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걸 - 에드거 앨런 포 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9
T. 제퍼슨 파커 지음, 나선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어제 부산에 갔더랬다. 주로 여행을 갈 때 가져가는 책은 추리소설류로, 이번엔 읽고 있던 '망량의 상자'를 들고 갔다. 부산까지 KTX로 3시간. 사실 차만 타면 그냥 자버리는 나로서도 그 불편한 의자 위에서 3시간을 자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상권만 들고 갔는데, 가는 길에 다 읽어버리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해버렸다. 저녁에 다시 부산역으로 돌아왔을 때, 너무나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3시간동안 차 안에 갇혀 있는데 읽을 수 있는 게 없다니. 나는 역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서점을 찾는 하이에나 비연. 생각지도 않은 자리에 서점이 있었고 그 안에서 난 저녁도 쫄쫄 굶은 채 책을 고른다. 괴상한 행복이 엄습하고, 결국 내 손에는 처음에 마음 먹었던 얇고 가벼운 책 대신 영림카디널에서 나온 두툼하기 짝이 없는 책이 쥐어져 있다. 짐도 많은데 여간 낭패가 아니다 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어쩌면 좋은 책과 우연히 만났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슬쩍 스쳐간다.

이 책, '캘리포니아 걸'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목 자체가 은근히 도발적이고 작가(T.제퍼슨 파커)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고른 것이라 처음부터 흥미진진했다. 내용은 폰 가족과 베커 가족의 아들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때는 1950년대 초반. 그 때부터 그 두 가족의 긴긴 인연은 수많은 세월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하며 이어지게 된다. 폰 가족에게 있는 두 딸, 리조트와 자넬은 그 당시 10살이 한참 못되는 아이들이었고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겪어내게 된다. 특히 자넬 폰은, 리조트처럼 가족을 등지고 떠나지 못한 댓가로 그 동네에 남아 마약과 섹스, 술에 절어든 생활을 하게 되지만, 특유의 낙천주의적 감성과 빼어난 미모로 다른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는 아가씨로 자라게 된다. 베커 가족의 아들들은 각각 목사, 형사, 기자로 크고 10년도 넘게 자넬 폰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그들이 청춘을 보내게 되는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 히피족의 등장, 마약과 무절제한 생활에 대한 청소년들의 탐닉, 케네디의 암살,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 등등으로 인해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인생이 주는 많은 회한들 속에 살아가던 중, 자넬 폰이 엽기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3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에 놓인 그녀의 목. 베커가의 아들들은 불쌍한 인생을 지내야 했던 그녀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하여 이 사건을 파헤치고 수많은 비밀과 다양한 사람들의 오고감이 지속된 끝에 범인을 검거하게 된다...그리고 36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그 사건을 마주하게 되는 그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세월이라는 것, 늙어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참을 생각하게 된다. 그 무게에 눌려 나도 3월을 마지막으로 추리소설 리뷰를 쓴 이후 근 2달여만에 다시 리뷰를 쓸 마음이 생겼는 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사건과 한 여자의 일생을 접하는 동안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은 제 마음대로 돌아가고 그 가운데 상처입은 영혼들의 울부짖음은 모두의 귓가에 울려퍼진다.

알아내고자 하는 자들의 눈과 귀, 그리고 손으로부터 흘러나가는 진실들은, 오히려 가려져 있을 때 견디기 쉬웠던 것들이었다. 부모와 형제, 아내, 아이들 그리고 가끔씩 스쳐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그리고 노인으로 바뀌어가는 나의 모습을 중심으로 흐려졌다 명확해졌다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벌이는 숱한 일들에 의해 희생되는 많은 것들의 명멸이 세월의 더께 위에 하나씩 내려앉는다.

여기에는 천재 탐정이나 완벽한 형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와 너무나 닮은, 내 주위 사람들을 뚜렷이 기억하게 하는 소도시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 때문에 고민하고 일 때문에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가끔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을 기만하기도 하지만, 또한 늘 진실성을 마음에 담고 정의를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캐릭터들이, 그래서 내 속에 살아 숨쉬는 듯 느껴지는가 보다.

