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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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날,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강의 야경을 내다보다가 문득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이 너무 낯설어 뛰어 내리고 싶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세상은 핵폭발을 일으키듯 내가 감당할 수 없을만큼 혼란스럽고 거대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규칙과 질서는 사라졌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내가 생각하는 원칙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집에 돌아올 무렵 술이 깨기 시작하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소설을 뒤적이거나 비디오를 봤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나 <블루벨벳> 같은 영화였던 것 같기도 하고 <씨네마 천국>이나 <베를린 천사의 시>를 몇 번씩 다시 보기도 했던 것 같다. 조지 클루니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델리카트슨>만큼 인상적인 영화로 내 기억의 저편에 저장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낮과 다른 밤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뱀파이어나 좀비를 다룬 모든 영화나 소설들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아니라 현실 너머에 존재할 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과 희망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요지부동인 현실에 대한 권태와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 역사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서성거리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다. 죽음에 대한 모든 살아있는 인간의 영원한 갈증! 바로 그것이 드라큐와와 뱀파이어와 좀비와 강시와 구미호와 귀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김중혁의 장편소설 『좀비들』은 그야말로 좀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좀비 소설이다. 좀비란 살아있는 시체를 말한다. 서인도 제도 원주민의 미신과 부두교의 제사장들이 마약을 투여해 되살려낸 시체에서 유래한 단어라 한다.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과학으로 예술을 증명하려는 어리석음이나 예술과 과학을 경계짓는 따위의 논란은 이 소설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좀비를 통해 현실 아닌 현실을 창조해 낸다. 현실과 상상 세계를 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좀비들이다. 그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그 경계인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자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 이 좀비 소설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들이다. 좀비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조연이며 부수적 역할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판타지나 SF로 보기는 어려운 애매모호한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재의 새로움과 낯선 기법으로 한국 소설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겠지만 그 성격이 분명하지 않아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더 나오거나 김중혁의 관심이 좀 더 확장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소설의 얼개는 과거 회상 형식의 액자식 구성이다. 안테나 감식반 일을 하면서 만난 좀비 이야기를 시작하는 주인공은 유일한 혈육이자 정신적인 지지대였던 형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뚱보130과 수신감도가 0인 고리오마을에서 만난 홍혜정 그리고 그녀의 딸 홍이안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고리오 마을의 비밀이 밝혀지고 좀비들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소설은 얽힌 실타래가 조금씩 풀린다. 추리소설 기법으로 고립되고 낯선 세계에 좀비들을 등장시켜 현실 밖의 세계와 현실의 접목을 시도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삶과 죽음의 공존이 아니라 특정 공간에 만나는 좀비는 낯설고 이물스럽다. 공포와 전율의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민과 동경과도 거리가 멀다. 이 소설에서 좀비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다만 좀비를 통해 비정한 인간 존재에 대한 반성이 있을 뿐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삶에서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한 충격이다. 작가는 죽음을 포함한 모든 삶의 ‘충격’을 이렇게 말한다.

충격이란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아주 작은 충격이 커다란 폭발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엄청난 충격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수도 있는 거죠.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발명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개발한 겁니다. - P. 12

인간이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좀비가 되는 것도 살아있는 인간들의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작가는 좀비와 대면한다는 것을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라고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좀비를 통해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살아있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당하는 좀비만 등장할 뿐이다.

사람들은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은 알아내지 못하고,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에 답해 보자. 단순한 호기심은 본능에 가깝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과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구별이나 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홍혜정의 과거나 고리오마을에 대해 주인공이나 뚱보130은 알 필요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소설적 진실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삶의 욕망을 넘어 선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숨김과 감춤의 미학이 아니라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진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진실한가, 아니 인간이 아닌 좀비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까.

"진실이 아무런 가치도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진실은 그저 사실의 한 종류일 뿐이에요."


