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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평점 :
[삼 년 전 은하가 차디찬 회복실에서 깨어나 한 결심은 이런 것이었다.
삶에 피하지방처럼 껴 있는 모든 영양가 없는 관계들과 결별해야지.
그것들이 은하 인생에 달라 붙어 얼마나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일으켜왔는지는 막 수술을 마친 은하의 몸이 증거하고 있었다.]
-<은하의 밤> 중에서
마흔 여섯의 은하는 유방암 선고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주변 지인들에게는 갑상샘암에 걸렸다며 쉽게 회복 될 것이라고 속였다.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은하는 엄마와 함께 다녔던 성당 마저 발길을 끊어 버리며 이렇게 스스로 벌을 받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수술 후에 찾아 온 극심한 통증,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하면서 은하는 자신의 생명이 이렇게 고통 속에 서서히 산화 되고 있다는 사실에 울적해졌다.
미혼인 채로 늙어가는 건 괜찮지만 어느 날, 치료 중에 홀로 죽게 된다면,,,이라는 자조적인 생각에 사로 잡힌다.
'고모, 요즘엔 부모도 자기 자식한테 그런 기대 안 해요. 바라지 마세요.'
암 발병이 시작 되기 전 은하는 방송국 예능 프로그램 작가로 한 순간도 쉼 없이 달려 왔다. 암 투병을 하는 동안 가족들 보다 직장 동료 후배들이 은하의 상태를 더 걱정해주며 항암 치료로 고통스러워 할 때는 집안 청소와 설거지를 해주는 후배, 신입 막내 작가들이 살뜰 하게 챙겨주었다.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발병 이전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 삶에는 오로지 고독 크기를 잴 수 없이 크고 깊은 고독만이 필요 하리 라는 결론이었다.]
은하는 암을 도려내고 난 후 육체의 한 부분이 떼어져 나간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홀로 남미로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이른 봄, 방송국으로 돌아 와 지지부진한 시청률의 늪에 빠져 버린 예능국으로 복귀한다.
남들 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 한 은하의 바로 옆 자리에는 보도국 아나운서 출신의 딱지가 붙은 덩치가 산 만한 남자 오태만이 앉아 있다.
조직 개편을 한 날 보도국에서 예능국으로 굴러 들어 온 불운한 낙오자 오태만은 구체적인 업무 담당 조차 받지 못한 채 ,섭외로 바삐 뛰어다니는 은하의 동태만 살피고 있다.
남 국장은 4차 산업 시기에 귀농하는 청년들의 인생 역전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암투병에서 살아 돌아온 은하는 사람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역전 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보도국 출신 오태만은 뉴스 보도 주제를 찾듯 취재를 하기 시작한다.
조직 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군림하는 자는 바로 한가하게 유유자적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상사이고 더 두려운 존재는 가족 모두 해외로 보내서 홀로 살고 있는 기러기 신세로 24시간 회사 일에 매달리며 직원들에게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 상사 일 것이다.
인생 역전한 귀농 청년들에 관한 프로그램의 이름은 <마망자들>로 정해지자 프로그램을 이끌고 채워 나갈 진행자와 게스트들을 섭외 하고 프로그램의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미션과 상금을 걸기로 한다.
상금의 액수를 얼마로 정할 지 실강이를 벌이는 동안 은하는 정규직인 담당 피디 지민과 충돌한다.
아무리 이름난 작가여도 방송국의 개별 프로그램들 방송 되는 동안에 일하는 계약직이기 때문에 자칫 정규직 피디들과 충돌 했다가는 곧바로 일자리를 잃게 되기에 아홉 번 도전 만에 겨우 아나운서 시험에 붙은 오태만에게 이런 저런 하소연을 늘어 놓는다.
보도국에서 예능국으로 굴러 들어 온 오태만은 아나운서 시험에 여덟 번 떨어 졌을 때 훌쩍 쿠바로 떠났다. 은하는 항암 치료 후 암 세포가 제거 되자 마자 홀연히 쿠바로 떠났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함께 회식 자리에서 고기를 굽던 피디 지민은 암 항암 치료 후에는 단백질 섭취가 필수 라며 자신의 엄마가 유방암 투병 했다는 말을 꺼낸다.
은하가 자신의 암이 갑상샘 암이라고 속였지만 아이돌 출신 방송인을 통해 유방암 투병 중이라는 걸 그녀의 모든 지인들이 알게 되었다.
'모두 방송계에서 계속 볼 사이잖아요. 이 바닥에서 위성처럼 빙글빙글 돌며 만나고 헤어지고 할 사이요. 방송국이 폭발하지 않는 한 함께 있을 운명이고요.'
뉴스 화면을 장악 하기에는 인물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도국에서 쫓겨난 오태만은 오로지 발로 뛰어 다니는 취재와 섭외가 중요한 예능국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프로그램 장소를 찾느라 무리 할 정도로 기여코 산에 올라가는 오태만, 입과 코를 가리고 있던 마스크가 순식간에 불어 온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오태만은 젖어 있는 덤불에 미끄러져서 발목을 다친다.
은하는 자신도 함께 미끄러질 수 있는 상황에 발목을 다친 태만을 부추켜서 겨우 산 아래로 끌고 내려 와 간신히 연출 부 사람들에게 구조 요청을 한다.
