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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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일찍 쓰련다. 찬란했다고.

차가운 물의 명백함을, 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는 그 격렬한 시간들을 차마 어떻게 마주한 것인지. 균형이었는지. 전부였는지. 그러므로 조금 미리 쓰련다. 당신도 찬란했다면 당신 덕분에 찬란했다고.


  한 편의 시와 다르게 한 권의 시집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와 무게로 다가온다. 한 편의 시는 낱낱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한 권의 시집은 전체 의미를 드러내는 유기체와 같이 시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긴 호흡으로 풍부한 소리를 내는 교향악과 같다. 한 편의 시가 기교를 뽐내는 독주와 같다면 한 권의 시집은 다양한 인물 군상을 드러내는 대하소설과 같다. 그래서 한 시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집을 읽고 또 그 다음 시집을 읽으며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즐거움을 맛보아야 한다.

  창비에서 나온 『바람의 사생활』과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찬란』은 시세계의 차이와 변화보다 시간의 흐름과 출판사의 이미지가 달라졌을 뿐인 것 같다. 예전에 참여와 순수 문학을 대표하던 출판사의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특성이 모호해진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이병률의 새 시집 『찬란』은 시집 뒷면의 시인의 시작노트처럼 우리들 삶의 ‘찬란’에 대해 적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너무 이르다고 해서 찬란하며 너무 늦었다고 해서 찬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찬란은 생의 매순간마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에 대한 헌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찬란’은 언제였을까? 매순간 찬란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어느 한 순간, 지나고 나면 그 때가 찬란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에 뭔가 들어가 있다. 괜히 필요하지도 않은 눈물을 흘렸고 그것도 모자라 인공 눈물까지 샀다. 병원은 커다란 안경을 통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유리 조각이 박혀 있다고 했다.

- ‘내가 본 것’ 중에서

  시는 지독히 주관적인 영역의 문학이다. 그래서 시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눈에 박힌 유리조각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손톱만한 자신의 실수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스스로 삼가고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동일한 사건과 사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기억은 더욱더 그러하다. 내가 본 것은 내 안에서 다른 일과 사물과 사건이 된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은 언제나 불안하기만 하다. 나와 타인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내 눈과 기억과 판단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눈은 ‘내가’라는 수식어가 주는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한다. 주관적 판단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주관이 아니라 객관적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안

혹시 이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안에 있다
안에 있지 않느냐는 전화 문자에
나는 들킨 사람처럼 몸이 춥다

나는 안에 살고 있다
한시도 바깥인 적 없는 나는
이곳에 있기 위하여
온몸으로 지금까지 온 것인데

문자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혹시 여기 계신 분이 당신 맞습니까

나는 여기 있으며 안에 있다
안쪽이며 여기인 세계에 붙들려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있는 숱한 풍경들을 스치느라
저 바깥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여기 있느냐 묻는다

삶이 여기에 있으라 했다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그렇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는 안에 있는 사람이다. 끝없이 밖을 지향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안이 편하고 좋다. 밖에서 안을 지향하는 사람도 있고 밖에 있는 것을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안’이 있고 ‘밖’이 있다. 우리가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고 ‘당신’을 찾을 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안의 세계가 진정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찬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이 찬란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당신의 모든 생이 찬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오월의 녹음은 눈이 부시다. 창 밖의 나무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도 찬란하고 눈부신 햇살은 더더욱 찬란하다. .내 생의 찬란함, 아니 우리 모두의 찬란함을 위하여 이병률의 시집 한 권과 작은 마음의 여유를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은 밤이다.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 중략 ……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 ‘찬란’ 중에서



10051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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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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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문제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의 범위를 넘어선다. 때로는 『소피의 세계』처럼 철학이 소설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고 서사 구조를 빌어 다양한 형식의 학문 영역이 융합되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이 펼쳐진다는 것은 소설의 재미가 갖는 매력 때문이다. 어찌됐든 소설은 여전히 사람과 삶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과 통찰을 제공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와 역사가 보여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변주하며 현실과 미래를 조망하기도 하고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소설은 인간의 삶이며 역사이고 미래이다.