100924-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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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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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해 봄 불 타기 전 낙산사 뒷방에 얼마쯤 머물자고 청했을 때 스님 한 분, 밥값으로 종두일을 권했으나 그만 못하고 말았는데 이제 와 후회한다
- ‘어느해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을 권해 받았으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중에서

*종두 : 절에서 종 치는 일을 하는 사람

말년에 시골에 가 텃밭이나 일구고 낚시나 하며 자연을 벗삼아 여유있게 살고 싶은 게 꿈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이없어 하는 농부나 어부의 심사를 헤아려 보자. 사는 일이 덧없고 한 점 구름처럼 사라져버리는 시간 앞에서 인간의 육신과 현실의 삶은 그저 덧없기만 하다. 허무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욕망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원하는가.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등에서 보여주었던 장석남 시인의 관심은 『뺨에 서쪽을 빛내다』에서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랑’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말은 반어이거나 역설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미래가 불안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사랑’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모태신앙처럼 남들보다 ‘사랑’을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뺨의 도둑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난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리 되어 그녀의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뺨‘의’의 서쪽을 빛내는 것도 아니고 뺨‘에’ 서쪽을 빛낸다는 제목을 한참 들여다보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제목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전작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해가 저무는 시간을 방향을 나타내는 서쪽을 뺨에 빛낸다는 말은 소멸에 대한 아쉬움, 이별 직전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여전히 부끄럽고 두근거리는 그녀 혹은 그의 뺨을 생각해 보자. 발그스름하게 빛나던 그 고운빛을 떠올려 보자. 그것이 바로 뺨이 가장 빛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그 사랑의 순간을 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묵집에서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집에서도 사랑을 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고 양념간장부터 찾는 것이 우리들의 눈이다. 서글프지는 않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느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사랑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위태로운지 그것만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시인의 시를 통해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 조차 어느 사랑의 눈빛을 빌려오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시 읽기의 즐거움은 아닐는지.

찬 바람이 불고 어둠이 내리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따뜻하게 불켜진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가을은 오자마자 뒷모습을 보일 터이고 어둠은 깊어만 갈 것이다. 뺨에 서쪽을 빛내던 사람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고 모두가 혼자 남겨지는 시간을 감당해야 할 시간이 온다. 그것을 ‘석류 익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석류 익는 시간

당신은 내게 비단을 주니

그걸 눈에 두르고
더듬어서 내 맘속 둥그런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보네

항아리에 늘 허공이나 담아두는 당신의 뜻을 모르니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보면 알려나?

하늘이 온통 노을로 꽃핀
이 부러진 듯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

가슴 속에 ‘허공’을 담고 싶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할지 모른다. 간절함 만큼 어리석은 감정이 또 있을까. 그것은 비움과 채움의 문제와 조금 다르지만 결국 붉은 비단이나 두 눈에 곱게 두르고 들어가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시디신 석류 익는 시간’은 견뎌내야 하는 생의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모든 순간일 수도 있다.

죄의식이나 부끄러움보다 사랑과 연민에 대해 마음의 갈피들을 짚어내는 시인의 목소리가 큰 울림을 갖는 것은 장석남의 특징이며 독자들에게 가장 적확하게 시를 보여줄 수 있는 그의 능력이다. 잘 할 수는 것을 계속 잘 하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 다른 생각, 다른 대상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의 변화가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겠다. 그때 독자들은 또 다른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뿐.

지나버린 ‘처서’에 나는 무엇을 꺼내 말렸을까?

처서

마른 빨래는 방안으로 던지고
덜 마른 빨래들을 처마 아래 건다

나뭇잎이 쩡쩡 소리내며 물든다

전기 검침원의 오토바이 소리 오솔길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나는 바지춤이 풀린 줄도 모르고 그를 배웅했다

담장 밖에 아무렇게나 몸 버린 구절초는 구절초
빈 몸의 옥수숫대 끝에서 새가 울어
건너 산이 건너온다

이해가 가지 않던 일들 몇 내놓기 좋다
덜 마른 빨래를 한번 더 손에 쥐어본다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음지에 말리기도 했다는 처서가 이쯤이어야지 싶다. 짱짱한 햇빛에 내다 말리지 못하고 그늘에서 천천히 말려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들 마음 속에도.

