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 골로비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친지 여러분께 사랑하는 남편, 항소법원 판사 이반 일리치 골로빈이 1882년 2월 4일 운명하였음을 삼가 알리는 바입니다. 발인은 금요일 오후 1시 입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중에서

항소 법원 판사로 재직했던 이반 일리치 골로빈은 마흔 다섯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부고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된 법원 고위급 인사들은 공석으로 남아 있는 그의 자리에 자신들의 측근이나 동료들의 자리 이동과 승진에 대한 기대감을 가득 품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자리로 이동하게 되는 이들은 개인 집무실은 물론 연봉까지 오를지 모른다는 생각만 할 뿐 법원 동료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없다.

그저 자리 이동과 보직 변경만 생각하는 동료들은 죽은 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깊이 안도 하고 있다.

이들 중 이반 일리치와 법률 학교를 함께 다녔던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예의 상 추도식에 참석해서 미망인과 남겨진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 마지막 발인 날 이반 일리치의 집 앞을 찾아 간다.

그는 관 속에 누워 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지만 머릿속은 카드 놀이를 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들로부터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순간, 사흘 밤낮으로 끔찍할 정도로 고통속에서 죽어갔다는 소리를 들은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자신에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의 마음을 진정 시킨다.

떠나간 이를 향한 슬픔에 잠긴 가족들의 울음 소리를 뒤로 하고 친구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서둘러 카드 게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친구 집으로 향한다.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

빼쩨르부르그의 정부의 여러 부서와 보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던 고위 공직자의 셋째 아들 이반 일리치, 똑똑하고 활달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예의 바른 청년으로 성장 하면서 법률 학교 전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십등문관 지위로 공직 생활을 시작 했다.

그는 최고급 상점들을 돌며 한 껏 치장한 이반 일리치는 성실한 직무 수행과 청렴 결백함으로 서서히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예심 판사가 되어 새로운 부임지로 이사한 후 권력층과 상류층,정부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을 교류 하며 살아간다. 그는 이곳에서 명망 있는 귀족 가문 출신의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라는 여자와 결혼 하고 난 후 서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인해 크게 충돌한다.

이반 일리치는 매사 모든 일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며 욕을 퍼부어 대는 아내에게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의 일에 매달리며 이전 보다 강한 출세 욕에 불타오른다.

사교계와 공직 사회에서 인정 받았듯이 이반 일리치는 가정에서도 일련의 원칙과 규칙을 세워 두고 적당한 거리를 둔다.

그가 아내에게 바라는 건 그저 따뜻한 식사와 집안 관리 그리고 잠자리 뿐으로 이 세가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어져 버리면 그는 일터로 돌아가 버렸다.

남편이 승진을 해서 새로운 근무지에 배정을 받아도 아내는 전혀 기뻐하지 않고 생활비를 대기 힘들 정도로 빠듯한 봉급 탓을 했다.

아이들의 양육 문제 부터 사소한 문제들로 인한 충돌로 인해 이반 일리치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서서히 줄여 나간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이반 일리치는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을 가장 좋아 했다. 부하 직원과 피고인들로 부터 전해져 오는 존경 어린 시선,지역 사회에서 과시 할 수 있는 직위,고속 승진 하는 기쁨 까지 맛 볼 수 있는 곳

이반 일리치는 동료들과 대화 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고 이들과 함께 식사하며 카드 놀이를 벌이는 나날로 하루 하루를 채워 나갔다.

1880년 인사 이동에서 뒤쳐져 버린 이반 일리치는 생활비를 줄여 보기 위해 시골로 낙향 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가족들을 먹여 살릴 정도의 연봉 5000루블이 보장 되는 곳을 찾아 다닌다.

러시아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인사 이동이 이뤄졌던 시기에 그는 뜻밖에도 이전에 근무했던 법무부로 부터 높은 연봉의 보직을 맡게 된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 되고 있었고 결혼 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웃음 꽃을 터트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원했던 연봉과 보직을 맡은 이반 일리치의 인생은 사교계로 진출하면서 허영심으로 잔뜩 부풀러 올라서 온갖 부류의 친구들과는 더 이상 연락은 커녕 집으로 초대 하지도 않았고 초라한 시민들 궁색해 보이는 이들과는 일절 교류 하지 않았다.

모든 가족이 건강했고 매주 주말 마다 열리는 파티에는 최 상위층 사람들만 찾아 왔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몸 속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인해 일터와 가정에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통증을 세심히 관찰하며 의사를 찾아 다니며 의학 서적을 읽고 치유 되고 있다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지만 병세는 빠른 속도로 악화 되어 갔다.

그는 극심한 통증은 오로지 자신만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 했고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병환 상태를 전혀 이해 하지 못하며 괴팍 해져 버린 성격 탓으로 치부 해버렸다.

가족으로 부터 외면 받고 함께 카드 놀이를 할 정도로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들 조차 그의 병세가 악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 하지 않았다.

스물 네 시간 멈추지 않는 통증의 고통 속에서 진정으로 이반 일리치의 병세를 함께 아파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 하지 않았다.

'내가 없다는 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가?

내가 없어지면 그럼 난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정말 죽음인가? 아니야. 죽고 싶지 않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중에서


여기, 죽고 싶지 않은 한 남자가 있다.

도쿄 시청에서 30년 동안 근무한 만년 과장 와타나베는 자신의 책상 위에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서류더미를 떠올리며 현재 병상 침상에 누워 있다.


'그는 위암에 걸렸지만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화<이키루>의 첫 화면에서 보이는 진찰실 장면은 섬뜻할 정도로 죽음의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방금 전 위암 판정을 받은 와타나베를 제외하고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진찰실엔 마치 저 멀리서 지켜 보고 있는 저승사자가 대기자를 기다리듯 와타나베가 앓고 있는 위암 증상을 건조한 독백으로 읊조린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돌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실상 살아왔다고 보기는 어렵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와타나베는 이전처럼 먹고 싶은 데로 먹고 마시고 싶은 데로 마실 수 없다.

퇴근 후 평소 술을 입에도 대지 않던 와타나베는 이날 술집에 들어가 값비싼 술을 들이키며 이렇게 말한다.

“이 술은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항의 표시야.”


와타나베는 시청 공무원으로 30년이나 근무하는 동안 책상 위에는 늘 상 서류더미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부하직원들은 일하느라 분주한 척하지만 막상 실행되는 일은 하나도 없이 그저 그날 그날 접수되는 민원서류에 결제 도장만 찍는 만년 과장이다.

그렇게 별탈 없이 굴러갔던 자신의 인생에서 어느 날 암 진단을 받은 와타나베는 술잔을 기울이다 여태껏 살아 오는 동안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 놓은 것이 없이 죽는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치밀어 오른다.

사직서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여직원에게 와타나베는 단 하루 만이라도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며 파친코 장과 영화관을 돌아다니다 여직원에게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 여직원은 와타나베에게 어서 남겨진 자식을 만나러 가라고 부추기고 그는 여직원의 말대로 아들을 만나 자신의 위암 투병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가로 막으며 남은 재산 여자에게 탕진하지 말고 자신에게 달라고 소리친다.

그날 와타나베는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눈물을 터트리고 카메라의 시선은 멀찍이 방 한 켠에 놓여있는, 와타나베가 시청에서 받은 근속 25주년 기념 상패를 비춰준다.

밤 새 눈물을 흘린 와타나베는 마지막 자신이 죽기 전에 세상에 가치 있는 일, 즉 공무원으로 시민들을 위한 어떤 일을 하나라도 하기 위해 버려진 땅에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원서류를 받자마자 즉각 빈민가 주택가의 한가운데 있는 물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 간다.

민원을 들고 각 부처들의 행정관련 서류를 챙기며 공사 허가를 받기 위해 미친듯이 뛰어다니는 와타나베를 보며 시청 직원들은 그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시체 같은 '미라'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던 그가 미쳐 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한부 인생 3개월을 남겨 둔 와타나베 과장은 시청의 이 부서 저 부서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결국 물웅덩이를 없애고 그 자리에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 도 된다는 시청 건축 심사를 통과 시킨다.


3개월의 시간이 흘러 시청 공무원들이 와타나베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와타나베가 마지막 순간 왜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는지 떠올려보지만 고인의 영정 앞에서 왁자지껄한 웃음과 시덥지 않은 농담들을 주고 받으며 먹고 마시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당신은 나라의 미래가 닫힌다 해도 자신은 나이가 들어 얼마 못 살 테니, 책의 지식 만은 어떻게든 지닌 채로 죽자, 라고 말할 사람 아닌가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을까.]

                                                          -오에 겐자부로의 <만년의 양식집> 중에서


2023년 첫 해의 시작인 1월의 마지막 날, 오에 겐자부로가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일본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동아시아 국가를 피와 폭력으로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자신의 국가를 향해 전후 평화 재건, 원폭 피해 고발, 천황제 및 헌법 9조 수정 반대와 같은 국내외 정치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며 평생 동안 국제사회 평화 운동에 헌신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였다.

오에 겐자부로는 아베 집권 당시 헌법 9조 수정을 추진했던 2014년 평화 헌법 수호를 위한 ‘9조의 모임’ 일원으로 아베 뒤통수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고 한국의 땅과 사람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에 대한 속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은 평생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속죄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의 근본입니다.'

