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표절 - 문학과 예술의 전통적 연대기를 전복하여 무한히 확장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다 패러독스 3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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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모든 표절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새롭다는 것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한다는 순수한 의미뿐만 아니라 기존의 것을 변형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새로움을 포함한다. 특허와 실용신안으로 새로움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에 비해 예술품에 대한 권리는 모호하기만 하다. ‘표절’에 대한 논란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분명한 기준과 잣대가 모호하다. 비슷한 것과 그대로 인용한 것의 차이는 보는 사람의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에서 표절은 앞선 시대의 작품을 베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거꾸로 미래의 누군가를 표절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웃어버릴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사람이 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으로 기발하고 탁월한 견해로 찬사를 받았던 프랑스의 인문학자 피에르 바야르가 이번에는 『예상 표절』이라는 책을 내 놓았다. 피에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낯선 개념을 통해 상식을 뒤집는다. ‘읽지 않는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어떤 작품을 표절할 수 있다는 발상은 장난스런 발상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은 넌센스 퀴즈를 위한 혹은 사소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볼테르의 셜록홈즈의 모험담을 표절했다거나 모파상이 프루스트를 표절했다고 주장은 구체적인 작품들의 장면을 인용한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의 선후 관계를 전복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견해는 진지하고 구체적이다. 전통 표절과 구별되는 예상 표절은 쌍방 표절이라는 개념까지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단순히 시간의 선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작품에 대한 경외감은 아닐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당대의 흐름과 기법 혹은 연속적인 문학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독특함에 대한 상찬으로 볼 수는 없을까?

미래를 예측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춘 작가만이 ‘예상 표절’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다면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전통적인 의미의 표절이 비곤한 상상력과 부도덕함의 상징이라면 예상 표절은 오히려 창조적 상상력과 미래 지향적인 작가 정신에 대한 넉넉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은 아닐까 싶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예상 표절이라는 기발한 개념으로 문학사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미래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간의 복잡한 굴곡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려 깊은 문학 교육의 으뜸 역할 가운데 하나여야 할 것이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190쪽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표절’ 자체에 대한 낯선 해석이 아니라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고 있는 문학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에 있다. 입체적이고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면 문학사는 단순히 작가와 작품의 시대적 흐름이나 영향관계를 직선적인 흐름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신선한 방법에 의해 재구성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문학사는 단순한 문학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이 태어나고 독자에게 전달되고 소비되는 과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숨은 의도는 바로 이러한 전복적 책읽기 - 문학사에 입체적 구성에 대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한 권의 책이 말을 거는 행복한 소수가 될 이 특혜 받은 수신인들을 언급하면서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 그렇게 그는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과 더불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될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 피에르 바야르, <예상 표절>, 193쪽

스탕달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스탕달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높이 평가할 줄 아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은 바로 예상 표절에 대한 저자의 찬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한 작가가 다른 시대들’ 즉 미래의 어느 시대에 탄생할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간의 제약’을 벗어났다는 것은 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며 새로운 평가를 위한 기준이 될 법하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문학뿐만 아니라 인접 예술 분야나 철학과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피에르의 ‘예상 표절’은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기준과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재미있는 발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또 다시 어떤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움을 전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피에르 바야르는 계속해서 주목할 만한 작가가 되었다. 그의 책도 미래의 누군가를 ‘예상 표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10070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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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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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를 결정하는 건 스피드?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경에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리고 교각만 남은 장면을 TV에서 처음 봤을 때 황당함. 이듬해 1995년 6월 29일 붕괴된 삼풍 백화점의 처참함. 곧이어 1997년 IMF로 상징되는 한국 경제의 몰락.

