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존 르 카레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존 르카레가 참 좋다. 그리고 그가 창조해낸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와 그의 동료들을 좋아한다. 열린 책들에서 나온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읽고나서 이 하얀 표지의 느낌좋은 책들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고는 가끔씩 펼쳐보곤 한다. 책 선전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가디언의 그 문구, 르카레는 현재 영국에서 글을 쓰는 그 어떤 소설가보다도 뒤지지 않는 작가이다, 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말이다.

이 책,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는 존 르카레의 처녀작이다. 따라서 조지 스마일리가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인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조지 스마일리를 고대 독일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냉전시대에 여러 나라에서 첩보원을 한, '땅딸막한 체구에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이 책은 시작된다. 1960년대 영국의 정보국에 근무하던 스마일리는, 며칠 전 이름없는 투서로 스파이라고 고발되어 본인이 직접 면담을 했던 외무국의 새뮤얼 페넌이라는 사람이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리고 그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서 페넌의 집에서 아내인 엘자 페넌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새뮤얼 페넌이 그 전날 신청해둔 모닝콜을 받게 되고, 이를 의아하게 여겨 이것저것을 조사하면서 그 의혹감은 커져만 간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우울한 진실들.

이 책은 다른 존 르카레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스파이소설'이라고 분류하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물론 스파이소설이라는 것을 우습게 보아서는 아니고, 그렇게 범주화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될 편견들을 방지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스파이라고 하면, 바로 생각나는 것이 007의 제임스 본드이고 그래서 멋지고 잘생기고 마초적인 유머를 즐기며 여자를 좋아라 하지만, 첩보전에서는 기가 막힌 활약으로 '악당'들을 물리치는 그 007을 생각하고 이 책을 봐서는 안된다. 내가 존 르카레를 좋아하는 이유는, 스파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사람에 대해서, 이념 속에 끼여 어딘가에 마음 붙이지 못하고 회색지대에 머물며 서성이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서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를 그저 선과 악으로, 미국과 독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분류하여 사람들도 똑같이 저쪽과 이쪽,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려고만 한다면 많은 중요한 것들이 간과되어지지 않을까.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자신의 배경에 따라 혹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무언가'(우리는 이런 것을 '꿈'이라고 이야기한다)를 실현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고 존 르카레는 그래서인지 그들을 굳이 모두 좋은 넘 모두 나쁜 넘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설사 영국의 정보국이라 할 지라도 여러가지 정치적 상황에 의해 잘못된 일을 저지르기도 하고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한다. 또한, 정보국도 조직이므로 멍청한 상사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부하가 있을 수 있고 같은 동료끼리의 갈등도 일어난다. 그렇게 존 르카레는 냉전 시대의 정보국과 그 속에 몸담고 있는 '첩보원'들을 대상으로 했을 뿐이지 사실은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나온 존 르카레의 책들에 비해서는 데뷔작이라 그런지 그 짜임새가 아주 정밀하지는 않지만, 스마일리와 이후에 계속 등장하게 될 멘델이나 피터 길럼이라는 사람들이 선보인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쓰고 있고 하나하나 연결고리가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진실과 거기에 대처하는 스마일리의 모습들은 흥미진진하여 다 읽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못 떼게 하는 재미까지 있다.

뱀꼬리. 그런데, 번역이 좀 매끄럽지 않은 점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그렇게 봐서인지, 군데군데 조금 어색한 부분들이 있어서 당혹스러웠다. 예를 들어 p198의 마지막 '이 곳은 템스 강의 단호한 팔에서...' 라는 부분처럼 번역자의 의도가 있는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런 식의 불편함이 있어서 읽는 재미를 조금 방해했다는 걸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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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7-09-2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운나라..> <팅거, 테일러..> <죽은 자...> 단 세 권만으로 르카레가 좋아졌답니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어진 <콘스탄틴 가드너>나 <러시아 하우스>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이라도 책읽기의 즐거움을 해칠까봐요. 근데 책출간은 세월아... 내월아... 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ㅠㅠ

비연 2007-09-24 00:34   좋아요 0 | URL
모든 작품이 주옥같은 작품이죠..^^ 근데 정말, 책출간은 왜 이리 더딜까요?
 
