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머나먼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72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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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잊고 지내던 첫사랑이 생각난 것처럼 반갑게 ‘최승자’를 만났다. 시인을 처음 만난 건 『즐거운 일기』를 통해서였다. 시를 쓰며 살아보겠다는 꿈을 꾸던 무렵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오규원이나 최승자, 이성복, 황지우, 정호승을 만나면서 시인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허접한 글쓰기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이었을까. 적어도 내게는 최승자의 시가 하나의 세계로 보였다. 살리에르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낭패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서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았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표제작은 이제 빛바랜 사진처럼 추억을 떠올린다. 당시 상황과 현실에 대한 냉소와 반어가 발랄하게 튀어 오른다. 그 젊은 시인을 다시 만나는 일은 또 하나의 기쁨이다. 나이 들어 많이 아팠다는 시인의 목소리에 기운찬 울림이 아니라 멀고도 쓸쓸한 세계의 침묵을 보여준다.

  영원한 삶은 없다.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삶에 대한 회의. 모든 작가가 한번쯤 부딪치는 문제겠지만 시인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저기 저 ‘먼 세계’는 설명할 수 없는 거리이거나 자웅동체처럼 한 몸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혹은 한 세계를 완전히 잊고 산다. 곧 만나게 될 그 세계를 완전히 외면한 채.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방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道家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마치 선문답을 하듯,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시인은 세월의 학교를 졸업한 모양이다. 그래서 ‘바다는 바다, 섬은 섬’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다만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이다. 우리도 그런가? 걱정인가 바다가 커져서? 나는 무슨 바다를 건너려하는가?

  쓸쓸하고 머나먼 세계를 인식했다는 것은 세월의 흐름을 느낄 만큼 살았다는 말이다. 넓고 큰 이치와 흐름을 읽어내고 작고 누추한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서든 그렇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문득 하늘을 본다. 해가 지는 푸른시간과 하늘이 없는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보다 끔찍하다.

세월의 학교에서

거리가 멀어지면 먼 바다여서
연락선 오고 가도
바다는 바다
섬은 섬

그 섬에서 문득문득
하늘 보고 삽니다

세월의 학교에서
세월을 낚으며 삽니다

건너야 할 바다가
점점 커져 걱정입니다


  다변이 달변은 아니다.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온몸으로 진실을 드러내듯 그렇게 시간과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자명해질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어리석은 인간은 지금, 현재를 즐길 줄 모르고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이 쉽게 죽음을 말하듯 원론과 원론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울타리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라질 것들을 영원히 지킬 수 없다는 자괴감을 견뎌내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는 지당한 말씀.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
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

중요한 것은 삶이었다
죽음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거꾸로도 참이었다는 것이다

원론과 원론 사이에서
야구방망이질 핑퐁질을 해대면서
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돈이 되어버린 세상,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삶의 참다운 가치를 논하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흐린 날에는 주막에 앉아 한 잔 술을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조용히,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먼 하늘에 상현과 하현을 구별하지 못해도 달이 둥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듯 만월과 초승달은 하나다. 차고 기우는 자연의 이치는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흐린 날, 달은 어떻게 바라 볼 건가. 그래도 어디엔가 달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

흐린 날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차고 기우는 것, 그게
차다가 기우는 건 아닌데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천장에서 비 새는 듯한 흐린 날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초승달이
보이지 않는 만월을 또 낳기도 하겠구나



10022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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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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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 혹은 자유

  아침이 밝아오는 동편 하늘 혹은 해질녘 서쪽 하늘을 물들인 빛의 산란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바늘 하나 꽂을 곳 없는 세상에 태어나 반복적인 일상과 힘겨운 생존의 몸부림. 모두 같은 꿈을 꾸는 세상은 불안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빛깔의 무지개를 그려보지만 만만치도 않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

  박민규는 이렇게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는 신현림에 말을 행동에 옮기고 있는 몇 안 되는 지구인처럼 보인다. 스스로를 ‘무규칙이종소설가’로 규정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우리는 그의 일상과 내밀한 정신세계를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소설들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아니 작가를 이해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한 개인에 관한 궁금증이 아니라 그의 소설을 조금 더 잘 읽어보려는 의도이거나 작가가 말하는 세상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한 시도일 뿐이다.