우리는 혼란스런 근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치장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밥은 먹고 살자는 생존을 넘어서 경주마처럼 돈벌레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없다.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치열한 생존 경쟁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했으며 무엇보다도 삶의 목표와 철학적 성찰이 없었다. 거창한 이념이나 궁극적인 지향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내 아이들과 우리들의 미래는 이래야 한다는 공동체의 가치관이나 삶의 질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는 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상황에서 친일파가 그대로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되고 각종 이권을 선점하며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는 뼈아픈 현대사가 전개된다.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를 바로 잡으려니 이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지 60년이 넘었지만 이제는 그 정통성마저 부정하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악취를 풍기는 수구 보수 세력은 철지난 이념 논쟁으로 공공연하게 온 국민을 협박한다. 21세기에 벌어지는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어느 역사가의 말대로 우리는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제 발전의 속도와 차이가 아니라 발전의 방향과 질적인 면을 살펴야 할 때이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는 일이 중요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통해 이념의 허망감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우리들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 어렵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혀있는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축을 따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현상에 대한 원인을 찾고 결과를 예상하기도 한다. 역사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여기’의 삶은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일은 추억을 더듬는 감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찰이다.


숨가쁜 근대화의 파노라마, 그 빛과 그림자

황석영의 『강남몽』은 자본주의 상징인 백화점이 대한민국 강남 한복판에서 붕괴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다음 해에 백화점이 무너졌다. 천박한 자본주의와 부패 사슬로 얽힌 건설업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이 소설은 백화점에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유한 마담 박선녀의 삶을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제시대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하던 김진의 삶도 파란만장하다. 부동산과 강남 개발에 편승하여 투기 자본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심남수까지 보태지면 대한민국의 현재를 보여주는 대표적 개인이라고 할 만하다. 거기에 조직폭력의 보스로 등장하는 홍양태가 가세한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으며 더구나 우리의 삶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제 2의 이인국 박사 같은 ‘김진’은 신산스런 근현대사의 상처이자 아픔이다. 선악의 기준으로 김진과 박선녀, 심남수와 홍양태를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 논리로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견뎌온 세월에 대한 아픈 성찰의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옷은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한다. 하지만 역사를 어찌 그리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한 편의 소설이 시대에 물음을 던지고 과거의 시간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무거운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황석영의 『강남몽』은 최소한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강남’이라는 신화에 대한 근원을 파헤치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이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느냐의 문제는 소설의 기본이다. 인터넷 연재라는 새로운 생산과 수용방식으로 독자와 만났던 소설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제는 보편적인 방법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색다르게 바라볼 필요도 없지만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독자들의 흥미와 요구에 부흥하고 창작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의 반응을 살폈을 작가의 속내를 상상해 본다.

가볍고 흥미진진한 단막극처럼 각 장의 주인공을 내세운 점이나 요정과 지하경제, 폭력세계 등 자극적인 요소들의 사적 전개 과정을 그린 점 등은 독자들의 호기심에 충분히 부흥했다는 면에서 성공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근대화 과정에서 펼쳐진 발전의 이면이 아니라 소설적 재미를 위한 양념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 사회의 아픈 성장과정을 그린 대한민국의 성장소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공동체의 가치와 대한민국이 만들어가야 할 문화에 대한 반성은 지난 시간을 통한 지금 이 시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 소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를 이제는 트위터에서 종종 만난다. 얼마 전에 트위터를 시작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시대의 흐름을 쫓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과 틀을 벗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의식 때문이다. 함께 더불어 호흡하고 울고 웃는 작가야 말로 이 시대가 원하는 젊음이 아닌가. 나이를 무색케 하는 작가의 자유분방함과 열정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강남몽』을 이번 휴가에 챙겨야 할 배낭 속 필수품으로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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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야기의 이론과 해석
최시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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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삶을 보라.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면 매일매일 시점이 다른 시트콤을 보게 될 것이다. 태어나고 죽고 다치고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하거나 이별하며 잠 못 이루고 미친 듯 달리며 행복하게 미소짓고 맛있게 먹으며 슬퍼하고 기뻐하며 화내고 울부짖고 싸우거나 병들고 떠나거나 사라진다. 소설은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는 가장 방대하고 익숙한 갈래의 문학이다.