그냥 추리하고 범인을 찾는 과정을 즐기기 위해 추리소설 혹은 그 비슷한 류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함께 나이들어가며 늙어가며 인생에 대해 회한을 느끼고 죽어간 여자를 둘러싼 가지각색의 현실들에 분노하기 보다는 착잡함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볼 만하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뛰어난 소설적 감성과 스토리 구성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덕분에 한번도 본 적없는 그 장면, '캘리포니아 걸'이라고 선명한 노란색으로 강렬히 그려진, 통통한 네이블 오렌지를 내밀며 미소짓고 있는 새까만 머리의 미인과 그 뒤에 줄지어선 오렌지 나무가 인상적인 선블레스트 오렌지 상자의 라벨 그림이 남색 하늘에 날아다니는 그 광경이 마치 본 것처럼 내 눈앞에 생생히 떠올려진다. 사진기로 한번 찰칵 누른 듯한 그 영상은 닉에게나 앤디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게도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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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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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 읽고 나서의 기분. 설명하기 힘들다. 분명 잘된 추리소설(이걸 추리소설이라는 범주 안에 넣는다면 말이다)이긴 한데 뭐랄까. 그냥 복잡하고 난해하고 그러면서도 뒷끝이 개운치 않은 맛이다. 장장 633페이지(아무리 '손안의 책'이라고는 하지만 말이다)나 되는 데다가 역자의 말 한마디조차 없는 불친절한 책이라는 점 때문은 아니다. 그래서 뭐라고 리뷰를 써야 할 지 사실 막막하면서도 또한 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것을 부여한다.

일단 이 책의 장광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반다인의 책에서 잘난척 현학적으로 말하던 탐정은 비길 바가 아니다. 교코구도(본명은 추젠지 아키히코)라는 고서점 주인의 길고도 긴 말들은 작가의 세계관과 나름의 철학들이 범벅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끊어지질 않고 상대의 말은 무시해버리기 일쑤다. 소설을 읽는 건지, 철학책을 알기쉽게 대화형으로 풀어놓은 건 지 헷갈릴 정도다. 하긴, 그렇다고 그 말들이 다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너무 길고 너무 자주 등장해서 좀 지루하다는 것일 뿐.

선전에 나온 것처럼 이야기는 1950년대, 전후 일본이 이제 막 부흥하려고 하는 찰나, 유서깊다고는 하나 이제는 쇠락의 길에 접어든 산부인과 가문의 사위가 실종되고 그 부인은 임신 20개월이 넘어도 출산을 하지 못한다는 정보를 접한 두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여기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이는 괴이한 탐정 에노키즈와 형사 기바 등이 관여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는데...

얼핏 보면 매우 평범(물론 사건 자체는 평범하지 않다. 20개월의 임신이라니...)한 추리소설의 구도를 가진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사건의 결말은 매우 충격적이고 믿기가 어렵다. 일본의 고대 설화 등에서 등장하는 우부메와 고획조 등의 요괴(혹은 귀신?)담이 적절히 가미되면서 전쟁과 망상과 집착과 광란이 교차되고 거기에 결코 유쾌하지 않은 한 집안의 역사와 왜곡된 인간상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파국에 치닫게 된다. 그냥 잘못된 역사의 반복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했더라면 그렇지 않았을테지만, 요괴라느니 영혼이라느니 하는, 밤에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한 일본의 정서들 덕분에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로 이끌어가는 추리소설이라고 보여진다.

일본의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그들의 정서에 반감이 들면서도 추리소설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색채가 강하게 들어가 어떠한 흐름을 형성했다는 자체에는 부러움이 든다. 추리소설 하나에도 자신들의 역사(그것이 괴기스럽든 요괴스럽든 간에 말이다)와 분위기를 고스란히 실을 수 있는 작가들의 정신이 때론 무섭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유럽이나 미국의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쟝르의 추리소설을 만들어낸 점은 높이 사고 싶다는 거다.

처녀작이라고 하기에는 그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의 이름을 다시한번 들춰보게 된다. 솔직히 나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 하에 별을 하나 제외시키긴 했지만, 억지스러운 장광설만 좀 자제했더라면 흠을 찾을 수 없으리만치 잘 만들어진 추리물이라는 느낌을 가진다. 다음엔 낮에 읽을 것을 결심하고(밤엔 정말 무서웠음을 고백한다)  '망량의 상자'를 읽어보아야겠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서 오싹함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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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1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읽고 싶게 만드는구랴..(낮에 읽는다는 조건으로^^)

물만두 2006-03-1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성님 이거 무서운거 아니라 밤에 읽으셔도 상관없어요^^