  개연성 있는 허구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문법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해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소설을 만나면 독자들은 불편하거나 극단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일탈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명명된다. 현실 밖의 세상을 동경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본능적인 욕망이 아닌가. 현실에 발 딛고 비상(飛翔)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그 세계를 경험한다. 지극히 이성적인 일탈 혹은 몽환적 자유.

  박민규의 소설들은 ‘틀’을 버린다. 2010년 34회 이상문학상작품집 『아침의 문』은 ‘이상(李箱)’의 문학정신을 가장 잘 반영한 ‘이상문학상’ 수상작가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수상했던 어떤 작가보다 이 상에 가장 어울리는 수상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그의 소설을 읽어 온 독자들은 그가 앞으로도 일탈의 환상과 자유로운 영혼 그리고 일상의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힘들여 쓰지 않는 그의 소설을, 어깨를 긴장시키지 않는 그의 문장을 킥킥거리며 읽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희망과 환타지 너머

  수상작 ‘아침의 문’은 자살사이트에 만난 사람들의 동반자살 실패가 시작이다. 물론 죽지 못한 한 사람이 문제다. 생을 긍정한 사람만이 죽을 수 있다. 자살을 시도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삶의 끝에서 만나야 할 죽음을 꿈꾸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 소설은 주제는 물론 그 이유를 찾는 데 있지 않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자살은 삶의 그림자 놀이?

  사람들은 오늘을 사는 이유가 내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거짓이다. 외면하고 싶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은 때때로 우리의 목을 조른다. 아무생각 없이 매일매일 행복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닐까. 박민규는 육하원칙에 따라 주인공의 일상을 명백하게 밝히려고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직업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비정규직은 아닐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채 불안하게 흔들리는 존재들. 그렇게 우리는 잠시 이 생을 살다가 사라진다. 생명의 탄생만큼 신비한 죽음의 세계는 늘 우리의 곁에 머물러 있다. 외면한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박민규는 죽음의 입구에서 탄생을 바라본다. 그것은 생을 긍정하기 위한 상징이 아니라 비루한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위안이다. 자선 대표작으로 뽑은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가 바로 이 일상의 권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희망 없는 오늘을 살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박민규는 희망 없는 희망은 가능한지 묻고 있다. 보이지 않는 혹은 불가능할 것 같은 일탈을 시도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차라리 눈물겨운 주인공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위로와 공감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밖의 것들은 또 다른 소설을 통해 확인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 시작이라고 소설 쓰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박민규의 문학적 자서전을 읽으며 ‘ㅋㅋㅋ’. 꿈없는 청춘, 희망 없는 일상, 3류 들의 고통을 즐겨 보여주는 박민규에게 희망이나 환타지가 아니라 그 바닥을 보여 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어설픈 사회소설이 어울리지 않는 박민규에게 우리는 적나라한 현실과 차마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킨 기분이 든다. 조금 더 철저하게 혹은 더욱 더 환상의 세계를 보여 달라고 조르고 싶은, 박민규의 힘을 믿고 싶다. 우리에게도 박민규는 필요하다. 거기 그대로 머물러 달라.


주목할 만한 소설가들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단편 중 ‘통조림 공장’과 윤성희의 ‘매일매일 초승달’은 수상작으로도 손색없다. 소설적 완성도 면에서 이미 하나의 세계를 완성한 듯 싶다. 독자들의 개인적인 취향이 있겠지만 소설의 다양성, 실험성을 고려하더라도 두 작품은 단연 돋보인다.

  전성태의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이야기의 힘 즉 서사의 본질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문학적 감동을 선사한다. 김중혁의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의 실험성은 커다란 울림을 주지 못했고 손홍규의 ‘투명인간’과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는 일상의 문제를 지적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단편으로 읽혔다.

  이상문학상이 갖는 권위에 눌려 호기심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평소 우리 소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통해 다같이 즐기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연말에 방영되는 텔레비전의 각종 시상식의 절반만큼이라도 문학상과 책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 삶은 얼마쯤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모든 작가들의 건투를 빌빈다.