이야기는 역사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닿아있다. 서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만들고 듣고 전달한다. 사실이든 허구이든 가리지 않고 이야기가 가진 매력은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문학의 한 갈래 안에 포섭되어 있다. 스토리텔링은 단순히 어느 갈래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 수많은 분야에 응용되고 확대 재생산 된다. 하나의 창작물은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로 재탄생하며 매체가 갖는 특성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어쨌든 시대를 막론하고 이야기 즉 서사의 힘은 막강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 특히 ‘소설’을 읽는 힘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기 위해 불이 나게 외웠다가 까먹었던 소설의 이론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물이나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냉정한 판단 능력이 필요하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저 재미있게 스토리만 읽어낼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 그렇게 소설을 소비한다. 하지만 조금 더 꼼꼼하게 그리고 천천히 소설을 음미하는 방법은 없을까?

소설에 관한 이론서를 읽는다고 해서 소설이 더 재미있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밤에 정원을 산책하는 것보다 밝은 빛을 따라 길을 걷는 것이 더 많은 꽃과 나무와 풀들을 보게 된다. 인물과 갈등이 소설을 읽는 중심 축이다. 물론 인물들이 엮어내는 사건이 본격적인 소설의 흐름을 형성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작가가 창조한 인물의 성격과 핵심 갈등이 소설의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들이 배열되고 적절한 시공간 배경과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된다. 하나의 완벽한 구조물이 형성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소설은 각 부분과 요소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복잡하다고 해서 좋은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구성과 인물만으로도 인상적이고 깊은 감동을 주는 단편이 있는가 하면 수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사건 전개가 이루어지는 데도 지루한 소설이 있기 마련이다. 소설의 재미는 사건의 독특함이나 신선함에서 올 수도 있지만 인물의 성격, 배경에 대한 치밀한 묘사, 유려한 문체, 유기적이고 정교한 구성 등 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교향곡과도 같다. 작가의 능력은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완전하게 탄생시키는 창조자이거나 조정자로서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독자에게 소설을 읽어주는 서술자는 작가와 또 다른 소통자의 역할을 한다. 한 편의 소설이 탄생되고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어야 하는 독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소설들을 읽고 또 읽으며 울고 웃는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을 읽는 목적이 ‘재미’만을 위한 것일까?

소설을 읽는 과정은 그것을 쓰는 과정을 닮았는데, 실제로 독자는 눈으로 읽고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자처럼 종합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여, 마음속으로 자기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 최시한,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22쪽

모든 책읽기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소설은 소설 속의 허구적 인물의 삶을 관찰하며 나를 돌아보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그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쓰는 과정을 닮아있다는 소설 읽기의 과정에 관한 최시한의 지적은 적확해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을 돌아보고 내 삶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소설을 읽는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교훈과 성찰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 소설은 아니지만 적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설을 읽는 것은 어쩌면 나를 읽는 일이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읽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즐거움만을 위한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

이론을 통해 소설의 즐거움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효용가치가 있다. 소설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깊이 있게 분석해야 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자세하게 그리고 정밀하게 읽고 싶은 독자라면 어려움 없이 새로운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오발탄’, ‘역마’, ‘눈길’ 등 다양한 한국소설을 통해 소설의 기본 구조와 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이해하기 쉽다. 소설을 분석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 아닐지 모르지만 충분히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필요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보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길가의 풀꽃과 나무위의 새들을 살펴보듯이 길을 가면서도 충분히 경치를 즐기는 일은 가능하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건 너머의 소설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의 기본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새겨본다.

