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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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내게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다. 처음 읽었던 '호숫가 살인사건'은 내용이 파격적이긴 했지만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었고 '백야행'을 읽었을 때는 그 사실적인 묘사와 비참한(난 그렇게 느꼈다) 내용에 한동안 어리둥절했었고 '용의자 X의 헌신'은 아 이렇게 쓸 수도 있겠구나 라는 감탄을 안겼으며 가장 최근에 읽은 '환야'는 사실 조금 실망감이 컸었다. 전반적으로 아주 끌리는 마음으로 고르게 되지는 않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면 장바구니에 사정없이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번에도 이 책 '숙명'과 '붉은 손가락'을 냉큼 구입하지 않았겠는가.

숙명. 제목이 좋았다. 1990년 작품이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창기 스타일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라는 기대감에서 출발했다.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범인은 누구일까, 어떤 트릭을 썼을까 하는 식으로 마술을 구사한 수수께끼도 좋겠지만, 좀더 다른 형태의 의외성을 창조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하기에 이번에도 '용의자 X의 헌신'과 같은 독특한 작품을 발견할 지도 모르겠구나 했다. 그리고 아주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썼는가에 대해 이해하면서, 나쁘지 않은 마음이었던 듯 하다.

이야기의 두 축은 유사쿠와 아키히코이다. 초등학교 같은 반 동급생이었던 둘은 사사건건 경쟁 상대였다. 아버지가 경찰이고 어디서나 리더의 기질을 발휘하던 유사쿠는 말없고 냉정하며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아키히코에게 늘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같이 졸업하고 대학에 올라갈 때 아키히코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의사의 길을 선택하고 유사쿠는 그렇게도 의대에 가고 싶었지만, 낙방과 아버지의 병으로 결국 경찰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던 중, 아키히코의 회사 중역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을 통해 그 둘이 맞닥뜨려지게 된다. 그러면서 실타래처럼 풀어지는 운명의 끈들이 차분하게 전개되는데...

이 이야기는 따라서 누군가가 살해되고 그 범인이 누구이며 그 동기가 무엇인가가 촛점이 아니다. 유사쿠와 아키히코라는 동갑내기 두 남자의 운명과 그들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더 크다. 하나의 살해사건을 통해 얽히고 맺어지는 그들의 삶이 참 녹녹하지 않게 다가오고, 마지막 몇 장에서 그 모든 비밀이 드러날 때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아연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 책을 선전할 때 계속 말하고 있지만, 정말 '마지막 장은 절대 먼저 읽어서는' 안되는 책 중에 하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양한 주제로 소설을 쓰고 있지만, 사실 미스터리 자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들, 그들의 본성, 운명과 같은 주제에 더 많은 관심이 있어 보인다. 대부분이 상상하기 힘든 주제들을 어렵지 않게 풀어나가면서 무리수를 크게 두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대단히 잘 짜여진 구도와 전개, 속도감 등이 책을 한번 들면 쉽사리 놓지 못하게끔 하는 재주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좀더 최근의 작품을 먼저 읽어본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이 맛으로 따지자면 좀 싱겁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파격적이지 않으면서도 충격적인 결말이라는 점은 그의 경향과 거의 일치하지만, 아직 초반 작품이라 그런지 매우 번뜩이는 글솜씨라는 측면에서는 최근 것에 비해 덜하기는 하다. 하지만, 난 양념이 많이 안 들어간 슴슴한 음식을 먹는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어쩌면 많이 유명해진 작가들의 작품들은 기교면에서 너무 기름칠한 것처럼 매끄러워서 감당하기 버겁다는 느낌을 가끔 가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 만 하다. 다만, 결말이 좀 비약적이라는 것이 약간 걸리는 부분이긴 하다.

아. 난 책을 살 때 북디자인을 보는 편인데, 개인적으로 이 책의 북디자인이 참 맘에 든다. 파울 클레의 '계획'이라는 작품인 모양으로, 책 내용과도 잘 부합되고 디자인 자체도 괜챦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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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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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요코미조 세이시가 좋다. 영국엔 아가사 크리스티가 있듯이 일본엔 요코미조 세이시가 있어서 부럽다. 무엇보다 서양의 고전을 능가하는 자국 미스터리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노력에 진지한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번역되어 나오면 아무리 바빠도 다 제쳐두고 사서 읽게 된다. 1902년 태생이니 그가 작품활동을 열심히 했던 것은 194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참 오래전이다. 아니 시간적으로 오래되어서는 아니고(고작해봐야 50년 안팎 아닌가?) 그 동안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가 너무나도 많이 변화해서 전후의 그 모습들이 몇 백년 전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코미조 세이시의 글은 흡인력이 있다. 지금 읽어도 하나 어색하지 않다.