100207-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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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로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8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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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현실 사이 - 사회주의 리얼리즘

  삶의 진실에 가장 근접한 갈래는 소설이다. 인간 삶의 정수를 담아내는 데 가장 적합한 방식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문학은 철학과 역사와 더불어 인류의 지혜를 전수한다. 다양한 인간 삶의 모습은 물론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는 문학은 어떤 학문적 성과나 객관적 사실보다 세계의 진실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래서 세월을 이겨낸 문학의 고전들은 인류의 과거를 아프게 드러내며 객관적 진실을 보여준다. 모든 작가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몸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통찰력은 위대한 작가들이 가진 공통된 특징이다.

  객관적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는 이상주의적 계몽주의와 환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19세기에 탄생한 문예사조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가 탄생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정점에 이른다. 소설은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현실을 말해준다. 문학은 현실이며 현실은 그대로 문학이 된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위대한 고전은 이런 이야기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문학적 진실을 전해준 작품들이다. 러시아 혁명과정과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으면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념이란 무엇일까.

  숄로호프의 소설은 우리에게 멀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단순히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표피적 사실이 소설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단편들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우리의 이야기와 너무 닮았기 때문에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힌다. 이념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총을 겨누는 현실을 우리도 겪었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사회적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상식과 이성으로 풀어나갈 문제들이 색깔론으로 덧칠되고 좌우 이념 대립과 무관한 문제까지도 감정적인 적대감을 드러낸다. 숄로호프의 소설은 과거의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아픔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문학은 여전히 현실의 가장 고통스런 부분을 드러내고 작가는 그 고통의 원인과 상처를 극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숄로호프는 작가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작가로 평가받아야 한다. 문학을 통한 미적 경험은 단순히 정서적 아름다움과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와 사회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느껴져야 한다. 그래서 한 권의 소설로 한 시대를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책을 고전이라 부를 수 있다. 


러시아, 아물지 않은 20세기의 혁명과 상처

  1917년 11월 7일 혁명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 1992년 1월 1일 독립국가연합으로 해체된다.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게 붕괴한 것이 아니라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보여주었고,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의 승리를 증명해주었다. 20세기를 붉은 혁명의 성공으로 출발하며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으나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반성과 고찰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니다.

  숄로호프는 고향 돈 강 유역 카자크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담아냈다. 참혹한 현실, 민중들의 삶이 숄로호프의 관심사였다. 고향의 이야기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6. 25를 통해 양산된 수많은 전후 소설들을 떠 올려 보자. 이념의 대립과 갈등 자체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비극을 설명할 수 있을까? 숄로호프도 가족과 고향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의 운명’, ‘배냇점’, ‘타인의 피’ 등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비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념과 전쟁으로 인한 모순과 비극 때문이다. 러시아 민중과 인류 전체의 비극이기도 한 20세기 역사의 한 페이지로 읽어야 한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들의 아픔은 역사적 친연성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성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 아프고 불편한 감정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슬픔’에 대한 보편성 때문이 아니라 길고 지난했던 역사의 인과관계 때문이었다. 그 고리는 여전히 우리들 현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좌절했고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상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숄로호프의 단편선』을 통해 전쟁과 상처, 야만과 폭력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하고도 뻔 한 대안을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 넓고 깊은 휴머니즘이 불가능하다면 숄로호프의 소설은 다큐멘터리 기록 필름에 불과할 것이다. 여전히 폭력과 광기에 사로잡힌 시대에서 자유롭지 못한 21세기의 현실을 돌아보자. 숄로호프의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지도 모르겠다. 고전은 현실을 비추는 등불이다.


100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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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창비시선 309
이문숙 지음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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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이 꾸준히 발행되고 팔리는 거의 유일한 나라, 아직도 출판사마다 시인들이 활발하게 시집을 찍어내고 고정 독자층이 확보되어 있는 특이한 양상을 보이는 나라 대한민국. 그것은 아마도 민족문학에서 시가 차지하는 비중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근대문학 이전에 고전문학은 한시를 중심으로 시조와 가사가 주종을 이루었다. 시는 항상 지배층의 지적 우월성을 표현할 수 있고 학문적 깊이를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17,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이 창작되었지만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소설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내용과 어렵지 않은 전달 방식을 가지고 있다. 시가 가지고 있는 고급스런 이미지는 다양한 층위에서 벌어진 문예사조의 부침에 따라 달라지긴 했지만 그 위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문숙이라는 시인은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으로 처음 만났다. 시집을 읽는 동안 시가 가지고 본질적인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시의 기능과 효용에 대한 쓸데없는 상념들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이문숙의 시는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게 주변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기교도 없고 특이한 발상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개성 없는 말장난이라는 뜻은 아니다.