독자의 기본 자세. 첫째, 스스로 읽어야 한다. 둘째, 인간과 삶의 모습을 깊이 느끼고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셋째, 작품 자체의 질서와 논리에 충실하게 읽어야 한다. - 최시한, <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24쪽 
 

10062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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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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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작은 이야기다.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한다.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낯선 대상에 대한 호기심, 익숙한 것에 대한 엉뚱한 상상력을 갖추지 못하면 소설가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 작가는 무엇을 써야할까. 아니 이야기꾼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어떻게 써야할까. 배수아의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소설의 틀과 형식과 규범에 대한 상식을 거부한다. 일반 독자에게 낯선 이야기의 구조는 색다름이 아니라 어색함과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한 모양이다. 천상 소설가로 살아야하는 것이 작가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그 고통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단순한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의 구조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작가가 느끼는 개인적 고민일 수도 있고 문학의 갈래가 갖는 근본적인 형식적 고민일 수도 있겠다.

8편의 소설을 모아 놓은 평범한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서사의 기본 틀은 와해되어 있다. 최근 2010년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또다른 10년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소설의 가능성과 방향에 대한 모색인지 지루한 형식과 방법에 대한 도전인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비단 배수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또다른 작가들도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설이 당대의 시대 현실을 담아내야 하거나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지극히 당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더라도 최소한 ‘재미’를 포기할 독자는 많지 않다. 고급한 독자의 취향 - 이를테면 박상륭류의 매니아가 아니라면 쉽게 읽히지 않을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속된 갈래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이 이렇게 꿈과 환상에 관한 기억을 더듬고 주인공의 내면 풍경 묘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소설의 다양성 측면에서 반가운 일이다. 단순한 서사구조를 벗어나 과거의 기억과 추억의 갈피를 쫓고 의식의 흐름을 쫓아다니는 일은 작가와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다. 독자들은 소설을 다양하게 그리고 온몸으로 읽는다.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가는 것은 물론이고 문장과 여백, 행간의 의미와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를 따라간다. 소설가가 안내하는 생의 이면과 또 다른 현실 속에서 울고 웃으며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트를 타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소설의 내용과 구조를 따라 가는 일이 전통적인 소설읽기의 방법이라면 낯설고 생경한 방식으로 독자들의 내면 풍경을 유추하게 하는 일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배수아는 ‘양의 첫눈’을 비롯해서 ‘올빼미’, ‘북역’을 통해 기승전결 구조에 길들여진 소설의 독법을 불편하게 만든다. 잔잔하고 일상적인 독백 같기도 하고 사유의 흐름을 따라 걷는 산책같기도 한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오히려 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소설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소설에 대한 판단 기준에 독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를 구성하는 이 외부의 물과 그림이 낯설다고. 이 독특한 비현실성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것이 곧 내가 되었다고. - ‘무종’ 중에서, 187쪽

소설 속의 주인공이 ‘비현실성’ 속에서 살아간다면 소설의 외부로 나아갔다는 뜻인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소설을 소설이 아닌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의 사유 방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고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도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독자의 선택과 취향에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작가의 손을 떠난 문제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 꿈과 환상이 어떻게 부딪쳐 소리를 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모든 직업은 우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직업은 우울하며, 필연적인 우울을 유발한다. 은퇴와 죽음 말고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울. - ‘빠리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중에서, 195쪽

책을 읽으면서 그날의 기분과 느낌, 날씨와 건강상태에 따라 다른 문장을 뽑아낼 때가 있다.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먹고 사는 일이 신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직업적 만족과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우울’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죽음과 은퇴’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선언에 대해 반박의 여지가 없을 때의 낭패감!

내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 중에서 그 어떤 것도 내가 당신을 떠나는 이유를 직접 설명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밤이 염세적이다’ 중에서, 289쪽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렇게라도 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 모든 변명을 책 속에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뱉어내는 말과 언어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고찰!

사랑은 모순의 일인극이다. 민감하고 선명하게 각인되는 사랑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외국 낭송극이다. 사랑은 새로운 말과 언어를 만들고 그것들을 드러내려고 몸부림친다. - ‘밤이 염세적이다’ 중에서, 310쪽


1006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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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커 (양장) - 제3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배미주 지음 / 창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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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중엽, 유럽연합과 미국 등이 강대국에 대항해 출범한 동아시아연합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지구를 벗어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을 수 있을지 모색하기 시작했다. - P. 7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꿈꾸고 상상하고 의심하라.