빳빳하게 마른 빨래처럼 건조하고 상쾌하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매일매일 우울하고 습한 일들이 벌어지는 일상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젖은 빨래를 처마 밑에 널 듯 힘들고 괴로운 일들은 조금씩 내어 말려야 한다. 시인은 천업인 ‘시’를 다 지운다는 말로 이 시집을 닫는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자유이다. 있는 것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경계를 지우고 시의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싶다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비어있음 즉 ‘공복을 즐기’고 싶다고 한 것은 아닐까.

비움으로 차오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만 소중한 경험인지 깨닫는데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시를 다 지우다

새벽빛도
홑겹만 남고

시인으로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벽뿐인 자리에 떨고 앉아
공복을 즐기다

언제 스민 건가?
먹물 스민 손톱을 보며
그믐달처럼 웃는다

공복 창자의 이랑마다
무슨 꽃씨를 뿌릴까
무슨 망아지를 풀어볼까

시의 나라의 국경을 부수고
시의 마을의 약도를 지우고
시를 지우고
시의 자리에 앉아
어라,
아침이 와서
함께 덜덜 떨다



100922-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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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0-09-2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집에서 를 읽으면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하던 그 어느 시절의 사랑의 눈빛이 아른거리며 떠오르곤 하더군요.

sceptic 2010-09-28 23:21   좋아요 0 | URL
이제 호젓하신가요?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크레이그 실비 지음, 문세원 옮김 / 양철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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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슈퍼맨과 배트맨 중에서 누가 더 용감할까?

엉뚱한 상상이지만 현실은 영화나 소설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하루하루 시간을 견뎌내는 것 같은 삶이 있는 반면 즐겁고 유쾌하게 창조적으로 이끌어가는 삶이 있다.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새로움을 찾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우울하고 만사가 귀찮기도 하며 때로는 하늘을 날 듯 기쁘고 행복하기도 하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천당과 지옥을 오고가는 예측 불가능한 삶의 비밀을 알고 싶지는 않다. 그저 이렇게 고민하고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소설은 인간 삶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서사의 힘은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개연성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한국 소설이 가진 정서와 세계관은 공감을 극대화할 수 있으나 새로움과 낯선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확장된다고 해도 독자들은 조금 더 새로운 이야기에 포섭되고 싶어 한다. 그런 측면에서 세계 문학은 세계를 확장하고 인간의 이해를 넓히며 우리 삶의 범위와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크레이그 실비는 우리가 접하기 힘든 오스트레일리아 작가다. 지구의 저쪽 반대편에 자리잡은 나라의 작가라는 사실이 먼저 흥미를 끈다.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랍과 아프리카, 남미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유럽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교류가 적은 지역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는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앞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자. 슈퍼맨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별다른 용기가 필요 없다.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슈퍼맨에게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트맨은 연약하고 평범한 보통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공포를 이겨낼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배트맨이 슈퍼맨보다 용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엉뚱한 질문과 나름대로 일리 있는 논쟁을 통해 이 소설의 서술자인 찰리 벅틴은 베트남에서 이민 온 이방인 제프리 루와 코리건의 토착민 사이를 잇는다. 소설의 전면에 나타나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재스퍼 존스는 원주민과의 혼혈이다. 두 이방인은 전통적인 백인 거주 지역의 이방인으로 분명한 색깔을 가지고 멸시와 천대를 이겨낸다.