  미래 사회를 다룬 고전으로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1984』 등을 들 수 있다. 쥘 베른의『지구속 여행』은 SF 소설의 고전으로 손꼽을 만하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는 데 소설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얼마든지 상상하고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가의 창조력 상상력은 『해저 2만리』처럼 미래를 예견하고 과학의 발달을 선도하며 인간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멀지 않아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지식과 과학기술은 끝없는 문명의 진보를 초래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변함이 없다.

  네덜란드의 작가 버나드 베켓의 소설 『2058 제네시스』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쏟아낸다. <공각기동대>가 보여주는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미래사회 때문에 두려움은 물론 혼란스런 의문들을 가진 적이 있다.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수많은 영화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질문에는 답이 없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단순히 뼈와 살과 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과학적 경계를 넘어 존재론적 의문들에 대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 소설은 독특한 형식과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독자들의 깊은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미래 사회에 실현했다는 발상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허생전>의 ‘빈섬’이나 <홍길동전>의 ‘율도국’과 유사한 유토피아가 건설된 미래 사회는 행복할까? 세상과 단절된 후 신분과 계급에 맞게 완벽한 시스템 속에 갇힌 사람들의 삶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작가는 가상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일에는 서툴다. 서양의 고전철학에서 그 이상을 가져와 플라톤의 이데아를 실현하는 듯하지만 시스템을 감독하고 통제하고 지배하는 자들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음모와 함정을 숨기고 있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완전할 수 없고 어둠과 그림자가 있게 마련이다. 완벽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그곳은 어쩌면 영원히 인간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에도 균열이 일어나며 그 작은 틈은 나비효과를 가져온다.

역사는 우리에게 음모이론의 무용성을 보여줍니다. 복잡한 것은 실수를 낳게 되고, 그런 실수 속에 편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P. 49

  이 소설은 철저하게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험관과 아낙시맨더의 대화는 단순한 외화에 불과하다. 학술원에 들어가려는 아낙시맨더의 준비와 사유의 틀은 결국 전체 시스템의 균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소설은 끝난다. 극적인 반전과 서스펜스를 즐기기 위한 소설이 아니다. 결론을 말한다고 해서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은 시스템에 도전하는 아담과 인공지능 로봇 아트가 주인공이다. 둘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야말로 이 소설의 팽팽한 긴장의 끈이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아담의 입을 통해 작가는 인간이 이룩한 이성과 합리적 제도 그리고 조직과 시스템을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과 음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개인을 희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에 앞서 개인의 삶과 행복의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한 성찰과 논쟁으로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행복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삶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부호로 읽어도 좋다. 물론 정답은 없다.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생의 목적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공통분모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역시 시간이 흐르면,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이성을 조금씩 몰아내, 결국 이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죠. 아담은 자기 머리를 믿지만, 결국 마음을 따릅니다. - P. 113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따라가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작가는 이성보다 감성을, 논리보다 직관을 인간의 본능적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모두가 공감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창밖에 연녹색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작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는 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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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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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 [食口]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가족 [家族]
1 부부와 같이 혼인으로 맺어지거나, 부모·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구성원. ≒처노(妻孥) .
2 <법률> 동일한 호적 내에 있는 친족.

  가족이 친족으로 이루어진 폐쇄적 집단이라면 식구는 끼니를 함께하는 열린 개념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는 말은 생면부지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확인되는 순간 모든 관계의 룰을 넘어서는 것이 한국적 전통의 가족이다. 살을 부대끼며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곧 식구이고, 식구가 곧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식구가 곧 가족인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적으로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일부다처에서 일부일처로 변화한 것은 권력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모계사회나 일처다부제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문명국가의 가족제도는 대체로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박현욱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현대사회의 일부일처제에 대해 재치 있게 의문을 던졌다. 앞으로 가족의 개념이 어떤 형태로 달라지고 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21세기가 되어도 한국적 개념의 가족은 견고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불안한 사회일수록 경쟁적 관계의 사회질서가 강화될수록 가족의 유대는 더욱 공고해질지도 모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가 분류했듯이 가족은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목적이 개입된 집단이 아닌 공동사회에 해당한다. 이해관계를 떠나 오로지 혈연관계로 이어져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 치부되는 것이 한국적 개념의 가족이다. 따라서 입양, 재혼, 혼외정사 등에 의해 새롭게 결합된 가족의 경우 한국인의 정서로는 온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천명관은 이런 예민한 문제로부터 『고령화 가족』을 온전한 가족으로 만들어냈다.

