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월간 <어린이와 문학> 겨울대토론회에 다녀와서는 1박 2일을 (작정했던 대로) 집에서 뒹굴뒹굴했다. 이따금 TV를 틀었는데 우연히도 반가운 두 아저씨를 만났다. 먼저 어젯밤 케이블 TV에서 만난 김창완 아저씨(꺅!). 산울림 1집부터 이번 김창완밴드 앨범에 이르기까지 자신은 항상 '10대들이 들어주었으면' 하는 음악을 만든다는 말에 뭉클하기까지 했다. 누가 그랬더라? 또래의 다른 가수들이 양수리 카페촌으로 무대를 옮기던 시절에 그는 홍대앞을 선택했다고. 아저씨 로커를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 음악은 참 행복하다. 감히 산울림 전집은 사지 못하고 대신 '기념비적인 앨범'(신해철 왈)이라는 김창완밴드 앨범을 사서 열심히 듣는 나는 김창완 아저씨가 출연한 토크쇼가 아주 즐거웠다. 또 한 분은 그동안 특별히 좋아한 적은 없는 코미디언 최양락 아저씨였다. 방송을 재개하기로 맘먹으셨다는데 모 프로그램의 재방송에서 보여준 입담에 오래간만에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막 웃었다. 근데 좀 전에 다른 방송에서 하신 말씀이 참 인상적이다. (그것도 장르라고) '막말개그'를 해대는 김구라에게 가만히 꾸짖는 말씀, '잘 하고 있긴 하지만, 인신공격 개그를 하면 모두가 웃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진짜 개그는 놀림을 받는 상대도 기꺼이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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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갖고 싶니? / 앤서니 브라운, 웅진주니어 2008
우리나라에는 얼마 전에 출간된 그림책인데, 판권을 보니 1980년 작이다. 나는 앤서니 브라운의 어떤 그림책들은 좋아하지만, 대체로는 어린이가 이해하기에 너무 어렵지 않은가 하는 걱정을 하곤 했다. (<터널> 같은 그림책은 사실 무섭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이 작가의 진심을 만난 것 같아 정말 반가웠다. 제레미는 자전거고 축구공이고 새로 생긴 것을 자랑하기 일쑤고 샘은 늘 별 말이 없다. 마지막에 제레미가 동물원에 갈 거라는 자랑을 늘어놓을 때 샘은 '듣고 있지' 않았다. 마지막 그림은 공원의 작은 숲을 바라보는 샘의 뒷모습만 보여준다. 그리고 제레미가 왜 '듣고 있지' 않은지 비밀을 밝혀준다. 책장을 덮고도 오래 가슴이 따뜻하다.
길모퉁이 행운돼지 / 김종렬 글 심숙경 그림, 다림 2006
어느날 마을에 찾아온 '행운돼지' 상점. 다림질 한 번에 다시는 옷에 구김이 가지 않게 하는 신기한 다리미와 무엇이든 넣으면 두 개를 만들어주는 항아리 등 신기한 물건을 공짜로 주는 정체불명의 상점이다. 온 도시가 돼지로 가득찰 때까지 이 수상한 가게의 장사는 계속된다. 인구에 회자되어온(!) 책이라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에 놀라면서도 이야기가 끝날 때가지 (어느 쪽으로든) 속이 시원해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탐욕'에 대한 경계는 이해하겠는데 작가는 어떤 답을 갖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김종렬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겠다.
