쟁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들 인생에 대한 모호함 때문이다. 과연 어디서 어디까지 노력과 선택으로 변화 가능한 것인 인생일까? 또 찰나에 불과한 인생에서 ‘구월의 이틀’은 언제였을까? 언제 찾아올 것인가?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책 없는 질문이 떠오르게 한다. 어떤 부모를 만나 어떤 지역에서 자랐는가에 따라 인간의 의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 의식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고 또한 그 변화를 촉발한 사건이나 사람 혹은 계기를 고민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대한민국처럼 좁은 땅에서도 남과 북으로 갈리고 동과 서로 나뉜다. 지역적으로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우열이 있다.

  이 소설은 두 세계의 분열과 통합 과정을 꼼꼼하게 고찰하고 있다. 정과 반 그리고 합으로 변화해가는 세계의 변증법적 결합 방식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인공 금과 은은 정이며 반이고 합이며 그 합은 또다시 정이 되고 반이 되며 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성장한 환경과 사회적 배경은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다. 광주의 시민운동가 출신 청와대 보좌관 아들 금. 부산의 실패한 사업가 아들 은.

  소설은 각자 다른 사정 때문에 광주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는 두 집안을 연결시킨다. 고속도로 휴게소 커피 자판기 앞에서 처음 마주치는 금과 은. 질긴 운명처럼 혹은 계속되는 우연으로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교양 과목 시간에 처음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대학생활은 동아리 선택 문제, 여자 문제, 진로 문제로 고민한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이 된 시민 운동가 출신, 금의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어머니 봉양을 대가로 큰 형 집에서 외제차를 굴리며 생활하던 아버지는 가정부와 바람이 났다가 가족을 본 후 쓰러진다. 아버지 세대의 몰락은 지위와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다음 세대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 은의 작은 아버지는 뉴라이트 교수다. 올드 라이트를 소개받은 은은 새로운 대학생 우파 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금과 은은 우정을 넘어 사랑을 나눈다. 늙은 올드라이트 퇴직 교수와 몸을 섞는 은의 모습은 동성애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넘어 실제 모델을 떠오르게 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할 뿐, 일평생이 인생은 아니다.’ - P. 133

  소설의 제목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의미한다. 삶의 어느 한 때를 가리켜 인생이라고 한다면 나의 인생은 언제였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념에 빠진다. 내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의식을 결정했던 이틀은 언제였을까? 소설의 주인공 금과 은은 도대체 어느 순간, 어느 이틀을 만나게 된 것일까. 소설을 읽어나가다가 그 순간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끄덕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다가올 순간을 준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연한 만남, 현실의 필연적 관계를 넘어 한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이념적 지향이나 인식의 틀을 형성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지독한 현실에 대한 반어와 풍자로 읽히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숨과 냉소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후기’에서 장정일은

그런 뜻에서 내가 가장 공들였던 인물인 은에게는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해도 좋다. 어떤 면에서는 야비하기도 하고 이중인격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은에게는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이 있다. - P. 336

라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을 나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보수, 진정한 우파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올드라이트나 뉴라이트가 아닌 새로운 기대화 희망을 걸어볼 만한 인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적 좌파만큼 어려운 이상적 우파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이분법적 시각으로 사회를 보는 것은 위험하다. 두 주인공을 통해 이 소설은 두 개의 대척점에 놓인 사람들을 그려놓고 있다. 금의 아버지나 거북 선생은 이제 금과 은으로 화하여 어떤 미래를 보여줄 것 같기는 하지만 궁금하지는 않다. 작가의 의도처럼 금과 은이 하나로 통합되거나 새로운 자각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는 모델은 상상하기 어렵다. 허생의 ‘섬’이나 홍길동의 ‘율도국’ 만큼이나 부질없다.

  10년 만에 나온 장정일의 소설에서 읽어낸 것은 금과 은이 함께 들은 문학 강의 첫 시간(아마도 작가의 강의 경험 그대로일 것인 그것)이 주는 울림이 전부다. 본문에 나와있듯 ‘좋은 책이란, 나한테 절실한 책’이다. 깊은 성찰의 결과이거나 뚜렷한 지향점이 보이지 않아 내겐 혼란스럽게 좌충우돌하는 치기 어린 19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에게도 작가에게도 기대와 희망을 꿈꾸지는 않는다.