                                                                             -오에 겐자부로(1935-2023)


2023년 1월 31일 일본에서 오에 겐자부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열흘 뒤에 공식적인 발표가 났던 건 가족들의 요청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발생 할지 모르는 정치적 혼란과 동요를 잠재우기 위했던 것이 분명하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고작 몇 차례 일어날까 말까다. 자신의 삶을 좌우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조차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많아야 네 다섯 번 정도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 번 정도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


오에 겐자부로와 함께 원전 재가동 반대에 나서는 등 탈핵과 환경,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세계적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2023년 3월의 끝자락에 눈을 감았다.

인두암 판정을 받고 치료 중이였던 2015년 아베 정권이 자위대 국외파병의 길을 열기 위한 안보법안을 처리하려고 하자 반대집회에 직접 참석해 마이크를 잡았고 세상을 떠나기 일 년전인 2022년 도쿄신문에 일본 정부의 원자력발전소 재운영 정책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쓴 글을 기고 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2000년에 들어서면서 건강 이상으로 큰 수술을 마치자마자 그린란드를 둘러 보며 기후변화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고 삼림 보전 단체 ‘모어 트리즈’를 만들었고 암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갔음에도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칠 수 있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설립 했다.


[인간의 수명이 80세에서 90세까지 길어진 것은 기껏해야 최근 30~40년 사이의 일입니다. 20만 년으로 알려진 인류의 긴 역사와 의료 시스템이 없던 시대를 생각하면 과연 무리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괴롭고 힘든 치료를 거부하고 최소한의 케어만으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가치관을 조금 더 허용하는 세상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방사선 치료와 외과 수술을 받고 화학 치료까지 병행하려는 스스로의 모습에 모순을 느낍니다. 신체보다 의식이 훨씬 보수적이라는 사실에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살다 자연스럽게 죽어가는 것이 동물 본래의 순리이자 생명 본연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인간만이 거기에서 벗어나 있죠.]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


오에 겐자부로와 류이치 사카모토의 인생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20세기 최대 사상가이자 실천적 지식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는 백혈병 투병 중에도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가 발표한 팔레스타인 평화 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제국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2003년 생애 끝자락에서도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글을 썼고 오후에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기를 반복하다 세상을 떠났다.


'죽음 때문에 우리는 단 하루도 한가하게 지낼 수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이 땅을 떠난 지식인들 에드워드 사이드, 오에 겐자부로, 류이치 사카모토는 평생 동안 모든 인간과 민족, 그리고 문화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며 다문화주의에 의한 인류 통합과 공존, 유연과 관용을 주장했다.

2023년은 기후 재난, 재앙, 전쟁, 전염병, 난민의 문제로 들끓어 올라 지구 반대편에서 지진과 재난으로 또 다른 반대편에선 무고한 생명들이 최첨단 무기와 폭탄으로 사라지고 있다.












[반세기 전 학생 시절, 재일본한국학생동맹(한학동)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본명을 이야기하고, 이제 막 조선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재일조선인 친구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음(ㅁ) 받침 발음이 잘 되지 않아 자신의 성인 김을 일본식으로 ‘기무’라고 발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걸 비웃거나 창피 주지 않고, ‘기무’도 ‘김’도 모두 金이라고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너는 자기 성조차 제대로 발음 못하니까 더 이상 조선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게 아닙니다. 좀 더 말하자면 저는 만약 조선어를 한 마디도 못하더라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 역사의 결과로,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런 사람이라면 충분히 대화할 수 있고, 같은 ‘조선인’으로서 만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서경식(1951-2023)


2023년의 마지막 몇 주를 앞 둔 12월 18일 서경식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 언론은 서경식 교수에 대해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장기수 가족이란 문구를 사용한다.

1971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던 서경식 교수는 당시 서울대에서 유학 중이던 두 형 서승, 서준식이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이라는 군사정권이 조작한 간첩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되자 그는 일본에서 두 형의 석방을 요구하는 구명 운동을 펼치며 일본의 리버럴·좌파 지식인들과 연대 하며 목소리를 높여 나갔다.

하지만 일본 땅에서 한국 정부가 발급한 여권 없이는 국외에 나갈 수 없는 재일 조선인으로 일본 땅에 갇혀 별다른 희망이나 기약 없이 두 형의 구명 운동을 하는 동안 갑작스럽게 부모님 마저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가 병실에서 투병하는 동안 서경식 교수는 프리모 레비의 책들을 탐독 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진보지식인들의 도움으로 유럽으로 3개월 간의 유랑을 떠난다.













[나에게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쁘게 움직이게 만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딘가 흘러 있을 빵조각을 발견하는 것, 육체를 소모하는 일을 피하는 것, 구두를 수선하는 것, 빗자루를 훔치는 것 혹은 나를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과 몸짓의 의미를 읽는 것 등.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다. 그리고 그것은 수용소에서 만의 일이 아니다.]

                                                                                                             -서경식


서경식 교수의 “차별과 박해에 짓눌린 증거, 이것에 저항하다 죽어간 증언”같은 기록을 써 내려간 책들이 일본의 주요 상을 수상하게 되고 마흔 살에 일본 대학 강단에 서게 된다.


'간토 대지진 때처럼 조선인을 죽이자고 이 강의실에 누가 들어왔을 때 이 방에 있는 학생 중 누군가가 나를 지켜줄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도 조선인을 죽이자는 무리에 들어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늘 합니다.'

                                                                                           -서경식(1951-2023)

분단국가의 ‘재외국민’, 비전향 정치범의 가족의 낙인이 찍힌 채 ‘난민’도 ‘국민’도 아닌 ‘반(半)난민’으로 살았던 서경식 교수는 생애 마지막 까지 ‘예술’의 시선으로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승산이 있든 없든 이념의 충돌이 극에 치닫는 이 시대에 ‘진실’을 이야기 했다.


영국 땅에서 11살 나이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를 처음 본 가즈오 이시구로는 매년 한 해가 끝나는 12월 마다 <이키루>를 보았다.

그는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 할  부터 영화 <이키루>를 여러 번 보면서  <남아 있는 나날들>,<너를 보내지마>, <클라라와 태양> 작품을 완성했다.

영미권의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비롯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가 된 가즈오 이시구로는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인 2018년 런던의 늦은 밤 식사 자리가 끝난 후 택시에 누군가 함께 동석하게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탄 택시의 뒷좌석에 합석한 동승자는 유명 배우인 빌 나이로 그의 모든 연극 작품을 찾아 다녔던 광팬 이시구로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떤 섬광을 보게 된다.

그 날 집으로 돌아 온 가즈오 이시구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를 틀어 놓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고 평소 알고 지냈던 연출자와 감독에게 연락을 해서 단  몇 일 만에 쓴 어떤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클라라와 태양> 원고를 완성하자 마자 곧바로 비밀스러운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간 갔고 택시에서 연락처를 주고 받았던  배우 빌 나이에게 전화를 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전화를 받은 빌 나이는 그에게 ' 방금 전 당신의 소설을 읽고 있었어요.'라는 말을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영국 전역을 덮치며 전 세계가 락다운 되었던 시기에 빌 나이는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건네 받은 시나리오를 단숨에 외워버리고  앞으로 몇 달 안에 연기하게 될 <그 남자>의 생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영화 <리빙> 시나리오를 감독에게 건네기 전에 이런 말을 시나리오 원고 맨 앞 장에 적었다.


'당신의 삶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남은 생에 진심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가즈오 이시구로(1954-)



2022년 마침내 영화 <리빙>의 제작진은 영화를 완성했고 빌 나이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만년 과장 공무원의 연기를 뛰어나게 해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2년 영화 제목은 ‘삶(生)’이 아니고 ‘살다(生きる이키루 )로 와타나베는 삶의 마지막 시간 동안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 놀이터를 완성하며 하루 하루 기적과 같은 나날을 살다 갔다.

우리 모두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반 평생 동안 글쟁이로 살았던 1949년 생 폴 오스터는 암 판정을 받았지만 두 권의 소설과 한편의 논픽션을 완성하며 마지막까지 글을 쓰겠다는 희망을 져버리지 않았다.


[왜 쓰는지 나도 모른다. 답을 안다면 아마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쓸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쓰고 또 쓰고 있다.

내가 글쓰기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가 나를 선택한 것이다.

글쓰기에서 돌아오는 보상은 거의 없다. 돈 한 푼 만져볼 수 없을지도 모르고, 유명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이 없다 해도 나는 쓰고 또 쓰면서 투병 중에도 여전히 쓰고 싶은 책 목록들이 있다.]

                                                                              -폴 오스터(1947-)

나는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 삶의 일상에도 변화가 시작되어 생각 없이 구글링 하는 시간에 쓰고, 쓰기 위해 책을 집어 들며 매일 글을 쓰고 있다.

단 하루에도 글을 쓰지 않고서도 살 수 있고 글을 쓰지 않아도 여러 최첨단 기기의 도움으로 쓸 수 있는 세상이지만 매일 글을 쓰는 동안 내 앞에 펼쳐진 자잘한 강 줄기를 발견하고 있다.

그 강 줄기는 지난 시절에 시작 했다 놓쳐버린 것들, 잊혀버린 것들, 지워버린 것들일 때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여러 실천 목록들이나 반드시 집고 넣어 가야 할 장애물일 때도 있다.