악어 쇼

아무도 없는데 돌아보니
악어 한 마리 입을 벌리고 있어

빨간 타이츠를 입은 소냐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활짝 폈다가
주먹을 만들어
벌린 입속으로 집어넣어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불을 한입 달게 먹고는
또다시 울퉁불퉁한 이빨 사이로 넣어

무릎을 꿇고 천천히 윗몸을 들어올려
잘 휘어진 등 아래로
긴 머리카락을 몇 번 흔들다가
머리를 악어의 커다란 주둥이 사이로

나도 그 속으로 펜을 쥔 주먹을 넣었다 뺀다
(주먹은 잘라지지 않고)
나도 매일 부글거리는 머리를 넣었다 뺀다
(머리는 동강나지 않고)

악어가 입을 다물어 이빨들이 맞물리지 않는 한
악어 쇼는 계속되리라

포만한 악어는 절대 사냥감을 찾지 않는다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닫아주기 전에는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좋은 시가 아니다. 적절한 비유와 다양한 의미를 증폭시키는 상징은 시 읽는 즐거움이다. 이 시집의 서시 ‘악어 쇼’는 현실의 변주곡으로 읽힌다. 어쩔 수 없는 ‘쇼’는 계속된다. 두려움과 공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쇼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그것을 즐기고 박수를 칠 것이다.

  견고한 현실의 벽을 두드리는 듯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관찰하는 시인의 눈. 이 시집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를 듣게 된다. 낯선 언어의 진경이 아니라 익숙한 말들의 투박한 이야기.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움직일 때마다 지팡이 땅을 그러쥔다
그 옛날 논골이었다는 이곳
논으로 흘러들지 못한 물소리 저만치 하수구로 흘러간다

그 남자 한 발짝을 들어올리는 동안

여기엔 그 옛날 작은 다랑이논들
물소리에 귀를 열어뒀으리라
왼손이 뒤틀리고 주먹 쥔 듯 오그라진 손을 치켜들고
그 남자

이제 다랑이논들은 노인정에 모인 그들의
이마에나 굵은 굴곡으로 남았다

겨우 그 남자 몸을 일으켜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지팡이는 땅으로 뿌리를 뻗고 새순 한 가지
쳐올릴 수도 있었으리라

갑자기 정자 기둥에 붙은 괘종시계가 울린다
무거운 시계추가 왔다갔다한다

치주염을 앓는 누런 이빨의 구름들
가는 귀먹은 노인들의 귓속으로
보공(補空)하듯 쑤셔넣는다


  쉽고 가볍게 읽히는 것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부호들의 나열도 아니다. 그녀의 시는, 우리의 삶은 어쩌면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끝나버릴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찰나의 삶과 죽음.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시계추는 끝없는 왕복운동을 하고 모든 존재는 소멸한다. 그렇게 숨가쁜 세월이 지나가는 어떤 순간, 우리는 겨우 한 걸음을 옮겨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아, 니체의 말이 떠오르는 시 그리고 밤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

그 많은 구두들은

어디로 갔을까
부서지는 바닷물에 쓸려갔을까
쏟아지는 흙탕물에 떠내려갔을까
진열장에 놓여 있던 가닥가닥 끈으로
발을 감싸는
양 창자를 꼬아 만든

삶이 막막할 때마다
숫양이 머리를 파묻고 울거나 애무도 받았을

(공원에서 여자의 배를 베고 남자가 누워 있다)
(여자의 보드라운 배를 베고 남자가)
(오목한 배 위에 머리를 대고)
(구불거리는 창자에)

그 발에 딱 맞는 구두들은 어디로 갔을까
동그란 뒤꿈치 뾰족한 발가락 감싸던 그 화려하고 보석 장식이 많은
구두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카메라가 붙잡은 물 위를 둥둥 떠내려가는
구두 한짝