비연 2006-03-1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ㅋㅋㅋ 꼬옥 읽어보세요^^

비연 2006-03-12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전..무지하게 무섭던데요? 웅~ 등줄기에 소름이 쫘악~

상복의랑데뷰 2006-03-23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다기 보다는 징그럽다는 표현이 ^^;;

비연 2006-03-24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 아...좀 그렇죠? 엽기적이라는..근데 그 장면은 상상만 해도 좀 무서워서요. 그 방의 장면..(더 이상 말하면 스포일러..우히히~)

jedai2000 2006-03-2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량의 상자>는 엽기성도 두 배, 재미도 두 배, 완성도도 두 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지만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비연 2006-03-29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엽기성이 두 배라...흠. 그래도 재미와 완성도도 두 배씩이니 읽어봐야겠군요^^

상복의랑데뷰 2006-04-20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에 망량을 읽었는데, 저는 망량에게 올인을...

비연 2006-04-21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지금 상/하권 고스란히 제 책장에 놓여있습니당.
상복의 랑데뷰님 말씀을 들으니 바로 개시해야겠군요! 룰루랄라~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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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자 마자 바로 컴퓨터 앞에 달려드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이거, 잡스러운 소리라도 리뷰 꼬옥 남겨야겠다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앉았다.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이런 건 추리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한정짓는 게 아까울 정도라고 나름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추리소설이 좁은 쟝르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손사래를 칠 사람들도 있을까봐 지레 우려스러워서 하는 소리지)

여러가지 사건들이 두서없이 펼쳐지고 그것이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을 연결시키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의 울타리 안에 묶여지는 구성은, 기실 예측 가능한 것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오는 숱한 얘기들, 사람들이 사카키바라 료가 저질렀다고 추정되는 사건에 수렴되리라는 것은 초반부터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짜임새 훌륭한 구성에 사회문제를 폭넓으면서도 예리하게 담아내는 솜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 가끔 문제 제기를 할 때에나 생각하게 되는 사형 제도라는 것. 그것도 머리 아파서 별로 깊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또는 죽일 놈은 죽여야 한다고 격앙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인권을 얘기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 그런 사형 제도가 화두가 될 수 있는 것은 결국 죽음과 삶의 문제, 그리고 신이 아닌 사람이 행해야 하는 행위들에 있겠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 것이 어떤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법이나 제도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허용되고 있는 그것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되는 사람들의 죄의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것인지. 그리고 과연 '죽일 놈'은 누구인지. 이런 것들을 쉴새없는 템포로 박진감 넘치는 필체를 동원하여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이 책은.

우츠기 고헤이 부부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인 사카키바라 료는 그러나 사건 전후에 대해 기억을 전혀 못하는 상태다. 매일 엄습하는 사형에 대한 불안을 삭이며 한 가지 떠오른 단상이 '계단'이고 또한 자신이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 뿐이다. 사카키바라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난고 교도관과 상해치사 혐의로 복역 중이다가 가석방된 미카미 준이치가 뛰어들게 되면서 결국 진범을 가려내는 과정을 그린 이 추리소설은, 사건 당일의 기억을 상실한 용의자라는 구상과 모두들 직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여본 경험을 공유한, 그래서 늘 그 테두리에서 맴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설정, 그 과정에서의 법적 사회적 심리적인 묘사 등이 너무나 뛰어나다.

무엇보다, 그냥 지나치곤 했던 사형 제도라는 문제를 치밀하고 접근성 강하게 들추어냄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철학까지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흡인력있는 작품이라는 점이 강력 추천하는 이유이다. 즉, 뭔가 두리뭉실하게 내 가슴 속에 내재되어 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들, 타인과 자신에 대한 생각들, 복수와 댓가라는 것에 대한 가치들이 하나씩 둘씩 수면 위로 떠올라 과연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고 옳다 그르다라는 가치가 또한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점이 있다.

사실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읽어보면 아니까. 무조건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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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2-26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이 책에 찬사를 보내시는군요. 꾹.

비연 2006-02-2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세요^^ 절대 후회 안 하실 듯~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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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충격적인 반전은 처음이라는 평들이 많았다. 게다가 약간은 몽환적인 책표지와 연애소설에나 어울릴 듯한 제목이 주는 이질감도 한 몫을 한 듯 하다.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다들 쉬쉬하며 읽어보라고만 하는가. 추리소설이라고 단정지어 구분한 책이 낭만적인 표지와 제목을 가지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너무 바빠서 사놓고도 한참을 못 본 채 마음을 계속 졸여왔던 것 같다. 궁금하고 또 궁금하고.