매일의 습관은 일상에서 발생하는 자잘한 균열에 슬기롭게 대처 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고 있고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보여 주기도 한다.

나에게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몇 시간을 위해 매일 나는 무언가 읽고 생각하고 상념하고 되새기며 머릿 속에 여러 개의 시물레이션을 띄운다.

쓰기 위해 읽고 읽고 쓰는 생활을 지속하게 되니 한국어 책과 영어 책을 1년 동안 800여권 가까이 읽었고 오늘까지 투비로그에 714개의 노트를 발행했다.

https://tobe.aladin.co.kr/t/scott


평온한 절망 속에서 살아갈 지라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인생조차도 기적 같은 생을 살다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만의 별을 품고 세상에 태어났다.

그 빛의 세기는 매일 무언가에 몰두하며 발 버둥 치며 어떤 목표를 향해 무모할 정도로 애쓰는 동안에도 빛이 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별,

정직하고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영혼.

모든 빛과 모든 영향력과 모든 운명을 통제하는 존재이니....

-랄프 월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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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12-27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00권!!!!스콧님 정말 어마어마하게 읽으셨군요 게다가 쓰기까지👏👏👏 대단하십니다👍 저 어제 빌 나이 나오는 러브 액츄얼리 봤는데 스콧님 페이퍼에서 또 이렇게 보네요ㅋㅋㅋㅋ근데 저 영화는...시한부 인생ㅜㅜ 우울할거 같아요

2023-12-27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7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27 1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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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책장 2023-12-27 1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올해 300권 넘게 읽었는데 scott님는 2-3배가 넘으니,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나오질 않아요.
저도 부지런떨며 2023년에는 더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써야겠어요!
scott님이 올려주신 글 덕분에 매년 제가 성장하고 있어요.
알고 있던 상식에 덧대기도 했고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때는 새겨들으며 기록하고 싶은 건 제 글쓰기 노트에 따로 기록하기도 했고요.
언젠가 인문책 하나 내셨으면 좋겠어요^^
scott님ෆ 많이 존경하고 좋아해요!

2023-12-27 1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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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12-27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3년에도 소중한 분들이 세상을 떠났네요... 얼마 전 서경식 님 부고는 진짜 충격이었어요. ㅜㅜ
스콧 님이 정리해주신 거 보니까 더더욱 빨리 이 분들의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진짜 대단하세요!! 읽는 것까지야 읽는다해도 글로 정리하는 게 에너지 소모가 더 크더라구요. 스콧 님 진짜 진짜 멋져요^^

2023-12-27 2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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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냥장판 2023-12-27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00권 이게이게 가능한거군요? 이반일리치 초반에 읽다 놨다 졸다 읽다 했더랬는데 나이든 지금 읽으면 다르게 읽어질려나요..
리뷰글에 급 책을 찾아 읽고 싶어지네요
얼마 안남은 23년도 마무리 잘하시고 건강도 늘 유념 하시구 내년엔 원하시는 일들만 가득 하시길 빌께요
오늘 갑작스런 뉴스소식에 안타깝던데 내년은 자살 뉴스는 없어음 좋겠어요
겨울 독감 조심하세요~~

2023-12-27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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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냥장판 2023-12-27 23:25   좋아요 1 | URL
오 유년시절과 함께 감사합니다 꼭 같이 읽어볼께요 제가또추천해주시는 건 무조건적으로 믿고읽죠
아 스캇님처럼 글은 못쓸지언정 한줄이라도 쓰자 했는데도 어김없이 깨어지네요 읽고 후기는 시간날때 하다 하나도 못쓰고 읽고만 있습니다 ㅋ 내년부턴 정말 한줄이라도 써야겠어요 기억이라도 하게

어쩌다냥장판 2023-12-27 23:26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약사아빠 소식에 ㅜ 어째어째만 되풀이 했네요 에효 불행한 사고 소식도 없어야 해요 내년엔 ㅜ

희선 2023-12-30 0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2023년에 여러 사람이 세상을 떠났네요 2023년 얼마 남지 않은 날에도... 다들 저세상에서는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하루하루 죽음으로 다가가겠지만, 그것보다 그저 살아간다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죽음도 삶의 한부분이죠 별 일 없을 때는 그런 거 잊고 살지만, 아주 가까이 다가오면 다른 느낌이 들겠습니다 그때도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밖에 다른 건 없을 듯합니다


희선

2023-12-30 1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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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2-26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모르겠어서 북친님들 리뷰를 찾아보는데 스캇님 리뷰가 제일 먼저 보였는데 정말 긴데 한참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마침 얼마전에 저도 리빙이라는 영화를 봐서 반갑기도 하고 아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구나 생각도 하고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도 꼭 보고 싶네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도 많이 사두었는데 얼른 읽어봐야 겠다는 다짐도 하고요. 😅

scott 2024-02-26 11:15   좋아요 1 | URL
이시구로 각본의 <리빙>도 좋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이키루 정말 오래전 제작되었지만 세기의 명작입니다.
아키라 감독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참고하고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키루>의 마지막 그네 장면에서 밀려오는 뭉클함은 이시구로의 작품을 잊게 만들 정도 입니다.

깨비님 2월의 꽃샘 추위 건강 잘 챙기세요.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북깨비 2024-02-26 14:40   좋아요 1 | URL
저도 대체로 오리지널을 좋아하는 편이라 꼭 이키루를 찾아 보겠습니다 ㅎㅎ

scott 2024-02-26 16:54   좋아요 1 | URL
오리지널이 쵝오 ^^
 

'오직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인류의 남녀를 비교할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1949년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 2의 성>을 출간 할 당시 프랑스 전체 사회를 뒤흔들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그동안 '여성은 자궁이다'라고 말해 왔던 프랑스 전체 지식인 계층을 넘어 오로지 남성의 시각만 반영 되었던 기존의 사회 법과 질서의 근간에 폭탄을 던져버릴 만큼 큰 파장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유럽 전역을 너머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동안 여성이라는 생명체에 관해 이토록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면서 총제적인 연구서가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가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하고 탐구 했던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으로 여성의 모성과 사랑, 권리와 기회를 주장 했기에 사상과 이념, 종교적으로 똘똘 뭉쳐진 집단으로 부터 거센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고심하는 모든 개인은 초월하고자 하는 무한한 욕구로써 자신의 존재를 경험한다.'


<제 2의 성>이 페미니즘의 초석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사회, 정치, 신화,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와 남성이 부여한 역할, 이미지, 사회적 활동 영역의 제한과 구분을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철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이라는 도구를 총동원해 분석했기에 페미니즘 이론의 사상적 기원은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출간 전 후로 나눠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읽었다.

당시 이 책은 우리 집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었는데 뜻밖에도 아버지가 구입해 놓았던 책이였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보부아르의 <제2의성>은 미국에서 1970년에 출간된 영역본 요약판을 한국어로 번역 출간 한 책이여서 읽는 동안 머릿속에 어떤 명확한 사상의 흐름이 형성 되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집어 든 <제2의 성> 역시 도서관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미국판 요약본이였지만 다행히 그 책에 수록된 상세한 주석에서 인용된 책들 참고해서 앞으로 내가 읽어나가야 할 책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나갔다.


'겉으로 보기에 사회적 차별은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그것이 여자에게 미치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영향은 아주 깊어서 마치 자연에서 기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중에서


<제2의 성>을 다시 읽게 된 계기는 대학 졸업 후 사회인이 되고 나서 부터였다.

나는 첫 사회 생활 시작을 절대 다수의 남성들이 상사로 군림하는 조직 세계로 들어갔다.

남성의 언어와 규율 체계가 조직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몸 소 체험하는 동안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든 체계와 법률 그리고 제도가 누구를 위해 존재 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글자를 처음 떼고 책을 읽기 시작 할 때 부터 부모님은 나에게 여성이 주인공인 스토리, 여성이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스토리를 선별해서 읽게 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긍심, 자존감을 세우는데 주력 하셨고 친인척들이 행하는 사소한 발언이나 행동에서 배어 나오는 성차별적 발언을 극도로 경계하며 그들에게 과감하게 경고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장 먼저 가부장적인 관습인 제사부터 없애 버렸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 날이면 그동안 쌓여 있었던 양쪽 가족의 묻혀있던 문제들이 모두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에 명절 날이면 친인척들 모두 멋진 곳에서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고 식사를 마치면 서로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각자 정해진 스케줄대로 이동하고 움직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폐혜와 병폐를 완전히 뿌리 뽑지 못했다.

'여자를 알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 안에서 오직 경제적 실체 만을 보는 유물사관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보부아르


1949년 보부아르가 제기한 남녀의 성적구분, 여성성, 모성 등의 문제는 여전히 페미니스트들 간에 이견과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이론의 초석이 되어 활발하게 논의되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데 큰 동력이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영국과 유럽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도 완전한 성평등은 존재 하지도 않았고 이들 국가의 법과 제도 역시 구시대 관습을 유지 하기 위해서 정치적, 종교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부유한 계층으로 올라 갈 수록 그들만의 규율과 관습은 여성에게 특히 엄격하면서도 차별적이였고 사회적인 이목과 관심에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유교적 관습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한국만큼 보수적이였다.