멀쩡한 이유정 / 유은실 글 변영미 그림, 푸른숲 2008
'멀쩡해 보이려고 무진장 애쓰는 어린이' 들을 위해 썼다는 작가의 말이 통할 것 같다. 멀쩡해 보이는 4학년이면서도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을 늘 헤매는 아이, 할아버지에 대해 써가는 숙제를 번듯하게 해가고 싶은데 술 먹고 골목에서 노래 부르는 것 말고는 별 쓸 말이 없는 할아버지 때문에 난감한 아이, 아무리 기도해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 아빠 문제를 비롯해 세상에 불공평한 게 너무 많아 속상한 아이 등 다섯 아이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실 관계와 맞지 않아 보이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그 의미만은 잘 전달 된다. 유은실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하면서도 이걸 아동문학으로 봐야 될지 소설로 봐야 될지 몰라 헷갈리고 한편 서운해했는데, 이번 책을 보니 작가가 '동화작가'로서 입장을 정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비밀 시험지 / 안점옥 글 최정인 그림, 사계절 2008
친구와의 투닥거림, 한 부모 가정, 할머니와의 우정, 학원의 '친구 데려오기 운동' 등 각 단편의 소재는 비교적 일반적이었는데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솜씨가 (독자로서)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많은 동화작가들이 이야기는 늘어놓고 마무리는 성급히 짓는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 작가는 (그것에 공감하든 아니든) 자기 답을 갖고 있다 싶었다. 그리고 그 답을 보여주는 방식이 참 좋았다. 특히 뒤늦게 한글을 깨친 할머지가 손자에게 남긴 쪽지 '동수야 학원 가는 길에 할머니 교실로 와라. 용돈 탔다.'(비밀 시험지)는 빙긋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원래 공부 못해 / 은이정 글 정소영 그림, 창비 2008
원래 노래를 못한다, 원래 그림을 못 그린다, 원래 요리를 못한다..처럼 원래 공부를 못하는 아이도 있을 수 있다. 선생님이나 부모들에게는 경악할 일인데 사실, 사실이다.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아이들을 지나치게 격려하고 몰아붙이는 새내기 선생님과, 할아버지를 도와 염소를 돌보는 일은 잘 할 수 있지만 공부는 못하는 찬이, 그리고 찬이의 친구로 새로 온 담임의 일거수일투족이 못 마땅한 진경이가 밀고 당기고 지치고 힘 내고 또 지치고 힘 내면서 소통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진경이 왈, "공부를 못하는 이진경을 상상하면 끔찍하지만 찬이는 아니다. 농장에 있는 찬이를 보면 공부를 못한다는 게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못해도 각자 잘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는 주제는 단선적이고 진부해 보이지만, 그 주제를 위해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이 아주 좋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진경이와 순진하고 선한 찬이, 철이 덜 들어서 그렇지 책 속 누구보다 순진한 선생님의 삼파전(!)이 설득력 있다. 끝까지 읽고 보면 셋 모두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일제고사로 어린이들을 한 줄 세우기 하려는 음흉한 정부 관계자들은 읽어봐야 이해 못할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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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은 어린이책을 정리하고 보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도 감동의 수위도 작가에 대한 신뢰도 각자 층위가 다르다 싶다. 전에는 어떤 종류의 책이 좋다고 나의 기준이 있었는데 점점 잘 모르겠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된다거나 동심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거나 하는 잘못된 주제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책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판단은 어린이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책은 별로라고 여길지, 어른들이 너무 나서서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 같다. 세상엔 다양한 주제를 다룬 다양한 수준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남들 다 아는 얘긴데 이제야 어렴풋이 이런 생각이 드니 아아 갈 길이 멀구나, 네꼬 씨. 그런데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연한 말이지만) 책을 쓰는 작가들은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우리 아동문학 작가들에 대해 내가 갖는 불만이랄까 그런 게 하나 있다면, 선뜻 믿고 좋아할 만한 중견작가의 층이 너무 얇다는 거다. 거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견'이면서도 새로운 스타일의 록을 연구하는 김창완 아저씨나, 잘 나가는 개그맨 후배에게 쓴소리도 할 수 있는 최양락 아저씨같은 작가들이 우리 아동문학계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비유가 좀 이상한가? 아무튼.) 물론 문학계와 연예계는 다르다. 음악가나 코미디언에게 트랜드를 읽어내는 감각이 필요하다면, 작가들에게는 시대에 촉수를 갖다 대고 호흡하고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와 문학> 겨울대토론회의 마지막(토론 내용은 무척 실망스러웠지만)에 들은 이야기는 아주 아주 반갑고 가슴 뛰는 소식이었다. 대운하 건설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성명과 광고, 행사를 진행했던 <어린이와 문학> 관계자들(주로 작가들)이 일제고사 파문을 보고 있노라니 더는 못 참겠는 모양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작가 모임"을 준비한단다. 줄여서 "더 작가"란다. (아휴 이 귀여운 감각들!) '해임교사 집회에 가서 촛불이라도 하나 들고 있자는 심정'으로 모여 앞으로 할 일을 고민해보겠다는, 사실 뭘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무얼 고민하고 있는지 서로 얘기라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모임을 준비하는 거란다. 다같이 모여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목소리를 높이는 건 질색이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 진실을 말하기 위해 수많은 단서들을 살피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작가라는 이름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족쇄"라는 동화작가 이현의 발제와 "뭐 지금은 우리가 뭘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일단 모여서 얘기라도 해보자는 거니까 관심 있는 작가분들은 오셔서 같이 뜻을 모았으면 좋겠어요"라는 겸손하고도 단호한 동화작가 임정자의 모임 홍보 코멘트가 나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역시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으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