추천하고 싶은 일본소설 베스트는?
유리 망치 - 2005년 일본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10
기시 유스케 지음, 육은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기시 유스케의 소설은 '검은집' 이후로 두번째다. '검은집' 자체가 워낙 인상적이어서(그러니 영화개봉하자마자 날름 가서 보지 않았겠는가. 결과는 대실망이었지만서두..쩝쩝) 이 책도 주저않고 샀다. '유리망치'. 제목이 대단히 있어보이고 게다가 북디자인도 만만치 않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부는 범인을 좇는 자와 살해된 사람의 주변자들 이야기, 2부는 범인과 범인의 주변자들 이야기.  어느 간병회사의 사장이 일요일 대낮에 완전히 밀폐된 집무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고 그 날 회사에 있었던 부사장,비서들, 직원들 모두는 알리바이가 있거나 살해 시각에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단 한 사람, 히사나가 전무만이 아무도 모르게 그 방에 직접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이유로 살인자로 몰리는데 변호사 아오토 준코는 전무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조금 독특한 탐정 비스무레한, 액면가로는 방범컨설턴트이나 전직은 매우 의심스러운 에노모토 케이라는 남자와 함께 조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 추리소설의 묘미는, 역시 이제까지 우리가 아연실색하며 보았던 자르고 붙이는 엽기시체콘테스트는 하나도 없이 그저 밀실추리라는 본격추리형식을 띠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정말이지, 사람 하나 가볍게 머리에 타박상 맞아 죽는 사건을 접한 지가(역시 추리소설 계속 보면 이렇게 잔인해진다니까..;;;) 한 수십년은 된 듯 하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약간의 구역질이나 미간의 찌푸림 없이 그저 어떻게 이런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에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들이 봉쇄되다가, 결국 에노모토가 진상을 섬광처럼 알게 된 순간 2부로 넘어가 바로 범인의 육성을 접하게 하는 숨가쁜 진행을 연출한다.

범인의 트릭은 대단히 놀라왔다. 전문적인 지식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트릭. 아니 그보다는 절대절명으로 몰린 사람이 죽을 힘을 다해 지혜를 그러그러 모아 만들어낸 살인. 그래서 그(혹은 그녀)를 100% 미워할 수는 없는 그런 사건. 이런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읽게 된다. 물론, 에노모토의 그 해박한 지식들, 특히 방범에 관한 그리고 방범 시설에 대한 듣도보도 못했던 많은 기술들이 쫘악 펼쳐지는 것도 (조금 지루할 수는 있겠지만) 의외로 재미나게 읽힌다.

에노모토의 캐릭터 또한 주목할 만 하다. 추리를 하고 범죄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돈이나 재물에 눈독을 들이지 않고 그 비밀을 풀어나가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상을 받으리라, 혹은 죄를 응징함으로 정의구현에의 바램을 이루리라 는 등의 기존 관념에 정면 도전하여 그저 속물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들어낼 때는 웃기기까지 하다.

"아닙니다. 실은 전무님의 가족인데, 조건을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일당이 2만엔. 이 가게의 아르바이트를 고용하는 데 하루 1만엔, 교통비, 사용한 기자재는 실비입니다. 지불을 3일마다 현금으로. 그리고 별도로 조사 결과에 따라 10만~50만엔의 보수를 받습니다."
일당은 그렇다 치고 아르바이트비는 바가지인 것 같고, 무엇보다도 최종적인 보수라는 게 단기간임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비싸다. 변호사 보수와 비교해도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책 p68-p69)