특히 백인과 히스패닉, 아랍계, 흑인, 아시안계 그리고 이민자, 난민 사이에서 서로를 향한 차별과 증오는 페미니즘으로 화합 하지 못할 정도로 집단과 계층, 피부색이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내가 다시 보부아르의 <제 2의성>을 펼쳐 들었을 때 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생각 보다 '어떻게 쓰였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 첫 장을 펼쳤다.


<제2의 성>을 집필하기 전 보부아르는 타자로서 여성이라는 생각 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사르트르의 사상과 철학과 연결 시켰고 사르트르가 그녀의 논리에 동의 하면 그제서야 이론적으로 체계를 다져나갔다.


이 시기가 보부아르의 나이가 서른 일곱 살 무렵으로 조금은 집요할 정도로 사르트르는 남성이고 나는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그와 나는 다르다'라는 매우 단순한 명제에서 역사적인 저술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을 오랫동안 주저해 왔다.'

보부아르


여성이 자기 삶의 '타자성'을 보지 못한다면 영원히 남성들이 주도하고 관할 하는 사회 속에서 영구적인 미이라처럼 어떤 성취도 어떤 결과물도 온전하게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노예들은 주인에게 복종했다. 그리고 여성은 남성이 주도하는 질서와 사회에 순응했다.

가족의 화목과 사회적 체면을 위해 여성들은 남성들이 제시하는 강압적 규율과 제도에 합의 했고 지지하며 서로 공모를 공유하며 어리석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자책하는 노예가 되었다.











[그중 외로운 여자 다섯 명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혹은 그들 탓에 조용하게 혼자서 미쳐가고 있었다. 모두 스스로에게 의혹을 품고 있었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이유에서 죄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예외 없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도리스 레싱의 <금색 노트> 중에서


여성이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이등 시민 지위라는 건 어떤 문서에도 표기 되지 않고 있지만 사회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자발적으로 지속적인 긴장 상태 속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21세기 현 시대에 '여성이 어떻게 여성이 되었을까?'


'내가 보기에 여성의 종속은 여성의 결혼이 중추적인 경험이라는 -남성과 여성 모두 공유하는 -확신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주로 여성들의 정신 에너지의 흐름을 감소 시켜 궁극적으로 파괴해버리지만 남성들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세상에 나 혼자이고, 절대 보살핌을 받을 수 없으며 삶은 공포와 욕망 사이 벌거벗은 전쟁이고 공포는 오직 스스로 즉 독립적으로 경험하는 능력에 의해 강화되고 갱신 되는 욕망의 급증을 통해서 만 잠시 물러난다는 불안한 지식 때문에 계속해서 정신 에너지가 주입된다.

                                                                                                  -비비언 고닉


현 시대 페미니즘의 가장 큰 과업은 여성의 경험적 자아를 다시 창조해서 각종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 잡아 나가야 한다.

그동안 각종 언론 미디어에서 늘 상 쓰여졌던 상투적인 문구들, 제도적 관습과 병폐, 성차별로 인한 불신과 왜곡을 새로운 의식의 관점으로 재 검토해서 광범위할 정도로 내부 변화가 일어 나야 한다.


'모든 정신분석학자에게는 선택이라는 관념과 그와 상관 관계인 가치라는 개념에 대해 일률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그것이 정신분석학 체계의 본질적인 취약성을 구성한다.'

                                                                                                        -한나 아렌트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특정 대상에 대해 분석 할 때 마다 환상과 망상에 젖어 들 때가 많다.

이런 현상은 지극히 원시적인 상태로 정신분석학에서 이런 상태를 분석할 때 프로이트의 '거울 이미지' 도구로 사용한다.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나 장난감, 선호하는 색깔, 취향, 성형들은 단순한 체계 분류로 선별해서 구별하고 특징 지으며 이것은 부정적인 징후 이고 이것은 긍정적인 상태라고 정신분석학 적인 분석을 내린다.

성의 구별을 떠나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가 태생적, 환경적, 유전적으로 다르다 이는 정신분석학 적으로도 사라져버린 기억이나 섬망을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따라서 남성에게 자주 발병하는 질병이나 여성에게 자주 발병하는 질병의 원인을 마치 거울 이미지에 비춰서 좌뇌와 우뇌의 인지적 통제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정신이 잠자는 상태'가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평생 동안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꿈 작업'에 몰두하며 의식에 감지 되지 않은 이미지를 사고 체계와 연결 시키는 연구를 했다.

이러한 정신분석학 적 관점에서 보면 페미니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분석을 하는 동안 어떤 카타르시스가 발생하지도 않고 어떤 트라우마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래된 자아를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역사적 사실과 경험을 기억해 내고 기억을 회복 시켜서 자아 의식에 투영 시켜 보는 과정 그 자체가 정신분석을 하는 방법과 비슷하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정신분석과 같다.


두 가지 모두 인간 성장의 과정을 분석하며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하나로 연결된다.

나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고 발전했는지 명징 하게 보고, 더 정확하게 기억해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온전하게 묘사하고 분석하는 동안 비로소 이 사회의 제도와 질서가 여성에게 어떤 차별을 부여하고 동등해야 할 권리와 의무를 짓밟고 있는지 알게 된다.


[여성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자연 크기의 두 배로 비춰주는 마법과 근사한 힘을 지닌 확대 경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힘이 없었다면 아마 지구는 아직도 늪과 밀림의 상태일 것입니다.

남성이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에서 최소한 실제 크기의 두 배인 자기 모습을 볼 수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계속해서 판결을 내리고 원주민을 문명화 하고 법을 제정하고 책을 집필하며 정장을 차려 입고 연회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버지니아 울프


수 세기 동안 문화와 역사의 기록은 곧 남성들이 저지르고 이룩하고 완성한 경험의 기록이었다.

그러니까 여성의 삶을 분석하고 묘사한 것들 모두 남성의 감수성에서 나온 것으로 특히 문학에서 남성이 묘사하고 창조한 여성의 이미지는 거대한 환상의 늪을 꾸준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20세기 두 차례 세계 대전으로 여성들이 사회에 전면 나서게 되면서 부터 남성들이 창조하고 기록한 여성의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이 세상은 '여성성'과 '여자다움'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전 우주적 질서 속에서 여성성을 찾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결국엔 이 지구상에서 여성으로 살아 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즐거움을 위해서 라면 몰라도 위대한 남성작가들에게 도움을 구하러 가봐야 소용 없습니다. 찰스 램, 토머스 브라운, 윌리엄 세커리, 버나드 뉴먼, 로런스 스턴, 찰스 디킨스... 누구도 여성을 도운 적이 없습니다.

여성이 종이에 펜을 대자마자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자신의 용법에 맞는 일반적인 문장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현대 사회는 숨막힐 정도로 빡빡하다.

우리는 도시 속에 갇혀서 온갖 기술에 둘러 쌓인 채 매일 사회라는 조직 속에서 감정의 죽음을 당하고 있다.

나와 너도 차별 당하고 있고 피해 당하고 있음에도 자연스럽게 이 모든 걸 운명이라고 받아 들이며 체제 안에 제도 속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어떤 인간의 문제도 편견 없이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1970년대 초에 페미니즘이 부활하고 난 뒤 몇 년 간 미국 여성들은 워낙 빠르게 승승장구해서 우리 할머니 세대의 삶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워낙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워낙 많은 장벽들을 무너뜨리다 보니, 페미니즘을 가장 열심히 반대했던 사람들마저도 여성운동이 일구어 낸 변화들을 뒤집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결승선에 다 와서 정신이 딴 데 팔려 버렸다. 우리는 명백한 흠모자에게서 반짝이는 싸구려 장신구를 받아 내려고 멈춰 서 버렸다. 그 흠모자는 시장이고, 싸구려 장신구는 해방의 언어를 새롭고 강력한 예속의 도구로 사용해 온 상업 문화의 풍료오움이다. 상업 문화에 예속된 미국 여성들은 이제 목숨은 부지하겠지만 너 자신을 잃게 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을 이행할 위험에 처해 있다.]

                                                                       -수전 팔룬디의 <백래시>중에서


2023년 현 시대를 곰곰이 살펴 보면 어쩔 수 없는 사회 문제에서 발생하는 가정 폭력과 학대, 데이트 폭력, 스토커 범죄 그리고 무차별 살인, 가벼운 처벌로 인한 보복 범죄로 조금씩 제도적 움직임은 일어나고 있지만 법 체계는 여전히 허술하고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을 정도로 폭력과 폭언,고발과 고소만이 끊임없이 전개 되고 있다.


[젠더 폭력의 트라우마를 논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단 한번의 끔찍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나 관계였던 것처럼 묘사한다. 마치 별안간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평생 물속을 헤엄쳐왔다면 어떨까?]

                                                                                             -리베카 솔닛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이 영화에서, 노래에서, 소설에서, 세상에서 살해되었고 지금도 어느 도시의 어떤 가정에서 폭력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고 어떤 국가 도시에서 여성은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이나 돌팔매로 잔인하게 살해 되고 있고 그리고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그리고 하마스가 기습 공격한 이스라엘 땅에서도 살해 되고 있다.