  사십대 후반의 화자인 나는 관객을 배신했다는 평가를 받은, 철저하게 망해버린 영화를 만든 실패한 영화감독이다. 스튜어디스 출신 아내와 이혼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칠순이 넘은 어머니에게 돌아가지만 오십대 초반의 전과자 백수 형이 먼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남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연립주택에 이혼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돌아온 여동생이 결합하면서 다섯 식구가 완성된다. 뒤늦게 다시 모인 형제들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처 자식인 형과 어머니의 불륜으로 얻은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제각각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신산스런 고통을 맛본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묻기 전에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 한 것은 그저 통속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우리들의 삶의 단면이 아닐까.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 P. 45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 삶의 해피엔딩을 꿈꾼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와 다르다. 작가는 그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루한 일상,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을 이 소설의 곳곳에 배치한다.

  찌질한 인간의 향연이라고 할 만한 인생 막장 드라마와 같은 소설을 읽는 내내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중심에 선 어머니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밥’으로 대변된다. 먹이는 일에 목숨을 거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는 평범한 어머니를 읽게된다. 가족으로 묶일 수도 없는 3남매의 연결고리가 되어 한 가족을 이끌고 살아온 어머니를 통해 형제들은 각기 또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마치 생의 출발과 종착역 같은 어머니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따뜻함의 원천이 된다.

  더불어 『고래』에서 보여주었던 거침없는 상상력과 영화 스토리 같은 사건 전개 걸쭉한 입담과 구라 솜씨는 소설의 흡입력으로 작용한다.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인생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삶의 의미와 가족에 대해.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 P. 286쪽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얻지도 못하고 말 깨달음은 아닐까. 항상 미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모든 순간과 과정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언제쯤 인정하게 될지 모르겠다.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인 삶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인생을 위해 다시 한 번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가족을 넘어 우리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10050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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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인보우의 관심사는 저출산, 고령화, 인플레이션, 은퇴, 연금.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from 낚시질은 이제 그만!!! 레인보우의 보험 뽀개기 2010-05-20 13:50 
    레인보우의 관심사는 저출산과 그리고 고령화입니다. 저출산의 문제와 고령화의 문제는 어떤것이 먼저라고 할 것없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해결방안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포스팅을 저출산과 고령화로 설정하고 왜 저출산과 고령화가 레인보우의 관심사인지는 부족한 글솜씨로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유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저 개인적인 문제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야기할까요? 먼저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구재앙은 이미 소리없이..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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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에 대한 성찰은 우리들의 삶을 객관화하기 위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면 이 시대의 소설을 읽어보자. 주목할 만한 신인들과 기성 작가들의 소설들이 조화를 이루며 풍요로운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면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김이설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로테스크한 표지의 얼굴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 어떤 사이와 간격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라면 김이설의 단편들은 여성과 남성, 개인과 가족, 모성과 부성 사이를 가로지른다. 극단적인 모습은 사람들이 외면한다. 현실이 아름답지 않지만 굳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이설은 두 손으로 뺨을 잡고 똑바로 들여다보도록 강요한다. 바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 사회의 모습 혹은 타자의 현실이 어떠한지 확인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이 완고하다.

  좋은 글은 불편하고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그렇다면 김이설의 글은 좋은 글이다. 편안하고 푹신한 소파가 아니라 조금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의자같다. 하지만 안락한 소파에 앉아 잠을 청하기보다 불편한 의자에 앉아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는 게 좋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열세살’의 노숙인 소녀, ‘엄마들’의 대리모를 위시해서 ‘하루’의 위선적인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김이설은 언제나 부딪칠 수 있거나 낯선 여자들을 골고루 보여준다. 물론 이 여자들의 공통점은 불편함이다. ‘엄마들’의 부족할 것 없는 여자가 대리모에게 밤늦게 찾아와 술이 취한 채 쏟아놓는 넋두리에 대해 작가는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고백은 처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이설의 소설은 처연하지 않고 낯설고 아프다.