09120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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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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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유동이 바로 모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절대로 한곳에 머물지 않는…… 물 속에서도 공기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래서, 살아 있는 생물은 보통 모래 속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 P. 32

  자연은 영원히 예술의 고향이다.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감정으로 자연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연이 주는 경건함을 표현하는 예술은 어쩌면 수없이 반복되는 과거일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대상에 대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편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특별한 혜안을 갖고 있지 않다면 산도 바다, 하늘과 강, 나무와 꽃도 피상적인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인식된다.

  모래의 생명이 유동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유목적 특성을 가진 모래는 언제나 자유롭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위대한 문학은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각성을 준다. 그런 면에서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사춘기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까뮈의 『이방인』만큼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번역서가 가지고 있는 한계, 문장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만큼 단숨에 책장이 넘어갔다. 이 책을 소개해 준 겨울님께 감사한다.(세상에 얼마나 많은 좋은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안타까운 일인데 책을 권해주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바닷가 사구의 한 마을로 곤충채집을 하러갔던 한 사내. 그는 모래 속에 사는 여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사내의 실종. 도대체 그는 모래로 된 굴 속 같은 집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낼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모래로 뒤덮여 있는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서른 남짓의 여인. 하룻밤을 신세 지게 된 남자가 다음 날 그녀는 전라의 몸으로 얼굴에 수건을 덮고 잠들어 있다. 기이한 광경일 수밖에 없다. 남자도 곧 익숙해지고 그 이유도 알게 된다. 살기 위해 모래를 퍼올리고 또 그렇게 생존하는 일상을 터득하게 되는 주인공.

  하지만 주인공은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고 실제로 마을 밖으로 탈출할 뻔 한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있다면 인생에서 발버둥쳐 봐야 소용없는 노릇이다. 숙명은 믿지 않지만 자신의 한계와 상황은 믿는다. 인연도 우연일 뿐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되기도 하며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모래가 가장 자유롭게 떠돌고 싶은 영혼을 가둘 수 있다는 아이러니! 이 소설의 기이함은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아니라 모래의 속성같은 인간들의 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래  암석 파편의 집합체. 때로 자철광, 주석, 그리고 간혹 사금을 포함하고 있다. 직경 1/16~2mm.

  본문에 적혀있는 가장 객관적이고 사전적인 모래의 정의가 오히려 생경하다. 작가는 이 모래의 힘과 흐름을 모래의 기본적인 속성과 정직함을 따라간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사막이 끈적하게 피부에 달라붙는 땀방울과 한여름의 뜨거운 모래와 쉴새 없이 그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서걱이며 씹히는 모래알갱이의 참을 수 없는 이물감처럼 낯설고 공포스런 주인공의 변신이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보다 우울해 보였다.

  이 소설의 매력은 모래와 여자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벗어난 교사인 남자의 관계에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모래를 받아들이고 모래에 순응하며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여자, 타의에 의해 여자와 동거하게 된 남자의 몸부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서 두 사람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모래는 여자에게 생활이며 고통이고 숙명이자 삶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구속이며 죽음이고 욕망이자 소멸이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든 나는 맨 처음 까뮈가 떠올랐다. 앞서 말한 대로 『이방인』, 『시찌프스의 신화』의 강렬함이 생각났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책 뒤표지를 보고 웃고 말았다. 그런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듯. 영화로 만들었다는데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뒤적거려보거나 찾아봐야겠다.

어쩌면,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힘의 절대적인 표현이 아닐까……. - P. 36

  절대적인 힘은 어떤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통찰력 있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 것은 최근의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지켜내는 힘과 의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치에 대한 판단 기준이 아니라 행동과 신념에 대한 기준은 스스로 지켜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내게 그런 역량까지 주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모래 구덩이에서 세상에서 가졌던 직업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장면이 나온다. 교사였던 주인공이 선생들에 대해 평가해 놓은 장면이다. 매우 인상깊다. 그리고 적확하다.