이런 광경을 영상으로 찍어 생중계로 송출하고 있고 어떤 단체에선 잔혹한 방법으로 여성을 구금하고 고문하고 학대하고 살인 하는 극우 단체에게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 여성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칼을 쥐고 총을 들어야 할까?

“구성적이고 인공적이며,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성의 본성을 음미하는 행위는 불가능하지만 너무나 강고한 현실에 처해 있는 우리를, 가능하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다른 곳(elsewhere)으로 이끌어 줄까?

우리 괴물들은 기존과 다른 의미화의 질서를 밝혀낼 수 있을까?

우리, 사이보그가 되어 지구에서 살아남아 보자!”

-도나 j.해러웨이


여자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종속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새로운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생각과 사고를 도출하기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잔혹하지만 태생적인 운명으로 살아야 한다면 세상의 낙원은 영원히 존재 하지 않을 것이다.


'노예제가 노예의 소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결코 여자의 소명이 아니다. '


2023년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다시 펼쳐 놓고 내가 누군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온전하게 깨닫기 위해 끊임없이 읽고 탐색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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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10-12 13: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제2의 성에 정말 도전하고싶게 만드는 글입니다. 항상 스콧님 글은 좋아요 말고 땡큐 백만개쯤 날리고싶은데 그건 왜 없을까요? 책은 이미 산 책이라 땡스투를 누를수도 없고... ㅠㅠ

2023-10-12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하수 2023-10-12 14:14   좋아요 2 | URL
저라도 땡투 남기겠습니다^^
넘 길어 길어 이러며 읽다보니 거의 있는책인데... 전 왜 읽지를 않고 있을까요!
ㅠ.ㅠ

scott 2023-10-12 16:05   좋아요 3 | URL
이 책 첫 장 부터 읽다가는 끝까지 읽지 못합니다.
은하수님의 눈에 들어오는 텍스트 부터 읽고 난 후에 부분 부분 읽다 보면 전체를 통독 하게 됩니다 ^^

2023-10-12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2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10-12 15: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헉 그럼 스콧님은 제2의 성을 세번 읽으신 건가요? 이제 네번째? 우와.
아버님도 넘 멋지시네요. 그 시대 쉽지 않았을텐데...
이 글을 이달의 페이퍼로 추천합니다!!

scott 2023-10-12 16:07   좋아요 3 | URL
완독만 세번 !^^
틈틈이 부분 부분 읽는 건 수시로 하고 있습니다.

울 아부지 그리하여 집안에서 눈엣 가시!^ㅎ^

괭님 행복한 오후 시간 보내세요 ^^

책읽는나무 2023-10-12 2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사다 놓으신 <제2의 성>이라니 참 인상적입니다.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딸의 양육에서 주변 친인척들의 말에서도 신경을 쓰신 대목을 읽으니 스콧 님의 행복했을 것 같은 성장배경이 상상됩니다.
그래서 직장생활에선 좀 많이 당황스러우셨겠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어주셨으니..^^

2023-10-13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3-10-13 0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님이 사다둔 《제2의 성》이었다니... 한번도 아니고 여러 번 보셨군요 이번에 다시 보시다니... 저것만 읽지는 않으시겠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곳에서는 아이와 여성이 가장 힘들죠 전쟁은 남자가 일으키기도 하는군요 여자 남자 다르기는 해도 사람이라는 건 같은데... scott 님 아버님은 집에서 제사도 빨리 없애다니 대단하시네요 모두가 함께 한다면 모를까 집안 행사 때 음식을 하는 건 거의 여성이겠지요


희선

2023-10-13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3-10-13 12: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글 정말 좋네요. 저 위에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좋아요를 백만개 누르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아쉽네요.

scott 2023-10-14 12:4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감은빛님 환절기 건강 잘 챙기세요 ^^

억울한홍합 2023-10-14 0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버님 세대에서는 누구나 나서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텐데 너무 든든한 아버질 두셨어요, 부러워요~~

scott 2023-10-14 12:50   좋아요 2 | URL
그리하여 저희 아부지
가문에서 빌런이 되셨습니다 ㅋㅋㅋ
 


“우리 삶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암초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인생의 너무 큰 몫을 출생이며 빈둥거리기, 수련 과정 따위에 할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 중에서


연이어 터지는 흉폭한 사건과 묻지마 사건으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치솟고 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행복과 기쁨 그리고 행운만 깃들 수 없지만 대한민국의 법과 제도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보호 받지 못한다는 것이 현재 2023년의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삶의 가르침이 되는 말은 어릴 때 부모님의 집에서 배웠다. 모두 엄격한 지혜였지만, 오래된 가재도구처럼 아름답고 단순할 뿐이었다. 그런 걸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경구는 항상 문장 하나로 표현되었고, 곧 마침표가 찍혔기 때문이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중에서

학교에서는 폭력과 욕설이 난무 하고 부모는 서로를 견제하고 헐뜯는 경쟁심으로 충만해서 10살 영재에게 근거 없는 비방과 협박 메일을 보내고 있다.

상처와 충격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 같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겨서 언제 어느 순간에 불쑥 튀어 나올지 모른다.

마치 주기적으로 감정의 높낮이가 오르락 내리락 하듯 하나의 상처와 폭행, 폭언으로 받은 상처가 어제는 견딜 만 했지만 오늘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떤 보상과 위로로도 완전하게 치유 되지 않는다.

산다는 게 이토록 힘이 든다는 건 인간의 운명인 것인가?

인간의 삶에 밀물과 썰물이 있다면 밀려 오고 쓸려 내려가는 시기와 간격의 고리에서 잠시 멈춤이라는 건 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속도에 얽매여 산다. 밤낮으로 빠르게 달리고, 다른 모든 일도 빠르게 처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우리를 둘러싼 네 벽이 고정돼 있는 것처럼 면도하고 밥 먹고 사랑하고 독서하고 업무를 본다. 섬뜩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그 벽들이 움직이고,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길고 굽은 더듬이처럼 벽의 레일이 계속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중에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죽은 딸,테니스 공에 맞아 즉사한 남동생, 세상에 둘도 없던 친구 라 보에시의 사망, 신장 결석증을 앓다 피를 쏟아 내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미셸 에켐 드 몽테뉴(1533-1592)는 38살이 되던 해 “남아 있는 삶이나마... 누구의 방해도 없이 지내다 죽겠노라' 다짐하고 조상 대대로 살았던 고향 프랑스 서남부의 페리고르로 귀향한다.

귀향 한 성 밖 너머 수시로 출몰하는 전쟁의 피 냄새가 끓어 올랐던 시기에 몽테뉴는 지름이 16보, 둘레가 50본 정도인 서재에서 칩거하며 1천 권 남짓의 책을 읽으며 종당 천장에 새겨 놓은 로마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시구를 지우고 이런 경구를 새겨 넣었다.


' 더 오래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

-몽테뉴


그가 이 시기에 써낸 『에세』는 근대 시대로 넘어가 마르셀 프루스트, 로베르트 무질,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에세이>라는 장르를 탄생 시키며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적 사유의 글은 인간의 내적 삶이 결정적인 사유를 통해 추출해낸 단 하나의 변할 수 없는 형식이 되었다.



[처음부터 나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이란 곧 작가를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일 때까지 계속 읽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더 큰 생각은 무엇일까? 진정한 경험은? 진짜 주제는? 내게 중요한 것은 답을 찾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비비언 고닉의'상황과 이야기' 중에서


나는 매일 글을 쓰면서 세상을 탐구 하며 내 안의 나를 다양한 각도로 살펴 보고 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사회와 가정에서 소비 되고 허비 되고 끌려 다니는 '내가' 아닌 주체적인 '내가' 된다.

1월 12일부터 투비에 매일 글을 쓰고 있으니 나역시 몽테뉴, 비비언 고닉처럼 에세이를 쓰고 있는 것이다.

https://tobe.aladin.co.kr/t/scott


[문학의 미래는 단지 책장에 책 몇 권을 덧붙이거나 위대한 여성 작가나 호메로스를 꼼꼼히 읽고 세련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에 관한 것이다. 나는 복수의 목소리와 복수의 관점을 담은 복잡한 소설들을 체험하는 것, 고통 받고 축하하고, 여행을 떠났다가 집에 돌아오거나, 그저 방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고, 친절하거나 잔인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소설들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 이 상상의 인간들은 실제의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낯선 것이 친숙해진다. 소설 읽기는 우리 정치적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 문제라면, 조직화, 적극적 저항, 더 강경한 수사가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야기들이, 좋은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시리 허스트베트의 어머니의 기원 중에서

한국에서 알랭 보통의 에세이들이 날개 돋치게 팔리는 동안 나는 뉴욕에서 시리 허스트베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그녀가 쓴 책들 기고한 에세이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다.

그 시기에 뉴욕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폭행과 범죄가 날마다 실시간으로 발생했고 대낮에 거리에서 아시아계들이 흑인, 히스패닉 부랑자들에게 피가 터지게 폭행을 당했던 시기였다.

다민족 국가로 이방인과 이민자들, 불법 체류자들로 넘쳐 나는 미국 뉴욕은 그야말로 아시아계들에게는 정글 같은 곳이여서 그곳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매일 아침 문 밖을 나설 때 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디에서든 안심할 수 없는 곳이다.