사건 컨설팅을 부탁하자마자 바로 봇물터지듯이 이어지는 이 돈 액수의 향연(?). 이 추세는 책의 마지막까지 주욱 이어지니까 기대해도 좋다. 특히 마지막 대사 몇 마디는 압권이다. 푸하하. 약간 심심한 맛을 주는 이 책에 그래도 생명력을 더해주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제목처럼 망치로 나를 가격하는 듯 충격적인 결말은 없다 하더라도 길고 긴 페이지내내 4년 반의 공백기간동안 성실히 이야기를 그려나갔을 작가 기시 유스케가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안고 있는 사회문제들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톤은 읽을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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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4
제프 린제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읽는 내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추리(혹은 스릴러) 소설 읽으면서 이렇게 갈등되는 건 처음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 책으로 탄생한 덱스터 모건이라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잔인한 캐릭터이다. 그래서 일단 시선이 머물기는 하는데, 솔직히 읽으면서 계속 시원한 마음은 아니었다. 뭐랄까.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찝찝하고, 불안했다.

제프 린제이의 데뷰작인 이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는 한마디로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범'이다. 어릴 때 받은 정신적 상처로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삶은 살 수 없는 괴물을 속에 키우고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 아닌가), 양아버지이자 경찰이었던 해리가 그 재능(이걸 재능이라고 말하다니, 내가 이 책을 넘 열심히 읽은 게 분명하다)을 다른 연쇄살인범들처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악당들만 처치하도록' 훈련을 시켰다. 덕분에 경찰 소속의 혈흔 분석가로 일하면서 남몰래 마음의 괴물이 움직일 때마다 조사해두었던 아동성애자라든가, 아동살해자라든가 하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인간같지 않다고 판단되는 인간들'을 제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선한 사이코패스라고 이름붙여도 될라나(말이 되나..이 단어가..;;;).

그런 덱스터에게 이번 책에서는 도전자가 나타난다. 덱스터의 검은 마음과 합일해서 매춘부들을 죽이고 다니는 연쇄살인범. 똑같은 방식으로 죽이고 피 한방울 남기지 않은 채 토막토막 내어 남겨두는, 그나마 덱스터와의 차이라면 드러내놓고 살인을 한다는 것과 대상이 죄없는 매춘부들이라는 것. 그렇게 해서 덱스터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우선 이 작품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유머감각이다. 이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현장의 묘사와 주인공의 음침한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져갔다면, 절대 끝까지 읽을 수 없는 내용이지만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전반에 깔려있어서 조금은 유쾌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인공 덱스터의 그 특유의 이죽거림, 상황에 대해 감정이 섞이지 않은 냉정한 통찰력과 블랙 유머는 잠깐잠깐 이 사람(!)이 연쇄살인범이고 괴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하지만, 역시 난 미국 작가의 연쇄살인범 스릴러와는 인연이 안 닿는 모양인지, 보는 내내 쭈욱 불쾌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었다. 살인방법이나 그 분위기(혈흔이 하나도 없는 목에 뭔가를 꽂아둔다는..컥)도 그랬고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도 그랬고 게다가 마지막, 반전이라면 반전인 부분에서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는 감상만 남았다. 아마 이 소재가 사람들에게 어필은 되는 지 '끔찍하게 헌신적인 덱스터' 라는 책도 번역되어 나왔다던데, 그걸 볼 것인가는 아직 딜레마라는. 아직까지도 이 덱스터의 캐릭터가 '가슴이 설레고 매력적인 킬러'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드는 걸 보면 앞으로도 흥미를 가질 수 있을런지는 미지수이기는 하다. 그러나 덧붙이자면, 내 성향이 아니라고 이 작품이 아주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런 캐릭터를 창조해내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음울함 일색이 아닐 수 있도록 재미있게 쓴 작가의 역량에는 기대를 걸어볼 만 하다.

뱀꼬리. 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의 삐침이기는 하지만, 난 왜 이 '덱스터'라는 이름에서 '콜린 덱스터'를 떠올리는 걸까. '콜린 덱스터' 시리즈는 정말 이제 영영 안 나오려나. 그게 더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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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7-3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린 덱스터 ㅜ.ㅜ 그나저나 저는 유머는 잘 모르겠어요 ㅡㅡ;;;

비연 2007-07-31 11:54   좋아요 0 | URL
유머라고 하기에도 좀 썰렁하긴 하죠..ㅜㅜ 전 그냥 콜린 덱스터가 그리워요..