섭외 장소인 식당에 도착한 은하는 주인 할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식당 안과 방을 둘러 보다가 대 식구가 모여 찍은 사진에 쓰여진 '회갑 기념' 문구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뭐 바랄게 있겄어. 그냥 아프지 마라, 허지.'
'아프지 마라. 죽어서도 아프덜 말고 살아서도 아프덜 말고 그 말벢에 더 있겄어.'
드디어 <마망자>가 방영 되는 날, 방송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은하는 창밖을 내다 보았다.
눈이 오고 있었다.
은하가 눈 오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 시키고 있는 동안 8시 뉴스가 시작 되기 전까지 후속 작업 편집이 끝날 수 있는지 오태만과 피디 지민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파업으로 시끌벅적한 방송국 내분 상태에서 시작 되는 아홉 시 예능이 성공 할 수 있을까?
시청자들은 방송국의 이런 복잡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보도국에서 추방된 아나운서들의 시위 목소리가 점점 크게 울리더니 뉴스 방송 중에 거리 현장에서 취재 중인 기자 뒷 편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난다.
'국민 여러분, MTN 부당 전보의 진실을 보도하겠습니다! 보도국 정상화 투쟁 중입니다. 저는 앵커 최지영, 김무한, 정치부 기자 주성태...'
뉴스 화면에서 곧바로 광고 화면으로 넘어 가버렸다.
<마망자들> 프로그램 출연 게스트로 준비 중인 오태만을 급히 호출하는 피디와 작가들
'나와, 나와요. 오태만 씨, 지금 사고 났어. 얼른 테이프 틀어야 해. 뉴스 사고 났다고.'
보도국에서 추방된 이들의 항의 시위로 뉴스 방영도 중단 되었고 뒤이어 방송 되는 아홉시 예능 <마망자>는 단 1초도 방영 되지 못했다.
'뉴스에서 그런 사고가 났는데 보도국 퇴사자가 상 받는 프로를 냈어 봐요. 일이 더 커졌겠죠.'
입봉작을 열심히 준비 했던 작가의 울분을 달래는 피디 지민, 첫 예능 방송 작가로 인생 역전의 꿈이 무너져 버린 막내 작가는 은하에게 쿠바에 가서 무엇을 위로 받고 구원 받았는지 묻는다.
'아, 그게 쿠바 였구나 페루 아니고.' 라며 말을 돌리며
'응, 구원이 있긴 있었더라고.'
은하는 쿠바에서 사흘 째 되던 날 문득 바다라도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해변으로 나갔지만 신기한 듯 홀로 있는 동양인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서 한적한 숲 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걷고 또 걷다가 목 속 깊은 곳까지 모래 알들이 올라오듯 갈증이 차올랐다.
물탱크에 연결된 수도꼭지에 입을 대려는 순간, 앙상하게 말라 버리고 송곳니가 멧돼지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온 개와 맞닥뜨렸다.
무서움에 뒤로 물러 선 은하가 수도 꼭지를 돌리자 개는 물이 뿜어 나오는 호수에 혀를 대로 찹찹찹 마시기 시작했다.
갈증에 목 마른 개와 은하, 홀로 이곳을 떠도는 개의 모습을 보며 은하는 자신은 절대로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은하는 창밖을 한번 바라보았다. 회사가 보도에 세워 놓은 대형 전광판으로 눈이 계속 내렸고 은하는 잠깐 조카 겨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가 신호가 가기 전에 끊었다.
잠시 후,,,
'고모 아까 전화 잘못 걸었어요?'
'아니'
'ㅋㅋㅋㅋ 다행이다.'
'고모 이제 안 아파요? 다 나았어요?'
크리스마스 이브, 새 하얀 눈이 하늘에서 흩날리는 동안 은하는 홀로 누운 방안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치지도 않았고 하느님에게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어떤 용서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 홀로 있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구원 되지 않는 날, 그저 그렇게 크리스마스 날은 흘러가고 있었다.
[멋지다. 멋져. 방송하는 사람은 말이야. 바로 은하 작가처럼 넓은 세상을 체험해야지. 망망대해를 헤밍웨이 처럼 일엽편주로 나가서 청 새치도 낚고 고등어도 낚고, 이 작업 해보고 저 작업 해보고, 그래서 은하 작가가 훌륭한 작가이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거지]
명절이나 자신의 생일 조차 제대로 챙기거나 기념하지 못한 채 오로지 방송 프로그램을 위해 살아 가고 있는 사람들....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이 잃은 사람에게 전해주던 그 기적 같은 입김들이 세상을 덮던 밤의 첫눈 속으로....'
김금희 작가가 독자들에게 내미는 선물 같은 스토리 <크리스마스 타일>
우리 모두 각기 다른 어려움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고독을 경험하며 2022년의 시간을 통과 하고 있다.
한 해의 끝 자락 11월, 그리고 12월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르게 되면 앞 서 흘러간 시간들을 이겨낸 우리 모두에게 축복하듯 하늘 높은 곳에서 새하얀 눈송이가 쏟아지길 바란다.
하늘 가득 눈 가루가 내릴지 모르는 그날, 2022년 12월 25일, 우리 모두의 행복을 빌어주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