  시험 전날, 학교에 불이 나거나 갑자기 휴교를 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황당한 상상을 하며 혼자 웃곤 한다. 유리벽 안에 갇힌 사차원의 세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코(일반인 코스프레)’에 가담한다. 평범하게 웃고 떠들고 보조를 맞추며 들키지 않고 엉뚱한 상상과 공상을 즐긴다. 정도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각자 현실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정말 현실세계만을 받아들이고 사는 걸까?

  영화 <매트릭스>를 보며 장자의 ‘나비’를 떠올린 관객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만큼이나 모호한 삶의 죽음의 경계. 초등학교 시절 밤에 잠들지 못하고 혼자서 고민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대로 잠이 들면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밤이 되면 또다시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한참이나 뒤척였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그때는 꽤나 심각했던 고민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현실과 꿈의 세계를 혼동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구운몽’의 성진이 처럼 지금 잠시 양소유의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는 없지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 꿈이 아닐까. 지구별로 잠시 여행을 온 우리들의 덧없는 삶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조금씩 그 이유가 다르다. 나는 무엇이 집착하고 있는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상, 황당한 공상이 얼마든지 즐겁게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소설이다. SF, 미래소설, 공상과학 등으로 명명되는 이런 종류의 서사를 즐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즐겼을 이야기가 우리 문학에서는 정통 소설의 주변에 머물며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무협지 혹은 환타지와 구별되는 영역을 구축하며 과학의 발전을 예견하기도 했고 미래의 삶을 추측하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는 분야지만 우리의 문학적 풍토에서는 설 자리가 많지 않았다.

  창비청소년문학상의 세 번째 소설로 선택된 배미주의 『싱커Syncher』는 『위저드 베이커리』와 유사하게 비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미래사회를 그린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문학적 상상력을 일궈낸 가상의 미래도시 ‘시안’은 지하세계에 건설된 유토피아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확대재생산하고 대부분 미래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 최근에 나온 『2058 제너시스』 - 이상사회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곳은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 디스토피아에 대한 경고에 불과하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바라볼 수 있지만 보다 나은 세상은 ‘자연’스럽지 않은 곳이다. 자연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지칠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초래할 미래는 굳이 소설이 아니어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완벽한 인공도시에서 ‘자연’에 접속(sync)한다. 게임을 테스트한다는 명목이지만 경험하지 못한 자연 즉, 동물의 감각을 가상현실에서 간접경험하게 되는 주인공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경험하며 세상을 낯설고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부정적 관점이 아니라 비판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바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믿고 보이는대로 판단한다. 이성적 판단력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를 스스로 갖추지 않는다면 편협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청소년들에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하층계급에 속한 미마가 신분상승을 위한 유일한 수단인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스마트약’을 찾는 사건의 출발은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현실에 대한 의심과 상상력이 결여된 무조건적 복종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각개전투로 우리는 결코 행복한 미래도 즐거운 인생도 얻을 수 없다. 이 소설은 220여페이지의 짧은 분량에 수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 복잡하다. 새롭고 흥미진진한 스토리도 아니고 충분히 예측 가능한 전개와 결론이 아니어서 아쉽다. 극적 반전이나 깜짝 놀랄만한 클라이맥스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치명적이고 단순한 평가를 받을 우려가 있어 아쉽다.

  현재든 미래든 소설은 결국 인간의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싱커’를 하게 된 후로 미마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깨달았다. 아니, 모든 생물이 서로에게 외계였다. 지식은 결코 '이해'가 아니었다. - P. 71

그것은 특별한 자든 평범한 자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 - 이해받고 함께하고 싶은 욕망때문이었을 것이다 - P.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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