특히나 이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작가가 대단히 정성을 기울인 기색이 역력한 작품이다. 기존에 나왔던 '옥문도'나 '팔묘촌'과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플롯으로 전개되면서도 한층 심화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일 게다. 내용을 간략히 말하자면, '귀수촌의 공놀이 노래'라는 무시무시한 민간 노래에 따라 귀수촌의 아가씨들이 하나 둘씩 무참하게 살해되는 이야기로, 여기에는 감추어진 가족의 비밀이 있고 그로 인한 아픔이 있으며 사건이 지속되면서 하나둘씩 그 진상들이 밝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전의 작품들과 좀 다른 것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잔인함과 소름끼침이 더해지기 보다는 슬픔과 연민이 깊어진다는 것일 게다. 뭐랄까. 살인자의 마음을, 심정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좀 우습겠지만, 그(혹은 그녀)의 인생과 주변 인물들의 아픔에 일말의 동감이 간다고 해야할까.

난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품을 보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느낀다. '쇼와'로 시작하는 그들의 연대 읽는 방법부터, 패전 후의 피폐함, 전통과 현대의 부딪힘, 그 속에서의 사람들의 갈등,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민간의 여러가지 관습들 등을 보면서 이 추리소설이 꼭 일본의 추리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재삼 발견하곤 한다. 가끔 우리나라에도 이런 추리소설이 있다면 하는 생각도 가진다. 우리나라를 느낄 수 있는 추리소설. 참 멋지지 않을까.

팔묘촌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이 너무 미진하여 실망했었다면 이 작품 '악마의 공놀이 노래'로 다소 풀 수 있으리라 본다. 여기에서 긴다이치 코스케는 여전히 처음부터 짐작은 하지만 연쇄살인은 막을 수 없는 탐정으로 나오지만(사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이런 플롯으로 진행되곤 한다) 전체적인 얼개를 구성해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예의 그 뛰어난 추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도 긴다이치 코스케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더더군다나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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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7-2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빨리 보고 싶어요 ㅠ_ㅠ

비연 2007-07-20 20:58   좋아요 0 | URL
이매지님. 지금 바로 보세요..아마 못 놓으실 겁니당^^

오월의시 2007-07-22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싶네요. 리뷰 감사합니다^^

비연 2007-07-24 23:59   좋아요 0 | URL
까탈이님..반가와요^^ 꼭 보시길 권해드려요~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애널리스트
존 카첸바크 지음, 나선숙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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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첸바크의 책은 두 번째다. 첫번째 읽은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에 대한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이 책 '애널리스트'는 두말 않고 집어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을 읽기 전에 '애널리스트'를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는 거다. 작품성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조금 뜨뜻미지근한 기분이 들어서 개운치 않았다.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은 읽고 나서 한참 다른 책을 못 읽었었다. 뭐랄까. 나의 속을 다 들켜버린 기분이랄까.

내가 존 카첸바크의 작품을 좋아하는 건, 인간 심리를 아주 깊숙이 파고 들어 묘사한다는 점이고 따라서 이런 쟝르가 심리스릴러라고 한다면 앞에서 몇 번째에 놓아줄 마음이 들 정도다. 이 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진다거나 엄청난 살인극이 펼쳐지는 장면은 없다. 하지만, 죽지 않아도 죽을 것 같은 심리적 두려움과 상상에 아주 오금이 졸아드는 경험을 여러번 하게 된다.

주인공, 리키 스탁스는 50대의 정신과의사이다. 오래 전에 아내를 암으로 잃고 자식도 없이 환자들 진료하고 일년에 한번 가는 여름 휴가 정도가 큰 이벤트인, 칸트처럼 매일이 변화없이 정석대로 움직여지는 사람이다. 그렇던 그에게 어느날 한 장의 협박장이 날아들게 된다. "나는 당신의 과거 어딘가에 존재하지. 당신은 내 인생을 망쳤어. 그 방법이나 이유, 시기조차 알지 못하겠지만 그건 사실이야. 당신은 매순간 내게 불행과 슬픔을 주었어. 내 인생을 망가뜨렸지. 이제 나는 당신을 철저히 파멸시킬 생각이야." 라는 내용의 끔찍한 편지는 15일 이내에 자신을 찾지 못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면 주위의 누군가가 크게 다칠 거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내용은 이 때부터 흥미진진해진다. 이 범인이 누구이고 왜 나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아나갔는가를 찾아나가는 과정은 단지 범인모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순간의 나로부터 지금의 나까지의 역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범인이 누구인가? 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게 아니라 '나'를 규정하고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것에 있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진실에 가까워진 리키 스탁스는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그에게 다시 복수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으로 변모를 하게 되고, 이전의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정신과의사로서 무료하게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천직인 줄 알고 살았는데, 좀더 생활을 나름으로 즐기고 그러면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삶에 만족감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가 또한 인상적이다. 그리고 마지막 범인과의 대치에서, 리키 스탁스가 선택한 길은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매우 처절한 방법이었고...