하이드 2007-08-0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꺄- 저는 책 좀 보다가 드라마 봤는데, 드라마 보고나니, 책도 급비호감;;
저도 모스경감 시리즈가 그리워요오오오

비연 2007-08-01 15:29   좋아요 0 | URL
드라마는 더할 듯 싶네요, 하이드님...ㅜㅜ
모스경감 시리즈는 더 이상 안 나오는 건지..쯔압

Forgettable. 2009-01-1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덱스터가 책이 원작이었다니! 몰랐어요 ㅎㅎ
전 미드로 엄청 재밌게 봤거든요.. 덱스터가 왠지 [라스베가스]의 주인공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엄청 매력적이라.. 목소리도 너무 좋고.... 동생이랑 같이 보며 얘를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엄청 혼란스러워했는데 책에서도 그런 캐릭터라니 재밌네요 ㅋㅋ 왠지 매력적인 연쇄살인범이라니, 미국이란 나라 정말 무섭지 않나요 =.=

그나저나 덱스터모건보다 더 매력적인 콜린덱스터는 누구인가요!

비연 2009-01-16 13:10   좋아요 0 | URL
아. forgettable님^^ 덱스터를 재미나게 보셨군요! ㅋㅋ
전 미드는 안 봤는데, 책은 좀 기기묘묘하더라구요. 재미는 있어요~.
콜린 덱스터는 영국의 추리소설가에요. 아가사 크리스티를 잇는 작가이죠~

2009-01-17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7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천하고 싶은 일본소설 베스트는?
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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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히가시노 게이고다. 며칠 새에 두 권째다. 이 책, '붉은 손가락'은 2006년 작품으로 가장 최근의 책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최근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일본 사회의 가정과 고령화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일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겉보기에 매우 평범한 한 가정. 마에하라 아키오는 중년의 회사원이고 18년 전에 결혼한 아내 야에코와 외아들 나오미, 그리고 치매 증상을 보이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날, 급박하게 걸려온 아내의 전화에 집에 달려가보니 아들의 손에 죽어 있는 한 초등학교 여자애의 사체를 발견하게 되고, 아들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근처 공원 화장실에 유기하게 된다. 이 살인사건을 가가 교이치로 형사와 그의 사촌동생인 마쓰미야 슈헤이 형사가 조사를 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급진전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평범하지만 속은 곪아 있는 마에하라 가족. 시부모가 싫다고 10년이나 시집에 찾아가지 않는 아내,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보려는 노력 없이 쉽게 넘어갈 생각만 하는 남편, 그리고 이런 부모 사이에서 커서인지 가족에게 정도 없고 친구도 없고 학교에서 외톨이인 아들. 아키오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자, 어머니가 도맡아서 수발을 하고 자식으로서의 의무보다는 고민하고 싶어하지 않아 하며 그냥 방치해두는 아키오의 모습이나, 부모는 홀대하고 무시하면서 아들에게는 쩔쩔 매는 야에코의 모습이나 정말 읽을수록 분노와 답답함이 치미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어떻게 해결해주기를 바라다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어이없고 극단적인 설정은 누구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나름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런 일들이 그닥 특별한 일도 아니겠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다.