1960년대 베트남전이 벌어지던 무렵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은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거나 인종차별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개성이 뚜렷한 세 소년을 중심으로 코리건 마을에서 벌어진 실종사건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추리 소설의 형태로 소년과 소녀들의 성장과정을 재치있고 유쾌한 문장으로 풀어낸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로라 위셔트의 실종으로 온 마을은 공포에 휩싸인다. 이 마을의 또 한명의 이방인 잭 라이어넬은 재스퍼 존스와 함께 세상의 편견과 루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는 인물이다.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술자인 찰리를 제외하고는 세상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힘없고 나약한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차이와 차별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비극은 나와 너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피부색과 종교, 지식과 재산의 유무에 따라 사람은 다르게 취급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한 편견과 배태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머리와 가슴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 쉽게 드러난다.

백인의 마을에서 벌어진 백인소녀 실종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500여페이지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히는 것은 복잡하고 정교한 소설적 장치 때문이 아니라 1인칭 서술자인 찰리의 솔직하고 실감나는 심리적 갈등과 모든 사람이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상황 설정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장정일도 지적했듯이 기존의 영미 문학과의 차별성이다. 무수히 많은 영미 소설 속 주인공을 차용하고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에 바치는 오마주라는 띠지를 둘렀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과 개성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우둔한 독자인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인간의 위선과 증오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한 점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10대 소년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왜 재스퍼 존스가 문제인지 확인해 볼 일이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 상황을 얼마나 넓게 둘러볼 줄 아느냐가 어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거야 -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237쪽


100908-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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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시인선 375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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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시인의 말’로 시작하는 『상처적 체질』은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제격이겠다. 연시(戀詩)가 보여주는 마음의 결을 따라 산책을 나가고 싶은 저녁에 어울린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시인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생의 고통과 신산스런 삶의 틈새를 보여준다.

날선 감수성을 지닌 시인의 언어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심장을 겨냥한다. 생각의 편린들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때로는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 결국 가장 큰 행복과 충만한 사랑이 지독한 슬픔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홀로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아득함 그리고 절대 고독 속에서 대면하는 나. 시인 류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마치 ‘독작’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랑의 상처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시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세계는 찌질한 감상주의도 아니고 우울한 슬픔도 아니다. 그의 시들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그리움’을 부르고 비껴가고 싶은 생의 감각들을 일깨운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되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살아 숨 쉬듯, 번개처럼 찾아온 사랑도 언젠가 끝이 나고 또 다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 사랑은 단순히 이성에 대한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얼마나 쉽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시인은 누구보다도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한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또 다시 취한 시간들이 다가온다. 어둠이 내린 저녁, 희미한 옛사랑이 그리울 테고 그리움 한 조각 부치고 싶은 것이다.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거나 상처를 받는 체질이거나.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시집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상처받는 체질이라면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지상에 발을 떼지 않는 직립 보행하는 인간의 꿈은 새가 아닐까. 자유로움 때문에 그리고 생의 무게를 벗어나고 싶은 열망은 저녁 새 떼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나의 일생이 자유로웠노라고, 아니 자유롭고 싶었노라고.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시인은 말한다. 가거라,



지혜로운 새는 세상에 와서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는다
바람보다 먼 울음을 울지 않는다

지상의 무게를 향해 내려앉는
저녁 새 떼들 따라 숲이 저물 때
아주 저물지 못하는 마음 한 자리 병이 깊어서

겁도 없이 몸도 없이
잠깐 스친 발자국 위에 바람 지난다
가거라,


절망의 문턱에서 일어나 살아보자고 몸부림치는 모든, 지친 그대에게.
다, 지나간다. 소소한 바람소리처럼 그렇게 잠깐 살다 가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과 희망이 깃들기를. 시인이 작사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김광석의 노래로 듣는 것은 모르겠지만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반성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보아라, 하늘조차 제가 낳은 것들을 위해
늙은 목숨 끊지 못하고 고달픈 생애를 이어간다
하늘에게 배우자
하늘이라고 왜 아프고 서러운 일 없겠느냐
어찌 절망의 문턱이 없겠느냐
그래도 끝까지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몸을 일으키는
저 굳센 하늘 아래 별이 살고 사람이 산다


100823-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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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와 대화하다
김규중 지음 / 사계절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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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빠쁜 때 웬 설사 - 김용택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바작 : ‘발채’의 방언. 지게에 얹어서 짐을 싣는 소쿠리 모양의 물건. 싸리나 대오리로 둥글넓적하게 조개 모양으로 엮어서 접었다 폈다 하게 되어 있다.