어제 오랜만의 여유를 부려 하루종일 이 책과 더불어 보냈다. 일단 한번 들면 놓을 수는 없는 책이다. 아주 박진감 넘쳐서도 아니고 매우 구성이 잘 되어서도 아니며 무지하게 재미있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사전에 들은 정보 때문이다. 반전의 정체가 뭔가. 이 생각 때문에 끝을 보게끔 했다. 사실, 전체적인 내용은 좀 진부하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성이나 알 듯 모를 듯한 실마리를 슬쩍 슬쩍 내비침으로써 독자들을 긴장하게 하는 내용이나 어디선가 많이 본 느낌을 준다. 게다가 반전이라고 하니까 내용을 그런 식으로 자꾸만 유도하게 되고 결국은 김빠진 맥주를 마시는 기분을 안겨준다.

그렇게 거의 대부분을 읽어내려갔는데도 반전의 기미는 보이질 않는다. 결국 마지막 한 컷에 다 달려있나. 갸우뚱 하면서 읽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이해하고 있던 것과 다른 내용이다. 나는 앞장부터 펼쳐들고 설렁설렁 책장을 넘기며 내용을 다시 보았다. 어..이상하다. 내가 이해한 게 맞는데 왜 이런 내용이 나오는 거지? 그렇게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나니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이 아니라 내가 은근슬쩍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을 먼저 받았다. 그러니까 버스에서 태연자약하게 신문 한장 펼쳐들고 있다가 핸드백 근처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손길에 번쩍 눈을 들어보니 핸드백이 찢겨져 그 속에 있던 지갑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의 아연한 느낌. 그리고나서야 터져나오는 비명. 어, 내 지갑! 그러니까 이 소설도 마지막 장을 넘긴 후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허둥지둥 내가 속았구나 하는 것을 알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그런 작품이었다.

결국 나는 작가에게 보기좋게 당한 셈이다. 그건 작가가 고도의 트릭을 썼기 때문이 아니다. 말하자면 내가 나의 고정관념에 속은 거다. 그래서 뒷끝이 씁쓸했고 책을 또다시 들춰보며 내가 무엇에 대해 그런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었는가 반추하게 된다.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머리 속에 박혀진 영상 속에서만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내가 알던 것, 사회가 요구하는 것, 규정지은 것 등등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세 따위는 취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타인을 그 영상의 틀 속에 박아버린다. 그렇다. 작가는 사회의 문제를,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한번 비틀어 냄으로써 우리에게 명백한 자각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그다지 나의 호감을 끌지도 않았고 내가 좋아하는 류의 반전도 아니었으며 더더군다나 그 속임수라는 것이 통렬함 보다는 자괴감을 선사했음에도 별을 4개 주도록 만든다. 사회의 문제라는 것은, 하나하나 구체적이고 서술적으로 르포형식으로 풀어서 선사해야지만 우리의 마인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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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2-26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그 점이 이 작가의 새로운 시도였고 당해도 좋았던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연 2006-02-26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조금은 색다른 반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런 반전이 아니라
우리에게 뭔가 시사하는 점을 가지게 하는 사회성 짙은 반전...^^

울보 2006-02-26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이책주문했는데,,

비연 2006-02-2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후회하지 않을 만한 내용이랍니다^^

2006-04-20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6-04-21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추리소설에 대해 거는 기대를 넘어서는(!) 사회문제라는 데에 의의를 많이 두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마지막 부분의 반전은 놀라움도 있었지만 실소를 자아내는 부분도 없지 않았으니까요.
알라딘에는 글 잘 쓰시는 분들이 넘 많아서 제 글은 정말 부끄럽지요. 님의 글도 잘 읽고 있는 걸요^^
 
임프리마투르
리타 모날디.프란체스코 소르티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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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사둔게 아마 2004년 말이었던 것 같다. 특이한 제목과 '움베르토 에코'에 비견할 만한 역사 추리물이라는 광고에 혹해서 인터넷으로 주문했었는데 받아들고 그 두께에 질려(무려 850페이지!) 서재에 그냥 넣어두었던 모양이다. 가끔씩 쳐다보고는 했지만 도대체 저걸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아닌 고민을 마음에 담은 채 늘 뒤로 밀어놓곤 했던 책이다. 근데 왠일인지 지난 주말에 문득 이 책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읽던 책들을 다 뒤로 하고 손 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이 소설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이틀만에 다 읽었다!