사실 읽으면서 '탈선'이라는 책과 거의 비슷한 구도다 라고 느끼는 바람에 그 재미가 좀 반감되고 그래서 흥미가 100% 발휘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매우 독특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평온한(혹은 지루한) 일상에 섬광처럼 다가온 협박이라는 낯선 방식에 대응해서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 나가고 분석해 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새에 저질러졌을 지도 모르는 뭔가를 발견해나간다는 것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와서, 문득 나조차도 나의 과거를 한번 훑어보게 되었다. 심리스릴러에 대해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크게 감탄해서 아하~ 이거야~ 라는 말은 안 나와도 적당히 머리 써가며 적당히 작품 속의 심리묘사들을 스스로에게 대입해가며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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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7-17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결말에서 좀 놀랐어요^^;;;

비연 2007-07-18 09:01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구나^^ '탈선'과 비슷한 결말인지라. 전 어느 정도 예측이 되더라구요..ㅋ
 
살육에 이르는 병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시공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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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 한 달 여만의 리뷰다. 읽은 책들은 쌓이는데, 그게 타이밍이라는 걸 놓치면 리뷰 쓰는 게 영 요원해진다. 내내 께름칙한 심정으로 밀린 리뷰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탁 놓아버렸다. 에고. 이제부터 읽는 걸로 쓰자구. 그렇게 해서 손에 든 두 개의 추리소설이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 과 이 책, <살육에 이르는 병>이다. 둘 다 워낙 회자되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사실 후자를 고르는 데에는 나름 많은 고민이 있었다. 제목도 그렇고('살육'이라니...평생 한번 쓸까말까한 단어 아닌가) 표지도 그렇고 들려오는 소문에 따른 내용들도 그렇고 이걸 꼭 읽어야 할까 수차례 망설이다가 그래도 '신본격'이라 하고 이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의 대표작이라는데 안 읽을 수야 있겠는가 하면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결국 정말 오랜만의 리뷰를 이 책으로 택한 걸 보면, 그 선택이 좋았는 지 나빴는 지는 몰라도 대단히 인상적인(?) 책인 것만은 분명한가보다.

연쇄살인사건. 그것도 죽은 여자의 시체를 상대로 성교를 하고 성기를 잘라 가져가는 범인은, 책의 첫 부분부터 밝혀진다. "...정말로 네가 죽인건가?" "예?.....아아.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시간을 교차해가며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바꾸어가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전직 경부였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아내를 먼저 보낸채 외로이 살고 있는 히구치 다케오. 그를 사랑했던 여자가 이 연쇄살인사건의 희생양이 되자 죄책감에 사건에 깊게 개입하게 되고, 결국....우여곡절 끝에 범인을 잡게 되는데...

책 앞 표지 오른쪽 상단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빨간 박스 안에 쓰인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정말, 읽는 내내 속에서 욕지기가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구체적인 상황 묘사, 엽기적인 살인자의 심리구조와 행각,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반전이라고 말하는 그것. 정말 예측하기 힘들다..). 읽지 말아버릴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끝까지 읽은 건, 작가의 뛰어난 역량 덕분이기도 하지만, 결국 말하려는 게 뭘까라는 단순한 호기심도 한 몫했다.

그런 생각하기도 싫은 내용을 차치하고라면, 이 책은 잘 짜여진 플롯과 작가 나름의 사회 문제에 대한 치밀한 분석, 트릭을 숨긴 채 여기저기 암시만을 두는 작법, 한 방에 독자들의 머릿 속을 날려버릴 정도로 마지막까지 예측을 불허하는(물론 예측은 한다.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내용의 전개 등으로 매우 잘 된 추리소설이다. 별 다섯개를 주어도 충분하겠으나, 정말이지 책을 덮고 나서도 남는 이 찝찝함, 아니 그것을 넘어선 구토가 별 한 개를 확 지워버리게 한다.