'여성은 성적 대상이 아니다.'라는 표어를 크게 적은 피켓을 들고 행진을 해도 아시아계 여성들의 인권 보호는 지켜지지 않는 곳이 뉴욕이다.


그 시기에 시리 허스트베트는 '여자가 성적 대상이면 남성도 성적 대상이다'라며 남성들이 품고 있는 성적 감성을 문장으로 낱낱이 해부 하는 기고 글을 썼다.

미국의 페미니즘은 2016년에 터져 나온 미투 사건 이전에 청교도적인 사고가 깊이 자리 잡은 곳이였다.


'성적 자유와 에로티시즘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한 시리 허스트베트는 법적으로 해석되지 못하는 '성차별'의 문제, 여성의 인권에 대해 심리학적 사유와 과학적인 사고 방식으로 분석했다.

시리 허스트베트의 글은 인간의 기억과 상실, 차별과 혐오, 모성, 이민자들의 현실을 예술적인 언어로 문학·신경과학·정신분석·예술·사회 분야를 넘나들며 여성성과 남성성이 모두 뒤섞여 있는 독특한 매력으로 넘쳐 난다.

그녀의 글이 기고 되고 책으로 출간 될 때마다 찾아 읽고 구매하는 이유는 세상을 집요하게 분석하고 파헤치는 작가 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유명 작가들이 펴낸 에세이 집에는 자기만의 이야기, 자기 만의 세상에 대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좁혀져서 실시간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의 세상을 손 안에 폰으로 볼 수 있음에도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바라보는 시각은 점점 편협해져서 거짓과 진실에 대한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미국 2세대 페미니스트인 80대 비비언 고닉은 여전히 길을 걸으며 세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70세를 앞둔 1955년생 시리 허스트베트도 사회에 고착된 죽은 언어, 여성 혐오, 차별,폭력, 폭언에 대해 맞서 싸우며 상투적인 언어가 아닌 논리와 설득의 아우라를 휘감고 오래고 영예로운 싸움의 선봉장에 서 있다.



불안한 시기에 두 권의 뛰어난 작가들의 책이 펀딩 되고 있다.

이미 나는 두 권을 읽었지만 모두 어려운 시기에 훌륭한 양서가 세상에 널리 읽혀지는 바램으로 펀딩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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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8-21 0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리 허스트베트 글 좋네요 저는 한권도 안 읽었는데ㅜㅜ 스콧님 소개 보고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근데 이 분 남편이 폴 오스터군요ㅎㅎㅎ

2023-08-21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시우행 2023-08-21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소개 감사합니다.

scott 2023-08-21 09:56   좋아요 0 | URL
오늘도 무덥네요
호시우행님 한 주 시작 시원하게 ^^

건수하 2023-08-21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리 허스트베트 전에 어딘가에서 보고 (스콧님이 언급하셨을까요) 이름이 어렵다고 생각하고서는 잊어버렸는데 오늘 이 글을 보니 급 관심이 생겨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요즘의 난무하는 범죄 때문인 것 같아요) 소개 감사합니다.

scott 2023-08-21 09:56   좋아요 1 | URL
네, 전에 제가 언급 했습니다

좋은 책 어려운 시기에 출간 결정한 출판사 칭찬하고 싶어서 올렸네요 ^^

희선 2023-08-22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cott 님은 벌써 읽으신 책이 한국말로 나오는군요 그런 거 보면 반갑겠습니다 요새 일어나는 일이 그리 좋지 않지만... 한국도 좀 멈춰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경제만 많이 생각했잖아요 한동안 저녁이 있는 삶을 살자 했지만 정말 그렇게 산 사람이 얼마나 될지... 세상은 이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겉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2023-08-22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억울한홍합 2023-08-27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에서부터 읽고 싶어집니다~~

scott 2023-08-27 20:59   좋아요 0 | URL
홍합님 9월 도서로 강추 ^^

어쩌다냥장판 2023-12-2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성 없는 남자의 리뷰를 보다가 리뷰 쓰신걸 늦게야 봤어요 에세는 추천해주셔서 구입해선 교훈서처럼 읽고 있어요 듣는걸로는 아까워서 눈으로 봐야할 책이라.. 역시나 여러책들 장바구니에 담아둡니다 소중하고 상세한 리뷰 늘 감사합니다
 


'그것 보세요. 공작, 제노바도 루카도 보나파르트 일가의 여지, 영지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잖아요. 미리 말씀드려두지만, 그래도 전쟁 같은 건 없다고 하시거나 반그리스도의(정말 저는 그자가 반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어요)추악하고 무서운 소행을 변화라도 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당장 당신과 절교 하겠어요. 당신은 더 이상 제 친구도 당신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제 충실한 노예도 아녜요.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잘 오셨어요. 제가 당신을 놀라게 해드린 것 같군요. 자, 앉아서 말씀을 들려주세요.'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중에서


1805년 7월 ,마리야 페오도로브나 황태후를 가까이 모시면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관 안나 파블로브나 셰레르는 자기 집 야회에 맨 먼저 도착한 위세 있는 고관 바실리 공작을 세련된 프랑스어로 맞아 들이면서 19세기 초 러시아 상류 사회 사교계들의 모습들이 눈 앞에 펼쳐 진다.

형형색색으로 수 놓은 궁중복을 입은 이들 별 모양의 훈장을 한 쪽 가슴에 주렁 주렁 달고 나타난 이들 온갖 향수 냄새로 진동하는 연회장 한 가운데서 안나 파블로브나는 느긋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초대 손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아아, 오스트리아 얘기 따윈 그만하세요.!제가 잘 모르는 건지도 모르지만 오스트리아는 결코 전쟁을 원한 적이 없고, 지금도 원하지 않아요. 그 나라는 우리를 배신하고 있는 거예요. 오직 러시아만이 유럽의 구세주가 되어야 해요. 우리 폐하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사명을 알고 계시고 그 사명에 충실하실 겁니다. 제가 믿는 건 이것 뿐이에요.......

우리 러시아인 만의 힘으로 의인들이 흘린 피를 반드시 씻어주어야 합니다. 어디 한번 말씀해보세요.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게 희망을 걸어야 합니까?....폐하께서 반드시 유럽을 구하실 겁니다.!'


1805년과 1807년, 그리고 1812년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 했다가 후퇴하는 시기를 담은 톨스토이의 대 장편 <전쟁과 평화>을 통해 유산을 위해 싸우고 영적 성취를 갈망하는 백작의 사생아인 피에르 베즈호프 백작,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가족을 뒤로 하고 싸우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그리고 귀족의 아름다운 어린 딸로 두 남자 모두를 유혹하는 나타샤 로스토프의 삶을 통해 전쟁을 겪으면서 소작농과 귀족, 민간인과 군인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시대, 역사, 문화에 따른 문제와 씨름 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 냈다.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10만 프랑스군의 추격을 받고 가는 곳마다 주민들에게 반감을 사고 이제 더는 연합군도 믿을 수 없고 식량이 떨어지고 전쟁의 예기치 않은 조건 아래서 행동할 것을 강요 당하던 3만 오천의 러시아군은 쿠투조프의 지휘 아래 도나우 강 하루 쪽으로 서둘러 퇴각했고 적군에게 추격을 당하면 멈춰서 중포 따위를 잃기 않고 후퇴할 수 있을 만큼만 후위 전으로 응전 하면서 나아갔다. 적군도 인정 할 만큼 러시아군은 용감하고 완강히 싸웠지만 이러한 전투는 결국 후퇴만 더 재촉할 뿐이었다.]

톨스토이가 36세이던 1864년이었다. 톨스토이는 같은 해 1월 20일자 편지에서 누이 동생에게 “1812년부터 취재한 장편 소설을 쓰고 있다”고 알렸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실제 이 작품을 쓰게 만들었던 직접적인 동기는 1856년 유형지에서 귀환이 허용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1825년 12월 26일에 무장 봉기를 일으킨 러시아 혁명가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들의 활동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비롯 되었다.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들의 혁명 운동이 중심인 소설을 쓰고자 했기에 여러 가지 자료를 직접 수집하며 집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의 성격과 세계관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보다 한 시대 이전의 러시아 국가가 당면했던 역사적 대 사건이자, 당시 청년 계층에 커다란 영향을 준 나폴레옹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1864년 서른 여섯 살에 접어든 톨스토이는 1856년 유형지에서 귀환이 허용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1825년 12월 26일에 무장 봉기를 일으킨 러시아 혁명가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들의 혁명을 중심으로 한 시대 이전의 러시아 국가가 당면했던 역사적 대사건이였던 나폴레옹 침공이 현세대와 미래 청년 세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작품을 써내려 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작품의 시작을 1805년으로 정해 놓고 개개인의 회상과 편지를 통해 당시 사회 정세 속에 여러 인물들의 삶이 어떤 변화와 성장 과정을 거쳤는지 상세하게 묘사했다.


『전쟁과 평화』는 인생, 역사, 가족, 그리고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에 대해 전쟁의 공포와 삶의 공허함에 대한 의문 즉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어떤 삶을 선택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인간이 알 수 없다. 전쟁은 숱한 인간 의지가 응집한 힘의 파급으로 특정 원인이나 한 사람의 주도적인 영향 만으론 절대 터지지 않는 수많은 우연이 켜켜이 쌓여 일어나는 필연이다.