사실 뒷면에 나와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 부분이 좀 지루하다 뿐이지 그 앞 부분의 내용은 언제 다 읽었는가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과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책이다. 고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나 연금술, 점성술, 의학, 미술, 인문학 등등의 다양하고 신기한 학문들을 술술 풀어나가는 등장인물들이나 사제와 그를 따르는 사환이라는 구도 등이 그러했다. 또 일면은 여타의 추리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섬이나 대저택 같이 밀실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그에 대한 인간 군상들의 비밀, 음모, 관계등을 파헤치는 아가사 크리스티류의 소설처럼 이 소설도 돈젤로라는 여관에서 정체불명의 남자가 독살당하면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추리의 형태를 빌어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플러스 알파의 그 무엇, 그러니까 이 소설만이 가지는 강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젤로 여관에서 정체 불명의 남자가 독살당하고 이를 페스트로 의심한 당국에서 투숙객들을 가두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에는 여관주인인 펠레그리노와 사환인 '나'가 있고 로블레다라는 예수회 신부, 미성의 카스트라토인 아토 멜라니 사제, 토스카나에서 온 잡다한 의학적 지식의 소유자 크리스토파노 의사, 나폴리에서 온 스틸로네 프리아소, 베네치아에서 온 정체 불명의 안졸로 브레노치, 그리고 죽은 노인과 함께 투숙했던 음악가 드비제와 페르모에서 온 상인 출신의 폼페오 둘치베니, 그리고 영국인인 베르포르디와 코르티자나인 클로리디아가 있다. 그저 그런 투숙객들인 듯 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뭔가 말못할 사연들을 지닌 양 서로를 경계하고 자신을 은폐한다.

독살된 남자의 사인을 밝히고자 하는 아토 멜라니 사제와 엉겁결에 그를 따르게 된 사환 '나'는 여관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암울하고 지저분한 도굴꾼들의 인도 하에 매일 밤 이 곳을 탐색하면서 여관에 투숙하는 사람들의 과거와 그에 얽힌 놀라운 비밀들을 하나씩 알아가게 된다. 거기에는 그냥 개인의 인생만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국왕과 왕비, 그리고 교황 등의 인물들이 배후에 있고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종교 갈등, 투르크의 빈 침략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결과는 읽는 나까지도 가슴깊이 허탈하게 느낄만치 비열하고 졸렬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이 소설의 내용을 말하는 건 스포일러에 해당하기에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이 소설이 에코나 크리스티의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마지막에 느껴지는 허탈함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앞 표지에 부착된 CD에 수록된 음악들이다. '다빈치 코드'가 미술작품을 배경으로 해서 방대한 미술사의 궤적을 함께 하는 작품들을 소개하듯이, 이 소설은 음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카스트라토인 멜라니 사제는 자신의 마음을 늘 음악으로 표현하고 사환 '나' 또한 음악가인 드비제가 연주하는 론도에 깊이 매료되곤 하며, 읽고 있는 우리들도 CD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마음을 싣고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딱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방대하고 스펙터클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내는 동시에 그 내면에 자리한 부정과 비리와 정치와 음모, 그리고 그로 인한 환멸까지 정말 짜임새 있게 잘 그려낸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움베르토 에코 정도의 지적인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나, 10년이 넘게 고문헌을 조사하여 쓴 소설답게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사람의 살아가는 모양새에 잘 각인한 솜씨는 높이 살 만하다고 본다. 

이 책을 덮으면서 우습게도 난 왜 조흔파 선생이 지은 '에너지 선생'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었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내용임에도 말이다. 주인공이 어느덧 나이가 한참 들어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 계신 에너지 선생을 기억하고 에너지 선생과 한바탕 싸우고 집을 나가버린 침모 할매를 떠올리던 그 장면이 소설의 마지막과 매치되면서 가슴이 짠해졌었다. 이 소설은 내게 그런 느낌이다.  소설 속에서 한 도굴꾼이 말하던 '빗속의 눈물' 이라는 어구가 주는 그런 느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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