현대 사회의 뒤틀린 억압의 구조. 가족관계의 변질. 부모와 자식과의 왜곡된 관계들. 이런 것들이 결국 한 사람의 살인자 머릿 속에서 얼키고 설키고 알 수 없는 것들로 변모하여 살인이 일어났지만, 종래에는 이것이 살인자 하나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잔인한 양태로만 드러나는 것도 아니나 기실은 사회의 곳곳에 알게 모르게 숨겨져 우리의 정신을 왜곡시키는 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아무래도 이런 류의 추리소설은 인정은 하지만 썩 내키지는 않는 것 같다. 현실적인 것도 좋고 예리한 것도 좋고 사회심층적인 분석능력도 좋고 다 좋은데, 마치 지옥에 쑤욱 빠져버려 더 이상 다른 데로 갈 수 없는 것만 같은 기괴함과 절망을 안겨주어 그게 생각보다 오래오래 마음 속에 박혀지는 듯 해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 책을 지금부터 들고 읽으실 분들이 있다면, 아마 조금은 각오하고 읽어나가는 게 좋을 듯 하다. 나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어 점심도 거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지 말라고 붙잡지도 않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게 충격적인 내용과 결말을 말하지 않으면 우리가 느껴야 할 것들,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그냥 손가락 사이에 빠지는 모래알마냥 쳐다보기만 하거나 혹은 모른 체하기만 할 수도 있어서이다. 살인 하나하나의 엽기적인 행태들에 집중하는 바람에 진정한 본질을 흐리지 말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족을 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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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03-25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네요 님.

비연 2007-03-2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흠..궁금하실 거에요...^^;;;; 추리소설 좋아하시면 한번 읽어보심도..
(정말 엽기적인 거 못 견디신다면, 권해드리고 싶진 않구요...ㅜㅜ)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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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우울하다. 아니 우울하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지 모른다. 말하자면, 범인이 범인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냥 하나의 인간으로서 가슴 아프게 다가오도록 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고나 할까. 예전에 읽었던 '백야행'도 그랬고 이번에 접한 이 '용의자 X의 헌신'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천재 소리를 들었으나 지금은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선생님인 이시가미는 40대의 독신 남성이다. 우연히 옆집에 살게 된 야스코라는 여자에게 남다른 호의를 가지고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러다가 야스코가 자신을 계속 못살게 굴던 전남편 도미가시를 살해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이시가미는 야스코와 그 딸 미사토 모녀를 구하기 위해 '헌신'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형사 시리즈물에나 나올 법한 이 평범한 내용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묘한 반전을 예고한다. 그리고 마지막 몇 페이지를 읽는 동안에는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를 감싸고 하는 단순한 문제는 아랑곳없고 그저 한 남자의 더할 나위없는 '헌신'에 대한 가슴 아픔만이 읽는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 결말을 말한다면 스포일러가 될테니 더 이상의 언급은 할 수 없으나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누구나 마지막에선 다 같은 심정에 사로잡혔을 게다.

사람이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누구는 그 재능을 몰라서, 또 누구는 그 재능을 확실하게 알면서도 여건이 안되어 그렇게 살도록 허락되어지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은 전자에 속하겠지만, 이시가미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자신의 관심사와 재능을 썩일 수 밖에 없는 불운한 천재의 경우는 전자에 비해 사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우리라. 그 외로움과 덧없음에 힘들어하다가 어느날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사실 그들은 그냥 한 일이지만 말이다) 두 모녀를 만나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바보같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딱히 천재가 아니라도 사람 사는 게 그리 녹녹하지 않고 또 숱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늘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에서 낯선 사람의 따스함과 미소가 어떤 순간엔 우주보다 크게 다가올 수도 있으리라는 걸 동감한다. 그래서 이시가미가 한 그 어처구니없는(현실적으로 보면 그리고 그 친구인 유가와가 볼 때도 참 어이없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행동과 계획이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어도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하면 말이 안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본 추리소설은 참 여러 부류가 있지만,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들은 여타의 것들과는 좀 다르게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아릿하다. 추리소설이 그냥 추리에만 그쳐서 트릭을 해결하는 쟝르로만 구실한다면 인간적인 매력이 떨어지겠지만 이렇게 삶과 사람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풀어나가는 추리소설들은 그 얄팍한 쟝르를 뛰어넘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 안겨주어 추천할 만 하다. 

다만 좋은 책임에도 몇 가지 지적할 것은, 오타와 역자의 글이다.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오는 오타들은 늘 그렇듯 책에 대한 호감도를 절대적으로 떨어뜨린다. 또한 아무리 책의 말미에 있다고는 해도 역자의 글이 스포일러성 글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한다. 이 책의 묘미는 그 마지막의 몇 장에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역자는 그 내용을 너무나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아차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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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9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연 2006-09-29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이따가 몇 가지 물어볼께용...^^ 기대만빵 비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