예쁘고도 사나운
벗어 철썩 사내의 뺨을 갈기던
구두들은
그 폭약의 여름은 다 어디로 갔을까



1001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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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베어 카르페디엠 7
벤 마이켈슨 지음, 정미영 옮김 / 양철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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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은, 진실을 거부하지 않으며, 억압했던 고통을 자기 안에서 느끼고, 몸이 감정적으로 알고 있는 과거를 정신적으로도 받아들여 더 이상 억압하지 말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앨리스 밀러, 『폭력의 기억』중에서
 

기억과 망각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산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잊혀지고, 과거의 기억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방향으로 다시 조정된다. 기억의 오류는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정신적 상처를 스스로 이겨내기 위한 자정 능력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몸으로 기억한 것은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몸은 고통 받고 치유하는 과정의 화학적 반응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경험은 성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은 그래서 상처받기도 쉽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부모이다. 대부분의 경우 어머니는 안정과 사랑의 대상이지만 아들에게 아버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대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무의식적 충동과 자아 방어’를 말하는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도구로 유용하다. 하지현은 『관계의 재구성』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동성 부모에게서 느끼는 질투와 저항의 관계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로부터 폭행 당한 아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

  벤 마이켈슨의 장편소설 『스피릿 베어touching spirt bear』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심리소설이다. 피터 드리스칼에게 끔찍한 폭행을 가한 주인공 콜 매슈는 평소에도 폭력 성향이 강한 15세 소년이다. 그는 감옥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인디언의 치유 방식인 ‘원형평결심사’를 통과하고 알래스카 남동부의 섬으로 떠난다.

  소설은 아버지가 콜을 폭행하는 장면, 알콜 중독으로 남편을 말리지 않는 어머니를 통해 15세 소년의 ‘무의식적 충동과 자아방어’ 기제를 설명하고 있다. 피터를 폭행한 것은 콜의 현재 모습이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콜을 통해 ‘아버지의 폭력 → 몸과 영혼의 상처 → 분노 →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폭력’에 이르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콜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 어떻게 이 지독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타인의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을까?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자연의 힘

  외딴섬에 혼자 살게 된 콜은 틀링깃 인디언 에드윈 노인이 지어놓은 오두막을 불태우고 희고 거대한 ‘스피릿 베어’를 만난다. 콜은 스피릿 베어를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두르다가 온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극적으로 살아난 후, 보호관찰관 가비의 도움으로 다시 원형평결심사를 요청한다. 스피릿 베어를 통해 끔찍한 폭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콜은 진정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섬에 돌아온 콜은 스스로 불태운 오두막을 다시 짓고 찬 물에 몸을 담그고 돌을 들고 산에 올라가 언덕 아래로 ‘분노’를 굴려 보낸다. 마치 ‘시시포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돌 굴리기는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콜은 외롭고 힘겨운 섬 생활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상처의 원인을 찾고 스스로 치유하게 된다. 작가는 주변 모든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던 콜을 자연과 대립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위대한 자연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손해지는 법이다. 콜도 자연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작가는 상처의 원인을 ‘아버지의 폭행’으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콜이 가진 내면의 슬픔과 분노로 보았다. 더 나아가 자연을 통해 겸손과 정직 그리고 용서를 배우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타인의 고통을 통한 상처의 극복, 그리고 성장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중에서

  2차 피해자인 피터는 결국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인 콜이 사는 섬에 도착한 피터. 두 사람의 동거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도덕적이고 뻔한 결론을 위한 수순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치유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콜과 점차 마음을 열게 된 피터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극복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 ‘분노는 거부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라는 에드윈 영감의 말은 콜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준다. 분노가 사라지고 자신과 ‘타인의 고통’까지 이해하고 용서하는 두 소년의 모습은 다른 성장 소설과 구별되는 『스피릿 베어』만의 특징이다. 결국, 콜과 피터의 고통은 견줄 수 없는 것이며, 가해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두 소년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부유한 부모를 가졌지만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콜은 청소년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을 통해 콜이 상처를 치유하듯 인디언의 전통적 가치는 문명화된 미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연안에 살고 있다는 ‘스피릿 베어’를 통해 우리는 미니애폴리스에 살고 있는 콜의 삶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나 인과관계의 필연성 등 소설적 완성도의 부족은 콜의 진솔한 고백으로 상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어요. 사람들은 두려워서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가끔은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죠.” - P.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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