‘시가 어렵다’와 ‘시를 읽기 싫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시에 대한 첫 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쉽고 재밌는 시, 짧지만 감동적인 시를 읽고 마음으로 느껴 본 아이라면 시를 멀리 할 이유가 없다. 국어 시간에 시는 해체된다. 뼈와 살리 분리되고 각종 장기는 피를 흘리며 파헤쳐진다. 기막힌 솜씨로 해부된 시체처럼 처참한 시를 누가 좋아할 것인가.

평생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쳐온 제주도 시인 김규중 선생님께서 『청소년, 시와 대화하다』는 이런 답답증을 조금 풀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쏟아내고 선생님들은 선생님대로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시를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한다. 이 고민들이 모여 국어교육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하지만 시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넘기 어려운 산처럼 보인다.

장편 2 - 김종삼

조선 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 상 밥집 문턱엔
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장편掌篇 : 극히 짧은 작품. 보통 소설에서 단편 소설보다 작은 분량의 작품을 말함.
*균일 상 : 가격이 균일한 식사.

김종삼의 1977년 작품이다. 시대배경을 생각하면 30여년이 흐른 뒤 쓴 시이다. 시인의 마음속에 흐뭇함과 미안함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발효’ 과정을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의 가난과 소녀의 순수한 마음 그리고 눈이 먼 부부의 모습이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자화상에 가깝다. 시는 그렇게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들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마음의 결을 흔들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시가 지닌 1차적 특징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울 것은 그 마음을 언어로 담아내는 방법과 기술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시의 숲을 거니는 것이다.

저자는 문과녀 ‘은유’와 이과남 ‘명석’을 내세워 대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두 학생의 차이와 특징은 시를 읽는 아이들의 특징을 닮았다. 물론 영특하게 시를 잘 이해한다는 점만 빼면. 중간중간 ‘김샘’이 끼어들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거나 어려운 부분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다소 형식적이고 딱딱한 느낌이 들고 두 아이들의 대화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금 작위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아이들에게 시는 어렵고 딱딱한 수능 언어영역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말과 글이 지닌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시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고 친근하게 접할 수 있어야 평생 시를 읽게 된다. 넉넉하고 따뜻한 감수성을 잃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서 시 교육이 아니라 우리의 삶,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는 시 읽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60여 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수준별로 단계를 구분했다. 시의 난이도와 내용에 따라 구분했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정확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지만 시는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고 조금 어렵게 느끼는 시는 시를 읽는 연습과 훈련도 필요하다. 마음으로 읽은 시는 오래 기억되고 영혼에 새겨진 시는 잊혀지지 않는다.

느낌 - 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에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한 편의 시가 주는 느낌이나 한 사람이 주는 느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언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정서적 충격, 체험적 사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바가 무언인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높은 점수를 받고 싶은 수험생이든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소녀이든 시는 항상 우리 곁에서 명징한 언어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온몸으로 전해준다. 오감을 통해, 때로는 지적 충격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우쳐준다. 지독하게 주관적인 방법으로.

시대를 거슬러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우리는 오래 기억한다. 한 시대를 유행처럼 풍미했던 작품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기억할 수 있는 시가 그립다. 아이들은 어떤 감수성과 기억력으로 지금 이 시대를 아니,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추억의 한때를 기억하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 이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추운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겠지만.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밖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하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10072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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