실제로 선생들만큼 질투의 화신에게 매달리는 존재도 드물다……. 학생들은 해마다 강물처럼 자기들을 타고 흘러가는데, 선생들만 그 흐름의 밑바닥 깊이 박혀 있는 돌멩이처럼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를 쓰레기 같은 존재라 여기고 고독한 자학 취미에 빠지든지 아니면 타인의 일탈을 고발하는, 의심 많은 도덕군자가 된다. 자유로운 행동을 공경하는 나머지 자유로운 행동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 P. 78

  스스로 꿈꾸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한 군데 뿌리박힌 돌멩이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럴 바엔 차라리 직업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선생이란 직업이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선생이 모래의 남자가 되어 원초적인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말과 행동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구경하는 즐거움은 다분히 가학적이다.


091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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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12-0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는 그의 작품이 너무 궁굼해졌었는데요. 유감스럽게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더군요.<타인의 얼굴>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sceptic 2009-12-08 20:07   좋아요 0 | URL
권해주신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안녕, 엘레나 - 2010년 제4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김인숙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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痛入骨髓.

  고통이 뼈에 스민다는 한 마디가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김인숙의 소설집 『안녕, 엘레나』에 수록된 단편 ‘조동옥, 파비안느’를 읽다가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과 유사한 기분을 느꼈다. 이 단편은 엉뚱하게도 고려시대 수령옹주가 공녀로 바쳐지면서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사랑과 고통은 투명한 기름종이처럼 서로 스미고 겹친다. 한 몸으로 뒤엉켜 지독한 사랑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낳는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별을 걱정하듯이.

  브라질로 이민 간 어머니 조동옥 아니 파비안느는 주인공의 딸을 데려가 키우다 멀리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동생이면서 딸인 아이는 포르투갈어로 주인공에게 긴 편지를 보낸다. 16년의 세월을 그 편지와 함께 묻는 것이 통입골수.

  모든 사랑의 밑바탕에는 두근거림과 떨림보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 이상의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벅찬 감동을 전해주는 파도소리이다. 한없이 밀려왔다가 사라지고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지지만 어느새 또 다시 발을 적시는 바닷물과 같다.

  아마 모든 소설은 젖은 발로 모래사장을 걸으며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모래 알갱이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털어버리기엔 그 불편한 감각들이 살아있는 듯하고 그냥 걷기에는 발다닥이 따끔거린다. 현실에서 부딪칠 것 같은 이야기들이 소설이 되기도 하고 소설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비현실적인 일들을 통해 상상력이 고갈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수많은 엘레나가 있다. 수많은 철수와 영희가 있는 것처럼. 표제작이 된 ‘안녕, 엘레나’는 원양어선을 탄 이름모를 아버지의 엘레나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세상의 모든 엘레나를 사진으로 보내오는 친구를 통해 존재의 근원을 묻고 있는 이야기다. 김인숙의 소설은 시간 앞에 초라해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엇갈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의 불가해함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지 모른다.

  가족으로 만난 인간 관계는 천형이다. ‘숨-악몽’, ‘어느 찬란한 오후’, ‘조동옥, 파비안느’는 모두 가족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괴기 영화처럼 음습하고 환한 대낮에 피를 흘리는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때때로 우리의 인생은 난잡하기만 하다. 가족으로 묶여 덩어리로 살아야 하는 피곤함과 끊을 수 없는 사슬에 질질 끌려다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존재 이유를 느끼게 해 줄 수도 있는 게 가족이지만 평생 악몽같은 관계일 수도 있는게 가족이기도 하다.

  단편 ‘그날’은 역사적 인물 이완용을 세상 밖으로 불러낸다. 그가 당연히 가지고 있었을 인간적 고뇌와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를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단순히 그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신선한 발상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 궁금해졌다. 말하고 싶으나 말 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입을 달아주는 것이 소설가의 의무라면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와 이야기 속에서 헤매야 할 것이다.

  ‘현기증’과 ‘산너머 남촌에는’도 크게 가족과 무관하지는 않다. 기러기 아빠로 사는 비행기 조종사의 현기증과 열두 남매를 낳아 길러야했던 어머니의 시선은 대체로 냉정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말들을 쏟아낸다. 애틋하고 다감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서걱이며 불협화음을 내는 관계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해설에서,

김인숙이 그려낸 인물들은 모두 혀가 있으나 입술이 없는 존재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존재로 그려진다. - P. 207, 정여울의 해설 ‘입술이 없는 존재의 상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중에서

 라고 말하는 정여울의 표현은 표현은 정확해 보인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존재’가 김인숙의 소설에만 등장할까?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닐까?


09112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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