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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목에 차곡차곡 쌓인 주름, 허리를 펴고 서면 오히려 살짝 틀어지는 자세, 이따금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참, 영어지), 기침의 깊이, 걸음의 속도와 폭은 극 안팎의 그의 나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여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다. 누구에게 허리는커녕 목도 굽혀본 적 없을 할아버지. 늘 미간에 힘을 주고 있어서 그의 눈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없지만, 그가 지금 누구를 노려보고 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가 손가락으로 총질 시늉을 하면 손가락에서 연기라도 나는 것만 같다.
그는 아내의 장례식장에 배꼽티를 입고 나타난 손녀를 보면서 나직이 그르렁거리고, 뭐 건질 것 없나 주위를 어슬렁대는 자식들에게 침을 뱉으며, 그 자신이 폴란드에서 온 미국인이면서도 동네를 채워가는 동양계 이웃들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는 지난날 한국전에서 용감히 싸워 훈장까지 받았고, 늙을 때까지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몸으로 일했으며 반세기에 걸쳐 용도와 크기가 모두 다른 공구를 모았고, 자신이 조립한 72년형 '그랜 토리노'를 보물로 여긴다.
집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세상을 개탄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젊은 깡패들에게 "너희가 절대로 마주쳐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라고 을러대고, 갱 한 명 정도는 완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은 근육에 힘이 있다. 제일 친한 친구와는 만나서 헤어지는 순간까지 각자 보유하고 있는 욕의 마지막 하나까지 꺼내 보이는 것으로 우정을 확인한다. 그는 "여자와 차와 직업이 없다는 사실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아야 한다"고 믿으며 그 인생의 진리를 어린 남자에게 전수한다. 그렇다. 그는 늙은 마초였다.
그는 제 몸과 가족을 건사하는 마초다. 동양인이라면 질색하고 경찰을 무시하며 신을 믿지 않고 이웃을 성가셔하지만, 결정적으로 제 힘으로 자신과 가족, 필요하다면 이웃을 지킨다. 여성주의라면 콧방귀도 아까워하겠지만 자기 여자를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그런 종류의 남자일 것이다. 그는 잠깐 기대 선 옆집 탈수기가 균형을 잡지 못해 흔들리자 그 자리에서 고쳐놓고 수도와 선풍기를 손봐준다. 이래서 집엔 남자가 필요한 거라는 듯이.
그리고 그는 반성과 괴로움을 아는 마초다. 참전의 기억은 그의 자존심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지만 사람을 죽인 일,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의지로" 사람을 죽인 일을 괴로워한다. 그가 타오에게 "지금 너처럼 겁에 질린 소년병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받은 훈장"에 대해 고백할 때 그는 진정 고독한 마초였다.
지금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일본차를 세일즈하는 아들녀석도, 할아버지의 소파를 제 기숙사에 갖다 놓으려는 손녀딸도 아니다.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고 했던 옆집의 동양 아이 타오(누나가 시키는 대로 설거지나 하고 있으니 저래서 남자 구실하겠냐고 집안의 걱정을 듣던)와 그의 누나 수가 지금은 그의 가족이다. 그 아이들이 그에게 찾아왔고, 그에게 사람들과 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그가 '타오'를 돌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타오가 착했기 때문이다. 미국적 가치를 실현할 준비가 된 예비 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난처한 이웃집 아주머니를 스스럼없이 도와준 소년이기 때문이다. 그는 타오로 하여금 맞은편 낡은 집을 고치게 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알게 한다. 그는 지시로써 아이가 일을 '익히게' 한다. (아이와 함께 일을 한다거나 일하는 아이에게 격려를 주거나 하지 않는다!) 아이가 대학에 갈 자금을 마련하도록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면접을 준비시키며(앞에서 말한 '욕' 전수), 첫 출근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를 준비해준다. 그리고 아이가 데이트를 나갈 때, 그랜 토리노를 빌려주겠노라 한다.
타오가 자라는 걸 깊은 눈으로 지켜봐주고, 이 남매를 위협하는 갱단을 (아이들 모르게) 손봐주고 마당에서 함께 고기를 구워먹으면서 그에게 평온한 날들이 계속되는가 했으나 타오가 갱단에게 린치를 당하고 수가 끔찍한 폭행과 강간을 당하면서 그는 일생일대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갱단이 있는 한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복수. '놈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의 복수.
언젠가 김어준은 "인문학적으로 각성한 마초, 그거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말은 마치 "우주의 어느 별에도 알고 보니 물이 있어서 생명체가 살더라"는 말처럼 그럴 듯하면서 아득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별에 가는 방법이 발표된 것처럼 희망이 구체화되었다. 즉, 다음과 같은 것들이 사실은 가능한 것이었다: 영리하고 세련된 희생. 인종차별주의자의 휴머니즘. 보수주의를 담아내는 총명한 노(老)감독. 섹시한 노(老)배우. 「그랜 토리노」는 이런 어불성설로 만들어진 영화다. 어불성설로 만들어진, 최고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