인류는 전쟁의 한 단면만 볼 뿐 전체를 파악하는 시각을 갖지 못한 채 애국심에 불타 올라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일 뿐이다.

전쟁이 터지면 인간은 미쳐간다. 러시아 민중이 애국심에 불타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인다.

​그렇다면, 전쟁과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공 속의 외침 일 뿐 일까?

세상 곳곳에서 발발하는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도 그리고 완전한 평화도 없다.

그저 한쪽의 추가 기울어지지 않게 팽팽하게 당겨야 하는 평화라는 힘의 균형을 가까스로 유지 하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균열이 생겨서 전쟁이 발발 할지 모른다.


2022년 2월 14일 새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을 침공했다.


'인류는 과거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두 번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 세계 대전이라는 너무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쟁이 반복 적인 패턴이 되기 전에 이 흐름을 바꿀 기회를 맞이했습니다. 수 백만 명의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다른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배운 교훈을 기억하고 세 번째 전쟁이 일어나는 것 만은 기필코 막아야 합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 중에서



이제 전 세계는 전쟁, 기후 변화,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전염병만이 창궐할 뿐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에서 평화로 이어지면서 지속 되어 왔다.

증오와 폭력의 먹구름 속에서 사랑과 자비, 용서는 언제나 승리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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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04 0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심지어 전쟁과 평화도 안 읽었다는..... ㅠ.ㅠ 올해 읽겟다고 책은 사두었죠. 힘내겠습니다. ^^
오늘 올라온 러시아가 잡아간 우크라이나 아이들에 대한 관련 기사는 너무 끔찍해서 입에 꺼내기도 싫네요. 설마 싶으면서도 그 설마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이 전쟁이니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끔찍하고 부끄러웠습니다.

scott 2023-02-04 00:20   좋아요 1 | URL
쟁여두면 언젠간 읽게 됩니다 ^^

러시아가 머나먼 시절 스탈린 때부터 해왔던 짓입니다
마을 전체 굶겨 죽이거나 몰살 시키고
아이들을 러시아로 끌고가서 러시아인으로 세뇌 교육 시켜서 성장하면 전쟁 용병으로 ㅠ.ㅠ

망고 2023-02-04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1년 되었네요 다시 겨울이 올 동안 전쟁이 안 끝나다니 우크라이나 사람들 너무 안타깝습니다 아ㅠㅠ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는 무려 4권이나 하아...언젠간 읽겠죠😂

2023-02-04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4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4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4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4 08: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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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4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3-02-04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평화 읽고
와!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ㅋ 장편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던 ㅎㅎ 요걸 원서로도 읽는 스콧님은 리얼천재!

우크라이나 전쟁이 평화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scott 2023-02-04 13:10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러시아 문학! 주르륵 섭렵 하신분!ㅎㅎ

불멸의 고전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평 그동안 4-5번 읽었지만
이번엔 제대로 정독

톨스토이 전평 번역본 품질 ㅋㅋ 비교도 해보느라 가장 훌륭하다는 영역판도 완독 ㅎㅎㅎ

얼마전 테스트 해봤는데
제 지능은 천재와 거리가 먼 ㅋㅋ


푸틴이 사라져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ㅠ.ㅠ

moonnight 2023-02-04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평화 아직 못 읽었습니다(동서문화사편)ㅠㅠ 언젠간 읽겠지 위로해봅니다.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영원히 유지되길 기도합니다ㅠㅠ

scott 2023-02-04 14:59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쟁여 두셨으면 언젠가 ^^

평화로웠던 세상은 없었지만 이번 전쟁 멈추지 못할 것 같습니다(악마 푸틴 절대로 종전 선언 안함 ㅠ.ㅠ)

희선 2023-02-0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든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사람이 욕심을 버리면 좀 나을 텐데... 어떤 일 하나로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겠네요 그렇게 되기 전에 막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좀 달라도 받아들이면 좋을 텐데, 말로 하든지... 이겨도 져도 좋지 않은 게 전쟁일 텐데...


희선

거리의화가 2023-02-05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전쟁과 평화‘만큼은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읽어야 할 작가 중 하나인데... 우크라이나 EU가 지원한다고 하던데... 전쟁이 멈출 줄을 모르네요. 이제는 종전이 양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지;;; 애꿎은 주민, 피난민과 총알받이가 된 병사들이 피해를 보네요.

scott 2023-02-05 09:19   좋아요 1 | URL
불멸의 고전입니다
세상에 영원한 평화도 없지만 이번 전쟁의 비극 멈춰야만 ㅠㅠ

coolcat329 2023-02-05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읽어야 할 책인데 너무 길어서 ...😓
일단 쟁여두기라도 해야 하겠죠?

scott 2023-02-05 13:01   좋아요 0 | URL
쟁여두면 언젠간 반드시 😄

페넬로페 2023-02-05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전쟁과 평화를 읽지 못했어요 ㅠㅠ
언젠가는 읽게 되겠죠^^
미국의 전쟁 중재안이 참 황당한데
전쟁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2023-02-05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23-02-05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빨리 끝나면 좋겠습니다. 러시아는 그동안 기후 등의 이유로 전쟁에서 패한 적이 별로 없으니 유럽과의 전쟁에는 자신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도 다 사람을 갈아넣은 거였죠ㅠㅠ 아직도 <에너미 앳 더 게이트>였나 영화에서 병사 두 명당 한 명에게 총을 지급하고 나머지 한 명에게는 총알만 준 장면을 잊을 수 없어요. ㅠㅠㅠㅠ

전쟁과 평화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런데 읽으면서 전쟁이 얼마나 허무한지, 진짜로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과 말만 하는 윗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참 그랬습니다. 나폴레옹도 그닥 훌륭한 전술가가 아닌 것 같았구요. 그리고 결국 피해는 그 땅의 모든 생명체, 무생명체 모두가 입었죠ㅠㅠ
피에르가 전투 구경하는 장면은 신기했습니다. 뭐지? 싶었어요. 그래서 드라마도 봤어요. 음...

2023-02-06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02-16 19:24   좋아요 0 | URL
참고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헐리우드식 연출이 들어간 장면입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소련군이 그렇게 싸운 적은 없어요. 그리고 독전대라는 것도 팀킬하는 용도가 아니었고, 소위 영화상에서 자국 군인 막 죽이는 주체로 나오는 이들 또한 전투에서 굉장히 많이 전사했습니다. 제프리 로버츠의 <스탈린의 전쟁>에 아주 상세하게 나옵니다.
 



[세상에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눈의 결정 같은 것, 똑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는 그것이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내리는 풍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다르고 다른 것들이 초속 30센티미터로 떨어져 내리는 데는 어딘가 초월적인 부분이 있다.]

​-김금희 <크리스마스 타일> '하바나 눈사람 클럽'중에서


2022년 11월 중순 한 낮의 온도가 17-18-19도를 오고 갈 정도로 포근 하다.

패딩을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토록 포근 했던 11월에 첫 눈을 기대 하기 힘들 정도로 올해 가을은 어느 해 보다 길어졌다.

이상 기온 현상으로 계절의 시간에도 이상이 생겨서 어쩌면 12월에도 눈 구경을 할 수 없을 지 모른다. 11월 창문을 열어 놓아도 차가운 공기를 느끼지 못하니, 길어진 가을 빛에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곧 찾아 올 12월의 눈을 기다리고 있는 건, 차가운 공기를 가로 질러 날아 다니는 하얀 눈 가루가 날리는 몽환적인 겨울 풍경을 바라 보며 새해를 기다리는 것도 1년 중 가장 손꼽히는 것 중에 하나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겨울이면 떠오르는 단어들

'호빵'

'바람'

'김밥'

'떡볶이'

'크리스마스'

'도넛'

그리고

'라면'

아빠가 밥을 챙겨 먹으라며 돈을 주고 나가면 그 돈을 '비밀 상자'에 넣어 두고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던 아이가 있다.

아홉 살 소녀는 막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아버지를 따라 낯선 곳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날, 아버지가 축사 일로 바쁜 틈을 타 딸을 마을 교회에 맡긴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교회에는 애들이 우글거렸다. 그동안 나를 빼고 다들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성탄절이라 교회를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보던 얼굴들이 그대로 있었고 나는 꼭 휴일에 등교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교회, 억센 억양의 사투리를 구사하는 이들이 아이의 손을 잡아 끄는 순간 , 두터운 스웨터를 입은 남자애가 말을 걸며 다가 온다.

주찬성,예수님이 그려진 가짜 돈을 건넸던 소년은 교회에서 열리는 시장에 가면 이 지페로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소녀는 떡볶이-순대-솜사탕의 냄새로 배고픔은 더해 가고 축사 일을 마친 아버지가 폭설을 뚫고 달려와 자신을 언제 데릴러 올지 모르니 무작정 주찬성을 따라 시장에 선뜻 따라 나서지 못하고 있다.

새벽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마태복음이랑 어린이 전도서를 매일 매일 읽으면 이 지폐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을 내뱉는 주찬성의 뿌듯해 하는 표정을 보며

'혼자 라면 끓여 봤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소녀

소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빚더미 처럼 가득 쌓인 축사의 건초더미를 치우는 일을 하고 돌아 와서 '그래도 나는 어떻게 든 고아원에는 안 보낸다.'라는 말을 내뱉을 때면 딸은 순간 공포심에 사로 잡혔다.