  버려진 아이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한다. ‘순애보’의 불편한 관계 또한 관계 너머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보이는 것이 전부다 아니라고, 관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꿈은 환상일 뿐이라고, 불쌍한 건 오히려 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념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잠언투의 이야기가 때로는 소설 읽기를 방해하지만 나는 누구의 소설에서도 일반화가 가능한 문장들에 밑줄이 간다. 맥락이 다를 뿐, 어쩌면 우리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관계를 맺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안한 싱글 연극배우의 비루한 일상과 꿈 없는 미래를 보여주는 ‘막’은 “세상은 늘 두 가지였다. 있거나 없거나. 그건 예쁜가 안 예쁜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로 구분되었고 결국 승자와 패자로 나뉘게 했다.”는 말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떤 자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올가미처럼 옭죄는 현실 혹은 답답한 미래에서 시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여자들을 끊임없이 나열한다. 앞으로 그 여자들의 어떤 측면을 보여줄지 혹은 그 여자들의 관계와 남성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기다려진다. 새로움이 항상 미덕이 될 수는 없으나 그녀만의 새로운 영역은 무엇일지 조금 더 읽어봐야겠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에 비해 박솔뫼의 장편소설 『을』은 독특한 감수성과 분위기를 지닌 장편 소설이다. 제1회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 수상작인 이 소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망을 집합체로 보여준다. 하나의 존재는 또 다른 존재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제 홀로 서 있는 것조차 불편한 존재들이 있는 법이다.

  을과 민주. “이민주는 방을 떠남으로 더 이상 ‘민주’일 수 없었다.”는 문장은 민주보다 비어있어 채울 수 있는 공간인 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람과 관계로 시작한 듯하지만 호텔방에 대한 공간이 먼저 다가온다. 익숙한 소설적 구성과 배치가 아니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의미의 호텔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일회적 혹은 단편적 관계를 오히려 전면적, 복합적 관계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을은 풀리지 않는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어떤 비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을은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 풀어내는 과정에 매혹되었을 뿐이다. - P. 21

  밑줄이 남아 있는 문장은 그대로 소설에 대한 인상이 되고 인물에 대한 평가가 된다. 이 소설은 낯설고 신선하다. 그것은 을이 따라가는 과정 때문이 아니라 을이 관계 맺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호와 오래된 신호 같은 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따라가는 과정에 매혹되는 것이 독자들이 할 일처럼 여겨진다. 깊은 갈등도 흥미진진한 사건도 없다. 빛바랜 사진처럼 탈색된 이미지와 지루한 웅얼거림이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그 조용한 웅얼거림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민주의 사려 갚음은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공평한 것이었다. 그 말을 달리 하자면 민주의 무관심은 지극히 공평했다. 하지만 민주는 대개 늘 사려 깊었고 주변의 사람들은 민주의 사려 깊음이 무관심으로 바뀌는 과정을 잘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무관심이 사려 깊음으로 녹아드는 과정도 말이다. 그것이 민주의 예의 바름이었다. - P. 38

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정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민주처럼 무관심을 공평하게 나누어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의바름의 위악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결국 현실 속의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묻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도 너에 대한 사랑도 세상에 욕망도 완성되는 순간 사라진다. 아니 영원히 완성되지 못한 채 부끄러워진다. 그것이 관계에 대한 쾌락이 아닌가. 정여울은 작품해설에서

인간은 관계의 쾌락을 즐길 때 그 쾌락이 둘 사이의 배타적인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쾌락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며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이 쾌락의 본질이기에, 그리하여 고정된 시공간에 가둘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하여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 P. 220

라고 일침을 가한다. 쾌락의 본질은 소유할 수 없다 사실을 부정하려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이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시간을 조금만 건너뛰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았다. 가련한 인간 『소현』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인간이 아니었다. 조선의 세자로 살아간 그의 한숨과 삶의 결을 따라가는 김인숙의 미려한 문체는 김훈의 그것을 넘어선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화려해서 지루할 지경이다.