고령화 사회가 심화되면서 노인들의 숫자는 늘어나고 핵가족 시대에 인생을 통틀어 바쳐 키운 한두명의 아이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커서 노인을 귀챦게 생각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 저만치 떨어뜨려 놓고 싶어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흔한 현상일 것이다. 예전처럼 효를 강조한다거나 부모에 대한 의무를 주입한다는 것이 어려워진 요즘같은 경우에는 더더군다나 그렇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마지막 충격적인 반전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제목 '붉은 손가락'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과정에서는 정말이지, 노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부부가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화와 소통이 없는 가정에서 크는 아이들에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는가, 그리고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점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끔 만든다. 따라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은, 그저 사건을 해결하고 그 속의 인간관계를 파헤치는 데에 주력을 기울이는 미스터리 소설의 범주를 벗어나 좀더 넓은 영역에 속한 작품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의미있는 책읽기'를 위해서라도 이 책을 반드시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 마지막 대사는 아직도 내 심금을 울린다. 가가 형사가 남기는 마지막 말. 그 말에 순간 울컥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부모와 자식의 정은, 설명하기도 곤란하고 참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외면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나름의 정을 소통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구나 라는 훈훈한 느낌.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가슴 답답한 소설에서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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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gghhhcff 2007-07-28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지막 가가형사와 그 아버지 이야기는 가슴 찡~ 한 뭔가를 느꼇답니다. ^_^

비연 2007-07-28 20: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 책을 읽는 분들은 아마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거에요.
그나저나 우아한인삼님, 반갑습니다!^^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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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비교적 초기 작품으로 연쇄살인사건을 10개의 지갑들의 시점으로 풀어쓴 독특한 형식의 글이다.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글은, 대단히 정교하고 잘 다듬어진 흐름과 독특한 시선,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열한 탐색 등이 특징이라고 본다면 이 초기 작품에는 이것이 제대로 갖추어지기 전, 그러니까 태동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다.

두 남녀가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을 감행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뛰어든 '형사'로 시작하여 용의자 여자를 협박하는 '공갈꾼', 세번째 피살자인 사나에의 조카 '소년', 사나에가 뒷조사를 부탁했던 '탐정', 우연한 '목격자', 네번째 피살자 '죽은 이', 용의자 남자의 절친한 '옛친구', 알리바이를 목격한 '증인', 형사반장의 젊은 '부하' 그리고 드디어 '범인'까지, 그들이 가장 깊숙이 간직하고 늘 들고다니는 지갑들은 각각의 주인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그 이야기들은 교묘하게 연결되어 사건과 해결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만들어가는 솜씨에 역시 미아베 미유키구나 라는 감탄을 하게 된다.

이런 소설의 경우 잘못 하면 엉성한 플롯과 이음새가 조잡한 구조로 흡인력이 떨어지기 쉬운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미야베 미유키는 '지갑'을 의인화해서 사람의 심리, 행동, 돈, 욕심, 사악함 등등을 쉽게 하지만 심도깊게 파고든다. 옮긴이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그 이후의 글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군데군데 이후에 생각을 발전시켜 소설로 만들었으리라 예상되는 모티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모방범', '화차', '이유' 와 같은 소설들의 아기 때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신선한 즐거움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마지막, 사건을 다 해결한 '형사의 지갑' 부분이 좋았다. 미야베 미유키는 인간의 악한 본성, 허영심, 욕망 등에 대해서 정말이지 내 눈으로 보는 것처럼, 내 귀로 듣는 것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철저하게 분석하는 데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늘 일상의 소소한 생활을 충실히 영위해 나가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주인공일 수 있게 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저 차갑게 식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좋기 때문이다. '형사의 지갑'에서처럼 남겨진 자들이 서로 의지하며 돌아가는 그 길을 나도 느끼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세상살이에서 그래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헤아려 보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의 줄곧 가지고 있는 관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이후에 나온 그녀만의 예리함이나 세련됨을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이 초기 작품이라는 걸 감안하고 읽는다면 나름의 재미와 감동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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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2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미유키란 이름만으로도 저에게는 굉장한 궁금증을 가져다 줍니다.ㅎㅎ 꼭 보고 싶은 책중에 하나인데.. 자금난으로 아직 만나보질 못하고 있는 책이에요.ㅜ.ㅜ
언젠간 꼭~~ 보고 말테야~~ㅎㅎ

비연 2007-07-29 09:16   좋아요 0 | URL
자금 사정이 빨리 풀리시길..^^
미야베 미유키 글이 계속 번역되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해지더라구요ㅋ
님도...조만간 꼭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