아버지가 주고 간 돈은 비밀 상자에 넣고 매일 매일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소녀

매일 매일 성실하게 새벽 예배에 참석해서 모은 지폐를 소녀에게 주는 주찬성

배고픔에 허기진 소녀는 주찬성이 준 지폐를 받자 마자 시장으로 달려가서 떡볶이-도넛을 사먹는다.

먹는 동안에도 허기진 배가 차오르지 않아 다리까지 후들 후들 떨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본 주찬성

1년 내내 성경의 말씀을 실천해서 지폐를 가득 모은 주찬성은 소녀가 원하는 것,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줄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매일 성실하게 교회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찬송가를 부를 것.'


수 년의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소녀는 선배 미용사의 소개팅 상대 남자 이름이 주찬성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주찬성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동명 이인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일렁였으니까. 만나기를 기대하는 건지 피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가운데에서도 그랬다.]


살면서 지난 시절의 추억 속의 그 친구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

주찬성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낯선 환경에 어느 날 문득 배고픔에 허덕였던 추운 겨울을 떠올리는 그녀,


'미워하지 말고 더 분노하라 카던데, 수난 받는 자를 탓하지 말고 그 수난에 대해 분노하라꼬. 참 알 듯 말 듯한 말아이가.'


처음 교회에서 만났던 주찬성을 학교에서 마주치게 되면 서로 모른 채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후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서로 가장 많이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동네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두 학생은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학교가 끝나면 서로 함께 모여 글짓기 연습을 했다.

백일장 대회에 나갔던 어느 겨울, 마을에 내린 엄청난 양의 눈 폭설로 도로 위를 달리던 버스 안에 갇혀 버린 두 사람, 퍼붓는 눈의 속도를 바라보며 커다란 눈송이를 향해 입김을 내뿜으며 눈덩이가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떠오르는 단어를 내뱉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한 단어씩 더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의 어느 날을 향해 가고 있는 지를 깨달았다. 처음 만났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이었다. 그때는 해명할 수 없었지만 늘 녹진 하게 달라붙어 있던 어떤 감정들을 처음으로 공유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 딸을 고아원에 버리지 않기 위해 동네 축사를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았던 아버지,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던 소녀는 교회 예배 시간에도 하느님의 말씀 보다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먹을 것들을 떠올렸다.

마을의 유일한 버스 정류장 앞을 환하게 밝혀 주었던 '하바나 클럽'

두 사람은 학창 시절 내내 버스정류장 앞 '하바나 클럽' 앞에서 서로의 말투 때문에 싸웠고 눈에 보이는 데로 서로 으르렁 거렸고 비아냥 거리다가 정작 함께 버스에 올라 탄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였다.

무더운 여름 하바나 클럽 버스 정류장에서 1시간 정도 되는 곳에 있는 해변가를 놀러 가고 난 후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모습을 본 주찬성은 범생이가 날날이가 되었다며 온갖 잔소리를 퍼붓고 그렇게 서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다.

외고가 아닌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딸이 서울의 미용학원이라도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 아버지는 연락이 끊어졌던 막내 이모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 준다.

​서울로 올라와서 미용실 수습 딱지를 막 떼자마자 샛별이라는 이름을 달은 그녀는 동료 미용사의 소개팅 남자인 주찬성과 마지막 만났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서울 스타일이 필요해지면 연락해'


마침내 만나기로 한 주찬성, 그녀는 이제는 관광지 명소가 된 그 시절 교회 앞을 거닐며 성탄절 기념 크리스마스 트리를 지나 버스 정류장이 있는 '하바나 클럽'을 찾아 간다.

16년전 자신을 버리고 갔던 엄마를 처음 만났던 순간에도 그다지 벅찬 감정을 느껴 보지 못했지만 낯선 곳, 교회에 홀로 남겨진 자신에게 지폐를 손에 쥐어 주었던 주찬성을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 켜켜이 쌓여 두었던 슬픔이 엄마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그 순간의 슬픔과 겹쳐지고 약속 시간이 훌쩍 넘기 시각에 낯선 남자가 그녀 앞으로 다가온다.


'화려하게 빛나던 크리스마스 트리 조명도 꺼졌을 즈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홉 살의 내가 하바나 클럽 앞에서 우두커니 맞고 있었던 눈이.......'


시간을 초월한 듯한 눈송이가 날렸던 순간, 기나긴 시간 배고픔으로 눈 앞이 새하얗게 보였던 그 날 분홍빛깔을 내뿜는 솜사탕 덩어리를 손에 쥐어 주었던 그 소년

매일 매일 성실하게 기도 하면 언젠가 이 모든 걸 초월 할 수 있다고 말했던 교회의 목사의 말 보다 주찬성이 내민 지폐를 손에 쥐었던 소녀

어지러이 내리는 눈 속에서 아무도 소녀를 데리러 오지 않았던 그 시절 그 밤 거리

시퍼런 가스 불 앞에 서 있었던 아홉 살 소녀는 교회 불빛 속에서 '기적'을 꿈꾸지 않았다.


'초월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듯 느껴지지만 창밖을 보기 위해 발꿈치를 드는 행동에도 있다고,.....


배고픔의 허기를 따스한 온기로 채워 주었던 주찬성, 허공 속을 흩날리는 눈 송이 속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 낼까....


'아홉 살의 내가 하바나 클럽 앞에서 우두커니 맞고 있었던 눈이, 그 뒤로 수십 번 맞닥뜨렸지만 한번도 시시 하지 않았던 그 작고 특별한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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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22 0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교회 가는 이유 중 대부분이 먹을 거 찾아가는 거라고 농담조로 던지는 이야기들이 많았죠^^; 저도 실제 배고파서 갔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썸탔거나 사귀었던 아이를 시간이 지나서 만나본 적이 없어요. 대체 어떤 느낌일까 잠깐은 궁금할 때가 있지만 추억은 추억으로서 간직해야 아름답다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ㅎㅎㅎ

scott 2022-11-22 10:29   좋아요 2 | URL
맛나는 추억이 많죠!^^
특히 이 책 속 주인공이 살던 곳은 시골 마을이여서 그곳에 단 하나밖에 없었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날에는 어디에서도 먹기 힘든 음식들로 가득차 있더군요.

화가님과 썸탔던 그분도 지금쯤 어딘가에 ㅎㅎㅎ

추억은 추억으로 만 ^^

코로나로 교회 성당 절에 신도들이 잘 안가고 온라인 예배를 주로 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서괭 2022-11-22 17:42   좋아요 2 | URL
오 한번도 시간 지나서 만나본 적이 없으시다니!! 전 여러번 ㅋㅋ 별로 좋지는 않더라구요? ㅋㅋㅋ

scott 2022-11-22 22:00   좋아요 1 | URL
역쉬 추억은 추억으로만 ! ㅎㅎㅎ

이 단편 Ott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마지막 라스트 신에서 대박 날 것 같습니다.


독서괭 2022-11-22 17: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옴마 이 책 굉장히 낭만적으로 느껴지네요! 아픈 이야기도 많은 것 같지만 로맨틱..^^ 과연 주찬성과 만날까? 궁금하니다.

scott 2022-11-22 22:00   좋아요 2 | URL
가장 중요한 단서와 장면은 뺐습니다 ㅎㅎㅎ

주찬성
주찬성
주찬성 ^^

2022-11-22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2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냥장판 2022-11-22 2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아련하기도 하면서 추억은 뭉게뭉게 같은 느낌이 날것 같은 책일 것 같은 후기글인데요
읽고 싶어지네요
내일 다시 소개주신 책들 살펴봐야겠어요 요즘 또 정신없이 보내는 중이라 책을 둘러보지도 못했네요

scott 2022-11-22 22:53   좋아요 1 | URL
이 작품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 여러번 읽었을 정도로 좋아합니다 ^^
냥이님 바쁘신 일상이여도 건강 잘 챙기세요
서울 코로나 확진자들 엄청난 속도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ㅠㅠ

희선 2022-11-24 0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찬성... 같은 사람일지... 같은 사람이면 좋겠지만, 어쩐지 이름이 같은 사람일 것 같네요 그냥... 쓸쓸했던 날 자신을 도와준 아이가 있어서 그래도 괜찮았겠습니다 하바나는 쿠바 수도던가요 다음에 쓴 이야기에서는 은하가 쿠바에 갔잖아요

이 책을 보면 마음이 따듯해질 것 같습니다


희선

scott 2022-11-24 10:54   좋아요 2 | URL
연작 소설집이여서 장소와 시간 인물들의 스토리가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습니다

하바나는 쿠바 수도 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클럽 이름이기도 하고
은하가 여행 간 곳이기도 하고 ㅎㅎ
희선님도 이 작품 읽으셨군요 ^^

mini74 2022-11-29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낯선 남자가 주찬성이길 비리며 읽어내려왔어요. 와 스콧님 필력 ! 👍

scott 2022-11-29 22:31   좋아요 0 | URL
드라마로 만들면
꼬옥 히트 칠 것 같은데
요즘 재벌집 막내 아들이 채널 점령을 ㅎㅎㅎ