  실존했던 한 인간을 따라가는 일이 소설가에게는 어떤 고통이나 운명이었을까. 자신의 한 순간을 과거의 누군가에게 완전히 몰입하는 것은 즐거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 그의 한과 눈물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했던 고뇌와 회한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었다면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다. 만상과 막금, 흔과 석경이라는 흥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소현’으로 귀결되는 작가의 관심은 굴욕의 역사도 아니고 동방의 작은 나라의 비루함도 아니다.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며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정복자의 세상, 정복자의 세월이었다. 세자가 문득 어금니를 물고 생각했다. 부국하고, 강병하리라. 조선이 그리하리라. 그리되기를 위하여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리라. 절대로 그 기다림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나의 모든 죄가 백성의 이름으로 사하여지리라.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 김인숙, <소현>, 316쪽

  한 군데 밑줄 치고 책장을 덮으니 띠지와 일치한다. 울분에 찬 소현의 독백은 시대를 건너 작가의 상상력으로 부활한다. 독자들도 물론 김인숙의 소설을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으리라.’


100426-03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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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불길한 예감을 전해준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걱정 중에서 30%는 일어나지 않고 45%는 사소한 것이며 25%는 과거의 것이라는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불안이 기실 쓸데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거나 준비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는 것은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 우리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된다.

  소설은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거기에 일어날 수 없는 일들까지 상상하는 것은 물론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어야 하며 간접 경험의 즐거움은 예상할 수 없을수록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정해진 순서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보다 우리는 때때로 황당하고 기괴하지만 딱히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 바로 편혜영의 『재와 빨강』같은 소설 속에서 말이다.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한 순간도 빈틈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가? 아니면 게으르게 하고 싶은대로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쪽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치열하게 욕망할수록 불행해지고 포기한 듯 절망하는 편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의 아이러니다. 삶이 부조리하지 않고 정해진 규칙과 룰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 모든 예술은 사라진다. 말할 수 없고 해석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 보여줄 것이 없다면 소설가는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편혜영의 장편 소설 『재와 빨강』은 위험한 상상과 불온한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 설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미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계선 너머의 인생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건은 단순하다. 제약회사에서 약품을 개발하던 주인공은  C국에 파견된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C국에 도착하자마자 불행은 시작된다. 이혼한 아내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동창생 유진의 말을 믿을 수 없으나 출국하기 전날 그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혼란스런 그는 감금생활을 해야하는 아파트에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쓰레가 더미로 뛰어 내린다. 부랑자 생활을 거쳐 방역업체에서 쥐를 잡게 된다. C국에 파견된 것도 쥐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주인공은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소설은 끝이 난다.

  어둠과 파괴 그리고 동물적 상상력의 세계가 재로 표현된 것 같다. 눈부신 빛과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는 빨강으로 나타낸 것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재와 빨강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이미지로 주인공 사내의 아이러니한 삶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는 듯하다. 기괴한 이미지와 칙칙한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동일시된 자아를 발견한다.

  조금씩 상황만 다를 뿐 이보다 더 지독한 반전과 생의 아이러니를 경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혀 낯선 세계에서 살인자가 되어 쫓기는 주인공은 전염병과 낯선 언어와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버틴다. 멀쩡한 직장과 평범한 일상이 있는 곳에서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한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과 타인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 때문에 극적 반전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도 이러하지 않은가?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치열하게 욕망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불행의 시작이 되는 모순. 이것이 아마 모든 인간의 운명은 아닐까?

  편혜영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신종플루의 공포가 전세계를 뒤덮던 시기에 인간의 삶은 언제든 극적 반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 같다. 독자들의 입장에서 불편하게 읽히지만 새롭고 낯선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그로테스크한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소설도 우리에겐 언제든 필요하다. 생경한 방식으로 인간과 삶의 방식을 통찰하고 있는 작가의 다음 소설도 기다려진다.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안내 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언제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며 작가들의 애정만큼 가열차게 욕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헛된 욕망이며 오히려 불행을 경고하는 빨간 신호등일지라도 말이다.


10041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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